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세대를 통해 본 2019년 홍콩시위

2019년 아시아 최대 이슈는 홍콩시위였다. 2019년 초 홍콩 정부가 도입하려 했던 송환법으로 촉발된 홍콩시위는 당해 6월 각각 100만 명과 200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고, 8월부터는 경찰과 시위대 사이의 폭력으로 홍콩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게다가 홍콩시위는 홍콩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쟁점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아시아의 정치 환경 속에서 홍콩시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해야 할지 논쟁이 격렬했다. 한편에서는 홍콩시위를 홍콩 반환 이후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발생되는 문제로 바라보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에 맞선 민주화 운동으로 인식했다. 또한 신자유주의 속에서 배제되는 홍콩 청년의 분노에 주목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들을 고려하면서도 홍콩시위를 2000년대 이후 점점 속도를 높여가는 홍콩의 중국화 과정에서 형성된 홍콩 청년세대의 정체성을 통해 이해하고, 이를 통해서 홍콩의 미래에 대한 전망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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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센트럴(Central) 지역에서 점심에 맞춰 인도로 행진하는 직장인 및 시민(2019.10.11. 저자 촬영)

김재형(서울대학교)

2019년 홍콩시위의 발생

반송환법시위, 홍콩민주화운동, 홍콩항쟁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홍콩시위(Hong Kong protest)는 2019년 2월 홍콩특별행정구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이 수장으로 있는 홍콩 정부에서 홍콩 입법회에 제출했던 ‘범죄인 인도조례(逃犯及刑事事宜相互法律協助法例, 이하 송환법안)’로 인해 촉발됐다. 표면적으로 송환법안은 2018년 대만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대만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법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법안에 대만뿐만 아니라 중국 및 마카오가 포함되면서 홍콩 사회는 이 법안의 도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다. 홍콩 사회의 가장 큰 우려는 이 법안의 도입으로 인하여 홍콩의 정치적 자유가 크게 제약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외국으로 도망친 용의자의 신병을 범죄가 발생한 국가에 인도하는 것은 근대적 법률 체계에서 보편적이지만, 일국양제라고 하는 중국과 홍콩 사이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송환법안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시작된 일국양제 하에서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홍콩은 상당한 정치적 자유를 누렸다. 중국 본토에서는 금지된 종교단체인 파룬궁 활동이나 중국공산당을 비판하는 서적의 출판이 홍콩에서는 가능했다. 심지어 중국 본토에서는 금기인 1989년의 천안문 6.4항쟁의 추모집회도 매년 홍콩에서는 개최되었다. 그러나 홍콩 시민사회는 이러한 정치적 자유가 2000년대 들어서 점차 약화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2015년 홍콩 출판업자들이 중국에 납치·감금된 사건은 홍콩의 정치적 자유가 크게 침해받았다는 홍콩 사회의 인식을 강화했고, 송환법안에 중국이 포함될 경우 중국에 비판적인 홍콩 인사가 중국 대륙에 송환되어 처벌받을 수 있어 정치적 자유는 더욱 훼손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점차 확산됐다.

자료출처 : 2019.10.12. 저자 촬영
침사추이에서 행진을 시작하는 시위대의 모습(시위대가 손바닥을 펴고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섯 손가락은 시위대의 5대 요구를 의미한다.)

 

홍콩시위의 발전과 전개

홍콩시위는 반송환법 시위로부터 시작되어 복잡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첫 번째 시위는 2019년 3월 15일 정치정당인 데모시스토(Demosistō, 香港眾志)가 홍콩정부청사 앞에서 개최한 연좌 농성이었다. 이후 홍콩 최대 시민단체인 민간인권전선이 3월 31일과 4월 28일 각각 송환법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홍콩 사회가 송환법안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홍콩 입법회에서 법안에 대해 본격적으로 심의를 시작한 6월 초부터다. 법안 통과를 앞두고 민간인권전선은 6월 9일 시위를 조직했는데, 주최 측 추산 홍콩시민 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면서 홍콩시위는 대규모화했다. 그러나 홍콩 인구의 약 1/7이 참여해 반대의견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홍콩 정부는 송환법 통과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시위는 더욱 가열됐다. 계속되는 홍콩 사회의 반송환법 반대 압력에 결국 6월 15일 캐리람 홍콩 행정장관은 송환법을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홍콩 사회는 송환법의 연기가 아닌 완전한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지속했는데, 6월 16일에는 홍콩시민 200만 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홍콩 사회의 지속적인 반대에 밀려 결국 9월 4일에서야 캐리람 행정장관은 송환법안의 철회를 발표하게 되었으나, 홍콩 정부와 그리고 이 사태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정부에 대한 홍콩 사회의 불신과 불만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시위과정에서 중국과 홍콩 정부의 시위대에 대한 모욕적 언사와 중국 인민군의 중국과 홍콩의 경계선 앞에서의 무력시위, 그리고 홍콩 경찰의 과도한 무력사용 등으로 인하여 홍콩시위는 과열되어만 갔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의 요구 역시 송환법안의 철회에서 ‘5대 요구’로 확대되었다. 5대 요구는 시기에 따라 변했는데, 중요한 것만 소개하자면 첫째, 송환법안의 완전 철폐, 둘째, 경찰의 과도하고 잘못된 무력사용에 대한 독립적 조사, 셋째, 체포된 시위자들의 석방과 면죄, 넷째, 캐리람 행정장관의 사임, 다섯째, 입법회 의원과 행정장관에 대한 보통선거제 도입이다. 그러나 시위대의 이러한 요구, 특히 마지막 요구인 보통선거제 도입은 홍콩의 헌법인 기본법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 문제로 중국과 홍콩의 일국양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해결이 쉽지 않은 것이었다.

자료출처 : 2019.10.12. 저자 촬영
지하철역에 붙여진 시위대의 한국어 버전 5대 요구 포스터

 

홍콩시위의 특징: 폭력화, 장기화, 국제화

2019년 홍콩시위의 특징은 폭력화, 장기화, 국제화이다. 2014년 우산시위와 비교할 때 그 특징은 더욱 두드러진다. 2014년 8월 31일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기존 선거위원회에서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간선제에서, 2017년에는 선거위원회에서 선출한 후보 중 홍콩시민이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직선제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홍콩 사회는 친중인사가 장악하고 있는 선거위원회에서 선출한 인사로만 선거를 하는 것은 진정한 직선제가 아니라 생각했다. 이에 홍콩의 다양한 시민단체가 직선제와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9월 26일부터 12월 11일까지 중완(中環; Central) 지역을 비롯해 주요 지역을 점거했다. 2014년의 우산시위와 2019년의 홍콩시위는 몇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우산시위는 철저히 평화 시위를 지향했고, 시위 중 이따금 발생하는 폭력을 운동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단속하고 저지했다. 반면 2019년 홍콩시위에서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에 맞서 폭력을 적극적으로 동원했고, 홍콩 사회는 이러한 폭력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홍콩시위의 폭력화는 장기방어적 성격이 강했다. 시위대 해산을 위해 사용된 경찰의 폭력은 최루 스프레이, 최루탄을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곤봉, 고무탄, 심지어는 실탄을 사용한 총격까지 그 수위가 매우 높은 것이었다. 게다가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리에 의한 시위대와 시위 지도자에 대한 테러도 빈번히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위대 역시 점차 무장과 폭력의 수준을 강화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년들로 구성된 용무파(勇武派)는 시위대의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나머지 시위대를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위대의 폭력은 경찰을 향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친중국 성향인 기업이나 상점으로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다국적 기업인 스타벅스가 친중국 기업으로 몰려 여러 매장이 시위대로부터 공격당해 파괴되었다. 또한 친중 성향의 시민이나 중국 유학생이 공격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러한 시위대의 폭력에 대하여 홍콩 사회는 비교적 관대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우산시위에서 어떠한 폭력에도 거부감을 느끼고 비난했던 홍콩 사회의 이러한 변화는 매우 극적이다.

둘째, 우산시위는 불과 3개월에 걸쳐 진행됐고, 마지막 한 달은 시위대의 동력이 떨어져 지지부진했었다. 반면 이번 홍콩시위는 11월 24일 홍콩 구의회 선거에서의 민주파의 압도적인 승리와 2020년 1월부터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19(COVID-19) 사태로 인하여 그 규모는 줄었지만,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홍콩시위의 장기화는 시위 참가자의 일상이 크게 훼손되고 피로감이 극도로 누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가 10월 홍콩 조사 때 만났던 한 젊은이는 2달간 매주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호소했다. 게다가 홍콩의 경제는 시위의 장기화 때문에 크게 침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홍콩의 주요 산업인 관광업은 시위로 인하여 상당한 타격을 받았고, 해외 투자는 홍콩에서 철수하고 있다. 장기화로 인한 타격과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2019년 홍콩시위가 이렇게 장기화되고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자료출처 : 2019.10.12. 저자 촬영
지하철역에 붙여진 시위대 포스터(시위대는 이러한 포스터를 통해 시위 자원을 동원한다.)

먼저 시위대의 5대 요구 중 어떤 것도 홍콩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장기화의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산시위는 요구가 수용되지 않았지만 동력을 상실하여 소멸한 것을 보았을 때, 요구의 수용 여부는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장기화의 가장 큰 이유는 홍콩 사회의 ‘절박함’과 ‘억울함’이라는 강한 정서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뒤에 자세히 논하겠지만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발생한 홍콩의 여러 문제점이 현재 일국양제 하에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과, 변화가 없다면 홍콩의 미래도 없다는 절박함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시위 도중 경찰이 행사한 강도 높은 폭력은 홍콩 사회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이전 신뢰받던 홍콩 경찰이 시민을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모욕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을 경험한 홍콩 사회는 극도의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홍콩 사회의 절박함과 억울함의 기저에는 홍콩의 체제, 더 나아가서는 일국양제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산시위는 국제적 관심과 여러 국제단체의 지지를 받았지만, 국제적 분쟁으로까지는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2019년 홍콩시위는 국제적인 분쟁 양상을 띠었다. 아시아국가들에서 홍콩과 중국 지지자 사이의 논쟁이 발생했고, 각국의 시민사회는 홍콩의 시민사회와 더욱 밀접하게 연대활동을 시작했다. 또 홍콩시위는 미중무역분쟁 과정 중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데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미국 상하원과 트럼프 대통령은 홍콩이 중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보장받는지를 매년 검토하는 홍콩인권민주주의법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홍콩시위는 2020년 1월 11일의 대만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결국 중국이 야심 차게 추진하던 일대일로와 중국·대만의 일국양제는 크게 타격을 받았다. 2019년 홍콩시위는 홍콩뿐만 아니라 중국정부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홍콩시위의 주도 세력: 청년세대의 등장

홍콩중문대 언론정보학과 프란시스 리(Francis Lee) 교수 등 4명의 사회과학자들은 2019년 6월 9일부터 8월 31일 사이에 발생한 시위에 참여하여 시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Lee et al., 2019). 조사결과에 의하면 이 시기 시위 참가자들은 주로 젊은이들이었다. 전체 설문 응답자 중 20세에서 24세 사이가 26.9%, 25세에서 29세가 22.1%, 그리고 19세 이하, 즉 중등학생도 11.8%나 되었다. 전체 시위 참여자 중 약 60%가 29세 이하로 이것은 홍콩시위의 주 참가자가 청년세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10월 중순 홍콩시위를 직접 조사한 필자 역시 대부분의 시위 참여자가 10대나 20대로 보이는 청년들이라는 것을 목격했다. 한편 응답자 중 약 80%가 전문대 이상 재학 또는 졸업생으로 시위 참가자의 전체적인 교육 수준이 높게 나타났다. 2012년 홍콩 통계처 조사에 따르면 홍콩의 대학진학률은 30%로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나는데(주홍콩대한민국총영사관, 2016), 이후 대학진학률이 확대되었음에도 시위 참가자의 교육 수준은 매우 높은 편이다. 마지막으로 시위 참가자의 성별은 남성과 여성이 거의 반반으로 차이가 없었다.

홍콩시위의 중심에는 홍콩의 청년세대가 있었다. 특히 검은 옷을 입고 헬멧, 고글, 각종 보호대와 마스크로 무장하고 경찰과 대치하는 용무파의 대다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년들이다. 그렇다면 이들 청년세대는 왜 이렇게 장기간 홍콩시위에 투신하는가? 홍콩의 청년세대는 무언가 절박해 보인다. 시위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던 작년 10월에 필자가 홍콩에서 만난 한 20대 청년은 “미래가 없다. 모든 것이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절박함의 원인은 무엇일까? 『홍콩의 토지와 지배계급(2011)』의 저자로 유명한 엘리스 푼(Alice Poon, 2019)은 부유한 계급만을 위한 홍콩의 부동산 정책으로 자신의 집을 소유할 수도 독립할 수도 없게 되어 절망감에 빠진 청년들이 홍콩시위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홍콩의 살인적인 물가와 부동산 가격은 청년세대에게 큰 어려움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이들의 시위 참여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부동산 가격의 급등은 홍콩의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한국, 일본, 대만 등의 젊은이들이 비슷하게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리 교수 등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설문 응답자의 거의 절반이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고 있으며, 40% 정도가 저소득층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즉 경제적 요인이 중요하긴 하지만, 반드시 시위 참여의 중요한 동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청년세대를 절박하게 만들었는가?

 

중항융합(中港融合)의 아이러니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 이후 한동안 중국 정부는 홍콩 내정과 사회문제에 대하여 ‘홍콩 정부의 고도의 자치 범위 내’의 일로 간주해 간섭을 최대한 자제했다. 홍콩 사회의 자유도 기본적으로 보장되었고, 종교와 언론의 자유 역시 지켜졌다. ‘세계 정의 프로젝트(World Justice Project)’에 의하면 2015년 홍콩의 법의 지배 수준은 조사 대상 102개 국가 및 지역 가운데 17위를 유지했다. 중국 정부가 홍콩에 불간섭주의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홍콩 행정장관은 베이징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사람으로 임명/선출될 수밖에 없는 정치구조가 이미 만들어졌고, 둘째, 홍콩 사회의 불안을 안정시켜 일국양제의 성공을 국제 사회와 대만을 향해 증명할 필요가 있었으며, 셋째, 홍콩의 경제적 번영과 안정이 중국 경제에 이득을 주기 때문이었고, 마지막으로 홍콩과 중국 사이의 유사국경의 유지는 홍콩의 자유 분위기가 중국 본토에 넘어오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구라다 도루, 장위민, 2019).

그러나 반환 이후 일국양제의 내용은 점차 변화해갔다.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 당시 홍콩 정부는 통화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2002년 말 발생한 사스(SARS)로 인하여 반환 이후 홍콩의 경제는 역대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콩 정부는 중국 정부가 요구하는 ‘국가안전조례’라는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같은 법안을 도입하려 했다. 이미 중국 정부의 정보 검열로 인하여 사스의 직격탄을 맞은 홍콩 사회는 분노했고, 2003년 7월 1일 반환기념일에 50만 명의 시민이 모여 행정장관인 퉁치화(董建華) 사임을 요구하여 결국 법안은 폐지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는 홍콩 사회의 불만은 경제에 있다고 판단하고 홍콩과 중국의 경제를 ‘융합’시키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타결하려 했다. 2003년 6월 29일 중국과 홍콩은 자유무역협정(FTA)보다 수준이 높은 경제협력동반자협정(CEPA)을 체결했다. 이 협정의 체결로 중국으로부터 많은 수의 관광객들이 홍콩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으며, 홍콩금융기관은 위안화로 업무를 할 수 있게 되면서 홍콩의 경제는 되살아나게 되었다. 심지어 2006년부터는 모든 홍콩산 상품이 무관세로 중국으로 수출될 수 있게 되었다(김홍원, 2019). 이후 중국 정부는 광저우, 선전, 마카오, 홍콩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대만구(大灣區; Greater Bay Area)를 구상하였고, 여기에 홍콩을 편입시키려는 계획을 실행 중이다.

이러한 경제 융합 정책의 핵심은 중국인의 홍콩으로의 여행 해금 조치였다. 매년 수천만 명의 중국인 관광객이 홍콩을 찾았고, 이들의 소비력은 홍콩의 경제를 회복시켰다. 당연히 홍콩 사회는 이러한 조치를 환영했고, 2007년 10월 홍콩대학의 여론조사에서는 베이징 정부를 ‘신임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60%에 이르렀고, ‘신임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사람은 13%에 불과했다(구라다 도루, 장위민, 2019). 그러나 매년 홍콩 인구의 6배에 이르는 대륙 관광객들은 홍콩인의 일상생활을 크게 훼손했다. 첫째, 병원 및 교육 등의 사회복지 인프라의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는데, 특히 홍콩에서 출산하는 대륙의 임산부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홍콩에서 태어나 영주권을 갖게 된 대륙의 아이들은 이후 홍콩의 교육을 받게 되면서 또 다른 문제로 이어졌다. 둘째, 2003년 홍콩 부동산의 대폭락 시기 대륙의 부유층이 부동산 투기를 하게 되면서 부동산 가격과 집세가 같이 폭등하여 심각한 양극화 문제가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중국인 관광객들과 홍콩인들 사이의 문화 차이로 감정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홍콩인들은 생필품을 대량으로 구매해 가는 중국인들을 ‘메뚜기’라고 비하했고, 중국인들은 자신을 비하하는 홍콩인들을 ‘개’라고 비난했다(Lee & Sing, 2019). 결국 경제적 융합 정책은 홍콩의 경제적 발전을 가져왔지만, 홍콩인의 일상을 배려하지 못하고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중국인, 중국에 대한 홍콩인의 적개심을 만들어 냈다.

한편 중항융화는 교육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홍콩반환 이후 홍콩의 교육계는 식민주의 교육에서 탈피한 탈식민주의 교육내용으로의 개혁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이러한 교육 개혁에 대한 논의는 첫째, 식민주의 교육관의 극복, 둘째, 학생들의 요구에 맞춘 다양한 교육내용의 도입, 마지막으로 베이징이 승인하지 않은 홍콩과 중국의 역사관에 대한 제한이라는 세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Kennedy et al., 2006). 다른 영역에서와 비슷하게 중국 정부는 반환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교육제도에 개입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베이징은 2010년경부터 홍콩 교육제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2010년 퉁치화 행정장관은 기존의 ‘덕육 및 공민(시민) 교육(Moral and Civic Education)’을 ‘덕육 및 국민(민족) 교육(Moral and National Education)’으로 대체하겠다고 발표했다. 홍콩 교육부가 제시한 교육내용안은 “중국 모델”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중국공산당이 진보적이며 이타적이고 단결된 정당으로 칭송하는 것이었다. 즉 이 교육 개혁의 의도는 초등학교부터 학생들을 중화민족 정체성을 형성시키겠다는 것이었다(Lee & Sing, 2019). 이 계획은 홍콩 사회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자료출처 : 2019.10.12. 저자 촬영
시위대에 의해 공격받아 파괴된 스타벅스
자료출처 : 2019.12.15 저자 촬영
중국/홍콩경찰지지 집회

 

청년세대의 지역주의(Localism)

이러한 교육개혁에 가장 앞장서서 반발했던 집단은 중등학교 학생들이었다. 2011년 5월 29일 중등학교 학생들은 스스로 ‘학민사조(學民思潮, Scholarism)’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정부의 교육개혁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교육개혁 내용이 학생들을 공산주의로 세뇌시키고, 홍콩의 민주주의를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2년 8월 30일 학민사조를 비롯한 반 교육개혁 단체들은 홍콩 정부청사 앞을 점거하면서 반대운동은 거세졌고, 결국 교육부는 ‘덕육 및 국민(민족) 교육’의 도입의 연기를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중등학교 학생들의 반중국 정서에 기반한 정치성향이 형성되었고, 조슈아 웡(Joshua Wong)이 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했다. 이들은 중국 정부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대륙과 홍콩을 분명히 구분하며, 민주주의적 시민성과 홍콩이라는 지역민의 정체성(local identity)을 지향했다. 그리고 이 세대를 특징 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이들이 중국이라는 거인과 싸워서 이긴 경험이다. 이 세대의 승리의 경험은 절망감 속에서도 결국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배태시킨 것으로 보인다.

홍콩의 교육학자인 케리 케네디(Kerry J. Kennedy, 2010)는 2009년 중등학교 학생 4,497명을 대상(평균연령 15.3세)으로 학생들이 생각하는 좋은 시민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다수의 학생들이 ‘법에 복종하는 것’, ‘선거에 투표하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것’, 그리고 ‘애국적인 것’이 좋은 시민이 되는데 중요한 가치라고 답했다. 반면 ‘정당 활동에 참여 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 시민 가치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즉 2009년 ‘애국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청년 세대는 2010년-2012년 반교육개혁 운동을 거치면서 중국정부의 의도와는 다르게 반중국, 지역주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세대는 2014년 우산시위를 주도하기에 이른다. 즉 홍콩 사회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중항융합은 오히려 특히 홍콩 청년세대의 반중국 정체성을 강화했다.

청년세대의 이러한 정체성 변화는 홍콩민의연구소(PORI)의 조사결과에도 반영되었다. 홍콩민의연구소는 반환 전부터 홍콩의 여론 및 정체성 등을 매년 2차례 조사해왔는데, 여기서는 정체성과 관련된 조사결과를 소개한다.

자료 출처 : 홍콩민의연구소(PORI), 저자 재구성

홍콩민의연구소는 홍콩인의 정체성을 홍콩인(Hongkonger), 중국 내 홍콩인(Hongkonger in China), 홍콩 내 중국인(Chinese in Hong Kong), 그리고 중국인(Chinese) 4가지로 구분하여 조사했는데, 이는 홍콩인의 정체성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홍콩인이라 응답한 사람은 홍콩이라는 지역정체성이 강할 것이고, 중국 내 홍콩인이라 응답한 사람은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상황을 강조할 것이며, 홍콩 내 중국인이라 응답한 사람은 중화민족의 정체성이 강할 것이다. 반면 중국인이라 답한 사람은 친중국적 성향이 강하고 중국과 홍콩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다. 홍콩인의 중층적 정체성은 홍콩반환 이후, 2008년을 기점으로 두 차례의 변화가 있었다. 1997년부터 2008년까지 홍콩인 정체성은 점차 옅어지는 반면, 중국인 정체성은 점차 강화되었다. 또한 이 시기 홍콩인과 중국인 사이의 절충점인 중국 내 홍콩인 정체성 역시 2008년까지 지속해서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홍콩반환 이후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홍콩인들이 일국양제와 중국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컸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2008년을 기점으로 홍콩인 정체성의 변화양상은 이전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2008년까지 중국인 정체성이 점차 강화되었던 반면, 2008년부터는 홍콩인 정체성이 점차 강화되고 중국인 정체성이 점차 약해진 것이다. 필자의 현지조사에 의하면 홍콩 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계속 상승했다. 그러나 2010년-2012년 교육개혁을 둘러싼 논쟁 이후 홍콩인들은 정체성을 지워나갔다. 즉 이 시기 중항융합이 본격화되면서 오히려 중국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홍콩인은 자신의 정체성에서 중국을 점차 지워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청년세대의 경우는 변화가 더욱 도드라졌다. 2018년 6월 조사결과, 18세에서 29세 사이의 청년층 중 84%가 중국시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다고 답했다. 이러한 변화양상은 2019년 홍콩시위의 결과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중항융합 과정 중에 발생한 반중 정서는, 청년세대가 홍콩이라는 지역정체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홍콩 시위대는 5대 요구 중 어떠한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이 시진핑 총서기에게 독립적인 경찰 조사 기구 설립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게다가 홍콩의 청년세대는 중국과 홍콩 정부로부터 범죄자로 낙인찍혔다. 다행히 2019년 11월 24일에 열린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비건제파(非建制派, 민주파)가 압승하면서, 중국 중앙정부에 맞서 홍콩 시민사회 진영은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만의 총통 선거 결과는 홍콩 사회에게는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홍콩은 일국양제라는 정치적 제도 안에 묶여 있는한, 홍콩의 주권과 주도권은 중국 정부에게 있다. 게다가 홍콩의 자치권은 2049년까지로 제한되어 있고, 이후 홍콩의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홍콩반환 이후 중항융합의 시도가 거세지면서 홍콩의 청년세대는 중국이 주도하는 미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경험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청년세대가 자신의 삶과 미래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인 되지 못한 삶에 대한 절박함이 현재 청년세대를 움직이고 있는 힘이다. 홍콩의 청년세대는 자신이 배제된 기존의 중항융합을 거부하는 미래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달랠 수 있는, 그리고 이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중국 정부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홍콩의 불안은 계속될 것이다.

 

저자소개

김재형(hyungjk77@gmail.com)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동북아시아센터 선임연구원 및 한신대와 상지대 전임강사이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한센인에 대한 강제격리정책과 낙인 및 차별”에 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의료사회학과 법사회학적 관심에서 한편으로는 전염병환자(소록도)로부터 부랑인(형제복지원)과 정신질환자(수심원)을 거쳐 노인에 이르는 한국의 시설격리제도를 통시적으로 정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격리제도와 사회적 배제 문제를 아시아적 맥락에서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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