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현(아시아연구소)
시리아 아이들의 작은 월드컵
시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번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리아 북부 이들립(Idlib) 사람들은 월드컵에 진출할 수 없다면 직접 월드컵을 개최하기로 했다. 카타르 월드컵이 개막한 2022년 11월, 이들립의 현지 NGO는 작은 ‘월드컵’을 개최했다. 이번 ‘월드컵’에는 이들립 지역과 그 근교에 사는 아이들로 구성된 32개 팀이 참가했으며, 선수들은 월드컵을 위해 몇 달간 합숙하며 실력을 쌓았다. 이들립 캠프 월드컵은 11월 19일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32개국 축구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축구장에 입장하면서 그 막이 올랐다.
그러나 ‘이들립 월드컵’에 참여한 아이들은 그러나 지역 유소년 축구 클럽의 회원들이 아니다. 11년간 이어지는 내전을 피해 시리아 각지에서 이들립의 난민 캠프로 모여든 아이들이다. 오늘날 반정부 세력의 마지막 근거지인 이들립에는 약 3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이들 중 절반이 난민이다. 오늘날 시리아 내전은 많은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진 문제가 되었지만, 이들 난민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진행 중인 위기다. 이들립 월드컵이 개최되기 2주 전인 11월 6일, 시리아 정부군의 포격으로 이들립 난민 캠프에서 9명이 사망했다. 국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을 뿐, 시리아 사람들의 고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겨울보다 혹독한 시리아의 봄
이들립 월드컵은 2011년에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존엄성과 자유를 요구하며 아랍권 각지를 휩쓴 아랍권 민주화 운동 또는 ‘아랍의 봄’이 시리아에 남긴 것 중 하나다. 시리아의 봄은 2011년 3월 시리아 남부 데르아(Deraa)에서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ad) 정권에 맞선 시위가 시리아 각 도시로 퍼져나가며 시작되었다. 2011년 7월에는 정부군에서 탈영한 시리아군과 장교들을 중심으로 정권의 무력 진압에서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한 자유시리아군(Free Syria Army)이 결성되었다. 알아사드 정권을 떠받치던 군에도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시리아에도 봄이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봄이 혹독한 겨울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화적 반정부 시위는 정권과 반정부 세력 사이에, 반정부 세력 간의 전면적 내전으로 악화되었고, 2011년 이후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내전은 현재진행형이다. 내전의 장기화는 막대한 인도적 피해를 남겼다. 시리아 전체 인구 2,000만 명 중 1,300만 명이 구호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놓였고 600만 명이 해외에서 난민으로 머무르고 있다.1) 그러나 여러 차례 이어진 국제 사회의 중재와 평화 정착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군과 반정부 세력 어느 한쪽도 완전한 승기를 잡지 못한 채 분쟁이 계속되면서 시리아 내전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
왜 시리아는 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평화 정착을 가로막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고는 시리아 내전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추적하여 이 질문에 답하는 한편, 시리아의 사례를 통해 오랜 독재가 남긴 사회적 영향과 외부 행위자의 개입이 어떻게 분쟁을 장기화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알라위파, 주변부의 소수자에서 시리아의 새로운 지배자로
할림 바라카트(Halim Barakat)는 종교, 종파, 민족 등 사회적 다양성과 경제적 계급 차이의 상호 관계와 작용에 초점을 맞추어 아랍 사회를 이해하고자 했다. 바라카트에 따르면 이집트와 튀니지와 같이 사회적 동질성이 큰 국가에서는 지배 엘리트와 다수 국민 사이의 계급 차이가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 따라서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독점하는 독재 정권에 대한 반감은 다수 국민이 연대하여 정권에 맞서고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대중 혁명의 성격을 띠게 된다. 반면에 시리아와 같이 사회적 다양성이 큰 국가에서는 종교, 종파, 민족 차이가 계급 차이가 결합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어떤 종교, 종파, 민족 집단에 소속되었는지에 따라 지배 엘리트와 피지배 대중이 구분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사회적으로 다양성이 큰 사회에서 정권에 대한 저항은 정권과 국민의 대결이 아닌 권력을 가진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의 충돌로, 즉 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Barakat, 1993, 20-21). 2011년 시작된 ‘아랍의 봄’의 전개는 1993년에 바라카트가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게 아랍 각국의 특징을 꿰뚫어 보았음을 보여준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는 시위가 대중 혁명으로 발전해 비교적 평화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했지만, 시리아에서는 바라카트가 분석한 대로 시위가 내전으로 전락했다.
시리아는 인구 중 다수를 차지하는 순니파 무슬림 외에도 기독교도와 이슬람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Alawi), 드루즈파(Druze) 등으로 구성된 다원적 사회다. 20세기 초 시리아를 위임 통치한 프랑스는 프랑스 지배에 적대적인 순니파 엘리트를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종파 간 분열을 조장했고, 알라위파 등 순니파 다수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소외된 소수 종파의 시리아군 입대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이에 따라 소수 종파 출신의 사병과 장교들은 시리아군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Fildis, 2012, 150-153). 결국 1963년 알라위파와 드루즈파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시리아에서는 소수 종파가 권력의 핵심적 위치로 부상했고, 1970년에는 알라위(Alawi)파 출신 장군인 하피즈 알아사드(Hafiz al-Asad)가 군부 내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1971년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알아사드 정권은 알라위파에 의한, 알라위파를 위한, 알라위파만의 정권은 아니었다. 군부와 보안기구의 핵심 요직과 실권은 알라위파가 쥐고 있었지만, 순니파는 정부와 군부 고위직에서 수적으로나마 다수를 차지했다.2) 정권은 또한 토지 개혁, 교육과 의료 등 복지 혜택 제공, 순니파의 공공부문 고용 확대와 같은 대중주의적 정책을 펼쳐 순니파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Hinnebusch, 2001, 80-84). 알라위파를 통해 군부와 보안기구를 철저히 통제한 알아사드 정권은 알라위파를 이단 종파로 규정하고 정권에 도전한 순니파 이슬람주의 세력의 위협을 무력으로 억누를 수 있었다. 1982년 시리아 중부 하마(Hama)에서 일어난 이슬람주의 세력의 무장 봉기를 군대를 동원해 무차별적으로 진압한 사건은 알라위파의 군부와 보안기구 통제가 알아사드 정권의 생존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의사 선생, 당신 차례가 왔다”: 시리아 시위, 누적된 불만의 폭발
2000년 하피즈 알아사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바샤르가 권력을 승계했다. 바샤르 알아사드가 집권한 뒤 정권의 대중주의적 성격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정권이 대중적 지지를 동원하던 수단인 복지 혜택과 공공 부문 고용은 재정 부족으로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바샤르는 해외 자본, 특히 걸프 자본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경제를 개방하는 한편 국영 기업의 민영화, 금융 부문 개방, 환율 자유화, 주식시장 개장, 가격 통제 제도 폐지와 노동 시장 유연화를 포함한 규제 완화와 같이 민간 경제 부문을 활성화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경제 개방과 자유화 정책은 평범한 시리아 국민의 생활고를 가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부는 재정 확충을 이유로 휘발유와 식품 등에 대한 보조금과 연금을 삭감했고, 많은 시리아 국민의 생계 수단이었던 연금과 공공 부문 고용도 축소되었다. 걸프 자본의 투자가 관광업과 부동산업에 집중되면서 제조업은 소외되었고, 무역장벽의 보호를 받던 시리아 국내 제조업은 시장 개방 이후 가격이 저렴한 수입품이 유입되면서 타격을 입었다. 공공 부문 고용은 감소한 반면 제조업과 농업 쇠퇴로 인해 민간 부문에서의 고용 창출 효과는 미미했고 결과적으로 고용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Hinnebusch, 2012, 101-102). 한편 경제 개방과 자유화가 가져온 혜택은 바샤르의 외사촌이자 시리아 최대 이동통신기업인 시리아텔(SyriaTel)의 소유주인 라미 마클루프(Rami Makhluf)와 같이 정권과 유착한 소수 경제인들에게 돌아갔다. 2004년 기준 시리아의 빈곤율은 30%에 달했으며 농촌 빈곤율은 60%에 육박한 반면, 소득 상위 5%가 전체 부의 50%를 차지했다(Yassin-Kassab et al., 2016, 32-33).
경제 자유화 정책은 알아사드 정권의 지지 기반에 변화를 가져왔다. 하피즈 알아사드 시기 정권의 주요 지지 기반이었던 도시 노동자와 농민 대신 바샤르 알아사드는 측근과 친인척, 정권과 결탁한 경제인을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형성해나갔다.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등 경제 자유화의 혜택을 누린 주요 도시와 소외된 지방 소도시, 농촌 사이의 지방간 격차도 커졌다. 경제 자유화 정책에서 소외된 지방 소도시의 순니파 주민과 농민 사이에서는 알아사드 정권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성장했고, 바샤르를 중심으로 한 소수 알라위파가 다수 수니파를 지배하고 착취한다는 인식이 성장했다(Philips, 2015, 367-368). 이처럼 2000년대 이후 대도시와 지방 사이의, 정권의 핵심 지지 계층과 소외된 다수 사이의 격차 확대라는 사회경제적 변화는 알아사드 정권에 대한 순니파의 종파주의적 반감이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시위가 시리아 남부의 소도시인 데르아에서 시작된 데에도 이러한 배경이 있다.
시위는 작은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2011년 3월 6일, 데르아에서 십대 학생들이 담벼락에 ‘의사 선생, 당신 차례가 왔다(ijaka al-dawr ya duktur)’이라는 낙서를 남겼다. ‘의사’는 바로 영국에서 공부해 의사 면허를 가진 바샤르를 비꼬는 표현이었다. 데르아 경찰은 이들을 체포해 고문했고,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지역 주민들의 시위는 데르아 지역의 유력 부족이 합류하면서 확대되기 시작했고, 곧 정권의 부패를 규탄하고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알아사드 정권의 무력 진압에 대응해 무장한 반정부 세력은 정권에 가장 깊은 불만을 품고 있던 동부 농촌 지역과 지방 소도시, 대도시의 교외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2013년 기준 알아사드 정권은 영토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다마스쿠스에서 홈스, 하마, 알레포로 이어지는 주요 도시 지역과 지중해 연안 지역만을 지켜낼 수 있었다. 주요 도시에 대한 정권의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았다. 반정부 세력은 홈스, 하마, 알레포 등에서 시내까지 진출해 일부 구역을 점거하고 정부군과 교전했다. 알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알아사드 정권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그러나 알아사드 정권은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승기를 잡는 데에도 성공했다. 2021년 기준 정권은 시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거의 탈환했고, 반정부 세력은 북부 터키 접경 지역으로 밀려났다. 시리아 동북부에서는 정권의 묵인 아래 쿠르드인들이 사실상 자치 지역을 세웠지만, 주요 도시에 대해서는 여전히 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는 위기 속에서도 알아사드 정권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을까?
먼저 알아사드 정권은 핵심적 권력 기반인 알라위파를 포함한 소수 종파와 주요 대도시 지역의 지지 유지에 성공했다. 바샤르는 시위대를 알라위파와 소수 종파를 위협하는 알카에다와 같은 순니파 극단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으로 정당화했다(Pinto, 2017, 127). 시위 초기에는 많은 알라위파 역시 반정부 운동에 가담했지만, 곧 반정부 운동에 대한 알라위파의 지지는 약화되었다. 1963년 이전까지 순니파에 의해 배척되고 탄압받던 알라위파는 반정부 운동이 다시 순니파가 지배하는 질서 수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었고, 군부와 보안기구, 공공 부문 일자리를 제공하는 알아사드 정권 붕괴가 가져올 영향을 우려했다. 한편 정권은 국영 언론을 통해 알라위파 민간인과 군인, 공무원에 대한 시위대의 폭력에 관해 보도하며 알라위파 내에서 반정부 운동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을 자극했다(Goldsmith, 2015, 197-198). 한편 정부의 무력 대응은 시위대 내에서도 극단주의 세력이 부상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알라위파 정권에 대한 반감은 전체 알라위파에 대한 적의로 확산되었다. 시위대의 종파 폭력은 다시 알라위파 사이에서 알아사드 정권이 유일한 보호자라는 인식을 강화시켰고, 이는 알아사드 정권에 대한 알라위파의 확고한 지지로 이어졌다(Pinto, 129-134).
소수 종교 집단뿐만 아니라 다마스쿠스, 알레포 등 주요 도시의 중상류층 또한 알아사드 정권의 확고한 지지 기반이 되었다. 지방 소도시와 농촌과 달리 대도시는 경제 자유화의 혜택이 집중된 곳이었고 따라서 알아사드 정권에 대한 반감도 크지 않았다. 지방과 대도시 사이의 사회경제적 차이는 반정부 운동이 대도시에는 깊게 침투하지 못하는 원인이었다. 이에 더해 시리아 국가체제의 완전한 해체를 주장하는 이슬람 국가(IS), 알카에다와 연계된 자브하트 알누스라(Jabhat al-Nusra)와 같은 극단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무장조직의 등장은 소수 종교 집단뿐만 아니라 세속적이고 온건 성향의 순니파 시민들에게 알아사드 정권이 시리아의 안정과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유지할 유일한 대안임을 상기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Zisser, 2018, 71). 반정부 세력이 국가 능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알아사드 정권은 정권 통제에 있는 지역뿐만 아니라 반정부 세력이 장악한 지역에도 전력과 수도 공급과 같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행정력을 발휘했다. 반정부 세력이 장악한 지역에 사는 시리아인들도 혼인이나 출생, 부동산 거래를 신고하거나 대입 시험을 보거나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정권이 통제하는 지역으로 가야했고, 이는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알아사드 정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Droz-Vincent, 2021, 40-43).
알아사드 정권에 대한 외부 세력의 지원 또한 정권 생존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다. 이란과 레바논 헤즈볼라(Hezbollah), 이라크 쉬아파 무장조직, 러시아의 병력, 자금, 물자 지원은 22만 명에 달하는 정규군이 탈영과 병역 기피로 11만 명까지 감소된 상황(Droz-Vincent, 36)에서 알아사드 정권에게 영토를 지키고 반정부 세력에 반격할 인력과 자원을 제공했다. 2018년 기준 시리아 내에서 활동하는 해외 쉬아파 무장조직 규모는 약 20,000~30,000명으로 추산된다.3) 알아사드 정권이 우방 세력의 조직적 지원을 통해 힘을 회복할 수 있던 반면 반정부 세력에 대한 미국과 서방 국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터키 등의 지원은 산발적이고 미미한 수준에 그쳤고, 반정부 세력 내 극단 이슬람주의 무장조직의 등장은 반정부 세력 지원에 대한 지지 여론을 악화시켜 지원이 더욱 감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내전의 세력 구도는 정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시작조차 하지 못한 협상, 대안이 없는 싸움
국제 사회는 시리아 내전을 끝내기 위해 여러 차례 알아사드 정권과 반정부 세력을 중재하고자 노력했다. 2012년 시작되어 2017년까지 총 7번 열린 제네바 회담과 2015년 빈 회담 등 UN이 주도한 중재와 평화 협상 시도 외에도 2017년 러시아와 터키, 이란의 주도 아래에 아스타나에서 여러 차례 이어진 정권과 반정부 세력 사이의 협상 또한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테러리스트’와의 협상과 정권 이양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알아사드 정권과 바샤르의 완전 퇴진과 과도 정부로의 완전한 권력 이양을 요구하는 반정부 세력 사이의 의견 차이는 지난 10년간 거의 변화가 없었다. 승기를 잡은 현시점에서 알아사드 정권이 반정부 세력과의 협상에 나설 가능성은 더욱 낮은 상황이다.
평화 정착 과정이 잇따라 실패한 이유로는 먼저 시리아 내전이 단순히 알아사드 정권과 반정부 세력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란, 카타르 등 지역 내 국가와 러시아, 미국 등 역외 국가에 이르기까지 시리아 내전은 지역 내외의 여러 국가의 이권이 결부된 소규모 국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중동 내에서는 아랍 지역 내 핵심 동맹으로서 알아사드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이란과 알아사드 정권을 타도하여 중동 내 이란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아랍 국가가 대립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을 차단하고 이란을 억제하기 위해 시리아 정권 교체를 추구하며, 규범적 측면에서도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 침해를 자행한 알아사드 정권을 묵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시리아를 지중해 지역으로 향하는 교두보이자 중동 내 거점으로 삼는 러시아는 알아사드 정권 붕괴가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 상실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박승규 외, 2022, 74-75). 시리아 내전에 개입된 여러 국가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는 협상과 대화를 통한 평화 정착을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다.
반정부 세력 내에서 알아사드 정권을 대신할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시리아 반정부 세력은 다양한 성향에 따라 분열되어 있으며 각기 다른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쿠르드 세력은 시리아의 완전한 정권 교체보다는 북동부 쿠르드 지역에서의 자치권 확보를 우선시하며, 내전에 개입한 주요 행위자인 터키는 시리아 쿠르드인의 평화 협상에 참여할 자격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쿠르드인의 자치를 막기 위한 무력 개입도 시사한 바 있다.
쿠르드 세력 외에 이들립 지역에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반정부 세력으로는 시리아 구국정부(Syrian Salvation Goverment)가 있다. 시리아 구국정부는 하이아트 타흐리르 알샴(HTS, Hay’at Tahrir al-Sham)이라는 이슬람주의 무장조직이 세운 정부로, HTS는 알카에다 연계 조직이었던 자브하트 알누스라가 2017년 알카에다와의 관계 단절을 선언한 뒤 다른 이슬람주의 무장조직과 함께 결성한 연합 조직이다. 이슬람주의 무장조직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리아 구국정부가 알아사드 정권을 대체할 정부로서 정당성을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시리아 북동부 지역에서 시리아 구국정부와 경쟁하는 다른 정부로는 시리아 과도정부(Syrian Interim Government)가 있다. 시리아 과도정부는 2013년 시리아 혁명저항세력 국민위원회(National Coalition for Syrian Revolutionary and Opposition Forces, 이하 국민위원회)이 결성한 정부로, 국민위원회는 2012년 미국과 영국 등 서방 국가와 터키,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등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는 중동 국가에서 시리아 국민을 대표하는 적법한 정부로서 인정을 받았다. 세속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시리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시리아 과도정부는 알아사드 정권의 이상적인 대안으로 인식되어 터키와 서방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시리아 국내에서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국민위원회와 과도정부로 대표되는 반정부 세력 내 세속주의, 민주주의 경향은 내전 초기부터 여러 문제로 인해 반정부 세력 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먼저 바샤르와 알아사드 정권의 전면 퇴진만을 요구할 뿐 권력 이양 과정에 관한 구체적인 청사진이 부재했으며, 이로 인해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조직력과 추진력을 갖추지 못했다. 또한 터키 이스탄불에 본부를 둔 국민위원회는 해외에 체류하는 망명 정치인들이 중심이 된 조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로 인해 국민위원회 지도부는 자유시리아군과 같이 시리아 국내에서 활동하는 반정부 무장조직과 체계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거나 시리아 내부 상황에 영향력을 행사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Alsarraj et al., 2020, 8-9).
시리아 내전 10년, 암흑 속에서 벌어지는 생존 투쟁
알아사드 정권은 10년 넘게 이어진 내전에서 승기를 잡았지만, 아직 시리아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반정부 세력 역시 정권을 타도할 동력은 상실한 채 북부 일부 지역에서만 겨우 버티는 상황이다. 양측의 소모전과 산발적 교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인도적 비극은 이어지고 있고 시리아가 평화와 안정을 되찾을 날은 요원해 보인다. 알아사드 정권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온 나라를 파괴하고 국민을 빈곤과 난민 신세로 내몰 준비가 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세를 차지한 지금 정권이 반정부 세력과의 타협과 협상에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다. 생존이 가장 위협받던 순간에서 알아사드 정권은 반정부 세력과의 협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국제 사회의 지원과 관심에서 밀려난 반정부 세력이 전세를 뒤집을 가능성 또한 낮지만, 알아사드 정권과 공존할 방안을 찾는 것도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시리아 내전은 누가 권력을 잡느냐의 문제를 넘어 정권과 반정부 세력 사이 누가 살고 죽느냐를 가르는 생존 투쟁이 되었고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시리아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겨울이 닥쳐오고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학교와 병원과 상점을 열고 일터로 향하며 월드컵을 개최한다. 코로나19 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눈이 쏠린 국제 사회가 더 이상 시리아의 고통에 눈길을 주지 않는 지금, 인간다운 삶을 지켜내려는 시리아 국민의 투쟁을 되돌아본다.
저자소개
황의현(katib@snu.ac.kr)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서아시아센터 선임연구원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에서 중동지역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단국대학교 중동학전공 강사,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중동 종파 관계, 정체성 정치, 역사적 기억의 정치적 수단화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논문으로는 “이라크의 종파별 권력안배제도와 국가 능력 약화 분석” 『중동문제연구』 (20권 1호, 2021), “타자화를 넘어선 서아시아 지역 정체성 형성의 여정: 이란을 중심으로” (공저) 『아시아리뷰』 (11권 2호, 2021), “카타르 단교 사태와 국민국가 정체성 강화에 관한 연구” (공저) 『중동연구』 (40권 3호, 2022)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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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nto, Paulo Gabriel Hilu, 2017. “The Shattered Nation: The Sectarianization of the Syrian Conflict.” in Nader Hashemi and Danny Postel, eds. Sectarianization: Mapping the New Politics of the Middle Eas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 van Dam, Nikolas, 2011. The Struggle for Power in Syria: Politics and Society under Asad and the Ba‘th Party, London and New York, I.B.Tauris.
- Yassin-Kassab, Robin and Leila Al-Shami, 2016. Burning Country: Syrians in Revolution and War, London, Pluto Press.
1) UNHCR, https://www.unhcr.org/syria-emergency.html
2) 1963년 군부 쿠데타로 알라위파 장교들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내각 장관 약 70~80%는 순니파였으며, 시리아의 단독 정당으로서 집권해온 바아쓰(Baath)당 지도부에서도 약 60%는 순니파였다. 알라위파의 영향력이 큰 군부에서도 순니파는 수적으로는 다수를 차지했다. 1963년부터 2000년까지 군부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들의 출신 배경을 조사한 니콜라스 반담(Nikolas van Dam)에 따르면 군부 고위직 가운데 39%는 알라위파, 45%는 순니파였다(van Dam, 2011, 85-86).
3) Phillip Smyth. “How Iran Is Building Its Syrian Hezbollah.” The Washington Institute for Near Easte Policy. 2018/04/12. https://www.washingtoninstitute.org/policy-analysis/how-iran-building-its-syrian-hezboll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