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하(한국외국어대학교)
‘볼리우드(Bollywood)’에 관한 오해와 진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볼리우드(Bollywood)’라는 용어의 개념에 대해서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인도영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하는 ‘볼리우드’는 한편으로는 가장 잘못 이해되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볼리우드는 인도 서부에 위치한 해안도시 ‘봄베이(Bombay, 1995년 Mumbai로 변경)’와 미국의 영화산업을 대표하는 ‘헐리우드(Hollywood)’의 합성어이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매체는 1970년대 말 봄베이에서 발행되던 월간 영화잡지 『씨네 블리츠』(Cine Blitz)였다. 이 잡지 소속의 일부 기자들이 당시 봄베이 지역의 영화 제작방식이 점차 헐리우드를 모방하는 경향을 빗대서 만든 신조어였는데, 이후 급속하게 확산되었고 2001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출간하는 『옥스포드 영어사전』(The Oxford English Dictionary)에 표제어로 등재되었다(Gopal, 2011).
그런데 국내외 여러 매체들을 살펴보면 ‘볼리우드’를 ‘인도영화’ 혹은 ‘인도영화산업’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잘못된 표현이다. 볼리우드는 인도의 전 지역에서 20여개 지역어를 기반으로 생산되는 연간 1,400-2,000여 편의 장편영화들 중 힌디어(Hindi)로 제작된 상업영화들의 부류에 해당할 뿐 인도영화산업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4년의 경우 인도에서 제작된 총 1,451편의 장편영화들 중 힌디어 영화는 233편(16.1%)이었으며, 뒤를 이어 따밀어(Tamil) 226편(15.6%), 뗄루구어(Telugu) 221편(15.2%), 말라얄람어(Malayalam) 156편(10.8%), 깐나다어(Kannada) 129편(8.9%), 벵갈어(Bengali) 121편(8.3%), 마라티어(Marathi) 106편(7.3%) 순으로 나타났다. 한편 2017년의 경우 총 1,986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이 중 힌디어 영화는 364편(18.3%), 따밀어 영화 304편(15.3%), 뗄루구어 영화 294편(14.8%), 깐나다어 영화 220편(11%), 벵갈어 영화 163편(8.2%), 말라얄람어 영화 156편(7.9%), 마라티어 영화 117편(5.9%) 순으로 나타났다(Film Federation of India, several years).[1]
이와 같은 통계자료들에 비추어 볼 때 최근 들어 힌디어로 제작되는 볼리우드 영화는 인도에서 제작되는 전체 영화들 중 1/5이 안 되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남인도 지역어인 따밀어, 뗄루구어 등으로 제작된 영화들과 제작 편수의 측면에서 볼 때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볼리우드 영화들이 인도영화산업의 대명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볼리우드라는 단어가 탄생한 이래 현재까지 인도의 여타 영화들과 비교해 압도적인 수의 관객들을 동원하며 흥행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2000년대 초반부터 볼리우드 영화를 즐기는 해외 관객들의 수도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데,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인도의 미디어 산업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매체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으며, 문화적 트렌드를 형성하고 이끌어가는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볼리우드의 성장: 독립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볼리우드 영화를 ‘봄베이 지역에서 힌디어로 제작된 상업영화’로 간주하고 그 역사를 살펴본다면 영국 식민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31년 3월 14일 봄베이 소재의 마제스틱 극장(Majestic Theatre)에서 상영된 힌디어 영화 <세상의 아름다움 Alam Ara>은 인도 최초의 유성영화로 기록되어 있으며,[2] 이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던 해인 1947년에 이르기까지 봄베이에서는 인도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영화 제작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봄베이에서 영화 제작이 성행했던 주요 배경으로는 식민지 시절 면 방직업을 중심으로 한 무역업과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대량의 자본과 기술, 인도 국내외로부터의 인구 유입이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Ganti, 2004).
한편 볼리우드 영화는 독립 이후부터 1980년대 말에 이르는 기간 동안 시기별로 뚜렷한 특징들을 보이면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독립 직후 새로운 국가 형성의 발판을 준비하던 1950년대에 제작된 영화들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 조성되어 있던 갈등과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영화를 세속주의(secularism)와 민주주의라는 인도 헌법의 목표를 선전하는 데 활용하고자 하였던 인도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후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에는 기대했던 만큼 변화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인도 국민들의 불신과 좌절을 반영한 이른바 “성난 젊은이(angry young man)”의 이미지가 등장하였고, 로맨스 영화라는 바탕 위에 액션이 더해진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후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에 이르는 기간에는 이전 시기에 다루어졌던 희망, 꿈, 좌절, 복수, 영웅적 이야기들이 액션, 로맨스, 코미디, 멜로드라마적 요소들과 어우러진 소위 ‘마쌀라 영화(masala film)’[3]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때부터 한 명의 스타와 그를 추종하는 팬덤(fandom)이 볼리우드를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독립 직후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제작된 영화들 중에는 인도의 시네필들 사이에서 오늘날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영화들이 많은데,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로는 <방랑자 Awaara>(1951), <마더 인디아 Mother India>(1957), <위대한 무갈제국 Mughal-e-azam>(1960), <행복 Anand>(1970), <벽 Deewar>(1975), <불꽃 Sholay>(1975), <의미 Arth>(1982), <새 Parinda>(1989) 등을 들 수 있다(Bose, 2006; Ganti, 2004; Joshi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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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더 인디아 Mother India>(1957) 포스터
1950년대에는 영화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 조성되어 있던 갈등과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다. 인도 정부는 세속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인도 헌법의 목표를 선전하는 데 영화를 적극 활용하고자 했으며, 영화산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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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불꽃 Sholay>(1975)포스터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에는 기대했던 만큼 변화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인도 국민들의 불신과 좌절을 반영한 이른바 “성난 젊은이(angry young man)”의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로맨스 영화라는 바탕 위에 액션이 더해진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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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우드에 불기 시작한 변화의 바람: 1991년 경제개혁과 신중산층의 등장
볼리우드 영화에 기존과는 뚜렷하게 차별되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경제개혁이 단행된 1990년대 초반부터이다. 독립 이후 40여년 이상을 유지해온 사회주의식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경제개혁이 단행되면서 인도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이 거센 변화의 바람에 직면했고 볼리우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경제개혁이 인도 사회에 불러온 가장 큰 변화는 ‘신중산층(new middle class)’이라는 새로운 사회계층을 탄생시킨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중산층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경제개혁의 혜택으로 소득이 급격히 늘어나고 삶의 질이 향상된 인도의 신중산층 사이에서 나타난 한 가지 분명한 특징은 그들은 과거와 같이 고단하고도 고립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영화를 찾기 시작했으며, 영화 제작에 필요한 자본 형성 과정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부류의 관객들이 증가하면서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볼리우드의 소재와 제작 방식은 기존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급격한 사회변화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진실한 사랑, 애국심, 화목한 가정을 소재로 다룬 <마음을 빼앗겨 버렸어 Dil to Pagal Hai>(1997), <무슨 일인가 일어난거야 Kuch Kuch Hota Hai>(1998), <때로는 행복, 때로는 슬픔 Kabhi Khushi Kabhie Gham>(2001) 등과 같은 영화들이 제작되어 큰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개혁 이후 인도에 본격적으로 상륙하여 확산되고 있던 케이블TV에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던 대다수의 신중산층 관객들은 좀 더 다양한 소재들의 영화를 원했다. 그 결과 2000년대 후반까지 나온 볼리우드 영화들 중 흥행에 성공한 경우를 살펴보면, 기존에는 좀처럼 다루지 않았던 소재들을 다룬 영화들의 수가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2007년의 경우 볼리우드가 주목했던 소재는 스포츠였다. 당시까지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가 없지는 않았지만 굳이 세어 본다면 복싱을 소재로 한 <복서 Boxer>(1984), 축구를 통해 동료관계를 다룬 <힙 힙 허레이 Hip Hip Hurray>(1984), 자신의 가족을 위해 신장을 기증하면서 축구를 포기하는 비운의 선수 이야기를 다룬 <싸헵 Saaheb>(1985), 에이즈(AIDS)에 걸린 수영선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나의 오빠 니킬 My Brother Nikhil>(2005)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2007년 나온 영화들 중 스포츠를 소재로 하여 흥행에 성공한 영화로는 싸이프 알리 칸(Saif Ali Khan) 주연의 <따 라 룸 뿜 Ta Ra Rum Pum>을 들 수 있는데, 이 영화의 소재는 카레이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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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행복, 때로는 슬픔 Kabhi Khushi Kabhie Gham>(2001) 포스터(좌)와 <따 라 룸 뿜 Ta Ra Rum Pum>(2007) 포스터(우)
1991년 경제개혁 이후 급격한 사회변화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진실한 사랑, 애국심, 화목한 가정 등의 소재를 다룬 영화와 더불어 기존에 좀처럼 다루지 않았던 소재들을 다룬 영화들의 수가 늘어났다.
출처: iMDb
볼리우드에서 신(new)볼리우드로 전환 중: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볼리우드의 정체성
장르와 소재의 다양화
2000년대 후반의 관객들과 2010년대의 관객들은 어찌보면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볼리우드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기존 영화들과 비교해 장르와 소재의 측면에서 더욱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특히 인도사회가 그 동안 진솔하게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각종 사회문제들과 더불어 가장 금기시되었던 종교와 문화적 가치관에 따른 암묵적 제약들까지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흥행에 있어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예를 들어, 2017년 개봉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은 악쉐이 꾸마르(Akshay Kumar) 주연의 <토일렛: 어떤 사랑 이야기 Toilet: Ek Prem Katha>는 ‘화장실’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다.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종종 소개된 적이 있듯이, 인도에서는 전체인구 13억 명 중 약 5억 2천만 명 이상이 화장실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경제적인 원인도 있겠지만, “정(淨)-부정(不淨)”에 대해 매우 민감한 힌두교의 가르침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다시 말해, 부정(不淨)한 화장실을 집 근처나 집안에 두지 않으려 하는 경향도 인도에서 화장실이 부족한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 화장실 부족이 성폭행 사건과 같은 불미스러운 사고로 이어지며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했는데, 이 영화는 주인공이 자신의 아내가 사용할 화장실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종교와 문화적으로 가치관이 다른 아버지와 겪게 되는 일련의 갈등을 풍자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2018년 3월 홀리(Holi) 축제 기간에 맞춰 개봉했던 <패드맨 Padman>도 ‘생리대’라는 독특한 소재를 선택한 영화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저분한 천을 생리대로 사용하고 있는 자신의 아내를 보고 저렴하면서도 위생적인 생리대 개발을 위해 노력한 한 인물의 성공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인도의 부족한 생필품 보급 현실까지 세련되게 언급한 영화로 부각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이끌어 냈다.
한편 최근 볼리우드에서 사용되는 음악에 있어서도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기존 볼리우드 영화와 예고편들에서는 ‘플레이백 가수(playback singer)’들이 부르는 음악이 배경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4] 그런데 최근 개봉되는 영화들과 예고편들에는 힙합음악이 사용되는 경우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예를 들어, 2018년 5월 1일 유튜브(YouTube)를 통해 공개된 영화 <찬양 Tareefan>의 예고편에는 두 명의 여배우 쏘남 까뿌르(Sonam Kapoor)와 까리나 까뿌르(Kareena Kapoor)가 인도의 인기 DJ 바드샤(Badshah)의 노래를 립싱크하는 장면들로 구성된다. 이 예고편은 기존과는 달라진 영화음악의 사용뿐 아니라 달라진 남녀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며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2018년 11월 22일 기준으로 이 동영상의 조회수는 1억 6천만 건이 넘었다.
여성들의 이야기와 여배우들 전성시대
2010년대 볼리우드 영화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면 여배우가 주인공을 맡은 영화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 볼리우드 영화에서 여배우들은 연약하고, 순종적이며, 소심한 캐릭터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연령대에 따라 남자 주인공의 연인, 부인, 어머니 역할을 주로 맡았으며 가정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혼신을 다해 전념하는 여성들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캐릭터가 아닌 경우에는 도덕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영화 속 악당들과 어울리는 악녀 역할들을 맡았다.
남성들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여성들이 조연의 역할에 머무는 경향은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후 2010년대 초반까지 여성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점차 박스오피스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남인도 따밀 영화권에서 인도의 마릴린 먼로라 불리며 활동하다 지난 1996년 35살의 나이에 자살한 쓰미타 씰크(Smitha Silk)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재구성한 <더티 픽처 The Dirty Picture>(2011)는 남성들이 지배하는 인도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여성성까지 거래의 수단으로 삼아야 했던 씰크의 실화를 소재로 삼으면서 인도의 일반 여성들은 물론 페미니스트 운동가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2011년 12월 인도 전국 1766개, 해외 120개 스크린에서 개봉했을 당시 개봉 첫 주에만 80억 원 이상의 흥행수익을 올리면서 개봉과 동시에 2011년 최고의 흥행작으로 등극하는 기현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 201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여배우들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아 전면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여배우들은 남자 배우들과 거의 동등한 영화적 공간을 부여받기 시작했으며, 남성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영웅적 면모를 지닌 주인공 역할까지 맡기 시작했다. 또한 영화 속 여성들은 이상적인 주부이자 아내, 또는 연인으로 묘사됐던 기존과 달리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여성들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영어를 배우면 자신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이 한 번에 해결될 것으로 믿으면서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리는 여성 이야기 <잉글리쉬 빙글리쉬 English Vinglish>(2012), 여성 복서의 성공 실화를 다룬 <메리 꼼 Mary Kom>(2014), 인도 여성 자경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굴랍 갱 Gulab Gang>(2014), 여성 레슬러의 성장을 다룬 <당갈 Dangal>(2016), 강간과 성적 학대 사건들이 법적으로 어떻게 조작되는지를 다룬 <핑크 Pink>(2016),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 이후 복수를 위해 잔인한 살인 기계로 변해가는 한 여성 이야기 <이름은 샤바나 Naam Shabana>(2017),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위기 속에서 파키스탄으로 침투하는 여성 스파이의 활약상을 그린 액션 스릴러 <라지 Raazi>(2018)와 같은 영화들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흥행의 측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영화들로 여성의 이야기와 여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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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끼라 Akira>(2016) 포스터(좌), 영화 <HK10>(2015) 포스터(중), 영화 <메리 꼼 Mary Kom>(2014) 포스터(우)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여배우들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아 전면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남성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영웅적 면모를 지닌 주인공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기존과 달리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여성들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출처: iMDb
한편 영화의 스토리 라인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특히 최근 볼리우드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묘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0년대 이전에 제작된 볼리우드 영화들 중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영화들에서는 남성이 수동적인 여성을 주도하여 사랑을 쟁취한다는 내용이 주요 스토리 구조였다. 예를 들어, 1995년 10월 개봉하여 오늘날까지도 뭄바이의 한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 <용감한 자가 신부를 얻는다 Diwale Dulhaniya Le Jayenge>(1995)[5]는 볼리우드의 전형적인 청춘 멜로물로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런던에 거주하고 있는 한 인도인 가정에서 자란 심란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결혼을 앞두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다. 심란은 여행지에서 만난 장난기 가득한 인도 청년 라즈와 사랑에 빠지지만 이미 집안에서 정해준 정혼자가 있는 자신의 상황을 떠올리고 라즈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심란이 사랑에 빠졌음을 알게 된 아버지는 런던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인도로 돌아간다. 혼자 남겨진 라즈는 심란을 신부로 얻기 위해 인도행을 결심하게 되고 심란의 정혼자 집안과 정면 대결을 펼친 끝에 심란의 아버지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내게 된다. 이 영화 속에서 심란은 부모의 말에 거역하지 못하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랑의 감정을 완성시켜준 것은 남자 주인공 라즈의 용기 있는 행동이다.
반면 2010년대에 개봉된 볼리우드 영화들에서 묘사되는 사랑과 결혼은 직설적으로 다뤄지고 있는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별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랑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2011년 개봉된 <따누가 마누와 결혼했다 Tanu Weds Manu>와 2015년 개봉된 후속작 <따누가 마누와 결혼했다 속편 Tanu Weds Manu Returns>은 인도 사회 내에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변화된 시선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전편은 런던에서 살다가 신붓감을 찾기 위해 인도로 온 남자 따누와 진취적인 성격의 여자 마누가 부모들의 주선으로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결혼 4년차의 부부가 되어 있는 속편에서는 오해와 다툼으로 인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고, 각자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결혼이 중대한 고비를 맞게 된다. 전편과 속편 모두 흥행에 성공했는데, 특히 속편이 더 큰 성공을 거두면서 볼리우드에서 시리즈 영화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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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용감한 자가 신부를 얻는다 Dilwale Dhulhaniya Le Jayege>(1995) 포스터(좌)와 <따누가 마누와 결혼했다 Tanu Weds Manu>(2011)의 포스터(우)
2010년대에 개봉된 볼리우드 영화들에서 묘사되는 사랑과 결혼은 이전과 비교할 때 크게 변화된 모습인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별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랑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 iMDb
변화의 바람 거센 볼리우드: ‘경제개혁 이후 세대(Post-reform generation)’들의 부상
그렇다면 2010년대 접어들어 여성들의 이야기와 여배우들이 볼리우드 영화의 전면으로 나오게 된 배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다. 첫째, 여성과 관련된 이슈들을 대하는 인도 내 사회적 분위기가 크게 변했다. 특히 2012년 12월 인도 뉴델리에서 발생한 여대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인도 전국을 뒤덮었던 촛불시위의 물결은 인도 사회 내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들을 공론화하는 물꼬를 텄다.[6] 이후 2014년 4월 치러진 인도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정당들의 주요 정치공약들은 거의 대부분 여성인권문제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변화하는 인도의 사회상을 볼리우드가 신속하게 반영하면서 여성의 이야기와 여배우들이 볼리우드 영화의 전면으로 나오게 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여성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점점 많아졌다는 것은 그와 같은 소재의 영화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 관객들의 수가 늘어났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오늘날 인도 영화관객들은 1990년대 이전의 관객들과는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991년 경제개혁 이후 태어난 ‘경제개혁 이후 세대(Post-reform generation)’들이 관객층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케이블TV, 유튜브, 페이스북(Facebook)과 트위터(Twitter) 등을 통해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보고 들으며 자라온 세대들이다. 어떤 면에서 이전 세대들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mindset)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뿐만 아니라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들이 주도적으로 볼리우드 영화의 제작과 소비에 참여하면서 영화의 장르와 소재에도 큰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셋째, 1991년 경제개혁 이후 오늘날까지 볼리우드 영화가 성장하는 이면을 들여다보면 인도 국내시장뿐만 아니라 관객층을 넓히기 위해 해외시장 공략에도 끊임없이 노력해온 흔적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 재외거주인도인(Non-Resident Indian, 이하 NRI)[7]들을 볼리우드의 주요 관객층으로 상정하면서 장르와 소재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NRI들은 오랜 시간 해외지역, 특히 서구 국가들에 거주하면서 기존 국내 관객들과는 다른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영화산업이 전문화되고 흥행수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성을 띠게 되면서 인도 국내 관객과 더불어 NRI 관객들까지 볼리우드의 관객층으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스토리와 제작 방식을 새로운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갈 수밖에 없었다.
볼리우드 초창기 영화들이 시골 출신의 가난한 청년이 성공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흥행에 성공했다면, 2010년대에 제작된 영화들은 중간 중간 삽입되는 춤과 노래 장면을 이집트, 스위스, 네덜란드, 미국, 캐나다, 태국과 같은 해외에서 촬영해 왔다. 이는 인도 국내 관객들뿐만 아니라 NRI 관객들까지 자연스럽게 관객층으로 흡수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인도 농촌에 거주하는 관객들도 가난한 청년의 성공 이야기보다 해외 유명 관광지에서 촬영한 장면들을 원한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그것이 비록 자신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임을 알고 있을지라도 자기가 원하는 장면이 담긴 영화를 선호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볼리우드 영화가 부단히 변화해 온 배경에는 기존과는 다른 성향을 지닌 관객들의 요구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함께 변모해 온 영화 제작방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사실 사회가 변하고 관객들의 성향과 취향이 달라지면 영화가 다루는 소재와 그에 따른 제작 방식이 변화한 예는 수도 없이 많이 있다. 다만 볼리우드가 특별한 점은 상업성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면서도 빠르게 변화하는 인도 사회와 사회적 가치들을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을 굳건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소개
신민하(aparajito@naver.com)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HK연구교수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를 졸업하고 델리대학교 역사학과(M.A.)와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역사학센터(M.Phil/Ph.D.)에서 인도 역사를 공부했다. 인도에서 1830년대 이후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경제단체들의 형성 및 발전과정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1] 2005년의 경우 제작된 총 1,041편의 영화들 중 뗄루구어 영화가 268편(25.7%)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힌디어 영화가 245편(23.5%), 따밀어 영화가 136편(13.1%)을 기록했다. 이 외에 말라얄람어, 깐나다어, 마라티어, 벵갈어로 제작된 영화들은 10% 미만의 수준에 머물렀다(Film Federation of India).
[2] 인도인이 제작한 최초의 무성영화가 상영된 곳도 봄베이였다. 둔디라즈 고빈드 팔케(Dhundiraj Govind Palke, 1870-1944)가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따』(Mahabharata)의 내용을 기반으로 제작한 무성영화 <하리쉬찬드라 왕 Raja Harishchandra>은 1913년 코로네이션 시네마토그래프 극장(Coronation Cinematograph Theatre)에서 개봉하여 한 달여간 상영되었다. 당시 개봉영화들이 일주일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상영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하리쉬찬드라 왕>은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마쌀라(masala)’라는 단어는 식물의 열매나 씨앗을 뜨거운 불에 볶아 만든 여러 가지 향신료들을 섞은 종합 향신료를 말한다. 다양한 소재들과 다양한 영화적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진 상업영화를 종합 향신료에 빗대어 ‘마쌀라 영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4] 플레이백 가수란 영화 속 주인공 대신 노래를 부르는 전문가수를 말한다. 대표적인 플레이백 가수로 라타 망게쉬카르(Lata Mangeshkar)를 들 수 있다. 인도에서 국보급 플레이백 가수로 칭송받아 온 그녀는 1942년 영화계에 입문해 2010년 4월 은퇴할 때까지 장장 70년 동안 활동했으며, 1974년부터 1991년 사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레코딩을 한 가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1950년대의 경우 하루 평균 4곡씩 녹음했는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대략 1천편 이상의 볼리우드 영화에서 6천곡 이상의 주제곡을 부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데브다스 Devdas>(1955), <쉬리 420 Shree 420>(1955), <마더 인디아>(1957) 등 195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들부터 <딜 세 Dil Se>(1998), <라간 Lagaan>(2001), <비르와 자라 Veer-Zaara>(2004), <랑 데 바산티 Rang De Basanti>(2006) 등 비교적 최근의 흥행작의 주제곡에도 참여하여 인도인들 사이에서는 ‘동시대 인도인들 중 그녀의 노래를 듣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5] <용감한 자가 신부를 얻는다>는 2005년 6월 개봉 500주 상영 기록을 세우면서 기네스북에 올랐다. 당시까지 볼리우드 최장기 상영기록은 1975년 8월 15일 개봉돼 1980년 12월 10일까지 5년 동안 상영됐던 액션영화 <불꽃 Sholay>(1975)과 지난 1940년대 두 개의 개봉관에서 3년간 상영된 <운명 Kismet>(1943)이 공동으로 가지고 있었다.
[6] 당시 사건은 인도 현지 언론은 물론 해외 언론들에서도 대서특필되어 국제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는데 사건의 개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2년 12월 16일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남자친구와 버스에 탑승했던 여대생이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6명의 남성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들은 성폭행 후 여대생을 도로변에 버리고 도주했으며, 성폭행 과정에서 쇠막대로 공격을 받아 뇌와 폐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여대생은 뉴델리의 한 사설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차도가 없자 싱가폴의 장기이식 전문병원으로 후송돼 감염된 내장 대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사건 발생 13일 만인 2012년 12월 29일 뇌손상과 심근경색으로 결국 사망했다. 당시 여대생의 사망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인도 전국에서 수천만 명의 시민들이 추도 촛불집회와 성폭력 근절 및 여성의 안전 보장을 요구하는 집회를 이어갔다. 당시 사건은 성폭행 가해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등 성범죄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이끌어 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너무 흔하다’는 이유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지참금 살인, 영아 살해 문제, 각종 성범죄 사건 등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에 큰 경종을 울렸다.
[7] 재외거주인도인(Non-Resident Indians, NRIs)은 인도 국적을 가지고 해외에서 장기간 거주하는 인도인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한편 해외 거주 국가의 국적이나 시민권을 취득하여 귀화한 사람이나 그 자손들은 재외동포인도인(Person of Indian Origin, PIO)으로 구별하여 부르고 있다. 인도 외교부(Ministry of External Affairs)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NRI는 13,008,012명, PIO는 17,835,407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참고문헌
- Bose, Mihir. 2007. Bollywood: A History. New Dlehi: Roli Books.
- Derek Bose. 2006. Brand Bollywood: A New Global Entertainment Order. New Delhi: Sage Publications.
- Joshi, Priya. 2015. Bollywood’s India: A Public Fantas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Gopal, Sangita. 2011. Conjugations: Marriage and Form in New Bollywood Cinema.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Ganti, Tejaswai. 2004. Bollywood: A Guidebook to Popular Hindi Cinema. New York: Routledge.
- Kishore, Vikrant., eds., 2014. Bollywood and Its Other(s): Towards New Configurations. New Delhi: Palgrave Macmillan.
데이터 자료
- Film Federation of India. Several years. Apex Body of Film Industry in India Indian Feature Films Certifies. http://filmfed.org (접속일: 2018.11.14.)
- Ministry of External Affairs, Government of India, on ‘Population of Overseas Indians’. https://mea.gov.in/images/pdf/NRIs-and-PIOs.pdf (접속일: 2018.11.14.)
포스터 출처
- iMDb (https://www.imdb.com)
- Wikimedia Commons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