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 전설의 고향 방콕

이 글에서는 방콕에 근거한 전설 세 가지를 소개한다. 전설은 역사와 관련되며 표징물이 존재해야 한다는 특징을 지니는데, 그에 부합하는 세 이야기는 방콕에 수도를 건립할 때 세운 기둥인 락므앙, 죽은 이들의 구역에 세워진 에라완 신전, 그리고 불멸의 여귀(女鬼) 매낙 프라카농이다. 시기와 서사가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이들이 전설이 되고 영험한 성지이자 유명 관광지가 되는 과정에는 진실성을 부여하고 확인하는 역사적 맥락과 실천이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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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서울대학교)

“신의 도시, 위대한 도시, 불멸의 도시, 아홉 개의 보석을 지닌 곳, 환생한 신이 다스리는 도시, 왕궁이 가득한 행복의 도시, 인드라가 정하고 비슈바카르만이 세운 도시!”

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도시 방콕의 온전한 공식 명칭이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태국 짝끄리 왕조의 라마 1세가 1782년 짜오프라야강의 서쪽인 톤부리 지역에 도읍을 세운 이래로 이백사십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 도시는, 온갖 축복의 의미를 담은 이름처럼 화려했던 과거와 발전된 현대의 모습을 조화롭게 그려내며 미래로 순항 중이다. 방콕은 천만 인구가 북적이며 살아가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도시이며 가장 방문하고 싶은 도시로 손꼽힌다[1]. 신이 만들고 신이 다스리고 신의 보호를 받는다는데 어찌 잘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이 도시에서 사람들과 신의 관계는 매우 밀접해 보인다. 높이 솟은 고층 빌딩 앞에도, 마을 모퉁이에도, 학교에도, 집 앞 마당에도 신을 위한 제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매일 아침 이 제단에 정성스레 제물을 바치고 합장하며 기도를 올린다. 전 국민의 약 94%가 불교도이지만 신은 부처에 국한되지 않는다. 불교가 유입되기 이전 힌두교가 먼저 전파되었고 그보다 더 이전에는 정령신앙이 존재하였다. 불교가 유입되며 국가의 건설 이념에 불교가 채택되었지만, 왕의 정통성과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힌두교적 신화가 이용되었다. 그리고 백성과 대중은 모든 신을 믿었다.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나무에도 땅에도 돌멩이에도 물속에도 모든 자연에는 정령신이 존재하며 심지어 휴대폰과 TV 같은 기계 속에도 신이 살고 있다. 죽은 이들이 그들의 세상으로 가지 않고 인간의 세상을 떠돌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끄라쓰[2]나 뻡[3] 같은 잡신이 출몰하기도 한다. 태국에서의 생활은 신과 함께 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태국에서 전설을 찾기란 쉬울 것이라 예상했다. 전설은 역사와 관련성을 가지며 진실성의 표징이 되는 물건이나 장소가 있다는 특징(진은진, 2017)을 염두에 두고 태국의 전설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나 태국의 수많은 (귀)신들 이야기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다. 힘겹게 찾아낸 태국의 전설은 뜻밖에도 저 화려한 도시 태국의 수도 방콕 도심에 있었다. 역시 방콕은 신의 도시였다. 지금부터 방콕에 근거한 전설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한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세 곳은 모두 유명한 관광 명소이자 영험한 기운을 가진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세 가지 전설의 서사를 알아보고 (귀)신의 이야기가 과연 어떠한 역사성과 진실을 담아내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방콕을 지키는 기둥, 락므앙

태국에서 도시와 마을을 건립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은 최고의 명당 자리를 골라 그 곳에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이를 태국어로는 락므앙이라 하며 번역하자면 ‘도시의 기둥’쯤 된다. 기둥을 세우는 일은 도시나 마을의 흥망을 가르는 일로 여겨지기에, 자리 선정부터 기둥으로 세울 나무를 고르는 일까지 신중을 기해야 한다.

방콕의 락므앙은 왓프라깨우(에머랄드 사원) 맞은 편이자 국방부의 앞에 자리잡고 있다. 짝끄리 왕조의 라마 1세는 싸얌 왕국을 건립하기 1년 전인 1781년에 점성술을 통해 지금의 락므앙 자리를 선정하고 신성한 나무라 불리는 라차프륵[4]을 골라 기둥을 만들었다. 기둥의 윗부분은 첨탑 형태로 조각하고 전체를 금으로 도금하였다. 기둥을 정성스레 만들고 난 뒤 미리 지정해둔 자리로 옮겨 기둥을 심기 위해 땅을 파내자 어디선가 작은 뱀 네 마리가 나타나 구덩이 속에 똬리를 틀었다. 아무리 쫓아내려 해도 뱀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냥 기둥을 박아 넣었고 작은 뱀들은 기둥에 깔려 죽고 말았다. 점성학에 능했던 라마 1세가 이 일을 두고 예언하기를, 짝끄리 왕조가 건립된 후 7년 7개월간 흉한 일이 끊이지 않을 것이며 이 왕국은 150년 후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1782년 짝끄리 왕조의 건국 이후 7년 이상 버마의 침략으로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150년이 지난 1932년 혁명에 의해 입헌군주제로 체제가 전환되면서 싸얌 왕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비록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되긴 했으나 짝끄리 왕조는 계속 유지되었는데, 이 또한 라마 4세때 락므앙을 다시 세운 덕택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라마 4세는 라마 1세의 예언을 받아들여 왕국을 지키기 위해 유명한 점성가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새로운 곳으로 락므앙을 이전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락므앙은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도 뽑히지 않았고 결국 그 옆에 새로운 락므앙을 하나 더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또다른 성스러운 나무인 차야프륵으로 기둥을 만들고 윗부분은 연꽃 모양으로 조각한 뒤 전체를 금으로 도금하였다. 라마 1세의 락므앙에서 1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이 락므앙을 세웠는데 이로 인해 짝끄리 왕조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5]

방콕 락므앙 모습, 왼쪽이 라마 1세가, 오른쪽이 라마 4세가 세운 기둥
출처: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Lak_Mueang)

라마 1세의 락므앙에는 다른 이야기가 하나 더 전해진다. 점성술사는 락므앙을 세울 명당 자리를 두 곳으로 선정하였다. 한 곳은 왕국이 발전하고 부유하나 식민국가가 될 것이며, 다른 한 곳은 혼란이 계속되나 독립국가를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라마 1세는 이를 두고 오랜 고민 끝에 부유한 식민지보다는 혼란한 독립국가가 될 자리를 선택하였는데, 결국 동남아의 모든 국가가 유럽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태국만은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뱀 네 마리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에 대한 답은 1638년에 쓰여진 기록서 <싸얌 왕국에 대한 서술(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Siam)>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저자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관장 Jeremias는 당시 싸얌 왕국에서 락므앙을 세우면서 살아 있는 사람을 함께 생매장했던 관습에 대해 언급한다. 아유타야 시대부터 시작되었던 이 관습에 따르자면 락므앙을 세울 때 ‘인, 짠, 만, 콩’이란 이름을 가진 사내 네 명을 함께 산채로 파묻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지신(地神)의 노여움을 잠재우고 미래의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물로 바쳐지는 ‘인, 짠, 만, 콩’의 이름을 가진 사내를 찾는 방법은 더욱 황당했는데, 인부가 거리를 다니며 이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하는 사내를 속여서 데려다가 며칠간 잘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며 대접한 뒤 락므앙과 함께 구덩이에 밀어 넣어버렸다는 것이다. 짝끄리 왕조에 들어서 라마 1세는 이 관습이 너무 야만스럽다 하여 더 이상 따르지 않았으며 사내 대신에 뱀을 잡아넣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산 사내를 생매장하였고 추후 왕의 이미지를 위해 이에 관한 기록을 뱀으로 수정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소원 성취의 성지, 에라완 신전

1950년대 초반, 정부는 해외 귀빈의 숙박을 위한 국영 호텔(지금의 그랜드 하얏트 에라완 호텔)을 방콕의 중심인 랏차쁘라쏭 사거리에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건설 과정에서 잇따른 사고가 발생하였고 완공일이 계속 연기되었다. 1951년 시작된 호텔 준공은 무려 4년 간의 건설 과정을 거쳐 겨우 완공에 이르렀다. 이에 건설 책임자인 파오 경찰대장은 개장일 택일을 위해 당대 유명한 점술가이며 의사이자 해군장교였던 루앙 쑤위찬을 찾아가 의뢰하였다. 루앙 쑤위찬은 호텔 부근의 일대가 인간들이 범해서는 안되는 신들의 구역인데도 신을 위한 제사도 없이 함부로 건물을 지었고, 게다가 호텔의 주춧돌의 방향이 잘못 놓여있어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지적하면서, 신을 위한 제단을 지어야만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에라완이라는 이름은 신성한 것으로 신을 위한 고사를 지내 허락을 먼저 구해야 하므로 호텔 개장 전 호텔 바로 앞에 창조의 신인 브라흐만을 위한 신전을 짓기로 결정하였다[6]. 이 신전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건축가, 종교인, 예술가 여럿이 참여해 1956년 11월 완공하게 된다(Burslem, 2012). 에라완 신전이 이렇게 만들어진 덕인지 랏차쁘라쏭 일대는 방콕 최대 번화가로 발전하였고 하루에도 수천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에라완 브라흐만 상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좌)과 브라흐만 상의 모습(우)
출처: 저자 제공 /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Erawan_Shrine)

역사학자이자 풍수학의 권위자인 위씻 떼차까쎔에 따르면, 랏차쁘라쏭 사거리는 오래 전 죄수들의 사형장으로 사용된 곳으로 많은 원혼들이 상주하고 있는 사자(死者)들의 구역에 해당된다. 또한 현재는 에라완 신전 맞은 편에 경찰병원이 자리하고 있어 매일 사망자가 나오는데, 에라완 신전이 이들의 원혼을 달래어 주변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7]

이렇게 신성한 신전에도 사건 사고가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2006년에는 한 무슬림 청년이 에라완 신전에서 망치를 휘둘러 브라흐만 조각상을 훼손하였다. 추후 정신이상자로 밝혀진 이 청년은 신전 관리인 두 명에게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두들겨 맞아 목숨을 잃었다. 태국인들은 이 사건을 불길한 징조로 여겼으며, 정계의 호사가들은 당시 총리였던 탁씬의 부덕함과 연관지었다. 삼 개월간의 복구 작업을 마친 뒤 에라완 신전은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마치 이 사건이 어두운 앞날을 예견한 듯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당시 UN 총회 참석 차 미국을 방문 중이었던 탁씬 총리는 이후 거의 이십 년의 세월 동안 망명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부터 정치적 경제적 불안이 시작되었고 한참동안 정국은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랏차쁘라쏭 사거리는 2010년과 2014년에 각기 다른 반정부 시위대의 집회 장소가 되었다. 2010년에는 친탁씬 세력인 레드셔츠가 민주당 정권의 비정당성을 주장하며 랏차쁘라쏭 도로를 점거하고 3개월간의 시위를 이끌어갔다. 3월부터 시작된 시위는 결국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90여 명의 사망자와 2천여 명의 부상자를 내며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약 4년 뒤인 2014년 1월에는 전(前)민주당의원이자 부총리였던 쑤텝이 이끄는 반(反)잉락 정부 시위대가 랏차쁘라쏭 도로를 점거했다. 이들의 시위는 같은 해 5월 쁘라윳 당시 육군사령관이 주도한 쿠데타로 종료되었다.[8]

2015년 8월에는 에라완 신전 앞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대형 백화점과 쇼핑센터, 5성급 호텔이 몰려 있는 도심인데다 퇴근 시간까지 맞물려 거리는 한창 많은 인파로 북적거릴 때였다. 폭음과 함께 불길이 솟았고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외국인 관광객 다수를 포함해 20명의 사망자와 12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40여 대의 차량과 근처 건물의 유리창이 파손되는 등 태국 역사상 최악의 폭탄테러로 기록되었다(이지은, 2015). 사건의 배후로는 태국에 밀입국한 위구르인의 중국 송환에 반발하는 세력, 남부의 이슬람 분리주의자, 반정부 세력 등이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십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도 배후세력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폭발의 반경이 100미터 이상이었고, 뒤편의 호텔 유리창이 3층까지 죄다 부서지는 등 엄청난 위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완 신전의 브라흐만 조각상에는 얼굴의 일부가 살짝 벗겨지는 경미한 피해만 발생했다. 그리고 불과 며칠 후에 에라완 신전은 다시 개방되었다. 이후 에라완 신전의 ‘영험함’은 더욱 명성을 얻었고, 오늘날도 이곳은 여전히 수많은 관광객과 소원을 접수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스타 여귀(女鬼), 매낙

1980년경 방콕의 수로(水路)마을 프라카농에 아내 낙과 남편 막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막은 임신한 아내 낙을 홀로 두고 나라의 부름을 받아 전쟁터로 나가게 된다. 막이 전장에서 부상을 당해 사경을 헤매는 사이, 낙은 아이를 낳다가 아이와 함께 목숨을 잃는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오매불망 그리던 집으로 돌아온 막은, 사랑하는 아내 낙과 아이를 돌보며 예전처럼 행복한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급기야 막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로부터 아내 낙이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를 전해 듣게 된다. 믿고 싶지 않았으나 아내의 실체를 눈으로 목격하게 된 막은 그 길로 도망쳐 마을 사원에 몸을 숨긴다. 믿었던 남편이 자신을 피해 도망친 것을 알게 된 낙은 막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이 모든 불행이 마을 사람들 탓이라 여겨 원한을 품게 된다. 낙은 마을 사람들을 하나씩 해치기 시작하고 고요하던 수로마을 프라카농은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낙의 악행이 극에 달한 어느 날, 홀연히 마을에 나타난 노승은 원혼 낙을 단숨에 물리치고 마을은 다시 평화로움을 되찾게 된다.

이 이야기는 방콕의 프라카농 지역에 기원한 귀신 전설이다. 태국에는 수많은 귀신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 매낙만이 이름, 장소, 시간 등 개별성(individuality)을 지닌 유일한 귀신이다(니티, 2012). 다시 말해, 매낙은 전설이 요하는 진실 즉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방콕의 수쿰윗 77번가에 위치한 마하붓 사원에는 매낙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1957년 싸릿 장군의 쿠데타로 실권하기 얼마 전 마하붓 사원을 찾은 피분 쏭크람 총리의 권유로 매낙 사당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야기 속에서 사악해진 매낙을 퇴치하는 노승[9]은 매낙의 환생을 막기 위해 매낙의 두개골 사이 이마뼈의 조각을 도려내는데, 이 뼈조각이 마하붓 사원에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피분은 사원측에 매낙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위로하는 사당을 지을 것을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낙의 이마뼈 조각이 매낙의 신당 아래 묻혀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난무할 뿐 그것의 실재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다.

매낙 사당 내부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Mae_Nak_Phra_Khanong)

피분 쏭크람 총리는 재임 당시 태국식 문화혁명을 주도하였으며 국가건설을 위해 여성이 산업화 현장에 동참하는 것을 권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여성의 사회 참여도가 높아지고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지만, 동시에 성별 역할의 변화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그림, 문학, 건축물 등을 통해 여성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아팃따야, 2012). 특히 매낙의 이야기는 가정 안에서 여성의 역할, 즉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이상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이지은, 2019). 남편을 전장에 떠나 보내야만 했던 매낙은 전쟁을 싫어하고 모성애가 깊으며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사당의 주인인 여신 매낙은 위험한 곳에 가족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 자식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보다 특별한 은혜를 베푼다고 알려져 있다.

매낙은 ‘매낙 프라카농’ 또는 ‘낭낙’으로도 불린다. ‘매’는 본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여기서는 결혼한 여성의 이름 앞에 붙이는 호칭이며, ‘낙’은 이 여성의 이름이고, ‘프라카농’은 지역을 말한다(이지은, 2019). 매낙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월간지 <싸얌쁘라펫>의 편집장인 꿀랍이 1899년 3월호에 기고한 글인데, 여기서는 프라카농이라는 배경과 낙이라는 여인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는 것 외에 다른 서사를 찾아볼 수 없다. 이후 1911년, 라마 4세의 56번째 아들이자 극작가인 프라나라팁쁘라판퐁이 <이낙 프라카농>이란 희곡을 써서 창극의 형태로 공연을 했는데, 이것이 최초로 매낙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며 현재 전해지는 서사구조와 가장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여귀의 이름 ‘낙’은 ‘나가(Naga)’ 즉 동남아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거대한 뱀을 뜻한다. 힌두교에서는 물의 신이기도 하며 불교에서는 인간의 세상에 몰래 내려갔다가 벌을 받게 되는 부처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한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자 귀신은 태국에서 가장 무서운 귀신으로 ‘피따이탕끌롬’이라 불린다. 매낙 전설은 현재까지 40여편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드라마, 뮤지컬, 연극,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역대 박스오피스 순위의 맨 위에는 매낙 전설의 코믹 버전인 <피막 프라카농(2013)>이 자리하고 있고, 외국에 매낙 전설을 알리며 평단의 찬사를 받은 영화 <낭낙(1999)>도 상위권에 올라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매낙은 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스타 여귀로, 또한 신전을 보유한 여신으로 등극해 그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전설의 전략적 진실성 생산

전설이 가진 역사성과 표징물이라는 특성은 전설에 진실성을 부여하는 여러 전략적 실천이 작용한 결과이다(진은진, 2017). 과연 위의 세 가지 전설이 유지되는 데는 어떠한 실천이 작용했을까? 방콕의 기둥 락므앙과 관련해서 언급되는 라마 1세와 4세의 신적 예지력과 통치력은 사실 출처를 확인할 수 없지만 방콕시는 이러한 이야기를 공식 홈페이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실천은 왕의 통치에 정통성을 부여하며 신화적 서사를 더해 왕의 절대적 권위를 확인시킨다.

에라완 신전은 힌두교적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신화를 역사적 사건사고와 연관지어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창조의 신 브라흐만의 영험함을 확인하는 동시에 현실의 정치 권력을 상징적으로 매개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또한, 매낙 프라카농이 여귀에서 여신으로 신분이 상승되는 과정에는 피분 총리가 구현하고자 했던 ‘이상적 여성상’이 강력하게 작동하였다. 게다가 영화등 다양한 매체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인물과 서사가 풍부해지면서 더욱 깊이 있는 진실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렇게 신의 도시 방콕의 전설은 사회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진실성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여러 전략적 실천을 통해 상징적 영험성을 더해가고 있다.

 

저자 소개

이지은(busaba@snu.ac.kr)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사이다. 태국 쭐라롱껀 대학교에서 태국대중문화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태국 씨나카린위롯대학교에서 한국어과 전임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태국어통번역학과 강사, 주태국 대한민국대사관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태국 대중문화를 통한 사회, 정치, 종교, 젠더 읽기에 관심을 갖고 연구 활동 중이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다문화가정을 위한 <한국전래동화모음집>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1] 2023 마스터카드 지표, http://mastercard.com

[2] 여인의 머리에 내장만을 달고 공중을 떠도는 귀신, 심장에서는 빨간 불이 반짝이며 주로 가축의 내장을 뜯어먹고 산다고 알려져 있다.

[3] 주로 태국의 동북부에서 출몰한다고 알려진 귀신, 형체는 없으며 여인의 몸에 들어가 못된 짓을 하며 마을사람들을 괴롭히고 가축의 생간을 먹는다고 한다.

[4] 태국의 국화(國花)

[5] 현 국왕은 라마 10세인 와치라롱껀 왕이다.

[6] 브라흐만 또는 브라만은 죽은 이들의 세계도 다스리는 신으로 믿어진다.

[7] Silpa-mag.com/history/article_89966

[8] 2014년 5월 쿠데타를 일으켜 그 해 8월부터 총리직을 수행하며 9년 간 총리를 역임했다.

[9] ‘쏨뎃 또’라는 라마 4세(1581-1868) 때의 대승으로 라마 4세의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참고 문헌

  • 이지은. 2015. “방콕 폭탄테러는 에라완사원의 경고?” 주간조선 2373호. 44-46.
  • 이지은. 2019. “매낙 전설의 서사에 나타난 태국의 젠더 이데올로기: 영화<매낙 프라카농>, <낭낙>, <피막 프라카농>을 중심으로” 『한국태국학회논총』 26-1, 29-65
  • 진은진. 2017. “전설의 현대화와 공포의 전략-군대괴담을 중심으로.” 『동양고전연구』 제68집. 439-472.
  • นิธิ เอียวศรีวงศ์(니티 이여우씨웡). “นิธิ เอียวศรีวงศ์ เขียนถึง นางนากพระโขนง ผีที่มีตัวตน รุ่นบุกเบิกของ
  • เองไทย”     http://www.matichon.co.th/news_detail.php?newsid+1338115737 (검색일. 2024.5.22)
  • อาทิตยา จารุยินดา(아팃따야 짜루인다). 2012. “การสร้างภาพความเป็นหญิงในนวนิยายไทย สมัยจอมพล ป.พิบูลสงคราม. ปริญญาพิพนธ์ บัณฑิตวิทยาลัย มหาวิทยาลัยศรีนครินวิโรฒ ปริญญาศิลปศาสตรดุษฎีบัณฑิต สาขาวิชาศิลปวัฒนธรรมวิจัย
  • Burslem, Chris. 2012. Tales of Old Bangkok; Rich Stories From the Land of the White Elephant. Earnshaw : Hong K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