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경(부산대학교)
도깨비의 기원으로 본 독각귀(獨脚鬼) 이야기
포켓몬스터나 요괴워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듯이 요괴 소재의 콘텐츠 개발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일본은 ‘요괴학’이 따로 학문분과를 형성할 정도로 매우 발달되어 있다. 또한 중국의 경우 학문적 발달에서는 일본보다 뒤늦었으나 고대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축을 이끌었던 만큼 이미 진나라 때부터 요괴에 관한 문헌들이 발달해 있었고 『산해경(山海經)』과 같이 요괴들을 이미지화한 문헌 역시 선진시대부터 저술되고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경우 요괴에 관한 문헌이나 체계적인 연구는 매우 저조하여 대표적인 한국의 요괴라 할 수 있는 ‘도깨비’에 관해서도 주로 민담 중심의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2006년 7월에 문화체육관광부는 전통과 현대를 아울러 한국의 민족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100대 민족문화상징을 선정하였는데, 여기에 ‘도깨비’를 포함시켰다. 이처럼 우리의 민족 문화를 대표할 정도로 도깨비는 오랜 기간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로서 우리 민간신앙에서 속에 존재해 온 초자연적 존재이지만, 단일한 도깨비상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이는 도깨비란 존재가 이미 오랜 기간 한국 민중들의 삶과 함께 존재하며 수많은 설화와 문학 그리고 예술 속에서 그 시대의 상황과 공간에 따라 각기 다른 외형과 특질을 가지며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신과 요괴에 관하여 이미지가 다양하게 발달된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도깨비에 관해서는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회화로 묘사된 것이 거의 없다. 주로 민화나 설화로 전해졌으며 간간이 문헌으로서 확인될 뿐이었다. 도깨비가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설화는 『삼국유사』의 ‘도화녀비형랑조’에 수록된 것이다. 신라 25대 진지왕이 미녀 도화녀를 범하고자 했으나 남편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2년 뒤 그녀가 과부가 되자 죽은 혼으로 찾아와 합방을 한 후 태어난 사내아이가 비형이다. 진평왕이 신기하게 여겨 비형을 궁중에 데려다 길렀는데 비형은 저녁마다 궁궐 밖으로 나가 도깨비들을 모아 놓고 놀았다. 진평왕이 그런 사실을 알고 나라의 공사를 도모하는데 비형에게 도움을 청한 바, 비형은 도깨비를 부려 하룻밤 사이에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에 큰 다리를 놓았다. 또한 비형은 자신을 따르지 않거나 배신하는 도깨비는 죽여 버렸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도깨비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 달아나게 되었고, 이를 안 당시 사람들은 비형랑에 대한 글을 써 붙여 잡귀를 물리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문헌으로서는 신돈복(辛敦復, 1692-1779)의 『학산한언(鶴山閑言)』과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가 있다. 거기서 표현된 도깨비는 공통적으로 외다리 요괴로서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고 가랑비가 내리는 날 삿갓 아래 눈을 희번덕거리며 외다리로 깡충깡충 뛰어다닌다고 한다. 독각귀로 묘사되면서 특정 체질의 사람에게는 병을 유발하지만, 이 독각귀와 멀어지면 금방 낫는다고 한다. 심한 악취가 나며 명함이나 문패 등 사람의 이름이 적힌 것을 두려워한다. 신돈복의 『학산한언』에서는 서울의 종묘 근처에서 목격되었다고 한다. 또한 『학산한언』과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모두 이 독각귀를 중국의 산소(山魈)라는 독각귀와 비교하고 있다. 특히 『오주연문장전산고』 속의 「만물편·귀물오통(萬物篇·鬼物五通)」 에는 이시진(李时珍)이 말하는 독각귀(獨脚鬼)는 바로 오통(五通)이고 한국의 망량(魍魉)을 독각귀라고 칭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시진이 말하길, “요즘 민간에서 말하는 독각귀는 자신을 숨길 수 있고 인가에 들어가 음란한 짓을 하는데 ‘오통’이라고 불린다. 포송령(蒲松齡)의 『요재지이(聊齋志異)』1)에 ‘남방지역에 오통이 있고 북방지역에 호(狐, 여우)가 있다.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지역의 오통은 민가에 예쁜 부인이 있으면 바로 간음하여 해를 크게 가한다. 그 본래의 모습은 말 같기도 하고 돼지 같기도 한데 미남자로 변해서 나타난다.’ 우리 동국(東國)에서는 망량을 독각귀라 칭하는데, 여자를 간음하여 귀태를 잉태시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王艶, 2019)
이 글에서 오통신과 독각귀가 같은 요괴로서 유교적 문화가 성행하던 당시에는 독각귀가 일종의 사신(邪神)으로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옛 문헌에서 묘사되는 독각귀의 형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도깨비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물론 도깨비가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데도 계속 씨름을 걸어와 여러 번 이겼다는 민담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민담은 외다리 요괴인 이매(魑魅)2)나 외다리의 산귀(山鬼)인 ‘망량’의 관념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임동권, 1971) 그러나 우리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도깨비의 이미지는 대개 머리에는 뿔이 있고 호랑이 가죽 같은 옷을 걸친 채, 도깨비 방망이를 든 아주 힘센 괴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 중세 문헌에서 보이는 도깨비(혹은 도깨비의 기원으로 생각되는 독각귀)의 이미지와 현대인들의 뇌리에 있는 도깨비 이미지의 괴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 때문이다. 즉,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도깨비의 이미지는 사실은 한국 중세 때부터 전래하던 도깨비의 이미지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일본의 요괴인 ‘오니’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도깨비는 본래 어떤 형상이었을까? 독각귀가 도깨비의 기원이라면 현대 도깨비의 이미지도 외다리 요괴여야 할 것이지만, 인간에게 외다리로 씨름을 걸어오는 도깨비 설화 외에는 그런 이미지가 별로 확산되어 있지는 않다. 이는 근대 이전에는 “도깨비의 외형이 우리 선조들에 의해 통일되고 정형화되어 기술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도깨비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큰 범위인지라 ‘도깨비 = 모든 이물 & 요물’에 가까운 개념으로 사용해 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이혁진, 2023)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특히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영향 아래 생활하며 지괴류3)에 대한 회화가 중시되지 않던 사회상에서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도깨비를 시각화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다고 본다. 다만 독각귀의 경우에 도깨비 설화로 널리 알려진 ‘인간에게 씨름을 거는 도깨비’의 다리가 외다리라고 알려진 점이나, 농경신과 역신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중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온 수목 정령 숭배 사상과 한국의 산신신앙을 종합해 볼 때, 독각귀로부터 현대의 도깨비상으로 유포되고 발달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한·중·일의 외다리 요괴들은 민담이나 설화에 따르면 여성 요괴로 나타나기도 하고, 남성 요괴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다양한 형상과 성격으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변화해 왔다. 따라서 한국 도깨비의 기원으로 보이는 독각귀에 대하여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에 이와 유사한 요괴가 있는지를 살펴보아, 비교 분석하는 것은 한국적 요괴로서의 도깨비가 가진 특성을 명확하게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독각귀 설화
독각귀는 중국에서는 주로 ‘산소(山魈)’로 불리며, 본래 ‘월인(越人)’이라고 불리는 중국 남부 소수민족의 설화 속 존재였다. 중국 남부에서 독각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춘추시대 고전인 『국어(國語)』 「노어(魯語)」 편과 고대 중국 지리서 『산해경』에 나오는 ‘기(夔)’의 이야기이다. 『산해경』의 기록에 따르면 ‘기’는 동해 7,000리 안쪽에 있는 유파산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소처럼 생긴 괴물인데, 몸이 푸르고 다리가 하나이며, 이 ‘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반드시 비바람이 몰아친다고 하여, 『산해경』에는 외다리의 소와 같은 동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노어」편에 따르면 “기는 외다리이며, 월인들은 이를 ‘산소(山繅)’라 했다. 사람의 얼굴에 원숭이의 몸뚱이를 하고 인간의 언어로 말을 하는 동물이며, 외다리의 요괴”라고 한다. 또한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는 기가 ‘목석(木石)의 괴이(怪異)’라고 여겨져, 망량(魍魎)과도 동일시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산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독각귀는 이후 중국의 역대 문헌 속에 산조(山趙), 산정(山精), 산귀(山鬼), 산소(山繅), 산도(山都)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북송의 민간신앙을 잘 드러내고 있는 소설집인 『이견지(夷堅志)』의 「강남목객(江南木客)」에 “양자강 이남에는 산이 많고 사람들은 거기 귀신이 산다고 믿는다. 그 신은 괴이해서 험한 바위나 수목에 깃든다. 각 동네마다 있어서 이절(二浙), 강동(江東)에서는 오통(五通)이라고 하며, 강남이나 민중(閩中)에서는 ‘목객(木客)’이라고 한다. 외다리일 때는 독각오(獨脚五)라고도 한다. 다양한 이름은 여럿이지만, 실은 하나이며, 그 내력을 생각하면 이른바 목석의 괴, 기, 망양 그리고 산소가 그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依田千百子, 1986)
일본에서 중국민속학의 대가로 알려진 히데타가 오츠카(大塚秀高)에 따르면, 『이견지』의 독각귀는 다리가 하나인 ‘독각오통신’이고 여색을 좋아하는 ‘호색오통신’이며 강서와 복건성 중부지역에서는 ‘목하삼랑신’으로 칭한다고 분석하였다. 독각귀의 가장 큰 특징인 외다리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 신화의 신수(神獸) 중 하나인 기(夔)나, 독각오통(独脚五通)이라는 별명을 가진 중국 남부의 오통신(五通神) 등 외다리 신 또는 요괴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수목이나 절름발이를 모방했다는 설, 남근숭배설 등 다양한 설이 전해진다. 이 요괴의 모양은 사람과 비슷하며 가장 큰 특징이 다리가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눈에 띄는 특징으로서는 일본의 오니와 유사하나 뿔이 없다는 것,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것, 또한 다리가 역방향으로 붙어 있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요괴는 한국과 중국에서만 언급된 것은 아니며, 일찍이 일본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일본의 에도시대 화가 토리야마 세키엔(鳥山石燕, 1712~1788)이 그린 『곤쟈쿠가즈조쿠햑기 상편, 아메(今昔畫図続百鬼・上篇・雨)』 중에서, ‘산정(山精)’의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그림 속에 쓰인 해설문에는, “중국의 안국현에 산귀(山鬼)가 있어. 사람 같은 모습이지만 다리가 하나밖에 없어. 벌목인의 소금을 훔치고, 게를 구워 먹는다고 영가기4)에 쓰여 있네.”라고 적어, 중국에 산다고 전해지는 산의 요괴임을 알 수 있으며, 묘사된 그림에서도 게를 손에 든 채 서 있다. 또한 일본 군마현의 산속에서는 이 외다리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존재하고 있다. 외다리의 형상과 게를 좋아하는 특징으로부터, 이 독각귀가 중국에서 산소로 불리며, 일본에서의 산정, 한국에서의 도깨비와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崔豊韜, 2021) 그런데 이들에 대한 민담과 설화는 여러 세대와 지역으로 전파되어 오면서 다양한 양상을 띠며 전승되어 왔다.
먼저 중국의 ‘산소’는 밤중에 마을에 내려와 자주 사람을 덮치기도 한다고 한다. 그 모습은 잘 익은 참외 같은 색깔의 얼굴을 가지고, 눈은 번쩍번쩍 빛나며, 크고 날카로운 쟁반 같은 입을 가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되면 그 인물을 노려 죽인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의 독각귀로 알려진 ‘산정’이나 ‘산괴’와 동일시되기 때문인지, 게를 좋아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중국의 ‘산소’는 여성으로 변하는 요물로서도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설화를 살펴보면, 중국 건주(현 복건성에 속하는 옛 지역명)에서 전해오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동네에 나무를 해서 살림을 꾸려가는 홀아비가 있었는데 산에서 한 부인을 만나서 함께 지내다가 돌아가려 하니, 그 여자가 나무 두 바구니를 해서 지고 스스로 따라왔다고 한다. 그의 가족 모두가 좋아했으나, 누이동생만은 그 부인이 외다리임을 보고 괴이하게 여겼으나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높이 떴건만 부인과 함께 잠에 든 남자가 인기척이 없자, 부모가 벽을 헐고 들어가 본 즉, 백골이 마루에 뒹굴고 그 여자의 바구니를 헤쳐 보니 모두가 사기조각과 종이 부스러기여서, 산소의 무리라고 여겼다”고 한다.(依田千百子, 1986)
외다리 요괴에 관한 이와 비슷한 일화는 일본에서도 전해지는데, ‘유키온나’라는 설녀(雪女) 설화가 주로 눈이 많은 지역인 산케이나 니가타 지역에서 많이 전해지는데, 여기서 설녀는 외다리의 흡혈귀 요괴로 묘사된다. 그런데 일본 영화나 소설로 우리에게 주로 알려졌던 설녀 이미지는 백발과 하얀 기모노를 입고 남자를 홀리는 미인으로 묘사된 설녀이지만, 이러한 설녀 이미지는 에도시대 중기 이후의 우키요에 화가들에 의해서 형성된 이미지이다. 사실, 그 이전의 일본 설화 속에서는 주로 노파이거나 외다리 요괴 등, 미인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였다. 또한 일본에서 외다리 또는 기형적인 발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산의 영물에 대한 전승은 다양한 변형을 지니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와카야마현 이토 지방에서는 눈이 내리는 밤에 외다리 아이가 날아다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유킴보’라고 불리는 원형 발자국이 남는다고 하며, 외다리 아이는 산신의 사자라고 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러한 산신으로서의 일본의 독각귀는 외다리일 뿐만 아니라, 외눈이라고도 전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신이 외다리라는 전승은 일본의 대표적인 설화집과 사료집인 『고고센다로쿠(肯構泉達錄)』, 『반세이햐쿠모노가타리(萬世百物語)』이나 『난로지(南路志)』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데, 이 신은 외눈에 외발이라고 전해진다. “도사(현 고치현 부근)의 산촌에는 산귀 또는 산부라는 외눈박이에 외다리가 있다.…외양은 70살가량의 노인과 같은데 사람과 흡사하다. 몸엔 도롱이 같은 것을 걸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다. 보통 사람의 눈에 띄는 일이 없지만, 큰 눈이 오면 길 위에 그가 지나간 자국이 남는다. 발자국이 육칠 척씩 되어 상당한 거인일 것이다.”(柳田国男, 1963)라고 한다. 이러한 일본의 독각귀에 관한 설명은 외눈에 대한 묘사만 제외하면 앞서 살펴보았던 『학산한언』과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묘사된 한국의 독각귀 묘사와 매우 일치한다.
그리고 일본 민속학의 대가인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國男)에 따르면, “외다리라는 것은 일목소승(一目小僧)의 계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괴물”이라고 한다. 일목소승은 외눈을 가진 일본의 요괴로 이마 한가운데에 눈이 하나만 있는 보주머리(까까머리)의 아이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요괴의 형상을 중국과 비교해 볼 때, 일본의 독각귀는 외눈과 외다리의 복합이 두드러져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依田千百子, 1986)
벽사의 대상이자 요물로서의 독각귀
한국의 도깨비에 관한 설화에서 도깨비는 다른 것으로 변하는 요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도깨비불’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도깨비가 불로 변화한다는 설이다. 또한, 도깨비는 요물로, 사람이 쓰다 버린 여러 도구가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도깨비가 원래의 모습을 드러낼 때는 대체로 도깨비와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이 도깨비를 이긴 후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도깨비로 변한 것을 살펴보면 인간이 쓰다 버린 물건에서 정령이 생겨 도깨비가 된 것이 대부분이다. 주로 빗자루, 홍두깨, 도리깨 등 민간에서 흔히 사용하는 것이며 주로 나무로 이루어져 있고 농기구가 많다. 그중에는 여성의 월경 피가 묻어있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때때로 땅에 오래 묻힌 돈에서도 도깨비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찍이 실학자 이익(李瀷)도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음양은 본래 일기(一氣)의 왕래이니 신(神)이나 귀(鬼)는 본래 하나이다. 기(氣)가 모여 형을 이루고 혼(魂)이 나가서 귀(鬼)가 된다. …물(物)이 오래된 것은 그 기(氣)도 오랜 것이므로 귀기(鬼氣)와 잘 감응하기 쉽고 그 귀기와 물기(物氣)는 서로 접근하여 귀기가 먼저 물(物)에 빙의(憑依)하고 그 뒤 오래되면 서로 훈화하여 하나가 된다. 독각귀(도깨비)도 아마 이렇게 생긴 것이 아닌가 짐작되고 있다”(한국민속대관, 1982) 그리하여 그는 빗자루가 도깨비가 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반드시 사람의 기를 많이 얻는 빗자루 같은 것이 괴변을 일으킨다고 논하고 있다.
중국의 독각귀 역시 불로 변화하기도 하며, “그 원형이 동물, 식물, 자연물, 인조물(기물) 등으로 매우 다양해서 생활용품 외에도 문구, 악기, 제기 등 의례에 사용하는 특수용품 등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특히 인간의 피가 묻은 장의용품 등이 변한 것도 있는데, 이것은 피(특히 여성의 월경)가 묻은 것이 도깨비가 된다는 것과 우리나라의 민담과도 일맥상통하며 역시 일본에서도 이러한 설화”가 있다.(金鳳齡, 2021)
한편 일본은 원시적 종교 속에 ‘팔백만의 신’의 관념이 있다. 이 관념의 주된 인식은 세상의 모든 것에 반드시 정령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생명 있는 동식물 이외에 인조물체나 무기물에도 적용된다. 이런 그들의 관념이 많은 요괴 이야기를 탄생시켰다고 생각되지만, 일본 독각귀 이야기에서는 특별히 인간이 쓰는 도구가 요괴가 되는 설화는 따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이는 일본에는 특별히 오래된 도구들이 버려져 요괴가 되는 ‘츠쿠모가미(付喪神)’5)이라는 개념이 따로 발달되어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독각귀가 역병을 옮긴다는 설, 역시 도깨비 설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화이다. 키리모토 토우타(桐本東太의 『중국고대의 민속과 문화』(2004)에서 중국 강남의 독각귀의 특징을 풍우를 지배하는 힘이 있으며 역병을 확산시키는 신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일본의 독각귀는 이 중국 강남의 독각귀로부터 전파되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독각귀도 역병을 옮기는 요괴로 종종 인식되어 왔다. 아오모리현의 독각귀 설화에는 12월 2일이라는 특정한 날짜에 독각귀가 동네에 온다는 설화가 있다. 사팔일이란 2월 8일과 12월 8일로 매년 2번 있는 행사인데 이는 동네 바깥에서부터 오는 내방자를 맞이하는 행사이다. 이 내방자는 귀(鬼) 혹은 일목소승이라고 하는데, 한 눈은 크고 한 눈은 작은 요괴이거나, 외눈이거나 혹은 8개 눈을 가진 이상한 할머니 등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천연두나 역병 등 나쁜 병을 퍼뜨리는 요괴이며,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바구니를 문에 세워 두는데, 눈의 수효가 많은 것을 써서 한 개밖에 없는 눈을 격퇴하려는 의도에서이다. 또 마늘이나 호랑이가시나무 등을 문 앞에 걷어두기도 한다.(打江壽子, 1977)
이처럼 병을 가져다주는 요괴로서의 면모로 인해 독각귀는 악귀를 막기 위한 벽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즉, 이런 독각귀를 나쁜 악귀로 보고 이들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벽사로서 한·중·일 삼국에서 행해진 것은 폭죽놀이다. 중국에서는 벽사의 의미로 정월에 폭죽을 울려 산소를 막고자 하며,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한국 역시 정월대보름에 불놀이나 폭죽으로 벽사를 행한다. 예를 들면, 『형초세시기』 라고 하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세시기(歳時記)에는 “정월에는 폭죽을 울려 산소(독각귀)를 막았다”라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6) 이러한 예는 조선시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조선조 말엽, 대궐 안에서는 음력 섣달그믐날 궁중에서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행하던 궁궐 의례로서, 대포를 쏘았는데 이를 연종포라 하였고, 이러한 행사를 대나 혹은 나희라고 하였다.(한국민속대관 「儺禮」편, 1980)
풍어신과 산신으로서의 독각귀
한중일의 독각귀는 악귀의 역할만을 한 것은 아니며, 신적인 존재로서도 민중의 생활 속에서 영향을 미쳐왔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독각귀의 기원으로 알려진 중국의 신화의 신이자 요괴인 기(夔)는 용신(龍神)의 일종으로 비의 신이며 강우와 관련된 자연의 신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독각귀는 이후에도 많은 문헌 속에 날씨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져 왔다.7)
한국의 도깨비 역시 바람을 다스리는 것으로 믿어져 왔는데 가장 유명한 요괴는 제주도의 풍어신(豊漁神)으로 알려진 도깨비 설화이다. 그것은 역병신(瘟神), 단조신(鍛造神), 부락신, 재물신 등의 명칭과 복잡하고 다채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풍어신은 해녀와 미녀를 좋아하고 인체에 붙어 병들게 하는 품행이 좋지 않은 남신이다. 병마가 붙었을 때는 ‘영감제(令監祭)’를 할 필요가 있다. 가무와 음식으로 초대한 후 그것을 짚으로 만든 배에 놓고 바다로 흘려보낸다.(崔豊韜, 2021) 이처럼 바람은 특히 어부들의 삶에 위협적이므로 어로와의 관계가 밀접하며, 이 때문에 한중일 모두에서 독각귀는 어로에 관계하는 신으로서 받들었다. 또한 독각귀는 농경신으로 농경에 관계하는 산신으로 받들어지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독각귀는 육조 이전의 독각귀와 육조 이후의 다양화된 독각귀로 분류할 수 있으며, 전자는 ‘산민신앙에 의한 산신’과 ‘농민신앙에 의한 논신’으로 분류된다. 즉, 산에 진좌(鎭座)하여 산을 황폐하게 하여 재앙을 가져오는 한편, 때때로 논으로 내려가 농작물에 혜택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육조 이후에는 독각귀는 단순한 산신에 그치지 않고, 부를 가져다주는 재신이나 여성을 덮치는 호색적인 괴물로 묘사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한민족의 남하에 의한 소수민족의 신앙에의 영향, 또 산민의 생활권의 이동과 그에 따른 생업의 변화가 이유로 생각된다.(三木麻奈美, 2010) 이러한 점은 수목 신앙과도 관계되는데 이는 특히 중국에서는 독각귀가 그 수명이 매우 길어 나무로 변한다고도 한다. 이러한 설화는 역시 한국에서도 도깨비가 산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연관성이 감지되며, 성호 이익 역시 도깨비의 유래를 식물로 보았고 특히 나무가 도깨비의 주요 출생지로 인식되었던 것을 보면 확실히 한국의 도깨비도 수목 신앙과 연관된다고 보인다.
일본에서도 독각귀와 농신의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신이 있는데, 풍어, 상업 번창, 풍요를 초래하는 생업의 신으로 모셔지는 일본의 대표적인 민속신 에비스(エビス)이다. 에비스도 불구신으로서의 성격이 현저하다고 하는데, 주목할 것은 풍어신이나 상업신으로서의 에비스신에게서는 불구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농신으로서의 에비스신에게서는 편족 혹은 양다리가 부자유한 불구의 성격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특히 다리와 눈이 부자연스러운 에비스신의 설화는 시즈오카현의 청수시에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다.(田中宣一, 1984). 이처럼 외다리 요괴로 알려진 중국의 산소나 일본의 산정은 한국의 도깨비와 같이 비바람이나 역병과의 친연성, 또는 산과 바다의 사신적인 존재로서 풍어나 농경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다양한 요괴문화와 민족 감성
도깨비의 기원으로 생각되는 한·중·일의 독각귀 특성은 공통으로 외다리의 요괴인 동시에 수목 정령에 기반을 둔 농경신이라는 특성과, 인간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양면성이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성을 가진다. 그러나 한국의 도깨비는 인간에게 잘 속는 어리숙함과 내기를 좋아하는 특성 등으로 유독 인간과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는 중국과 일본, 특히 일본 독각귀의 경우 설녀(유키온나)의 설화와 융합되어, 여성으로 둔갑한 후 남자를 잡아먹는 외다리 요괴 설화가 널리 전해져 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덩치가 우람하며 인간에게 잘 속는, 그래서 풍어신으로서 모셔질 때조차 ‘김 서방’으로 불리는 한국의 도깨비는 중국과 일본의 독각귀와는 다소 차별적 특징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중국이나 일본에는 다양한 요괴 설화가 분화되는 양상을 보여, 그 속에 해학적인 면모를 가진 여러 요괴들도 존재하므로, 한중일의 요괴 설화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도깨비가 중국과 일본의 요괴와는 다른 존재로 나름의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 테면 유독 한국의 도깨비 설화에서는 고대부터 인간을 살해할 만큼 사악한 면모보다는 인간의 꾀에 넘어가 초자연적 힘을 이용당하는 미련함을 보이거나, 외다리로 잘 넘어지면서도 씨름하자고 조르는 악동 같은 면모가 부각되어 왔다. 또한 인간들의 요구로 하룻밤 만에 다리를 놓아주는 등의 친근한 특성이 후대로 내려갈수록 확산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것은 아무래도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서 거대한 자연환경과 함께 신비함과 공포를 주는 중국의 요괴나, 차가움, 비애, 애상 등의 감성이 두드러지는 일본의 요괴문화와 비교할 때, 유머스러움, 친근함, 해학 등 한국인이 가진 독특한 민중적 감성이 도깨비 민담과 설화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오랜 기간 시⋅공간을 넘어 우리 민족의 신앙과 상상 속에 전승되어 온 도깨비의 실체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마치 예술이나 게임에 관한 개념들이 ‘열린 개념’이라는 시각에서는 한 때 정의가 불가하다고 이야기되었듯이, 도깨비란 개념 역시 고대 동아시아의 초자연적 현상이나 존재로부터 유래되어 각각의 시공간 속에서 살아 온 다양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제각기 다른 열망과 사상, 감성들이 중첩되어 가면서 나름의 다양한 특질들로 구체화 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민속 신앙 속의 도깨비를 정의한다는 것은 그 민족의 감성과 시대별 사상을 밝히는 적절한 매체가 될 수 있으며, 오늘날 창조적인 민족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문화콘텐츠의 개발에서도 탁월한 소재가 될 것이다.
저자 소개
신나경(nakyungs@pusan.ac.kr)은
현재 부산대학교 조형학과 교수이며, 동경대학교 미학예술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민예론, 한일비교미학, 요괴론, 일본미학 등의 분야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으며, 한국의 미론과 한중일 공예이론에 관한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우타가와 구니요시(歌川国芳)의 우키요에를 통해 본 에도시대의 골계와 풍자”(2023) 와 공저 『동아시아 문화와 한국인의 미의식(2017) 등 한일미학 관련 다수의 논문을 출판하였다.
1) 중국의 포송령(1640-1715)이 산둥에서 지은 기담 모음집으로 모두 12권이다. 요재지이의 요(聊)자가 산동성 서부의 현재 랴오청(聊城)시의 요자를 취한 것이며, 영화 「천녀유혼」으로 유명한 섭소천 이야기의 출전도 바로 이 책이다.
2) 얼굴은 사람이며 몸은 짐승모양을 하고 사람을 잘 홀린다는 도깨비.
3) 지괴류(志怪類)는 기이한 일을 기록한 이야기 모음집을 말함.
4) 절강성 영가현(永嘉縣)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기록한 책.
5) 물건이 괴이한 존재로 변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도깨비와 유사하나, 일단 무생물이 츠쿠모가미가 되려면 도깨비에 비해 매우 긴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한국의 도깨비는 생산자, 익살꾼 같은 이미지인 반면 츠쿠모가미는 순수하게 위험한 요괴 이미지이다.
6) https://anachrism.hatenadiary.com/ 참조(검색일 2024.02.21.)
7) 중국 한 대의 소설 『신이경(神異經)』에 의하면 독각귀는 날씨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며, 청대의 『총우헌필기(聰雨軒筆記)』에서도 임안(臨安)을 무대로 날씨를 다스리는 요괴 이야기가 있다.
참고문헌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1980. 『한국민속대관』 서울. 고대민족문화연구소 출판부.
- 王艶. 2019. “제주도 令監 신앙과 중국 江南 五通神 신앙 비교 연구”, 제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이혁진. 2023. “도깨비에게는 뿔이 없었을까:도깨비 뿔 담론으로 본 한국학 방향에 대한 고찰”, 한국학연구 85집, 89-132.
- 임동권. 1971, 『한국민속학논고』. 집문당.
- 金鳳齡. 2021. “東アジアの視点からみるトケビ.” 日本言語文化 제14호, 73-79.
- 田中宣一. 1984. “エビス神の一側面 -不具神傳承についてー.” 日本常民文化紀要, 10(1984-12.), 169-184.
- 打江壽子. 1977. “コト八日” 日本民俗學 107 號, 東京 : 日本民俗学会, 21-26.
- 依田千百子. 1986. “妖怪도깨비와 韓國의 民俗宇宙” 한국민속학. 1986.
- 三木麻奈美. 2010. “去来する山神 : 南中国における独足鬼の例より”(レポート) 79巻、3号、三田史学会, 119-120.
- 崔豊韜. 2021. “東アジアの妖怪像中国の妖怪像の変化と他国の妖怪像に与える影響,” 宝塚大学大学院学位請求論文.
- 柳田国男. 1963. 『定本柳田国男集』 第四巻, 筑摩書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