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제일의 헌법 국가, 인도

적어도 아시아에 국한해서 본다면 헌법발전의 최상위에는 한국, 일본, 인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 지표로 볼 때, 민주주의와 인권의 측면에서는 일본과 한국이 앞서나, 헌법재판의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과 인도가 최상위에 선다. 그런데 헌법에의 충실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인도가 한국보다 앞선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의 청사진인 헌법을 잘 만들고 헌법에 부합하게 국가를 조직하고 운영해왔다는 말이다. 물론 면적과 인구가 워낙 큰 나라이기 때문에 여전히 인도의 입헌주의에 대해서는 의문과 회의가 들 수 있지만, 인도인들이 헌법에 쏟은 정신과 열정은 그저 지나칠 정도가 아니다. 이 글은 인도의 독립과 건국부터 오늘날까지 얼마나 헌법에 입각해서 철저하게 점검하면서 살아왔는가를 소개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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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선(방송통신대학교)

매우 독특한 인도헌법

아시아에 국한해서 본다면 인도의 헌법 수준은 분명 최정상에 서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의아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헌법재판이 활성화된 곳은 한국과 인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나라 중에서도 헌법재판 활동만 보면 한국이 앞서나, 헌법규범에 대한 충실도(faithfulness)의 측면에서는 인도가 월등 높아 보인다. 인도만큼 헌법의 제정 단계에서부터 오늘날 국정운영까지 철저히 입헌주의적 노력을 기울인 나라를 아시아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한 가지 예만 보도록 한다. 인도는 골수 의원내각제 국가이다. 흔히 정치학자들은 내각제를 시행하려면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높아야 가능한 정부 형태라고 설명한다. 한국의 경우는 1960년 4·19혁명 직후 들어선 정부에서 1년간 의원내각제를 시행한 적이 있었는데 실패 사례로 평가받았다. 그 트라우마로 인해 지금도 한국 국민들은 대통령제를 선호한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1950년 국가출범 이후에 한 번도 예외 없이 내각책임제가 지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인도와 국민의 정치 수준은 높다고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다. 그것은 빈곤과 문맹, 전근대적인 카스트제, 열악한 여성과 아동 인권 등 인도에 대한 고정관념이 불식되지 않는 데서 연유하리라 본다. 워낙 인구수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국민소득이 몇만 불 되고 인권보장이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국제 위상에 비례해서 향후에는 종전과 다른 인도에 대한 높은 관심과 평가들이 쇄도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도 헌법은 모든 것에서 독특하다(sui generis). 여기서는 그 형식적 특징에 대해서보다 운영상의 특징에 집중해서 인도인들의 입헌주의적 노력을 살피고자 한다.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곳곳에서 한국 헌법과의 비교가 따를 것이다.

캘리그래피로 장식한 인도 헌법 표지
출처: Wikimedia Commons

 

헌법에 대한 깊은 인식과 존중

한국 헌법은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총선거가 실시되고 그 후 2개월 뒤인 7월 12일에 국회를 통과한다. 그리고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한 뒤 이에 근거해 대통령도 선출하고(국회에서), 정부조직법도 만들고 8월 15일 정부수립일 기념식을 가진다. 제헌에서 국가출범까지 모든 것이 3개월 남짓에 끝났다. 인도의 경우,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이라는 엄청난 과제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었다. 독립에 앞서 1946년 제헌의회 의원 총선거를 실시했고 그해 12월 9일 제헌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듬해 1947년 8월 15일 독립이 된다. 분단으로 인하여 일부 지역 대표자들에 대한 교체 작업이 있었지만 제헌회의는 계속되었고, 헌법안은 개원 약 3년 만인 1949년 11월 26일에 제헌의회를 통과한다. 의회에서 통과한 이 날을 인도에서는 ‘헌법의 날’(the Constitution Day)로 기념한다. 우리나라는 제헌국회에서 헌법이 통과된 7월 12일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오직 헌법 전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인도의 헌법에 대한 인식(awareness)이 한국보다 월등 높은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의 제헌절은 헌법 공포일인 7월 17일이다. ‘제헌’이란 국가를 세운다는 뜻이다. 제헌절은 형식으로서의 건국절이다. 인도의 헌법 공포일은 제헌의회에서 의결된 11월 26일부터 2개월 뒤인 1950년 1월 26일이었다. 이날 헌법을 공포했고 동시에 이날을 공화국의 날(Republic Day)로 선포하였다. 건국일이 된 것이다. 왜 1월 26일로 잡았냐면 그것은 우리의 3월 1일이라 할 수 있는 식민지 시절 1930년 국민회의 라호르 대회에서 결의했던 ‘완전독립의 날’ (Purana Swaraj Day)을 기념한 것이다. 이렇게 헌법의 제정과 공포, 그리고 건국 그 어느 하나도 의미를 놓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인도의 건국에 참여한 이들이 매우 지성적이었고 특히 헌법에 대한 이해와 존중심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 통합의 헌법 제정

헌법의 존재의의 중의 하나는 국민의 통합(integration)에 있다. 헌법 제정 시기는 권력투쟁이 가장 심한 때이다. 어느 집단이 제헌의 주도권을 잡느냐, 또한 제헌 이후에 누가 집권을 하느냐는 것이 가장 첨예하게 대두되는 격변기이기 때문이다. 인도 제헌 과정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인도는 그렇게 심한 권력 갈등은 발생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간디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의 절대적 카리스마가 배후에 있었기 때문에 집단 간 이전투구가 없었고 질서가 섰다.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간디는 자신의 후계자로 네루를 내세우고 건국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자와할랄 네루도 그만한 경력과 지성과 덕성이 있었지만, 간디의 후광으로 그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렇듯 수많은 인사들의 자제력과 협력으로 건국의 결실을 이룬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가 파텔(Vallabbai Patel)이다. ‘철인’(iron man)이란 별명이 붙었던 그는 인도를 하나의 연방국가로 만드는 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네루에게 가장 큰 경쟁자였고, 네루가 총리일 때 내무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한 바 있다. 현재 모디 총리는 파텔의 인물을 높이 기리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큰 182m의 동상을 그의 고향인 구자라트에 세웠다.

제헌의회에서의 파텔과 사로지니 나이두(Sarojini Naidu)
출처: Ministry of Earth Science (moes.gov.in)

이 당시 인도의 정치인들이 보여주었던 민주적 정치적 관용과 덕(virtue)은 매우 컸다. 제헌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네루가 암베드카르를 헌법기초위원장으로 위촉했다는 사실이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예다. 암베드카르가 누구인가? 그는 불가촉천민 출신이었지만 용케 유학 갈 기회를 얻어 당시의 인도인 중에서 아마도 가장 화려한 학벌을 가진 인물이었을 것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영국에서 변호사로 실력을 쌓았던 그는 귀국하면서 인도의 카스트제도의 불평등에 맞섰다. 결국 그가 주장했던 불가촉천민을 위한 분리선거구를 식민정부로부터 얻어냈다. 이 과정에서 평등의 종교를 선택한다면서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전향한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몇 차례 간디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대결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배경을 보면 간디를 모시던 국민회의에서 그에게 헌법기초위원장이라는 중책을 위촉한다는 발상 자체가 대단히 획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차례 고사한 끝에 암베드카르는 이 자리를 마지못해 맡았다. 맡고 나서도 불평은 거듭될 정도로 개성이 강한 인물이다. 그는 법무부 장관직도 맡았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정치적 투쟁이나 갈등, 알력이 가장 심할 수밖에 없던 이 시절에 거의 적대 진영에 서 있는 인사들까지 제헌 과정으로 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헌법을 전 국민의 통합된 작품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서 한국의 경우 제헌과 건국 과정에서 얼마나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던 가를 생각해보면 인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정말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인도에서는 미국과 똑같이 독립과 제헌에 기여했던 인물들을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로 세워 높이 존경하고 있다.

암베드카르가 프라사드(Rajendra Prasad)에게 인도 헌법을 전달하는 장면의 부조
출처: Creative Commons
저자: संदेश हिवाळे

 

모자이크에서 아름다운 조각보

헌법에는 독창적 헌법과 모방적 헌법이 있다. 역사상 소수의 경우(예컨대, 미국헌법, 프랑스헌법, 러시아 사회주의헌법,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는 다른 나라들의 헌법을 모방해서 자국 헌법을 제정한다. 모방적 헌법이라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헌법 자체가 인류의 문화적 유산이라 할 수 있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이 나라 저 나라의 모범사례들이 카탈로그가 되어 조성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인도 학자들 스스로 인도헌법을 ‘아름다운 조각보’(beautiful patchwork)라고 불렀다. 1949년 당시의 최초의 헌법은 395개의 조문과 8개의 부칙을 포함한 세계최장의 헌법전이었다. 오늘날, 이 헌법은 465개 조문, 12개의 부칙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모든 개혁과 제도 변화를 헌법에 근거해서 시행하기 때문이다.

인도헌법에 영향을 준 국가들
출처: ⓒDiverse+Asia

암베드카르는 “전 세계 헌법을 모두 샅샅이 조사한(ransacking) 연후에 헌법 틀을 짰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탁상공론만 한 것이 아니다. 발로도 뛰었다. 한국의 유진오 선생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헌법자문관 라우(B.N. Rau)가 그런 역할을 했다. 그는 법률가로서, 판사로서, 헌법학자로서 유럽과 미국의 헌법 이론들을 섭렵하면서 제헌에 기여했다. 노력의 70%는 연방과 주의 조직을 새롭게 짜는 작업이었다. 이 일은 대체로 1935년의 「인도정부법」에 기초했다. 기본권조항은 미국 헌법의 권리장전에서 수용하고, 복지국가의 사회적 기본권에 해당하는 내용은 국가정책의 지도원리(Directive Principles of State Policy)라는 독특한 방식은 아일랜드로부터 받았다. 의원내각제 정부형태와 특히 의회주권원리는 영국 통치 아래서 익숙했던 것들이었고, 대통령과 부통령제는 미국의 것을 받아들였다. 연방의 구조와 연방과 주의 상호관계와 권한배분의 모델은 특별히 캐나다의 것을 수용하였다. 또한 헌법 부칙 제7조에서 규정한 통상, 교역, 왕래에 관한 내용과 의회특권에 관한 연방과 주의 병행목록들은 오스트레일리아 헌법을 따른 것이며, 비상조치에 의한 기본권 제한 권한은 독일 바이마르헌법을 모델로 하였다. 또한 국민의 의무에 관한 조항은 소련헌법을 참조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헌법 이념은 프랑스로부터 유래했고, 개헌절차와 상원 선출 방법은 남아프리카 헌법을 차용했다. 인도의 법체계와 법조문화는 기본적으로 영국의 보통법(common law) 전통에 서 있다. 하지만 현대 인도는 영국을 넘어 미국법으로 확대되었고 동시에 대륙법과 사회주의법의 내용까지도 가미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헌법의 형식과 내용은 서구의 많은 나라로부터 차용했지만, 헌법의 적용 대상은 인도였다. 인도 현장에는 외국과는 판이한 수많은 다양한 토착적인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과 해법도 지속적으로 헌법에 반영시켰다. 빈곤과 사회정의, 종교와 언어의 다양성, 소수 부족, 카스트와 후진계급 등 여타의 국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사회현실에 관한 특별한 배려가 담겨 있다. 수수께끼보다 더 난해한 이 문제를 어느 하나 포기함이 없이 인도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이런 구체화 작업에 항상 헌법이 수반되었다.

1946년 12월 제헌의회
출처: Ministry of Earth Science (moes.gov.in)

 

헌법의 목적: 건국과 사회개혁

제헌의회의 키를 잡았던 네루는 제헌의회에 ‘목적 결의’(Objectives Resolution)를 제시하였다. 새로운 헌법은 사회혁명의 목표에 봉헌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몇백 년 만에 찾아온 독립이었기 때문에 건국과 사회개혁 두 작업을 동시에 해야만 했다. 네루는 이 거대한 변화의 작업을 의회가 주도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당시에 국민회의는 유일정당이라 할 만큼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으니 의회에 의한 사회개혁은 현실성 있는 기획이었다. 네루는 영국에서 공부하고 영국 정치와 법제에 익숙해 있었다. 그래서 영국의 의회주권원리를 원용하면 막강한 힘으로 개혁법률을 통한 개혁이 가능하리라고 추산하였다. 건국은 연방을 구성하는 일이었고, 사회개혁은 봉건제의 폐지와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토지개혁이 핵심과제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의회의 개헌법률이 발동되기 시작하였다.

인도헌법은 정말 독특한 개헌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즉 경성헌법과 연성헌법으로 이원화시켰다. 경성헌법은 헌법개정을 까다롭게 하는 방식이고, 연성헌법은 일반 국회의 절차만으로 개정할 수 있는 헌법을 말한다. 개헌을 위해서 최종적으로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한국 헌법은 당연히 경성헌법이다. 헌법전이 없는 영국을 제외하고 성문헌법 국가들은 일체 경성헌법국가들이다. 그런데 인도는 ‘연성에 가까운(more flexible than rigid)’ 개헌방식을 택하였다. 네루 등 초창기 지도자들은 바로 연성헌법에 의회주권원리를 결합해서 의회 주도의 사회개혁을 할 작정을 했던 것이다.

1950년 1월 발효된 헌법은 1년 후 제1차 개헌을 하였다. 개헌법률은 안정된 국가건설을 위해 가장 시급했던 토지개혁과 후진계급(backward class)의 보호,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팬데믹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두는 개헌으로 시작되었다. 개헌법률은 자민다리(지주제) 폐지 입법에 대한 무제한적인 면책특권을 부여했다. 당연히 지주 측에서 반대의 소송이 제기되었다. 헌법상의 재산권 침해라는 이유다. 의회도 기본권을 제한하는 입법권한은 없으며, 개헌법률이라 해도 이것은 법률 차원의 헌법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개헌법률에 의한 개혁입법이 사법부와의 갈등관계로 비화하였다. 물론 제1차 개헌법률에 대한 이의 제기는 대법원 5명 재판관 전원일치로 기각되었다. 외견상 대법원이 의회의 입장을 지지한 것이다. 소송은 지속되었고, 대법원의 입장은 점진적으로 변해갔다. 정치인들의 요람이 의회라면 사법부는 법률가들의 요람이다. 독립과 건국 당시에는 당연히 의회 정치인들이 크게 보였지만, 제헌 이후에는 사법부는 별도로 자신의 고유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사법부가 원래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법관들은 법의 논리를 별도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정치인들과 법률가들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인도 헌법의 백미는 의회주권원리와 사법심사제를 동시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의회주권원리(sovereignty of the parliament)란 영국만이 가진 독특한 전통이다. 영국은 민주주의가 가장 먼저 발달했는데, 1689년 권리장전 사건을 계기로 군주는 존재하지만, 주권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가진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영국은 오늘날까지 성문헌법이 없는 헌법국가로서, 법률이 최고의 법이다. 즉, 의회법률이 최상의 법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미국은 영국법 전통에 기반을 두면서도 다른 길을 걸었다. 성문헌법을 만든 것이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의회 법률이라도 성문헌법에 위배되면 무효라는 사법심사제(judicial review)가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위헌법률심사제는 미국에서 기원한 제도이다. 사법심사제는 따라서 영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제도이고 성문헌법 국가인 미국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인도의 경우는 영국의 의회주권제도 받아들이고 미국의 사법심사제도 수용하였다. 인도는 성문헌법 국가이기 사법심사제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의회주권원리는 사법심사제와 공존할 수 없는 원리라는 점에 문제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충하는 두 가지 원리를 무기로 삼아 의회와 대법원 간에 벌인 진검승부는 인도 헌정사에서 가장 흥미롭고 핵심적인 장면이 되었다.

헌법개정법률(개헌법률)도 헌법이기 때문에 일단 규정되면 헌법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일반 의회법률과는 분명 성격이 다르다. 1967년 인디라 간디가 집권하면서 사회주의 방식의 국유화 경제정책이 시행되자 대법원은 의회의 개헌권에 대해 종전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즉, 기본권은 개헌법률에 의해서도 축소 또는 삭제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골락 나트 판결). 1971년 의회는 제24차, 제25차 개헌법률 제정을 하여 골락 나트 판결을 무력화시켰다. 개헌법률은 헌법이기 때문에 어떤 헌법규정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1973년 케사바난드 판결은 의회의 입장을 어느 정도 지지하면서도 전혀 다른 논리를 덧붙였다. 즉, 개헌법률에 의한 개헌권은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것은 동의하나, 의회가 헌법의 ‘기본구조’(basic structure)를 변경할 권한까지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의회는 다시 1976년 제42차 개헌법률에 의하여 “개헌법률의 효력에 대해서는 어떤 법원도 여하한 이유로도 심사할 수 없다.”라고 못 박아 버렸다. 개헌법률에 대한 사법심사권의 배제를 선언한 것이다. 그렇지만 대법원도 이에 맞섰다. 1980년 대법원은 제42차 개헌법률의 사법심사 배제조항은 개헌에 의해서도 배척될 수 없는 ‘핵심사항’(basic features)에 해당한다며 개헌법률을 무효로 선언하였다(미네르바 직물공장 판결). 헌법개정권력의 한계를 사법부가 실제로 확인한 세계적으로도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해서 인도의 의회주권원리는 사법권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강경선, 2020).

이렇듯 의회와 사법부의 각축을 통해 인도의 헌법이론과 판례는 정밀화 과정을 거쳤다. 오늘날에는 의회보다도 오히려 대법원이 더 사회개혁의 주도권을 쥔 감이 없지 않다. 독립과 건국에 기여했던 카리스마를 가졌던 정치인들이 모두 퇴장하고 난 지금은 전문가 집단인 법원이 상대적으로 지위가 강화된 것으로 느껴진다. 특히 대법원이 사법적극주의를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깊숙이 개입하고 사회개혁의 한 부분까지도 자임하고 나설 때 이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공익소송(public interest litigation)의 활성화다. 공익소송은 미국에서 유래한 제도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법원에 의해 훨씬 광범위하게 활용되어 사회개혁에 큰 기여를 하고 따라서 사법부의 권위를 신장시킨 획기적인 제도로 변모되었다. 인도 특유의 고질적인 인권문제들 노예노동, 방치된 아동인권, 노동착취, 감옥인권, 경찰 등 권력기관에 의한 피해, 여성학대, 동네에서 벌어지는 사적 폭력, 공해문제 등을 법원이 직접 감독하여 문제 해결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50년 1월 24일, 제헌의회 의장인 라젠드라 프라사드가 인도 헌법에 서명하고 있다.
출처: Ministry of Earth Science (moes.gov.in)

 

진화하는 연방제도

한국 사람들은 인도가 원래부터 하나의 나라로 있다가 독립된 것으로 안다. 하지만 기나긴 역사에서 통일된 인도는 거의 없었다. 영국 바로 직전에 있었던 무굴제국, 또 그 이전으로 소급하면 600년대 이후부터 서아시아로부터의 이슬람 세력이 지속적으로 도래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힌두교 다수의 통일 인도로 독립한 것은 매우 특별한 건국이라 할 수 있다. ‘통일 인도!’ 말은 쉬어도 이루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결국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가 분단되어 나갔지만, 인도 내부의 통일과 통합도 결코 만만치 않던 작업이었다. 영국에서 독립할 당시에 인도 아대륙(亞大陸)의 5분의 2(인구로 보면 4분의 1)가 토후국들이었으며 그 수는 565개에 달하였다. 이들 토후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시킨 것이다. 봉건제적 왕국인 토후국들은 건국 이후 일반 국민으로 변모해왔지만, 특히 1971년 「토후지위부인법」 제정으로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대부분의 토후국은 위에서 언급했던 노련한 정치가 파텔의 헌신적 노력을 통해 인도연방에 편입되었다.

통일국가라는 건국과정에서는 당연히 예상되는 바와 같이 수많은 다양성들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양하지 않은 나라는 없지만, 집단의 규모와 수에서 인도의 다양성을 따를 나라는 없을 것이다. 인도의 다양성은 혼란스럽지는 않다. 인도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다양성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다. ‘다양성 속의 통일’(unity in diversity)이라 해도 무방하다. 가장 큰 에스닉(ethnic) 집단들은 언어, 인종, 종족, 카스트, 종교, 지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들 요소가 이중, 삼중, 다중적으로 어우러져 다채로운 인도 사회를 만들어 왔다(S.D. Muni, 2010).

연방제(federalism)는 문화적 다양성을 갖는 국가를 통합하기 위해 적합한 조직원리다. 그런데 인도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연방제(미국의 연방제)와는 다르다. 현재 연방은 29개 주와 7개의 연방직할지역(Union Territories)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헌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미국과 같이 각 주가 기초가 되어 그들 간의 합의로 만든 상향식 연방이 아닌 것이다. 인도는 처음부터 주의 자율성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전체를 하나로 묶는 일이 급했다. 단일국이 아닌 연방주의를 선택한 것만 해도 대단한 자유와 민주적 통찰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 점에서 단일국을 추구한 중국과 뚜렷이 대비된다. 향후 두 나라의 귀추가 주목되는 결정적 차이점이다.

인도는 세계 최장의 헌법전으로 출범하였다. 헌법에 따라서 연방과 각 주의 조직과 권한을 정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방대했고, 해를 거듭할수록 헌법은 더욱 길어졌다. 법원 조직도 단일국과 같다. 즉, 하나의 대법원을 정점으로 한 단일체계의 법원조직을 취한다. 그래서 인도 연방제는 중앙정부가 우월한 연방제 즉 준(準)연방제(quasi-federalism)라고 불린다. 영문호칭도 Federation 대신 Union을 많이 쓴다. 헌법 제1조제1항은 “India, that is Bharat, shall be a Union of States.”라고 표기한다. 연방정부를 중앙정부(Central Government)로 호칭할 때가 많다. 인도 헌법학자인 D.D. Basu도 인도연방제는 연방제와 단일국의 혼합형이라고 보았다. 인도의 국가이익이 최우선시된 연방제로 평가했다(D.D. Basu, 2003).

인도는 캐나다 모델을 차용하였다. 인도 연방제의 기초가 된 1935년 ⸀인도정부법」이 1867년의 캐나다의 「British North American Act」을 답습했고, 그 후 제헌 당시에도 이 방식을 계속 유지했던 것이다. 연방과 주의 권한 배분도 캐나다나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연방 위주의 권한배분 방식을 따랐다. 미국과 같은 ‘강한’ 연방제는 공통의 이해관계 즉, 국방, 외교, 화폐, 조세, 각 주간 통상문제 등만 연방정부에 귀속시키고, 잔여권한은 주의 관할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약한’ 연방제의 경우는 권한을 중앙정부 위주로 배정한다. 인도의 경우, 관할영역을 3개의 목록으로 나누고, 즉 연방목록, 주목록, 병행목록으로 정한 뒤, 병행목록에 열거되지 않은 잔여권한은 중앙정부에 귀속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주지사도 선출이 아니라 중앙정부가 임명한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해체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헌법을 강구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도 연방제는 중앙 정부의 행정 편의가 보다 더 고려되었고, 특정 종교나 문화에 대한 배려를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단지, 정치적으로 시급했던 잠무와 캐시미르(제370조, 부칙4), 북동부의 부족들(나가스, 미조스, 마니뿌리, 트리뿌라)에 관한 규정(제371조, 371A-1)에 대한 특별한 배려만 했을 뿐이다. 제헌의회는 언어를 기초로 한 주의 편성에 대해서조차 거부했다. 사실 언어는 문화정체성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데 그것조차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연방헌법의 제정작업이 끝나자 1953년 주의 재확정 위원회가 구성되어 1960년 말까지 작업했다. 이후에 개헌을 통해서 인도는 지속적으로 진정한 연방주의의 모습을 갖추기 위한 작업을 계속해왔다. 그런 점에서 요즘에는 인도를 multi-ethnic federalism이라 부르기도 한다.

건국 당시에 급박했던 사정은 이해해야 하지만, 헌법에서 연방주의를 채택한 이상, 인도는 향후 연방제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는 헌법적 과제를 안고 있다. 기초단위의 마을자치로부터 중간단위의 지방자치를 거쳐, 주정부의 주권성 보유, 그리고 연방국가와 같은 자율의 연쇄 고리로 연결된 사회가 고전적인 연방주의 원리이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인도는 불완전한 연방국가다. 중앙 집중 연방제가 지속하는 한 민주주의의 한계는 계속해서 노정될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연방 국가를 향한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인도는 가장 하위 단계인 마을 공동체의 씨앗이 뿌려진 역사적 토양을 가졌다. ‘5인 촌장회의’의 뜻을 가진 빤차야트(panchyat)라는 민주적 마을 정부가 고대로부터의 전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간디의 염원에 따라 헌법에 규정된 빤차야트제가 어렵지만 꾸준히 복원되고 있다. 이렇듯이 마을에서 연방국가, 그리고 세계에 이르기까지 자유, 민주, 평화가 실현되는 이것이 인도 헌법의 지향점인 것이다(S.C. Kashyap, 2018).

건국 70년을 맞으면서 의외로 중앙에서 지역으로의 권한분산이 많이 되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헌법의 최종 목표가 ‘주권적, 사회주의, 세속, 민주 공화국’(sovereign socialist secular democratic republic)의 달성에 있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헌법에 충실하다 보면 사필귀정으로 일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경제적으로는 1991년 자유화를 계기로 중앙정부에 의한 사회주의식 계획경제를 탈피하게 되었다. 법적으로는 대법원이 지속적으로 중앙에 의한 지방정부의 관여를 제한시켰다. 정치적으로는 전국정당에 비해 지역정당들의 약진이 현저해졌다는 점이다. 독립과 건국 당시에 독주하던 국민회의(회의당) 시대가 끝나고(1967), 이후 자나타(1977), 자나타 달(1989), 1991년에는 BJP(인도국민당)가 연합정부로 집권하기 시작했다. 이제 전국정당은 지방정당의 협력 없이는 집권이 불가능했다. 권력의 원심분리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곧 중앙정치 보다 지역정치의 힘이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권력분화는 시대적 추세가 되었다. 최근 2019년에는 인도국민당(BJP)가 단독 과반수를 획득하는 일도 벌어졌지만 중앙권력 독주의 시대는 대체로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헌법은 정쟁의 수단이 아닌 국가의 목적

이제까지 인도헌법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주로 장점의 측면에서 많이 설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보다 확실하게 다른 점은 인도인들은 헌법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개헌은 정권연장, 정쟁의 수단으로만 이용해왔음에 비교해서 인도의 경우는 국가의 청사진인 헌법을 목표로 그를 구체화하기 위한 개헌을 해왔다는 점이 확실히 출중하다. 역사에서 보면 세계의 지도적인 국가들은 동시에 모범적 헌법국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한국도 산업화, 민주화에서 모두 성공한 나라이긴 하지만 더욱 중심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거북이걸음으로 가는 인도를 통해 헌법규범에 충실한 그런 자세를 꼭 배웠으면 좋겠다.

 

저자소개

강경선(kangks@knou.ac.kr)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헌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관심분야는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를 넘어 공화국 만들기에 있다. 저서는 『인도헌법형성사』, 『사회복지국가 헌법의 기초』, 『헌법전문 주해』, 관련 논문으로 “법률가로서의 간디”, “헌법과 공화국”, “영국과 미국의 노예제 폐지 과정”이 있다.

 


참고문헌

  • 강경선, 2020, “인도헌법에서의 의회주권과 사법심사제의 각축”, 한국정치평론학회 편, 『정치와 평론』, 제26호. 53-79.
  • Muni, S.D., 2010, “Ethnic Conflict, Federalism, and Democracy in India”, in Norman Dorsen ed. Comparative Constitutionalism, West, A Thomson Reuters Business, 412-413.
  • Basu, Durga Das, 2003, Introduction to the Constitution of India, Wadhwa Nagpur, 51-66.
  • Kashyap, S.C., 2018, State of the Nation, Vitasta, New Delhi, 2018, 133-134.
  • Singh, M.P., 2014, Indian Federalism, National Book Trust, New Del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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