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1. K-콘텐츠의 ‘세계적’ 성공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의 대중음악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 등 이른바 K-콘텐츠는 전례 없는 세계적 성공을 거두었다. K-팝의 대명사 방탄소년단은 2019년 팝의 성지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을 6만여 명의 글로벌 ‘아미’로 가득 채우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스타임을 입증했다. 2017년 빌보드 뮤직 어워드의 ‘탑 소셜 아티스트’ 부문 수상을 필두로 세계 대중음악 시상식을 휩쓸고 있는 방탄소년단은 지난 2021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대상 격인 ‘올해의 아티스트 상’을 수상함으로써 소위 미국의 3대 대중음악 상 가운데 이제 그래미 어워드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초연된 칸 영화제에서의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시작된 영화 <기생충>의 글로벌 수상 행렬은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미를 장식했다. 외국어 영화로서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은 이외에도 감독상과 각본상, 외국어 영화상 등 총 4개 부분에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며 한국 영화사는 물론 세계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83개 국가 모두에서 1위를 차지하고 46일 동안 넷플릭스 드라마 순위 1위를 유지하는 등 숱한 기록을 남기며 2021년 하반기 전 세계 최고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이 같은 화제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징어게임>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 시리즈 드라마 부문 작품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 주요 부문 후보에 올랐고, 출연 배우 오영수가 한국인 최초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미국 배우조합상에서도 비영어권 작품 최초로 드라마 시리즈 부문 앙상블 연기상과 남녀주연상 등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른 <오징어게임>이 또 다시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 같은 K-콘텐츠의 세계적 성공 사례를 들여다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띈다. 바로 미국에서의 성공, 특히 수상 기록을 통해 그것의 세계적 성공이 추인되었다는 점이다. 방탄소년단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미 2010년대 중반 한국을 넘어 아시아와 남미, 그리고 유럽 등 미국을 제외한 세계 전역에서 심상치 않은 인기몰이를 시작했지만, 그들이 반론의 여지가 없는 ‘글로벌’ 스타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빌보드 메인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고 미국의 인기 TV쇼와 대중음악 시상식의 단골손님이 된 2010년대 말·2020년대 초의 일이었다. 봉준호 감독 역시 유럽의 전통 있는 ‘국제’ 영화제인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으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 전부터 이미 세계의 숱한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이력을 지닌 ‘세계적’ 감독이었지만, 그에게 가장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로컬’ 영화제로 규정한 오스카에서의 작품상 수상이었다. <오징어게임>도 마찬가지이다. 각종 순위 집게 사이트에서의 1위 기록을 통해 비공식적으로만 입증되었던 <오징어게임>의 세계적 성공이 골든글로브 수상을 통해 비로소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세계적 성공의 척도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미국이 정치·경제, 특히 문화적 차원에서 여전히 세계의 중심임을 고려했을 때, 미국과 세계를 동일시하는 그러한 관습은 유효하며 또 유용하기도 하다. 하지만 K-콘텐츠의 세계적 성공 비결을 찾기 위해 그것의 어떤 내재적 요소들이 미국 대중에게 어필했는지를 분석하는 학계 안팎의 일련의 추세에 대해 나는 다소 회의적이다. 이는 단지 미국의 대중이 세계의 대중 전체를 대변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최근 K-콘텐츠의 미국 내 성공은 세계의 문화 ‘수도’ 미국의 시민들이 드디어 주변부를 돌아보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부분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1) 그렇다고 해서 K-콘텐츠가 그 질적 수준과 상관없이 단순히 소위 ‘운때’가 맞아 미국에서 성공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반대에 가깝다. 가수 보아나 드라마 <대장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K-콘텐츠는 첫 한류 열풍이 불었던 21세기 초반에 질적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으며, 미국의 대중은 어쩌면 그것을 가장 늦게 알아본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K-콘텐츠는 어떻게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나?”에서 “미국은 어떻게 (혹은 왜) 주변부 한국의 문화 콘텐츠를 돌아보게 되었나?”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K-콘텐츠의 ‘미국 진출’이라는 사건을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과 인식론적 차원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세계’의 지정학적 변화를 보여주는 한 가지 징후로 읽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2. ‘로컬’ 미국과 언어 장벽 너머의 ‘세계’
K-콘텐츠의 ‘미국 진출’과 관련하여, 내가 가장 주목하는 ‘콘텐츠’는 봉준호 감독의 미국 내 <기생충> 캠페인이다. 과장이 아니라, 나는 그의 시상식 캠페인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 그것도 명대사가 넘쳐나는 한 편의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봉 감독의 연출자로서의 탁월함은 이미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가 <기생충> 캠페인 과정과 시상식에서 쏟아낸 수많은 ‘명대사’는 그가 영화 밖 ‘세계’, 그리고 그 ‘세계’의 미묘하지만 분명한 지각변동에 대해서도 얼마나 촌철살인의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봉 감독이 캠페인 기간 중 쏟아낸 무수한 ‘명대사’ 가운데, 나는 다음의 두 발언에 특히 집중하고 싶다. 하나는 그가 미국 매체 벌쳐(Vulture)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오스카를 “국제 영화제가 아닌 매우 로컬(local)한” 행사로 묘사한 발언이고, 다른 하나는 “1인치 정도 되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라는, 골든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수상 소감이다. 오스카를 ‘로컬’ 영화제로 규정한 봉 감독의 발언은, 미국을 세계의 중심 혹은 세계 그 자체와 동일시해왔던 미국 자신, 그리고 ‘우리’의 오래된 무의식을 더할 나위 없이 무심하게, 하지만 세련되고 재치 있게 폭로한다. 동시에 그 발언은 더 이상 미국을 세계와 동일시하지 않아도 될 만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미국을 세계의 일부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세계관 자체가 확장되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확장된 세계관 속에서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안에서 미국은 ‘1인치 장벽’에 둘러싸여 ‘나머지’ 세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혹은 알 필요도 없이, 자신이 곧 세계라 믿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K-콘텐츠 제작자들과 예술가들이 한때 그 장벽을 넘어 미국이라는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일을 떠올려 본다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봉 감독이 한국어로 말한 ‘자막’ 수상 소감과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진실이 샤론 최라는 걸출한 ‘통역가’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 뒤 미국의 대중에게 전달되는 순간은, <기생충> 캠페인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하다.
꼭 그 두 발언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봉 감독의 발언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뒤 미국 내에서 놀랄 만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하나는 미국 제작사 플랜B에 의해 만들어진 미국 영화 <미나리>를 한국어 대사 분량을 이유로 외국어 영화로 분류하여 거센 비난을 받았던 골든글로브 측이 외국어 작품도 주요 부문의 후보가 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꾼 것이다. 그 이후 배우 윤여정이 <미나리>에서의 연기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고, 뒤이어 배우 오영수가 ‘외국어 작품’에서의 연기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한 <오징어게임>의 미국 내 흥행이 보여주듯, 자막이라는 ‘1인치 장벽’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징어게임> 이후 자막 달린 한국 드라마들이 미국 넷플릭스 시청률 순위권에 드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뉴스가 아닌데, 이는 난공불락일 것만 같았던 자막의 장벽이 미국 안에서 생각보다 훨씬 빨리 무너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언어 장벽의 급속한 붕괴는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극예술 분야를 넘어 대중음악 분야에서도 확인된다.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운데 한국어 가사가 대부분인 ‘작은 것들을 위한 시’가 빌보드 8위, 그리고 ‘Life Goes On’이 빌보드 1위를 기록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어로 된 노래가 미국의 TV와 라디오에서 매일같이 흘러나오는 그런 믿기 힘든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 대목은, 방탄소년단의 빌보드 기록 행진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당시 소수였던 미국 내 ‘아미’들 사이에서는 자발적으로 그들의 한국어 가사를 영어로 번역하고 그들의 영상물에 입힐 영어 자막을 만드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K-콘텐츠의 미국 내 성공 비결을 미국이 비로소 언어 장벽을 넘어 세계의 주변부를 돌아보기 시작한 현상에서부터 찾는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이 장벽을 허물고 미국 밖의 세계로 힘차게 나아간 이들이야말로 성공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중국과 아시아의 부상과 미국 내 한류 열풍의 상관관계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세계의 문화 수도 미국의 시민들은 어떻게 해서 자막으로 상징되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주변부, 특히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에 다가가게 된 것일까?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중국의 부상으로부터 시작된 아시아의 부상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미국 사회 내에서 아시아의 존재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지게 됨에 따라 우선 ‘미국 속의 아시아’라고 할 수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뒤이어 (그들이 이미 꽤 오래 전부터 향유하고 있던) 미국 밖 아시아의 대중문화로까지 그 관심이 확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긍정적인 계기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었던 기간의 대부분이 트럼프 집권 기간(2017~2021)과 겹친다는 점,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노골적인 반(反)중·반아시아 정서가 미국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는 점은, 미국 안팎의 아시아 문화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그러한 반아시아 정서에 대한 반작용 혹은 저항의 결과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내가 K-콘텐츠의 미국 내 성공과 관련하여 보다 주목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 후자의 차원이다.
2010년 중국이 G2로 부상하고 그로부터 2년 뒤 시작된 시진핑 정권이 강력한 1인 집권 체제로의 전환을 본격화함에 따라, 미국을 포함한 서구 세계에서는 소위 ‘중국 위협론’이 중국에 관한 주류 담론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중국이 미국의 정치·경제적 패권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포함한 서구의 ‘보편 가치’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되기 시작한 배경에는 바로 이 같은 중국의 부상, 더 정확히는 ‘중국 위협론’의 부상이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때 미국 내에서 중국은 중국 그 자체를 넘어 서구의 오래된 상상적 타자인 동양(the Orient) 혹은 아시아 전체와 동일시된 측면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중국 위협론’에는 익숙한 오리엔탈리즘의 수사들이 빈번히 등장하는데, 중국이 미국을 위협할 만큼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비결을 유교와 같은 동양 사회의 공통적 문화 기반에서 찾는 것이 그 한 가지 사례이다. 과거 맑스나 막스 베버, 칼 비트포겔 등이 거의 동일한 요소를 중국을 포함한 동양 사회의 후진성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했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아이러니는 동양 또는 아시아에 대한 서구 사회의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이 21세기에 중국의 부상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계기로 하여 (외관상으로는 정반대인) ‘중국 위협론’의 형태로 되살아났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중국이 정치·경제적 부상과 함께 미국에서 서구의 타자로서의 동양 혹은 아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기호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트럼프 행정부 시기 내내 지속된 미중 무역 갈등과 반(反)아시아 정서 확산 사이의 상관관계를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해준다. 인종차별주의와 ‘증오 정치’를 거리낌 없이 내세운 트럼프 정권 하에서, 미중 무역 갈등은 두 나라 사이의 정치·경제적 마찰을 넘어 점차 아시아인 전체에 대한 인종적 반감으로 비화되는 양상을 보였고, 그러한 반감은 2020년 말 중국 우한(武汉)에서 첫 환자가 보고되며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해 혐오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 같은 추세는 통계상으로도 확인된다. 예컨대 작년 3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산하의 ‘증오와 극단주의 연구 센터’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한해 미국 내에서 전반적인 증오 범죄는 7% 감소한 반면,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 범죄는 무려 150% 가까이 증가하였는데, 특히 뉴욕과 LA 같은 대도시 지역에서 뚜렷한 증가세를 보였다.2) 같은 해 9월 발표된 FBI 보고서에서도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 범죄가 전년 대비 73%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눈여겨 볼만한 부분은 팬데믹 기간 동안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 범죄가 가장 드라마틱하게 증가했다는 점과, 반아시아적 편견은 2020년 발생한 모든 범죄 사건을 통틀어 8위에 해당하는 범죄 동기였다는 점이다.
아시아인에 대한 이 같은 차별과 혐오에 맞서, 그 최대 피해자 집단 가운데 하나인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매우 인상적인 대응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시아인으로서의 공통의 정체성에 기반한 범아시아적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2021년 3월 16일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인해 아시아계 여성 다섯 명이 희생되자, 샌드라 오, 박재범, 에릭 남 등 한국계 미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미국인 대중예술인들은 한목소리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를 멈출 (Stop Asian Hate)” 것을 촉구하였다. 그보다 앞선 2020년 5월 7일, 아시아계 미국인인 션 미야시로와 제이슨 마에 의해 설립된 미국의 아시안 힙합 레이블인 88rising은 “Asia Rising Forever”라는 이름으로 아시아계 미국인 및 아시아 각국 뮤지션들의 온라인 합동 콘서트를 개최하여 그 수익금을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반대 운동에 기부한 바 있다.4)
미국인들이 어떻게 K-콘텐츠로 눈을 돌리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있어 “Asia Rising Forever”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이 온라인 콘서트는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이는 단지 이 공연에 강다니엘 등 당시 가장 ‘핫한’ 한국인 아티스트들도 참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생각에, 이 공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오히려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 출신 뮤지션들의 음악이 개별 민족국가의 대중음악을 넘어 ‘아시아’의 대중음악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문화적 아시아, 나아가 새로운 문화적 세계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3)
K-콘텐츠가 세계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때의 그 ‘세계’ 역시,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이 새로운 문화적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세계에서, 이미 21세기 초반에 중동과 남미,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을 강타한 바 있는 K-콘텐츠는 십여 년의 시간을 거쳐 그들의 일상에 자리하게 되었고, 미국 내 아시아계 커뮤니티로까지 스며들었다. 한때 일부 평론가들은 한국 아이돌 가수들의 미국 현지 공연 관객의 대부분이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이들의 ‘월드스타’ 자격에 의문을 표하곤 했는데, 바꿔 말하면 이는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 내에서의 K-콘텐츠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하며, 또 얼마나 일찍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인기를 모았던 K-콘텐츠 역시 한국이라는 한 민족국가의 문화 콘텐츠라기보다는 아시아의 문화 콘텐츠로 인식되고 소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2010년대 이후, 특히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아시아계 커뮤니티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2010년대 말 이후, 아시아계 커뮤니티의 전유물에 머물러 있던 한국의 대중문화가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 대중문화의 대표이자 선두주자로서 본격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88rising을 대표하는 스타인 래퍼 리치 브라이언이 2018년 미국에서 발매한 싱글 ‘History’의 (저작권법 위반이 심히 우려되는) 뮤직 비디오는 K-콘텐츠의 그러한 전파 경로와 양상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준다.5)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으로서 미국의 아시아계 힙합 커뮤니티를 거쳐 메인스트림 힙합 신에 진출한 리치 브라이언은 그 자신이 문화 세계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의 성공적 진입을 보여주는 산 증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직접 만든 <History> 뮤직비디오에는 <세일러문>, <드래곤볼>,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과 함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김치로 뺨을 가격하는 밈(meme)으로 유명한 드라마 <모두 다 김치>, 그리고 아시아권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끌었던 <별에서 온 그대>가 등장하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국적과 혈통을 초월하여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의 공통의 기억 속에 자리한 아시아의 콘텐츠라는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들이 근사한 영어 랩을 구사하는 인도네시아 출신의 래퍼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볼 때, 그들은 그의 ‘역사’이기도 한 이 아시아의 대중문화 ‘유산’ 역시 함께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4. 미국의 지방화(provincialization)와 새로운 문화적 ‘세계’
리치 브라이언의 <History> 뮤직 비디오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가씨>,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K-콘텐츠 작품들이 영화 <트와일라잇>, <해리포터> 시리즈, 시트콤 <오피스>,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등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히트작들과 완전히 대등하게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미국의 콘텐츠뿐만 아니라 이 뮤직 비디오에 등장하는 세계 각국의 콘텐츠는 모두 완벽하게 병렬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데(아마 그는 콘텐츠들의 국적 따윈 생각지도 않은 채, 그저 좋아하는 장면들을 이어 붙여 그 뮤직비디오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는 기존 문화 세계를 특징짓는 중심(수도)과 주변부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매우 직관적인 방식으로 전복시킨다. 나는 그가 그러한 전복을 비장하게 의도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의 문화 콘텐츠들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콘텐츠들이 성좌(constellation)처럼 연결되어 만들어진 그의 문화적 세계에서, 그러한 전복은 의식도 못한 사이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이루지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서, 기존 세계의 중심이었던 미국은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지방(province)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트와일라잇>과 <해리포터>가 <History> 뮤직 비디오를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장면 가운데 하나이고, 오스카가 봉준호 감독에게 세계의 무수한 ‘로컬’ 영화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이 같은 미국의 ‘지방화’가 단지 리치 브라이언이나 봉준호 감독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스카가 2020년 외국어 영화 <기생충>에 작품상을 수여하고, <미나리>로 홍역을 치른 골든글로브가 주요 부분 상을 외국어 영화에도 개방하기로 한 것은, 그동안 미국 혼자만이 독점하고 있던 상징적 세계를 한국을 비롯한 주변부 지역에 비로소 내어준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과 K-콘텐츠가 미국의 그러한 지방화의 단순한 수혜자에 불과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미국이 생각하는 상징적 세계 너머에서는 일찌감치 한류가 문화적 세계의 지형도를 바꿔나가고 있었고, 심지어 미국 내부에서도 아시아계 커뮤니티들이 차별과 혐오에 맞서 이뤄낸 진정한 아시아의 부상과 함께 아시아의 공동 문화자산으로서의 K-콘텐츠가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지방화는 오히려 이런 일련의 변화가 가져온 효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이 그래미라는 철옹성마저 무너뜨린다면, 상징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미국의 지방화는 어느 정도 완결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미국의 지방화는 새로운 문화적 세계에서도 여전히 구심점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매우 전략적인 선택으로도 보인다. 당장 오스카의 경우만 보더라도, 외국어 작품인 <기생충>에 작품상을 수여함으로써 순식간에 ‘로컬’ 영화제라는 굴욕(?)을 벗어나 ‘국제’ 영화제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를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문화적 패권을 수성하기 위한 미국의 선제적 조치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꼭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확실히 중국 문화상징의 세계화를 추구하는 중국의 민족주의적/애국주의적 문화 노선과, 지방화를 감수하고서라도 주변부의 문화를 공식적으로 포용하여 진짜 세계로 거듭나고자 하는 미국의 문화적 지향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감지된다. 현실 세계에서 발생한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정치·경제적 갈등이 한 바퀴 돌아 다시 문화적 세계에서의 대결 구도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 즈음에서 다시, K-콘텐츠와 이 새로운 문화적 세계 ‘사이’를 생각해 본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K-콘텐츠의 ‘세계적’ 성공을 ‘국위선양’ 혹은 그 새로운 세계에 ‘태극기’를 꽂는 행위로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 내부의 문화 민족주의적 경향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닐뿐더러, 나의 주된 관심사도 아니다. 다만 나는 그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그 새로운 세계의 형성 과정 및 작동 원리와는 매우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K-콘텐츠가 우리의 문화 자산을 넘어 아시아의 문화 자산으로, 다시 새로운 ‘세계’의 문화 자산으로 도약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는 우리가 과연 그 새로운 세계를 품을 수 있는지의 여부일 것이다.
저자소개
김은영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방문학자로 동아시아 사상사를 연구했다. 이후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의 Department of East Asian Languages and Cultures에서 중국의 루쉰(魯迅), 일본의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한국의 리영희(李泳禧)의 사상을 제3세계성thirdworldness의 관점에서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22년 3월부터 인하대학교 중국학과에서 현대 중국 문학과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1) 문화 수도와 주변부에 대한 이론적 논의에 대해서는 Casanova, Pascale. The World Republic of Letters. translated by M. B. DeBevois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를 참고할 것.
2) Yam, Kimmy. “Anti-Asian hate crimes increased by nearly 150% in 2020, mostly in N.Y. and L.A., new report says.” NBC News, 10 March 2021.
https://www.nbcnews.com/news/asian-america/anti-asian-hate-crimes-increased-nearly-150-2020-mostly-n-n1260264 (최종검색일: 2022. 2. 25.)
3) Venkatraman, Sakshi. “Anti-Asian hate crimes rose 73% last year, updated FBI data says.” NBC News, 26 October 2021.
https://www.nbcnews.com/news/asian-america/anti-asian-hate-crimes-rose-73-last-year-updated-fbi-data-says-rcna3741 (최종검색일: 2022. 2. 25.)
4) https://www.youtube.com/watch?v=M8-49EaVE00&t=414s 에서 당시 온라인 중계된 공연을 다시 볼 수 있다.
5) ‘History’의 뮤직 비디오는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하는데, 이 글에서 언급한 버전은 리치 브라이언이 직접 영상을 편집해서 만든 버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rYE9WB22KZo 에서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