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연(서울대학교)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체제 전환·변동 과정
소연방을 구성하던 15개 공화국 중 하나였던 키르기스스탄은 1991년 8월 독립을 선언했고, 독립 직후에는 권위주의 정권 일색이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한 ‘민주주의의 섬’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마치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소연방 해체 이후 지금까지도 실질적인 정권교체가 일어났다고 하기 힘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예외적으로 키르기스스탄은 합헌적 혹은 비합헌적 방식에 의한 정권교체를 4차례나 경험했고, 현재 5번째 대통령이 재직 중이다.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체제를 정말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그것처럼 권위주의라고 해야 하는지 여부를 떠나서 적어도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적 과정은 매우 역동적으로 그리고 파란만장하게 전개되었다. 정권교체 및 헌정질서 변화를 중심으로 그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산당 관료로서 경력을 쌓은 다른 구소련 공화국 지도자들과 달리 물리학자 출신의 아카예프(Askar Akaev)가 1991년 10월 대선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키르기스스탄은 민주화·자유화·개방화를 기조로 하는 체제전환에 착수했고, 언급되었듯이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높은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회와의 정치적 대립 격화, 경제상황 악화 등 초기 체제전환의 결과가 좋지 않게 나타나자 이에 실망한 아카예프 정권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권위주의화하기 시작한다. 제도적으로는 1994년, 1996년, 2003년 3차례나 헌법을 개정하면서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고, 행태적으로도 야당과 언론에 대해서는 탄압을 가하고 친족·파벌·피후견자(client)에게는 특권과 특혜를 제공하는 등 권위주의 통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다른 포스트소비에트 국가들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처럼 아카예프도 1995년 재선 및 2000년 3선에 성공하면서 장기집권의 궤도에 들어서는 듯했으나, 2005년 3월 총선 선거부정을 규탄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일어나면서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2003년 11월 그루지야(현재의 조지아) 장미혁명, 2004년 11-12월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에 이어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에서 세 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혁명이 성공하였고, 이에 키르기스스탄은 이 지역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로서 또다시 국제사회의 기대와 주목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튤립혁명이 완수된 이후인 2005년 7월 대선이 실시되어 아카예프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던 바키예프(Kurmanbek Bakiev)가 의회제로의 개헌과 부패척결을 약속하면서 90%에 가까운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개혁에 대한 열망과 요구가 고조된 분위기에서 키르기스스탄의 새 정권이 출범한 것이지만, 이후에도 다양한 사회정치적 요구와 이해관계가 표출되고 충돌하면서 시위 정국이 이어졌다. 이러한 정국 혼란 속에서 2006년에서 2007년 사이에만 헌법이 3차례나 개정되는 과정 끝에 결국 애초의 의회제 개헌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오히려 대통령 권한을 더욱 강화한 개정 헌법이 채택되었다. 이에 더해 이 개정 헌법과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2007년 12월 조기총선에서 신생 친(親)대통령 정당이 80%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바키예프는 의회까지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외의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바람을 저버리고 바키예프 정권 역시 권위주의 체제로 퇴행하였고, 일가 및 측근 중심의 부패 또한 아카예프 정권 시기보다 심화되었으면 심화되었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이에 또다시 대중과 야권의 불만과 저항이 폭발하면서 2010년 4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시위는 유혈사태까지 수반했고, 전임 정권처럼 바키예프 정권도 비헌법적 방식으로 전복되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키르기스스탄의 체제전환 과정은 전진과 후퇴, 기대와 실망을 오가는 과정을 반복한 것이다.
바키예프 축출 이후 발생한 일종의 권력공백 상태에서 2010년 6월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에서 대규모 유혈 민족분쟁이 발발하는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같은 달 임시정부는 새로운 헌법에 관한 국민투표 실시를 강행하여 신헌법을 통과시킴으로써 키르기스스탄의 권력구조는 의회제 요소를 도입한 형태로 재편된다.1) 이 새로운 헌법의 주요한 의도는 특정 인물이나 가문이 국가를 포획하여 권위주의 체제를 수립하지 못하도록 대통령, 총리, 의회에 권력을 분산시키고 주요 정치세력의 대표성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 신헌법과 한 정당이 의회 의석의 55% 이상을 차지할 수 없도록 규정한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2010년 10월 총선 이후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연이어 연정이 구성되고 있다. 2011년 10월에는 바키예프 정부와 임시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던 아탐바예프(Almazbek Atambaev)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평화적·합헌적 방식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고, 2017년 10월에는 아탐바예프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던 제엔베코프(Sooronbay Jeenbekov)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현재 재직 중이다. 한편 퇴임이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던 2016년 12월 아탐바예프가 총리 역할 강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 국민투표를 주도하여 성공시킴에 따라2) 퇴임 후에도 그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행사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의혹이 일었으나, 2020년 6월 그는 부패 혐의로 11년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혐의에 대해서도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후견주의, 후견 네트워크
이처럼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기복 심한 궤적을 밟아온 포스트소비에트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적 과정이 말해주는 바는, 선거 혹은 혁명에 의한 정권교체, 제도적 장치의 도입이나 변경, 민주주의 지수 등을 추적하는 작업만으로는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체제 전환 과정을 추동한 근본 요인 혹은 경향성을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이에 키르기스스탄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포스트소비에트 유라시아 지역 국가들의 정치적 역동성을 관통하는 논리로 제안된 이론적 개념이 바로 일종의 비공식 정치라고 할 수 있는 후견정치(patronal politics) 혹은 후견주의(patronalism)이다. 이 개념은 “개인들이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원칙이 아니라 일련의 실제 지인들을 통한 구체적인 보상과 처벌의 개인화된 교환을 둘러싸고 정치경제적 활동을 조직하는 사회의 정치” 혹은 그러한 활동이 사회에서 게임의 규칙 혹은 행위 규범처럼 받아들여진 상태라고 정의될 수 있다(Hale, 2015). 즉 이념, 정책, 법, 제도 등 ‘문서상’ 존재하는 ‘차가운’ 공식 정치의 이면에서 동등하지 않은 ‘인간들’ 사이에서 보상과 처벌이 교환되는 구조 혹은 기제가 형성되어 공식 정치를 작동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의 정치 혹은 정치체제는 후견주의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 통치 형태가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적 관계의 양상을 의미하는 후견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혹은 핵심적인 요소는 보상을 위한 자원이 분배되고 처벌을 위한 강제력이 적용되는 통로인 위계적·수직적 후견 네트워크이다. 후견주의를 구성하는 피후견자(client), 하위후견자(subpatron), 최고 후견자(patron in chief) 같은 다층위의 행위자들 간에 보상과 처벌의 교환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 계단식 피라미드 구조의 후견 네트워크를 통해서인 것이다. 따라서 후견주의 정치체제들 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인 역시 바로 이 후견 네트워크가 단일 피라미드로 배열되었는지 아니면 다수의 경쟁적 피라미드로 배열되었는지 여부가 된다(Hale, 2015). 다른 말로 하면, 후견주의 정치체제는 하나의 후견 네트워크가 정치적 과정을 장악한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와 복수의 후견 네트워크들이 보다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거나 행사하기 위해 각축·투쟁하는 경쟁적 후견주의 체제의 두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후견주의 개념틀을 사용하여 키르기스스탄 정치체제 전환·변동의 주요 사건 및 국면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키르기스스탄 정치체제의 특징으로서 후견주의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듯이, 아카예프와 바키예프 모두 집권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권력을 자신과 자신의 일가 및 측근에게로 집중시키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는 물론 권위주의를 향한 움직임이었지만 또한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를 구축하려는 노력과 과정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아카예프의 예를 들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한 개혁적 지도자로 명성 높았던 그가 1990년대 중반 이후 평판에 걸맞지 않게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논의된 바와 같은데, 후견주의 개념을 통해 보면 이러한 그의 정치적 행보의 이중성 혹은 모순성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아카예프는 한편으로는 대규모 사유화를 비롯한 급진적인 경제체제 전환을 실행하기도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유화되지 않은 대규모 국영기업이나 국가경제·재정기구는 일가 및 측근의 통제·지배를 받게 하거나 의회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주지사 임명제를 도입하여 지방 요직에 자신의 일가 및 측근을 배치하기도 하였다(Engvall, 2018).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통해 아카예프는 결국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를 건설하는 데 성공한다(Hale, 2015). 따라서 그의 궁극적인 정치적 지향이 민주주의 혹은 권위주의였는지 아니면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거나 합의된 견해에 이르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그의 일관된 목적이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기하기 힘들어 보인다.
바키예프의 정치적 행적에서는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 건설의 의도와 결과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의회제 개헌 약속의 이행을 지연하는 가운데 대통령제 헌정질서의 대통령으로서 그는 법집행기관 인사, 재정 관련 국가기구 신설, 야권의 잠재적인 정치적 경쟁자 포섭 같은 공식·비공식 권력과 방법을 사용하여 이른 시간에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다(Hale, 2015). 이러한 바키예프의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 건설 과정에서 결정적인 요인이자 두드러진 특징은 아카예프 정권 시기와 달리 바키예프 일가 및 측근은 공식적으로 안보기관을 포함한 법집행기관을 장악했다는 점이었다(Engvall, 2018). 2007년 12월 조기총선과 2009년 7월 조기대선에서 각각 친대통령 정당과 바키예프가 압승을 거둔 것은, 이처럼 최고 후견자만 아카예프에서 바키예프로 바뀌었을 뿐 또 다른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가 공고화되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사건들이었다. 시민혁명에 의한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키르기스스탄에서 민주주의 체제는 착근되지 못한 반면에, 후견주의 체제, 그중에서도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는 연속된 것이다. 후견주의와 후견 네트워크 개념은 아카예프 정권과 바키예프 정권의 권위주의화뿐만 아니라 두 정권이 대중시위에 의해 전복된 과정을 설명할 때에도 유용성을 갖는다.
2005년 3월 아카예프를 퇴진시킨 튤립혁명은 무엇보다도 그의 낮은 인기와 임박한 권력승계에 대한 대항 엘리트의 기대가 결합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논의된다(Hale, 2015). 경제적 어려움, 부패, 권위주의적 행태 등으로 인해 이미 1990년대 말에 이르면 대중은 아카예프 정권에 대해 실망과 환멸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2004년 중반 아카예프는 임기 연장을 위한 개헌을 하지 않고 임기가 만료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한다. 이는 아카예프 후견 네트워크에 속하지 않는 대항 엘리트가 정권에 도전하거나 반대할 때 뒤따를 수 있는 위험의 수위가 낮아졌음을 의미하게 되고, 이미 아카예프 정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던 대중이 이들 엘리트의 피후견자로 동원되어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나선다. 시위가 절정에 달한 결정적인 순간에 아카예프가 이들 시위대를 향한 자신의 발포 명령에 법집행기관 병력이 복종할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항 엘리트는 물론 아카예프 후견 네트워크에 속한 내부 엘리트까지 정권에서 이탈해버림에 따라 아카예프에게는 나라를 떠나는 것 외에는 남은 선택지가 없게 된다(Hale, 2015). 튤립혁명의 사례는 특히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의 유지ㆍ강화 혹은 붕괴에서 후견 네트워크의 결속력이 결정적인 요인임을 말해준다.
2010년 4월 유혈사태 혹은 혁명에 인한 바키예프 축출의 계기 또한 튤립혁명과 마찬가지로 그의 낮은 인기와 다가올 권력승계였다고 논의되는데(Hale, 2015), 이때에도 엘리트의 지지 혹은 이탈은 정권 붕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 바키예프 집권기 내내 대중 및 엘리트의 반정부 시위는 끊이지 않았는데, 2010년 초에 이르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경제상황의 악화가 체감되고 공공요금 및 통신료가 인상되면서 바키예프에 대한 여론이 크게 악화된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된 2010년은 바키예프가 헌법에 규정된 마지막 두 번째 임기에 들어선 해이기도 하다. 이에 바키예프 후견 네트워크에 속하지 않는 엘리트가,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를 구축한 바키예프의 권력 독주를 막기 위해서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now or never)”라는 절박감(sense of urgency)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계획하고, 이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빚어지고 희생자가 발생하는 국면을 거치며 결국 바키예프는 권력을 잃고 만다(Hale, 2015). 최고 후견자가 후견 네트워크 내부 및 외부의 엘리트를 관리 혹은 분할통치하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입할 때에만 견고한 후견주의 체제가 수립·유지될 수 있는데, 바키예프의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는 충분한 노력과 시간이 투입되지 않은 채 빠르게 구축되었고, 따라서 그 붕괴 또한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
바키예프 정권과 그의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가 붕괴된 이후 일어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2010년 6월 행정부 권력을 분산시킨 신헌법의 채택이었다. 후견주의 체제는 비공식 정치에 속하는 질서·규칙·관행·구조지만, 비공식 정치는 공식 정치와 분리되어 존재하거나 작동하지 않는다. 공식 정치와 비공식 정치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구성한다. 이러한 점은 헌법과 후견주의 체제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승자독식(winner-take-all) 현상을 방지하려는 의도에 따라 ‘경로형성적 제도 선택’으로 채택된 신헌법은(강봉구, 2011) 비공식적인 후견주의 정치체제가 독점적인 유형에서 경쟁적인 유형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틀과 제약으로 기능한다.
예를 들면 신헌법에 따르면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은 총리 임명 및 정부 구성 과정에서 제한된 권한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임기가 6년 단임으로 제한되어 처음부터 레임덕(lame-duck)이 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Hale, 2015). 또한 신헌법은 이전에 비하면 의회의 권한을 크게 강화했지만 동시에 한 정당이 의회 120석 중 65석 이상을 차지할 수 없도록 규정하여 의회를 지배하거나 압도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당이 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헌정질서는 특정 정치인 혹은 정치세력이 과거처럼 대통령으로서의 권력을 이용하거나 혹은 의회를 장악하는 방식을 통해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를 구축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 결과 바키예프 정권 퇴출 이후 치러진 두 번의 총선과 두 번의 대선은 대체로 경쟁적인 것이었다는 국제사회의 평가를 받았고, 현재 의회에서는 서로 독립적인 다수의 정당들이 연정 구성을 포함한 여러 이슈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Marat, 2018). 이러한 사실들은, 2010년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체제는 복수의 후견 네트워크가 영향력 확대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지형으로 재편되었음을 말해준다.
후견주의 정치체제의 부정적 현상으로서 부패
후견주의적 정치행태가 모두 부패 행위인 것은 아니고, 모든 부패 행위가 후견주의 정치에 기인하는 것 또한 아니다(Hale, 2015). 그러나 후견주의와 부패가 권력·자원 배분 및 정책결정 과정의 폐쇄적 구조, 비공식 규칙과 관행에 의한 상호이익의 교환 같은 공통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적어도 두 현상 사이에 친연성은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해주듯이, 후견주의 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키르기스스탄에서 부패의 규모는, 2013년 경제부의 추산에 따르면, 국가 세수의 40%에 이를 정도로 막대하다(Engvall, 2018). 이처럼 키르기스스탄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부패의 양상이 후견주의 체제의 성격 변화와 관련하여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카예프 정권과 바키예프 정권 모두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였다는 점과 관련하여 이 두 시기에 벌어진 부패는 기본적으로 대통령 일가 및 측근이 독점한 부패의 성격을 공유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아카예프 정권 시기와 바키예프 정권 시기 부패의 양상을 보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아카예프 정권 시기보다 바키예프 정권 시기에 대통령 일가 및 측근의 부패 독점이 더 공식적이고 직접적이었다는 차이점이 논의될 수 있다. 한편 부패의 핵심 원리는 정치·관료 직위를 지대로 전환시키는 것이고, 지대란 시장가치를 초과하는 자원 수입 극대화로 이해될 수 있다는 일반론은(Engvall, 2018: 272) 키르기스스탄의 부패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유용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아카예프 정권 시기에는 정권이 주도한 사유화 과정이 대통령 측근에 의해 관리되면서 특히 수익성 높은 지대의 원천이 되었고, 사유화되지 않은 국영기업 중에서는 금광 회사가 대통령 일가 및 측근에 의해 경영되면서 부패의 온상으로 악명 높았으며, 그 밖에도 에너지, 금속, 언론, 통신, 교통, 주류 등의 부문에서 40개 이상의 기업과 재단이 아카예프 일가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탈세에 연루되거나 부패 혐의를 받았다(Engvall, 2018: 273-274; Hiro, 2009: 306). 튤립혁명의 급박한 와중에 아카예프는 비밀수첩 등의 문서를 남긴 채 황급히 대통령 관저를 떠났는데, 이후 여기에 적힌 의회 의원 후보 3만 달러에서 고위 공무원이나 외국 대사 20만 달러에 이르는 등의 공직에 붙은 뇌물 액수가 공개되면서(Hiro, 2009: 305) 아카예프 일가 및 측근이 독점했던 부패의 범위와 정도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일어났다.
이처럼 바키예프가 전임 정권의 몰락을 야기한 주요인 중의 하나가 부패임을 목격하며 집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대통령 일가 및 측근의 부패 독점은 그의 집권기에도 되풀이된다. 에너지, 은행, 언론, 통신 등의 부문에서 많은 국영·민영 기업이 빠르게 바키예프 일가 및 측근의 수중으로 넘어가면서 정권 말기에 이르면 키르기스스탄 경제 전체가 그의 아들 측근에게로 집중되다시피 한 것이다. 이러한 바키예프 일가의 경제력 장악·확대에서 법집행기관의 참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는 바키예프 일가 및 측근에 의해 지배된 검찰, 내무부, 국가안보위원회 등의 법집행기관과 신설된 재정경찰국이 기업 단속을 통해 지대추구 행위에 나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Engvall, 2018). 이처럼 바키예프 정권 시기의 부패 현상은 아카예프 정권 시기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일가 및 측근에 의해 독점되지만 보다 노골적으로 그러했다는 특징을 나타낸다.
헌정질서의 개편은 비공식 정치 혹은 체제인 후견주의의 성격 변화를 유도 혹은 강제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치 혹은 체제에서 만연해진 부패 현상의 양상이 달라지는 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2010년 신헌법 하에서는 독점적 후견주의 체제가 경쟁적 후견주의 체제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부패도 특정 일가 및 측근에 의해 독점된 양상이 아니라 주로 의회 진출에 성공하여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에 의해 분산·분점된 양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2010년 이후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부패의 양상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바키예프 정권이 붕괴되자 부와 자산의 재분배가 시작되는데, 예를 들면 2010년 말 첫 연정이 구성된 이후 이에 참여한 정당들이 광산, 언론, 통신, 교통 등의 부문에서 수익성 높은 기업들을 나누어 가진 것이다. 신헌법 하에서는 지대추구 행위의 주체와 방식이 크게 달라진 것인데, 이러한 새로운 양상은 “연립에 기반한 지대추구 체계 형태”이라고 일컬어지며 보다 조직적 성격을 띠게 된다. 한편 여러 정당들 가운데 키르기스스탄사회민주당(SDPK)이 연이어 대통령을 배출하고 매번 연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경제 부문 및 법집행기관에 대한 장악력을 점차 확대해 나가긴 했지만, 의회가 다양한 반부패 기구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2010년 이후 지대추구 기회의 분권화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반부패 캠페인은 선별적으로 진행되면서 또 다른 지대추구 행위로 변질되기도 하는데, 이는 정당에 의해 분산ㆍ분점된 양상의 지대추구 행위가 부패의 근절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Engvall, 2018).
요약과 전망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체제 전환 과정은 때로는 과도한 열정의 분출과 이에 따른 격동의 연속이었다. 장기집권이 대세인 중앙아시아에서는 예외적으로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정권이 수차례 교체되었고,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간혹 끔찍한 폭력과 많은 희생이 수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키르기스스탄 정치체제의 특징을 파악할 때 비공식 네트워크와 교환관계에 주목하는 후견주의 개념은 제도적 측면에 주안점을 두는 민주주의 개념이 포착하기 어려운 현상과 원리, 역학관계를 드러내 보여주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한편으로 후견주의는 아카예프 정권과 바키예프 정권 시기는 물론 아탐바예프 정권 이후 현재에도 키르기스스탄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일관된 비공식 기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바키예프가 축출된 2010년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후견주의 체제는 독점적 후견주의에서 경쟁적 후견주의로 그 유형이 바뀌었는데, 이러한 변화의 분기점은 그해 여름 신헌법의 채택이었다. 키르기스스탄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할 수 있는 부패 현상 또한 이 변곡점을 계기로 대통령 일가 및 측근이 독점한 부패에서 의회 내 정당들이 분점한 부패로 그 양상이 달라졌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지난 30년간 그 성격과 내용을 변화시켜가며 생명력을 유지한 후견주의 체제와 부패 현상이 적어도 당분간은 지속될 것 같다. 지금도 대부분의 정당에는 후견관계가 만연해 있으며, 대중은 여전히 정치적 다원주의에 반하는 전통적 가치에 기반하여 활동하는 지도자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Marat, 2018: 416).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적 과정에 경쟁이 도입되었다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긴 했지만, 후견관계 혹은 후견주의 관행에 대한 기대심리는 크게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의식과 가치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은 체제 유형 및 행태 양상의 변화는 근본적인 것일 수 없어서 기존의 사고와 행위 규범이나 원칙은 표면적 변화의 저변에 자리를 잡고 여전히 암묵적인 게임의 규칙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은데,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앞으로도 한동안은 후견주의 체제와 부패 현상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저자소개
김태연(antiwar99@hanmail.net)은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강사이다. 모스크바국립대학교(MSU)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포스트소비에트 지역의 민족주의, 민족분쟁, 이슬람, 공간, 기억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의 2차 세계대전 기념물: 다르게 말하기와 기억의 조작 사이에서” (2020),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현재: 정치ㆍ사회ㆍ경제적 선택』 (2020, 공저) 등 다수의 논문 및 저서를 출판하였다.
1) 흔히 신헌법에 따라 키르기스스탄의 권력구조가 의원내각제로 전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행정부와 행정부 수반인 총리가 전적으로 의회에 의해 구성되고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고전적인 의원내각제에서와는 다르게,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총리가 대통령의 지명과 의회의 승인을 받아 임명된다. 또한 신헌법에 따르면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의 권한은 이전에 비하면 크게 약화되지만, 대통령제에서의 대통령처럼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도 여러 영역에서 의회로부터 독립적인 행정 실권을 보유하기도 한다. 2010년 신헌법의 주요 내용에 대해서는 강봉구(2011: 274-275) 참조.
2) 정된 헌법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Marat(2018: 418-419) 참조.
참고문헌
- 강봉구. 2011.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키르기스스탄의 새로운 제도 디자인.” 『국제정치논총』 제51집 1호.
- Engvall, Johan. 2018. “From Monopoly to Competition: Constitutions and Rent Seeking in Kyrgyzstan.” Problems of Post-Communism. Vol. 65, No. 4.
- Hale, Henry E. 2015. Patronal Politics: Eurasian Regime Dynamics in Comparative Perspectiv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 Hiro, Dilip. 2009. Inside Central Asia: A Political and Cultural History of Uzbekistan, Turkmenistan, Kazakhstan, Kyrgyzstan, Tajikistan, Turkey, and Iran. New York and London: Overlook Duckworth.
- Marat, Erica. 2018. “Kyrgyzstan’s Experiments with Democracy.” in Daniel L. Burghart and Theresa Sabonis-Helf, eds. Central Asia in the Era of Sovereignty: The Return of Tamerlane? Lanham: Lexington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