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담론의 초국가적 구성: 초국가적 침묵과 국경을 초월한 사회화의 역사

‘위안부 담론’은 어떻게 생성됐는가? 이 글은 그 생성의 지적·정치적 역사를 추적하려는 시도이다. 1930년대와 40년대 전반까지의 기간에 여성들이 전쟁에 동원된 역사적 과정과 실태를 파악하려는 역사학적 연구라기보다는 전후 ‘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추적하려는 것이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둘러싼 논쟁 등에도 불구하고 ‘위안부’는 역사적 사실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여성들이다. 이것이 ‘위안부’에 관한 첫 번째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들이 전후 사회에서 이슈로 인식되고 논의되는 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 거의 30여 년간 이들의 존재에 대해 침묵이 강요됐다는 것 또한 중요한 사실이다. 이 두 번째의 사실은 전후 사회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야기한다. 왜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은 전후 역사에서 망각되고, ‘위안부’ 여성들은 침묵을 강요받았는가? 세 번째의 사실은 ‘위안부’를 둘러싼 망각과 침묵의 성격이 초국가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를 뒤덮은 초국가적 침묵이 있었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침묵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위안부’ 담론도 초국가적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에서의 연구가 한국에서의 관심을 자극하고, 한국에서의 활동이 다시 일본의 논의를 유발하는 담론의 교류가 유기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유기적 담론 전개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포함하여 서구 사회까지 포괄하는 초국가적 확장성을 띠게 되기도 했다. ‘위안부’ 담론의 이러한 초국가적 전개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이러한 접근을 취하는 이유는 ‘위안부’ 담론에서 드러나는 초국가성이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구성에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초국가성을 이해하는 것이 ‘위안부’ 문제의 관리와 해결에 불가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8474
서울 일본대사관 앞의 평화의 소녀상.
출처: Wikipedia

서재정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위안부 담론의 전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최근 한일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와 아베 정부는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하는 합의를 발표해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합의에 따라 2016년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했고 일본 정부는 10억엔을 재단에 출연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2018년 11월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결정했고, 일본 아베 정부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여 양국간 가장 뜨거운 현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사안은 이미 세계의 담론이 되어 있다. 중국과 타이완을 위시하여 필리핀과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정부와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 ‘위안부’ 피해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미국도 국회의원들과 시민들이 이에 관한 토론과 활동을 벌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엔 인권이사회나 유엔 여성차별 철폐위원회 등 국제기구도 보고서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밝히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둔 담론이 이렇게 초국가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현실에 보다 주목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초국가적 ‘위안부 담론’은 어떻게 생성된 것일까? 이 글은 그 생성의 지적·정치적 역사를 추적하려는 시도이다. 1930년대와 40년대 전반까지의 기간에 여성들이 전쟁에 동원된 역사적 과정과 실태를 파악하려는 역사학적 연구라기보다는 전후 ‘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추적하려는 것이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둘러싼 논쟁 등에도 불구하고 ‘위안부’는 역사적 사실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여성들이다. 이것이 ‘위안부’에 관한 첫 번째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들이 전후 사회에서 이슈로 인식되고 논의되는 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 거의 30여 년간 이들의 존재에 대해 침묵이 강요됐다는 것 또한 중요한 사실이다. 이 두 번째의 사실은 전후 사회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야기한다. 왜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은 전후 역사에서 망각되고, ‘위안부’ 여성들은 침묵을 강요받았는가? 세 번째의 사실은 ‘위안부’를 둘러싼 망각과 침묵의 성격이 초국가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를 뒤덮은 초국가적 침묵이 있었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침묵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위안부’ 담론도 초국가적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에서의 연구가 한국에서의 관심을 자극하고, 한국에서의 활동이 다시 일본의 논의를 유발하는 담론의 교류가 유기적으로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기적 담론 전개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포함하여 서구 사회까지 포괄하는 초국가적 확장성을 띠게 되기도 했다. 물론 이 초국가적 과정은 선순환적 회로를 통해 작동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세번째 절에서 지적하는 것과 같은 초국가적 악순환도 존재한다. ‘위안부’ 담론의 이러한 초국가적 전개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본 시론의 의도이다. 이러한 접근을 취하는 이유는 ‘위안부’ 담론에서 드러나는 초국가성이 동북아시아 지역질서의 구성에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초국가성을 이해하는 것이 ‘위안부’ 문제의 관리와 해결에 불가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초국가적 침묵의 생성

태평양 전쟁 말기 많은 수의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전쟁에 동원됐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은 물론 전쟁 중 점령하고 있던 중국 및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역사적 기원은 ‘위안부 담론’이 초국가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태생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담론’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나타나지는 않았다. 전쟁에 동원되었던 여성들이 전후 모국으로 귀환하거나 다른 곳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는 역사적 실체에도 불구하고 전후 공론장에서 이들의 존재와 경험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 여성을 동원했던 군 관계자와 업자들이 엄연하게 실존하고 있었지만 이들도 ‘위안부’를 공론장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위안소 관리자들, 또 전장에서 ‘위안부’를 직접적으로 ‘사용’했던 일본군들도 침묵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중국 정부나 사회도 ‘위안부’는 공개적으로 논의하지 않고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뿐만 아니라 목격자마저도 침묵을 지켰다. ‘위안부’를 둘러싼 초국가적 침묵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페낭의 중국계 및 말레이계 여성들.
출처: Wikipedia

일반적으로 이러한 초국가적 침묵을 설명하기 위해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을 언급한다. 하지만 결국 이는 정부와 사회가 침묵을 유지했다는 현상을 표면적으로 기술한 것과 대동소이한 설명이다. 또 이러한 설명은 무관심이 한 국가와 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초국가적 현상이었던 현실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무관심이 생성된 이유를 초국가적 구조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1980년대 말부터 대두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은 이러한 초국가적 침묵에 날카로운 분석의 칼을 댔다. 많은 이들이 주목한 사회적 구조는 초국가적으로 재생산되는 남성 우월적 구조다. 첫째 여성을 성노예화하는 제도가 일본과 조선반도를 넘어 중국과 동남아시아까지 생성.유지된 것은 그러한 남성 우월적 구조가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피해여성들 중 많은 수가 종전후에도 귀향하지 못하고 타지에 정착한 이유도 남성 우월적 사회구조에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피해여성들이 귀국해서도, 또는 현지에 남아있으면서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공개하지 못한 것도, 정부와 사회의 관심 및 지원을 받지 못한 것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구조적 요인으로 작동했다는 지적이다. 한.중.일 삼국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와 네덜란드같은 서구 국가들에서도 공통적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남성 우월적 구조의 초국가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 이러한 초국가적 침묵에 균열을 일으키는 힘도 초국가적 페미니스트 운동에서 유래할 것임을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의 중요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침묵의 초국가적 생성과정은 충분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연구는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여성의 정체성이 어떻게 상호구성되는지를 보여주어 이러한 상호구성성이 초국가적 침묵을 가능하게 함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가능성이 현재화되는 과정까지 밝히는 데는 한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를 논구한 학자들 중 상당수가 젠더 뿐만 아니라 식민성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은 그러한 한계를 인지했다는 반증이다. 또 젠더 연구를 식민주의 연구로 보완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단 이들의 시각은 위안부 제도라는 과거의 실체를 식민주의 구조의 일환으로 인식하는 것에 제한되어 있다. 즉 전후 한국과 중국 등지에서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지 못하도록 한 초국가적 침묵을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식민지배가 종식된 이후에도 식민주의가 변용.분화되는 과정이 위안부 문제의 현재화를 저해하고, 침묵을 강제하는데 기여하지 않았는지를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러한 총체적 침묵이 가해국에서 나타난 이유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전후 처리과정으로 일부분 설명될 수 있다. 즉 가해자는 도덕적, 정치적, 물적 책임의 담지자이므로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해상관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해자가 전후 처리과정에서 위안부를 포함해 강제동원 등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전후 처리 과정에서 평화협정 등을 체결하면서 피해책임과 보상.배상이 명기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는 것이 결정적이 계기가 되어 ‘역코스’가 진행됐다. 즉 일본 점령정부가 이전의 전범 책임 추궁 및 처벌 정책을 역으로 뒤집어 이들을 석방하고 복권시키는 정책을 집행했다. 또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청산하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한국과 북한, 중국과 대만이 참가하지 않으면서 책임 청산이 구조적으로 봉쇄됐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의 역사가 희생자의 ‘침묵’의 다른 이유를 보여준다. 한국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한 후 희생자들의 문제 제기를 우려해 이들의 활동을 억압했다. 태평양전쟁으로 사망한 군인 및 군속 희생자의 유족들은 1971년 ‘대일민간 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10개월의 신고기간(1971년 5월 21일~1972년 3월 20일)이 고시되는 것을 계기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각 지방에서 신고를 둘러싸고 활동하던 유족들이 1973년 4월 부산에서 태평양전쟁유족회를 결성했으나 한국 정부는 20년 넘게 법인체 허가를 하지 않았다. 이들은 법인체로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1974년 10월 ‘보상금 수취거부 전국 유족단결대회’를 열었고, 11월에는 전쟁으로 사망한 피해자 1인당 1천만 원의 보상 지불을 요구했다. 그러나 12월1일 ‘대일민간청구권보상법’이 국회에서 수립되고 정부는 신고인 확정한 군인 및 군속 8552명에 위로금 25억6천만원을 지불했다. 유족회는 일본 정부로부터 입수한 명부 등으로 확인된 군인군속 전사자 수가 21,919명인데도 불구하고 8천여 명만 신고인으로 확정한 것에 반발했다. 또 일인당 보상액 30만원은 지나치게 작은 액수라며 수취거부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정부는 강제로 보상을 집행했다. “이후 피해자들의 조용한 목소리는 계속되었으나 기본적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1] 피해자들이 문제 제기에 어려움을 겪는 한편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은 냉전의 산물이었다. 세계의 영향력을 두고 소련과 경쟁하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요한 발판으로 인식했다. 특히 미국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하던 1950년대부터 미국은 일본이 아시아 저개발국 원조에서 역할을 하기를 바랐다. 한.일관계에서 과거사가 걸림돌로 남아있기를 원치 않았다. 한편 경제개발을 위해 일본의 자본이 절실히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청구권협정을 이용하려 했다. 이를 위해서는 청구권협정으로 받은 자금 중 정부가 지급해야 할 피해자 보상액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대일민간청구권보상법은 그 필요를 현실화할 도구로 도입되었던 것이고 피해자들을 최대한 침묵시키려 했던 것이다.

1980년대말 한국에서 정치적인 민주화가 이뤄지고, 1990년대 초 세계적 냉전체제가 붕괴된 이후에야 피해자들이 치유와 보상을 큰 소리로 요구하게 되었다. 유족회는 1990년 10월 대일 공식사과와 보상청구소송을 최초로 제기했다. 다시 1991년에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을 제소하며 원고 35명에 위안부 3명을 포함했고 1992년 4월에는 다시 위안부 6명이 추가로 제소했다. 이러한 활동 끝에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는 1992년 9월 13일에 비로서 사단법인으로 허가를 받았다. 위안부를 포함한 피해자들의 침묵을 강요했던 아시아의 냉전 및 냉전과 맞물린 한국의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1990년대에 들어서야 완화됐던 것이다.

냉전 단층선이 위안부 문제의 공론화 과정에 깊이 관여하는 기제는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의 기억이 세상에 알려지지만 그의 목소리가 공론장의 변두리에 국한되는 과정에서 더 잘 나타난다. 오키나와 도카시섬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후 전후 귀국하지 못하고 오카나와 난조시에 살고 있던 배봉기의 과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5년 이었다. 그 계기에는 국제정치와 국내정치의 접점이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1971년 체결된 오키나와 반환 협정이 있었다. 1970년 기한이 만료되는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연장하는 대가로 오키나와를 반환하기로 합의한 리차드 닉슨 미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 일본총리와의 1969년 정상회담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72년 오키나와 시정권을 회복한 일본 정부는 불법체류 외국인들은 강제추방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오키나와현 거주 조선인들에게 특별영주를 허가한다는 조처를 발표했다. 이 조처 때문에 강제추방을 피하고 특별영주 자격을 얻기 위해 배봉기는 1945년 이전 위안부로 일본에 입국했음을 밝혀야 했던 것이다.

냉전 국제정치가 배봉기의 ‘커밍아웃’을 강제했다면 동북아시아에 드리워진 냉전 단층선은 그의 목소리가 일본 사회나 한국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차단막 역할을 했다. 배봉기와 가깝게 활동한 것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정부의 활동과는 별개로 일본에서는 총련을 중심으로 위안부 문제가 197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총련은 1972년 5월 오키나와 반환 이후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을 결성한 후 발표한 보고서에서 “위문대원”의 존재를 포함했다. 이후 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과 김현옥이 배봉기를 찾아내 생활을 지원하기도 하고 함께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77년에는 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배봉기의 사연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렇게 배봉기가 총련이 ‘선점’한 것처럼 공론화가 되니 총련을 불온시하고 있던 한국 사회에서는 그를 논의에서 배제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기도 하다. 재일조선인인 김일면이 1974년부터 재일조선인 잡지 『마당』의 기고문과 단행본 세 권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알렸고 그의 1976년 저서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를 번역한 것이 임종국의 『정신대 실록』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일월서각에서 출간된 책은 임종국을 저자로 소개할 뿐, 김일면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영호는 이와 관련한 연구에서 김일면이 조선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한국에 입국이나 저서 출판이 불가능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상황 하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해 임종국의 이름을 빌어 출판한 것으로 추정한다.[2] 즉 일본에서 위안부에 관한 선행연구가 있었어도 냉전과 분단 상황에서는 이를 한국에서 알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전후 한국과 일본 등에서 위안부를 둘러싼 초국가적 침묵이 형성된 것은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된 결과였다. 즉 피해 여성들의 침묵을 강요한 여성차별적 젠더 구조가 사회에 강고히 남아 있었던 데다가 냉전의 대두로 일본과 한국에 위안부를 둔 침묵이 더 강화됐던 것이다.

초국가적 침묵의 생성.
ⓒ DIVERSE+ASIA

 

침묵의 초국가적 균열

이러한 침묵을 깨뜨리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언론인들이었다. 센다 가코오(千田夏光)는 1973년에  『종군위안부 ‘소리 없는 여성’ 8만명의 고발 [従軍慰安婦 “声なき女”八万人の告発]』을 출간, 위안부의 존재를 처음으로 일본에서 공론화했다. 그 이전에도 고치 히로시(高知浩)에 의해서 일본군 성노예가 된 여성들의 존재가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종군위안부’의 실태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밝힌 것은 센다가 처음이었다. 센다는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해 일본 내에서 자료를 찾고 관계자와 인터뷰를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10여 차례 오가며 조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센다는 이후에도 위안부에 대한 연구와 저술 작업을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저술을 통해 일본의 침략전쟁과 전쟁책임을 고발했다.

한국에서 이 책을 번역해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것은 20여년이나 지난 1992년이었지만, 센다의 작업은 여러 경로로 한국에 전해졌고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 다음해인 1974년 10월 나봉한 감독이 <여자 정신대>라는 영화를 개봉했고, 1978년에는 김대상이 「일제하 여자 정신대의 비극」을 「신동아」에 발표하여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종합적으로 기술했다. 그의 글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여 역사적 사실 관계를 혼동한 한계 등이 있었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언론인이었던 김대상이 중앙의 권위있는 월간지에서 위안부 문제를 논의함으로써 한국사회의 공론장에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는 의의는 결코 적지 않다. 그런데 그의 글은 센다의 선구적 연구 등 일본에서의 연구에 기댄 부분이 많은데서 일본의 선행 연구가 한국의 인식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또 1982년에는 하야시 에이다이의 논문이 「한국인 여성의 강제연행」으로 번역 출간되었다.[3] 하야시의 논문은 1930년대 홋카이도 지역에서 있었던 조선인 여성 강제연행과 강제매춘의 실태에 대한 연구로서 그는 위안부를 조선인 여성의 강제연행이자 강제노동이라고 규정하며 그 강제성을 강조했다. 홋카이도 지역에 국한된 연구이기는 하지만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실증적으로 밝힌 하야시의 논문도 한국인들이 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일본에서의 선행연구가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사회에 전해지면서 한국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가게 되었다. 1981년에는 앞에서 언급한 『정신대실록』을 출간됐고, 이를 읽은 윤정모가 그 다음 해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중편소설로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다. 19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최한 국제세미나 ‘여성과 관광문화’에서 윤정옥이 “정신대 답사보고”를 한 데 이어 1990년 1월 취재기를 한겨레신문에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90년 11월 16일 여성단체 37개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대협)를 결성했다. 이름이 나타내는 것과 같이 결성 당시만 해도 정신대와 위안부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있었지만 정대협은 이후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해왔다. 특히 출범 다음해인 1991년 김학순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증언하는 기자회견을 주최하여 피해자의 커밍아웃이 시작되는 전기를 마련했다. 또 ‘정신대 신고전화’를 개통하는 등 피해자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에서도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의 노력은 정신대 피해자들의 증언집 발간 등으로 결실을 맺었고, 일본 및 중국 등에서 위안부에 대한 연구와 활동이 활성화되는 거름이 되었다.

한편 김학순의 커밍아웃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세인의 주목을 받는 사회문제가 되는 전기가 되었지만, 그의 커밍아웃은 한국과 일본 내의 활동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1990년 5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일본 정부에 대해 정신대 문제 진상규명과 사죄를 요구하자,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위안부 명단을 요구했다. 5월 30일에는 다케무라 야스케 사회당 의원이 국회에서 위안부 조사 의지가 있는지 질의하기도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당시 노 대통령과의 만찬장에서 “우리나라에 의해 야기된 불행한 시기에, 귀국(貴國)의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나는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위안부 명단 전달을 거부했다.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주관했기 때문에 정부 책임은 없다는 이유였다. 또 1990년 6월 6일 일본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모토오카 쇼오지 사회당 의원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진상조사를 정부에 요청하자 시미즈 쓰타오 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이 아래와 같아 답변했다.

“종군위안부라는 사람에 대해 옛 사람들의 이야기 등도 종합해서 들어 보면 역시 민간업자가 그러한 분들을 군과 함께 데리고 다녔다는 등의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실태에 대해 저희들 입장에서 조사해서 결과를 내는 것은 솔직하게 말씀 드려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4]

이 답변이 한국 시민사회의 강력한 비판과 대응을 초래했다. 1990년 9월 17일 정신대문제 위원회가 소집됐고, 10월 17일 한국의 37개 여성단체가 한국정신대연구회와 함께 ‘위안부’의 강제연행을 인정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 한편 일본 정부의 발표에 분노한 김학순은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증언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늘고 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일본에서도 이 문제에 더 주의를 돌리도록 자극했다. 특히 1970년대 언론인들이 시작한 위안부 연구가 학계로 확산되게 되었다. 그런 연구의 확대 속에 요시미 요시아키가 일본 방위청에서 위안부 관련 문건을 발견하여 1992년 1월 11일 아사히신문에 공개한 것이 일본 정부의 책임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 위안부는 업자가 한 일이지 정부는 책임이 없다던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물증이 확인된 것이다. 그의 문서 발굴은 이후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로 이어졌다.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당시 1년 8개월의 조사를 거쳐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과 관헌의 관여를 인정한 것이다. 고노 담화는 1995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로 이어지고, 위안부에 대한 기술을 담은 역사교과서들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한국에서 위안부 대응 활동이 활발해지고 급기야 1990년대 초에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는 상황이 되자 북한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가 1992년에 결성된 것을 계기로 대책위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대 위안부’를 포함해 일본의 전시 강제동원/연행 피해를 종합적으로 조사하고 일본의 과거청산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5년에 자료집 <짓밟힌 인생의 웨침: 종군위안부편>을 발간해 이경생과 같은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채록, 공개하기도 했다. 북한이 자체적으로도 위안부에 대한 연구가 있기도 했지만 대책위가 결성되고 자료집을 간행하는 등 활동을 확대한 것은 한국과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남북한과 일본의 여성들이 개최했던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가 직접적인 자극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안부를 둘러싼 초국가적 침묵이 이 시기에 종식된 데에는 국내외의 정치적 변화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1980년대 말 한국이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고 곧 이어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종식된 것은 위안부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여성단체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민주화의 결과였다. 또 냉전이 종식된 것도 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총련이 ‘선점’한 것으로 보지 않고 한국 시민사회가 독자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경로에서 일본과 한국 사이에 밀접한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이나 일본의 공론장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이나 일본 내부의 변화만 보는 것은 부족하다. 또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고 받음’이 적극적이거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1980년대 말부터 시작해서 1990년대에 들어서면 위안부 문제를 둔 작용과 반작용은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화했다. 한국에서의 변화가 일본에서의 반응을 촉발하고 일본의 변화가 한국의 반응을 초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초국가적 침묵이 1990년대에 균열된 것은 ‘초국가적 현상’이었다.

초국가적 침묵의 균열.
ⓒ DIVERSE+ASIA

 

초국가적 위안부 담론의 분열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관련해서 주목할 부분이 두 가지 더 있다. 첫째, 위안부 문제가 동북아시아 공론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초국가적 순환 현상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초국가적 백래시가 태동했다는 점이다. 나카노 고이치 등은 1997년을 ‘백래시의 원년’으로 부른다. 그 해에 극우적 역사관으로 무장된 이들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결성했고, 아베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로 주목받는 ‘일본회의 (日本会議)’도 1997년에 출범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과거 침략전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입장을 ‘자학적 사관’이라며 배척하고 위안부와 같은 역사적 실체를 부인하는 우익의 활동이 1997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계기는 역설적으로 그 이전까지 있었던 초국가적 담론이었다. 즉 위안부 존재와 정부의 책임을 일본 정부가 인정하게 되고, 이에 따라 교과서에도 이 내용이 담기게 되어 1997년에는 모든 중학교 교과서에 위안부 문제가 기술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변화에 일본의 우익이 위기감을 느끼며 적극적으로 반대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아베 내각이 들어서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국가의 정책화되는 한편 사회 전반적으로도 넷우익 등 배타적 우익활동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극단적인 형태로는 한인/조선인에 대한 혐오감정을 드러내놓고 헤이트스피치를 행하는 극우적 단체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의 이런 현상은 한국과 북한, 중국 등지에서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조장하면서 ‘혐일류’를 파생시키기도 하는 등 동북아시아의 담론지형을 험악하게 만들고 있다.

둘째, 위안부 문제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양자적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두 나라의 정부와 시민사회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위안부 문제가 국경을 뛰어넘은 초국가적 사안으로 발전되어 왔음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다. 동시에 이 문제는 양자관계를 초월하여 북한 및 중국과 대만,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태평양 전체 지역의 초국적 사안이 되었다. 물론 그 초국가성의 물적 기반은 일본군이 과거 아시아 태평양에서 초국적으로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지적한 것과 같이 그러한 과거의 사실이 현재의 문제로 사회화되는 것은 자동적이지도 않았고 즉각적이지도 않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위안부의 초국가적 과거가 초국가적 역사로 현재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담론이 다자적 초국가성을 획득하는 데는 1992년 8월 서울에서 개최된 <정신대문제 아시아연대회의>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배상, 유엔을 포함한 세계인권기구에 문제해결을 위한 협력 요청, 아시아 여성의 인권 신장과 세계 평화를 위한 노력 등을 목적으로 한 것에서 보이듯 아시아연대회의는 출범 당시부터 위안부 문제를 초국가적으로 접근했다. 또 연대회의는 한국과 북한, 일본을 위시하여 대만,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등의 지원단체와 지지단체, 개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국적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논란을 뛰어넘은 초국가적 이슈로 전화되기 시작했다. 1993년 6월에는 비엔나에서 개최된 세계인권대회에서 위안부 피해자인 장수월(조선)과 김복동(한국)이 참가하여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1996년에는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인권위원회 여성폭력문제 특별보고관이 보고서를 작성해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제출했다. 이로서 위안부 문제는 유엔 차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고, 쿠마라스와미 특별보고관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성노예제’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 인정과 배상을 촉구했다. 그의 보고서는 위안부 논의가 ‘위안부’ 문제를 넘어서 보편적 ‘성노예’의 문제로 인식되는 전기가 되었고, 이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개최로 이어졌다.

초국가적 담론의 균열.
ⓒ DIVERSE+ASIA

 

위안부 담론의 초국가성

지금까지 간략하게 살펴본 것과 같이 일본군 위안부라는 과거의 실체는 초국가성을 본질로 하고 있었다. 일본은 물론 조선과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여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국경을 뛰어넘은 성폭력을 행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초국가적 과거는 전쟁의 종식과 함께 바로 담론화되지 못했다. 전쟁의 종식은 위안부에 대한 초국가적 침묵을 강요했다. 피해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각이 구조화된 동북아시아에서 피해 여성들은 고향에 돌아가기도 어려웠고 자신들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더구나 종전이 세계적 차원의 냉전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이들의 침묵을 초국가적으로 강제했다. 일본에서의 ‘역코스’나 한일청구권협정은 일본이나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고 북한과 중국 등이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위안부 문제 등이 전후처리에 포함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이러한 초국가적 침묵의 벽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국경을 뛰어넘는 상호작용을 통해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일본 내에서의 연구가 한국에 유입되어 활동을 자극했고, 한국에서의 활동이 또 일본의 반응을 촉발시키는 초국가적 순환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위안부 담론이 사회적 주목을 받게 되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활동들이 한.일을 오가며 활성화된 결과 1990년대 중반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실체를 인정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시인하게 됐다. 그리고 위안부 담론은 계속 확장되어 유엔 등을 위시한 세계사회에서 성노예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이에 반발하는 백래시를 불러 일으켜서 위안부의 실체와 일본의 책임을 부인하는 흐름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현재는 이 두 가지 흐름이 강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저자소개

서재정 교수
현재 국제기독교대학 (일본 동경) 교수이며, 윌슨센터 펠로우 및 존스홉킨스대학 국제대학(SAIS) 부교수직과 코넬대학 정치학 조교수직을 역임했다. 풀브라이트-해이즈 교수연구, 변화하는 세계의 평화안보를 위한 SSRC-맥아더 장학재단, 스미스 리차드슨 장학재단, 동서장학센터와 같은 많은 기관으로부터 그의 연구를 지원받았다. 또한 이화여대 석좌교수, 서울대 객원교수, 연세대 연구교수, MIT객원연구원, 캘리포니아 주립대 (어바인)의 객원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한미관계, 미국의 아시아 정책, 동아시아 국제관계, 국제 안보 및 국제관계 이론의 전문가로서, 그는 현재 동아시아 국제관계, 인간안보, 북한에 대한 연구에 천착 하고 있다. 저술로는 “전쟁사인가, 외교사인가: 동아시아 역사분쟁과 지역질서”(War-Like History or Diplomatic History? Historical Contentions and Regional Order in East Asia) 외 다수가 있다.

 


[1] 오오타 오사무. 2000, 217.

[2] 이영호. 2017, 143-164.

[3] 하야시 에이다. 1982. 281-294.

[4] ‘위안부’ 문제가 밝혀지기 전까지, 디지털 기념관 위안부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

 


참고문헌

  • 길윤형. 2015. “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그 이름, 배봉기,” <<한겨레>> (8월 7일).
  • 김당. 2002. “북한 거주 일본군위안부의 실태와 특성,”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디지털 기념관 위안부문제와 아시아여성 기금, ‘위안부’ 문제가 밝혀지기 전까지, http://www.awf.or.jp/k2/survey.html
  • 오오타 오사무. 2000. “한일 청구권 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 이영호. 2017. “위안부 문제의 등장과 재일조선인 김일면 : 잡지 『계간 마당(季刊まだん)』의 기사를 중심으로,” 한국일본학회논문지 113호.
  • 하야시 에이다이 저, 신정식 역. 1982. “한국인 여성의 강제연행,” 『일제의 조선인노동 강제수탈사』, 서울: 비봉출판사.
  • 中野晃一. 2015. 『右傾化する日本政治』, 東京: 岩波書店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PDF 파일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