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은정 (서울대학교)
일본에 있는 또 하나의 ‘북조선’
지난 10월 25일, 올해 세 번째로 조선대학교를 방문했다. 조선대학교라고 하면 대개는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대학을 떠올리겠지만 일본에도 “조선대학교”라는 이름의 대학이 있다. 이 대학 도서관에 북한 문헌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북한의 생활문화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이 대학의 문을 처음 두드렸을 때에는 ‘우리는 공식적으로 남측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의 답신을 받았다. 그렇지만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남북의 가교역할을 해달라’고 재차 메일을 보낸 후에 어렵사리 방문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지난 5월 처음으로 찾아간 조선대의 겉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외부인의 경우 사전에 방문 허가절차를 밟아야만 출입을 할 수 있으며 정문에서부터 신원조회를 거쳐야 한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교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본관 옥상에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만세!”라고 쓰인 붉은 글씨의 간판이었다. 여학생들은 교복이라 할 수 있는 검정 혹은 남청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일본에 어떻게 이런 대학이 있을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재일동포 2세이자 영화감독인 양영희 작가의 표현대로 조선대는 ‘일본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북조선’이라 할만하다.
조선대가 “남측 손님”의 방문을 항상 달가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올 5월에 KBS에서 방영한 「어느 편이냐 묻는 당신에게」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는 “남측 방송사”에서 조선대를 밀착 취재한 결과물이다. 작년과 올 초 두 차례 열린 북미정상회담으로 인해 잠시 한반도에 평화무드가 조성되었을 때에 제작된 것이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협상이 결렬되고 다시 한반도 정세가 경색되자 조선대 또한 공식적으로 “남측 손님”에 대해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그런데 친북 성향의 강한 이데올로기로 치장한 듯한 겉모습과 달리 그 안의 분위기는 소탈하고 다정다감하다. 전교생의 수가 500명을 조금 넘고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친숙함’이 있다. 외부인일지라도 일단 교정 안에 들어온 이들에게 학생들은 웃는 얼굴로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건네고, 또 저들끼리 교정 곳곳에서 웃고 떠든다.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적어도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점차 포획되고 있는 한국 대학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는 분위기다. 나아가 비공식적으로는 “남측”과 이어지기를 바라는 조선대학교 내부의 의향이 감지된다.
이 글은 북일 간 공식적인 대화 채널이 부재하고 남북 간 정치적ㆍ군사적 대립의 완화가 무색한 가운데 동아시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재일조선인, 특히 조총련계의 지도층을 양성하는 조선대의 역할과 전망을 새로이 모색해보고자 한다.
재일조선인이라는 담론
‘재일조선인’은 복잡한 존재인 것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복잡한 존재로 구축되어온 것 같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재일조선인이 ‘전후(戰後) 일본’을 비치는 “거울”로 위치하면서 일본 사회에서 다양한 담론이 제기될 때마다 그 소재로 활용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재일조선인은 일본 사회 내부의 탈식민주의―전후 일본이 식민지배의 역사적 후과(後果)로서 떠안은 과제―와 민족주의―‘일본인론’으로 표상되는 국민국가주의―를 담론상에서 효과적으로 구획하는 존재로 위치해왔다. 그리고 그 존재성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들이다.
이를테면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한 후쿠오카 야스노리(福岡安則)(1993; 2000)는 그것을 피억압 역사의 중시 경향과 일본 사회로의 정주 중시 경향에 따라 ‘조국지향형’, ‘공생지향형’, ‘개인지향형’, ‘귀화지향형’으로 유형화한다. 이러한 유형 구분은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주요하게 다루는 여러 연구들(김덕룡 2008; 남근우 2011; 김종곤 2014; 지충남 2016 등)에서 기본적인 틀로 설정된다. 성별, 세대, 이주 시기 등으로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더욱 세분화한 소냥 량(Sonia Ryang)의 연구(2005),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2세대의 정체성을 ‘더블’로 논한 리홍장의 연구(2016)에서도 마찬가지로 (해체하려는) 기본적인 틀은 후쿠오카의 유형 구분이다.
이와 같이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일본 사회의 탈식민주의(피억압 역사의 중시 경향) 혹은 민족주의 담론(일본 사회로의 정주 중시 경향)과 언제나 얽혀 있다. 그래서 이러한 정체성론은 오히려 ‘재일조선인이란 누구인가?’에 답하기보다 ‘일본인이란 무엇인가?’(加藤周一 1976)를 해명하는 데에서 재일조선인을 ‘일본인’의 경계 혹은 배타적 표지로 결론짓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재일조선인의 정체성론이 집단적 동일성이나 집합적 기억을 논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의에서 재일조선인의 삶은 담론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런데도 재일조선인에 대한 ‘외부자의 시선’이 그러한 시선을 통해 ‘외부자’를 표명하게 된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선을 내재화하려는 재일조선인 당사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것은 왜일까? 재일조선인을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거나 풀리지 않는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재일조선인이 그들 고유의 민족적 정체성을 고집하게 되면 일본의 국민화 논의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일본의 어느 우익정치평론가의 신경질적인 반응(佐藤勝巳 1992)을 차치하고서라도, 재일조선인의 정체성론이 ‘가해’와 ‘피해’ 논리의 틈바구니에 끼인 전후 일본의 역사 담론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기대(윤건차 1999)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우리 시대의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변화무쌍한 세태 속에서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일관되게 내세운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실행한다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재일조선인을 둘러싼 역사의 구축
주지하다시피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하고 조선이 해방을 맞이할 즈음에 일본에 있는 조선인 수는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중 약 135만 명이 귀향하고 약 65만 명이 일본에 잔류하였다. 이때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은 연합군 사령부에 의한 7년여의 군정기가 끝나고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는 1952년 4월 28일을 기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재일외국인으로 편입된다. 그리고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는 한국 이외에는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이들의 국적은 한국과 무국적(일명 “조선적”)으로 갈리게 된다. 1960년대까지 재일조선인 중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인구수는 소수에 불과했으며 거의 무국적자들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만 해도 재일조선인들의 대다수는 생계기반을 일본에 두고 있어 당장은 귀국할 수 없지만 한반도가 통일되면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반쪽짜리 조국”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미즈노 나오키・문경수 2016).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1998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인한 일본 내 대북인식의 악화로 인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재일조선인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게다가 한일협정 이후 일본으로 이주한 약 15만 명의 ‘뉴커머’(newcomer)까지 가세하여 2016년 현재 일본 내 한국 국적자 수는 485,557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일본으로 귀화한 인구수 또한 1952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2016년 현재 365,955명에 이른다. 또 1952년부터 1984년까지 진행된 북송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간 인구수가 93,339명으로 집계된다.
그리하여 무국적자로 남은 인구수는 2016년 현재 32,461명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1세대는 5% 미만으로 추산되며, 2세대(41%)와 3세대(45%)가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1) 이 추세라면 1945년 이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일본에 잔류한 재일조선인 1세대가 무국적을 ‘선택’함으로써 지향했던 통일 조국에의 동일성은 앞으로 30년 안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재일조선인 사회의 구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온 ‘조선학교’가 점차 통폐합되고 있으며 학생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조총련계에도 최근 한국 국적을 암암리에 용인하는 분위기가 점차 확산하는 데다가, 2016~17년 도쿄와 오사카에 거주하는 211명의 재일조선인을 대상으로 민족 정체성에 관한 설문 조사를 수행한 지충남의 연구(2018)에 따르면 그들의 절반 이상(57%)이 국적에 상관없이 한민족 문화 자체에 관심을 나타냈다. 한국과 북한에 대한 차별적 지향의 강도는 점차 약화되면서도 민족문화에 대한 동일성은 여전히 견지되고 있는 것이다. 30년 후의 우리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어떻다고 단정하지 못하는데 재일조선인의 미래를 단정할 수 있을까? 혹은 단정해도 되는 것일까?
물론 재일조선인 사회의 민족문화에의 동일성은 매우 독특한 역사 속에서 재생산되어왔다. 그것은 전후 일본 사회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한국과 북한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정책과도 연관된다. 1945년 8월 이후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 단체로서 그해 9월에는 재일본조선인연맹이, 1946년 10월에는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 각각 결성되는데, 단체의 정치적 성향이 좌익과 우익으로 갈리는 데다가 북한과 한국에 대한 지지를 각각 표명하면서 처음부터 재일조선인 사회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 재일조선인들에 대해 어떠한 정책도 내놓지 않은 반면,2) 1951년 통일 조국을 지향하는 재일본조선민주통일전선을 거쳐 1955년 재일조선인총연합회(이하 총련)가 결성되고 대다수 재일조선인이 총련을 지지하는 가운데 북한이 재일조선인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외공민’으로 공식화하면서 재일조선인 사회와 북한과의 관계는 사회적・정치적으로 공고화되었다(소명선 2017: 99~100).
게다가 애초에는 귀국을 염두에 두고 모국어(조선어) 교습 및 민족교육 시행을 목적으로 설립한 ‘국어강습소’가 일본 내 공식적인 교육기관으로 발돋움하고자 할 때 김일성이 국가 예산에 ‘재일동포 자녀들을 위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라는 항목을 신설하고 거액의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온다. 더욱이 북한은 1956년 조선대학교 부지구입과 학사건설을 위해 1957년과 1958년에 걸쳐 총 3억 2,160만 엔을 송금한다(김은숙 2009: 32~33). 또 조선대학교 설립 초기 일본 우익을 중심으로 인가를 반대하는 와중에 한국 정부가 그에 동조하여 일본 정부에 지속적인 인가 반대 의견을 제출한 반면, 북한은 그 후로도 재정적으로도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고 교사들과 학생들의 “조국 연수”와 교재 및 교과서를 제공해왔다. 그리하여 ‘조선학교’에서 실시하는 민족교육의 기반은 공식적으로 북한에 있음을 지금까지도 표방하고 있으며,3) ‘조선학교’를 중심으로 총련계의 지도부 인사의 재생산에서도 북한과의 정치적 연계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렇듯 총련계를 중심으로 한 재일조선인 사회는 일본 내에서 일본의 미수교국가인 북한과의 정치적 연계를 강조하는 까닭에 그동안 한국이나 일본 당국으로부터 도외시되어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최근 북미정상회담을 둘러싸고 한국 언론이 북한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조총련계 재일조선인의 대표언론인 『조선신보』를 참고하고 있고, 또 북한과의 공식적인 대화 채널이 끊긴 일본에서도 2018년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부랴부랴 북한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일조국교 정상화 추진위원연맹’(日朝國交正常化推進議員連盟)4)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에도 『조선신보』 측을 주요 인사로 참석시켰다. 그 한편으로 재일조선인 내부에서도 3~4세대를 중심으로 남북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남북을 잇는 역할을 우선시하고 있고, 북한 지지와는 별개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한국과의 교류를 원하는 분위기가 부분적으로 감지되는 마당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총련계 재일조선인의 생활세계를 인류학적으로 탐구한 이문웅의 연구(2004)가 주목할 만하다.
재일조선인을 보는 또 하나의 관점으로서 ‘에스닉’
이문웅은 2001년 12월부터 2002년 3월에 걸쳐 일본 오사카 지역의 총련계 지도부와 ‘조선학교’ 교사진의 활동에 참여 관찰하여 그 내부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었다. 그의 연구는 시기적으로 2000년대 초반을 다루고 있지만,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인류학적 접근에 의한 후속연구가 미진할뿐더러 그만큼 내부 깊숙이 들여다본 연구가 부재하기에 인류학적으로 여전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의 연구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총련계 재일조선인 사회가 이데올로기적인 민족의식에 의해 뒷받침되고 유지되어왔다는 기존의 피상적인 이해와 달리 강한 연대의 네트워크와 일상적인 상부상조에 의해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네트워크와 활동을 조직하는 기본단위로서 ‘분회’가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총련계 재일조선인의 일상생활은 거의 대부분이 분회생활로 이루어져 있다. 분회는 총련의 기층조직이자 직접적인 실천단위이다. 그런데 ‘민족’을 가장 중시하는 가치로 내세우고 그 외의 것들은 부차적으로 밀어내는 총련계의 활동상 구호와 달리 분회사업에서 주요 안건은 결혼문제, 취직알선, 동포 고령자와 장애인을 위한 사업, 교육문제, 금융문제, 심지어 음식준비 등 서로의 일상생활을 살피고 돌보는 데에 있으며, 조국통일사업이나 대외사업은 그 외의 부차적인 안건으로 밀려난다.
또한 ‘조선학교’의 교육목표가 “어린이들을 북조선의 새로운 세대로 키우자!”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교사와 학생 간, 교사와 학부모 간의 정서적인 유대가 중시되고 이를 통해 ‘조선학교’를 중심으로 재일조선인 사회의 공동체적 연대감이 형성된다. 이문웅은 이 연대감에 대해 “민족교육을 받는 수년간의 경험은 그들만의 독특한 연대감(sense of solidarity)을 형성하게 되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간다.”(2004: 187)고 언급한다.
그렇다면 1950년대 일본에서 서클운동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시기에 재일조선인들이 소규모로 활발히 만들었던 잡지들을 ‘에스닉 잡지’로 명명한 소명선의 연구(2017)5)를 따라 총련계 재일조선인의 분회 활동과 민족교육을 에스닉(ethnic)의 관점에서 접근해볼 수 있다. 새삼스럽지만 이것은 에스닉 집단을 연구하는 기본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연구자 스스로가 일본의 역사적・정치적・사회적 담론의 변화,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급변하는 정세에 의해 드러나거나 부각되는 총련계의 대외적인 활동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기본을 놓친 것일 수 있다. 에스닉의 관점에서 보면, 총련계의 북한과의 정치적 연대표명은 총련계 재일조선인의 에스닉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 가시화된 한 요소의 특질일 뿐이고, 언제든 잘라내거나(cutting) 이어붙일(connecting) 수 있는 에스닉적 지식의 출처 표기로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유비적 분석(analogical analysis)을 시도해본다면, 총련계의 지도부를 에스닉적 지식의 전달자로 위치짓고, 그들의 활동을 ‘재일조선인’이라는 이름하에 북한과 한국, 심지어 일본을 포함한 주변의 여러 민족적 전통들을 재조립하여 자신들의 생활세계의 지식을 만들어 전수하는 연장자(elder)의 관습적 행위로서 접근해볼 수 있다.
유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총련계의 활동을 에스닉 집단의 연장자가 (수집과 재조립을 통해) 수행하는 지식 창출의 관습적 행위로 이해하고 접근한다고 해서 그것이 재일조선인의 모든 생활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재일조선인의 정체성론에서 논했다시피 정체성이란 집단 내부의 한 측면이 다른 외부 집단과의 관계적 성질로서 드러나는 개별적인 표상이고, 이는 그때의 정체성이 그 외의 관계적 성질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를 구획하는 정체성 작용은 내부의 수많은 것들을 숨기는 반작용을 수반한다. 민족 정체성은 민족 집단들 각각의 내부와 외부를 구획하는 한편 그 내부를 외부에 드러내지 못하게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총련계의 활동에서 외부자의 시선 속에서 가시화되는 것은 총련계 재일조선인과 북한, 한국, 일본 등과의 관계적 성질이며, 이 성질이 드러내는 각각의 연결들이다. 이 관점에서 총련계의 지도자층을 형성하는 조선대 졸업생의 주요 활동을 살펴보자.
조선대학교를 졸업하면 대개 진로는 조선학교 교사가 되거나 조총련 간부로 활동하게 된다. 이때 이들은 재일본조선청년동맹(이하 조청)에 가입한다. 조청은 1955년 결성된 이래 ‘조선학교’ 출신자를 중심으로 총련계의 재생산에 기여해왔다. 공식적으로 동포봉사활동, 민족교육발전, 동포청년의 요구실현 등 동포사회를 견인함과 동시에 ‘3대애국사업’이라 하여 조국의 발전과 통일에 이바지할 것을 조직의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2019년 현재 일본 전국에 34개 지부를 두고 있다.6) 그런데 앞서 언급했다시피 ‘조선학교’가 재일조선인 인구수 감소에 따라 학생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에 더해 일본 정부의 무상교육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재정난이 가중되어 대도시를 제외한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상당수가 ‘휴교’ 상태에 있거나 통폐합의 과정을 겪고 있다.
지난 2019년 7월 방문한 니이가타 조선초중급학교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2018년부터 ‘휴교’ 상태인 이 학교에는 조청 니이가타 지부 위원장인 오민수(가명)가 학생이 없는 학교건물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그는 도쿄 조선대를 졸업한 후 여느 졸업생과 마찬가지로 출신학교로 되돌아와 교사를 할 예정이었지만, 가르칠 학생이 없기 때문에 지역 분회의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며 방학 때마다 시행되는 재일조선인 자녀의 단기강습을 이끌었다. 이 단기강습은 일본학교를 다니지만 ‘조선어’를 배우기 원하는 재일조선인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것인데, 지부의 조청 “전임일군”은 위원장뿐이므로 조선대 학생들이 자기 출신지에서 열리는 이 행사를 지원한다.
3세대 혹은 4세대인 “전임일군” 대개는 “조선적”을 갖고 있으며 북한의 이러저러한 국가행사에 초청을 받아 북한을 정기적으로 왕래한다. 오민수의 말에 따르면, ‘조국 방문’은 조선대 재학 중에 ‘조청 입회’와 더불어 시작된다. 방문 일정과 내역을 살펴보면, 평양 만수대 김일성 동상 참배, 혁명역사 유적지 탐방, 공업 및 상업지구 관람, 지방의 협동농장 작업반원들과의 집담회가 주를 이룬다.7)
‘조국 방문’은 재일조선인 3세대나 4세대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동포사회의 휘황한 미래를 위해 우리가 더 많은 일을 하여야 한다”(『조선신보』 2012년 9월 4일자)는 다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사람으로서 살기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그릇된 인생관을 낳게 하는 원인이 일본당국이 실시하는 민족말살정책과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다는 것”(『조선신보』 2012년 7월 19일자)을 깨닫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들이 주도해서 편집하고 출간하는 여러 잡지들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나 정치적인 선전 선동의 내용을 거의 싣지 않고 생활 정보를 교류한다든지 여느 청년들이 겪는 일상적인 문제들을 상담해준다든지 하는 ‘생활지’의 성격을 띤다(하단표 참조).
자료명 | 성격 | 내용 및 특징 |
조국 | 교양 월간지 | 1964년 1월 1일에 창간된 월간잡지로 북한의 정치, 경제, 민족문화, 풍습, 역사 등을 해설함. 북한 학자들, 특히 민속학자들의 글이 연재 방식으로 다수 실리고 있음. |
이어 | 생활 월간지 | 3세대와 4세대 재일조선인을 위해 발행되는 생활정보지로서 1996년 6월에 창간됨. 일본어, 칼라인쇄. |
새세대 | 생활 월간지 | 제호는 1997년까지 “新しい世代”, 1998년부터 2000년 5월까지 “セセデ”, 2000년 6월부터 “새세대”로 제호 변경됨. 재일조선청년학생들 대상. 일본어, 흑백 칼라혼합인쇄. |
꽃봉오리 | 조선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지 | 유치반 원아 대상 |
친한 동무 | 초급부 저학년 대상 | |
해바라기 | 초급부 고학년 대상 | |
조선중학생 | 중급부 대상 | |
주간동네 | 지역 동포 생활정보지 |
후쿠시마 |
하나 | 이와테 | |
월간남부 동포동네 |
가나가와/남부 | |
히로겨레 | 히로시마 | |
동네동포소식 | 가나가와/가와사키 | |
동네net | 아이치/미나미 | |
오다하나신문 | 도쿄/오다 | |
하찌오지소식 | 니시도쿄/하찌오지 | |
우리동네 | 아이치/세도 |
총련계 재일조선인이 만드는 생활지 일람
‘한민족’의 문화를 생성하고 전수하는 조청
지금까지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는 약 3만여 명의 재일조선인은 ‘조선적이 아니라 남도 북도 아닌 무국적자’로 재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조관자 2015).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북한과 정치적으로 거리를 둔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다음 세대의 재일조선인이 자신의 문화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의 과제에서 남과 북 중에 어느 한쪽을 특정해서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들에게 체제이념은 부차적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재일조선인 3~4세대에서 발간되는 잡지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위의 잡지들은 북한을 재일조선인이라는 에스닉 집단이 갖는 문화요소의 차용처로서 활용하며, 또 그로부터 빌려온 것을 자신의 문화요소로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그들 자신이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이 아닌 또 하나의 중심으로서 독자적인 생활세계를 형성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들이 북한과의 지속적인 교류 속에서 북한에 한민족이라는 문화요소의 위상을 부여하고 그들 자신의 생활세계 속에서 그 요소를 실현하고 있다면, 조청을 ‘한민족’ 문화의 생성자이자 전수자로 가정해볼 수 있다. 즉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표피를 걷어내면 그들은 이미 독자화된 생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20세기 그들의 삶을 방관해왔던 한국 사회는 21세기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해서라도 그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다양한 교류를 시도해보아야 한다.
저자소개
차은정(chaeunjung@gmail.com)은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다. 규슈 대학 한국연구센터 방문연구원과 히토츠바시 대학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숲은 생각한다』, 『부분적인 연결들』 등이 있다.
1)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홈페이지(http://www.mindan.org) 참조.
2) 조관자는 일본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한국정권으로부터 어떠한 원조나 지지를 받지 못한 재일조선인의 역사적 경험은 ‘기민(棄民)(“버려진 백성”) 의식’으로 표상되는 일본 내 조선인 담론의 근거 중 하나로 이야기된다고 말한다(2015: 177~178).
3)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홈페이지(http://chongryon.com)에서는 주체사상의 연호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연계를 곳곳에서 표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민족교육의 개요를 설명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볼 수 있다. “총련과 재일동포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옳바른 령도와 조국의 따사로운 사랑과 배려 밑에 온갖 난관을 이겨내며 민족교육사업을 발전시켜왔다.”
4) ‘일조국교 정상화 추진위원 연맹’은 2002년 9월 17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 간의 평양회담에서 채택된 ‘조일평양선언’의 후속 조치로서 북한과 일본 양국 간의 국교정상화 실현과 동아시아 안전보장의 확립을 목적으로 2008년 5월에 설립되었다.
5) 1950년대 재일조선인들이 한글로 발행한 잡지 수는 ‘오사카 조선시인 집단’에 기증된 것만 33종에 이른다(소명선 2017: 115).
6) 재일본조선청년동맹 홈페이지(https://www.chochong.info) 참조.
7) 「조청일군대표단 98명이 조국방문―나를 키워준 조국의 모습 보았다」 『조선신보』 2012년 5월 8일자; 「청년절경축행사에 참가한 재일조선청년학생대표단의 조국체류기―조국청년들과 발걸음 맞추어 앞으로」 『조선신보』 2012년 9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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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