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시아 정치지형 속 군부 읽어내기: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쉬 남아시아 3국의 국민국가 만들기와 군부의 역할 그리고 미래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쉬는 영국 식민유산을 공유하는 나라들이며 국가가 아닌 하층 단위에서 ‘민족’(nation) 동질성이 구축된 다층적인 다양성을 지닌 나라들이어서 ‘국민’(nation) 형성의 과제를 안은 채 국가적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나라들이다. 따라서 이 나라들에서 조직의 효율성을 확보하고 주변국 기준의 수행 능력을 지향하는 군부는, 독립 이래로 국민국가 형성의 주요 변수였고, 현재와 미래의 정치지형을 결정짓는 요소이기도 하다. “군부”라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변수를 통해 남아시아 각국의 정치지형과 그 미래의 방향성을 이해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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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군 사진

강성용 (서울대학교)

하나의 출발점: 영국으로부터의 분할독립

요즘 “남아시아”라는 말로 지칭되는 역사적인 인도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할되었고, 분할 당시 동·서로 나뉘어 있던 파키스탄에서 방글라데쉬가 1971년 독립한다. 이 나라들은 식민지 경험이 같고, 같은 뿌리의 대영제국 군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모병제 기반 전문직 군인들로 구성된 군 조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각 나라마다 군이 정치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 그리고 맥락이 크게 다르다. 이 차이를 중심으로 현재 남아시아 각국에서 군이 국민형성(nation building)의 과제를 안고 있는 세 나라들에서 각각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 살펴보고 그 미래를 향한 함축을 읽어 보고자 한다. 인도는 공식적으로 군부통치를 경험한 적이 없는 드문 경우에 해당하고,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쉬는 현재 공식적인 민정체제 안에서 군부가 실질적인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에 대해 따져보도록 하자.

인도와 파키스탄의 각 주들 간의 경계선은 일반적으로 언어를 기준으로 나눈 선이다. 따라서 공통의 언어와 공통의 역사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단위가 한 지리적인 공간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개별 주 단위에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nation)이 구현되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들을 묶은 단위로 이루어진 국가는 결국 이차적인 의미에서만 ‘민족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이 나라들은 어떻게 ‘민족국가’를 구성할지에 대한 과제를 안고 출발한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2백년이 넘는 긴 기간의 식민통치를 겼었던 식민지 인도는 독립을 혁명적인 단절이 아니라 제도적인 틀 안에서 규정된 과정을 거쳐 맞았다. 그리고 독립 이전부터 식민인도의 정치엘리트들은 선거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면서 나름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식민인도의 정치엘리트들은 독립 이후의 국가를 구성하고 국가발전의 지향점과 전략을 설정하는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식민시기에 간디(M. K. Gandhi)의 대중적 영향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던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 INC)는 독립 이후 네루(J. Nehru)를 중심으로 세속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국가구성의 기본 축으로 삼았다. 따라서 문민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군부에 의해 정치체제가 위협받는 상황을 막아내는 과제는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간주되었다. 영국군 시절부터 이어지던 직업적 전문인으로서의 군인들로 조직된 모병제 군대의 전통을 살리면서도, 무력을 동원한 반란행위를 차단하기 위해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노력이 긴 기간 동안 추진되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군인들이 문화적·언어적·종교적·지역적 동질성을 가진 집단으로 묶이지 않도록 해 내는 것과, 군의 정치개입과 사회적 영향력 행사가 불가능하게 하는 것, 장교들의 처우를 상류층보다는 중산층 집단에 가깝도록 강등시키는 것 등등이었다. 독립 이후 인도에서는 군 고위 장교의 공적이고 정치적인 발언이 금기시되었고, 군총사령관직이 철폐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다양한 특수부대와 준군사조직이 군이나 국방부 소속이 아닌 조직으로 신설되고 유지되었으며, 수도방위를 맡는 별도의 군사조직이 구성되어 수도 주변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인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겪고 있는 군사쿠데타나 군부통치의 경험을 하지 않은 드문 예를 만들어 냈다(강성용 2020). “세계 최대의 민주정치”를 구현했다는 사실은, 인도가 겪어온 열악한 경제적 상황에 비추어 보자면 믿기 어려운 기적에 가깝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영국령 인도제국(British Indian Empire)의 일부였던 미얀마의 현재 상황이 이러한 성취가 작지 않은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85년 당시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 INC)의 모습(출처: wikimedia)

그런데 진나(Md. Ali Jinnah)가 중심이 되어 종교를 근거로 별개의 국가를 추구하던 무슬림리그(All-India Muslim League, ML)는 식민인도가 종교를 기준으로 힌두와 무슬림 두 민족(nation)으로 이루어졌으니, 무슬림을 위한 별도의 나라(nation state)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몽상처럼 들리던 이 주장이 정치적 현실이 되면서 탄생한 나라가 파키스탄이다. 그런데 ML은 INC만큼의 역사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조직은 아니었다. 힌두 근대화론자들의 대중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조직된 성격이 강했고, 주도적으로 정치 아젠다를 설정하는 역량을 발휘해 본 경험이 적었다. 또한 무갈제국 시기 이래로 인도의 기득권층에 속하던 무슬림 상층부는 서구화와 근대화를 향한 노력에 소극적이기도 했다. 인도에 비해 작은 나라이면서도 동서로 1,600km가 떨어진 동·서파키스탄이 결합된 형태의 국가가 만들어졌을 때 파키스탄 내부에서도 그리고 외부에서도 그 존속가능성에 회의가 많았다. 네루가 독립 인도의 미래를 기획할 수 있었던 근거는 식민통치기부터 작동하고 있던 관료 중심의 행정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행정체제는 물론이고 군과 여타 모든 조직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파키스탄을 세우는 시도는 시간이 지나면 당연하게 붕괴될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고 인도의 엘리트들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파키스탄이 유지되고 또 초창기에는 인도보다도 나은 경제발전을 이루어간 것은, 식민통치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의 상식적인 윤리의식마저 저버리고 냉전의 틀 안에서 오직 전략적 유불리만을 따져서 편을 드는 서구 강대국들, 특히 미국의 비도덕적인 진영논리 때문이라고 인도의 지도부는 생각했다. 기존의 반식민주의적 입장이 냉전시기 진영논리에 대한 도덕적 폄하와 지역패권국으로서 주변국을 관리해야 하는 독립 인도의 필요가 결합되어 반영된 것이 인도의 비동맹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1937년 10월 럭나우(Lucknow), 무슬림 연맹(All-India Muslim League, ML) 실무 위원회와 함께 하는 진나(앞, 왼쪽에서 두 번째)(출처: wikimedia)

 

군 내부와 외부의 다층적 분절

대영제국 군대에서도 무슬림들만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운영하지는 않았고, 분할독립 당시 파키스탄 군으로 편입되는 과정도 부대 단위가 아니라 군인들의 개인적인 선택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대영제국시절 왕권을 유지한 채로 영국에 복속되었던 565개나 되는 크고 작은 토후국(princely state)들이 인도와 파키스탄에 편입되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문제의 경우로 떠오른 카쉬미르(Kashmir)는 1947년부터 인도와 파키스탄이 무력충돌을 피하지 못하게 되는 구체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도는 인도 나름으로 하이데라받(Hyderabad)의 경우나 인도 안에 남아있던 프랑스령이나 포르투갈령 지역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파키스탄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결국 인도에서도 온건파 네루와는 달랐던 강경파 파텔(Sardar Patel)의 주도로 군사작전이 벌어져서 편입을 추진하게 된다. 서파키스탄의 경우 국토의 절반이 넘는 면적이 토후국의 영토였다. 따라서 독립한 처음 한 달 안에 파키스탄 편입을 이룬 토후국이 둘밖에 없었으며 14개 토후국들의 편입과정은 지난하기만 했다. 1948년 3월 발로치스탄 지역의 칼랃(Kalat)이 파키스탄에 편입되었고, 이어 1952년에 발루치스탄(Baluchistan)에 포함되었지만 공식적으로 1955년에야 이 토후국은 소멸되었다. 그런데 이미 1958년 칼랃의 왕(Khan)은 발루치스탄의 독립을 선언했고, 지금까지 파장이 남아있는 발루치스탄 독립 세력의 공식적인 등장을 알렸다. 가장 늦게 공식적인 편입과정이 마무리된 훈자(Hunza)와 나가르(Nagar)의 경우는 편입이 1974년 10월에 끝났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인도나 파키스탄 모두 독립 이후 국가 내부의 영토문제를 매듭짓는 일에서부터 군사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의미에서 군부의 활동은 국가구성의 출발점을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동벵갈을 파키스탄에 할당하면서 생겨난 동파키스탄에는 토후국이 없었고, 벵갈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어서 상황이 크게 달랐다.

단일한 정치권력이 통치하는 국가를 구성하는 일에서부터 파키스탄은 물리력을 동원한 투쟁을 피할 수 없었다. 분할독립 과정에서 벌어진 종교집단간의 폭력과 수백만 명 규모의 실향민들은 상황을 더욱 어렵게 했다. 특히 인도에서 지배층을 이루던 토후국의 왕족들까지 모두 (서)파키스탄에 실향민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이 사람들은 “무하지르”(Muhajir/Mohajir, 아랍어 ‘이민자’)라고 불리는 사회집단을 구성하게 된다. 출신지역과 배경은 다르지만 분할독립 과정에서 인도를 떠나 실향민으로 서파키스탄에 정착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주로 씬드(Sindh)지역의 카라치(Karachi)나 하이데라받(Hyderabad) 등 대도시에 정착했다. 우르두(Urdu)를 구사하면서 교육수준이 높았지만 실향민 처지를 공유하던 이들은 행정 관료직이나 상인 혹은 전문직 종사자로서 힌두들이 떠난 빈자리를 채워 나갔고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집단으로 자랐는데, 1958년 아윱 칸(Ayub Khan)이 미르자(Iskander Mirza) 대통령을 쿠데타로 축출하고 군부통치를 시작했을 때부터 어려운 상황을 맞는다. 아윱 칸은 자신의 출신지역인 카이버 팍툰콰(Khyber Pakhtunkhwa)지역 출신들을 정재계의 핵심요직에 배치하기 시작했고, 각 지역단위의 정체성이 훨씬 강했던 발로치(Baloch), 벵갈리(Bengali), 씬디(Sindhi) 사람들은 동원해서 지역단위 정체성 정치에 몰입한다. 결국 이런 구도에서 실향민으로서의 불안정성에 저항하던 무하지르들은 1960년대 초부터 격렬한 저항을 시작한다. 공용어이자 무슬림 정체성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파키스탄의 국어로 채택된 우르두(Urdu)를 제일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7%에 불과한(2017년 센서스 기준)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파키스탄에서 75%의 국민들이 우르두를 이해한다는 것은 힌디(Hindī)와 우르두가 문자와 종교적 지향성으로 구분된, 원래는 하나의 언어였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렇게 가상의 통일성을 현실로 바꾸어야 하는 과제가 파키스탄에게는 크고 무거웠다.

 

역사의 갈림길을 지나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군부

그렇다면 무엇이 군의 정치개입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역사를 갈라놓았을까?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파키스탄이 급조된 국가로 경제적·전략적인 생존기반을 갖지 못한 채 기존 식민시기의 조세와 행정조직 및 군사조직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꼽는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꼽는 것은 바로 ML의 취약한 정치력을 꼽는다. 긴 시간 구축된 하부 단위의 정치조직과 장악력을 가진 INC와 ML의 정치적 역량에는 차이가 컸다. 이 외에도 파키스탄, 그리고 나중의 방글라데쉬에서까지 군부의 정치개입이 반복된 원인을 몇 가지 더 꼽을 수 있다(Wilkinson 2015). 우선 앞서 말한 것처럼 군대 내의 종족구성 면에서 인도군보다 파키스탄군의 편중현상이 훨씬 강했다. 뻔잡(Punjab)주가 분할되면서 서뻔잡지역이 파키스탄에 편입되었는데, 이 서뻔잡은 서파키스탄 최대의 인구를 보유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파키스탄 전체로 보자면 대략 인구의 1/4을 차지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군대 내에서는 서뻔잡지역 출신이 보병 전력의 3/4을 차지하고 있었다. 분할독립 당시의 동파키스탄은 인구 규모로는 파키스탄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는 인구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군대 내에서의 벵갈인들의 규모는 비중이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미미한 것이었다. 이는 구체적으로 영국이 세포이항쟁 이후 반란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낸 “무골종족”(martial race)이라는 인종이론에 따라 당시 인기가 높았던 직업군인이 되는 모병과정에서 특정한 종족집단, 특히 벵갈인들을 차별한 결과였다. 이미 양 세계대전 당시에도 모병인구로 뻔잡 출신 무슬림이 최대의 집단이었다. 당연히 식민시기 군대를 물려받은 인도군에도 같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 쏠림의 정도가 파키스탄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무골종족 목록을 기준으로 가장 많은 군인이 징발된 뻔잡지역과 가장 크게 차별을 받은 벵갈지역이 파키스탄의 영토로 할당된 것은 더 큰 갈등의 요소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인도군에서는 뻔잡 출신 군인들 내부에서도 분명한 종족집단의 다양성이 있었다. 즉, 뻔잡 출신들 중에서 힌두와 시크교도(Sikh)들은 인도군에 남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두 집단의 이질성은 물론이고 이 두 집단 내부에도 여러 집단들 간의 이질성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또 이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병된 여타 군인들에 비해 인도군 내의 압도적인 위치에 있지 않았다.

1912년 영국-인도 육군 보병부대 “1st Brahman”(출처: wikimedia)

그런데 식민군대가 파키스탄군으로 분할될 때 부대 단위가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에 따라 군인들이 파키스탄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자체가 파키스탄군 내부의 동질성을 강화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식민시기에 영국은 무슬림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를 구성하고 운영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종교를 기준으로 분할독립된 파키스탄에 할당할 수 있는 부대는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ML이 민·군의 관계설정 면에서 장기적인 기획을 할 수 있었던 독립 초기에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미 식민시기에 영국에 적극 협조하면서 나름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고자 했던 ML은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서구화된 엘리트 집단을 구성하고 또 대변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가진 ‘무슬림은 하나’라는 이데올로기이자 확신은 무슬림들 내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역과 인종과 언어 그리고 심지어 종교의 차이까지를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게 만들었다. 무슬림 내부에도 수많은 종파들이 존재하며, 파키스탄의 이슬람 전통은 역사적으로 수피즘(Sufism)전통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힌두와의 대립구도 안에서 ‘무슬림은 하나’라고 주장하던 집권 엘리트들은 이슬람이 여럿인 현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무슬림은 곧 하나의 민족이라고 주장하여 파키스탄을 만들어낸 이들이 이러한 현실적인 감각을 갖기는 어려웠을 수 있지만, 너무나 명백한 국민형성의 과제에 대해 지나치게 무감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인도의 경우에는 기나긴 제헌의회의 헌법 제정에 대한 논쟁과 주 경계선 설정 등등의 난제들을 다루어 가면서, 특히 1951~1955의 기간에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종족단위 충돌을 막기 위한 노력을 다양하게 기울이고 있었던 것과 크게 대조된다. 카스트 문제를 다루기 위한 할당제를 실시하고, 언어의 구분에 따라 주 단위를 설정해서 하부의 민족단위 구성을 가능하게 했고, 군내부의 일체성을 와해시키기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군이 문민통제를 벗어나는 일을 막았던 노력이 파키스탄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건국 초기부터 수권집단 자체가 스스로를 유리시킨 실수가 있었다. 진나 통치시기에 무함맏 알리(Chaudhri Muhammad Ali)가 내각기획위원회(Planning Committee of the Cabinet)를 조직했는데, 결국 내각 자체가 무력화되고 옥상옥을 만든 상황이 되고 말았으며, 이것은 결국 정치권력이 국가를 지탱하던 관료체계와 유리되는 문제를 낳았다. 군의 개입이 쉬운 틈새를 만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결정의 근원에는 진나 개인을 중심으로 한 상명하복의 문화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던 ML의 의사결정 관행이 있었다. 결국 파키스탄은 1947년 이후 2008년까지 4번의 쿠데타와 36년간의 군정통치를 겪어 왔다.

 

파키스탄 문민통치의 시도와 한계들

하지만 파키스탄에 문민화의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1년 방글라데쉬 독립과 맞물린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파키스탄 군부는 하층 장교들은 물론이고 국민 전반에서 지지를 잃고 있었다. 이 때 파키스탄인민당(Pakist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있던 줄피까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는 이전 군부통치 하에서의 정치적 경험도 있었다. 또 파키스탄 최대의 정치 쟁점이던 동·서파키스탄의 균형 문제도 방글라데쉬 독립으로 없어진 상황이 펼쳐졌다. 결국 집권한 부토는 인도의 정치엘리트들이 했던 군부 통제방식을 사용했다. 최고위 장성의 인사권 통제, 3군 참모총장의 직위 강등, 강력한 여타 준군사조직 구성을 통한 군부 견제, 다양한 종족집단 출신들의 균형 있는 모병 등이 실시되었다. 그런데 부토는 정권의 사적인 남용으로 인해 정당성은 물론이고 대중과 군부 모두의 지지를 잃고 말았다. 결국 1977년의 쿠데타는 이러한 모든 시도를 무위로 만들었고, 1977년 이후로는 구조적인 문민통제 복원 시도가 없었다고 해야 한다. 부토의 실패는 지아 울학(Zia ul-Haq)의 군부통치로 이어졌고 특히나 1985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게 되었다. 지아가 1988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총선을 통해 줄피까르 알리 부토의 딸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가 수상에 오르게 되었지만 이 때부터는 대통령과 수상과 군사령관(Chief of Army Staff)사이의 삼각균형이 이미 공고화된 후였다. 1988년 이후로 의회 해산권과 수상 임명권을 가진 대통령은 구조적으로 군사령관에 의존하는 체제가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정치권의 분열과 군부의 단결은 비대칭적인 관계설정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데, 군부는 항상 이슬람 극단주의 진영을 적절하게 동원하면서 세속주의 전통에 남아 있는 정치권을 향한 지렛대로 사용하고 있다. 독립 당시 카쉬미르전쟁 이래로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외교까지는 모두 군부 관할로 남아 있는 사정은 이러한 군부의 극단주의자 활용이 가능하면서도 필요한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후 샤리프(Nawaz Sharif)가 파키스탄무슬림리그(Pakistan Muslim League, PML-Q) 총리로 2/3 과반의석을 가진 정권을 구성했을 때 다시 한 번 군부 견제 시도가 있었다. 개헌을 했고, 대통령을 해임시키고 군부인사에 개입하면서 민선 총리의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삼각통치 구도를 해체했지만, 1999년 무샤라프(Musharraf) 장군의 쿠데타로 모든 시도는 좌절되었다. 무샤라프 장군은 무하지르인지라 군부 내 다수인 파쉬툰(Pashtun)과 뻔자비의 충성을 얻지 못하리라는 정치적 계산은 심한 착오였다. 그 배경에는 샤리프 총리가 제도를 정비하기보다 개인적인 재량권을 강화하는 방식을 선호했다는 사실이 있다. 1998년 핵실험으로 미국의 제재까지 더해지면서 비효율에 지배당하는 경제는 주저앉을 상황이었다. 1947년 이래 파키스탄의 민정이 의지해 온 보루는 외국의 원조였다. 특히 미국의 원조는 파키스탄이 국가로서 생존하도록 하는 근거였고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의 요인으로 인해 원조의 강도는 등락을 거듭해 왔다. 그런데 미국이 파키스탄을 지원하는 지정학적 이유가 바로 해당지역의 안정화와 얽혀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개입과 관련되어 있어서 미국의 원조는 파키스탄의 민주화를 지향하고 군부를 견제할 동기가 없었다.

<파키스탄의 군부 경제를 다룬 Ayesha Siddiqa의 책 Military Inc. 표지 (출처: Amazon)>

이제 기존의 경험들이 쌓여 파키스탄의 국가로서의 통일성과 위기대응 능력을 유지할 주체로 군부를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가 굳어지게 되었다.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 Survey)의 1997년 결과는 파키스탄에서 97% 국민이 군부에는 신뢰를 갖고, 33.1%만이 정치정당을 신뢰한다고 했으며, 56%가 민주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만, 40%는 군정을 지지한다고 했다(Croissant et al. 2013: 185). 베나지르 부토 집권기(1988~1990, 1993~1996)와 샤리프 집권기(1990~1993, 1997~1999)에도 군부는 문민정부와 평행 권력을 유지해 오면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최후의 권력으로 남아있는 상태를 유지했고, 특히 대인도 관계와 외교 및 국방 면에서의 독자적인 결정권을 유지해 왔다. 1958년 쿠데타는 문민정부의 실정에 대한 군부의 실망과 파키스탄의 유지를 위한 보루로서의 군부에 대한 자신감의 발현이었고, 대통령 아윱 칸 장군은 문민 엘리트들을 군부정권에 포함시키고 경제와 사회 분야를 향한 군부의 제도적 장악에 나섰다. 아윱 칸은 PML-Q를 만들어 군부 주도의 정당이 정치를 주도하게 했다. 1962년의 개헌도 여기에 맞추어져 있었는데, 실질적인 큰 변화는 ‘Milbus’(Siddiqa 2007)라고 흔하게 불리는 군부와 산업체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 군부 자본의 구축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이다. 군부만의 핵심 이익이자 기득권 구조를 창출했다는 뜻이고, 이 구조는 파키스탄의 군부통치가 이루어지는 목적이자 수단으로 유지되고 있다. 네 개의 복지재단을 ─군부는 군부의 특권을 군 유지를 위한 ‘복지’제도라고 인식한다.─ 통한 경영권 장악 하에 농장과 학교나 생산시설을 운영하는 것뿐 아니라 은행과 보험사 방송국까지 아우르는 경제활동을 군부가 수행하고 있고 사용료 징수사업이나 쇼핑센터나 주유소 운영 등은 군부가 직접 통제하고 있는 구조인데, 이는 퇴역 군인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경제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이 상황은 군부가 정책결정에 직접 개입하는 동기를 강화시킨다. 또 군부가 이러한 기득권의 일부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보통 사람이 군 장교가 되어 기득권층에 진입하는 일은 철저하게 통제된다. 다시 말해 특정한 집단과 족벌의 관계 안에서 군의 모병과 승진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국가 엘리트 집단이 군부와 공생관계를 구축하게 되면서 군부에 도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세력이 형성되기 어렵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국가의 자원분배에서 비효율성을 낳고 있기도 하다. 군부정권이 바뀔 때마다 집권자를 지지했던 군인들에 대한 특권적인 보상이 강화되었고, 이 체제는 군부집권을 통해 공고화되었다. 결국 파키스탄 내에서 군부는 별도의 국가(parallel state)를 구성하고 있고 그 나름의 핵심 이익(core interest)을 주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군은 궁극적으로 전쟁에 대비하는 조직이다. 이 말은 군의 기준은 국내의 역량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역량을 기준으로 판단을 받는 효율성을 강요받는 조직이라는 뜻이다. 결국 국가로서의 파키스탄이 존립되는지의 질문에 대해 가장 최후의 보루로 파키스탄 군부가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단순하게 쿠데타를 통한 정권장악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카쉬미르 분쟁, 아프가니스탄 국경 불안정, 국내 소요사태와 종족 간 폭력사태 및 테러 진압 등을 통한 치안 유지 기능과 자연재해에 대한 대응 등등의 문민통치 지원활동이 군의 역할에 포함된다. 특히나 경찰조직의 비효율성 내지는 무력함을 군이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군 주도 국가운영의 근본적인 원인을 꼽자면 결국, 파키스탄 건국 이후로 잔존하고 청산되어 본 적이 없는 봉건적 기득권세력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꼽아야 한다. 기존의 지주이자 봉건 영주들이 현대의 자본가이자 장교로 세력을 유지해 오면서 다양한 형태로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구조가 배후에 숨어 있다. 족벌정치와 일인통치의 관행은 그 피상적인 발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방글라데쉬의 군부 그리고 국가

벵갈어로 “벵갈”을 가리키는 말 “방라”(Bāṅlā)와 “나라, 땅”을 가리키는 “데샤”(deśa)라는 단어를 결합시킨 이름이 보여주듯, 방글라데쉬는 벵갈어를 사용하는 벵갈 사람들(전체 인구의 98%)이 모여서 사는 땅이다. 그런데 벵갈 사람들 중에서 힌두들이 모여 사는 곳은 지금의 서벵갈(West Bengal) 주이고 인도의 일부이다. 그러니까 방글라데쉬는 벵갈이 분할되면서 동벵갈이 독립국으로 만들어진 나라인 셈이다. 바로 이 통일성이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방글라데쉬가 독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보다 더 강하게 민족의 단위가 국가형성의 강한 동력임을 확인시켜준 역사의 증거이다.

1947년 파키스탄의 분할독립 이후 서파키스탄 주도의 군부와 관료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은 주로 동파키스탄에서 내고 있었고, 불만은 누적되어 갔으며 이것이 무지브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을 중심으로 한 아와미리그(Awami League, AL)의 독립운동에 힘을 싣는 근거가 되었다. 파키스탄 시기 동파키스탄의 군부는 전혀 정치적 무게를 갖지 못한 주변부에 불과했다. 그래서 71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대부분의 벵갈 출신 장교들은 서파키스탄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독립투사들은 준군사조직 소속이거나 참전한 민간인들이었다. 독립 이후 방글라데쉬로 돌아온 송환군과 독립투사 출신의 독립군 사이의 간극은 무척 컸다. 독립군 출신들은 송환군들이 영국 전통에 따라 전문 직업군인 조직을 지향하는 것에 반대하고, 중국식 인민해방군처럼 혁명군사조직을 만드는 것을 지향했다. 하지만 1975년 기준으로 송환군이 전체 36,000명 조직에서 28,000명 규모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서 독립군 출신들은 불만이었고, 송환군은 독립군 출신들이 인사에서 특혜를 받는다고 불만이었다. 그 와중에 초대 수상 라흐만은 군 예산을 삭감하고 별도의 준군사조직을 신설하여서 실권을 실어 주었다. 인도와 같은 군부 견제를 시작한 셈이었다. 하지만 국부 라흐만이 재난대응과 부정부패 척결에 실패하면서 불만이 누적되자 좌익 진영에서 반란시도가 이어졌고, 라흐만은 결국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다당제를 금지하여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진영에서도 불만을 사고 말았다. 1975년 라흐만은 가족들과 함께 암살되었고 ─그 때 살아남은 딸이 지금의 총리 셰이크 하씨나이다.─ 그 후 22번의 쿠데타와 반쿠데타와 반란시도가 이어지는 상황이 뒤따랐다. 1975년 쿠데타로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장군의 집권기가 있었고, 그가 쿠데타로 살해되고 나자 ─그의 미망인이 양대 정치인 중 한 명인 칼레다 지아이다.─ 에르샫(Hossain Md. Ershad)이 쿠데타로 1982~1990년에 집권했다. 지아우르 라흐만은 집권기에 모든 군사조직을 방글라데쉬군(Bangladesh Armed Forces, BAF)으로 통합했고 국방예산을 증액하여 군 규모를 세 배로 늘렸다. 그리고 독립군 출신들을 배제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그래서 군은 80년대에 송환군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되었다. 에르샫 장군 집권기에도 같은 정책이 이어졌고 그도 군의 강화에 성공했지만, 반정부 시위가 닥쳤을 때 시위진압을 명령받은 군은 반정부 시위를 조직한 양당 지도자들과 만나 군조직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협상을 벌였고, 에르샫은 축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방글라데쉬에서 군은 정치정당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지 물어야 한다.

<AL의 수장이자 현 방글라데쉬 총리 셰이크 하씨나(왼쪽)와 BNP의 수장 칼레다 지아(오른쪽)>

방글라데쉬를 지배하는 정치지형은 극단적인 진영 간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에르샫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양대정당, 아와미리그(AL)와 방글라데쉬 민족주의당(Bangladesh Nationalist Party, BNP)을 각각 이끄는 두 여성 정치인인 셰이크 하씨나(Sheikh Hasina)와 칼레다 지아(Khaleda Zia)가 정권을 주고받는 상황이 1991~2006년에 이어진다. 중도우파 정당인 BNP는 원래 군출신 인사들이 만든 정당이고 이슬람을 자신들의 정당근거로 내세우며 친파키스탄 입장과 반인도 노선을 표방했고 이것은 군부의 입장이라기보다 파키스탄 전통을 따르는 방글라데쉬의 정치적 흐름이었다. 다르게 중도좌파 정당인 AL은 역사적으로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 정당은 아니었고, 독립전쟁의 유산에 따라 친인도 성향이 강하고 반파키스탄 정서가 남아 있는 정당이다. 현재 방글라데쉬 총리인 하씨나의 아버지를 살해한 군인들이 처벌 받지 않게 된 것은 칼레다 지아의 죽은 남편이 배려해 준 덕이었다. 그래서 이 두 여성은 개인적인 원한관계까지 가진 사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두 정당은 방글라데쉬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두 가지 대립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정당은 상대당의 말살을 지향하는 관행을 유지해 왔고, 그 상황을 감당하기 위해 정당과는 무관한 과도정부(Caretaker Government, CTG)까지 구성되기를 반복하면서 AL과 BNP와 CTG, 3자의 정권 주고받기가 전개되어 온 것이 방글라데쉬 현대정치의 역사이다. 제로섬과 승자독식의 결렬한 대립 문화가 방글라데쉬 정치를 규정하는 요소가 되다 보니, ‘선거제 독재’(Croissant and Schächter 2010)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선거에 기초한 민정체제가 유지되고 있지만, 극단적 대립의 문화 속에 총리 개인이 직접적으로 사적인 관계를 통해 군부를 관리하는 관행이 유지되면서 ‘선거제 독재’라고 할 만한 정치구도는 방글라데쉬 민·군 관계를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하씨나와 지아 중 한 명이 수상이 되면 항상 동시에 국방장관을 겸임하고, 국방이나 군부관련 인사 및 의사결정을 수상실 산하의 군정책실(Armed Forces Division, AFD)로 집중시켰다. 국방부는 남은 행정 처리를 맡는 껍데기 기관이 된 셈이었다. 정치지도자 개인과 군부가 이해관계에 따른 협상을 통해 보호자-추종자 관계를 유지해 왔다. BNP와 AL의 극단적 대립 상황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군부가 지원하는 CTG가 2007년 1월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환영했다. 2007년 이후 군부가 대통령을 압박해 군부의 지지를 근거로 한 CTG를 관철시켰을 때에는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었던 시기였다. 2008년 AL가 승리를 거둔 이후로는 현재 방글라데쉬는 선출된 문민정부가 집권하고 있다. 민정세력은 군부를 통제하기 위해 준군사조직을 강화하고 의사결정권을 수상실에 집중시키고 충성한 장교들에 대한 혜택을 늘리는 방식을 택했다.

 

방글라데쉬의 정치지형과 전망

방글라데쉬의 정치구도가 대립적일 수밖에 없는 뿌리는 바로 국가 엘리트집단 자체가 친파키스탄, 이슬람 지향의 진영과 방글라데쉬 독립파인 친인도 진영으로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권력을 가진 수상 개인이 직접 민·군 관계설정의 세부사항을 결정하는 관행이 굳어졌다. 방글라데쉬의 문민전통 자체가 약한 것이 아니라, 정치권의 극단적 대결구도가 워낙 강해서 정치가 불안정해지고 이것이 군부의 개입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방글라데쉬 정치의 현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열악한 경제상황에 비해 문민정부를 당연시하는 의식이 방글라데쉬에는 무척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심지어는 군부의 지지로 CTG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에도 군은 군정보기관이 문민행정부를 통제하는 방식의 간접통치를 선호했고,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물론 이 방식을 사용할 때에도 군은 군장교의 정부 관료직 임용이나 국내 치안유지의 결정권을 군이 갖는다는 등 군부의 기득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AL과 BNP의 대립구도를 정치적으로 매도하는 선전을 적절하게 잘 해 나간 면도 있다. 2009년 민정이 들어서고 군부정권에서 이루어진 1979년과 1986년의 개헌을 무효화시키는 등의 조치가 있었지만 아직도 정부의 치안조직은 군부의 영향력이 강한 상태로 남아 있다. 하지만 방글라데쉬는 문민통치를 당연시하는 국민 대다수의 태도가 파키스탄과 확연하게 다르다. 파키스탄처럼 국민형성의 과제 자체가 크게 남아 있는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민통치 체제가 유지될 것이지만, 당분간 지속될 극단적 대립구도에 갇힌 정치구도 때문에 아마도 군부는 끝까지 나름의 정치적 발언권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과 인도 국경 와가(Wagah)에서 행해지는 양국의 국기하강식>

 

남아시아의 군부와 세 나라의 현안 그리고 미래

이제 2021년 가장 최근의 뉴스들을 예로 들어서 남아시아 3국의 현안을 이해하는 일에 왜 군부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인도의 강력한 문민통제는 관료지배로 인한 비효율성과 전투력 약화의 부작용을 만들었다. 싸우는 군대가 아니라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군대가 유지된 결과는 심각했다. 첨단무기를 개발한다는 거의 모든 사업이 예외 없이 수십 년 간의 지체와 부정부패로 얼룩졌고, 외국무기의 효과적인 도입도 실패하는 일이 많았다. 중국의 일대일로사업을 통해 구체화된 지역패권국으로서의 인도의 지위에 대한 위협은 이제 필요할 때 싸울 수 있는 군대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힌두근본주의(hindutva)를 중심으로 국가정체성을 구축하겠다는 방향설정 하에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신흥중산층이 현 집권세력을 지지하는 구도에서 시장자유주의에 입각한 군의 현대화와 효율화는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 폐지된 군총사령관 직이 다시 설치되고 수많은 국방현대화 사업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 중국 견제를 위해 미국 주도 쿼드(Quad)에 가입하고 분쟁지역 소규모 전투에 실제 투입이 가능한 가성비 높은 한국산 무기 도입에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인도의 지향점이자 정체성은 남아시아 지역패권국이자 인도양의 해양 패권국이다. 2021년 말 실제 공급과 배치가 시작된 러시아산 S-400 미사일 도입 때문에 미국이 제재를 취할지 말지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지만, 인도는 결코 미국과 러시아 사이 줄타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2011~2015년과 2016~20년을 대비할 때 러시아산 무기도입이 33%가 줄었다(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는 사실은, 이 줄타기가 이제야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고, 미국 무기로 인도 무기체계가 대체될 것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아직도 러시아는 인도의 최대 무기도입국이다. 미국이 국내법(CAATSA, 2017)을 동원해서 터키의 경우처럼 제재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인도의 국방전략이자 외교전략의 지향점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미국의 대인도 외교전략 전체 그리고 대중국 봉쇄전략의 큰 그림과 얽혀 있는 문제여서 큰 틀에서 읽어내야 하는 뉴스들이 당분간 이어지리라 보인다.

<파키스탄-중국 국경 쿤자랍 고개(Khunjerab pass)의 모습>

파키스탄은 빙산의 노출부를 스포츠 스타 출신의 포퓰리스트인 임란 칸(Imran Khan) 수상이 차지하고 그 아래 빙산의 잠긴 부분을 군부가 차지하는 안정적인 정치구도를 구축해냈다. 이제 밀린 숙제를 풀어야 하는데, 국가부도 사태를 맞아야 당연한 상황을 긴 세월 유지해 온 상황에서 탈출해야 한다. 2021년 12월 5일 사우디아라비아가 파키스탄 중앙은행에 30억 달러의 외화를 입금해 주었다. 이슬람국가로서는 유일한 핵무장국이자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파키스탄을 관리하는 일에 이슬람권 국가들이 신경을 써 온지는 오래 되었다. 군부 주도로 진행된 아프가니스탄 장악 작전은 크게 성공해서, 인도가 5만 톤의 밀을 아프가니스탄에 지원하기 위해 파키스탄의 협조와 허락을 구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고 왔으니 말이다. 2021년 12월 3일에 파키스탄에서 인도 측에 와가(Wagah) 국경을 통해 파키스탄 트럭을 사용한 운송방식을 제안한 것이 최근의 상황이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을 매개로 얻어온 미국의 지원이 없어지게 된 지금 파키스탄은 어떻게 경제난을 해결해 갈 것인지가 핵심 사안이다. 국내적으로는 군부자본(Milbus)의 효율적 개혁 없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는 어렵게 보인다. 2021년 10월에 군총사령관이자 실권자인 바즈와(Q. J. Bajwa) 장군은 국내 정보기관(Inter-Services Intelligence, ISI) 책임자인 하믿(F. Hameed) 장군을 안줌(N. Anjum) 장군으로 교체하려고 했다. 항상 형식적인 절차에만 그치던 임명절차를 임란 칸 총리가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정치적 안정구도에 균열이 있을지 긴장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바즈와 총사령관 후임이 되자면 야전사령관 경력이 필요한 상황에 있는 하믿 장군이 ISI를 넘겨주려고 했지만, 임란 칸은 지난 선거에서─투표조작을 실행했다는 언론보도나 일부 공론도 있다.─자신의 당선을 보장했던 하믿 장군이 물러나는 것을 결사 저지하겠다는 상황이었다. 임란 칸의 부인이 주술사이고, 이 인사를 막는 것에 정권의 생사가 달렸다고 조언했다는 것도 언론에 보도된 사실들이다. 결국 임란 칸이 양보하면서 마감된 이 인사 사태는 파키스탄의 미래를 읽어내는 일에서 군부의 지향점과 군부 내의 사정을 읽어내는 시각이 필요함을 잘 드러내 준다. 파키스탄이 그 지속가능성을 의심받는 불안정한 국가의 늪에서 벗어나는 일은 군부의 결단 없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쉬에서는 2021년 2월 10일 야당인 BNP가 군사령관의 두 형제들이 사령관의 불법적인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제 감시장비를 도입하고 이익을 취했으며 하씨나 총리가 묵인했다고 주장하고, 이에 대한 UN 차원의 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군 인사들이 조직한 정당이고 전통적으로 친군부적인 BNP가 이러한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은 무척 뜻밖의 일이었다. 우선 방글라데쉬의 유엔평화유지군 파병이 국가의 규모에 비해 아주 큰 규모인데다, 이를 군부가 수입원으로 삼고 있다는 논란은 국제적으로도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제(!) 도청과 감시를 위한 장비가 야당 탄압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주장을 야당이 공식화 하고, 유엔 일부 인사들이 “부정부패 연루 의혹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발언을 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대두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군이 이제는 집권당인 AL에 편향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모습에는 근거가 있다. 그 핵심은 2009년 발표된 “군 청사진 2030”(Forces Goal 2030) 계획이다. 육·해·공 3군의 입체적 작전능력을 배양한다는 계획인데, AL의 집권 이후 국방예산이 123% 증액된 사실과 맞물려 있다. 정치적으로 하씨나 총리가 군부의 충성을 비싼 값에 샀다는 논평이 나오는 근거이다. 그리고 군수물자 도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통제와 투명성은 없는 상황이다. 방글라데쉬 정치권에서 부정부패 혐의는 일상의 정치적 이슈여서, 칼레다 지아는 아직도 부정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는 중이고, 현 수상 하씨나는 모두 무혐의 판정을 받은 상태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외부 위협이 없는 상태의 무기 구입에 대해 군부는 유엔평화유지군 활동에 필요하다는 답만 주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다른 곳에 있다. 현재 대형 국책 건설사업의 수행에 군부를 포함시켜서, 빧마대교(Padma bridge) 건설이나 로힝야 난민 수용시설(Bhashan Char) 개발 사업에 군부가 참여하게 되면서 국민국가 유지의 역할에 대해 건설사업의 이권으로 보답하는 방식이 관철되고 있다. 이제 군부는 두 개의 복지재단을 중심으로 방글라데쉬 최대의 재벌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파키스탄 군부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보인다. 이 상황이 방글라데쉬 경제의 미래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며, 국내 정치지형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저자소개

강성용(citerphil@snu.ac.kr)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이다. 독일 함부르크(Hamburg)대학교에서 인도학, 철학, 티벳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스트리아 빈(Wien)대학에 근무하면서 파키스탄 라호르 소재 울너(Woolner)컬렉션의 국제프로젝트를 진행시킨 바 있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남아시아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Die Debatte im alten Indien>과 <빠니니 읽기> 등의 저작이 있다.

 


참고문헌

  • 강성용. 2020. 「인도에는 왜 군부 쿠데타가 없는가?: 인도군의 위상과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 맥락」, EMERICs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신흥지역정보 종합지식포탈 전문가오피니언. (https://www.emerics.org:446/issueDetail.es?brdctsNo=303455&mid=a10200000000&systemcode=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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