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8일 (30호)
신민하(서울대학교)
들어가며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인 남아시아 지역에는 20억 8천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는 아시아 전체 인구의 43%, 전 세계 인구의 25%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민주주의’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살고 있는 곳이 남아시아 지역이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아시아 지역은 이미 고대 시기에 ‘사바(Sabha)’, ‘빤짜야뜨(Panchayat)’ 등과 같은 민주주의 제도의 독창적 원형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사례들이 존재했다. 한편 국가 지도자들은 어떠했던가? 기원전 3세기 오늘날 남아시아 전역에 버금가는 지역을 통치한 마우리아 제국의 3대 황제 아쇼카(Ashoka, 기원전 268-232 재위)는 피비린내 나는 정복 전쟁 끝에 살생을 멈추고 백성에 대한 덕치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며, 마우리아 제국보다 더욱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던 무굴제국의 3대 황제 아크바르(Akbar, 1556-1605 재위)는 종교적 관용을 기반으로 문화적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여 백성들 사이의 화합과 평화를 도모했다. 한편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는 비폭력을 세계사적 유산으로 남겼다. 또한 영국 식민주의가 인도아대륙에 뿌려놓은 독초인 힌두-무슬림 간 종교적 분열과 갈등의 극복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던 독립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54)와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 무함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 1876-1948)는 세속주의(Secularism)에 기반한 의회 민주주의를 국가 비전으로 천명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사적 토대를 기반으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 남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생존과 발전을 위한 각기 다른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글에서는 남아시아 지역 국가 중 1947년 이전까지 영령 인도로 한 몸이었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민주주의가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는지를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이들 나라 모두 2024년에 총선을 치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논의들이 오갔다. 이 글을 통해 같은 시기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서로 이웃해 살고 있는 세 나라가 처해있는 너무도 다른 민주주의의 현재 상황을 비교해 봄으로써 민주주의 제도와 체제의 생존을 촉진하는 특성은 과연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도: 세속주의에서 힌두민족주의로 변화하는 민주주의 근간

인도의 2024년 총선은 국민들이 그 어느 때보다 주의 깊게 바라본 선거다. 투표 참여 유권자 6억 4,200만 명, 투표소 105만 곳, 전자투표기 180만 대가 동원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주주의 선거’라는 점과 함께 2014년부터 집권한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 이하 BJP)이 얼마나 압도적인 득표 차로 세 번째 연임에 성공하느냐에 대한 높은 관심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인도 국내외 언론들은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BJP의 완벽한 승리를 예측했는데 예상을 벗어난 결과가 나왔다. BJP가 하원 의석의 확실한 과반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체 의석 543석 가운데 최소 272석이 필요했지만 이에 훨씬 못 미치는 240석 확보에 그쳤기 때문이다. BJP는 연립정부를 구성해 2024년 6월 모디 3기 정부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2019년 총선 당시 303석을 확보했던 것과 비교할 때 심각한 선거 결과가 나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정치평론가들은 BJP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이었던 우따르쁘라데시, 라자스탄, 마하라슈뜨라와 같은 주(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배경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고, 이는 인도 민주주의가 처한 현재 상황에 대한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나렌드라 모디 집권 2기까지 과학 기술과 인프라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인도를 세계 5위 경제 대국에 등극시킨 것과 더불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유치, 무인 탐사선 찬드라얀 3호의 달 남극 착륙 성공 등 가시적인 경제 발전 성과를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농촌 지역의 빈곤이 지속되면서 많은 유권자가 돌아섰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이유로 2014년 집권 직후부터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강화돼 온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들었다. 국가 권력을 사용하여 야당을 탄압하고, 특히 무슬림을 표적으로 삼아 의도적으로 차별하고 소외시킨 점은 국민들에게 세속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 것으로 평가됐다.

(좌) 2024년 1월 22일 아요디아의 람 사원 봉헌식을 집전하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출처: Wikimedia Commons, Prime Minister’s Office (GODL-India)
(우) 2024년 1월 람 사원 재건을 축하하는 극우 힌두 단체들이 뉴델리 시내 곳곳에 걸어 놓은 사프란색 깃발
출처: 저자 제공

 

BJP의 정치적 영향력은 자매단체인 민족자원봉사단(Rashtriya Swayamsevak Sangh)과 함께 힌두뜨바(Hindutva) 이념을 내세워 힌두민족주의를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으로 변화시키는 만큼 성장하는 양상을 보였다. 실제 1984년 11월 총선에서 단 3석으로 시작하여 2019년 총선에서 303석이라는 압승을 거두게 되는 정치적 여정에는 1992년 12월 바브리 마스지드(Babri Masjid) 종교폭동 사건, 2002년 2월 구자라트 종교폭동과 같은 전체 인구의 14%(1억 7천만 명)를 구성하는 무슬림에 대한 증오와 혐오, 차별과 배제를 기반으로 한 극단적 성격의 폭력 사건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2019년 2기 정부 출범 이후에는 무슬림 인구가 다수인 잠무 카슈미르 지역에 허용됐던 자치권을 박탈하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했다. 여기에 더해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방글라데시 등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아 인도로 넘어오는 힌두교·시크교·불교·자이나교·파르시교·기독교 신자들에게 시민권 신청 자격을 부여하면서 무슬림은 노골적으로 제외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주에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결혼이 금지됐고, 힌두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소를 도살하거나 먹었다는 의혹만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민간 자경단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2024년 총선을 석 달여 앞둔 1월 22일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힌두들의 정치적 결집을 염두에 두고 1992년 파괴된 바브리 마스지드 인근 부지에 힌두교 사원을 재건하는 행사에 참석해 직접 봉헌식을 진행했다. 이날 행사는 TV, 유튜브 등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생중계됐다.

전체적으로 볼 때 2014년 BJP 집권 이후 인도의 정치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서 멀어지는 듯 보일수록 경제 발전 속도가 빨라진 것은 사실이다.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인 성격의 정부는 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인도의 위상이 더욱 강화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인도 국내적으로는 독립 당시 간디와 네루를 비롯한 국가 지도자들이 받아들인 이념, 즉 국가 권력은 어떤 종교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모든 국민은 자유롭게 개인의 신앙을 실천할 권리를 가진다는 세속주의 정신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4년 총선 이후 BJP는 힌두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목소리의 크기와 음색을 가다듬는 중으로 보이는데, 앞으로 4년 남은 임기 동안 어떠한 변화를 보여줄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파키스탄: 군부독재의 그림자와 여전히 투쟁 중

1947년 8월 14일 인도보다 하루 먼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파키스탄은 세계 여러 국가로부터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것이라는 관심과 기대를 받았다. 국가 운영의 기본 이념으로 삼은 이슬람이 평등사상에 기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구 절대다수가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일 국가를 설립하는 데 유리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48년 9월 11일 의회 민주주의를 신봉하던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사망한 직후부터 정치권력의 분배를 둘러싼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더니 1950년대 후반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 출현 이후 파키스탄 현대사의 대부분은 군부가 직간접적으로 국가 운영에 개입하는 병영국가(garrison state)의 형태를 띠어왔다. 파키스탄에서는 1947년 건국 이래 2013년 이전까지 선거를 통해 구성된 민주 정부가 임기를 완전히 채우고 다음 정부에 민주적으로 권력을 이양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민들이 주도한 민주화 노력이 군사 쿠데타로 인해 번번이 좌초되었기 때문이다. 2013년 역사상 처음으로 5년의 임기를 채운 파키스탄인민당(Pakistan People’s Party)은 같은 해 5월 11일 치러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 전 총리가 이끄는 파키스탄무슬림리그-나와즈당(Pakistan Muslim League Nawaz)에게 정권을 승계했다. 당시 적극적인 시민의 참여, 활발한 미디어, 주요 정당과 여론의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합의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면서 파키스탄에 마침내 민주주의가 안착할 것이라는 큰 기대를 불러왔다.

(좌) 파키스탄 군부와의 갈등 끝에 총리직에서 물러난 임란 칸 전 파키스탄 총리
출처: Wikimedia Commons, Pakistan Tehreek-e-Insaf
(우) 1990년대 군부와 첨예하게 대립했던 나와즈 샤리프 전 파키스탄 총리
출처: flickr, WORLD ECONOMIC FORUM/swiss-image.ch/Photo Jolanda Flubacher

 

이후 2018년 7월 25일 치러진 파키스탄 총선에서 부패 척결을 내세워 ‘안티-나와즈 샤리프(Anti-Nawaz Sharif)’ 캠페인을 펼친 전직 크리켓 국가대표 출신의 야당 대표 임란 칸(Imran Khan)이 이끄는 파키스탄정의운동(Pakistan Tehreek-e-Insaf)이 승리하면서 파키스탄 역사상 두 번째로 문민정부 간의 정권 이양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파키스탄 국내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임란 칸 정부의 취임 직후부터 국방, 안보, 외교 등 전반에 걸쳐 파키스탄 군부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자칫 파키스탄 군부 세력이 부활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이 예상은 얼마 가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파키스탄 군부와 각종 정책과 관련해 의견 충돌을 빚어온 임란 칸은 2022년 4월 의회 불신임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어 2023년 8월에는 징역형을 받고 수감됐다. 올해 1월에는 총리 재직 시절 직권 남용과 부패 혐의로 14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외에도 국가 기밀 누설에서 불법 결혼에 이르기까지 150여 건에 달하는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이는 군부가 법 제도를 교묘히 이용하여 부정부패 혐의로 민선정부를 붕괴시키고 정치에 간섭했던 과거 양상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 파키스탄 군부는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강력한 정치적 플레이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키스탄 군부는 오랜 기간 국가 주요 조직에 뿌리를 내려왔기에 여론을 조성하고 정책을 구성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테러 위협, 지역 및 종족 갈등, 뿌리 깊은 인도와의 긴장 관계에 상시 직면해 있는 파키스탄의 현 상황은 군부가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국가적 담론 형성을 주도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파키스탄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는 향후 적잖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방글라데시: 시민혁명 앞에 스스로 사임한 4선 총리
(좌) 2024년 8월 5일 사임한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전 총리
출처: Wikimedia Commons, Ministry of Railways (GODL-India)
(우) 하시나 전 총리의 관저 꼭대기에 올라가 환호하고 있는 반정부 시위대
출처: Human Rights Watch, 촬영: Nur-E Habib Nurshed

 

방글라데시는 인도와 파키스탄과 비교할 때 훨씬 젊은 나라이다. 1971년 12월 인도의 지원을 받은 무장독립투쟁을 통해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파키스탄 시절 군부독재라는 쓰라린 경험을 했던 방글라데시는 민주주의, 세속주의, 사회주의를 건국 이념으로 내세우며 절차적 민주주의 전통을 굳건히 지키고자 노력해 왔다. 그 결과 군부독재와 쿠데타, 암살과 보복 정치의 위협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유지해 왔다. 그런데 오늘날 방글라데시의 상황은 큰 혼란을 겪고 있는 모습이다. 파키스탄으로부터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이끌었던 초대 대통령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의 장녀이자 방글라데시 민주화 운동과 경제 발전의 아이콘으로 여겨져 온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총리 본인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시나 총리는 1975년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가족 대부분이 암살당했을 당시 인도에 체류 중이었던 탓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1981년 방글라데시로 돌아와 아버지가 이끌었던 아와미연맹(Awami League)의 지도자가 됐다. 이후 다른 군소정당들과 협력하여 후세인 무함마드 에르샤드(Hussain Muhammad Ershad, 1930-2019) 장군이 이끄는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시위를 이끌었다. 하시나 총리는 1996년 처음으로 총리직에 올라 2001년까지 집권했고, 이후 2009년 총리직에 복귀해 2024년 1월 7일 치러진 총선까지 승리하며 총 네 차례 총리직에 오른 대기록을 세웠다. 아와미연맹이 이끄는 집권당은 2024년 1월 총선에서 의회 전체 의석 298석 중 223석을 확보했다.

그런데 네 번째 집권이라는 대기록이 수립되는 과정은 또 다른 의미에서 대기록이 만들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총선 과정에서 집권당의 대규모 사전 투표 조작, 야당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 하시나 정권의 부정부패 혐의가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고자 벌인 전쟁에 참여했던 유공자 후손들에게 정부 공직의 3분의 1가량을 할당한다는 방글라데시 대법원의 판결에 반대하며 2024년 6월 초부터 시위를 벌여온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반정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1만 명 이상이 구금되고 최소 3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하시나 총리가 보여준 권위주의적 독재자의 면모에 분노한 시위대 규모는 정부의 군·경찰 병력이 진압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갔다. 결국 2024년 8월 5일 방글라데시 최장기 집권 총리가 전국 규모의 반정부 시위에 무릎을 꿇고 한 때 군부독재의 위협을 피해 망명했던 인도로 군용헬기를 타고 급히 도피하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 벌어졌다.

하시나 전 총리의 인도로의 도피는 방글라데시 국민에게 역사적인 환희의 순간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방글라데시 내에서 또 다른 사회적 이슈를 불러왔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인도 정부에 하시나 전 총리의 소환을 요구하고, 방글라데시 경찰 당국이 신병 확보를 위해 국제형사경찰기구(Interpol)에 적색수배 발령을 요청하는 가운데 방글라데시 국민 사이에서 반(反)인도 정서가 급격히 고조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하시나 전 총리가 이끌었던 아와미연맹이 전통적으로 전체 인구 1억 7,000여만 명 중 약 8%(1,300여만 명)를 차지하는 힌두교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인식됐기 때문이다. 실제 방글라데시에서는 하시나 정부를 지지했던 힌두교 신자들의 자택과 사업장, 힌두교 사원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반대로 인도에서는 2024년 12월 방글라데시 영사관이 극우 힌두교 단체의 공격을 받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시나 정권이 무너진 이후 방글라데시에서는 빈곤퇴치 운동가이자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를 수석고문(Chief Adviser)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출범했고, 2025년 12월부터 2026년 6월 사이 선거 실시 계획을 발표한 상황이다.

 

나가며: 살아있는 남아시아 민주주의의 불씨에 주목하며

전 세계 전문가들이 오늘날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직면했다고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독주’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야당과 소수자의 목소리는 실종되었고, 집권당은 독주를 넘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민들은 분노를 억누르고 있지만은 않았다. 선거를 통해서든 반정부 시위를 통해서든 표출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지점이 오늘날 남아시아 민주주의가 여전히 희망의 불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인도의 경우 2024년 총선 이후 그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시민들과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를 비롯한 야당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는 모습이다. 여기에 더해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이 처한 정치적 현실과 맞물려 국제사회에서 인도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인도의 정치 상황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그간의 행보로 미루어 볼 때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인도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지 않으면 인도가 국제사회에서 강대국 이미지를 가지기 힘들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한편 파키스탄의 경우 군부독재 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하고자 시도하고 있지만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일을 의도적으로 자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민선정부의 국가 운영을 경험해 본 파키스탄의 수많은 유권자가 군부독재에 대한 반감을 투표를 통해 표출하는 정도가 점차 거세지고 있음을 목도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파키스탄의 침체된 경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구제금융과 지속적인 외국인 투자유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구성된 민주정부가 주도하는 경제 개혁, 인권 보호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는 공감대가 시민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마지막으로 방글라데시의 경우 시민이 주도하여 야당을 위한 정치적 공간이 본격적으로 마련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 마나 한 뻔한 선거’였던 2024년 총선 이후 폭주하는 집권당에 반대하며 전국 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것은 2000년대와 2010년대 초까지 비교적 활기찬 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방글라데시 국민들이었다. 그들은 ‘일당독재’ 수준의 4선 총리를 몰아내고 우왕좌왕하는 일 없이 과도정부를 세우고 현재 차기 총선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 중이다.

인구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측면에서도 국제적 존재감이 커지고 있는 남아시아의 민주주의는 앞으로 다양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다. 뿌리 깊은 불평등과 높은 빈곤율로 먼저 인식되는 남아시아 지역이 세계 그 어느 지역보다 민주주의의 큰 변화와 변혁의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저자소개

신민하(aparajito@naver.com)
인도 국립 델리대학교 역사학과(M.A.)와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역사학센터(M.Phil/Ph.D.)에서 인도 역사를 공부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에서 인도의 역사와 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파키스탄 국기(國旗) 제정과정에 투영된 진나의 세속주의 국가 비전에 관한 연구”(2023), “국장(國章) 제정과정에서 나타나는 인도의 국가정체성 형성에 대한 연구: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국가비전을 중심으로”(2021) 등이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인도 대전환의 실체와 도전: 통합과 도전』(2023)(공저). 『인도 대전환의 실체와 도전: 힌두 헤게모니 담론』(2022)(공저) 등이 있다.

참고문헌

미주

1) 사바는 고대 인도의 문헌인 『리그베다』(Rigveda), 『마하바라타』(Mahabharata) 등에서 ‘대규모 집회’, ‘협의회’ 또는 ‘그러한 모임이 열리는 장소’ 등을 의미했다. 이 용어는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인도 의회의 하원을 지칭하는 ‘로끄 사바(Lok Sabha)’, 상원을 지칭하는 ‘라즈야 사바(Rajya Sabha)’, 각 주의 입법부를 지칭하는 ‘비단 사바(Vidhan Sabha)’를 들 수 있다.

2) 빤짜야뜨는 고대 인도에 존재했던 ‘마을 자치 공동체’를 의미한다. 마을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하는 빤짜야뜨는 마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안에 대해 상급 기구와 소통할 수 있는 창구였으며, 경찰권과 사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빤짜야뜨는 중세 무굴제국 시대와 영국 식민 지배 기간 경찰권과 사법적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지만 계속해서 유지됐다. 한편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면서 빤짜야뜨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간디가 독립 인도에서 개인의 자유에 기반한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마을을 기본 단위로 하는 자치제도 및 상향식 의사 전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간디는 빤짜야뜨 체제 확립을 통한 국가 운영을 의회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보았다. 그러나 간디의 구상은 인도 제헌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빤짜야뜨는 농촌개발을 장려하는 한 방안으로 각 주 정부가 정책 수립 시 참고하는 헌법 지시조항(Directive Principles of State Policy)에 포함됐다. 이후 1992년 12월 23일 발표된 제72차 헌법 개정안을 통해 빤짜야뜨는 지방자치 기구로 공식 인정받았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주에서 운영되고 있다.

3) 20세기 초 처음으로 등장한 힌두뜨바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힌두성(Hinduness)’ 또는 ‘힌두로서의 상태 또는 자질(the state or quality of being Hindu)’을 의미했다. 그런데 힌두 민족주의 운동가 비나약 다모다르 사바르까르(Vinayak Damodar Savarkar, 1883-1966)가 『힌두뜨바의 본질』(Essentials of Hindutva)을 출간한 1922년 이후부터 ‘힌두교의 헤게모니와 힌두교적 삶의 방식을 확립하려는 이데올로기, 즉 힌두 민족주의’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극우 성향의 힌두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활동을 본격화한 민족자원봉사단(Rashtriya Swayamsevak Sangh), 세계힌두협회(Vishva Hindu Parishad),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 등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이념의 성격이 강한 용어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지난 2014년부터 최근까지 세 번째 집권에 성공한 인도인민당은 1980년대 초반부터 힌두뜨바 개념에 기반한 ‘힌두교 우선 정책’을 전면에 내세워 정치적 기반을 견고하게 구축해 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외래 종교, 특히 무슬림에 대한 노골적인 배제와 탄압이 동반되면서 인도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여겨지는 세속주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