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와 아시아 자본주의: 중국과 한국의 경험

198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을 우선 순위로 삼은 아시아 국가들은 국경과 시장을 개방하여 노동력과 자본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 일부 국가는 해외 디아스포라를 경제 발전의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했다. 디아스포라 구성원들 또한 민족적 고국을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이와 같은 민족적 고국-디아스포라 관계가 경제주의적으로 (재)설정되면서 아시아 국가들은 서로 얽혀 통합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아시아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를 '동포적 경제 통합'이라 부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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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한성대학교)

아시아 자본주의와 국가(민족적 고국)-디아스포라 관계

탈냉전과 세계화의 시대에 경제 발전을 첫 번째 책무로 간주한 많은 국가들은 연결되고 개방된 시장에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국가들은 과거의 이념적인 적을 자신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상당한 효용성을 지닌 자원으로 인식하고 활용했다.

아시아 자본주의의 특징을 설명하는 모델 국가로 중국과 한국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비록 자본주의 체제로 볼 수는 없지만 탈사회주의 체제전환을 통해 경제 규모가 세계 2위인 국가로 발전했다. 한국은 정치적 및 경제적 근대화를 통해 선진국 반열에 오른 거의 유일한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이유에서 1980년대 이후 이 두 국가를 사례로 한 아시아 자본주의(또는 경제 발전)에 대한 연구는 그것의 작동 메커니즘, 구성 요소, 북미/유럽/남미 등 다른 지역과의 차이, 전망 등 다양한 측면에서 무수히 많은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필자의 관찰에 따르면, 이렇게 많은 관심과 연구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과 디아스포라의 관계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디아스포라 현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연구자들이 이 관계에 주목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대부분은 이산된 사람들의 감성(민족성과 소속감), 이동의 역사와 경향성(이출, 귀환, 재이주 등)에 주목하고 있을 뿐, 민족적 고국(ethnic homeland)과 디아스포라의 경제주의적(또는 발전주의적) 관계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디아스포라의 역할에 주목하는 연구도 있지만 1 국적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보다 넓은 차원의 (비교)사회과학적 시야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일종의 방법으로서 국가-디아스포라 관계는 ‘디아스포라와 자본주의’라는 사회(과)학 고전 명제를 소환함으로써 1980년대 이후 아시아 경제 발전의 경험을 조망하는데 유용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중국이 재외동포와의 관계를 매우 적극적으로 재설정했고, 한국도 비슷한 시기에 재외동포와 제도적으로 더욱 밀접해졌기 때문이다. 국가-디아스포라 관계의 재설정은 중국과 한국이 경제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마치 약속한 듯이—공동으로 채택한 변화 중 하나였다.[i]

 

탈사회주의 전환의 중국과 디아스포라

개혁개방 초기부터 중국정부는 홍콩, 마카오, 대만 등 지역의 디아스포라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했다. 1979년, 덩샤오핑이 외국자본을 유치할 때 화교 자본도 중요한 유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정부의 디아스포라 자본에 대한 첫 공식 입장으로 해석되고 있다. 1983년, 중국은 화교, 홍콩/마카오/대만 동포들이 중국에 투자할 때 특별 혜택을 부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84년에 후야오방은 재외동포들이 중국의 현대화 건설, 조국통일, 중국의 해외 영향력 강화, 그리고 외국 친구들과의 연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시중쉰은 재외동포의 경제 규모가 약 2천억 달러이며, 그중 10%만 유치해도 현대화 건설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아가 그는 재외동포 중에는 과학기술자, 관리자 등의 인재가 많기에 중국정부는 재외동포의 대륙 투자에 혜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 지도자들의 이러한 의지는 구체적인 정책으로 이어졌다. 중국정부는 1985년에 ‘화교투자우대규정’을 제정하여 화교 기업가들이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경영하거나 국영기업 또는 집체기업과 합자의 방식으로 기업을 경영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1990년에 이 규정은 ‘화교, 홍콩, 마카오 동포 투자 규정’으로 대체 및 확대되었다.

디아스포라 자본을 유치하는 과정에 중국정부가 해결해야 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두 가지를 꼽자면, 첫째는 재외동포의 대다수가 외국적 동포인 화인이었기에 이들의 중국 투자와 중국 국적인 화교의 투자를 동일시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중국정부는 화교와 화인은 국적이 다르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지만 민족적 정서와 중국과의 관계 차원에서 화인과 외국인을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라고 보았다.[ii] 둘째는 디아스포라 자본이 중국에 진출할 때 어느 지역에 투자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1982년 덩샤오핑은 중국정부가 광둥성과 푸젠성에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한 핵심 이유가 해외 및 홍콩, 마카오 동포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리적 환경에서 출발하여, 선전은 홍콩, 주하이는 마카오, 산터우는 동남아시아 차오저우인이 많고, 샤먼은 해외에서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민난인들이 많은 것이 주된 이유라고 말했다. 즉, 초기에 지정한 경제특구는 재외동포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대만 자본의 유치에도 적극적이었다. 1983년에 ‘경제특구투자특별우대방법’을 제정하여 대만 자본이 경제특구에 투자할 경우 소득세와 토지사용료 등을 부분적으로 면제했다. 하이난성을 비롯한 경제특구의 외부에 투자하는 대만 자본에 대해서도 이 정책을 적용했다. 1988년에는 ‘대만동포투자규정’을 제정하여 대만 자본을 중국의 어느 지역이든 투자가 가능하게 했다. 연해 지역 도서와 일부 지역의 토지개발 사업에도 진출이 가능했다. 1994년에는 ‘대만동포투자보호법’, 1999년에는 ‘대만동포투자보호시행세칙’ 등을 제정하여 대만 자본의 중국 내 투자 활동을 보장하고 대만 기업가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재외동포 업무를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중국정부는 전담부처인 국무원교무판공실(国务院侨务办公室)을 설치했다. 계획경제 시기에 위원회였던 이 기관은 1978년에 정식으로 국무원의 장관급 부처가 되었다. 교무판공실은 화교(재외국민)를 정책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재외동포와 관련한 포괄적 사업(특히 사회문화적 측면)을 주도하고 있다. 또한 지방정부에도 교무판공실을 설치하여 재외동포 업무 수행을 위한 체계적인 조직을 구성한 상태다.

 

중국의 외국인 투자와 디아스포라

이러한 정책 노력으로 중국은 디아스포라 자본을 대규모로 유치할 수 있었다. 1984년부터 1992년까지의 기간 동안, 전체 외국인 직접투자(FDI) 중 홍콩 및 동남아시아에 거주하던 재외동포 자본의 비중은 70%에서 90%까지 달했고, 1992년부터 2004년까지는 작게는 40%, 많게는 70%를 차지했다(1990년대 이후 한국, 일본, 북미, 유럽 등 지역에서 중국으로의 투자도 증가했다). 대만 출신까지 고려하면 재외동포 자본의 비중은 더욱 커진다(Mainland Affairs Council of Republic of China). 이렇게 유치된 자본의 대부분은 동남연해지역에 집중되었다. 특히 광둥성과 푸젠성의 외자유치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다.[iii]

중국정부는 막강한 재력을 과시하는 디아스포라와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고안했다. 그중 하나가 세계화상대회를 중국에 유치하는 것이었다. 세계화상대회는 1991년에 싱가포르(싱가포르, 홍콩, 태국 화인 상회 주도)에서 개최되었고, 그 후 매 2년마다 대회를 개최했다. 중국은 제6차 난징대회와 제12차 청두대회를 개최했다. 난징대회는 중국이 WTO에 가입한 2001년에 개최된 만큼 경제적 및 정치적 의미도 남달랐다. 난징세계화상대회에는 주룽지 총리와 리루이환 정협주석이 축사를 했고, 2013년 청두 세계화상대회에서는 시진핑 주석과 위쩡성 정협주석이 축사를 했다. 이는 중국정부가 재외동포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윗줄 1991년 제1차 세계화상대회(좌)와 1차 대회에서 연설하는 리콴유 총리(우), 아랫줄 2001년 제6차 난징 세계화상대회에서 주룽지 총리의 축사(좌), 2013년 제12차 청두 세계화상대회의 위쩡성 정협주석(우)
출처: 싱가포르중화총상회(https://www.sccci.org.sg/), 세계화상대회(https://www.wcecofficial.org/)

 

중국 기업의 해외 진출과 디아스포라

중국은 디아스포라 자본을 유치하는 데만 몰두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이 해외에 진출하는 과정에서도 그 지역의 재외동포들이 큰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다. 2000년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수출입 규모는 모두 급격하게 증가했다. 중요한 소비자이자 중개자로 역할 한 재외동포들이 중국 상품의 동남아시아로의 수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남아시아 시장에 진출한 중국산 제품은 주로 저가의 생필품 위주였는데, 이런 생필품은 재외동포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판매되었다. 제품들은 오프라인 매장뿐만 아니라 신규 유입된 중국인 이민자와 상인들의 초국경 무역을 통해 유통 및 판매되기도 했다. 올드커머 화인에 추가로 뉴커머 화인이 증가하면서 동남아시아 국가의 중국산 생필품 수요는 꾸준히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제조, 에너지, 채굴 등 분야의 기업들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는 과정에도 재외동포가 유대 역할을 했다. 중국의 자본과 상품은 디아스포라를 매개로 삼고 매우 효율적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 전환의 한국과 디아스포라

1990년대 초, 한국정부는 외국인 노동력 정책의 시작이라고 불리는 산업기술연구생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그 후 이 제도는 1998년의 연수취업제도와 2002년의 취업관리제도로 이어졌다. 한편, 외국인 노동력 정책보다 더 큰 변화는 재외동포 정책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부터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이전까지, 한국의 재외동포 정책은 주로 미국, 일본, 유럽 등 지역의 동포들이 해당되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선언’ 이후 재외동포 정책은 크게 변화했다. 이 선언으로 북한 출입이 가능했던 재외동포도 남한으로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더불어 한국은 1990년대 초에 소련(러시아), 중국, 그리고 베트남 등의 국가들과 수교했다. 1980년대까지 한국이 이른바 자유주의 국가들과 경제적 분업 관계를 맺었다면, 1990년대부터는 체제 전환의 (구)공산권 국가들과 정치외교적 관계는 물론 생산과 교환의 경제적 관계까지 새롭게 맺었다.

(좌) 해외동포 자유 왕래를 허용한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 / 출처: MBC
(우) 1997년 10월 새로 발족한 재외동포재단 간부들과 접견한 김영삼 대통령 / 출처: 한국정책방송원 영상역사관

1995년에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추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96년에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이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오사카에서, 1996년 LA에서 동포들에게 재외동포재단을 설립하여 재외동포와 관련된 사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결과가 1997년의 재외동포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는 한국과 재미동포 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 방문 이후인 1999년에 (사실상) 재미동포의 ‘시민권’ 요구와 국민이 이행해야 할 의무를 절충 수용한 법제화로써 재외동포법(‘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재외동포법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 해외로 이주한 동포만 재외동포로 규정하면서 중국, CIS, 그리고 대부분의 재일동포들이 이 법에서 제외되었다(재일동포는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재외동포법의 대상 여부보다는 ‘특수한’ 사례로 인식되었다). 동법은 위헌 결정을 받았고, 배제했던 동포들을 포함하는 내용으로 2004년에 개정되었다(이 법에서 정의한 재외동포 정의는 중국의 화인 및 화교의 정의와 매우 비슷하다).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와 디아스포라

재외동포법이 개정된 이후 기존의 재외동포 정책과 외국인 노동자 정책이 상호작용하면서 2007년의 방문취업제도가 출현했다. 이 정책에 의해 중국 및 CIS 지역의 재외동포 노동력이 한국의 2차 노동시장에 편입되었다. 또한 2007년부터는 이들 중 고학력자와 전문직 종사자 등에는 재미동포에 부여했던 재외동포비자를 발급했다. 2009년부터는 한국인이 기피하거나 고용이 어려운 업종에 장기 근속한 경우에 방문취업비자에서 재외동포비자로 전환이 가능해졌다. 재외동포 노동력과 대조적으로 비동포 노동력은 2004년에 제정된 고용허가제도의 적용 대상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으로 인해 중국 및 CIS지역의 동포 노동력은 방문취업제도와 재외동포법 적용 원년인 2007년의 약 26만 명에서 2019년의 약 71만 명으로 증가했다(2020년에는 약 65만 명; 2007년 이전에는 재외동포 노동력도 상당수가 고용허가제의 적용을 받았다). 비록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소폭 감소했지만, 이 감소세는 이동 규제가 완화되면서 점차 줄어들고 있다. 비동포 노동력이 대규모로 유입되기 전까지, 한국의 외국인 노동력의 대다수가 재외동포 노동력이었다. 전체 외국인 노동자 중 재외동포 노동자는 많은 경우 70% 이상을 차지했고, 현재는 약 50% 미만인 것으로 추산된다.[iv]

2007년 방문취업제 신청 첫날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몰린 재외동포들
출처: 연합뉴스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과 디아스포라

한국은 해외 진출 과정에서도 디아스포라를 중요한 시장 및 협력 파트너로 간주했다. 일례로, 1990년대에 이미 연변은 한국 상품의 중국(동북) 집산지 역할을 했다.[v] 한국 기업의 제품들이 연변에 수출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뻗어 나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의 중국 진출에도 연변이 활용되었다. 1994년부터 중국이 프로축구를 시작하면서 기존에 지방정부 주도로 운영되던 시스템을 기업 후원의 방식으로 변경했다. 중국 프로축구의 초창기에 삼성은 연변축구팀의 후원 기업이 되었고 축구팀은 길림삼성FC라는 이름으로 1부리그에서 뛰었다. 당시 이 팀은 외국기업이 후원한 첫 번째 프로축구팀 중 하나였다. 또한 1995~1996년에는 현대가 후원 기업이 되면서 축구팀의 공식 명칭은 연변현대자동차FC가 되었다.

최근 한중 간의 무역이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협력 관계는 계속되고 있다. 2022년, 한국무역협회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공동으로 경제협력교류회를 개최했는데, 행사 홍보 프로그램에는 “중국시장 진출, 한류 유통의 원조 연변을 테스트베드로 활용하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한국무역협회). 이와 더불어 중국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로의 한국상품 진출도 활발해졌다. 2000년 이후 경제 교류가 더욱 증가하면서 한국의 패션, 뷰티, 의료 등의 제품과 서비스가 선도적으로 중앙아시아 시장에 진출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기계제품, 컴퓨터, 자동차 부품, 식품, 생필품 등의 수출도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현지의 고려인 동포들도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vi]

제21차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세계한상대회)
출처: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https://wkbc.us/)

한국정부는 재외동포 기업가들과의 관계도 돈독하게 하고자 했다. 싱가포르에서 개최한 세계화상대회와 중국정부가 재외동포 기업가들과 구축한 경제 관계에서 영감을 얻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와 미주한인상공인단체총연합회는 재외동포재단의 지원을 받아 4회의 해외한민족경제공동체대회를 개최했다. 2002년부터는 재외동포재단이 세계한상대회를 개최했다. 제1회 세계한상대회를 시작으로 거의 모든 대회에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거나 축사를 진행했다. 세계한상대회와 세계화상대회의 차이점을 보면, 첫째는 전자는 한국정부의 주도로 진행되어 왔고, 2022년까지의 모든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했다는 점이다(해외에서 개최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에 따라 2023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개최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계화상대회는 중국정부도 유치를 해야 했다. 둘째, 이 플랫폼을 통해 중국은 재외동포 자본을 유치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에 비해 한국은 주로 수출 증진과 한국기업의 해외 진출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재외동포의 역할이 계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2023년에는 재외동포청이 신설되어 기존의 재외동포재단을 대체했다.[vii]

 

동포적 경제 통합(compatriotic economic integration)

중국의 탈냉전과 세계화는 시장경제 제도를 구축하고 국내 시장을 외부 세계에 개방하는 과정이었다. 전 세계 각지의 자본이 중국을 향해 투자되어 이른바 탈사회주의적 ‘시초축적’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주었다. 출신 국가를 기준으로 외국(인) 자본에 분류되었던 자본의 상당 부분은 사실 디아스포라 자본이었다. 한국도 1960년대에 서울 서남부 지역에 수출산업단지를 조성하여 재일동포 자본을 유치하고자 했지만 중국에 비해 그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중국과 한국 모두 재외동포 자본을 활용하려는 의지나 목적은 비슷했지만, 이 자본이 실제로 두 국가의 경제 발전에 공헌한 비중과 역할은 달랐다.

한국의 탈냉전과 세계화는 시장경제 질서의 재편을 통해 ‘지속축적’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 도입한 것이 바로 중국 및 CIS지역의 재외동포 노동력이다. 이들은 출신 국가를 기준으로 분류하면 외국(인) 노동력에 속하지만 사실 상당 부분이 디아스포라 노동력이었다. 중국이 화교/화인 자본에 우대 정책을 펼쳤듯이, 한국도 비동포 노동력과 다른 경로의 정책을 통해 재외동포 노동력에게 비교적 자율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중국도 남부 지역 노동시장의 계절적 특성 때문에 동남아시아 국가로부터 재외동포 노동력을 도입했지만, 그 상대적 규모와 경제 발전에서의 공헌은 한국과 많이 달랐다.

이 두 국가는 해외 진출 과정에서 모두 중개자 및 해외 시장으로서 디아스포라를 활용한 공통점도 있다. 자국 상품, 자본, 기술 등이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과정에 재외동포들도 적극적으로 반응하기를 바랐고, 실제로 민족성에 근거한 연결망이 이 과정에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이렇게 중국과 한국은 디아스포라를 투자자, 노동자, 중개자 및 해외 시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은 첫째로, 세계자본주의 체제 또는 국제분업에서 두 국가가 차지하는 위계적 위치와 1980년대 이후 그 위치의 변화, 둘째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의 규모(지정학적 특징), 셋째로, 디아스포라의 경제적 및 사회적 지위의 격차 등의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한 결과 디아스포라는 민족적 고국과 거주국의 자본주의 제도에 동시에 포함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국가-디아스포라 관계의 시각에서 해석한다면, 아시아 국가들과 디아스포라의 상호작용이 이 국가들의 자연스러운 경제(주의)적 통합으로 이어졌다. 다른 말로, 1980년대 이후 아시아 자본주의의 한 측면은 동포적 경제 통합이었다.

요컨대 동포적 경제 통합은 국가들 간의 상호의존성을 증가시키고, 서로를 사회경제 발전의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민족적 고국과 디아스포라 간의 관계가 긴밀해졌다는 것은 세계화, 국제화, 또는 세계주의적 이상향을 추구하는 노력들이 민족주의의 강화(또는 강조)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제발전 과정의 이러한 경향이 자민족중심주의나 심지어 인종주의와 연결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또한 민족적 연결망을 통한 특정 희소 자원에 대한 경쟁적 쟁취는 자본주의가 내재한 모순의 강도를 증폭시킨다.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교류가 훨씬 많아졌는데도 문화적 갈등은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다. 이는 동포적 경제 통합으로 국가의 경제적 영토 넘기와 민족적 경계 재구축이 동시에 진행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동북아시아의 중국과 한국뿐만 아니라(실제로 일본도 일계인 디아스포라와 경제주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남아시아의 인도 역시 디아스포라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다. 신흥 경제체인 동남아시아의 베트남도 경제 발전을 위해 디아스포라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많은 국가들이 이러한 발전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동포적 경제 통합은 그 동안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아시아 자본주의 본질, 나아가 아시아적 근대성의 한 측면(경제적 이해관계와 정치/문화적 갈등이라는 포괄적인 사회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박우(parkwoo34@gmail.com)는
현재 한성대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제이주, 중국지역, 시민권 등 분야에 관심이 있다.

 


[i]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Park(2022a)을 참조하라.

[ii] 화교는 해외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재외국민), 화인은 해외에 거주하는 외국 국적의 중국계(외국적 동포)를 말한다. 그 외에 화인의 후예라고 해서 화예라는 표현도 있는데 정책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iii] 王望波(2004), 郭碧波(2006)를 참조하라.

[iv] 법무부 출입국통계연보(https://www.immigration.go.kr/immigration/1570/subview.do)를 토대로 필자 정리. 국내 동포와 관련해서는 Park(2019, 2020, 2022b)을 참조하라.

[v] 한국 기업의 중국 진출이 전적으로 재외동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신규 시장을 개척할 때 기업들은 재외동포를 ‘첫 번째’ 대상(시장)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vi] 중국 동포의 시민권 문제에 대해서는 Park, Chang, and Robert(2020)을 참조하라.

[vii] 이민청보다 재외동포청이 별다른 이슈 없이 먼저 설립된 것은 사회경제 발전의 측면에서 디아스포라 자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국민적 정서가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장벽이 낮다는 것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 법무부 출입국통계연보. https://www.immigration.go.kr/immigration/1570/subview.do
  • 한국무역협회. https://www.kita.net/asocBiz/asocBiz/asocBizCloseDetail.do?bizAltkey=202207005 (검색일: 2022. 9. 3)
  • Mainland Affairs Council of Republic of China. https://www.mac.gov.tw/News.aspx?n=2C28D363038C300F&sms=231F60B3498BBB19&_CSN=CA60F31A88AF3736 (검색일: 2021. 12. 2)
  • Park, Woo, Robert Easthope, and Chang Kyung-Sup. 2020. “China’s Ethnic Minority and Neoliberal Developmental Citizenship: Yanbian Koreans in Perspective,” Citizenship Studies, Vol. 24, Issue.7, pp.918-933.
  • Park, Woo. 2019. “The Asianization of Northeast China.” Journal of Asian Sociology Vol. 48, No. 3, pp.377-414.
  • Park, Woo. 2020. Chaoxianzu Entrepreneurs in Korea: Searching for Citizenship in the Ethnic Homeland. Routledge.
  • Park, Woo. 2022a. “Compatriotic Economic Integration in Asia: Explaining the Role of Overseas Diaspora for Developmental China and South Korea.” Journal of Asian Sociology Vol.51, No. 2, pp. 191-224.
  • Park, Woo. 2022b. “Restored Korean Ethnicity and China’s Post-Socialist Local Development in the Mid-1970s and 1980s: Yanbian Koreans in Perspective,” Korea Journal, Vol. 62, Issue. 3, pp204-233.
  • 王望波. 2004. 『改革开放以来东南亚华商对中国大陆的投资研究』. 厦门大学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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