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서울대학교)
조선과 러시아의 조우
17세기 중반의 나선정벌(羅禪征伐)은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 접촉으로 알려져 있다. 효종시대에 청나라의 요청으로 동진하는 러시아와 맞붙은 전투가 그것인데, 아쉽게도 전과(戰果)에 대한 기록을 제외하면 러시아에 대한 문화적 인상이나 소회가 드물다. 민중의 생활에서 러시아가 손에 닿는 실감으로 드러난 것은 근 2세기가 지난 19세기 중후반의 일이다. 1858년 청나라와 아이훈 조약을 맺은 러시아는 연해주까지 진출해 왔고, 마침내 조선과 두만강을 경계로 마주치게 된다. 먼저 두 나라의 상인들이 오고가며 상업활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점차 일반 민중들도 이에 가세하여 빈번히 교류하고 더러 국경을 넘어가 터를 잡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현대적 의미에서 명확한 국경의 체계가 있던 게 아니라 ‘강 건너 저편’이라는 식의 희박한 국경 관념이 지배했던 탓이다. 더구나 말이 러시아 영토지, 연해주 부근은 사실상 인적이 드문 공지(空地)에 가까웠다고 한다. 구한말의 폭정과 궁핍, 민란 등으로 어수선했던 조선땅을 떠난 민중은 1860년대 무렵부터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해 갔고, 1884년 무렵에는 그 수가 1,164가구 5,447명까지 불어날 정도였다.
연해주 ― 조선인의 새로운 삶의 터전
러시아어로는 ‘프리모르스키 크라이’(primorskii krai) 즉 ‘바다에 인접한 영역’이라 불리는 연해주는 두만강 위쪽의 북동부 지대인데, 북쪽으로는 아무르 강과 서쪽으로는 우수리 강, 동쪽으로는 동해를 마주하고 있다. 연해주의 또 다른 이름은 ‘원동’(遠東)이라는 뜻의 ‘달니 보스토크’(dal’nii vostok)로서, 멀리는 16세기 말부터 아시아를 향해 끊임없는 동진정책을 펼쳤던 러시아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도달한 마지막 변경을 가리킨다. 오늘날에는 행정수도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인구가 약 195만 명, 면적은 한반도의 4분의 3에 이르는 16만 5,900km2 를 아우르지만, 19세기 중엽까지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었다. 당시 이곳은 청조(淸朝)의 발원지로서 성역화되었고, 봉금령(封禁令)을 내려 출입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아이훈 조약으로 러시아가 진출한 후에도 극동의 오지까지 러시아 관리가 찾아오는 일은 드물어서 조선인들이 농사와 사냥을 위해 몰래 숨어들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은밀히 넘어오던 조선인들은 점차 무리를 지어 이주했고, 러시아 관리에게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러시아인들이 오기를 꺼렸기 때문에 조선인 이주를 적극 장려했고, 이에 따라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연해주 거주민의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 될 정도였다.
러시아혁명과 조선인 혁명가들
러시아 혁명은 연해주의 조선인 사회사에 극적인 분수령을 이루었다. 연해주 개척의 초기에 러시아 정부가 보여주었던 환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견제와 박해로 바뀌었다. 구한말의 혼란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들은 러시아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했기에 착취와 강탈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참에 혁명과 전제정의 붕괴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일깨워 주었다. 1차 대전 중에 제국군에 징집되어 유럽으로 나갔던 조선인들은 전선에서 공산주의 혁명가가 되어 돌아왔고, 다시 그들로부터 촉발된 새로운 사회와 삶의 이상이 연해주의 조선인 사회를 뒤흔들었다.
‘고려인’이라는 명칭의 우여곡절
구 소련 지역의 한인들을 ‘고려인’이라 부르는 근거도 이즈음 나타났다. 1917년 연해주 조선인들이 결성한 정치조직 ‘고려족회’(高麗族會)와 1918년 만들어진 ‘한인사회당’ 산하 군사조직명이 ‘고려적위군’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고려인동맹’이라는 노동자 해방조직도 결성되었고,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창당한 혁명당은 ‘고려공산당’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연해주를 비롯하여 구 소련권 지역의 한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하기 위해 ‘고려’라는 명칭을 택한 것은 어떤 연유였을까?
19세기부터 조선왕조의 폭압을 피해 이국의 변경으로 달아났던 유민들이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그 이름을 따서 자신들을 부르긴 쉽지 않았을 듯싶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 그들은 ‘카레예츠’(koreets)로 불렸기에 어쩌면 옛 고려의 이름으로 새롭게 명명되길 바랐을 수도 있다. 만일 해방이 이루어진다 해도, 돌아가야 할 조국의 이름은 조선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을 법하다. 그래서 1928년 소련으로 망명했던 작가 조명희는 그해 11월 <선봉>이라는 한글신문에 「짓밟힌 고려」라는 제목의 산문시를 발표했던 것이다. 이 시에서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침탈당한 고려인은 곧 프롤레타리아트로 주체화되며, 그로써 해방의 날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요컨대 ‘고려’는 옛 조선이나 대한제국이 아니라 소련처럼 사회주의적으로 건설될 새로운 나라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 체제가 세워지면서 북한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엄연히 사용하는 상황에서 ‘고려’라는 명칭은 공식화되기 어려웠다. 그렇게 잊혀졌던 고려, 고려인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 것은 소련이 해체된 후의 일이다. 러시아 한인들이 남북한 사이의 정치적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38년, 카자흐스탄의 키질오르다로 이주한 <선봉>은 현지에서 <레닌기치>로 재창간했다가 1991년 5월부터 <고려일보>로 개칭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아는 ‘고려인’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소련 당국의 고려인 인식 ― 무국적자 또는 일본인
1921년, 러시아 혁명 이후 왕당파 및 국외세력의 개입으로 일어난 내전이 끝났다. 유럽지역과 달리 일본군이 기세등등하게 활보하던 시베리아 지역의 전투는 그 다음해가 되어야 비로소 종결되었다. 내전 시기 볼셰비키 정부는 고려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고, 연해주 일대의 토지를 재분배하며, 민족평등과 권익실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막상 내전이 끝나도 이행의 기미는 눈에 띄지 않았다. 1923년 연해주 거주 고려인은 공식적으로 10만 6,817명으로 추산되고, 그 가운데 소련 국적자는 32.4%인 3만 4,559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67% 정도는 조선국적자였고, 조선이란 나라는 없어졌으므로 무국적자이거나 일본시민으로 의심받기 쉬웠다. 실제로 소련당국은 비소련 시민권자인 고려인들을 적대시했으며, 일본으로 추방하거나 오지(奧地)로 이송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언제 적성세력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고려인들을 가급적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으로 분리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농업집단화와 생존을 위한 투쟁
때마침 시작된 농업 집단화는 위기에 몰린 고려인들에게 생존의 방편을 확실히 붙잡을 기회로 여겨졌다. 연해주에도 농촌소비에트가 조직되기 시작했고, 고려인들은 재빨리 거기에 등록하여 당국의 관리를 자발적으로 받고자 했다. 그로써 농업화 정책에도 적극 동참하여 소련 당국의 신임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1923년 당시 연해주 고려인 1만 6천여 가구 중 약 86%가 소작농 신세였는데, 집단화에 대한 고려인들의 협력에는 토지 재분배에서 일정한 이익을 얻으리란 기대도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가장 핵심적인 걸림돌이 남아있었는데, 토지를 분배받기 위해서는 소련국적을 획득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고려인들을 관할하는 연해주 공산당은 국적취득 절차를 간소화해 쉽게 소련의 시민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에 반대했는데, 고려인들이 일시에 소련 시민이 될 경우 그들 모두에게 러시아인과 동등하게 땅을 분배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인들이 인구와 토지를 점유함으로써 자치권 주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소련 당국의 우려를 낳았다.
1925년 가을 무렵 토지 분배에 대한 명령이 떨어졌다. 예상대로 러시아인과 고려인들에게 적용된 원칙은 굉장히 차별적이었다. 전자에게는 가구당 35 데샤티나(약 1.092헥타르)를 나누어준 반면, 후자에게는 가구당 15 데샤티나만 책정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고려인들의 불만이 폭증했고, 상당히 난폭한 타개책이 기획되었다. 고려인들을 또 다른 오지인 하바로프스크로 대거 이주시킴으로써 불만을 잠재우려던 것이다. 연해주 북단에서 시작하는 하바로프스크 지방은 연해주보다 더 큰 영역을 자랑하지만 춥고 척박한 오지로서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도 흔쾌히 가고자 하지 않는 지역이다. 소련 당국은 연해주 토지 분배 과정에서 일어난 분란을 가라앉히고, 유능한 고려인 노동력을 활용해 새로운 땅을 개간할 수 있다는 예상으로 흡족해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려인 입장에서는 원동보다도 더 먼 지역으로 반강제 이주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거기서도 2등 시민의 차별과 굴욕을 벗어나지 못할 게 뻔했다.
강제이주의 리허설
고려인 분산이주 5개년 계획은 몇 년 후 실행될 이주기획의 커다란 밑그림이었다. 1929년부터 수천 명 단위로 1933년까지 총 8만 8천 명 정도의 고려인이 하바로프스크의 몇몇 지구로 이송되도록 배정되어 있었다. 이 계획이 심사숙고 없는 즉흥적 산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이주할 장소가 논농사를 주로 짓던 고려인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산지였을 뿐만 아니라 어부와 벌목공 등도 여기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려인들 대부분이 이주에 극력 반대했으며, 연해주 집단농장들도 농사의 주요 인력인 고려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선별해 이주시킨다는 당국의 기획에 적극적인 저지투쟁을 벌였다. 많은 수의 고려인들이 빠져나가면 농장의 생산량이 감소할 테고, 그 질책은 고스란히 농장에 떨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발대로 이주한 고려인들이 현지 적응에 실패해 사망자가 속출했고, 심지어 조선이나 중국으로 도망치는 경우도 생겨났다. 결국 1930년 말까지 약 3천 명 정도만 이주에 호응했고, 전체 계획 자체는 취소되어 버렸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이지만, 이를 1937년의 대이주가 벌어지기 위한 예행연습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적지 않다. 고려인 주민들을 설득하고 행정명령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송하는 대신, 폭력적 강제를 동원해 한꺼번에 옮겨놓는다는 과격한 방법은 이때의 경험을 통해 학습된 결과였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대숙청과 소수민족의 수난
1937년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옮겨놓은 강제이주는 전쟁을 앞둔 소련 당국이 일본에 대한 고려인들의 협력을 두려워해 자행한 만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강제이주가 단기간에 폭력적으로 실행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 전체는 상당히 오랜 준비기간을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가령 앞서 살펴보았던 1930년을 전후한 1차 이주는 스탈린 집권 하에 소련 사회에서 벌어졌던 대숙청의 일환으로 간주되는 형편이다. 1934년 키로프의 암살은 권력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숙청의 상징적 사건이지만, 멀리 변방 연해주의 고려인들 역시 그 여파로 강제이주의 수난을 겪어야 했고, 앞서 보았듯 이주계획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소련 당국에 의해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고려인만이 소련 당국의 의혹과 탄압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강제이주 이전에도 소련 영토의 폴란드인 3만 5천 명, 독일인 1만 명, 이란인 6천 명, 쿠르드인 2천 명 등이 타지로 강제이주 당했으며, 그밖에 핀란드인, 칼미크인, 카라차이인, 체첸인, 잉구시인, 발카르인, 타타르인, 그리스인, 터키인 등도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어야 했다. 소련 내 60개 소수민족 가운데 근 300여만 명이 적성분자 혐의를 받고 고향에서 쫓겨난 셈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아마도 수십만 단위의 거대 단위로 한 민족을 통째로 옮겨놓는 작업은 고려인들에 대해 처음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예고된 폭력과 이주의 공포
1937년의 강제이주가 스탈린 대숙청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어도, 수십만 명의 거대 단위로 한 민족을 통째로 옮겨놓는 작업은 고려인들이 전무후무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길고 가혹한 과정이었는데, 1차 이주가 취소된 후 소련 당국은 고려인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줄이지 않았다. 가령 고려인들의 인구분포와 교육 정도, 경제력과 법적 지위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수집되었었고, 의심스러운 고려인들은 직장에서의 강제해고와 압수‧수색, 체포와 수감 등의 방법으로 억압당하던 참이었다. 1935년부터 1937년 동안 약 2,500명의 고려인들이 체포되었는데, 그들은 연해주 고려인 사회의 지식인과 지도층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종의 예비검속에 해당되는 사건으로서, 그들의 죄목은 불충분하거나 조작된 상태였고, 재판 없이 판결에 회부되었다고 문제삼을 수도 없었다. 특히 1932년 일제에 의해 세워진 괴뢰국가 만주국을 지배하던 관동군과 연결될 수 있다는 의심 때문에 고려인들의 죄목에는 스파이 혐의가 상당수를 차지했는데, 대부분 날조된 증거와 약식 재판으로 총살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라 해도, 실제 강제이주를 강력히 견인했던 것은 1937년 7월 7일 노구교(盧溝橋) 사건으로 발발한 중일전쟁이었다. 소련 정부는 일본의 침략을 목전에 다가온 전쟁 위협으로 보았고, 그에 대비하기 위해 국경지대의 위험요소를 ‘정리’하고자 서둘렀다. 안그래도 의심스러웠던 고려인들을 하루라도 빨리 처리함으로써 유사시 일본과의 전쟁에서 교란받을 가능성을 줄이려 했던 것이다. 1937년 8월 21일 전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의 명령서가 하달되고, 같은 해 10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변경으로 이송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진 강제이주의 출발점이다.
이주열차 ― 움직이는 지옥도
짐을 꾸려 마을의 집결지에 모인 고려인들은 트럭이나 버스를 타고 다시 기차역까지 이동해 갔다. 그곳은 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의 행로를 밟아간 출발점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생존해 있던 강제이주 체험 세대의 구술에 따르면, 고려인들은 ‘와곤’(vagon)이라 불리는 화물칸이나 가축용 운송칸에 태워졌던 듯싶다. 사실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으니, 어떤 열차인지를 알 수 없어도 편안히 승객을 실어나르는 차량은 아니었던 듯싶다. 증언에 따르면 단층 차량의 좌우 벽면에 선반을 붙여 2층으로 만든 다음 네 가족을 태운 경우도 있고, 사람이 많을 때는 그 이상도 얼마든지 탈 수 있었다. 지금도 일부 자료집을 찾아보면 그 당시 열차에 태워졌던 고려인들의 사진이 약간 남아있는데, 대부분 창이 없는 화물칸 같은 공간에 빽빽하게 들어앉았거나 서 있는 장면들이 나온다. 단층을 여러 층으로 개조해 허리를 펼 수 없는데다가 과밀하게 태워서 편안히 앉아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목적지도 모른 채 하루를 꼬박 내달리던 열차는 24시간에 한두 곳에 정차할 뿐이었다. 따라서 탑승한 고려인들은 차가 설 때까지 대소변을 참아야 했고, 열차가 정지해 문을 열 때면 곧장 주변의 화장실로 시합하듯 달려가야 했다. 한 열차에 600명 이상이 타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많은 인원이 한 번에 화장실을 사용하자니 탈이 안 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몇 가지 필수품을 챙기고 나면 열차는 곧장 다시 출발했기 때문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길게 기다릴 여유조차 없었다. 그래서 기차가 서게 되면 사람들은 아무 곳으로나 흩어져서, 대개는 철로변에 주저앉아 배변을 했다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급한 생리현상부터 해결해야 했으니 체면을 중시하던 고려인들이 겪었을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먹는 것을 줄여 배변을 참아보려 해도, 수천 킬로미터를 가는 동안 물이 달라져 입술을 축이는 정도로도 금방 배탈이 나고 설사가 났다. 기본적인 생리현상이 조절 불가능해지면 타인과의 관계가 정상적일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피할 대상이 되고, 불편한 동행이 되어 너나없이 고통스러운 여정이 된다. 게다가 차량에는 어린 아이와 노약자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은 배변을 참는 것보다 필요한 영양을 보충하는 게 더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급한 대로 간단한 음식을 준비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수십 여일의 여정 동안 금세 소모되게 마련이었고, 돈을 가져온 사람들은 정차역마다 먹을 것을 사느라 분주히 뛰어다녀야 했다. 그마저도 없다면 굶거나 구걸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앙아시아 ― 새로운 땅에서
창문 없는 짐칸은 심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가을께 출발한 열차는 겨울이 다 되어서야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열차 안에서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여정이 길어질수록 차에서 내릴 때마다 사람을 땅에 묻는 게 일상사처럼 이어지곤 했다. 좌절감과 절망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 완전한 체념에 빠지고부터는 처음 열차에 탈 때 가졌던 최소한의 자의식이나 체면치레도 사라졌다고 한다. 열차 내부에 여기저기 흩어진 오물과 대소변을 곁에 둔 채 짐승처럼 먹고 자면서 무조건 버티는 길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총 18만 명 정도가 이주행렬에 올랐는데, 그중 25,000-30,000 명 정도가 도중에 사망했다. 끔찍하고도 두려운 참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지 않을 수 없다.
한 달여가 지나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여러 지역에 도착했다. 1937년 10월 25일 예조프 소련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은 당중앙에 극동의 고려인 36,442가구 171,781명이 중앙아시아로 이송되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사람만이 아니었다. 연해주에서 발간하던 신문 <선봉>과 고려극장, 조선사범대학 등의 거의 모든 문화기구들도 함께 이주한 대역사라 할 만한 사건이었다. 척박한 중앙아시아의 오지를 농업지대로 바꾸려던 소련 당국의 의도에 따라 고려인들의 도시거주는 금지되었고, 모두 농촌으로 가서 거기에 적응해야만 했다. 집단적 이주계획에 따라 현지인들이 비워준 거주지에 들어가거나 그들과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고, 그마저도 불가능하면 겨울사막에 토굴을 파서 생활을 꾸려가야 했다. 이주 전에 약속했던 재산의 보상과 시민권 보장은 전혀 가망 없는 일로 판명이 났다. 겨울녘 중앙아시아의 꽁꽁 언 땅을 손끝으로 파헤쳐 굴을 파고 농사를 지어야 했다는 증언이 여럿 남아있다. 거의 매일 사람이 죽어나갔으며, 강제이주 후 첫 번째 겨울에 많은 노인과 영아들이 사망했던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타슈켄트 인근 어느 마을의 경우, 이주해 온 아이들 상당수가 죽고 신생아는 나오지 않는 바람에 1935-38년생이 거의 사라졌을 지경이었다. 참상의 증언 하나를 더 덧붙여 놓는다.
1937년도 9월초 이튿날, 화장실도 없는 짐 싣는 기차에 다 실어서 짐승들처럼 그렇게 실려 갔어. 그거, 내 지금도 생각해 보면 야… 가뜩이나 아이들은 얼마나 죽었겠소.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벌판에다가 던져놓고 너 살겠으면 살고 죽으면 죽고 알아서 하라고 했어. 어쨌든지 아이들이 2살까지는 다 죽었소. 기후가 기후인지라 어린아이들이 2살까지는 다 죽어버렸소. 아침에 일어나면 저 집에서 울음소리 나고, 이 집에서 울음소리 나고, 먹을 물 없고 해서 손도 씻고 빨래도 하고, 그런 물 마시고 애들이 죽고.
해체 이후의 역사와 망각된 비극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철의 장막’ 너머에서 살아가던 한민족의 유민(流民)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을 때를 떠올려 보자. 중국의 조선족과 더불어 소련 지역의 고려인들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송사마다 방영되었고, 관련 서적들이 출판되었으며, 여러 학술대회에서 고려인 학자들을 초청해 중앙아시아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논의가 이어지곤 했다. 무엇보다도 1937년 강제이주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고통받던 고려인 동포들의 아픔을 표시하는 사건으로 널리 회자되어 왔다. 그렇지만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고려인과 강제이주에 관한 관심사는 점차 시들해져 버린 듯한 느낌이다. 이제 고려인이란 단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재외동포로 인식되고 있으며, 청년 세대에게 강제이주의 비극은 더 이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아픈 상처가 아니다. 잘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뼈아픈 과거, 트라우마로 가득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세대에게 그것을 알고 기억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강제이주를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의 질문 속에 다시 되새겨 보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기억의 위기, 기억의 권리
안타깝게도, 강제이주의 참혹함은 기억될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스탈린 시대에는 이주 사실 자체에 관해 발언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로도 소련 당국은 이주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에 관련된 언급이나 연구, 서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려인들의 삶에 크나큰 트라우마를 남긴 이 사건은 정당한 애도를 받지 못한 채 깊은 상처로 남아 버렸다. 사정이 바뀐 것은 소련이 해체될 즈음이었다. 1993년 러시아 연방 최고회의의 결정에 의해 비로소 강제이주 고려인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실질적 보상이나 위로는 아직 요원한 상태이다. 소련이 해체되었기에 독립한 개별 공화국들에게 그 부담이 떠넘겨졌지만, 아직 가난하고 억압적인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이를 모른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화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는 강제이주라는 사건이 망각의 늪에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제이주의 기억은 문서화된 형태로 남겨지지 않았기에 고령화된 체험 세대의 구전에 의지해 회상될 수밖에 없고, ‘소문’의 형태로만 진상이 조금씩 전해지는 실정이다. 직간접적인 소수의 기록물과 생애담, 증언들이 일부 채록되긴 했으나, 체험 세대가 소진해 가는 속도를 전혀 맞추지 못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위안 받지 못한 고통은 그때를 기억하는 몇몇 개인들의 회한 속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강제이주 80년 ― 종결되지 않은 대화
문제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데 있다.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지 벌써 80여 년이 지났고, 그 트라우마를 간직했던 사람들은 자연적 수명을 다한 채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다. 소수의 연구자들과 활동가들만이 힘에 부치는 싸움을 거듭하며, 강제이주의 트라우마적 상흔들을 모아들이는 형편이다. 중앙아시아 현지와 한국에서 만나본 젊은 세대의 상당수는 강제이주에 관해 잘 모르거나 알고자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제를 거론하면 간혹 이런 반문도 듣곤 한다. 당사자들도 기억하길 거부하는 아픈 상처를 왜 자꾸 들추어내려 하냐고. 혹은 다 지난 옛날이야기를 파헤치는 것은 미래를 건설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라고. 확실히 고려인의 청년 세대가 강제이주에 관해 모르는 것은, 흡사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에 관해 잘 모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더욱 더 이 망각된 기억, 애도받지 못한 비극에 관심을 기울이고 되새겨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떤 실용적인 목적이나 이유를 떠나서, 지금 우리가 알게 된 그 고통의 역사를 이제 우리 아니면 누가 기억하고자 하겠는가? 역사에는 단지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기억의 막중한 책임이 부과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강제이주와 우리가 바로 그 같은 경우라 하겠다.
사람들은 상투적으로 말한다. 미래를 향해 나가려면 과거는 덮어두거나 밀쳐둘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지나온 자취를 되새기지 않은 채 향하는 미래는 얼마나 가능한 것일까? E.H. 카의 말처럼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대화의 한쪽 편을 망각한 현재가 어떻게 온전한 미래를 꿈꿀 수 있겠는가? 올해 초 평창올림픽을 기념해 열린 국제인문포럼에 참여했던 고려인 작가 중 한 사람은 강제이주라는 잊히지 않는 기억을 위한 투쟁에 한국인들이 동참해 주길 강력히 촉구했다. 하지만 이는 민족 정체성이나 동족의식 등에 의거한 통분의 표현은 아니었다. 그에 따르면 강제이주는 비단 한민족의 애통한 과거지사일 뿐만 아니라 아우슈비츠에서 숨진 유대인들, 혹은 세계 곳곳에서 인권을 탄압당하고 말살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동일한 차원에 놓인 사건이다. 강제이주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의미화하는 것은 민족사의 한 장면으로서뿐만 아니라 인류사의 일부로서 가치있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그것만이 전 지구적 시대에 소수민족의 불행했던 역사를 인류 전체가 수용하고 기념할 수 있는 길이 되지 않을까? 강제이주의 비극으로부터 80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그 기억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의미화하고 세계와 공유함으로써 반복되지 않도록 저항하는 일이다. 그렇게 과거를 감싸안고 현재 속에 견실히 끌고 가는 것만이 미래를 여는 진정한 방법이 되리라 믿는다.
저자소개
최진석 박사(vizario@gmail.com)는
서울대학교 노어노문과를 졸업하고, 러시아인문대학교에서 문화학(문화연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 강사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술로는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러시아문화사 강의』(공역)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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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