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학(월곡고려인문화관)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의 기원과 시작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은 러시아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강제이주 이듬해인 1938년 5월 15일 카자흐스탄에서 모국어 신문 《레닌기치》가 창간되면서 전적으로 이 신문에 의지하여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산술적 정의는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의 태동과 탄생을 괄호 안에 넣어버리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의 발전과 분화까지도 의식의 지평 너머로 밀어내버리는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모든 사회적 현상이 그렇듯이 한글문학도 강제이주 이전에 그들이 연해주에서 일구어낸 모든 문학적 산물과 이음새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일단 주지해야 할 것은 고려인 한글문학이 소비에트 국가 이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 이념의 우산 아래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문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는 장차 고려인 한글문학이 러시아 목각인형 마트료시카처럼 다중의 제약에 갇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소간 편향된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고려인 한글문학이 태동하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이후 5년간 시베리아에서 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다 끝난 뒤 소수민족의 문화적 자치를 폭넓게 허용한 러시아 혁명정부의 정책에 기반하여 1923년부터 고려인사회에 모국어 문화예술 및 사회주의적 교육계몽 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 가까운 1923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봉》이라는 모국어 신문이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일찍부터 한글문학에 주목하고 다양한 작가들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적절한 평론으로 그들의 창작활동을 견인하면서 한글문학을 태동시켜나갔다. 1933년 10월 3일에는 역사적인 ‘문예페이지’란을 개설하여 주요 작가 대부분을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발아하여 싹을 틔우던 한글문학은 한반도에서 카프(KAPF)문학을 선도하던 작가 포석 조명희가 1928년 8월 소련 연해주로 망명하자 획기적인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조명희는 망명한 해 11월 7일 《선봉》신문에 항일저항시 「짓밟힌 고려」를 발표했는데 이 시는 연해주 일대 모든 고려인의 심금을 울리며 단숨에 고려인 시문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1) 이후 포석은 다양한 작품활동과 평론활동, 교육과 강연을 통해 다수의 제자를 길러냈으며 1934년에 『로력자의 고향』, 1937년에 『로력자의 조국』이라는 두 권의 사화집을 발간했다. 이렇게 그는 형식과 내용과 요건을 온전히 갖춘 한글문학을 사실상 출범시켰고 그래서 고려인 한글문학의 시조로 불리게 되었다.
그밖에도 1928년 3월 16-17일 해삼현(블라디보스토크) 공청회 간부회 주최로 열린 제1회 해삼위 고려인 예술경쟁대회에서 블라디보스토크 9년제 조선중학교 학생 연성용이 희곡 「승리와 사랑」으로 1등 상을 받았는데 이는 토박이 고려인이 외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정한 수준을 갖춘 문학작품을 생산해냈다는 점에서 진정한 고려인 한글문학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또 당시 한문학의 재사였던 《선봉》신문의 초대 주필 리백초는 새 문예운동의 발기자로 나서서 고려인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막심 고리끼(М. Горький)는 1928년 9월 8일 친히 《선봉》신문에 답장을 보내 고려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달성한 성과를 글로 쓰라고 격려해줌으로써 작가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처럼 고려인 한글문학은 소수민족의 문화적 자치를 폭넓게 허용한 러시아 혁명정부의 정책을 기본 배경으로 하여 1923년 3월 1일 《선봉》신문의 창간, 1928년 8월 포석 조명희의 소련 망명과 문학활동, 1928년 3월 토박이 고려인 연성용의 희곡 창작, 《선봉》신문 초대 주필 리백초의 새 문예운동, 1928년 9월 막심 고리끼의 격려 편지 등과 같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과 흐름에서 기원하였고 이를 자양분으로 하여 성장하였다. 1937년에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이후에는 정치·사회적 여건이 일거에 고려인들에게 불리하게 변했고 한글문학을 지탱해줄 물적 기반도 크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고려인 한글문학 자체는 연해주에서 형성된 형식과 내용 그대로 중앙아시아에 이식되어 전개되었다.
강태수의 필화사건과 부자유하게 전개된 한글문학
고려인들은 강제이주 당시 연해주에서 운영했던 출판사의 기자재를 모두 두고 와야 했다. 다만 《선봉》신문을 찍어냈던 ‘모국어 활자와 활자주조기’만큼은 6천 킬로가 넘는 강제이주 열찻길에 어렵게 싣고 들어올 수 있었는데, 바로 이것 덕분에 강제이주 이듬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한글신문 《레닌기치》를 창간할 수 있었고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도 이 신문에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그런데 《레닌기치》가 창간되던 당시는 스탈린 정권의 탄압정책이 절정에 달해서 고려인공동체는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고, 대중은 다중의 억압구조 속에 놓여 있었다. 물론 작가를 포함한 인텔리겐치아들은 일반 대중보다 훨씬 더 많은 압박과 박해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기를 둘러싼 지배권력의 감추어진 욕망을 쉽게 꿰뚫어 보고 그 진실을 공동체 구성원에게 공유하여 공평과 정의를 향한 움직임을 추동할 위험성을 본래적으로 지닌 자들이라는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증폭된 잉여의 의심이 한 고려인 작가에게 투사되었고 그것은 고려인 한글문학 전반에 커다란 족쇄를 채웠다. 1937년 말 어느 날 고려사범대학교 조선어문학과 학생 강태수(1908-2001)가 「밭 갈던 아씨에게」란 시를 써서 벽신문에 게재하였는데 그것이 고려인 한글문학의 물줄기를 바꾸어버린 필화사건으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강태수는 고려인 한글문학의 시조 조명희가 그 재능을 격찬해 마지않았던 전도유망한 문학청년이었다.
“밭 갈던 아씨야! / 이 가없는 벌판에 / 땅거미 살며시 기여들어 / 모두를 거무숙 물들일 즈음 / 나는 차창에 목을 내밀고 / 네가 갈던 밭과 / 네가 뜨락또르에서 내려 / 기꺼이 걸어가던 그 모습 / 다시 한번 보구지여라. // …… 밝는 날은 어제일가 그제일가? / 북두는 말없이 지평선에 떨어지며 / 마음은 너를 찾아 달음박질, / 아, 아직도 동녘은 껌껌나라, / 어서 동이 트고 날이 밝아야 우리는… ” (시 ‘밭 갈던 아씨에게’ 중에서)
이 시는 어떻게 읽어보아도 순수한 서정시임에 틀림이 없지만 당시의 엄혹한 상황에서는 후반부의 몇몇 문구들이 얼마든지 불온한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결국 강태수는 당국의 정책을 반대하고 극동 연해주를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무려 21년 동안이나 시베리아에서 유형살이와 거주지 제한 생활을 해야 했다.2) 이 사건 이후로 고려인 작가나 지식인들은 누구도 함부로 ‘조국’이나 ‘원동(극동)’이란 단어를 쓰지 못했다. 부득이하게 ‘조국’이란 말을 쓰게 된다면 반드시 그 앞에 ‘소비에트’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했다. 이후 작가들은 순수예술작품 한 편을 발표하기 위해 수령과 체제를 찬양하는 작품을 여러 편 써내는 수고를 감내해야 했다. 고려인 한글문학과 문화예술은 문명의 빛을 잃어갔다.
필화사건으로 부자유스럽게 전개된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은 더욱 가혹하게도 후속 세대 없이 한 세대로만 끝나버릴 숙명까지 떠안고 출발했다. 1938년 소련 정부가 고려인의 모국어를 비롯한 여러 소수민족 언어들을 주요 언어목록 대상에서 제외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주된 고려사범대학교는 1938년 4월부터 순차적으로 모국어 사용을 금지당하다가 9월에는 전면 러시아어 강의제로 전환되었다. 조선어문학과는 더이상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고려인 집거지에 개설됐던 무수한 일반 모국어 학교들도 도미노처럼 문을 닫았다. 중앙아시아에서 모국어 작가나 전문가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외부에서 젊은 피가 수혈되지 않는다면 한글문학은 대략 1920년 이전에 출생한 작가들, 즉 강제이주 이전에 연해주에서 창작활동을 막 시작했거나 적어도 그때 고려사범대학교 문학부 학생으로 들어갔다가 1940년 무렵에 졸업한 이들의 자연 수명이 다할 때 함께 종말을 맞이해야 할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은 이념적 제약과 정치적 압박 속에서 매우 부자유하게 출발했고 다음 세대가 없는, 그래서 미래가 없는 단일 세대 작가들만의 전유물이 되어 긴 항해에 나섰다.
작가들의 놀이터와 경작지 – 모국어 신문 문예페이지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모국어 신문사 《레닌기치》 외에는 자신들의 작품을 실어줄 다른 문화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던 관계로 신문사에 대한 작가들의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다수가 《레닌기치》 본사의 기자로 들어가 일하거나 직외기자(통신원)가 되어 생업과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다만 희곡작가들은 예외였는데, 이들에게는 신문사와 함께 고려인 모국어 문화기관의 쌍벽을 이루는 우리말 극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작품을 창작하면 이를 어김없이 신문사에 투고하여 편집부의 품평과 게재 여부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이들의 신문사에 대한 의존도도 다른 작가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한편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은 문인들이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가 매우 어려운 구조였다. 그래서 고려인 작가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 분야에서만 긴 호흡으로 풀어낸 작품을 거의 생산하지 못했고, 다수가 시, 소설, 수필, 노래가사 등을 모두 쓰는 만능작가로 활동했다. 이는 자기 작품의 원천에 깊숙이 스며들어 이야기의 스타일은 물론 형식과 내용까지 어느 정도 규정하는 공동체문화와 사회시스템의 본질을 쉽게 통찰할 수 없게 만들어서 작가들에게 한글문학의 밭을 깊게 갈아엎기보다는 표면만 훑고 지나가도록 유혹했다. 고려인 유명작가 중에 주로 소설과 희곡 창작에만 매달린 김기철(1907-1993)과 한진(1931-1993) 정도가 예외였는데 이들은 한 우물만 깊게 파 내려간 결과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미학적으로 세련된 작품을 창작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레닌기치》는 연해주에서 《선봉》신문이 그랬던 것처럼 창간 초기부터 조심스럽게 문예페이지란을 개설하여 창작에 목마른 작가들의 갈증을 빠르게 해소해나갔다. 처음에는 문예페이지가 작은 지면에 불규칙적으로 전개되었으나 점차 빈도가 잦아지고 지면이 커져 나중에는 거의 격주로 나가게 되었다. 문예페이지는 한글문학 작가들의 유일한 ‘놀이터’이자 ‘경작지’였다. 작가들은 이 ‘놀이터’에서 모국어 작품을 더 많은 독자에게 더 널리 전파하는 놀이를 즐겼고 이 ‘경작지’에서 대중을 고상한 이상으로 인도하고자 개념의 쟁기로 미지의 땅을 갈았다.
문예페이지는 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크게 활성화되었다. 신문이 복간되고도 20여 년이 지나서야 문예페이지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데에는 몇 가지 사정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신문은 초창기에 지면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문예재료를 싣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레닌기치》는 비록 모국어 신문이기는 했지만, 공산당 기관지라서 당의 사상과 이념과 그것이 이룩한 성과를 선전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했다. 더욱이 고려인은 강제이주 당한 적성민족이라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어서 나중에 상당한 정도로 표현의 자유가 주어진 뒤에도 스스로 내적인 검열을 거쳐 소련정권에 대한 충성심은 과도하게 표현하는 대신 민족공동체의 내면적인 욕구는 가능한 한 억눌러왔다. 그런 까닭에 표현의 자유가 얼마만큼 보장된 시대가 정말로 도래했음을 확실히 깨닫게 된 1960년대까지는 당과 정부의 주요 정책을 선전하는 기사를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다채로운 모국어 작품으로 채울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북한에서 숙청된 소련파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1945년부터 420여 명의 소련고려인 인텔리겐치아들이 소련정부의 명령으로 북한에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들어갔는데 그들 중에는 다수의 문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에 들어간 고려인 문인들은 언론인과 문인과 학자로 활약하면서 북한에 사회주의 문학을 정착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3) 그리고 그들은 북한에서 종파투쟁이 일어난 1955년 무렵부터 1957년 사이에 대부분이 숙청되어 돌아왔고 그들 중 다수가 1962년 무렵부터 《레닌기치》사에 기자로 들어가 일했다. 이들 중 전동혁, 명월봉, 김세일, 정상진, 림하 등은 신문사에서 줄기차게 작품활동을 전개하였고 다른 이들은 다양한 사회평론 등을 남겼다. 이들은 소련에 귀환한 뒤에 자신들의 작품을 실어줄 지면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한편 북한에 가지 않고 소련에 남아있었던 리은영, 연성용, 조정봉, 김광현, 태장춘, 김준, 김기철, 강태수, 김종세, 차원철 같은 여러 작가들은 수시로 신문에 작품을 투고하면서 모국어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었다. 그들은 부지런히 글을 써서 투고했고 신문사에는 늘 원고가 넘쳐났다. 부득불 경쟁은 치열하고 평가는 엄격해졌다.
이렇듯 스탈린 사후 소련 사회에 상당한 정도로 표현의 자유가 주어진 바탕 위에 중앙아시아와 소련지역에 있던 기존 문인들의 열망이 쌓이고 그 위에 북한에서 귀환한 작가들의 바람이 더해지고 그 열망을 실현해줄 지면이 늘자 모국어신문 《레닌기치》 문예페이지란은 확장에 탄력을 받았다. 문예페이지란은 그후 20-30년간 거의 모든 고려인 작가와 독자들을 매료시키며 무수한 모국어 작품을 발굴하고 작가들을 양성하여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의 번영에 크게 이바지했다.
젊은 피의 수혈과 한글문학 터전에 밀려온 세 번의 부흥 물결
1950년대 후반에 이르자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계에는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1세대 기자-작가들이 어느덧 중년을 넘어서고 있는데 대를 이을 젊은 세대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바로 그 무렵에 젊고 유능한 북한 출신 엘리트들이 신문사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1950년대 초에 모스크바 영화대학 등에 유학했다가 1958년에 정치적 이유로 소련에 망명한 한진(한대용), 리진(리경진), 허진(허웅배), 맹동욱, 양원식, 정추, 김종훈 같은 전도유망한 청년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한글문학에 뜻을 두고 1960년 무렵부터 신문에 작품을 투고하다가 4-5년 후에 직접 신문사로 들어가 일하면서 다수의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중에서도 한진과 리진은 고려인 한글문학을 수준 높은 미학으로 끌어올린 제2세대 선두주자가 되었다. 리진은 1960년 1월 24일에 《레닌기치》 문예페이지에 첫 시 「까라딸 강반에서」를, 한진은 1962년 10월 7일에 첫 단편소설 「찌르러기」를 발표함으로써 제2세대 고려인 한글문학의 탄생을 알렸다. 이후 한진은 아름다운 산문과 뛰어난 희곡을, 리진은 빼어난 시와 탁월한 문학 이론을 전개하며 고려인 한글문학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들과 같은 북한유학생 출신인 양원식은 1984년에 신문사에 들어가 20여 년을 일하며 다수의 시와 단편소설을 남겼고, 이들과는 다른 경로로 북한에서 소련으로 들어간 박현과 남해봉도 1970년대 중반부터 오랫동안 기자와 작가로 활동하며 훌륭한 모국어 시들을 발표했다.4) 그런데 이들은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또 그중 일부는 신문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아 《레닌기치》는 여전히 인재 부족에 시달렸다.
신문사 지도부는 사할린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사할린 한인들은 한반도에서 사할린으로 이주한 역사가 짧아 기본적으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보다 모국어를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또 사할린에는 1963년 여름까지 한인 집거지에 모국어 학교들이 널리 운영되고 있었고 한인사범대학교까지 있어서 모국어를 훌륭히 구사할 수 있는 인재가 많았다. 신문사는 사할린 한인들에게 오랫동안 구애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리하여 사할린 출신 리정희 기자가 1966년에 처음으로 《레닌기치》사에 들어간 이래 1970년대 초중반부터 윤수찬, 박경란, 우경애, 배철준, 남경자 등과 같은 젊은 인재들이 사할린에서 속속들이 ‘큰 땅’, 즉 중앙아시아로 건너갔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할린 한인들이 입사함으로써 신문사 기자의 절반 이상이 사할린 출신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들 중 리정희, 윤수찬, 정장길, 최영근, 남경자는 열정적으로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제3세대 고려인 한글문학 작가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또 이와는 별개로 다수의 사할린 거주 한인 문인들이 서신과 통신을 통해 《레닌기치》 문예페이지란에 왕성하게 작품을 투고함으로써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을 더욱 두텁고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이로써 신문사는 세대 단절이라는 최대의 어려움을 이기고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도 세대 간 맥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동안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의 텃밭에는 세 번의 부흥 물결이 밀려왔었다. 1940년대 후반에 북한에 들어갔다가 1950년대 후반에 귀환한 일단의 고려인 1세대 작가들이 신문사에 들어가거나 긴밀히 연계되어 활동함으로써 문예페이지가 활성화되고 한글문학 창작이 왕성해졌는데 이것이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 발전의 도상에 밀려온 첫 번째 부흥 물결이었다. 이후 북한 출신 유학생과 작가들이 1960년 무렵부터 신문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활동하면서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을 경이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는데 이것이 두 번째 부흥 물결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일단의 사할린 출신 기자-작가들이 신문사에 들어가 중앙아시아 토박이 선배 세대 및 북한 출신 작가들과는 다른 정체성 집단을 형성하며 왕성한 활동으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을 다채롭게 빛낸 것이 세 번째 부흥 물결이었다. 이 세 번째 물결을 마지막으로 한글문학의 부흥 물결은 더 이상 밀려오지 않았다.
한글문학작품집의 발간과 탁월한 이야기꾼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 정부는 1956-1959년 사이 고려인이 포함된 적성민족에 대한 차별을 중지하고 이들의 공민권을 회복시켜주었다. 고려인 언론과 출판계에 훈풍이 불었다. 그동안 《레닌기치》 문예페이지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충분히 축적되어 온 터라 언제든지 책으로 엮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자-작가들은 조심스럽게 사회 분위기를 살피면서 작품집 발행을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1958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조선시집』이 간행된 것을 시작으로 1964년 김준의 장편소설 『십오만원 사건』, 1971년 합동작품집 『시월의 해빛』이 출판되었으며 1990년까지 총 15권의 한글문학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이는 한글문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고려인 작가들이 분투하며 이루어낸 빛나는 결정체였다. 중앙아시아는 출판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모국어를 지키고 가꿔온 일단의 작가들이 얻기 힘든 기회를 붙잡아 그동안 축적해둔 모국어 개념과 의미의 집적물을 자신과 후세들에게 기념비적인 성과물로 내놓았던 것이다. 이는 고려인 한글문학사는 물론 한민족 한글문학사에도 빛나는 업적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간행된 한글문학 작품집 열다섯 권 중 마지막 다섯 권은 당시 작가동맹 조선어분과 위원장으로 일하던 극작가 한진이 주도하여 편찬하였다. 그가 단행본 편찬을 주도하던 시기는 그곳의 출판환경이 이전보다 나아진 상태이긴 했지만, 그동안 여러 명의 작가가 30년에 걸쳐 겨우 이루어낸 모든 작업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을 그가 3-4년 만에 홀로 해냈다는 것은 고려인 한글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집들에 저자로 이름을 올린 작가들은 예외 없이 고려인 한글문학계의 탁월한 이야기꾼들이었다. 소설집 한 권과 시집 두 권의 저자로 이름을 올린 김준(1900-1979)을 비롯하여, 종합작품집을 낸 연성용(1909-1995), 소설집을 펴낸 김기철, 희곡집을 출간한 한진, 시집을 간행한 리진(1930-2002)은 누구나 인정하는 대표적인 고려인 작가들이다. 비록 여기에 단독으로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레닌기치》에 장편소설 『홍범도』를 긴 시기 동안(1965-1966년, 1968-1969년, 1989-1990년) 연재했던 김세일(1912-1999)은 1989년에 한국에서 5권으로 된 똑같은 제목의 책을 출판할 기회를 얻었다.
한편 고려인 시문학과 단편소설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긴 강태수와 전동혁(1910-1985), 그 외 몇몇 작가들은 개인 단행본을 출간한 고려인 대표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이 닿지 않아 개인 작품집 출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밖에도 독특한 개성과 재능을 보여준 작가들이 많았지만, 이들은 신문사와 긴밀한 연계를 갖지 못했거나 그들의 창작활동 시기가 출판 가능한 환경과 맞아떨어지지 않아 신문의 문예페이지란에 이름을 몇 번 올린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한국에서 연성용, 리진, 한진, 박현, 강태수, 김해운, 양원식, 조명희 등 여러 고려인 작가들의 작품집이 다양한 시기에 걸쳐 출판되었다.
그동안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 시문학에서는 1세대 작가 조기천, 강태수, 김준, 전동혁, 주송원, 리은영, 김두칠, 김증손, 김광현, 연성용, 차원철 외 다수, 2세대 작가 리진, 박현, 남해봉, 양원식, 3세대 작가 윤수찬, 남경자, 정장길 등이, 단편소설‧소설‧수필에서는 1세대 김준, 김기철, 김세일, 전동혁, 강태수, 태장춘 외 다수, 2세대 한진, 리진, 3세대 리정희, 정장길 등이, 희곡에서는 1세대 연성용, 채영, 태장춘, 김해운, 김기철, 김두칠, 2세대 한진, 맹동욱, 3세대 리정희, 최영근 등이 두드러지게 활약했다. 그리고 평론에서는 정상진, 리상희, 우가이 알렉산드르 등이 왕성한 필력으로 오랫동안 문단을 이끌었다.5)
초원에서 저물어간 갈라파고스 고려인 한글문학
1986년 봄 모스크바에서 제8차 소련작가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 주최 측은 다민족 소비에트문학이 78개의 민족어로 창작되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거기에는 당연히 고려인의 모국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 고려인 한글문학은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6) 가장 수준 높은 모국어로만 구현할 수 있는 한글문학 작품을 이제 고려인들은 더 이상 생산해내지 못한다.
극작가 한진은 1991년 1월 1일 《고려일보》(“레닌기치”에서 제호 변경) 첫 호에 쓴 「우리 신문과 동포 문단」이라는 글에서 “문학작품을 쓸 수 있는 말은 적어도 어머니의 젖과 함께 몸과 넋에 배인 말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지금 어린애에게 젖을 물리는 그 어머니들도 우리말을 모른다. …… 모름지기 우리 재소동포사회에는 우리말 문학이 없는 진공시기가 올 것이다.”라고 예언한 바 있다. 당시 고려인공동체가 처한 현실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같이 예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교적 장수했던 까닭에 1990년대 초중반까지 창작활동을 이어갔던 고려인 1세대 작가 강태수, 2000년 첫 1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북한 출신 2세대 작가 양원식, 사할린 출신 3세대 작가 리정희, 정장길, 최영근 등은 작품의 질적 수준을 떠나 마지막까지 한글문학의 불꽃을 지펴온 이들이다. 특히 연해주 출신 1세대 작가로 1962년부터 2008년까지 무려 46년 동안 쉬지 않고 수준 높은 평론 활동을 전개했던 정상진은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계의 최후의 모히칸족이 되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은 1920년 이전 연해주 태생의 1세대 작가들이 두텁고 탄탄한 단일 작가군을 형성한 가운데 1960년대 초반에 유입된 북한 출신 작가들과 1970년대 중반에 합류한 사할린 출신 작가들의 엷은 인재풀이 더해져 1937년부터 2000년 첫 10년대 초반까지 유장하게 유지되었다. 거기에 제1세대 일부 토박이 작가들과 제2세대 일부 북한 출신 작가들의 헌신과 천재성, 그리고 제3세대 사할린 한인 작가들의 신심이 더해져 고려인 한글문학은 1980년대까지 크게 번영했다. 그러나 고려인 전체 작가들의 창작 역량은 1세대 작가들의 자연 수명 그래프를 따라 1980년대에 정점을 찍은 뒤 1990년대에 급격히 하락했다.
고려인 작가들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들은 이념적으로 경도된 정치·사회체제라는 환경과 강제이주라는 역사적 트라우마 등에 복합적으로 구속되어 자신들이 소속된 문화공동체와 자신들 삶의 물적 토대를 이루는 사회체제를 비판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을 본격적으로 길러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개인의 생존과 공동체의 안전을 위한 타나토스(금기)의 회피에만 집중하였고 따라서 작품 속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수직적 변용의 꿈을 펼쳐내지 못했다. 대신 사회의 충실한 순응자로서 체제의 정당성을 획득한 작품들을 양산하여 소수민족 고려인공동체의 수평적 안정을 지속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물론 고려인 작가들이 금기에 대한 도전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개혁개방 이전까지는 그것들이 너무나 미미하여 독자들에게 포착조차 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구조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은 갈라파고스제도의 생물들처럼 자신의 시원지인 한반도와 소통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도 70여 년 동안이나 제 역할을 다하며 생존해왔다. 단순히 생존만 한 것이 아니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며 고려인 에스닉 집단을 상호이해와 각성의 길로 인도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작가들은 디아스포라 고려인공동체를 무겁게 짓누르며 그들이 수고하며 쌓아온 모든 문화적 의미를 해체해 버리려고 위협하는 정치적‧사회적‧심리적 억압구조 아래서도 그 해체의 원심력과 맞서 싸우며 오랫동안 모국어의 가치를 드높여왔다. 이들은 모국어 작품의 창작과 보급을 통해 고려인 언어공동체 구성원들을 드높은 상호 존중의 의사교환 활동에 참여시킴으로써 그들이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성장해 나가도록 도왔다. 이는 언어공동체 구성원들을 수준 높은 모국어의 구조 속에 깊숙이 붙잡아두는 인력으로 작용하여 온갖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고려인들의 모국어가 오랫동안 보존되도록 이끈 주요 동력이 되었다.
저자 소개
김병학(bhkim7714@naver.com)은
월곡고려인문화관장이다. 1992년에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가 민간한글학교 교사, 대학한국어과 강사, 고려일보 기자, 카자흐스탄한국문화센터 소장으로 일하다가 2016년에 귀국하였다. 현재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 1•2』, 『한진전집』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와 편찬서를 출판했다.
1) 조명희의 저항시 「짓밟힌 고려」는 학생과 청장년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외우는 것을 당연히 여길 정도로 이들의 마음을 빠르게 사로잡아 이들은 공식, 비공식 모임에서 흥이 무르익으면 반드시 이 시를 낭송하며 조국 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곤 했다고 한다. 2000년 첫 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시를 외우는 노인들이 더러 남아있었다. (정상진. 2005. 『아무르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 서울: 지식산업사. 189-190.)
2) 강태수가 직접 쓴 글과 다른 이들이 쓴 글들을 보면(우 블라지미르. 1993. “교정노동수용소의 지옥생활을 거쳐” 고려일보 (10월 9일). 2.) 당시 소련당국이 강태수를 체포한 이유는 그가 창작한 시를 문제 삼기 위한 것 외에도 고려인 한글문학의 시조로 불리는 포석 조명희와의 관계를 캐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태수 지음, 김필영 해제 정리. 2022. 『소련 아르한겔스끄 수용소에서』. 서울: 민속원, 65-87.)
3) 북한에 파견된 대표적인 고려인 문인과 언론인과 학자로는 1945년 북한에 들어가 문예총 위원장을 역임하며 저명한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조기천(1913-1951)을 비롯하여 노동신문 주필을 역임한 기석복(1913-1979), 군인신문을 만든 김세일(1912-1999)과 정국록과 허학철(1922년생), 외무성 참사를 지낸 전동혁(1910-1985), 김일성대학에서 문학원론과 세계문학을 강의한 정상진(1918-2013)과 노문학을 강의한 명월봉(1915-1991)과 노어문법을 강의한 김용선(1917년생), 평양극장에서 희곡을 쓴 림하(1911-1971), 문화선전성에서 러시아어 잡지 《노바야 까레야(Новая Корея)》 주필을 역임한 송진파(1914-1990) 등이 있다.
4) 북한 유학생 출신 고려인 2세대 작가 한진과 그의 북한 출신 동료들이 신문사와 관련을 맺고 문학 활동을 전개한 내력에 대해서는 김병학의 『한진전집』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김병학. 2011. 『한진전집』. 서울: 인터북스. 687-775.)
6) 고려인 1세대 작가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운 관계로 일부 인물만 자의적으로 골라 열거했다. 작가들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 전반에 대해서는 김필영의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1937~1991)』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김필영. 2004.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1937~1991)』. 용인: 강남대학교 출판부.; 정상진. 2005. 『아무르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 서울: 지식산업사. 187-237.)
6) 고려인 2세대 작가 한진은 1990년, 중앙아시아 고려인 한글문학 마지막 작품집에 쓴 머리말에서 고려인 한글문학이 머지않아 소멸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진. 1990. 『오늘의 빛』. 알마아따: 자수싀. 3.)
참고문헌
- 강태수 지음, 김필영 해제 정리. 2022. 『소련 아르한겔스끄 수용소에서』. 서울: 민속원.
- 김병학. 2011. 『한진전집』. 서울: 인터북스.
- 김필영. 2004.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1937~1991)』. 용인: 강남대학교 출판부.
- 정상진. 2005. 『아무르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 서울: 지식산업사.
- 한진. 1990. 『오늘의 빛』. 알마아따: 자수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