2025년 5월 26일 (31호)
김선희(서울대학교)

2024년 4월 2일 키르기즈 공화국 자파로프 대통령은 “외국 대표(Foreign Representatives)” 법안에 최종 서명한다. 이 법은 외국에서 자금 지원을 받는 비영리단체들의 활동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시민단체들에게 활동 내용 전반에 대한 과중한 보고 의무를 부과하고, 활동 자금의 출처의 일부가 국외일 경우, “외국 대표”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부착할 것을 요구하는 등 사실상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언론, 인권, 환경,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시민사회를 탄압하는 수단이다. 2023년 이 법안이 처음 국회에 제출되었을 때,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미국 국무부, 그리고 키르기스스탄 100개 이상의 시민단체등이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지만 결국 국회 내의 큰 반발 없이 통과 되었다(CPJ, 2024/04/02). 이로써 정치적 통제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고 키르기스스탄의 민주주의는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 같은 민주주의 퇴행의 징후는 사실 자파로프 대통령의 2020년 취임 직후부터 감지되어 왔다. 자파로프 대통령은 “허위 정보” 유포 금지법을 도입하여 법원 명령 없이 행정 처리로 불법 사이트 차단이 가능하도록 했고, 국영방송에 대한 행정부의 권한을 확대했으며, 키르기스스탄에서 활동 중인 주요 독립, 외신 언론들을 정조준하여 탄압하였다. 2024년 초에는 대표적인 독립 온라인 언론매체인 KLOOP이 폐쇄되었고(RFE/RL, 2024/02/15), 이를 위시로 하여 활동하던 많은 언론인들이 횡령, 마약 등의 혐의로 체포된 바 있다(CPJ, 2024/04/02).

이와 같은 행보가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키르기스스탄이 그나마 중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의 섬’이라 불리며 이 지역 민주화의 마지막 희망의 보루였다는 점 때문이다. 키르기스스탄을 비롯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의 중앙아시아 지역 5개국의 정치체제는 모두 권위주의로 향했다. 카자흐스탄은 30년 장기 집권한 나자르바예프가 퇴진한 뒤에도 권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으며, 후계자인 토카예프는 2022년 대규모 시위를 러시아 주도의 평화유지군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하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고 있다(Kudaibergenova & Laruelle, 2022). 우즈베키스탄은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이 ‘개혁가’로 이미지 메이킹을 해왔지만, 실제로는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임기를 연장했고, 야당 없는 선거로 국회를 채우고 있다. 타지키스탄은 라흐몬 대통령이 1992년부터 권좌를 지키고 있으며, 현재 아들에게 권력을 승계하는 수순을 밟는 중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이미 초기 대통령의 아들인 세르다르 베르디무하메도프에게 국가수반직이 세습되었고, 북한과 비슷한 수준의 독재 체제로 평가받는다. 이들 국가들에서는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30여 년의 시간 동안 2세대 이상 정권 교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자유주의적 정치체제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2024년 8월 9일,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에 모인 중앙아시아 5개국 수반들. 왼쪽부터 키르기스스탄 사디르 자파로프 대통령, 타지키스탄 에모말리 라흐몬 대통령, 카자흐스탄 카심-요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대통령, 투르크메니스탄 세르다르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 출처: Official website of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azakhstan (https://www.akorda.kz/ru/pod-predsedatelstvom-kasym-zhomarta-tokaeva-sostoyalas-vi-konsultativnaya-vstrecha-glav-gosudarstv-centralnoy-azii-971327)

 

3의 민주화 물결의 낙오자?

현재의 중앙아 지역 국가들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국가들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인해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유럽의 국가들과 소련 내 공화국이었던 15개 신생 국가들이 모두 체제이행을 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이렇게 다섯 나라가 독립국가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헌팅턴이 정의했던 ‘제3의 민주화 물결’에 해당되는 국가들이었으며, 독립과 동시에 공산주의 1당 독재 체제에서 탈피하여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자유시장경제로의 전환이라는 이중의 체제전환을 시도하게 되었다. 제3의 물결이라 지칭되었던 이 시기의 체제이행은 계획경제의 공산주의 체제가 급진적인 자유화, 사유화를 통해 시장경제로 이행을 했어야만 했던 점, 더군다나 이러한 전환이 전세계적인 경제통합 및 무제한적인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시기의 보다 점진적이고 순차적이었던 민주화 이행과는 구분되었다(Gallo, 2020).

이러한 환경 하에서 국가들의 체제 전환의 경로와 그 결과는 상이했다. 유럽에 인접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폴란드, 체코 등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민주화와 경제자유화를 달성하며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러시아의 경우 체제 전환 초기에는 민주주의 제도 도입과 경제개혁을 병행하며 일정 부분 진전을 보였으나, 2000년대 중반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장기 집권과 함께 권위주의로 회귀하며 다시금 강력한 국가주의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한편 중앙아시아 5개국의 경우, 체제 전환 초기부터 민주주의 제도의 구축과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원만하지 못했다. 이후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정치적으로는 구조적인 전환에 실패하였고, 경제 영역은 시장경제의 형태를 갖추기는 하였으나 그 발전 정도가 다른 이행 국가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다. 자원 강국인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은 1인당 GDP가 13,000달러 정도를 웃도는 수준이며, 나머지 3개국은 1,000~3,000달러에 불과하다. 각국은 형식적인 선거제도를 도입하고 헌법적 틀을 마련하였지만, 안으로는 초기 집권 세력으로의 권력 집중과 이들에 의한 장기 집권 체제, 반대 세력에 대한 정치적 탄압 등이 반복되며 사실상 권위주의 내지는 독재 정권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석유와 가스의 자원에 의존하거나, 해외로 나간 노동 인력이 보내오는 송금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회 전반의 발전이 지체되고 있다. 이처럼 소련 해체 이후의 체제 전환이라는 약 20개국의 나라들이 처했던 공동의 역사적 출발점에도 불구하고, 2025년 현재 중앙아시아 5개국 모두는 뚜렷한 권위주의 체제 하에 낮은 수준의 경제적 삶을 답보하고 있다.

권위주의 체제 귀결의 결정 조건

그렇다면 왜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민주주의로 이행하지 못하고 권위주의 체제로 수렴하게 되었을까? 민주화 이행을 다루는 기존 학설에서는, 몇 가지 조건이 민주주의의 성공적 정착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지적된다. 대표적으로 (1) “근대화 이론(Modernization Theory)”은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 발전이 민주주의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즉, 산업화, 교육 수준 향상, 도시화 등 사회경제적 조건이 성숙한 가운데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다는 논리다. (2) 또 다른 조건은 민주적 규범과 제도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다. 국가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제한적으로나마 민주적인 규범, 제도의 확립을 경험했을 경우 민주화로의 이행이 순조로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민주화를 위한 외부적 유인이 존재하는가의 여부이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이 모든 조건이 부재하였다. 중앙아 국가들은 소련 해체 이후 심각한 경제 붕괴를 겪었고, 이후 자원 수출에 치중된 경제 구조로 인해 산업 다변화나 중산층 형성이 매우 제한적이었다(근대화이론). 또한, 동유럽 국가들처럼 과거에 제한적이더라도 의회주의나 자유주의적 전통이 존재했던 사회는 체제 전환 이후 이를 복원하거나 확장하는 데 유리했을 수 있지만,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오히려 소비에트의 유산인 중앙집권적 통치구조와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의 유산(Beacháin & Kevlihan, 2017)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역사적 경험). 발트 3국이나, 중동부 유럽국가들은 EU 가입이라는 외부적 목표가 민주화의 강력한 촉진제가 되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는 지정학적으로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EU나 NATO와 같은 제도권의 동기 부여로부터 사실상 배제되어 있었다. 오히려 중국과 러시아라는 권위주의 국가들과의 경제, 안보적 연계가 강화되면서, 민주화보다는 정치적 안정과 국가 주권 강화를 앞세운 정권 유지 논리가 우세하게 작동해 왔다(외부적 유인).

그렇다면 이 지역의 권위주의화는 단지 경제 수준이나 역사적 유산, 혹은 외부적 유인의 부재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부재한 상태에서도 민주화에 성공하고 또 향후 민주 정치 체체의 공고화와 경제 발전을 모두 이루어 낸 국가들도 존재한다. 즉, 이러한 조건들은 체제 전환 초반의 여러 어려움을 설명할 수 있겠으나, 향후 권위주의 체제가 어떻게 유지되고 왜 굳건해지는지에 대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권위주의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 정권의 초기 구축 과정 이후, 어떻게 그 정권이 유지되는지, 그 기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신권위주의 체제 외연화된 정당성

도입부에서 언급했던 키르기스스탄의 시민사회 억압과 통제 강화는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들에게서 공히 나타나는 권위주의 체제의 운영방식을 드러내 준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들 국가들은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외형을 유지한다. 헌법이 있고, 정기적으로 선거가 치루어지며, 국가 수반들은 “개혁”이라는 기치 아래 국가 발전과 사회 안정을 이룰 것을 천명한다(Beachain et al., 2017).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민주적 양태를 지니고 있는 제도와 국가 발전이라는 담론을 활용하여 권위주의 정권을 강화하고 현재의 권력을 장기화하고 있다. 러시아, 중국, 터키 등 현대의 여타 다른 권위주의 체제에서도 나타나는 이러한 양상은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 혹은 ‘주권 민주주의(Sovereign Democracy)’라고 명명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겉으로는 혼합적인 정치체제이나 본질적으로는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현대의 정부들을 가리켜 “신권위주의 체제”라 부른다. 신권위주의에서는 민주적인 제도와 명분을 앞세우면서 이를 활용함과 동시에 최신의 거버넌스 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시민사회를 매우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무력화시킨다. 이렇듯 보다 교묘하고 정교한 통치 기술을 도입하고 활용하면서 사회 내 민주적 대항 세력을 구조적으로 포섭, 처벌, 억지하여 원천적으로 권위주의 정부를 견제하는 시민사회, 독립언론 및 정당 체계가 형성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내부적으로 경쟁 엘리트들을 통제하고, 사회 내 대안세력을 억압하는 데에는 자원과 비용이 든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에서는 특히 경제적 어려움이 증대되는 데 따른 사회적 소요가 반정권적인 정치적 운동으로까지 번지고 있으며 이를 제압하기 위해 무력이 동원되고는 한다. 키르기스스탄의 1·2차 튤립혁명은 이러한 움직임이 실제로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했던 사례이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의 신권위주의 현상은 정권의 엘리트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 어떤 통치 방식을 운영하는가보다, 그런 통치 방식의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가를 알아봐야 한다. 즉, 이 정권들의 실질적 권력과 정당성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적 토대를 알아봄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중앙아시아의 집권 엘리트들은 통치의 정당성을 국내 시민들과의 사회계약적 관계에서 찾기보다는, 국외의 정치경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구축해 왔다. 이 네트워크는 국가 자원을 독점하는 국내 엘리트들, 초국적 자본, 그리고 해당 자본이 소속된 영국,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주요 강대국들 간의 교차적 이해관계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이 지역의 권위주의 체제는 국내의 정치적 참여나 사회적 합의, 국내 경제 수준 제고에 의존하지 않고, 외부 행위자들과의 전략적 연계를 통해 통치 비용을 감당해 왔다. 이로써 내부의 반발은 억압, 통제하고 정권유지의 비용과 국가 주권 및 통치의 명시적·실질적 인정을 외부에 전가하였다. 이러한 정당성 확보 방식은 ‘외연화된 정당성(externalized legitimacy)’ 혹은 ‘정권 유지의 국제화’로 개념화할 수 있다. 이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권위주의가 장기적으로 공고화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카자흐스탄은 이 모델의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부터 장기 집권한 나자르바예프는 자국의 풍부한 석유, 가스, 희귀금속 자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서구의 초국적 에너지 기업들과 밀접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엑슨모빌, 쉐브론, BP 등 다국적 기업들은 카자흐스탄의 자원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진행했고, 이에 상응하는 대가로 나자르바예프의 억압적인 장기 통치는 국제사회에서 일정 수준의 정치적 묵인 혹은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핵심 자원은 사실상 대통령 가족과 측근 엘리트들에 의해 독점되었으며, 그 이익은 국가 발전에 재투자 되기보다 이들 개인들의 해외 은닉 자산과 사적 축재로 전용되었다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예를 들어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첫째 딸, 다리가 나자르바예바는 카자흐스탄 최대 미디어 기업(Kharbar Agency)과 은행(Nurbank) 지분을 소유했으며, 해외 부동산과 자산 보유 내역도 여러 국제 조사에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 에너지 시장의 안정성과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관계는 국제사회가 나자르바예프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개혁을 요구하지 못하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이와 유사한 구조는 키르기스스탄의 바키예프 정권에서도 관찰된다. 2005년 1차 ‘튤립 혁명’을 통해 집권한 바키예프는 초기에 개혁주의를 표방했지만, 곧 친족 중심의 부패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국가 자산의 사적 유용을 본격화했다. 특히 정권의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는 국영 전력 및 통신 인프라(MegaCom)를 사실상 개인 기업처럼 운영하면서, 서방 및 러시아 자본과의 비공식적인 거래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영국, 미국 등 해외로 빼돌렸다. 이 역시 정권의 대내적 지지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외부 자본과의 유착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타지키스탄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보고된다. 라흐몬 대통령은 세계 4위 규모의 타지키스탄 알루미늄 제련소(TALCO)의 수익 대부분을 가족과 측근 엘리트 중심의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통해 통제하고 있다. TALCO는 수출입과 재무 구조상 BVI(British Virgin Islands)와 같은 세금 도피처에 설립된 수많은 중간 회사를 거쳐 자금을 세탁하듯 분산시키는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정권은 국영 산업 수익을 직접적인 국가 재정으로 환원하지 않고 엘리트 유지와 외화 자산 축적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TALCO와 연계된 서구 기업이나 금융 네트워크,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강대국의 정치엘리트는 타지키스탄 국민들이 겪어야 하는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에 대해 침묵해 왔다.

이렇듯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통치 자원과 정당성의 외연화는 초국가자본들의 이익추구와 더불어 중앙아시아가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해 있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맞닿아 있어 중동지역으로 가는 교두보 지점이기 때문에 초강대국들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교차하는 지점이라는 데에 기인한다.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강대국들은 이 지역의 민주주의 발전보다 안정과 안보, 그리고 이 지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영향력 경쟁에 편중되어 있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은 일대일로(BRI, Belt and Road Initiative) 전략을 통해 이 지역의 인프라 건설, 에너지 수출입, 금융 지원 등에서 핵심 파트너로 부상했으며, 러시아는 전통적인 군사·안보 협력을 지속함으로써 영향력을 유지해 왔다. 미국은 20년간의 아프간 전쟁을 위한 주요 군사 기지이자 보급로로써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외부 압력이나 인센티브 없이도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실제로 중국과 러시아 모두 국내 정보통제 기술, 시민사회 통제 방법, 반서방 담론 등을 공유하며, 이들 국가들과의 밀접한 관계는 권위주의적 정책을 제도화하는 데 실질적인 자원과 정당성을 제공해 왔다.

이처럼 중앙아시아 권위주의 정권들은 국내 시민의 지지나 제도적 정당성보다는, 자원의 독점과 이를 기반으로 한 외국 자본과의 교환 관계, 그리고 강대국들의 암묵적, 직접적 정권 지지를 통해 정치적 생존을 도모해 왔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부패 차원을 넘어서, 체제 자체가 외부 이해관계에 의해 지탱되는 일종의 ‘정권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는 중앙아시아 권위주의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설명하는 핵심 요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권위주의적지역주의와 중앙아시아의 선택

중앙아시아의 신권위주의 정권들은 단지 국내적 차원에서만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차원에서 서로 유사한 통치 전략을 공유하고 모방하면서 일종의 ‘권위주의적 지역주의’(authoritarian regionalism)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이 과정은 개별 국가의 통치 전략을 넘어, 권위주의가 지역 질서의 일상적인 형태로 정착하게 한다. 예컨대, 키르기스스탄이 최근 통과시킨 “외국 대표(Foreign Representatives)” 법은 러시아의 “외국 에이전트(Foreign Agents)” 법을 모델로 삼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처럼 법 제도뿐 아니라 정당화 논리까지도 이들 국가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다는 점(Lewis, 2021)은, 단순한 제도 수입을 넘어서 권위주의적 담론과 실천의 ‘지역화’를 의미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은 이러한 권위주의적 지역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 중국은 디지털 감시 기술, 통신 기반시설, 안면 인식 시스템 등 정보 통제 인프라를 중앙아시아 국가에 수출해 왔고, 이들 국가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사회에 대한 통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은 공공 안전과 테러 방지를 명분으로 감시 기술을 도시 단위로 확장 배치하고 있으며, 이는 물리적 감시와 정보 통제를 통한 사회에 대한 국가 장악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러시아는 법적 모델뿐 아니라, 지역 내 안보협력기구(CSTO, SCO)를 통해 정치적 연대를 강화하며, 정권 유지에 필요한 외교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이 같은 양상은 지역 내 권위주의 ‘확산(diffusion)’의 양상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 즉, 각국의 엘리트들은 서로의 생존 전략을 답습하면서, 내부 반대 세력의 제압, 선거 관리 방식, 언론 통제, 외교적 줄타기 등에서 실용적 전략을 교환하는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상호 학습은 비공식적 회담, 대통령 간 정상회담, 또는 지역 포럼 등을 통해 촉진되며, 그 결과는 권위주의 체제의 ‘지역적 내재화’로 이어지고 있다(Buranelli, 2020).

결국 중앙아시아에서 권위주의 체제가 공고화되고 있는 현실은 단순히 개별 정권의 선택이나 일시적인 정치적 흐름의 결과라기보다는, 중앙아시아 정권들이 독립 후부터 위치해있는 정치경제적 시공간이 맞물려 만들어 낸 세계사적 구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가 유지되는 한, 민주주의로의 실질적 이행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지역 내에서 제한적이나마 변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조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예컨대, 키르기스스탄은 여러 차례의 정권 교체를 경험하며 제한적이나마 경쟁적인 정치적 공간을 유지해 왔고, 카자흐스탄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소규모 시민 운동과 청년 세대의 정치적 관심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들은 아직 미약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권위주의 체제의 균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보다 구조적인 접근—예를 들어, 국가 주요 자원에 대한 투명한 소유 및 경영,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국적 기업의 책임성 강화, 시민사회의 점진적 회복, 그리고 외부 민주주의 지원 네트워크와의 연계—는 중앙아시아가 현재의 권위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저자소개

김선희(shkim_politics_rus@snu.ac.kr)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중앙아시아센터 선임연구원이다. 워싱턴대학교(the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지역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Columbia University, Harriman Institute에서 박사후연구원, William & Mary에서 정치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주로 권위주의 체제 및 유라시아 & 러시아 지역 정치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러시아 국가의 사회통제, 러-우 전쟁 난민, 유럽의 극우 정치 분야 관련 논문을 출판하였다.

참고문헌

  • Beacháin, D., & Kevlihan, R. 2017. “Menus of Manipulation: Authoritarian Continuities in Central Asian Elections.” Demokratizatsiya: The Journal of Post-Soviet Democratization, 25(4), 407-434.
  • Buranelli, F. C. 2020. “Authoritarianism as an Institution? The Case of Central Asia.”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64(4), 1005–1016.
  • CPJ(Committee to Protect Journalists). 2024. “Kyrgyzstan president signs Russian-style ‘foreign agents’ law.” CPJ (April 2) https://cpj.org/2024/04/kyrgyzstan-president-signs-russian-style-foreign-agents-law/ (검색일: 2025.05.01.).
  • Cooley, A. & Heathershaw, J. 2017. Dictators without borders: Power and money in Central Asia. Yale University Press.
  • Gallo, E. 2020. “Globalisation, Authoritarianism and the Post-Soviet State in Kazakhstan and Uzbekistan.” Europe-Asia Studies, 73(2), 340–363.
  • Kudaibergenova, D. T., & Laruelle, M. 2022. “Making sense of the January 2022 protests in Kazakhstan: failing legitimacy, culture of protests, and elite readjustments.” Post Soviet Affairs, 38(6), 441–459.
  • Lewis, D. G. 2021. “Varieties of authoritarianism in Central Asia.” in Isaacs, R., & Marat, E., ed. Routledge Handbook of Contemporary Central Asia, Routledge.
  • Rickleton, C. 2024. “Closing The Kloop: Kyrgyzstan’s Media Crackdown Becomes Farcical As Leading Journalism Foundation Shuttered.” RFE/RL (February 15) https://www.rferl.org/a/krygzystan-media-crackdown-kloop-farcical-foundation-shuttered/32821355.html, (검색일: 2025.05.01.)

미주

  1. 글로벌 자본 네트워크와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 정치엘리트의 정치, 경제 결탁에 대한 내용은 Cooley et al.(201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