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진(한양대학교)
7세기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에 점진적으로 전파된 이슬람
이슬람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중앙아시아에 전파되었을까? 핵심은 중동 아랍에서 중앙아시아로 전쟁을 치르기 위해 넘어 온 군사 원정대가 이슬람을 점진적으로 확산했다는 점이다. 초기의 정복 사업을 이끌었던 왕조는 우마이야조 (Umaiya, 661-750)였다. 이때 아랍 원정대가 최초로 정복한 도시는 부하라였다. 우마이야조의 통치자들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공격을 재차 이어가 사마르칸트 지역까지 나아갔다.
아랍 군사원정대가 중앙아시아로 넘어오기 전 까지 이 지역의 주요 종교는 기독교, 특히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마니교, 불교 등이었으며, 조로아스터교가 지배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원정대가 세력을 확실하게 확장한 시기는 8세기 중엽이었다. 아랍 무슬림들은 중앙아시아 거주민들과 연합, 중국과 전투를 벌이고 승리하였다. 당시 중국의 군대를 이끈 장군이 고선지였다. 그 유명한 탈라스전투(751)였다.
중앙아시아 이슬람이 가지는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점진적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이슬람을 신봉한 왕조가 많았다는 점도 특색이다. 특히 9-10세기 사만 왕조 시기에 이슬람 문화가 꽃피웠다. 11-12세기, 호레즘 왕조에서도 이슬람은 세력을 떨쳤다. 사마르칸트, 부하라, 우르겐치는 이슬람 학문,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13세기에 몽골이 중앙아시아를 점령하면서 차가타이 칸국을 건국하면서 이슬람화의 과정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몽골은 타종교인 이슬람 자체를 억압하지 않았다. 이후 이슬람 왕조인 티무르제국(1370-1507)이 중앙아시아를 통치하면서 이슬람화가 재개되었다. 16세기 이후에는 우즈베크 민족, 카자흐 민족이 분화하면서 이슬람이 확산되었다(정세진, 2012). 중앙아시아는 기본적으로 유목 문화와 정착 문화라는 문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는 지역 토착 문화를 이슬람 문명의 일부로 만드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슬람은 토착 문화에 혼성되어 민속 이슬람(Folk Islam), 민중 이슬람(People Islam), 생활 이슬람(Living Islam) 형태로 창출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샤머니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났다. 알-콰레지미, 아부 비루니 등 이 지역의 저명한 이슬람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유럽 과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중앙아시아 부족들은 특정 이슬람 교리를 수용하는 데 시간이 걸렸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중앙아시아 이슬람화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즉 신을 향한 믿음과 이슬람 율법에 헌신하는 경향보다는 지역 거주민들은 유목 생활 방식과 지역 전통에 더 관심이 깊었다.1)
반러시아 저항 운동의 성격을 지닌 중앙아시아 이슬람
둘째, 제정러시아 시기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반 러시아적 저항 운동의 특성을 보이기도 했다. 1865년 이후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점령함으로써 러시아는 이 지역에 러시아정교회를 건립하고 정교를 전파하고자 하였다. 제국주의의 문명 미션에 러시아정교는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이미 전통적으로 이슬람이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왔기 때문에 이슬람은 중앙아시아 거주민들의 광범위한 민족적 특성으로서 중앙아시아의 문명적 가치로 자리하고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슬람은 대 러시아 저항 운동의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바스마치’ 운동(The Basmachi Movement; 1916-1934)은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이 제정러시아와 볼셰비키 세력에 반대하여 일어난 항쟁이었다. 주체 세력은 ‘중앙아시아의 무자헤딘’이었다. 즉 바스마치 운동의 본질은 반러시아, 반 소비에트 무슬림 저항운동이었다. 서방도 일부 개입하였는데, 영국이 군사 지원을 했다. 바스마치 운동 초기에는 적군과 백군이 내전을 벌이던 시기라 백군 잔존세력이 합세하여 소련에 저항하였다.
바스마치 운동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보수적 이슬람이 강력하던 페르가나 계곡(Fergana Valley)에서 시작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중앙아시아 무슬림 종교지도자들은 볼셰비키 권력에 대항하면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볼셰비키 세력은 코칸드에서 독립을 선언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에게 군사적 공격을 벌여 약 5만 명을 살해하였는데, 바스마치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배경이 되었다. 운동 규모가 가장 컸던 때는 1918~1919년으로 한때 약 40만 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1918년에 임시정부를 세웠으며,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바스마치 운동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이는 일종의 독립 운동인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통치하던 제정러시아, 소련에 대한 저항적 운동으로 수용된다. 반러시아, 반소비에트 저항 운동에 이슬람이 투쟁의 수단으로 작동한 것이다. 이것은 볼셰비키, 즉 러시아인과 중앙아시아 무슬림 사이에는 민족적 동질성의 차이와 이념적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재영, 2011). 이 저항 운동은 무슬림 종교지도자들과 민중들이 결합하여 발생하였다. 이후 볼셰비키는 무슬림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고 바스마치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 운동은 민족의 주권 쟁취와 주권국가 건설이 그 목표였다. 바스마치 운동에 참여한 무슬림들은 종교적 정신 아래 단결하여 러시아에 저항하였다. 소련 정부는 무슬림의 재교육과 이슬람 생활 방식을 소련식 생활에 강제 적용하고자 했다. 이제 소련 정부가 통치하면서 성직자의 영향력은 격하되었으며, 종교 단체는 체제의 적대적 요소로 간주되었다. 바스마치 운동은 이교도에 대한 종교 투쟁의 성격과 민족 운동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Marie, 1989).
소련 시기 탄압받는 중앙아시아 이슬람
셋째, 소련 시기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철저히 탄압되거나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소련은 무신론 정책을 내세웠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정교,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스탈린은 체제 초기에 중앙아시아 민족 문화를 일정하게 보존하는 정책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이 소련 체제에 저항의 모티프로 작동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스탈린은 바스마치 운동을 억압하고 난 이후 노골적인 반(反) 이슬람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이슬람 정책에 대한 태도는 이슬람 사원에 대한 징세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스탈린은 이슬람 세력을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슬람 사원에 속한 토지인 ‘와크프’(Vakf)를 몰수하는 것이라고 보고 무슬림 세력을 근본적으로 제어하고자 했다(제프리, 1990). 그는 이슬람 사원들을 대부분 폐쇄하였다. 그리고 이슬람 성직자들에 대한 탄압과 숙청, 무슬림 학교와 아랍 문자사용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이슬람 사원들은 혁명 이전 1912년 26,274개에서 1942년에는 1,312개로 줄어들었다. 신학교인 ‘마드라사’(madrasah)는 대부분 폐교되었다.
스탈린 사후 해빙기에 흐루쇼프의 통치 시절, 소련 지도부는 반종교적 운동과 이슬람 억압정책의 골격을 유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반 종교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종교 활동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령을 제정하였다. 정부는 고등종교인 이슬람을 비과학적 사교(邪敎; cult)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종교 정책을 펼쳤다. 당시 소련을 ‘철의 장막’이라고 불렀는데,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전 세계 무슬림 세계로부터 사실상 격리되어 있었다. 한편 1970년대 이후 중앙아시아 이슬람에 대한 종교 탄압은 중지되었다. 이는 1960-70년대 중동아랍을 중심으로 거대한 무슬림 정치 운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중동에 대한 우호 정책을 내세우던 소련 정부가 무슬림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후 고르바초프 서기장 시절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슬람은 부흥하기 시작했다. 한편 전통적 이슬람의 부흥과 동시에 이슬람 원리주의도 부흥하였다. 페르가나 지역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대표적인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는 ‘해방당’(Hizb-ut-Tahrir), ‘우즈베키스탄 이슬람운동’(Islamic Movement of Uzbekistan: IMU). ‘타지키스탄 이슬람부흥당’(IRPT) 등이다.
1990년대 이후 중앙아시아 이슬람 원리주의의 부흥과 정부의 대처
넷째, 1991년 독립 이후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부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슬람의 부흥은 모스크의 급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면, 1987년에 키르기스스탄에서는 34개의 모스크가 있었다. 그런데 1994년에는 거의 1,000개에 이르렀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이 기간 중 모스크의 수가 87개에서 3,000개로 급증했다. 그런데 이슬람이 부흥하면서 동시에 이슬람 원리주의가 부흥하였다. 그 이유는 독립 이후 이 지역의 경제가 매우 열악해진 상황에서 신정국가 건설을 내세우는 이슬람 원리주의 이념은 매우 단순하여 일부 청년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념적 공백에 빠진 청년들에게 이슬람 원리주의는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1991년 독립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가 급진적 경향을 띠게 된 것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념적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하는 아랍 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이 유입되었다. 그런데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정부는 이슬람이 차츰 극단주의, 근본주의적 성향을 띠면서 반정부 활동을 한다고 판단하면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그들이 속한 단체에 대해 정치적 압박을 가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는 중앙아시아 내부에서 발전된 이념은 아니다. 외부에서 수입된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이슬람 원리주의는 일부 청년들을 제외하고서는 일반 민중들에게 크게 각광을 받지 못하였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 공동체 건설이나 신정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정치적 불안 요소로 작동했다. 심지어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을 겨냥한 폭탄 테러 사건도 벌어졌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이후에는 서방 국가들까지도 나서면서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발동되었다. 국제 사회에서도 중앙아시아 내에서 발흥하던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를 경계했다. 미국은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단행하였으며,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에 영토와 영공을 제공하였다. 미국 본토를 공격한 알카에다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군사 및 테러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서방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였으며, 국제사회는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중앙아시아 지역의 정치적 안정을 보장하는 것을 테러 방지의 핵심적인 요건으로 인식했다.
서방 사회만 중앙아시아 지역에 전략적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들도 테러와의 전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강대국들은 테러와의 전쟁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니었다. 이 국가들은 중앙아시아가 지니고 있는 원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활용한 측면이 있었다(Van, 2007). 이러한 국제사회의 대 이슬람 원리주의 경계를 활용, 중앙아시아 정부는 이를 정부의 안정과 지도자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추진한 측면이 있다. 일례로 타지키스탄 정부는 이슬람 원리주의 활동을 잠식하기 위한 측면으로 공립학교에서 히잡을 금지하였다. 그런데 소련 시기에도 그랬지만, 히잡 착용은 타지키스탄에서 전통적인 관습은 아니었다(Khalid, 2007). 히잡은 일반적으로 이슬람 문화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이러한 이슬람 요소가 사회에 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2001년 9.11 사건 이후 중앙아시아 내에서도 여러 어려운 상황이 겹쳤는데, 여전히 이슬람의 극단적 성향이 남아있는 국가도 있었으며, 이 지역은 고질적인 빈곤과 열악한 경제 성과로 인해 사회 자체의 불안정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에 대한 탄압과 단속을 정당화하였다.
아랄해 주변의 환경 파괴, 고질적인 빈곤, 열악한 교육과 같이 중앙아시아 지역을 늘 괴롭혀왔던 무수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비하면 이슬람 원리주의는 보다 덜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중앙아시아 정부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탄압한 이유는 소련의 권위주의 정권에서 성장한 정치가들에게 정치적 안정성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전문가 아딥 칼리드(Adeeb Khalid)는 이슬람은 “좋은 이슬람”과 “나쁜 이슬람” 또는 “온건파”와 “극단주의자”로 쉽게 분류할 수 없는 복잡한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전통적이고 관습적이다. 칼리드는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중동 아랍의 이슬람과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관점을 갖고, 문제가 되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명확하게 분별하고, 정권이 퍼뜨리는 허위 정보와 무슬림의 실제 행위를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Khalid, 2007: 203)고 언급한다.
그렇다면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렇지 않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활동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지하에서 숨어서 앞으로 활동할 날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을 수 있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다. 2015년에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고 합법적인 정당이었던 IRPT가 타지키스탄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었다. 동시에 타지키스탄 동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슬람 군사주의자들의 활동도 많이 약화되었다. 물론 IRPT 자체가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원리주의 원칙을 정당 이념에서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타지키스탄은 극심한 내전(1992-1997)시기 국가적 분열을 경험했다. 당시 내전의 핵심 세력은 ‘개혁연합세력’(The United Tajik Opposition-‘UTO’)이었는데, 이 단체에서 IRPT는 반군의 핵심 세력이었다. IRPT가 초기에 신정국가 건설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이 단체는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로 간주되었다. 정부는 내전 이후 줄곧 IRPT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단속에 나섰다. 동부 지역에서 이슬람 군사주의자들이 준동하였기 때문이다. 2020년 1월, 정부는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 회원 113명을 체포했다. 정부는 무슬림 형제단을 이슬람 급진주의 단체로 규정하였다.
IRPT는 초기 창설될 때는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 그러나 내전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 활동을 보인 적이 없었다. IRPT 집행부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의 종교적, 정치적 연대를 추진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부가 IRPT를 견제하던 일, 그리고 정부가 IRPT를 정당 등록에서 배제한 것은 정치 엘리트들의 정권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에모말리 라흐몬 타지키스탄 대통령은 IRPT의 영향력 차단에 성공했고, 독재적 권위주의 정권을 완성하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IRPT가 타지키스탄 국내에서 재건되어 활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IRPT는 형성되었고 그 정치적 과정의 경로를 거쳤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표면적으로 소멸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정세진, 2020).
타지키스탄과 더불어 1990년대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 등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우즈베키스탄에서도 현재 이슬람 원리주의는 현저히 약화되어 있다. 우즈베키스탄에 현재 이슬람 원리주의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과거 가장 강력했던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였던 IMU의 경우, 이미 오래전에 아프가니스탄 등으로 핵심 인물들이 떠났기 때문에 현재 우즈베키스탄 내에서 공식적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활동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중앙아시아 이슬람 원리주의의 현재적 불안 요소 : 탈레반의 집권
2021년 가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재집권한 탈레반 세력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현재 아프가니스탄발(發) 안보의 위험이 나타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측면은 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다시 세력을 형성해 인근 국가인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확대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다. 타지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과 약 1,300km 정도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약 144km 정도 국경이 걸쳐있다. 투르크메니스탄도 중립국가임을 선포하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타지키스탄의 경우 2000년대에도 파미르고원, 동부 라쉬트 지역 등에서 꾸준하게 이슬람 원리주의자, 혹은 이슬람 군사주의자들이 여러 차례 정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런 이유로 타지키스탄 정부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인근 국가 안보의 불안정성을 기회로 세력을 확대할까 우려하고 있다. 탈레반의 재집권은 중앙아시아 정부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안보 대책을 입안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정세진, 2023).
이슬람 원리주의가 중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지 못하는 이유
중앙아시아에서 1990년대, 2000년대 이슬람 원리주의가 국민들의 마음에 강력히 수용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지역에서 전통적 이슬람, 생활 이슬람은 이슬람 원리주의 이념과 반대적 정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하나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중앙아시아 문명을 이루는 요소이자 오랫동안 이 지역 사회에서 형성되어 온 관습에 부합하는 종교이다. 소위 ‘생활 이슬람’, ‘민속 이슬람’, ‘일상의 이슬람’(Everyday Islam), ‘병렬 이슬람’(Parallel Islam)으로 불린 중앙아시아의 전통적 이슬람은 이슬람 원리주의의 급진성과는 구별되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중앙아시아가 비교적 견고한 사회통합성을 보여주는 이유는 이슬람이 일정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시민적 통합성을 지니면서 사회 통합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슬람이 사회를 견고하게 통합시키고 소통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이슬람 원리주의는 사회 통합의 저해 요소가 된다. 이슬람은 중앙아시아의 보편적인 공동 유산이며, 중앙아시아 사회의 포괄적인 문화 정체성이다. 중앙아시아 무슬림은 가족의 의미로서도 이해되며, 공동체로서도 받아들여진다. 이는 서로 연결되는 고리로 작동된다(Schoeberlein, 1994).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문명으로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이슬람은 유일신 사상으로 종교적 기능을 담당하지만, 이슬람은 문명적 요소로 중앙아시아 거주민들에게 오랜 세기동안 수용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슬람은 중앙아시아 지역권의 공통의 정체성이요, 보편적인 삶의 양태로 작동되어왔다.
저자 소개
정세진(jsjstar2@hanmail.net)은
한양대학교 교수이다.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역사학과 대학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까지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 지역의 역사 및 지역학을 연구하고 있다. 주로 러시아 이슬람, 중앙아시아 이슬람 등 유라시아 종교문화사, 러시아와 북코카서스의 역사적 관계, 중앙아시아 민족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 관련 연구를 진행해왔다. 최근의 연구로는 『쉽게 읽는 중앙아시아 이야기: 역사·문명·이슬람』(2022), 『코카서스 국가 조지아: 역사·종교·국내정치·국제관계』(2022), 『중앙아시아 국가 타지키스탄: 일반개관·이슬람·국내정치·국제관계』(2023) 등이 있다.
1) https://en.wikipedia.org/wiki/Islam_in_Central_Asia
참고문헌
- 이재영 외. 2011. 『포스트소비에트 20년 중앙아시아의 미래 : 통합가능성과 균열 요인 연구』 서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 제프리 호스킹. 김영석 역. 1990. 소련사 서울: 홍성사.
- 정세진. 2012. 『중앙아시아 민족정체성과 이슬람』 . 서울: 한양대학교출판부.
- 정세진. 2020. “타지키스탄 이슬람 부흥당(IRPT) 형성, 활동, 그리고 그 소멸.” 슬라브학보 35권 4호, 247-279.
- 정세진. 2023. 『중앙아시아 국가 타지키스탄 : 일반 개관 · 이슬람 · 국내정치 · 국제관계』. 서울: 진인진.
- Broxup Marie. 1989. “Islam.” in Eugene B. Shirley and Michael Rowe, eds. Candle in the Wind: Religion in the Soviet Union. Washington, D.C. : 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
- Khalid Adeeb. 2007. Islam After Communism: Religion and Politics in Central Asia.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Schoeberlein-Engel. 1994. “Identity in Central Asia: Construction and Contention in the Conceptions of ‘Ozbek,’ ‘1ajik,’ ‘Muslim,’ ‘Samarqandi,’ and Other Groups.” Ph. D Diss., Harvard University.
- Van Wie Davies. Rouben Azizian. 2007. Islam, Oil and Geopolitics: Central Asia After September 11. Lanham, Maryland: Rowman & Little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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