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고려인 장례문화에 나타난 ‘전통의 고수’와 ‘동화’ 사이의 혼종성

고려인들은 일반적으로 민족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는 전통 종교와 언어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강한 민족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이들이 민족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소 중 하나는 전통 생활문화를 지켜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장례문화이다. 고려인들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결혼 풍습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전통들이 변모될 수 있지만, 장례문화만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야만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강조한다. 이처럼 고려인들의 장례문화는 전통을 고수하는, 즉 ‘문화동결 현상’이 두드러진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고려인의 장례문화를 살펴보았을 때, 사적 공간에서 전통의 고수가 선명하게 드러난 것과는 달리, 사회적 공간에서는 주류문화에 어느 정도 동화된 혼종성을 보이고 있다. 이때 주류문화는 지배 민족이었던 러시아인의 문화이다. 이처럼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들의 장례문화는 ‘전통의 고수’와 ‘동화’ 사이에서 ‘혼종성’을 드러내며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의 핵심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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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영(서울대학교)

민족정체성과 장례문화

이주민들의 민족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언어와 종교이다. 그런데 구소련 지역의 한인(고려인)들은 거의 대부분 민족 언어를 상실한 채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종교로 인해 선명한 민족정체성을 갖는 것과는 달리, 고려인들은 뚜렷한 종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은 구소련 지역,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그렇다면 언어와 종교가 아닌, 고려인들로 하여금 민족정체성을 유지하게 한 요소는 무엇일까?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일상에서 전통 생활문화를 유지하는 것이 민족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인들에게 전통 생활문화는 타자들과 구분되는 ‘우리’라는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생활문화의 범주에는 의‧식‧주, 일생의례, 세시풍속, 민속놀이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생활문화 중 오늘날 중앙아시아 고려인 공동체에서 전통적인 요소가 잘 보존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장례문화이다.

고려인들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결혼 풍습도 변할 수 있고, 여러 가지 전통 생활문화들이 변할 수 있지만, 장례문화만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야만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강조한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는 전통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을 경우 ‘동티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현재의 삶에 액운이 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1) 한마디로 두려움이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는 함께 공동체 내에서 어울려 거주하고 있는 무슬림들은 무슬림의 방식으로, 루스키(русский; 에스닉 러시아인(ethnic Russian)을 의미하는 단어) 들은 루스키들의 방식으로, 유대인들은 유대인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 사람들은 고려식으로 당연히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인들이 고수해 온 전통적인 장례 의례를 연구하는 것은 오늘날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를 위해 이글에서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 공화국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장례문화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특히 장례문화 중 전통이 고수되고 있는 영역은 무엇이며, 주류문화와 혼종된 부분은 어떤 것인가를 분석해 보았다.

이를 위해 필자는 2015년~2017년 3년 동안 총 4차례의 현지조사를 통해 중앙아시아 3개국 9개 도시 즉 우즈베키스탄(부하라,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카자흐스탄 (알마티, 아스타나, 크즐오르다, 카라간다), 키르기즈 (비슈케크, 오슈)에 위치한 고려인 묘지들을 살펴보았으며, 49명과의 구술인터뷰를 시행했다. 인터뷰 대상자에는 각 도시에서 전문적으로 장례를 집전하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려인 장례문화의 특성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사적인 공간인 가정 안에서와 바깥에서 동화의 정도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장례문화: ‘동결’과 ‘동화’ 사이의 혼종성

 

사적(가정) 공간에서의 전통의 고수

혼 부르기와 명정

중앙아시아 지역의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상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혼 부르기’로 명명된 의식을 행한다. 이는 이제 막 숨을 거둔 망자가 입고 있던 윗옷을 벗겨서 들고 베란다나 지붕, 혹은 집 밖으로 나가 북쪽을 향해 서서 왼손을 위로 가게 옷을 잡고 세 번을 흔들며 망자의 혼을 하늘이 받아줄 것을 요청하는 의례이다. 이를 행하는 이는 아들이나 가장 가까운 가족 중 한 사람이다. 혼 부르기는 예를 들면 ‘김 블라지미르의 옷을 가져가라’와 고인의 이름과 생년월일, 복복복을 세 번 외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계를 떠나는 망자의 혼을 저승에서 받아주기를 요청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혼 부르기’에 대해서 모르는 고려인들은 거의 없었다.

<혼부르기와 명정쓰는 법, 작성: 텐 예브게니, 사진 출처: 저자제공>
<명정용 성씨별 본관 명부 중 일부, 작성: 텐 예브게니, 사진 출처: 저자제공>

비슈케크에 거주하는, 자신을 하동 정가라고 소개한 텐 예브게니 세르게예비치(Тен Евгений Сергеевич)는 ‘혼 부르기’를 마친 이후 망자를 7개의 구멍을 뚫은 ‘칠성널’이라고 부르는 나무판 위에 눕히고 먼저 깨끗하게 씻기는 염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염은 망자의 몸이 굳어지기 전에 해야 한다. 칠성널은 고인의 키보다 30-40cm 길게 준비했다.2) 머리에는 베개를 받쳐 놓았으며, 손은 남성은 왼쪽 손이 위로 가게, 여성은 반대로 오른쪽 손이 위로 가도록 포개어 놓았다. 이때 수의는 반드시 흰색이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경제적 상황에 따라 새 옷을 마련하거나 평소에 고인이 좋아했던 옷을 깨끗하게 손질하여 수의로 사용했다. 알마티의 김 안나 할머니의 경우 남편의 장례를 치를 때 그가 환갑날 입었던 옷과 구두를 신겼다고 회고했다. 최근에는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구입한 한복을 수의로 입히는 경우도 있다. ‘혼 부르기’에 대해 대다수의 고려인들이 인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입관 이전의 시신을 눕히는 칠성널에 대해서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깨끗이 씻긴 시신을 칠성널에 눕힌 후 작은 상에 사자밥을 차렸다. 사자밥은 밥 세 그릇, 보드카 세 잔, 세 종류의 찬, 예를 들면 칼바사(햄 종류), 치즈, 계란 세 개 등을 놓았다. 이는 망자의 혼을 받아달라는 의미로 차린 것이다. 이후 상에 차렸던 음식들은 큰 그릇에 다 담아서 뜰에다 파묻었다. 사자밥을 차리는 것은 콜호즈 내부와 같은 단독주택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2017년 당시까지도 잘 지켜지고 있었지만, 도시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경우는 생략하거나 사자밥상을 차리더라도 땅에 음식을 파묻는 것은 생략하는 경우도 많았다.

칠성널에 고인을 눕힌 후, 흰 천으로 휘장을 치고 휘장 가운데 붉은색 명정을 둘렀다. 고려인들은 이 명정을 파스포르트(Паспорт, 패스포드)로 부른다. 알마티 노인회 회장인 박 알렉세이는 패스포트란 통행증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고인이 다른 세계로 들어갈 때 서류가 된다고 설명했다. 명정은 붉은 천 바탕에 주로 흰색이나 금색으로 글씨를 썼다. 명정을 붉은색으로 하는 이유는 사악한 존재들이 붉은색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명정의 길이는 약 2m, 넓이는 0.7m보다 좁지 않도록 만들었다.3)

독립운동가 황운정 선생의 딸 황 라이사의 명정
출처: 저자 제공

이때 글씨는 반드시 한글로 위에서 아래로 적었다. 명정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고려인 사회에서 존경을 받아왔다. 명정에는 남성의 경우는 이름 앞에 ‘학생’을 붙였으며, 여성의 경우 ‘유인’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리고 남성의 경우는 본관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여성의 경우는 본관을 명시했다. 그리고 미성년자의 경우 남녀 구분 없이 ‘수재’라는 단어를 붙이고 본관을 적지 않았다.

흰 천을 두르고 그 가운데 붉은 천의 명정을 두른 후에는 가족과 조문객들은 관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망자에게 한 번 절을 했다. 비록 사망을 확인했으나, 입관 전까지는 망자를 산자와 동일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입관과 상차리기

주문한 관이 도착한 이후 칠성널에 눕혔던 시신을 관에 넣는 입관을 한다. 입관시 쌀을 세 숟가락 입에 물리기도 하고, 생전에 고인이 좋아했던 물건과 옷을 넣어주기도 한다. 손톱과 발톱을 깎아서 주머니에 넣어서 관에 함께 넣기도 한다. 관의 위치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머리를 서쪽으로 발을 동쪽으로 두어 망자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과, 머리를 북쪽에 발을 남쪽에 두기도 한다. 입관을 한 이후에는 그 이전에 한 번씩 절하던 것을 세 번으로 늘린다. 입관은 망자의 죽음이 확인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망자가 이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고 여긴 것이다. 한 번의 절은 오직 고인에게 올리는 것이지만, 세 번의 절은 하늘을 주관하는 신과, 땅을 주관하는 신, 그리고 고인에게 올리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세 번의 절의 의미를 알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부고를 받고 온 손님들도 입관 이전에는 망자에게 한 번, 입관 이후에는 세 번의 절을 했다.4) 유가족임을 나타내는 징표로 남자들은 팔에 검은 완장을 착용했으며, 여자들은 흰 머릿수건을 착용했다. 이는 3년 제사 때까지 보관했다가, 3년 제사를 치른 후 불에 태웠다.

장례는 주로 3일장이었다. 3일 동안 고인을 위한 밥상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에 세 번씩 차렸다. 이때 상에는 밥, 물, 보드카, 닭고기 등이 차려졌다. 이때 다른 음식들은 한 번 상에 올려두었던 것을 다시 올릴 수도 있지만 밥은 아침, 점심, 저녁 매 끼니마다 반드시 새로 지은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에는 아침상만 차렸다. 이는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일반적인 형식이었다. 단지 타슈켄트의 고려인 단체인 ‘신생(Возрождение)’과 관련된 사람들은 고인을 위한 밥상을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만 차렸다. 이는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었다.5) 마지막 상차림 때에 절하는 순서는 지역별, 가정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장남의 가족, 나머지 아들들의 가족, 딸들의 가족, 친척과 지인 순으로 절을 했다. 마지막 상은 성대하게 차렸으며, 모든 음식들은 각각 포장하여 장지로 가지고 갔다. 이처럼 장례는 대체로 3일장으로 치러지나 경우에 따라서는 5일장이나 7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6)

이처럼 3일 동안 가정 내에서 행해지는 장례 의례는 전통적인 요소들이 매우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즉 ‘문화 동결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의 특성인 전통의 유지와 주류사회에 대한 동화의 역학관계 중에서 사적 공간인 가정 내에서의 의례에는 동화로 인한 혼종성보다는 전통의 유지 현상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비록 고인의 손톱, 발톱을 깎아서 관에 넣는다거나, 사자밥을 차려서 뜰에 묻는다거나, 지신에게 자두나무 가지와 음식을 가져가 미리 보고를 하는 행위 등이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에 따라 생략되는 경우도 있지만, ‘혼 부르기’ ‘명정 쓰기’ 입관 이전에 한 번 절하고 입관 이후에 세 번 절하기, 3일간 ‘제사상’ 차리기 등은 중앙아시아 지역들 내에서 현재까지 비교적 엄격히 준수되고 있었다. 이는 사적 공간에서의 전통의 고수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공간에서의 동화로 인한 혼종성

사적 공간에서 전통의 고수가 선명하게 드러난 것에 반해 사회적 공간에서는 ‘문화 동결 현상’ 보다는 주류 문화에의 동화를 통한 ‘혼종성’이 더 두드러진다. 고려인들 스스로는 장례문화가 매우 보수적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사회 내의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고려인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듣고 난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 묘지를 방문했을 때 당황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묘를 쓰는 방식, 묘지를 구성하는 방식, 묘비를 세우는 방식 등이 한국의 매장 풍습, 묘지 조성 방식과 현저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의 묘지 조성 방식은 한국 전통적인 양식이라기보다는 러시아인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

발인과 매장

발인 때, 상주가 앞에 서서 한국어로 망자의 이름을 부르며 ‘김 블라지미르 집에서 나간다, 먼저 떠나간다. 금천구 집에 갑소다’라고 읊는다. 문지방을 넘을 때마다 ‘금천구 집에 갑소다’를 반복한다.7) 고려인의 장례 풍습에는 문지방 세 개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지만, 오늘날 대다수가 도시의 아파트에 거주하기 때문에 이러한 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는다.

묘지는 대부분 도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발인시 차를 이용하는데, 발인 때에 나가는 순서를 지켜야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상주의 뒤를 따라 제일 먼저 나가는 것은 명정이다. 두 사람이 명정을 들고 나가고, 그 뒤를 고인의 사진을 들고 나간다. 이어 화환, 관 뚜껑 그리고 관이 나간다. 관 뚜껑은 두 사람이 들고 나가며, 관은 여섯 명이 남성이 든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발인 때에 관 뚜껑을 닫지 않고 연 채로, 운구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전통적인 발인 풍습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지배 민족인 러시아인들의 양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화환을 중시하여 반드시 발인 때 화환을 준비하는 것도 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크즐오르다와 같은 도시들에서는 발인 때 음악을 연주하는데, 이것 또한 러시아인들의 장례 풍습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장지로 가는 차량에 실려지는 순서는 관, 관 뚜껑, 화환, 명정 순서로서 집에서 나올 때와 정반대 순서이다. 이는 장지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는 순서가 집에서 나올 때 순서와 동일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집에서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장지에서 관을 내릴 때 음악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러시아인들의 장례 풍습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장지에 도착해서는 남쪽 방향으로 관을 놓는다. 이때 관 뚜껑은 열린 채로, 고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주는 고인의 생애를 러시아어로 읽는다.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때때로 고려인 협회장, 지인들이 애도를 표한다.8) 이후 관 뚜껑을 덮고, 관 위에 명정을 덮고 파 놓은 땅으로 관을 내린다. 그리고 전날 가져온 흙을 제일 먼저 뿌리고 흙을 덮는다. 묘는 머리가 서쪽으로 발이 동쪽으로 가도록 쓴다.

매장을 마친 후에는 가져간 작은 판을 고인의 왼쪽 어깨 쪽에 놓고 닭, 술을 놓고 절을 한 번 한다. 이것은 토지신에게 드리는 예로서, 후토질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토지신에게 음식을 차리는 것은, 망자를 받아들여 달라는 염원을 표현하는 것이다. 고인을 위한 큰 상은 망자의 발 쪽에 차린다. 아침상에서 물린 음식들을 집에서 가져간 판 위에 차린다. 이때도 순서대로 가족들은 세 번 절을 하고, 묘지에 세 번씩 술을 뿌린다. 가져간 음식 중 밥만 따로 담고 나머지 모든 종류를 하나씩 한 군데 담아 놓고 난 뒤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음복을 한다. 그 이후 손님들은 레스토랑으로 바로 가고,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들어오면서 곡을 하고 집을 구석구석 돌아본 이후 레스토랑으로 간다.

부하라 고려인 묘지 후토질
출처: 저자 제공

 

묘지 조성의 혼종성

고려인의 장례 의례 중 혼종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묘지 조성 방식이다. 화장이 아닌 매장만을 하고 있는 오늘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 공화국에서의 고려인 묘지들은 한국적인 묘지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묘지 조성 방식에서 지배 민족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00개가 넘는 소수민족들로 구성된 중앙아시아인들의 묘지는 크게 이슬람 묘지, 주로 러시아인들의 묘지인 정교도들의 묘지, 유대인 묘지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인들의 묘지는 우즈베키스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정교도들의 묘지에 함께 섞여 있거나, 정교도들의 묘지 안에 별도의 구별된 공간에 형성되어 있다.

타슈켄트 교외 벡테미르스키 고려인 묘지
출처: 저자 제공

그런데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 공화국이 매장을 위한 토지를 개인이 구매해야 하는 것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매장지는 국가로부터 무상으로 부여되고 있다. 무엇보다 독립 이후 1990년대 초반에 타슈켄트와 부하라, 사마르칸트와 같이 고려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주요 도시들에 초대 대통령인 카리모프 대통령이 토지를 하사함으로써, 고려인들만의 묘지를 조성했다.9)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 묘지를 별도로 구성하게 된 것은 한국과의 관계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타슈켄트 교외의 벡테미르스키 고려인 묘지는 1993년에 별도로 구성되었으며, 현재 묘지관리권은 타슈켄트 고려인 협회 중 하나인 ‘신생’이 관리하고 있다.10)

묘지 조성에 있어서는 중앙아시아 내에서도 지역별로 미세한 차이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정주 문명 지역에서는 묘지에 쇠로 된 울타리가 대부분 없으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 공화국과 같은 유목 지역의 묘지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다. 이는 짐승들에 의한 묘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다.

알마티 부룬다이 묘지의 김씨 부부의 묘
출처: 저자 제공

또한 비석을 세우는 시기와 위치는 지역마다 차이를 드러낸다. 비슈케크와 사마르칸트의 경우에는 한식날에만 비석을 세우고, 타슈켄트, 알마티는 장례식에 바로 비석을 세운다. 비석을 머리 쪽에 세워야 하는지, 발 쪽에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디서나 지금까지 논란이 분분하다. 러시아인들이 머리 쪽에 비석을 세우는 것에 영향을 강하게 받는 부하라와 같은 지역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발 쪽에 비석을 세우고 있다. 알마티의 한 부부의 합장묘는 이러한 점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내는 정교회 신자인 러시아 여성이며, 남편은 고려인이다. 남편의 성씨를 따른 러시아인인 아내 김씨 부인은 머리 쪽에 비석을 세우고 정교회 십자가를 세웠으나, 무신론자인 남편은 십자가를 세우지 않고, 고려인의 규범대로 발 쪽에 비석을 세웠다. 이처럼 묘지석을 세우는 것 하나에서도 고려인의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이 감지된다.

최근에는 묘지석에 한글을 적어 넣음으로써, 고려인으로서의 특성을 드러내려는 노력을 더하고 있다. 비슈케크의 중앙묘지의 고려인 묘지들에는 한글로 본관과 성을 묘지석에 새겨 넣은 묘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비석에 고인의 사진을 새겨 넣는 것을 비롯한 조각을 세우는 것 등의 묘비의 형태는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묘지 조성 방식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서, 현지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슈케크 중앙묘지의 고려인 묘비석. 왼쪽부터 ‘간금준’, ‘김 알렉세이’, ‘순천김씨’
출처: 저자 제공
백테미르스키 고려인 묘지: 한복을 입은 최생금, 박씨 부부, 가족묘의 묘비조성
출처: 저자 제공

 

추모 과정에서의 혼종성 한식

고려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식날은 러시아어로 ‘부모님의 날 (Родительскийдень)’이다. 고려인들은 한식이라는 표현보다는 ‘부모님의 날’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물론 설날, 추석 등의 세시 풍속 역시 성묘와 관련하여 기념하고 있지만, 한식은 한국에서 보다 훨씬 중요한 날로 기념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인들이 전통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영역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배 민족인 러시아인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부모님의 날’은 매우 중요한 성묘날이다. 이날은 부활절로부터 9일째 되는 날이다. 예를 들어 2017년에는 이날이 4월 25일이었는데, 타슈켄트 시내에 위치한 러시아인 묘지에 초기 고려인들의 묘들이 함께 위치하고 있어, 탐방을 하려고 했을 때, 수많은 인파로 인해 접근이 매우 어려워서, 탐방 일정을 다음날로 미뤄야 했을 정도였다. 비록 날짜는 조금 차이가 나지만, 러시아인들의 이러한 추도 풍습과 한인들의 한식이라는 절기가 융합되어 중요한 날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보인다.

 

장례문화의 혼종성

고려인들은 생활문화 중에서 장례문화는 전통적인 요소들이 잘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아울러 대다수 고려인은 장례문화만은 반드시 민족의 전통적인 양식들이 보존되고 계승되어야만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중년의 고려인들은 자신의 부모를 고려식으로 장례를 치러드린 것처럼, 아이들이 자신을 반드시 고려식으로 장례를 치러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인들이 스스로 인지하는 것과는 달리 오늘날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장례문화가 전통이 오롯이 보존되어 계승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1937년 강제 이주 이전 극동에서 ‘문화동결 현상’을 유지하며 잘 보존되어 오던 고려인의 장례문화는 강제 아주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주류 문화와의 조우 속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강제 이주를 통해 자신들의 운명이 지배 민족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경험을 한 고려인들은 장례문화에도 ‘전통의 고수’만이 아닌 ‘동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인들은 비록 자신들이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적 공간인 ‘가정’ 내에서는 장례문화의 ‘전통의 고수’ 현상이 선명하게 나타나지만, 사회적 공간인 묘지 조성에 있어서는 주류 문화로의 ‘동화’ 현상이 두드러진, 문화의 혼종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고려인들의 ‘동화’의 기준은 중앙아시아의 명목 민족인 우즈베크인이나 카자흐인이 아닌 러시아인이었다.

오늘날 개신교의 전파, 도시화 등 장례문화 변화의 요인들이 있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들의 장례문화는 전통의 고수와 동화 사이에서 혼종성을 드러내며 여전히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의 핵심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고려인들의 전통문화의 원형이 되는 한반도에서의 장례문화의 전통이 남한에서는 사라졌다는 점이다.

 

저자 소개

고가영(kkynow@snu.ac.kr)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 메가아시아 연구단 연구교수이다. 러시아 현대사 전공자로서,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러시아·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소련의 민권운동과 고려인·유대인·크림 타타르인들의 이주사, 그리고 모스크바, 칼리닌그라드, 타슈켄트, 카라간다 지역의 박물관들을 통한 기억의 문제 등을 연구해왔다. 아울러 러시아 유대인·중앙아시아 이슬람과 같은 종교 관련 주제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생활문화,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국경선 획정 과정 탐구 등을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연구를 심화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소련 시기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 문제와 스탈린 시기 중앙아시아에 건립되었던 수용소를 통한 인권 문제 등으로 관심사를 확산시키고 있다.

 


1) 텐 예브게니 세르게예비치 인터뷰 (2017년 1월 13일 비슈케크, 자택) 외 다수.

2) 가령 고인의 키가 180cm이면, 칠성널의 길이는 210cm 혹은 220cm로 만들었다. 대체로는 2m 정도의 길이로 준비했다.

3) Геннадий Ли, Моя планета воспоминания, размышления, очреки, статьи, публийстика, Бишкек: Камилла Принт, 2014, С. 313.

4) 조문을 온 손님이 망자보다 연배가 높은 경우, 절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망자가 미혼인 경우 혹은 15세 이하의 미성년자인 경우 절을 하지 않기도 한다. Г.Н. Ли, Обычаи и обряды корейцев СНГ. Практические рекомендации. М. 2001. С. 74.

5) 텐 아나톨리 인터뷰 (2017년 4월 25일, 타슈켄트, 묘지관리사무소)

6) 2018년 3월 22일에 향년 99세로 작고하신 1920년생인 아스타나의 황 라이사 운데노브나(Хван Райса Унденовна)의 경우도 외국에 거주하는 자손들을 배려하여 5일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황 라이사는 독립운동가이신 황운정 선생님의 따님이시며, 필자와는 2015~2017년 사이에 5차례 만남을 가졌었다. 황 라이사님의 아버님인 황운정 선생님의 유해는 2019년 문재인 정부에 의해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7) 텐 예브게니 세르게예비치 인터뷰 (2017년 1월 13일 비슈케크, 자택)

8) 애도사의 내용은 1. 고인의 이름과 본, 2. 고향과 학업과 직업, 3. 자녀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4. 가족과 친지들이 고인을 사랑하게 된 이유로 구성된다. Геннадий Ли, Моя планета воспоминания, размышления, очреки, статьи, публийстика, Бишкек: Камилла Принт, 2014, С. 319.

9) 우즈베키스탄 전체 인구 32,121,100여명의 0.6%를 차지하고 있는 소수민족인 고려인들에게 별도의 묘지를 선사한 것은 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염원한 카리모프 전 대통령의 의지의 반영인 것으로 보인다.

10) 안 타티야나 드미트례예브나 신생 협회장 인터뷰 (2017년 4월 24일, 고려인 협회 ‘신생’ 사무실)

 


참고문헌

  • 김 넬랴 스테파노브나 인터뷰 (2017년 4월 24일 고려인 단체 ‘신생’ 사무실)
  • 김 안나 그리고례브나 인터뷰 (2015년 1월 20일, 알마티, 자택)
  • 김 니콜라이 인터뷰 (2017년 1월 20일, 크즐오르다, 고려인협회 사무실)
  • 박 알렉세이 티모페예비치 인터뷰 (2015년 1월 15일, 알마티, 자택)
  • 초이 피델 콘스탄티노비치 인터뷰 (2017년 1월 11일, 비슈케크, 고려인 문화회관 사무실)
  • 텐 아나톨리 인터뷰 (2017년 4월 25일, 타슈켄트, 묘지관리사무소)
  • 텐 예브게니 세르게예비치 인터뷰 (2017년 1월 13일 비슈케크, 자택)
  • 김균태‧강현모,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이주와 삶󰡕 (글누림, 2015)
  • 전경수 편, 󰡔까자흐스탄 고려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 󰡔까자흐스탄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국립민속박물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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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준희, 「중앙아시아 고려사람의 공동묘지에 나타난 문화 정체성」, 󰡔한국문화연구󰡕 21 (2011).
  • ГАРФ. Р-5446. Оп. 1в. Д. 497. Л. 27-28/ Сталниские дипортации. 1928-1953, Под общ. ред. акад. А.Н. Яковлев. М., 2005.
  • Ким, Г.Н., История иммиграции корейцев (Алматы, 2006).
  • Ли, Г.Н., Обычаи и обряды корейцев СНГ. Практические рекомендации (Москва, 2001).
  • Ли, Г.Н., Семейные устои корейцев Коре Сарам (Бишкек,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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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Хан, Валерий Сергеевич, Сим, Хон Ёнг, Корейцы Центральной Азии: прошлое и настоящее (Москва,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