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혁 (고려대학교)
동남아시아에는 필리핀,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11개 나라가 있다. 이 나라들은 태국을 제외하면 2차 세계대전 끝날 때까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2차 대전 중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 등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독립 후에는 민주주의부터 권위주의까지 다양한 정치체제를 수립하였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동티모르는 야당이 참여하는 경쟁적인 선거로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베트남과 라오스, 브루나이는 야당이 허용되지 않는 권위주의 국가이다. 한편 싱가포르와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에서는 야당도 허용되고 선거도 실시되지만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매우 낮은데, 이들은 완전히 민주주의도 아니고 권위주의라 하기도 어려워서 준민주주의(semi-democracy)라 불린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과거에는 거의 모두 군주제나 왕정을 기본으로 하는 권위주의 국가였지만 캄보디아와 미얀마 등은 준민주주의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은 민주주의로 전환하였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역사를 경험한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이처럼 다양한 정치체제를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어떤 나라는 여전히 권위주의로 남아있는데, 어떤 나라는 준민주주의로, 어떤 나라는 민주주의로 전환하였을까? 또한 태국은 군부가 통치하는 권위주의(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민주주의에서 다시 군사독재로 전환을 여러 차례 반복해 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경제, 정치 둘러보기
앞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나라들의 역사, 경제, 정치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식민지배를 받았고, 특히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서 한국과도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할 때까지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였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식민지였으며,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싱가포르, 미얀마는 영국 식민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프랑스 식민지였다. 가장 최근에 독립한 동티모르는 포르투갈 식민지였는데, 1975년 독립을 선언하고 포르투갈이 떠난 후 인도네시아 영토로 강제 편입되었다가 2002년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러한 식민지배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나라들에서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 독립 이후 정치체제 수립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필리핀의 경우 미국이 식민통치를 하는 동안 의회와 선거 등 미국의 정치제도들이 이식되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미국식 상하원 선거가 1916년에 실시되었고, 1935년부터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처럼 일찍 미국식 민주주의를 경험한 필리핀에서는 독립 이후에도 대통령제와 상하원 양원제에 기초한 미국식 민주주의가 상당 기간 유지되었다. 영국이 지배한 미얀마의 경우에도 영국의 정치제도들이 이식되어 1922년부터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독립 후에도 의원내각제에 기초한 영국식 민주주의 모델에 입각해 헌법을 만들었다. 네덜란드 식민통치 기간 중 네덜란드 정치제도를 경험한 인도네시아 역시 독립 이후 비례대표제와 의원내각제 등 네덜란드식 모델에 기초해 정치체제를 설계하였다.
한편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지배한 프랑스는 식민지에 자신들의 정치제도를 이식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국가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채 독립을 이루었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수립한 나라는 아직 없다.1)
그렇다면 과연 식민지 시기 민주주의 정치제도들이 이식되었던 국가들에서는 독립 후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그러한 경험이 없었던 국가들에서는 민주주의 가능성이 낮은 것일까? 먼저 오늘날 민주주의로 분류되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동티모르 가운데 식민지 시기 서구식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던 나라는 없었다. 이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 시기 서구식 의회와 선거를 경험했던 것이다. 반면 오늘날 권위주의로 분류되는 베트남, 라오스, 브루나이는 모두 식민지 시기 서구식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다. 베트남 남부 사이공(오늘날 호치민시)을 중심으로 하는 코친차이나(Cochinchine) 지역에 한하여 의회 선거가 제한적으로 실시되었을 뿐이다.
이처럼 식민지 기간 중 서구식 민주주의를 경험한 나라들은 모두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수립하였고, 그렇지 않은 나라들은 권위주의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동남아시아 정치체제에서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이 상당히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가 가능한 완전한 민주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야당이 허용되지 않는 권위주의도 아닌 준민주주의 국가들을 보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싱가포르,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은 모두 오늘날 현재 야당이 허용되지만 선거를 통해 야당이 집권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이 매우 낮은 준민주주의 국가들이다. 이들은 모두 독립 이전에 서구식 의회 선거를 경험하였다. 태국은 식민 지배를 받지는 않았지만 1932년 혁명 이후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1933년부터 의회 선거를 실시해왔다. 이처럼 오랜 서구식 민주주의 경험을 가진 나라들이지만 아직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부터 오랜 민주주의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도 왜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나라는 민주주의를 이룩했는데 싱가포르나 태국과 같은 나라는 아직 그렇지 못하는 것일까? 역사적 경험의 차이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로 전환과 민주주의의 안정성을 설명하는 대표적 이론인 근대화 이론(modernization theory)에 따르면 경제적 이유가 중요하다.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민주주의로 전환 가능성도 높아지고 수립된 민주주의의 안정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Przeworski et al., 2000).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경제가 성장할수록 물질적 혜택보다 자유나 정의, 인권 등 비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부유한 나라에서 민주주의 가능성을 높이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근대화 이론은 설명력이 높지 않다. 권위주의 국가들에 비해 민주주의 국가들이 더 부유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1개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 1인당 국민총생산(GDP) 중위 국가는 필리핀($7,943)이다. 필리핀보다 1인당 GDP가 큰 나라는 부유한 편이고 그보다 작은 나라는 가난한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볼 때, 민주주의 국가들 중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부유한 편이나 동티모르는 가난한 편이다. 준민주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싱가포르와 태국은 부유한 편이나 캄보디아와 미얀마는 가난한 편이다. 권위주의 국가들 중 브루나이는 부유한 편이고 베트남과 라오스는 가난한 편이다. 따라서 부유한 나라일수록 민주주의 가능성이 높다는 근대화 이론으로는 동남아시아 사례들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요인으로 체제 간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비슷한 체제를 갖고 있는 나라들 사이의 공통점을 살펴본 후 체제 간 차이를 비교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들부터 살펴보겠다.
민주주의: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동티모르
동남아시아의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민주주의로 전환한 나라는 필리핀이다. 식민지의 유산으로 대통령제와 상하원 양원제에 기초한 미국식 민주주의를 물려받은 필리핀은 독립 이후 민주주의를 유지했으나 1972년 마르코스(Ferdinand Marcos)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키면서 민주주의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필리핀 국민들은 1986년 ‘인민의 힘 혁명(People Power Revolution)’이라 불리는 마르코스 독재에 반대하는 거대한 민주화 운동을 일으켜 마르코스를 퇴진시키고 민주주의를 복원했다. 이후 오늘날까지 선거를 통해 야당이 집권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마르코스 이전과 비교하여 달라진 것은 대통령 단임제가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마르코스 이전에는 미국과 같이 대통령 임기 4년에 한번 연임이 가능하여 최대 8년까지 집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선에 성공한 마르코스가 3선 개헌을 시도하다가 좌절되자 민주주의를 중단시켰던 경험 때문에 1986년 마르코스 퇴진 후 민주 헌법을 만들 때 대통령 임기 6년 단임제를 채택하였다. 그로부터 1년 뒤 민주화된 한국에서도 대통령 임기 5년 단임제가 채택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의회와 설치되어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독립 후에는 1955년에 네덜란드식 비례대표제에 기초한 총선이 실시되었다. 정당별 득표가 의석으로 비례적으로 전환되는 비례대표제의 특성 상 적은 득표를 한 작은 정당들도 국회 의석을 얻을 수 있어서 무려 28개가 넘는 정당들이 의석을 차지했고, 독립운동 지도자 수카르노(Sukarno) 대통령의 정당(여당)인 인도네시아국민당(Partai Nasional Indonesia)은 불과 22.2%의 의석을 차지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원하는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 힘들자 수카르노는 1960년 국회를 해산하고 의원 절반을 자신이 임명하는 새로운 국회를 설치했다. 1965년에는 수하르토(Suharto)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였고 수카르노는 가택연금 하에서 1970년 사망하였다. 수하르토는 1998년 민주화 운동으로 퇴진할 때까지 무려 33년 간 권력을 유지했다. 1999년에 실시된 민주적인 총선에서 다시 21개에 이르는 많은 정당들이 의석을 차지하였다. 수하르토 이전과 달라진 것은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의원내각제 방식에서 벗어나서 2004년부터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영국 식민지 시기인 1955년부터 총선이 실시되었고, 의원내각제에 기초한 영국식 정치체제가 도입되었다. 그런데 독립 이후 선거에서 통일말레이국민조직(United Malays National Organization, 약칭 UMNO)이 이끄는 국민전선(Barisan Nasional, 약칭 BN)이 늘 승리하여 집권하고, 탄압으로 인해 야당이 집권할 현실적인 가능성이 거의 없는 준민주주의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그런데 2018년 총선에서 말레이시아 역사상 최초로 야당(야권 연합)이 승리를 거두어 정권이 교체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야권 연합의 지도자이자 새로 총리가 된 마하티르(Mahathir bin Mohamad)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총리를 했던 과거 UMNO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이다. 2003년 퇴임 이후 정계를 은퇴했던 마하티르는 2015년 나집(Najib Razak) 총리가 거대한 부패 스캔들에 휘말리자 나집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 편에 섰고, 2018년 총선에서 야권 연합의 대표가 되었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동티모르에서는 1973년에 최초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1975년 직후 인도네시아에 강제 합병되면서 선거는 중단되었다.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위한 투쟁 끝에 2002년 독립을 하게 되었고, 2001년 제헌의회 선거부터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이룩한 이 나라들의 명백한 공통점은 독립 이전부터 의회가 설치되고 선거가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독립 이후에도 국민이 선거에서 선택한 대표(국회의원)가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규범(norm)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는 민주주의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독재자 마르코스와 수하르토 역시 집권 기간 비록 경쟁적인 민주 선거는 아니지만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해 왔다. 말레이시아 역시 UMNO 집권 기간 동안 야당에게 불리한 비민주적인 선거였지만 지속적으로 총선을 실시해 왔고, 2018년 총선에서 드디어 불리함을 딛고 야권이 승리하여 정권을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이식되었던 역사적 경험이 민주주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연구가 있는데(Hariri, 2012), 동남아시아의 경우에도 그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준민주주의: 싱가포르,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싱가포르는 독립 이전부터 영국식 민주주의 정치제도들이 이식되어 의회가 설치되고 총선이 실시되었다. 싱가포르의 국부라 불리는 리콴유(Lee Kuan Yew)도 독립 전인 1959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총리가 되었다. 그 후에도 중단 없이 총선은 실시되었으나 리콴유의 정당인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약칭 PAP)이 오늘날까지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총선에서 모두 승리하여 집권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UMNO는 2018년 총선에서 패하여 결국 권력을 내주었지만, PAP는 아직 그러한 경험이 없는 것이다. PAP는 가장 최근인 2020년 7월 총선에서도 61.2%의 득표로 89.2%의 국회 의석을 차지하였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언론을 통제하여 여당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당블록투표제(party block vote)라는 여당에게 유리한 극단적인 승자독식형 선거제도를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는 집단대표선거구(group representation constituency, 약칭 GRC)라 불리는 정당블록투표제에서는 각 정당이 2명 이상을 선출하는 선거구(중대선거구)마다 후보 명부를 제출하고 유권자는 정당에게 투표하는데, 1표라도 많이 득표한 정당이 해당 선거구에서 선출될 국회의원 전원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3인을 선출하는 선거구에서 PAP가 야당보다 1표 더 많이 획득했다면 PAP 후보 3인 모두 당선된다. 따라서 60% 정도의 득표로 국회 의석을 90% 가까이 획득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현재 리콴유의 장남 리셴룽(Lee Hsien Loong)이 이끌고 있는 PAP를 위협할만한 야당이 없는 상황에서 PAP의 집권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보디아에서는 선거가 실시되지 않았고, 총선은 프랑스의 영향력이 약화된 1946년부터 실시되었다. 베트남전쟁이 공산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을 때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 루즈라 불리는 극단적인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인구의 1/4 정도를 학살하였다. 1979년 베트남이 개입하여 크메르 루즈가 실권한 이후에는 친베트남 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정부와 반정부 세력 간의 내전이 시작되어 선거는 중단되었고, UN이 개입하여 내전이 종식된 이후 1993년부터 선거가 재개되었다. 이 선거에서 훈센(Hun Sen)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 약칭 CPP)은 2위를 차지하여 훈센은 제2총리로 내각에 참여하는데, 1998년 총선에서는 CPP가 단독으로 과반의 의석을 획득하여 훈센은 총리가 되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CPP는 총선에서 계속 승리하여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2018년 총선을 앞두고는 위협이 되던 제1야당 캄보디아구국당(Cambodia National Rescue Party, 약칭 CNRP)을 해산시켰고, CNRP 없이 치러진 총선에서 CPP는 국회 125석 모두를 차지하였다.
태국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1932년 혁명 이듬해부터 총선을 실시해왔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 군사독재가 지속되었고, 1973년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진 민주화 운동으로 1975년 최초의 민주 선거가 실시되어 민주 정부가 들어섰지만, 1976년 쿠데타로 인하여 다시 군사독재로 돌아갔다. 1979년 다시 민주주의가 복원되었지만 1991년 쿠데타로 민주주의는 중단되었고, 이듬해 복원된 민주주의는 2006년 쿠데타로 중단되었다. 2007년 민주주의는 다시 복원됐지만 2014년 쿠데타로 다시 군부가 집권하였다. 태국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민주주의의 안정성이 상당히 낮은 것이다. 2019년에는 총선이 실시되었으나 군부가 만든 2017년 헌법에 따라 상원 250석을 장악한 군부가 하원 500석 중 116석을 획득하여 손쉽게 상하원 다수 연합을 형성함으로써 권력 유지에 성공하였다. 250명 상원의원을 군부가 임명하도록 한 2017년 헌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반군부 세력이 집권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헌법 개정을 위해선 군부가 임명한 상원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자신들에게 불리한 개정안에 동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영국 식민지 시기부터 선거가 실시되었던 미얀마에서도 1962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민주주의가 중단되었다. 그해 군사독재가 들어선 이후 2015년까지 민주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 1988년 민주화 운동 이후 실시된 1990년 총선에서는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야당이 압승하였으나 군부는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그런데 2015년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였지만, 군부가 만든 2008년 헌법 때문에 야당 지도자 아웅산 수지는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더 중요한 것은 2008년 헌법에 따라 군부가 원하면 언제든 다시 개입하여 민주주의를 중단시킬 수 있다. 따라서 미얀마 역시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야당이 허용되고 선거가 실시되지만 야당이 집권할 가능성은 매우 낮은 준민주주의 국가들 역시 의회와 선거의 역사는 긴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이룩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라에 따라 다르다. 싱가포르와 캄보디아에서는 집권 여당의 역사적 정통성이 크기 때문에 권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고, 태국과 미얀마에서는 영향력이 막강한 군부 때문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어렵다.
싱가포르의 PAP나 캄보디아의 CPP는 모두 나라를 세운 주역들이다. 국부 리콴유가 만든 PAP는 건국 이후 오늘날까지 싱가포르를 이끌어 온 정당이고, CPP는 베트남전쟁과 크메르 루즈의 학살, 베트남 개입 이후 일어난 내전으로 인한 오랜 혼란을 종식시키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정당이다. 이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상당히 높은 편이고, 역사적 정통성에 의한 이러한 높은 지지가 이들 체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신재혁, 2019).
한편 태국과 미얀마에서는 군부가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태국에서는 1932년 혁명부터 군부가 정치에 개입해왔고, 미얀마에서는 영국에 대항한 독립전쟁 시기부터 군부가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 왔다. 미얀마의 국부 아웅산 역시 독립전쟁을 이끌던 장군이었다. 태국에서는 1975년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적 혼란이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다시 개입하여 안정을 도모하고 있다. 특히 2001년 총리가 된 탁신(Thaksin Shinawatra) 지지파(레드 셔츠)와 반대파(옐로 셔츠) 간의 극심한 갈등이 정치적으로 해결되기 어렵게 되자, 군부는 2006년과 2014년 쿠데타를 일으켜 혼란을 물리적으로 종결시켰다. 미얀마에서도 1962년 정치적 혼란을 군부가 개입하여 해결하면서 군사독재가 시작됐다. 1988년 대규모 민주화 시위에 직면하여 민주 선거를 약속했지만, 1990년 총선에서 야당이 압승하고 인권 침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야당을 탄압하였다. 이후 2008년 헌법을 만들어 군부의 이익을 침해할 경우 언제든 개입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한 후 2015년 총선을 실시했다. 막강한 군부는 민선 정부가 군부를 통제하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권위주의: 베트남, 라오스, 브루나이
베트남과 라오스는 매우 유사한 정치체제를 갖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선거는 실시하지만 야당을 허용하지 않는 일당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베트남공산당(Communist Party of Vietnam, 약칭 CPV)이, 라오스에서는 라오인민혁명당(Lao People’s Revolutionary Party, 약칭 LPRP)이 집권 여당이자 유일하게 인정되는 정당이다. 두 나라 간에 차이가 있다면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Ho Chi Minh)이 만든 CPV는 독립 이후 나라를 이끌어 온 정당이나, LPRP는 베트남전쟁이 끝난 1975년부터 집권하여 나라를 통치해 왔다. 그 전까지는 라오스에서도 여러 정당이 참여하는 총선이 실시되었다. 라오스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하면서 야당이 허용되지 않는 일당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브루나이는 이슬람 왕 술탄이 다스리는 왕국이다. 브루나이 술탄의 계보는 1368년부터 시작되었고, 1967년 즉위한 현재 술탄 하사날 볼키아(Hassanal Bolkiah)는 29대 술탄이다. 브루나이에서 오늘날까지도 국왕이 다스리는 군주제가 유지되는 이유는 ‘자원의 저주’로 설명할 수 있다. 자원의 저주론에 따르면 정치 지도자가 소유한 자원이 많고 부유한 경우 국민들이나 다른 사회 엘리트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들과 권력을 공유할 이유가 없고 민주화 요구를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신재혁, 2019: 172-173). 브루나이는 산유국으로 2018년 1인당 GDP가 7만 달러가 넘는 부유한 나라이다. 브루나이 술탄은 유전이라는 막대한 자원을 소유한 매우 부유한 지도자이다. 따라서 다른 사회 엘리트의 도움이 필요 없기 때문에 그들과 권력을 나눌 이유가 없어서 의회도 설치하지 않고 선거도 실시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더라도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지금까지 동남아시아의 민주주의, 준민주주의, 권위주의 국가들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모두 식민지 시기에 서구식 정치제도들이 이식되어 오랜 민주주의 경험이 있었다는 특징이 있다(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동티모르). 준민주주의 국가들 역시 오랜 민주주의 경험을 갖고 있지만, 나라를 세운 주역이라는 강한 역사적 정통성 때문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거나(싱가포르, 캄보디아), 비대해진 군부의 강한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완전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태국, 미얀마). 권위주의 국가들은 서구식 민주주의 경험이 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하여 일당체제를 수립하였거나(베트남, 라오스), 풍부한 자원을 소유한 국왕이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브루나이).
결국 권위주의나 준민주주의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오랜 민주주의 경험을 토대로 군부를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야당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당이 강력해서 야당이 성장하기 어렵거나, 야당이 집권하더라도 강력한 군부를 통제하기 어렵거나, 정치 지도자가 부유하여 다른 사람들과 권력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이다.
저자 소개
신재혁(shinj@korea.ac.kr)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부교수이다. 2011년 UCLA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 아세아연구 편집위원장과 고려대학교 아세안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다. 전공분야는 비교정치이고,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선거, 정당, 국회, 정치·경제발전에 관한 연구를 주로 수행하고 있다. 대표 논문으로는 “The Choice of Candidate-Centered Electoral Systems in New Democracies.”(Party Politics 2017)와 “싱가포르는 왜 민주화되지 않는가? 비교연구 방법을 활용한 지역연구”(동남아시아연구 2019) 등이 있다.
1) 규칙의 집합이 제도이고, 제도의 집합이 체제이다. 예를 들어, 선거를 규율하는 규칙들이 모여 선거제도를 구성하고, 선거제도와 의회제도 등이 모여 민주주의 체제를 구성한다.
참고문헌
- 신재혁. 2019. “싱가포르는 왜 민주화되지 않는가? 비교연구 방법을 활용한 지역연구.” 『동남아시아연구』 29권 2호, 161-91.
- Hariri, Jacob Gerner. 2012. “The Autocratic Legacy of Early Statehood.”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106(3): 471-94.
- Przeworski, Adam, Michael E. Alvarez, José Antonio Cheibub, and Fernando Limongi. 2000. Democracy and Development: Political Institutions and Well-Being in the World, 1950-1990.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