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4일 (29호)
서지원(서울대학교)

민주주의 위기, 퇴행 담론의 유행은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연구자는 자신의 이론이 맞으면 기분이 좋아야 마땅한데 민주주의가 망해 가고 있는 것을 보며 “그것 봐라, 내가 맞지”라면서 손뼉을 칠 수는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동남아시아 정치를 지켜보면서 딱히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평가를 마주친 적도 거의 없을뿐더러, 더 냉소적으로 세상을 보자면 원조금으로 월급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민주주의가 퇴행한다고 해야 관련 원조금이 들어오고, 학자들 역시 자신이 연구하는 지역이 적당히 문제를 일으켜야 연구 의뢰가 들어오기 마련이다.

이렇게 이모저모 따져 봐도 동남아시아 민주주의에 위기가 찾아오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상황이 다 다르고, 다른 지역 국가들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상황도 다르기에 위기를 통괄하는 어느 하나의 일반적인 설명을 제시하기는 힘들다. 이 글에서는 민주주의 상황이 크게 변화를 겪지 않은 라오스, 베트남, 브루나이, 싱가포르와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를 제외하고, 태국과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미얀마, 필리핀의 정황에 대해 군부정치·세습정치·초국적 탄압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로 풀어 보려고 한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도 힘들지만 권위주의를 도입하거나 유지하는 것도 어쩌면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의 상황이 최선은 아니지만 최악도 아니라고 가정하며 각국 정치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군부정치

군인 출신인 사촌오빠가 방콕에 놀러 와서 잠시 정치 얘기를 했다. “태국은 아직도 쿠데타 할 때 왕실에 허가받냐?” (1990년대 초 TV로 매일 뉴스를 보던 모든 한국인의 기억에는 반군부 시위 유혈 진압 이후 군인과 시위대 지도자가 바닥에 공손히 앉아 푸미폰 왕의 말씀을 듣는 모습이 남아 있다.) “그렇죠.” “그러면 쿠데타를 뭐하러 하냐?” 듣고 보니 그렇다. 일으키는 사람 입장에서도 쿠데타는 부담스럽다. 마음대로 하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힘들게 쿠데타를 하는가?

태국은 2006년과 2014년에 군부 쿠데타를 겪었고, 미얀마는 2021년에 탱크가 수도에 진출했다. 하지만 그전에도 군부정치가 없어졌던 것은 아니다. 미얀마에서는 2008년 헌법과 함께 자유선거 실시의 길이 열렸지만, 군부에게 할당된 의회 의석이 25%였고 군부의 동의 없이는 헌법을 개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출된 민간 정치인들은 비토권을 가진 군부가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는 구조였다. 쿠데타 이전에 군부의 정치적 역할이 미얀마와 같이 제도화되어 있지는 않았던 태국에서도 비공식적인 역할은 남아 있었다. 맥카고의 ‘네트워크 왕실’ 이론에 따르면, 1980년대 초부터 탁신이 집권한 2001년까지 푸미폰 왕은 군부의 고위급 인사들과 추밀원 인사들, 특히 군사령관 출신인 쁘렘 전 총리를 통해 내각의 구성, 군부 내의 승진 등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다(McCargo, 2005).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후견-피후견 네트워크를 통해 묶인 군부와 왕실이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의 배후에서 비토권을 행사했다는 맥카고의 주장은 선출된 탁신 정부가 대안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인사권도 행사하려고 했기에 제거되어야 했다는, 다음 해에 일어난 쿠데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오늘날 동남아시아 군부정치의 특징은 자리, 예산, 인사권, 경제적 이익 등의 문제들이 거의 포장되지 않은 채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미얀마 군부가 경제의 여러 분야에 진출해 있는 국영기업을 통해 관리하는 막대한 자산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 잘 알려져 있으며, 이들 군부기업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들은 쿠데타 통치를 비호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군부의 경제적 역할은 제재 캠페인의 대상인 미얀마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며, 왕실모독죄와 컴퓨터범죄법 위반으로 태국 군부에게 고발당해 4월 8일에 구금된 미국인 학자 폴 챔버스와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군부 정치경제’에 대해 ‘카키색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분석하기도 했다(Chambers and Waitoolkiat, 2017). 한편 얼마 전 태국에서는 장군직에 오른 군인의 숫자에 대한 의회 질의에 최고위급 기밀이기에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와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3월의 총리 불신임 투표 과정에서 야당인 쁘라차촌당의 지랏 텅수완 의원은 태국에 휴전 상태인 한국보다 8배나 많은 3,000명 이상의 장군이 있다는 추산치를 발표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3월에 의회의 심의 대상 법안 목록에 올라 있지도 않았던 군부법 개정안이 충분한 논의 없이 지나치게 신속하게 처리되면서 주요 도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이어졌다.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군인이 군인 신분을 유지한 채로 직위를 맡을 수 있는 군부 이외의 정부 부처 및 기관을 10가지에서 15가지로 늘리는 것으로서, 기존의 국방부와 정보부, 대법원, 마약 관련 기관 이외에 해양·재난·테러리즘 분야와 검찰이 추가되었다. 시위대는 이번 군부법 개정이 1966년부터 1998년까지 이어진 수하르토 대통령의 신질서 통치 기간에 정식화되었던, 군부가 국방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중기능’(dwifungsi)의 부활이라고 비판한다. 군부 출신인 (하지만 2024년 대선에서는 강성 이미지보다 귀여운 이미지로 승부했던) 프라보워 대통령은 이미 기존의 법을 지키지 않고 군인 신분의 인사들을 장관직을 비롯한 각 부처에 임명한 바 있다. 대다수 군인들에게는 거창한 이중기능이나 신질서의 부활보다는 자신들이 진출할 수 있는 자리가 늘어났다는 것, 그리고 개정안의 다른 중요한 내용인 계급정년 연장이 더 와 닿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리와 돈 문제가 선명히 드러나 있는 상태에서 군부정치가 부딪치는 문제는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태국 군부는 왕실이 있어서 마음대로 못 한다지만 왕실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울 수는 있다. 요즘은 미얀마를 제외하면 내전도 거의 없는데 군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동남아시아 군부정치의 (그들 입장에서의) 또 다른 문제는 인기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이다. 동남아시아 유권자들은 군부를 지지하지 않는다. 4년 전 민 아웅 흘라잉의 미얀마 군부는 부정선거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어떻게 선거를 해도 그들의 인기 없음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미얀마 군부는 인기가 없다. 2020년 총선에서 미얀마의 친군부 정당은 군부에게 할당되지 않은 의석의 7.8%인 26석밖에 차지하지 못한 반면 민족민주동맹(NLD)은 그 10배에 달하는 258석을 얻었다. 소선거구제도 한몫했다지만 이 정도 되면 좁힐 수 없는 차이이다. 주요 정당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거를 하더라도 미얀마 군부가 그간 겪어 온 선거에서의 끊임없는 좌절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선거에 이길 수 없으니 쿠데타를 하는 것인데, 결국 선거를 해야 한다면 쿠데타 세력은 고민될 수밖에 없다. 아무 선거라도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옹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선거를 해야 통치의 명분이 생긴다는 인식이 군부에게는 어느 정도 압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세습정치

얼마 전 쭐라롱껀대 정치학과에서 개최한 ‘민주주의 회복력’에 대한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질문을 받는 시간이 되자 대학원생이 손을 번쩍 들고 (영어로) 의견을 개진했다. “제 생각에 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세습정치입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동의하지 않는다. 문제인 것은 맞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아니다. 세습정치가 가장 심각한 문제라면 군부 쿠데타를 비롯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세습정치를 막아야 할 텐데 그게 맞나?

세습정치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배우자나 자녀에게 지역구를 물려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직을 세습할 수도 있고 그 외의 공직을 세습할 수도 있다. 자신의 직위를 물려줄 수도 있고, 영향력을 이용해 다른 직위를 얻도록 할 수도 있다. 임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물려줄 수도 있고, 수년 또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가족이 해당 직위에 오를 수도 있다. 5년 전 이 지면을 빌어 2020년에 전국 단위 의회에 진출한 인도네시아의 20대 청년들이 모두 ‘금수저’ 정치인임을 밝힌 바 있지만, 그들도 무엇을 어떻게 물려받았는지는 경우가 다 달랐다(서지원, 2020).

소속 정당인 투쟁민주당의 당규를 무시하고 편법으로 솔로 시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던 세습정치 드라마의 주인공, 조코위 대통령의 큰아들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는 지금 부통령이 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헌법재판소가 2024년 대통령 선거 후보 등록을 앞두고 단체장 경력이 있으면 40세에 이르지 못했어도 정·부통령 후보로 출마할 수 있다는 논쟁적 판결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판결로 조코위 대통령의 매제였던 헌법재판소장은 징계를 받아 사임해야 했지만, 기브란은 재빨리 프라보워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등록하여 당선됐다.

프라보워와 기브란의 선거 캠페인 현수막
출처: 저자 제공

 

기브란의 입후보 과정은 드라마틱했고, 상대 후보인 투쟁민주당의 간자르 프라노오 후보는 이를 ‘한국 드라마’에 빗대기도 했다. 왜 다른 가문도 세습정치를 하는데 기브란의 세습만 이렇게 드라마틱해야 했을까? 정당을 세워서 키울 만한 재산과 기반이 있는 다른 가문은 법과 규정을 지키면서 시간을 들여 당직과 공직을 세습할 수 있었던 반면, 조코위에게는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권력을 누려 보니 이걸 물려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퇴임 후 본인의 바람막이 내지는 방패가 되어 줄 믿을 만한 사람이 달리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남들도 다 물려주니 나도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헌법재판소라는 독립기관을 이용한 조코위 가문의 권력 세습은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에 대한 국내외의 인식을, 그리고 민주주의 그 자체를 심각하게 후퇴시켰다.

세습정치의 유형과 양태에 대해서는 더 세밀한 비교 분석이 필요하며, 이 자리에서는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세습정치 실태 일부를 점검할 수 있을 뿐이다. 야당을 무력화시킨 상태에서 38년간의 통치를 끝내면서 총리직을 자신의 아들인 훈마넷 총리에게 바로 물려준 훈센 전 총리는 세습정치의 왕, 아니 왕이 아니라서 세습정치를 하면 비난을 받는 것이니까 세습정치의 대마법사라고 할 만하다. 그는 내각의 장관들과 함께 집단 세습을 거행함으로써 더욱 무난한 세습을 성공시켰다고 한다(정연식, 2023). 필리핀의 페르디난도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은 40년 전에 독재자였던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데, 2001년에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탄핵으로 쫓겨난 이후 필리핀에서 정치 가문 출신이 아닌 대통령은 없었다. 암살된 야당 정치인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미망인으로 1986년 피플파워 이후 집권한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인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이후에 집권한 두테르테 전 대통령도 남부의 정치 가문 출신이다. 임기 말까지 인기를 누렸던 두테르테는 딸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를 바랐지만, 사라 두테르테는 마르코스 가문에게 대통령을 넘겨주고 부통령의 자리를 택했다. 2025년 3월 말 현재 아버지 두테르테는 국제형사재판소가 위치한 헤이그에 구금되어 있고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은 탄핵 위기를 맞았다. 이들의 운명은 정치 가문끼리의 결탁이 모든 가문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해 주지는 않으며, 가문정치 또는 세습정치는 치열한 경쟁을 수반하기도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싱가포르에서는 초대 리콴유 총리의 아들인 리셴룽 총리가 물러나고 로렌스 웡 총리가 집권하면서 정부 수반 수준에서의 세습정치가 일단락되었다. 태국의 탁신 전 총리는 2006년 쿠데타로 할 수 없이 망명길에 오르지 않았으면 굳이 여동생이나 딸에게 권력을 물려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전 국가고문과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전 대통령은 민족 지도자의 딸이라는 상징성으로 반독재 운동을 견인한 경우이다. 투쟁민주당의 하락하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당권을 거의 30년째 쥐고 있는 메가와티는 조코위 임기 말에 ‘신질서(수하르토 권위주의 정권)의 부활’이라며 오늘날 반정부 시위의 구호를 선구적으로 외쳤지만, 딸인 푸안 마하라니 국회의장은 군부법의 통과에 매우 협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모든 국민이 참정권을 가진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류층 출신으로 연줄을 가진 정치인들이 과대 대표되는 것은 공정하지 않기에, 고착화된 세습정치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이미 선거민주주의를 실시하는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에서 세습정치가 일반화된 상황이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세습정치인의 존재가 민주주의를 딱히 퇴행시킨다고 하기도 힘들다. 태국의 가문정치, 세습정치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니시자키 교수에 따르면 태국 의회 의원 절반 정도는 정치 가문 출신인 반면, 정당정치에 새바람을 일으킨 제1대 ‘오렌지당’ 아나콧마이당은 2019년 의원 당선자의 15%만이 정치 가문 출신이었다고 한다(Nishizaki, 2023). 하지만 그들조차도 가문 출신 정치인을 배척할 수는 없다. 전국 단위의 바람이 부는 의회 선거에 비해 지역 위주의 선거에서는 늘 힘들게 싸우는 제3대 오렌지당 쁘라차촌당이 2025년 2월의 지방선거에서 오렌지당 역사를 통틀어 최초로 배출한 도행정위원장은 해당 지역의 정치가문 출신이었다.1)

 

초국적 연대와 초국적 탄압

태국 까우끌라이당이 해산된 2024년 8월, 쁘라차촌당으로 거듭난 까우끌라이당이 한창 당원 배가 캠페인을 하고 있을 때 태국 친구에게 권유를 받았다. “너도 가입하고 당비를 내!” “난 안되지.” “안돼?” 따로 알아볼 필요도 없이 안 되는 일이다. 해당국의 국적이 없는 외국인이 정당에 가입하거나 기부를 할 수는 없다. 외국의 도움과 손길은 때로 반가운 일이지만, 민주주의와 민주화에 있어 외국인은 주인공이 아닌 부차적인 존재이다. 한때 활발했던 밀크티 동맹 #MilkTeaAlliance, 미얀마 지지운동 #StandWithMyanmar 등 소셜미디어에서의 민주화 연대 해시태그는 초반만큼 자주 보이지는 않는다. 팔레스타인을 향한 국제적 관심에 가려졌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홍콩과 태국에서의 체제 개혁 운동이 예전같지 않고 미얀마에서의 반군부 운동도 방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각각의 해시태그와 정치적 흐름은 부침을 겪지만, 소셜미디어를 통한 국제사회에의 호소 자체는 기본적인 활동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3월 말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인도네시아 군부법 개정 반대시위와 관련해서도 X의 여러 계정이 영어로 시위대의 요구사항을 번역해서 올렸고 이에 호응하는 외국인들도 있었다.

태국 드라마 ‘마이스탠드인’(2024)에 출연한 배우 ‘멕’ 찌라낏 타원웡이 인도네시아 군부법 개정 반대 트윗을 리트윗한 모습
출처: X(@talktojirakit)

BIMST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미얀마 군정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이 태국에 방문하자 활동가들이 반대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출처: X(@MilkTeaTHA)

 

다른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함께 하지 않더라도 민주화운동가들의 기본적 인권 보호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다. ‘초국적 탄압’(transnational repression)은 최근 몇 년 새 미국 프리덤하우스의 캠페인 등을 통해 관심을 끌고 있는 용어이다. 주로 정치망명자들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 법무부에 의하면 초국적 탄압은 외국 정부가 다른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활동가와 언론인, 야당 정치인, 박해받는 소수자 그룹의 성원 등을 괴롭히고 위협하거나 해치는 행위를 뜻한다(U.S. Department of Justice, National Security Division, 2025). 탄압은 해당 망명자를 노리는 외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실행할 수도 있지만, 거주국 정부 및 다른 정부들과의 협력이 수반되기도 한다. 탄압의 양태는 망명자들을 감시하거나 위협하는 것부터 물리적 공격, 암살과 강제실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고국에 남은 망명자의 가족을 괴롭히거나 외국 정부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는 것도 초국적 탄압으로 간주된다.2)

망명자들에 대한 이러한 위협은 망명이라는 현상과 함께 언제나 존재했던 만큼 새로운 용어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미국 정부와 국제인권단체에서는 이미 정착된 용어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 태국에서는 국제난민기구에서 난민 지위를 부여받고 방콕 근교 빠툼타니에 살고 있던 베트남 반체제 블로거 두옹 반 타이가 실종되었다가 나중에 베트남에서 재판을 받고 12년형에 처해졌음이 밝혀진 사건, 그리고 2024년 11월에 태국 정부가 캄보디아 정부의 요청에 따라 태국에 살고 있던 야당 출신의 반정부 활동가 6명을 돌려보낸 사건 등이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더 심각하게는 야당인 캄보디아구국당의 전 국회의원이었던 림 킴야가 2025년 1월에 방콕에서 청부살해를 당한 사건이 있으며, 말레이시아에서 2023년에 남편 및 세 자녀와 함께 납치된 미얀마 활동가 투자르 마웅의 거취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암살이나 강제실종의 경우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배후세력과 동기를 파악하기 힘들기에 그만큼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초국적 억압을 주시하는 이들은 중국에 주목하는 편이지만, 캄보디아 역시 아시아 2위의 초국적 억압 국가로 명단에 올라 있는 만큼 경찰과 이민 당국이 재한 캄보디아 민주화 운동가들을 비롯한 난민과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이주민들의 인권 보장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Vaughan et al., 2025). 3월에는 태국 정부가 2014년부터 구금되어 있던 위구르인 40여 명을 중국의 요청에 따라 송환한 이후 미국 국무부가 태국 정부의 관련 인사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이슈는 태국과 유럽연합의 자유무역협정 협상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초국적 범죄와 이민 단속도 국가의 중요한 업무이지만, 초국적 탄압으로 인한 희생을 방지하는 것도 하나의 국제적 목표라는 점을 경시하고 외국 권위주의 정부의 요청에 대응했을 때 외교정책에 예상치 못한 파장이 올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저자소개

서지원(suhjiwon@snu.ac.kr)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부교수로 동남아시아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해 강의한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과거청산과 이행기정의, 기억의 정치 등의 분야를 연구해 왔다. 최근에는 태국에서 무슬림 정치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 서지원. 2020. “금수저와 창업자: 금권 시대 인도네시아의 청년정치.” 다양성+Asia. https://diverseasia.snu.ac.kr/?p=4692
  • 정연식. 2023. “2023 캄보디아 총선: 선거와 권력 세습.” 전북대학교 동남아연구소 이슈페이퍼 25.
  • Chambers, Paul, and Napisa Waitoolkiat eds. 2017. Khaki Capital: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Military in Southeast Asia. Copenhagen: NIAS Press.
  • McCargo, Duncan. 2005. “Network Monarchy and Legitimacy Crises in Thailand.” The Pacific Review, 18(4), 499-519.
  • Nishizaki, Yoshinori. 2023. Dynastic Democracy: Political Families in Thailand. Chiang Mai: Silkworm Books.
  • U.S. Department of Justice, National Security Division. “Transnational Repression (TNR).” Updated Feburary 13, 2025.
  • Vaughan, Grady, Yana Gorokhovskaia, and Nate Schenkkan. 2025. “Ten Findings from Ten Years of Data on Transnational Repression.” Freedom House, Perspectives, February 6.

미주

1) 아나콧마이당과 그 후신인 까우끌라이당은 사법부에 의해 해산되었고, 2025년 3월 현재 쁘라차촌당이 이들을 승계한 정당이다. 오렌지색 로고를 쓰기 때문에 구어에서는 오렌지당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2) 이 문단은 2024년 9월 강제실종의 날 기념으로 방콕에서 열린 “Justice has no boundary” 행사에서의 위팃 문타폰 교수 강연과 필 로버트슨 씨의 발표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