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우(경상국립대학교)
중앙아시아 영화의 두 가지 정체성
중앙아시아 영화사 전개 과정은 세계영화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현상이다. 이 지역 영화는 소비에트 영화사의 일부로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독립된 영화 역사를 창조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앙아시아 영화사는 이 지역 각국 영화의 개별적인 역사인 동시에, 중앙아시아라는 지역 전체를 포괄하는 집단적인 영화 역사이기도 하다. 즉 소비에트 영화사로부터 독립한 중앙아시아 영화사는 중앙아시아 각국의 개별적인 영화사가 되었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지역 국가 영화의 집단적인 역사로도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앙아시아 영화는 종속된 상태로부터 독립하였는데, 한편으로는 현재 개별적인 역사를 발전시키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특한 형태의 집단적인 영화 역사를 창조해가고 있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본고에서는 2000년 이후 공개된 중앙아시아 각국 영화의 대표작 몇 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영화 제작이 사실상 금지되었던 투르크메니스탄 영화는 본고에서 소개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카자흐스탄 영화
카자흐스탄 현대사에 대한 재해석, 영화 《스탈린의 선물(Подарок к Сталину)》(2008)
루스템 압드라셰프(Рустем Абдрашев) 감독이 연출한 영화 《스탈린의 선물》은 2008년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다. 이 작품은 개인사와 역사, 세대와 세대, 국가와 국가 간의 이야기가 상호 교차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영화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한 어린 소년의 형상을 통해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카자흐스탄 현대사에 대한 감독의 고유한 재해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카자흐스탄이라는 한 나라의 축소판과도 같은 카심(Касим)의 가족 구성원 중에서 유일하게 미래의 희망이었던 주인공 사슈카(Сашка)만이 살아남는다. 각기 다른 민족 출신으로 구성된 이 유사가족의 보호자인 카심 할아버지가 지녔던 현자의 모습을 이제는 성인이 된 사슈카가 계승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사가족의 모티프는 중앙아시아 영화사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감독은 이러한 유사가족의 모티프를 통하여 다민족 국가인 카자흐스탄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영화에서 종교의 문제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개인과 권력 간의 대립의 모티프로서 제기된다. 이슬람적인 전통이 유지되는 카자흐스탄에서 유대계인 사슈카가 성장하면서 직면하는 문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카심의 가족, 그리고 마을의 침략자를 상징하는 경찰에게 종교적 신앙만은 양보하지 않았던 여주인공 베라(Вера)의 형상이 종교의 주제와 관련된다.또한 베라에게서 나타나는 상반된 두 이미지, 즉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전형적인 박해받는 비순응자로 규정할 수 있으며, 이는 그녀가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전통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카심은 소비에트 권력의 속성을 파악하고 있는 인물로서, 그가 권력에 대항하는 방식은 베라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는 직접적인 대항을 선택하기보다는 자신의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스탈린과 마을 경찰이 상징하는 강제와 억압, 명령과 지휘와는 상반되는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현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성장 영화의 레드 웨스턴, 《말 도둑들. 시간의 길((Конокрады. Дороги времени)》(2019)
2019년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예를란 누르무함베토프(Ерлан Нурмухамбетов)) 감독의 영화 《말 도둑들. 시간의 길》(2019)은 구조상 주인공 올자스(Олжас)의 아버지인 오다스인(Одасын)의 죽음을 전후로 하여 두 부분으로 나뉜다. 또한 후반부에 올자스의 생부인 카이라트(Кайрат)가 등장하면서 전반부에 제시되었던 서부극의 요소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시각적으로 부각되는 말들을 실은 트럭, 평원의 외딴집, 텅 빈 평원 등은 서부극의 풍경과 분위기와 매우 흡사하다. 올자스의 아버지인 오다스인이 말을 팔기 위해 트럭을 타고 가축시장으로 향하는 장면의 롱테이크에서 관찰되는 끝없이 펼쳐진 평원의 길, 그 길을 따라 이동하는 트럭은 서부극의 정서와 분위기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서부극의 전형적인 선과 악의 대결구조는 가축시장의 투계 장면에서 예고되고 있으며, 말 구매자를 가장한 말 도둑들은 올자스의 가족과 마을 공동체를 위협하는 악당 역할을 맡고 있다. 오다스인이 말 도둑들에게 살해당한 후 등장하는 올자스의 생부인 카이라트가 이 공동체를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구원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러한 서부극의 형식을 차용한 ‘레드 웨스턴’ 장르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영화 《말 도둑들. 시간의 길》은 중앙아시아 영화 역사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한 소년의 성장 드라마의 형식과 내용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서 고양이와 같은 동물의 울음소리나 움직임이 하나의 징조가 되고, 태양, 달, 별, 바람, 새소리, 물소리가 인간의 삶에 신비스러운 영향을 미치는 시공간이 창조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공간은 대결의 공간과 서정의 공간으로 분류될 수 있다.
올자스가 성장기에 겪는 진통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적인 호기심이고 두 번째는 가족사이다. 카메라는 영화 초반부에 올자스의 꿈을 통하여 그의 성적인 호기심을 유난히 강조하면서, 그가 앞으로 성장의 진통을 겪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올자스의 부모인 오다스인과 아이굴 (Айгуль)의 삶은 노동의 삶이었다. 반면에 생부인 카이라트의 삶은 모호하다. 그는 이전에 범죄 세계와 연루된 적이 있다. 한편 오다스인이 말 도둑들에게 살해되면서 작품의 세계는 세 개가 된다. 첫 번째는 노동의 세계이고, 두 번째는 가축시장으로 대표되는 비즈니스의 세계이며, 마지막은 말 도둑들과 카이라트가 연루된 범죄의 세계이다. 작품의 삶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주인공 올자스 가족의 삶, 이방인인 카이라트의 삶, 범죄자들인 말 도둑들의 삶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작품의 장르는 수정주의 서부극이자, 정통 가족 드라마, 그리고 성장 드라마이다.
이주(移住)와 정주(定住), 그리고 부재하는 가족, 영화 《노랑 고양이(Жёлтая кошка)》(2020)
현재 해외 평단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카자흐스탄 출신의 아딜한 예르자노프(Адильхан Ержанов) 감독의 영화 《노랑 고양이》의 시공간 배경은 현대 카자흐스탄의 어느 시골 마을이다. 여기서 남자 주인공인 케르메크(Кермек)와 여자 주인공인 에바(Ева)가 함께 정착할 곳을 찾아서 떠나지만, 그들은 끝내 정착할 수 없으며,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파국적인 운명이다. 7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 케르메크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쇼트이다. 카메라는 이 장면을 롱테이크로 포착하고 있으며, 주인공이 걸어가고 있는 길의 풍경은 황량하다. 케르메크는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다시 살인에 가담할 것을 종용받고, 끝내 정착하지 못한다. 그는 이주와 정주를 거듭한 끝에 잔인하게 살해된다.
케르메크의 이동 경로는 크게 보면 ‘감옥-고향’이다. 그러나 케르메크가 석방된 후 정착하기 위해 찾아온 고향은 이미 자본으로 무장한 범죄조직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케르메크는 다시 떠나야 한다. 그는 비록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정주를 위한 이주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패가 예정된 정주를 위한 케르메크의 이주 행로에 에바가 동행하게 된다. 케르메크가 범죄조직 일행과 원치 않게 들른 곳이 바로 에바가 몸을 파는 곳이었으며, 그곳에서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에바와 밤을 보낸 케르메크는 그녀에게 산 위에 극장을 짓고자 하는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함께 떠나자고 말한다. 여주인공 에바 역시 잔혹하기 그지없는 자본의 희생자이다. 그녀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녀가 팔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주인공이 정착하지 못하고 이주와 정주를 거듭하는 배경에는 중앙아시아 영화에서 공통적인 주제인 ‘가족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다. 가족과 관련된 케르메크의 이력은 고향 마을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서 밝혀진다. 그는 절도로 수차례 감옥을 드나들었으며, 그가 수감 중이었을 때 엄마가 사망해서 임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주인공 에바에게도 가족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이력은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그녀는 몸을 팔고 있으며, 혼자 세계여행을 하려는 꿈을 지니고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인 ‘노랑 고양이’는 불에 타서 죽어가는 고양이를 의미한다. 산지기들이 산불을 낼 때, 고양이를 잡아서 등유에 푹 담갔다가 불을 붙이면, 고양이가 숲으로 뛰어간다는 것이다. 그 불쌍한 고양이가 산 채로 불에 타면서 달리기 때문에 산불이 난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날뛰어봤자 벗어날 방법은 없으며, 바로 그것을 “노랑 고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노랑 고양이’는 부패가 만연한, 그리고 폭력적인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 카자흐스탄 사회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케르메크의 비참한 운명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케르메크와 에바는 집에 정착해서 살 수 없다. 케르메크의 비극적 죽음 이후에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세상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무심하다. 이 영화의 비극적 정서는 이때 절정에 달한다.
타지키스탄 영화
경계의 설정과 지우기, 《윗마을, 아랫마을, 그리고 국경선(Истинный полдень)》(2009)
현대 타지키스탄 영화를 대표하는 중견 감독인 노시르 사이도프(Носир Саидов)의 《윗마을, 아랫마을, 그리고 국경선》은 소연방 붕괴 이후 타지키스탄에서 최초로 제작된 장편 극영화이다. 이 영화의 서사는 소연방 붕괴로 인해 평화롭게 살아가던 한 마을에 국경선이 생기는 상황에 대한 것이다. 타지키스탄의 한 마을의 관측소에서 일하는 러시아인 키릴(Кирилл)은 같은 마을의 타지키스탄 처녀 닐루파르(Нилуфар)를 후계자로 삼고 있다. 닐루파르는 아랫마을 청년과 곧 결혼할 예정인데, 뜻하지 않게 어느 날 이 두 마을을 사이에 두고 국경선이 설치된다는 방송이 들리고, 실제로 국경경비대가 주둔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두 마을에 경계가 설정되고, 이후에 그것을 지우려는 시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두 마을에 경계가 설정되기 전 마을 사람들은 평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감독은 관측소 무전기로 이따금 러시아로 떠난 부인과 교신하는 키릴의 모습을 통해서 연방 붕괴에 따른 혼란의 상처가 이미 이 지역에 엄습해 왔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키릴은 정기적으로 러시아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그가 보내려 한 편지는 여전히 우체국에 쌓여있다. 연방 붕괴 후 우편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 산 위에서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는 관측소장 키릴은 그의 직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마을의 모든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현자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이 영화는 크게 보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평화로운 삶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음악도 부드럽다. 그러나 국경선이 설치된 후인 후반부는 오랫동안의 평화가 흔들리는 상황이며, 음악도 거친 느낌이다. 국경선이 설치된 후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 역시 키릴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국경선이 생긴 후 발생하는 주된 사건은 세 가지이다. 이것은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일종의 시장이 형성된 것, 그리고 닐루파르의 결혼식, 마지막으로 닐루파르 엄마의 임신과 출산이다. 이 세 가지 사건에서 해결을 주도하는 인물이 바로 관측소장인 키릴이다. 그는 국경수비대가 지뢰를 설치하고 난 후 폭발 사고가 터졌을 때 왔던 길로 그대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며, 닐루파르의 엄마가 출산을 위해 국경선을 넘어 병원에 가야 했을 때, 지뢰탐지기를 만들어 국경선을 넘어가도록 돕는다.
영화 《윗마을, 아랫마을, 그리고 국경선》은 외면적으로 ‘경계’의 문제가 가장 현실적으로 구현된 작품으로 보인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분리된 경계선은 역사-문화적 기억과 혈연을 공유해 온 이들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키릴의 죽음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물리적 경계가 이들의 공통된 문화적 기억까지 경계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행과 여행’의 모티프와 역할 바꾸기, 영화 《공중의 사파르(Воздушный Сафар)》(2015)
달레르 라흐마토프(Далер Рахматов) 감독이 연출한 《공중의 사파르》는 권위 있는 국제영화제를 겨냥한 작가예술 영화라기보다는 일반 관객을 의식한 작품이다. 타지키스탄의 산골 마을에 살고 있는 주인공 사파르는 괴짜이며 엉뚱한 상상을 하는 청년이다. 그의 진정한 친구는 자신이 키우고 있는 개 ‘렘보’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개와 오히려 잘 소통하고 어울리는 것이다. 자주 엉뚱한 상상에 빠져 있는 그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공중에 붕 뜬(Воздушный)’ 사파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별명은 현실이 된다. 어느 날 열기구를 타고 세계여행을 하던 프랑스 청년 잔(Жан)이 사파르가 살고 있는 타지키스탄의 산골 마을에 도착하게 되고, 우연히 감전 사고를 겪게 되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 사파르는 잔의 열기구에 올라탔다가 열기구가 날아가게 되면서 뜻하지 않게 열기구 비행을 하게 된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의 외모가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즉 프랑스인 잔은 타지키스탄 산골 마을에서 정신 이상이 된 사파르로 살아가야 하고, 열기구 비행을 하게 된 사파르는 잔의 여권을 가지고 프랑스인 행세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일종의 ‘역할 바꾸기’ 또는 ‘분신’의 테마를 차용한 이 영화는 서구와 동양의 관계, 의사소통의 문제, 타지키스탄 산골 마을이라는 좁은 공간과 열기구를 타고 위에서 바라보는 넓은 세계와의 대비 등의 모티프도 포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또한 소비에트 시기에 청소년들의 꿈이었던 ‘우주로 비행하기’의 모티프를 사용하고 있다. 사파르의 비행은 우연이었지만 그는 이 비행을 통해서 자신의 상상을 실현하고 성찰의 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영화 《공중의 사파르》는 ‘역할 바꾸기’와 ‘여행’이라는 고전적이고 친숙한 모티프를 사용하면서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 동시에 이 작품은 문화간 소통과 자기 정체성 추구라는 만만치 않은 주제도 담아내고 있다.
흔들리는 공동체와 행운의 역설, 영화 《행운(Дов)》(2022)
타지키스탄 출신의 무히디니 무자파르(Мухиддини Музафар) 감독이 연출한 영화 《행운》은 중앙아시아 영화 특유의 가족과 공동체의 주제, 그리고 중앙아시아 지역 전체의 시대적 현상인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행운’이라는 고전적인 모티프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공장 노동자인 카호르(Каххор)와 마논(Маннон)이다. 서로 친구인 두 사람은 공장 자재를 밀반출하여 판매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부족한 월급을 충당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마논이 월급 대신 받은 복권을 친구인 카호르에게 선물하면서 발생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인 행운은 ‘신으로부터 받은 행운’을 의미한다. 이 행운이 두 주인공 중에서 한 사람에게만 다가왔기 때문에 이 영화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이다.
영화 《행운》에서 반복해서 효과적으로 사용된 이미지는 자전거와 기차를 비롯한 교통수단과 철로, 그리고 고물상이다. 고물상 노인은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고, 세상의 잉여적인 것을 청소하는 인물이다. 철로 위를 지나가는 기차의 방향과 주인공이 걸어가는 방향은 어긋나고, 인물과 철로의 방향이 일치하는 경우에는 인물이 선택한 철로는 끊어져 있었다.
카호르와 마논은 위기의 순간에 끝까지 서로를 배신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불화의 원인이었던 차는 외형만 남은 채 해체된다. 즉 두 주인공의 불화가 해체된 것이며, 동시에 불공평하게 느껴졌던 행운이 사실은 속이 텅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히디니 무자파르 감독은 중앙아시아 영화 역사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보편적인 주제와 적절한 영화 언어를 자신의 작품에 삽입하였다. 타지키스탄 장편 영화 제작 편수가 극히 미미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화 《행운》이 뛰어난 걸작은 아니지만, 타지키스탄 및 중앙아시아 영화사에서 일정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다.
우즈베키스탄 영화
영혼 재탄생으로서의 침묵, 그리고 반복되는 여인들의 삶, 영화 《40일간의 침묵(40 дней молчания)》(2014)
우즈베키스탄 출신 사오다트 이스마일로바(Саодат Исмаилова) 감독의 영화 《40일간의 침묵》은 삼 대의 여인들이 함께 사는 외딴 마을의 한 집안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재탄생을 위해서 40일 동안 침묵하기로 결심한 주인공 비비차(Бибича)와 나머지 세 여자의 내면을 카메라는 거친 산악지대와 집의 벽 등을 응시하면서 묘사하고 있다. 영화의 주요 인물은 주인공 비비차와 그녀의 할머니 비비 사오다트, 어린 소녀 샤리파, 비비차의 이모이자 샤리파의 엄마인 하미다이다. 비비차는 비비 사오다트의 죽은 아들의 딸, 즉 손녀이고, 샤리파는 할머니가 키웠지만, 그녀의 실제 엄마는 하미다이다. 즉 샤리파는 비비 사오다트의 외손녀이다. 하미다는 사망한 연인 아보르와의 사이에서 샤리파를 낳았다.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낳은 자식인 것이다. 그녀는 샤리파를 자신의 법적인 딸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때 사오다트와 하미다 모녀가 나누는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하미다가 식탁 위에 있는 사과를 먹으면서 “사과가 더 이상 달지 않다”라고 말하자, 사오다트는 “사과가 달콤했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라고 답한다. 즉 도시 생활을 갈망하는 하미다가 이제는 마을에 정착해서 샤리파의 엄마로서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사오다트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 간의 대사는 매우 절제되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침묵하는 비비차는 오히려 주위 환경과 소통한다. 그녀가 왜 침묵을 통하여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카메라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관심이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비비차가 침묵을 통하여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성찰을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때 비비차의 침묵 수행은 칼 가는 소리와 나무를 베는 도끼 소리로 청각화된다. 사오다트 이스마일로바 감독은 전통적인 내레이션과 대화 대신 시각적 내레이션 위주로 자신의 내면과 삶에 대해 성찰하는 비비차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네 명의 여인들의 삶이 현재 시점에서 교차되도록 하는 빼어난 연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지속되는 아프카니스탄 전쟁의 비극, 영화 《고요한 인내(Стойкость)》(2018)
라쉬드 말리코프(Рашид Маликов) 감독의 영화 《고요한 인내》는 소연방 시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주인공이 겪은 비극적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전쟁은 끝났고, 소연방도 붕괴되었지만, 비극적 역사가 남긴 상처는 아물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영화 《고요한 인내》의 서사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첫째는 주인공인 사이둘라(Сайдула)의 현재 생활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사이둘라가 과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것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참전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이둘라에게 사망한 옛 전우가 환영 속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이둘라는 전쟁에서 전우들을 배신하고 현재 군 지휘부가 되어 있는 또 다른 전우와 사망한 옛 전우 사이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일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또한 그는 아들과의 순탄치 않은 관계를 해결하고, 아파트를 팔아서 전우의 미망인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학교의 급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영화 전체적으로 보면 사이둘라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위해 살아왔지만, 그의 삶은 성공했다고 보기 힘들다.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이미 병든 상태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교장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유일하게 사이둘라의 동반자 역할을 하는 것은 사이둘라가 키우고 있는 개다. 형식상으로 영화는 주인공의 현재 삶과 그의 회상에 대한 묘사로 나눌 수 있고, 시각적으로는 주인공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 생활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회고, 그리고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고 사이둘라의 환영 속에서만 자주 찾아오는 사이둘라의 옛 전우와의 대화로 나눌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모두에게 보이는 물리적 현실, 그리고 사이둘라에게만 보이는 그의 내적 독백과 환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형식, 즉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충돌로써 이 작품은 소연방 시절에 겪어야 했던 역사적 상처뿐만 아니라, 동시대 우즈베키스탄의 문제, 즉 부패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사이둘라가 살고 있는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부패 문제와 소연방 시절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충돌하면서, 사이둘라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극복하는 동시에, 현재 삶의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사이둘라에 대한 가장 극적인 묘사는 영화 마지막의 롱 쇼트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전우를 배신했던 동료와 화해한 후 길에서 사망한 사이둘라를 카메라가 하늘에서 바라보는 장면이다. 근접 촬영에서 점점 롱 쇼트로 전환해 가는 이 롱테이크 장면은 개인의 삶에서 출발해서, 역사의 한 점으로 남게 될 사이둘라의 삶에 대한 감독의 코멘트일 것이다.
집과 혁명, 영화 《파리다의 노래(2000 песен Фариды)》(2020)
우즈베키스탄의 욜킨 투이치예프(Ёлкин Туйчиев) 감독이 연출한 영화 《파리다의 노래》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주인공인 카밀(Комиль)과 부인들이 함께 살고 있는 집과 혁명의 관계이다. 또한 이 작품은 일부다처제 하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평온한 삶이 지배하던 카밀의 집에 균열이 생긴 이유는 카밀의 네 번째 부인인 파리다가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밀은 파리다가 자신의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카밀 부인들의 실질적인 서열이 변하게 된다. 이 작품의 서사가 파리다의 등장으로 시작되는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 역시 작품 서사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구시대가 퇴장하고 새로운 시대가 등장하듯이 이 작품에서 인물들도 등장하고 퇴장한다. 네 번째 부인인 파리다는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한다. 후손을 원하는 나이 많은 카밀과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던 그녀는 가부장제의 희생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지 않고, 그와 함께 카밀의 집을 떠나면서, 결국엔 가부장제에 굴복하지 않은 모습으로 퇴장한다.
파리다가 오기 전까지 가장 나이가 어린 부인이었던 마흐피라트는 활발하고 역동적인 외모을 지니고 있다. 젊은 그녀는 카밀의 총애를 받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카밀에게 작두로 손을 잘린 그녀는 파리다와 함께 떠나라는 카밀의 제안을 주저 없이 수용하면서, 그동안 내재되었던 억압된 심리를 드러내면서 퇴장한다.
카밀의 부인들 중 가장 연장자인 후시니야는 가부장제에 대한 철저한 순응자의 형상으로 등장하고, 그러한 형상을 유지하면서 퇴장한다. 그녀는 심지어 카밀이 떠나라고 말할 때도 남편에게 남아 있기를 원한다. 후시니야는 끝까지 가부장적인 사고를 지닌 채로 살아가는 여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은 두 번째 부인인 로비이다. 그녀는 가부장제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자로서 남편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퇴장하지만, 당초 카밀의 사랑을 가장 갈구하던 여성이었다. 로비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인물이다. 또한 로비는 파리다의 도착으로부터 시작된 새 시대의 기운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남편 카밀에 대한 분노로부터 시작된 그녀의 동요는 결국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리게 된다. 로비가 카밀의 다른 부인들과 구별되는 점은 로비의 분노가 개인적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가부장제에 상대적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한 여성이며, 남편에 대한 그녀의 개인적인 분노는 최종적으로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가담하는 공적인 분노와 저항으로 연결된다.
로비의 저항을 시각적으로 요약한 것은 권총이다. 우연히 카밀에게서 권총을 얻게 된 그녀는 장난치듯이 권총 쏘는 연습을 한다. 그녀의 총구는 처음엔 남편을 향한 것이었고, 그 후엔 가부장제를 향한 것이었으며, 최종적으로는 혁명의 완수를 위한 것이었다. 로비는 다른 부인들과는 달리 새로운 시대의 진보된 여성으로 재등장한다. 결국 카밀과 그의 부인들은 밀려오는 새로운 역사적 흐름에는 자의든 타의든 동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키르기스스탄 영화
‘빛의 남자’의 등장, 영화 《전기도둑(Свет–аке)》(2010)
악탄 아림 쿠바트(Актан Арым Кубат) 감독의 영화 《전기도둑》은 키르기스스탄 시골 마을의 작은 풍차가 돌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풍차는 전기 기술자인 주인공의 희망이다. 별명이 ‘빛의 남자’를 의미하는 스베트-아케(свет-аке)인 그는 아직까지 자연의 혜택을 받고 있는 고향 마을을 개발하기를 원치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전기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마을 주민들을 위해 소규모 전력이나마 공급하고자 풍력발전소를 만들고자 한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고향 마을의 자연처럼 그는 선한 영혼의 소유자이고 마을 사람들의 모든 일을 돕는다. 스베트-아케는 이따금 마을 주민들에게 전기를 불법으로 공급하기도 한다.
사회 법률적인 측면에서 스베트-아케는 범법자이지만, 그는 고향 마을 주민들에게는 사실상 물리적인 불빛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불빛을 공급해주는 사람이다. 그의 아내가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해 항상 확신하며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순수한 인물이다. 이러한 캐릭터는 동시에 그의 결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쉽게 믿는다는 것은 현대 기술 사회에서는 꼭 필요한 생존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주인공이 직업상 전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마을 전체의 전기 공급에 관한 기술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결국 신화적인 관점에서는 불 혹은 빛을 다루는 사람이기도 하다.
스베트-아케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불빛은 삶의 이상이며 동반자이다. 이러한 스베트-아케의 생각과 행위는 경제적인 개발을 중시하는 세력과 충돌한다. 그는 풍력발전소를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구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지역의 유력자인 베크자트에게 호감을 갖지만, 그의 실체를 알고 난 후 그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데 스베트-아케가 베크자트의 개발 방식에 저항한 대가는 결국 그의 목숨이었다. 스베트-아케가 베크자트 일당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은 주인공의 고향마저도 가혹한 힘의 논리가 최우선인 공간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을 주민들에게 삶의 불과 빛을 제공했던 스베트-아케가 베크자트에 의해 살해당한 채로 강물에 뜬 채로 흘러갈 때 영화의 비극성은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이후 그가 생전에 그토록 원했던 풍력을 이용한 전깃불이 희미하게나마 들어오는 것으로 영화가 끝남으로써 관객들은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 이때 풍차가 돌아가면서 희미하게 전등이 켜지고, 이미 죽은 주인공이 생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카메라는 지극히 선한 영혼의 소유자이자 키르기스스탄의 전통과 자연의 질서에 순응했던 주인공의 처참한 비극 앞에서 차마 그의 얼굴을 직시할 수 없는 것이다.
채무 가정의 비극, 《집 팝니다(Дом продаётся)》(2022)
탈라이벡 쿨멘데예프(Таалайбек Кулмендеев) 감독의 영화 《집 팝니다》는 중앙아시아 영화사에서 전통적인 가족의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주인공인 다미르 부부는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채무를 기한 내에 해결하지 않을 경우, 그는 집을 팔아야 한다. 영화의 제목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다미르의 부인은 해외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면서 돈을 벌어오길 원한다.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그녀는 임신 중절 수술을 해서라도 해외로 가려고 한다. 반면 남편인 다미르는 임신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친척에게 입양 형식으로 미리 팔았다. 이 지점에서 한 가정의 부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채무 문제가 아동 매매라는 범죄 행위의 주제로 연결된다. 즉 감독은 개별적인 묘사를 통해 보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미르가 자신의 아이를 팔 수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가 상황에 따라 무엇이든지 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미르의 부인 역시 선한 사람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녀 역시 임신 중절을 통해 한 생명을 없앴다. 구체적인 해결책보다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모습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채무로 고통받는 주인공 다미르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으며, 오직 가정의 화합, 구체적으로 부부의 상호 협력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이틀 동안 일어났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영화 끝 부분에서 다미르의 가족은 행복한 표정으로 부유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 시퀀스는 주인공의 소원이자 꿈이다. 즉 빚에 시달리는 주인공 부부의 상황이 이 꿈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형식적인 면으로 보자면, 이 영화에서는 대조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 작품의 서사 자체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지만, 그에 대비되는 자연 묘사는 밝은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은 슬프고 우울하게 묘사되지만, 그 배경이 되는 하늘과 숲은 매우 밝은 톤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세상은 빛과 어둠의 양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이외의 인물들은 한번 등장했다가 거의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사건의 중심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이 작품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남녀 주인공이 천천히 걸어가는 롱 테이크가 빈번히 사용되었다.
영화 《집 팝니다》에서 실제로 집은 팔리지 않는다. 이 영화가 정작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협력하지 않고 각자 개별적으로 행동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즉 가정의 가치를 이 작품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모욕과 화해의 성장 드라마, 영화 《쑥의 향기(Запах полыни)》(2022)
아이벡 다이르베코프(Айбек Дайырбеков) 감독의 영화 《쑥의 향기》는 감독의 어린 시절을 직접 반영하면서 보다 개인적인 사연에 기반한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 이 영화는 세 소년의 성장 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영화의 주인공인 다스탄, 바엘, 그리고 카나트는 각자 자신의 부모들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도시에서 이주해온 카나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이며, 바엘의 아버지는 가정 폭력을 습관적으로 휘두르고, 다스탄의 엄마는 다스탄을 자신의 부모에게 맡기고 재혼을 하기 위해 도시로 떠난다. 세 소년들이 건초에 불을 지르거나, 뜨거운 돌 위에 새의 알을 깨서 구워 먹는 놀이를 하는 것은 잠시나마 부모들로부터 받는 고통을 잊기 위한 것이다.
감독에 따르면 주인공들의 형상은 감독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영화는 이 세 소년이 부모에게서 느끼는 모욕감과 분노에서 시작된다. 즉 알코올 중독, 가정 폭력, 도박 등과 관련된 아버지와 자신을 버리고 재혼하기 위해 도시로 떠난 엄마에 대한 소년들의 모욕감이 영화 초반부에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종반부에 카나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가족들과 함께 다시 도시로 떠난다. 바이엘의 아버지는 바이엘이 카나트의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중상을 입은 사건 이후에 아이들과 부인에게 폭력을 행했던 지난날을 반성한다. 그가 반성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분노한 소년 다스탄이 그의 트랙터를 향해 새총을 쏠 때, 다스탄에게 폭력을 행하는 대신, 오던 길로 되돌아갈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이 영화는 모욕과 분노에서 시작하여 화해와 용서로 끝나는 것이다.
성장 영화로서 《쑥의 향기》에서 강조되는 시각적 이미지는 다스탄이 영화 종반부에 쓰는 모자이다. 그의 모자는 그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의미이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구체적으로 모자에 있는 장식의 색깔이 나이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는 붉은색 장식이 있는 모자를 쓰고, 그 후에는 고동색, 그리고 중년에 접어들면서는 검은색 장식이 있는 모자를 쓴다. 그리고 노인들은 회색 장식이 있는 모자를 쓴다. 다스탄이 붉은색이 아닌 고동색 장식이 달린 모자를 영화 후반부에 쓰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제 유년 시기에서 벗어나 청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다스탄이 꿈속에서 눈이 오는 들판에서 얼어 죽은 말의 머리를 껴안는 장면은 엄마가 떠났을 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중요한 사회 문제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키르기스스탄인들과 같은 유목민에게 매우 중요한 동물인 말은 남자들에겐 날개와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 장면은 엄마가 떠남으로써 소년 다스탄의 날개가 꺾였다는 의미이다. 유목민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동물인 말이 동시대 키르기스스탄에서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성장 드라마로서 영화 《쑥의 향기》의 세 주인공의 성장 과정도 흥미롭다. 카나트는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했지만, 다시 도시로 되돌아간다. 정착을 원하는 그는 오히려 이러한 이주와 정착의 반복을 통해서 성장한다. 다스탄은 엄마와 이별하면서 시련을 겪지만, 오히려 언젠가 다시 엄마와 같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고, 정신적으로 성숙해진다. 바이엘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통하여 소년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한다. 그는 마을 회관에서 카나트 누나의 팔을 건드리기도 하고, 떠나는 그녀에게 꽃다발을 선물한다. 카나트의 누나는 그의 볼에 키스하면서 작별 인사를 한다. 이처럼 영화 《쑥의 향기》는 불우한 가정의 소년들의 성장 과정을 통하여 모욕과 분노가 화해와 용서로 승화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양해지는 중앙아시아 영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앙아시아 영화는 ‘가족’이라는 주제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각국별로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자국의 현대사에 대한 성찰, 가족에 대한 관심, 세계영화사 전통의 계승과 발전 등으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타지키스탄의 경우, 아직 소수의 감독들만이 장편 극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가족이라는 공통된 주제와 더불어, 감독들의 능숙한 영화 언어 구사력이 돋보인다. 우즈베키스탄 영화는 소연방 시절의 역사적 상처에 관한 주제를 자주 다루고 있지만, 사오다트 이스마일로바라는 재능있는 여성 감독의 향후 활동이 주목된다. 키르기스스탄의 주요 감독들 역시 가족이라 공통된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부패, 돈, 그리고 이주노동자의 문제 등 동시대 키르기스스탄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자신의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자 소개
홍상우(swhong@gnu.ac.kr)는
경상국립대학교 인문대학 러시아학과 교수이다.
참고문헌
- 홍상우. 2008. “영화 스탈린의 선물 《 (Подарок к Сталину)》 연구” 『노어노문학』 20-4, 443-463.
- 홍상우. 2009. “2008-2009 중앙아시아영화 연구 – “경계 지우기” 혹은 “경계 넘기” 욕망의 미학” 『세계문학비교연구』 29, 537-555.
- 홍상우. 2016. “2014-2015 중앙아시아 영화 주된 경향 연구” 『노어노문학』 28-3, 233-252.
- 홍상우. 2018. “2017-2018 중앙아시아 영화 연구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들을 중심으로-” 『노어노문학』 30-4, 259-282.
- 홍상우. 2022. “2022 중앙아시아 영화 연구 – 제 27회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집 팝니다》와 《쑥의 향기》를 중심으로 -” 『노어노문학』 34-4, 193-209.
- 홍상우. 2023. “2022 중앙아시아 영화 연구: 카자흐스탄 영화 <계략(Схема)>과 타지키스탄 영화 <행운(Дов)>을 중심으로”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80, 251-279.
- 홍상우. 2022. “아딜한 예르자노프 감독의 영화 《노랑 고양이》연구”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76, 175-197.
- 홍상우. 2020. “성장드라마의 레드 웨스턴, 카자흐스탄 영화 ≪말 도둑들. 시간의 길≫ 연구” 『슬라브연구』 36-2, 143-160.
- 홍상우. 2010. “‘빛의 남자’의 등장, 악탄 아림쿠바트 감독의 키르기즈스탄 영화 <전기도둑> 분석” 『세계문학비교연구』 33, 407-425.
- 홍상우. 2021. “‘집과 혁명 – 우즈베키스탄 영화 ≪파리다의 노래≫ 연구 -” 『세계문학비교연구』 77, 169-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