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개전(開戰)을 둘러싼 북・중 갈등과 그 시사점

한국전쟁은 북중 “혈맹”의 기원이자 양국 역사상 가장 긴밀한 협력 사례로 조명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자료와 연구들은 “혈맹”의 이면에는 심각한 갈등이 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정세 안정을 중시하는 중국과 무력 통일을 희망하던 북한은 전쟁 이전부터 정전 협정 체결 이후까지 전략적 차이를 노정하며 갈등하였다. 주변 정세의 안정화 vs 군사적 모험주의로 요약되는 중국과 북한의 대외전략상 간극은 오늘날까지도 양국 갈등을 반복적으로 양산하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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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Kim_Il-sung#/media/File:KimIlSungCalciumDeposit1970.png

김규범(아시아연구소)

북중 “혈맹”의 이면

1950년 10월 19일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신속하게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올라온 전선(戰線)을 원점으로 되돌렸다. 이에 따라 유엔군의 인천상륙 이후 남한에 유리했던 형세는 무위에 그쳤으며, 북한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처럼 한국전쟁의 전황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중국의 참전 및 대북원조는 소위 “피로 맺어진” 북중 “혈맹”의 상징적 사건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양국 역사상 가장 긴밀한 협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혈맹”의 역사에는 전혀 다른 이면도 존재하고 있다. 전쟁시기 북중 양국은 군 지휘권 문제, 계속적인 남하 여부, 정전협정 체결시기 등 주요 의사결정에서 상당한 입장 차를 노출하였다. 특히, 한국전쟁 개전 문제를 두고 양국 지도부는 첨예한 갈등을 겪었다. 전쟁 이전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의 무력통일안에 수 차례 반대한 바 있으며, 정전 이후에는 이 전쟁을 “100% 과오”이며, “민족적 재앙”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였다.[i] 북한과 소련 앞에서 표출한 마오쩌둥의 불만은, 이 갈등이 전쟁과정에서 발생한 일시적인 다툼이 아니라, 심각하고 근원적인 갈등이었음을 시사한다.

최근 각국의 1차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이 문제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다만, 개별적 갈등들은 시기별로 상세하게 밝혀진 것에 비해, 정작 전쟁 자체에 대한 북중 간 서로 다른 평가와 불만 그리고 영향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언급만 있었을 뿐, 독립적인 논의로 다뤄지지 못했다(이재훈, 2013). 이 문제는 전시 북중관계, 1950년대 관계 악화 등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할 뿐 만 아니라, 양국 간 이익과 전략의 현저한 간극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발표된 1차 자료와 연구들을 종합하여 위 문제를 간략하게 토론하고자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중국의 외교노선과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당시 중국은 오랜 전쟁의 참화로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새로 집권한 중국공산당의 당면과제는 경제회복과 이를 통한 정권 공고화가 되었으며, “경제건설에 유리한 외부적 환경의 조성”은 자연스럽게 중국 외교의 목표가 되었다. 실제로 1949년 12월 마오쩌둥은 스탈린(J. Stalin)과의 첫 만남에서 “중국은 전쟁 이전의 경제 수준을 회복하고 국내 상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3년에서 5년 간의 평화 기간이 필요하다”면서 주변 국제 정세의 안정이라는 자국의 외교 목표를 강조하였다.[ii]

같은 맥락에서, 마오쩌둥은 당시 고조되고 있었던 냉전 구조 속에 자국이 연루될 것을 우려하였다. 비록 중국은 “소련일변도” 방침을 선언하고 사회주의 진영의 일원임을 명확히 하였지만, 아시아 국가들의 공산당들을 지원하는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오쩌둥은 아시아의 코민포름(Conminform)격인 ‘동방정보국’ 설립을 “시기상조” 라고 평하며 미온적 반응을 보였으며, 아시아 각국의 공산당에게 외부의 지원에 기대하기 보다 “자력갱생” 할 것을 강조하였다.[iii] 이는 타국의 혁명을 지원하여 미국 및 자본주의 진영을 자극하는 것을 피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반면, 같은 시기 북한에서는 정반대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출범시키고, 내부 공산주의 세력을 통합하여 체제 안정을 이룬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의 승리에 고무되었다. 한반도 통일을 실현할 기회가 왔다고 인식한 그는 소련과 중국에게 무력통일안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한국전쟁 개전에 관한 북중의 첫 논의는 1949년 5월 초에 이루어졌다. 조선노동당 정치위원 김일은 북경을 방문하여 중국군 내 조선인 부대의 송환을 요청하는 동시에, 한반도 정세에 대한 중국의 의중을 물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내전시기 과도하게 증가한 병력을 감축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김일의 요구에 흔쾌히 동의하였으며, 북한의 국방력 강화에 협조할 것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가 북한의 남한 침공까지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미국과 일본의 참전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남한이 미・일의 도움을 받아 북한을 침공할 경우 후퇴하여 병력을 보존할 것을 조언하였으며, 미・일의 개입이 없는 경우에도 남한을 선제 공격해선 안된다고 권고하였다. [iv]

1949년 6월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하자 이를 기회로 김일성은 재차 중국에게 지지를 요청하였다. 이에 중국지도부는 김일성이 보낸 서신을 스탈린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마오쩌둥은 미・일의 개입 가능성과 북한의 역량 부족을 지적하면서, 남한에 대한 선제 공격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스탈린 또한 그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아직은 선제 공격보다 북한군과 남한의 혁명세력의 역량을 더 키워야 한다는 것이 1949년 말 중소 양국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v]

그러나, 불과 한 달여 만에 한반도 정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1950년 1월 말 스탈린은 자국의 이익에서 출발하여 돌연 김일성의 무력통일안에 동의하면서 전쟁 준비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김일성은 방중하여 스탈린의 바뀐 입장과 선제 공격 계획을 중국에게 통보하였으며, 스탈린의 말을 인용하여 중국을 압박하였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역설하는 김일성에게 마오쩌둥은 우리는 “그들(미국)의 참모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의중을 알 수 없다”며 반박했지만, 스탈린의 바뀐 입장과 중국의 지원은 필요치 않다는 김일성의 발언에 그는 결국 무력통일 계획에 동의하였다. 훗날 마오쩌둥은 두 나라가 모두 동의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강하게 반대할 수 없었다”고 회고하면서, 개전 결정에 있어 중국은 사실상 배제되었으며, 북・소의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음을 암시하였다.[vi]

이러한 사실들은 건국 초기 중국은 김일성의 무력통일안에 명확하게 부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중국이 특별히 평화를 희망하는 나라였기 때문이 아니라, 전후 회복이 절실히 필요했던 신생 정권이었다는데 주된 이유가 있었다. 1949년 6월 미군 철수 이후 출현했던 외국군이 없는 한반도는 중국의 외교노선에 지극히 부합하였기 때문에, 중국은 이러한 한반도 정세를 유지하고 싶어하였다. (Kim, 2016b) 따라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쟁에 연루되어 자국의 경제회복에 중대한 방해가 될 수 있는 김일성의 무력통일안은 중국으로서 결코 달가운 일일 수 없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유

비록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렇다면, 전후 회복을 위해 주변 정세의 안정을 추구하고, 냉전의 최전선에 서기를 꺼려했던 중국은 왜 파병을 결정했을까? 냉전시기 연구는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 시키기 위해 소련, 중국, 북한이 전쟁을 함께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소위 ‘삼국공모론’과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마오쩌둥의 낙관적 열망에서 기인했다는 ‘혁명론’을 통해 중국의 파병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위에서 언급한 한국전쟁 개전에 중국지도부가 반대해왔다는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설득력을 잃었다.

중국의 파병 원인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 이래 관련국들의 1차 자료들이 대량 공개되면서 진일보한 발전을 이루었다. 최근 학계에서 주로 논의되고 있는 견해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중국의 파병은 미국발 안보 위협에 대한 수동적 대응이라는 견해가 있다. 일부 서구학자들은 미군의 38선 돌파는 중국에게 중대한 안보적 위협이었으며, 자국의 ‘완충지대(Buffer zone)’라고 할 수 있는 북한에서 결전을 치르고자 했다고 주장하였다(Whiting, 1960).

둘째, 중국은 미군의 참전과 제7함대의 대만해협 파견 이후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인식하였으며, 혁명의 역동성 유지, 소련, 북한과의 동맹관계 등을 고려하여 참전을 결정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는 1980년대 공개된 중국의 공식문헌 등을 활용한 연구로 위의 견해보다 중국의 적극성을 강조하고 있다(Chen, 1994).

셋째, 중국의 참전 결정은 전황의 유불리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였으며, 1950년 10월 평양-원산 이북 지역에 미군이 아닌 한국군이 북상한다는 첩보를 받은 중국은 대치하되 싸우지 않는다는 전략적 기대를 바탕으로 출병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를 주장한 최신 연구는 이 방안은 미군과 직접적 충돌을 피하면서도 소련 및 북한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 실리와 명분을 챙길 수 있었다고 분석하였다(Kim, 2016a).

이러한 견해들은 중국의 참전 원인을 다양한 경로로 설명하고 있으나, 한반도 공산화는 진정한 동기가 아니었다는 점과 중국이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파병을 추진한 게 아니라, 자신의 국익, 동맹국과의 관계, 전쟁 형세의 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파병을 결정하였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중국의 피해의식과 북중관계의 악화

중국은 파병을 통해 국경 앞까지 북상하였던 미군을 38선 부근까지 밀어내고, 위기에 처한 동맹국을 구하는 등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였지만, 오랜 전쟁 수행으로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다. 먼저, 중국은 자본주의 진영과 무력으로 충돌하면서 최강대국 미국과 정면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부담을 안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소련에 대한 의존도도 크게 심화시켰다. 또한, 막대한 인적, 재정적 동원 때문에 자국의 경제 건설을 연기해야만 하였다. 실제로 건국 직후 중국이 서둘러 추진하고자 했던 경제계획은 1953년 1월에야 겨우 시작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대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북한과 소련에게 직설적으로 표출하였다. 북한과 갈등이 고조되었던 1956년 9월 그는 조선노동당 대표단과의 회담에서 김일성이 자신의 만류를 무릅쓰고 전쟁을 강행하였다면서 북한대표단을 질타하였다. 또한, 소련공산당 대표단과의 회담에서는 전쟁의 책임론까지 거론하였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무력통일안을 “100% 과오”라고 규정하면서, 김일성의 잘못된 결심은 북한군을 사실상 전멸로 내몰았다고 비난하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면 “자리에서 물러났을 것”이라고 하면서, 김일성은 자아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vii] 물론 이 발언은 비공개 석상에서 나온 화풀이에 불과하였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지도부의 솔직한 인식을 보여준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중국은 전쟁으로 악화된 주변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적극 나섰다. 오늘날까지 중국이 표방하는 ‘평화공존 5원칙’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으며, 중국지도부는 “혁명은 수출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주변국들을 안심시키고자 하였다. 동시에, 중국은 김일성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자국 외교의 리스크로 인식하고 통제하고자 하였다. 마오쩌둥은 김일성과 회담에서 북한의 안보는 중국인민지원군에 의해 보장된다고 강조하면서 병력을 42만명에서 10만명으로 감축할 것을 권고하였으며, 공군과 기계화 사단의 증설에도 반대하였다.[viii] 동시에, 전시 경제원조를 무상으로 처리하고, 8조 위안(元) 규모의 추가원조를 약속하였다. 이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되, 남한을 침공할 무력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써, 중국의 한반도 정책의 핵심은 정전체제의 유지와 무력충돌 재발 방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북한 또한 중국에 대해 고마운 감정보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시기 중국과 소련의 위세에 눌려 매번 자국의 입장을 관철시키지 못했던 북한지도부는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진정으로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정전 이후 확대된 중국의 대북 영향력과 통제 정책은 김일성 입장에서는 정치적 위협이자 내정간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크게 반발하였다. 김일성은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전쟁시기 중조연합사에서 중국과 소통했던 군 지도자들을 모조리 숙청했으며, 직・간접적으로 중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김규범,2019). 이로 인해 북중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56년 8-9월 북한의 정치투쟁에 중소 양국이 간섭하는 소위 8월 종파사건과 중소의 공동간섭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양국관계는 1958년 중국군 철수로 관계가 회복되기 이전까지 파국으로 치달았다.

 

중국과 북한의 대외전략상 간극

한국전쟁은 북중 “혈맹”의 기원이자 양국 역사상 가장 긴밀한 협력의 사례로 조명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자료와 연구들은 “혈맹”의 이면에 심각한 갈등이 내재했음을 보여준다. 정세 안정을 중시하는 중국과 무력 통일을 희망하던 북한은 전쟁 이전부터 정전 협정 체결 이후까지 전략적 차이를 노정하며 갈등하였다.

한국전쟁 전후부터 표출된 이 대외전략의 차이는 현재 북중관계에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일본, 미국, 소련 등 강대국들과 대립해오면서 늘 열세에 있었던 중국은 분쟁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반도의 안정 및 현상 유지를 선호해왔다. 반면, 북한은 시기별로 다른 맥락에서 군사적 모험주의를 견지하였다. 한국과 국력 차가 크지 않을 때는 무력통일을 추구했으며,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열세에 처한 이후에는 핵과 미사일 실험을 통해 무력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양국 전략의 간극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계속해서 북중 간 갈등을 초래하였으며, 2013년 제3차 핵실험과 2017년 제6차 핵실험 이후 출현한 북중관계 악화 국면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주변 정세의 안정화 vs 군사적 모험주의’로 요약되는 중국과 북한의 대외전략상 간극은 오늘날까지도 북중관계에 있어 갈등을 반복적으로 양산하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저자소개

김규범(daitou826@gmail.com)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이자, 동국대학교 북한학전공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중국 베이징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국제관계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북한, 중국, 소련의 자료를 이용하여 1950-60년대 북중관계사와 북한정치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국제관계 현안에도 관심이 많다. 논문으로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 재론”(2019)이 있으며, 역서로 “최후의 천조”(2017)가 있다.

 


[i] 『毛澤東與蘇聯共產黨中央委代表團第二次會談記錄』(1956.09.23)

[ii]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회담기록』 (1949.12.16).

[iii] 『김일의 북평방문 및 회담에 관한 김일성의 진술』 (1949.05.15), 『김일과 회담에 관한 마오쩌둥의 진술』 (1949.05.18).

[iv] 위의 글.

[v] 『몰로도프가 스탈린을 대신하여 작성한 마오쩌둥 전보에 대한 회신』 (1949.10.26).

[vi] 『毛澤東與蘇聯共產黨中央委代表團第二次會談記錄』(1956.09.23).

[vii] 위의 글.

[viii] 위의 글.

 


참고문헌

  • 김규범. 2019. “1956년 8월전원회의 사건 재론” 『현대북한연구』 22권 3호, 7-47.
  • 이재훈. 2013. “러시아 문서보관소 소장 사료에 비친 휴전협상 시기 공산 측 내부의 갈등.”『동북아연구』 28권 2호, 75-102.
  • 『김일의 북평방문 및 회담에 관한 김일성의 진술』 (1949.05.15).
  • 『김일과 회담에 관한 마오쩌둥의 진술』 (1949.05.18).
  • 『몰로도프가 스탈린을 대신하여 작성한 마오쩌둥 전보에 대한 회신』 (1949.10.26).
  •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회담기록』 (1949.12.16).
  • 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Kim Donggil. 2016a. “China’s Intervention in the Korean War Revisited.” Diplomatic History 40, 1002–1026.
  • Kim Donggil. 2016b. “New Insight into Mao’s Initial Strategic Consideration towards the Korean War Intervention”. Cold War History 16(3), 239-254.
  • Whiting, Allen S. 1960. China Crosses the Yalu: The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New York: Macmillian.
  • 沈志华 2013. 《毛泽东、斯大林与朝鲜战争》.广州:广东人民出版社.
  • 『毛澤東與蘇聯共產黨中央委代表團第二次會談記錄』(1956.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