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균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기존 민주주의의 한계와 숙의 민주주의라는 대안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연구활동을 하는 비영리기구인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에서는 전 세계 민주주의와 관련된 통계를 매년 내고 있다. 이 기관에서 발간하는 ‘Freedom in the World’라는 보고서에서 최근에 나타나는 주요한 메시지는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다(Freedom House, 2018). 20세기에 사람들은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이야기한 민주주의의 물결들(waves of democratization)을 통해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경험했고, 그러한 민주주의의 전 세계적인 확산은 불가역적인 과정으로 여겨졌다(Huntington, 1991). 그런데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민주주의의 확산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측면에서 사람들은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민주주의로 구분할 수 있는 국가의 수가 줄어든 것이다. 민주주의로 이행을 하다 정치적 불안정 및 군사적 이유로 권위주의 상태로 회귀한 국가들로 인하여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 둘째, 비교적 선진 민주주의로 여겨지는 국가들에서도 극우로 치닫는 우경화 현상이 나타나고, 경제적 불평등과 불안으로 인해 대의 민주주의에 근본적 문제가 있음에 대한 관찰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국 하버드 대학 정치학과 교수들인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zky)와 다니엘 지블랏(Daniel Ziblatt)이 올해 초에 내놓은 책, “민주주의 국가들은 어떻게 죽게 되는가(How Democracies Die)”라는 책도 그러한 맥락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Levitzky and Ziblatt, 2018).
숙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기존 민주주의의 병폐를 치유하고 보완할 수 있는 대안적 형태의 민주주의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사실 서구사회에서 숙의 민주주의가 관심을 받은지는 30년 가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에 조셉 베셋(Joseph Bessette)에 의해 숙의 민주주의가 새로운 용어로 탄생하고, 존 드라이젝(John Dryzek)이 이미 2000년에 정치 사상에 있어서의 숙의적 전환(deliberative turn)을 이야기한 이후 지금까지, 숙의 민주주의는 정치 이론가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숙의 민주주의란
숙의 민주주의(또는 심의 민주주의; deliberative democracy)는 투표나 여론 조사를 통해 일반 시민들의 선호를 간단히 조사하여 그것으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선호집합 민주주의’ 아이디어를 반대하고, 자유롭고 평등하며 열린 토론을 바탕으로 참여의 질을 높여 공공문제 해결을 하는 민주주의의 이상이자 현실적 방법론이다.
숙의 민주주의에서의 숙의 과정은 어떠한 쟁점에 대해 찬반 논쟁을 해서 한 쪽이 승리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숙의의 핵심은 바로 사려깊은 저울질(weighing)이다. 2018년도에 시행된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김영란 전 대법관은, 그러한 숙의의 과정을 일반 시민들이 행하는 ‘재판’에 비유했다[1]. 서로 다른 주장들을 서로 대비시키고 그것들의 설득력을 저울질하여 평가를 하는 과정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러한 숙의의 과정은 타인과의 토의를 통해서 진행되기도 하지만, 내적 성찰, 그리고 내적 숙의(“deliberation within”)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 또한 핵심적 요소로서 포함한다. 즉 서로 다른 논거와 가치들을 타인과의 토론을 통해 대립시키거나 한 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각각을 서로 대면시킨 후 그러한 대립적 관점들을 사려깊게 비교하여 설득력의 우위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숙의 민주주의는 대중여론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 대중여론 민주주의에서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개인들의 고정된 선호 가정은 그러한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문제점으로 비판받아왔다. 개인이 충분한 정보를 습득하지 못하고, 타인과의 충분한 의사소통이나 의견 교환, 토론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며, 해당 문제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놓는 의견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여론’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여론이라 할 수 없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대중여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Public opinion does not exist)’라고 말한 배경이 이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숙의 민주주의에서는 개인의 선호라고 하는 것은 토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보며, 민주주의의 의미는 그러한 지속적인 과정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갈등을 협력과 성찰과 동의로 전환시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본다.
숙의 민주주의를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운용하고 현실화시키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법론은 공론조사, 시민배심원, 시나리오 워크숍, 합의회의 등인데, 이러한 숙의를 위한 틀을 갖추어지면 비교적 적은 숫자의 시민집단이 구성되어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작은 집단을 미니공중(mini-public)으로 일컫기도 하는데, 숙의 토론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전체 시민들을 대표할 수 있는 작은 공중(公衆)이 되게끔 구성한 것이다. 미니공중은 사회의 주도권 세력들에 의해 배제된 사회적 약자들의 선호와 이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참여 구성원들이 대표성을 가지는데 중점을 둔다. 올해 진행된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과정에서 시민참여단을 대상으로 “여러분이 작은 대한민국입니다”라는 수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이 그러한 대표성에 대한 강조를 보여준다. 미니공중에 포함된 개인들은 단순히 자신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그들은 의사소통을 통해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말한 이성의 공적 활용(public use of reason)을 통해 자신의 이득만이 아닌 사회 전체를 위한 공공성과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는 이성을 발휘시키기를 기대 받는다(Habermas, 1995). 이러한 소규모 숙의에서는 하버마스가 말한, 최선의 논증이 가지는 힘(“forceless force of the better argument”)이 참여하는 개인들의 그 어떤 사회적 위치보다도 더 강력한 권위와 힘을 가지게 된다.
한국의 숙의 민주 ‘열풍’
한국에서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촉발되게 된 이유에는 사회적 갈등 특히 공공갈등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갈등 해결과정에 일반 시민들이 보다 적극적인 주체로서 참여하고자 하는 배경이 있다. 기존의 국가 정책이 DAD (Decide-Announce-Defense) 방식으로,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 2000년대 이후로 갈등 및 분쟁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현상이 나타났다. 갈등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OECD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공공갈등이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게 됨에 따라 정책적 차원에서도 공공갈등을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이 숙의 민주주의 그리고 그와 관련된 다양한 숙의 모델들이다.
한국의 숙의 민주주의의 역사는 아직 비교적 짧고 사례도 많은 편은 아니다. 2005년 참여정부의 8.31 부동산 정책에 대한 공론조사가 최초로 실시된 적이 있었다. 2011년에는 경찰청과 국가경쟁력강화 위원회가 기존의 4색 신호등을 3색으로 전면 교체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는데, 이에 대해 언론과 여론, 그리고 정치권에서 반대 의견을 펴자 경찰이 시민참여형 숙의 여론조사를 실시한 경험이 있다. 숙의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교체 찬성이 27%에서 50%로 증가하였으나, 경찰청에서는 아직 시민의 공감대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고 판단한 후 무기한 연기한 바 있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공론화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숙의 민주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게 된 계기는 2017년 신고리 원전 5·6호기의 건설 중단·재개 여부와 관련된 공론 조사였다. 탈원전과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이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후보 당시 공약이었던데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불거지던 원전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2016년 울산·경주 등에서 지진이 발생하면서 원전 건설반대 운동이 힘을 얻은 것이 조사를 실시하게 된 주요 배경이었는데, 결국 이것이 현 정권의 정책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이슈로 불거지면서 여·야간 대립과 시민사회에서의 의견 충돌이 심화되었다. 청와대는 원전 건설을 일단 중지하고 건설 재개여부와 향후 원자력 관련 에너지 정책을 공론화 작업을 통해 결정하겠다고 선언하였고, 국무조정실을 통해 공론화 위원회가 구성되어 출범하게 되었다.
공론화 위원회가 출범이 되고나서, 2017년 9월부터 12월까지 한국 사회에서 실질적으로는 처음으로 전국 단위의 대규모 공론조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일반 시민 2만 명 대상 전화조사를 실시하고, 그 응답자들을 성‧연령‧원전건설 재개에 대한 입장에 따라 층화하여 무작위로 500명을 선정, 시민참여단으로 선정하여 그 시민참여단이 (최종 471명) 자료집 및 온라인 자료를 통한 학습 그리고 오리엔테이션과 2박 3일 동안의 합숙 토론에 참여하면서 집중 숙의를 하였다. 숙의 과정이 끝난 후 설문을 통해 시민참여단의 최종 의견을 받아 원전 재개라는 권고안이 도출되었고, 공론화위원회가 조사 보고서에 정책권고안을 담아 국무총리에게 전달, 최종적으로 대통령은 그 권고를 수용하여 원전건설을 재개하고 세부적 내용들에 따라 향후 정책 방향을 따르는 것으로 공표하였다.
여기서 사용된 방법론은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제임스 피시킨(James S. Fishkin) 교수에 의해 제시된 공론조사 방법과 상당 부분 유사한 ‘시민참여형조사’라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2], 숙의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의견을 토론 전후로 물어본 후, 최종의견의 비율과 변화를 고려하여 정책결정에 반영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3].
숙의 모델 적용의 확산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한국에 본격적인 숙의 민주주의가 도입되는 신호탄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학계나 시민단체 등에서의 여러 비판적 평가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성공적 시도였던 것으로 인식되었고, 특히 이후 원전 건설에 대한 사회적 갈등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사그러들게 됨에 따라 공론조사의 효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신고리 공론화가 이렇게 성공적 평가를 받게 되자, 기타 이슈들도 숙의를 통한 의견 수렴을 시도하는 사례들이 생겨났다. 신고리 공론화 이듬해 초, 문재인 대통령은 역시 자신의 공약사항인 개헌을 공론화 하기로 하였고, 이어 대통령 자문기구인 정책기획위원회 산하에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이 위원회를 중심으로 약 한 달여간 권역별 숙의토론회, 2천명 대상 여론조사, 주요 기관과의 간담회, 그리고 온라인 웹사이트를 통한 의견수렴 등이 진행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위원회 위원 30명은 최종적으로 대통령에게 헌법 개정 자문안을 제출하였다. 이 과정 역시 다시 한 번 중요한 국가적 사안에 대해 숙의적 절차를 진행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나, 개헌이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전체적 숙의 과정이 두 달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지나치게 급하게 해치워졌다는 점, 전체적인 국민과의 소통이 거의 부재했고 정보 또한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 등이 비판을 받았다.
이어 2018년 4월에는 교육부가 역시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국가교육회의에 ‘대학입시제도 국가교육회의 이송안’을 보내면서, 국가교육회의가 2022년도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추진을 시작, 공론화 위원회를 구성‧운영하게 되었다. 이 경우 전자들에 비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공론조사 방식이 아닌 시나리오 선택형 조사가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즉, 가능한 대입제도 개편 방안에 대해 4가지 시나리오를 수시‧정시 비율, 수능 절대평가 전환 등을 조합해 마련한 것이다. 숙의에 참여한 최종 약 500명의 시민참여단이 각 시나리오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이와 같은 숙의 민주주의적 어프로치는 전국 단위의 굵직한 사안들에 대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 대구, 울산, 제주 등 각 지자체들에서도 지역 개발이나 민생 현안과 관련된 이슈들을 시민참여형 숙의 토론을 통해 해결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이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이처럼 숙의 민주주의 모델이 빠르게 확산하는 것은, 고도화 되어 있는 사회적 갈등을 풀 수 있는 다른 마땅한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가장 크다. 물론 우리 사회에 특유하게 존재하는, 어떤 좋은 것이 있으면 순식간에 확산 및 모방이 이루어지는 특성에 연유하는 측면도 있지만, 시민참여형 숙의 모델이 사회적으로 강하게 요청되는 측면이 없었더라면 이와 같은 빠른 확산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낮은 정당‧국회‧정치인 신뢰수준도 대의 민주제에 대한 불신과 냉소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숙의 민주 모델에 대한 정당성을 높인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서의 숙의 민주주의, 특히 비교적 특수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사례에 주로 초점을 맞추면서, 일본과 몽골의 사례를 더불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의 협상 민주주의(協商民主主義)
서구의 경우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과 실천적 시도들이 90년대부터 다양한 방면으로 시작되었다면, 중국의 경우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최근에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반 자체가 그 전에는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견강부회적 해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간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전통이 유교 문화권에서도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공론(公論)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하였듯, 일종의 유교적 공론장으로서 동양 사회에서도 존재해왔다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어왔다. 예를 들어, 리쥔루(李君如) 같은 학자는 숙의 민주적 전통이 현대 중국 건설의 역사와 이후 국가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역설한다.
현대 중국에서 숙의 민주주의는 숙의 민주나 심의 민주라는 단어보다는 중국 공산당 중앙편역국의 번역대로 주로 협상민주(协商民主)라는 용어를 통해 이야기 된다. 2001년에 하버마스가 방중을 하여 숙의 민주를 언급하고, 2003년에 정치철학자 위커핑(俞可平)이 서구의 숙의민주주의 이론을 학술적으로 본격적으로 소개하면서 점차 중국 학계와 정계에 숙의 민주이론이 중국적 맥락에서 정착하게 된다. 중앙 지도부 차원에서 협상 민주주의는 상당히 중요한 중국식 거버넌스의 요소로 강조되어 왔다. 2012년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시 후진타오 주석은 협상민주주의가 인민민주주의의 중요한 형식이라 역설하며, 이와 관련된 제도를 발전시키고 다양한 국가기관들에서 협상민주를 활발히 사용하여 사회경제적 문제를 실용적으로 해결해나가기를 강조하였다. 협상민주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18차 대회 보고나 후진타오 노선에서 강조된 민본주의, 그리고 기층(基層)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와도 연관되어 있고, ‘중국특색 사회수의 민주정치’라는 큰 틀 속에서 점진적으로 민주정치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2017년 10월에 개최되었던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의 당대회 보고에는 숙의 민주에 대해 보다 의미있는 강조가 이루어진다. 19대 보고는 사회주의 협상민주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함을 말하면서, 더 나아가 “협상민주는 공산당의 주요 지도 방식이며, 사회주의 민주정치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형식이자 독특한 장점”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이 앞으로 협상민주를 “정당 협상, 인민대표 대회 협상, 정부 협상, 정치 협의 협상, 인민단체 협상, 기초 협의 협상 및 사회 조직 협상” 등 다양한 수준에서 광범위하게 제도화 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협상민주가 중국의 ‘사회주의 민주’를 구성하는 핵심 축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것이며, 기층 단계부터 최고 지도부까지 모든 영역에서 중국식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방법론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협상민주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이러한 강조는 인민대중이 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향후 정치시스템이 적응적으로 진화할 방향을 명확하게 그려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중국의 일반 대중들이 당국에 원하는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 도입과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지역에 누적된 현안들을 해결함에 시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그 과정에 있어 정치경제적 투명성을 제고하여 부패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개인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을 일반 대중들은 가장 원하고 있는 것이다. 증가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서서히 감소하는 경제성장률, 그리고 눈높이가 높아진 중국 인민들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요구, 상호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다양한 이익집단들 간의 갈등해결, 그와 동시에 확보해야 하는 성과 정당성(performance legitimacy) 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역적 수준에서 직접 민주주의와 숙의 민주주의적 성격이 혼재된 제도들을 시행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 지역적 수준에서는 어느 정도 숙의 민주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들이 전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농촌지역에서 80년대에 인민공사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집단적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대안적 시스템이 촌민위원회라는 형태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를 감독하는 촌민대표회의도 등장하였다. 도시지역에서는 90년대부터 시민합의회의, 시민공청회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관련된 사례로 가장 유명한 것은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여러 차례 이어진 중국 저장성 (浙江省) 원링시(温岭市)의 민주간담회를 꼽을 수 있다. 여기서는 공장부지 입지 등 산업시설 및 지역개발 관련된 개발 계획 문제를 시 간부들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모아 의견을 듣고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형태로 정책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아예 공식적 공론조사의 모양새를 갖춘 방식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무작위로 선발된(random sampling) 시민들이 숙의 토론에 참여하는 시도를 하였다. 원링시(温岭市)의 원자오진(温峤镇)이나 쩌궈진(泽国镇)에서의 민주간담회 그리고 기타 민정간담회, 민주의정회, 민주이재회 등 다양한 시민참여 숙의 모델이 등장하였고, 이와 비슷한 형태의 협상민주적 제도들이 현재 중국에서는 전국에 걸쳐 운영되고 있다.
보다 전국적 단위에서의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중국은 매우 거대한 국가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두 듣기는 힘들다. 그래서 후진타오 주석이 2008년, 2012년에 인민망(人民網)과 인터넷을 통해 네티즌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상징적인 제스쳐를 취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국가 의료보건 시스템 개혁도 대규모의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이에 따라 정책을 위한 의사결정들이 이루어졌다.
중국식 ‘협상민주’의 한계는?
하지만 중국의 사례에서 여전히 많은 한계를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명백한 첫 번째 문제는, 정치학자 이언 샤피로(Ian Shapiro)가 이야기한 숙의 민주주의 단점과 관련된 것으로, 이러한 종류의 민주주의는 권력의 문제 그 자체를 거의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Shapiro, 2016). 민주주의의 본질로 “비지배(nondomination)”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는 샤피로는, 요즘 유행하고 있는 숙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사실상 더 나은 정책을 만든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고, 오히려 사회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으며, 무엇보다 지배적 정치권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샤피로의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몇 가지 측면에서 잘못되었거나 과장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숙의 민주주의 자체가 정치적 권력이나 자본의 힘에 대해 상당부분 눈을 감고 있다는 지적은 타당한 부분이 있다. 중국에서 협상 민주주의를 강조할 때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문제들, 즉 정치적 권력은 누구의 손에 놓여져 있는가, 자본을 가지고 있거나 통제할 수 있는 힘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 등에 대한 근본적이고 중요한 물음은 가려지고, 숙의 민주주의 특유의 일상생활 중심의 실용정치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과 집중이 다른 곳으로 모아지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서의 협상 민주주의는 기존 체제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수단으로 평가를 하고, 협상 민주를 주장하는 관방 학자들이 주창하는 중국식 협상 민주의 특징들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인다.
중국의 사례가 보이는 두 번째 문제는 바로 ‘협상’이라는 단어와 관련되어 있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 협상(consultation, negotiation)이라는 단어는 서구에서 쓰이는 숙의/심의(deliberation)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정치학자 팡닝(房宁) 등의 협상민주 이론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듯이 협상 민주주의에서 협상의 목적은 결국 분열을 막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사회전체를 먼저 생각하는 ‘안정’ 위주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연 숙의가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더 나은 대안을 찾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서로위키(Surowiecki)가 이야기하는 ‘대중의 지혜(Wisdom of Crowds)’에 따르면, 다수의 사람들이 집합적으로 내놓는 판단과 의사결정은 소수의 사람이 내놓는 의견보다 더 올바른 결정에 가깝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요구되는 조건 중 한 가지는, 의견의 다양성(diversity of opinions) 충족이다. 이를 숙의 민주주의와 연결시켜보면, 비록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충분한 정보와 의사결정을 위한 시간과 상호간 의사소통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일군의 일반 시민들이 더 나은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을 찾을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각 개인마다 처한 다른 상황들, 자신들만의 체험(local knowledge)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의견들이 모여, 그 다양성을 바탕으로 좋은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적 협상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이 내놓는 의견들이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대중의 지혜는 최상의 정책을 내놓는 기제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하고, 기존 체제에 지속적 정당성을 주는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에서 협상 민주주의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 약칭 CPCC 혹은 정협)라고 하는 제도/기구와 종종 연결되어 이야기될 때 나타나는 문제점이다. 공산당 전체대표회의나 관방 학자들이 내놓는 문서에서 중국 협상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로 정협 혹은 중국정치 상층부의 정치협상제도가 종종 이야기 되는데, 정협에서 이루어지는 협상이 과연 최대한의 의견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휩쓸려가는 의견 동질화(homogenization) 없이 진정한 숙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즉 당의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협상제도가, 체제비판이나 검열 문제와 같은 의견 다양성을 뒷받침 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숙의 민주적 목적을 달성하는 제도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꾸준히 비판이 있어왔다.
샤피로의 또다른 주장은 민주주의로의 점진적이고 부드러운, 합의된(negotiated) 이행은 오히려 지배 계급의 결속력과 권력을 공고히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협상민주를 기반으로 하여 증량민주/점진민주(incremental democracy)의 경로를 따라가는 중국식 ‘사회주의적 민주(社會主義民主)’가 좀처럼 쉽게 우리가 생각하는 서구적 민주주의의 형태로 이행되지 않으리라는 예상을 가지게도 한다.
물론 이러한 이유들을 바탕으로 반드시 어두운 전망만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시도되는 숙의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온 허바오강(何包钢)은 마크 워랜(Mark E. Warren)과의 글에서, 중국에서 시도되는 숙의 민주의 사례들이 궁극적으로 기존의 권위주의적 지배체제를 공고히 할 것인지 아니면 숙의 과정 자체에 담겨있는 근본적으로 리버럴한 속성들이 점진적으로 더 심화된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기제로 작동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엇갈린 예측들이 나오고 있음을 제시한다(He and Warren, 2017).
현재로서는 중국식 협상민주주의가 그것을 경험하는 인민들로 하여금 서구식 선거민주주의를 선호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연구자료는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그렇지만 중국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협상민주주의의 사례를 보았을 때, 그러한 경험들이 중국의 정치시스템을 보다 더 인민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들 수 있고, 또 기존에는 일방적으로 하향식으로 처리되던 정책들을 지역에서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시민들의 다양한 권리 의식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중앙 지도부에 대한 전국 단위 선거를 요청하게끔 하거나, 일당체제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협상민주의 모든 과정이 현재 정치체제의 틀 내에서 작동하면서, 궁극적으로 현재의 정치체제를 위해 기여하도록 이론과 방법론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숙의 민주주의는 상층부에서는 정치협상이라는 제도 및 기관을 통해 당과 당 외부 간의 협상을, 그리고 기층부에서는 지방 정부 및 간부들과 인민들 간의 협상 혹은 서로 다른 이해집단들 간의 협상을 추구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물론 협상이라는 통치를 위해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제도적 수단을 통해 중진국 함정이나 체제이행의 함정 속에서 화합과 안정을 꾀하는 중국정치의 맥락, 그리고 지방정부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실적을 쌓기 위한 전략적 목적도 자리잡고 있다(장윤미, 2011).
물론 중국의 협상민주주의에 대해 그 동기를 비판하면서 무조건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선거민주주의와 협상민주주의를 적절히 섞어서 가장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중국특색의 민주정치를 서구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중국의 정치와 사회를 논할 때 그리 효과적인 접근방법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허바오강과 마크 워렌이 지적하듯이, 진정한 숙의를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He and Warren, 2017). 민주주의가 갖추어지지 못한 조건에서는 숙의의 장이 권력에 의해 왜곡되거나 영향을 받는다. 민주주의가 성숙되지 못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숙의는, 지방 지도자나 엘리트들이 책임을 떠넘기는 용도로 활용되거나, 인민들의 생각을 정보로 활용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거나, 시장경제를 발전‧유지시키는데 활용되는 목적 정도로 이용되는데, 이런 경우 진정한 의미의 숙의 민주주의가 발전된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일본의 숙의 민주주의
일본의 숙의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두 가지 모두 피시킨의 숙의민주주의 센터(Center for Deliberative Democracy; CDD)로부터 가이드를 받아 공론 조사(Deliberative Polling®)가 진행된 전국 단위 공론조사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에너지 정책과 관련된 관심과 열기가 고조되자, 정부는 에너지‧환경 회의를 설치하고 2012년 9월에 ‘에너지‧환경 선택지’라는 공론화 과정을 실시하였다. 이 공론조사에서는 2030년까지 발전량에서 원자력 에너지 비율, 신재생 에너지 비율, 화력 에너지 비율을 각각 몇 %씩 차지하게 바꿀 것인가에 따라 3가지 에너지 정책 시나리오가 제시되었는데, 원자력 비율을 0%로 낮추는 ‘제로 시나리오’, 원자력 비율을 15%로 하고 신재생 에너지 비율을 30%로 하는 ‘15 시나리오’, 그리고 원자력 비율을 20-25%로 맞추는 ‘20-25 시나리오’이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의견 청취회, 공론 조사, 인터넷‧우편 등을 활용한 의견 수렴을 활용하여 공론화 과정을 진행하였다. 공론조사 결과는 상당히 놀라웠다. ‘원전 제로 시나리오’가 공론조사에서 지지율이 상당히 상승한 반면, 기타 시나리오들은 상당히 하락하였다. 결과적으로 모든 공론 조사에서 ‘제로 시나리오’가 가장 우위를 점하게 되자, 당시 노다 내각은 이 공론조사 결과를 국무회의에 올려 실제로 2030년까지 탈원전을 완료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그러나 2012년 말 정권이 아베 신조의 민자당으로 교체되면서 실질적으로 백지화되는 결과를 맞았다.
2011년 5월에는 게이오 대학이 NHK와 손을 잡고 스탠포드의 CDD로부터 자문을 받아 연금제도 개혁안을 ‘연금제도, 세대의 선택’이란 제목으로 공론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전국을 대상으로 3,000명 1차로 선발되고, 이 중에서 최종적으로 127명이 집중 숙의에 참여한 이 조사에서는 일본사회의 급속한 고령화와 관련하여 기초연금을 전액세금으로 지탱하는 것이 문제화 되자, 연금을 민간 자본으로부터 보완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소비세를 증가시키는 방식을 택할 것인지 등에 대해 공론화 작업을 벌였다. 공론조사 결과 소비세를 인상하는 안이 지지를 얻었는데, 찬성률이 64%에서 75%로 늘었고, 반대가 32%에서 19%로 줄어들었다.
이 밖에도 관심을 가지고 볼만한 일본의 숙의 민주주의 사례들은 많이 있다. 한 가지는 2014년에 삿포로 시의 제설 시스템 및 눈 관리 방안에 대한 숙의이다. 이 숙의 바탕에는 사실 기존에 이미 지역에 구축되어 있던 제설 파트너십 제도와 같은 숙의형 제도들이 자리잡혀 있었고, 그러한 제도적 기반 위해서 시정부와 시민들의 숙의 역량과 동기가 축적되어 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설 정책에 대한 성공적인 숙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밖에도 2009년 지방자치제도와 관련된 도주제(道州制) 관련 숙의, 2011년 홋카이도에서 광우병 대책과 관련해 진행했던 공론 조사 등이 주요한 사례이다(김정인, 2018).
이와 같은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일본에서 숙의 민주주의는 광범위한 관심과 도입보다는 예외적인 수준에서 시도되는 실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정책 및 의사결정, 갈등해결 과정이 일본의 기존 법제도 틀 내에서 처리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숙의 민주주의의 범위를 어디까지 잡느냐와 관련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지역 단위의 생활정치가 비교적 활발하게 발달되어 있는 일본의 경우 그러한 제도적 틀 내에서 숙의 토론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숙의 민주주의가 사회 전반에서 대안적 민주주의 방법론으로 주목을 받으며 시행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일본에서의 숙의 민주주의는 일본 사회가 맞닥뜨린 가장 큰 대표적인 국가적 난제들, 즉 원전문제와 고령화에 따른 연금 문제를 기존의 정치제도를 통해 풀기 어려움에 따라, 미국의 공론조사 기법을 빌려와 돌파구를 모색해본 예외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사실 공론조사가 정책‧의사결정 과정이 결정적 장애물에 막혔을 때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줄 수 있는 예외적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할 수 있다.
몽골의 숙의민주주의
몽골은 위의 한중일의 사례와는 대비되는 특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헌법 개정 방향에 대한 공론 조사를 했다는 점에서도 특이하지만, 기존의 법적 제도적 틀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플랫폼을 전면적으로 구축하는데 공론 조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훨씬 능동적인 면모를 보인다.
몽골은 1992년에 민주적 헌법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소비에트식 정치시스템과 전통적 요소들이 혼재된 법제 그리고 독일식 의회민주제도가 불분명하게 혼합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민주화 이후에도 러시아식 대통령제와 독일의 내각제가 어색하게 조합된 형태로 존재하면서, 대통령의 역할이 불분명하고, 행정부와 사법부의 다양한 영역에서 기관들 간 이해충돌 및 갈등, 독립성 문제가 발생하는 등 여러 문제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따라 헌법 개정에 대한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는데, 헌법 개정의 방향성과 우선 순위에 있어서 어떤 것을 중심에 둘지, 방향성은 어떠해야할지 등에 대해 여러 혼란과 갈등이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2017년 2월에는 헌법 개정이 있을 시에 그 전에 반드시 공론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중요한 법이 통과되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통과된 법으로, 공론 조사를 개헌 과정에 제도적으로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숙의 민주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제도화한 케이스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러한 법을 바탕으로 하여 2017년 4월에는 헌법 개정과 관련된 첫 번째 전국 공론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개헌에 있어서 고려할 6가지 영역을 주제로 하여 몽골 통계청이 샘플링을 주도하여 최종 669명이 1박 2일의 숙의 토론 참여하였다. 이 공론 조사를 통해 시민들이 생각하는 개정된 헌법에 포함될 최우선의 요소들이 뽑혔고 구체적인 정책 안들에 대해서도 1, 2차 조사를 통해 숙의를 통한 의견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조사되었다.
몽골은 이미 2015년 12월에도 ‘내일의 도시’라는 공론화로 울란바토르 도시개발과 관련되어 어떠한 프로젝트를 우선 순위에 두고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 317명을 대상으로 1박 2일의 공론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 조사 결과 산업단지 구축이나 물류 센터 구축, 고속도로 및 지하철 건설과 같은 굵직한 사업들보다 울란바토르의 학교와 유치원이 난방 시스템을 개선시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로 선정되었다는 점이 특이할 만하다.
이러한 몽골의 사례에서는 두 가지 점이 주목할 만하다. 첫째로,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과 토양이 비교적 부족한 국가에서 숙의 민주주의가 매우 성공적으로 시행되고 문제 해결에 결정적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할 점은, 처음부터 공론 조사가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몽골 정부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려던 공론 조사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있어서 결과적으로 미국의 CDD에 자문을 구하여 피시킨을 개인적으로 아는 정치인을 통해 CDD의 공론조사 방식을 도입했던 뒷배경이 있다. 즉 공론 조사의 정당성을 자체적으로 만들기에는 역부족인 측면이 있었는데 그 정당성을 외부에서 가져온 것이다.
둘째는, 제도화라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제도를 둘러싼 여러 조직, 집단, 이해관계들이 조정되면서 진화과정을 통해 제도적 침전(institutional sedimentation)이 이루어지면서 새 제도가 자리를 잡게 되는 과정인데, 유럽적, 전통적, 사회주의적 요소들이 어지럽게 뒤섞인 형태로 존재하던 정치시스템을 숙의 민주적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몽골 사례는 보여준다. 잔단샤타르 몽골 외무장관이 이것은 단순히 개헌(constitutional amendment)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헌법(new constitution)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평가한 것을 보면, 새로운 제도와 국가의 플랫폼을 구축하는데 숙의 민주주의가 효과적일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숙의 민주주의의 한계 그리고 가능성
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와 같은 숙의 민주주의의 도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이는 숙의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체적 한계와 가능성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숙의 민주주의가 가지는 잠재적 한계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많은 연구들이 잘 나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숙의에 참여하는 집단의 대표성 문제, 높은 비용 문제, 소규모 토론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견 동질화나 극화 문제 그리고 참여자간 불평등 문제, 숙의 결과를 정책에 반영한다고 했을 때 책임소재의 문제,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의회 민주주의를 훼손할 가능성의 문제, 이상적 숙의 상황 가정이 가지는 비현실성 문제, 일반인 숙의에 맡기기 어려운 주제 및 사안의 문제, 숙의 토론의 질과 토론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왜곡 문제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많은 연구결과들이 재반박을 하고 있고, 많은 정치학자들이 이야기하듯, 숙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이상(ideal)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것을 경험적으로 검증(test)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마치 현실 민주주의가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민주주의가 좋은지 나쁜지 경험적으로 테스트해서 받아들일지 여부에 대해 결정내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사례들 외에도 홍콩, 마카오 등에서의 공론 조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숙의 민주주의가 확산되는 이유와 배경은 각각 다르다. 한국에서는 높은 사회적 갈등과 낮은 정치적 신뢰라는 어려운 환경에서 고착된 많은 중요한 현안들을 해결하는 목적으로, 촛불시위라는 참여민주적 배경 위에 설립된 새로운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되며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중국식 ‘사회주의 민주’를 제도화 함에 있어 정권과 사회의 안정 그리고 사회적 갈등을 잠재우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식으로 변형되어 도입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동아시아의 숙의 민주주의 중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 및 도입이 되면서 중국적 맥락에서의 변형적 수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숙의 민주주의가 새로운 대안이나 규범으로 본격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보기 힘들지만, 결정내리기 힘든 국가적으로 가장 큰 문제들(원전과 연금)에 대해 해결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실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몽골에서는 1992년 민주화 이후 제대로 개혁되지 못한 기존 헌법과 정치‧거버넌스 제도들을 전면적으로 다시 구성하고 새로운 플랫폼에 올려놓기 위한 근본적 제도 개혁을 위해 숙의 민주주의적 기법이 활용되었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에서의 숙의 민주주의가 앞으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해나갈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최근의 추세를 살펴보았을 때, 복잡해지고 고도화되는 사회경제적 문제들과 갈등의 등장, 그리고 그것들을 기존의 대의민주제가 해결하는데 봉착하는 분명한 한계 때문에 숙의 민주주의는 앞으로 중요한 대안으로 국가와 시민사회에 주어지고, 논의되고, 활용되리라 보여진다.
저자소개
임동균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 학석사와 미국 하버드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부교수로 재직하면서 정치사회학, 사회심리학, 그리고 동아시아 사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다. 최근 주요 연구들은 중국에서의 정치적 신뢰, 한국에서 숙의 민주주의 정착의 가능성, 사회의 질(social quality)의 사회심리적 측면, 중국인들의 불평등과 복지에 대한 정치적 태도 등에 연구가 있고, 현재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경험적 연구를 중점적으로 진행 중에 있다. 2018년도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위원회에서 검증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1] 대입제도 개편을 위한 시민참여단 2차 숙의 토론회 개회식 때 김영란 위원장의 발언(2018년 7월 27일)
[2] 제임스 피시킨(James S. Fishkin)은 숙의민주주의와 공론조사에 대해 선구적 연구와 실천적 작업들을 진행해온 정치학자로, 그가 개발한 공론조사 기법(Deliberative Polling®)은 전 세계 여러나라에 소개되어 활용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제반 정보는 피시킨 교수가 이끄는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숙의 민주주의 센터(Center for Deliberative Democracy)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링크: http://cdd.stanford.edu)
[3]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과 관련된 제반 정보 및 공식 보고서는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확인할 수 있고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링크: http://www.sgr56.go.kr)
참고문헌
- 김정인. 2018. “한국 사회에서 숙의민주주의 제도화 가능성에 관한 연구: 일본 삿포로 시 제설정책 사례를 중심으로.” 22(1):1-25.
- 장윤미. 2011. “허바오강의 협상 민주론” 동아시아 브리프 6(4):85-89.
- Freedom House. 2018. Freedom in the World. Freedom House.
- Habermas, Jürgen. 1995. “Reconciliation through the Public Use of Reason: Remarks on John Rawls’s Political Liberalism.” Journal of Philosophy 92:109–31.
- Huntington, Samuel. 1991.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 Levitsky, Steven and Daniel Ziblatt. 2018. How Democracies Die. Crown Publishing.
- Shapiro, Ian. 2016. Politics against Domina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 Surowiecki, James. 2005. The Wisdom of Crowds.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 He, Baogang and Mark Warren. 2017. “Authoritarian Deliberation in China.” Daedulus 146(3):155-166.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