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원(국립등산학교)
산악신앙이란 무엇인가?
산악신앙을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산을 보는 관점부터 살펴보자. 산은 다양한 측면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문학의 소재로, 미술 또는 레포츠 등을 위해서도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는 물리적 측면에서의 산과 산악신앙의 장소로서의 산으로 나눠보자. 단순히 물리적 관점의 산은 ▲지구의 지각변동으로 인해 주변보다 융기된 지형 ▲임산물‧광물 등을 포함한 산림이 주로 형성된 지역 ▲정착 생활의 시발점이 된 농경사회의 매우 중요한 기능이었던 수원지로서 역할을 하는 장소 ▲화산 등 자연재해 발생지역 등으로 볼 수 있다.
산악신앙 장소로서의 산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연결해주는 중간 매개체적 장소이다. ▲경외의 대상인 산신이 사는 곳. 특히 일본에서 산신은 봄부터 가을에 이르는 농사기에 마을에 내려와 밭의 신이 되어 산기슭에 사는 농민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활동하다가 농사가 끝나는 늦가을부터 겨울 동안에는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즉 사람이 죽은 뒤 영령(英靈)이 산으로 간다고 여겼다. 영령이 산에 머물며 자손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산소(山所)란 말은 영령이 머무는 장소란 의미로, 한‧중‧일 모두 사용하는 용어이다. ▲조상숭배의 장소로서의 산. 산은 사자의 공간이기 때문에 또한 조상숭배와도 결부된다. ▲신성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수행의 장소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산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다양한 형태로 다가왔다.
사회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뒤르케임(Durkheim)은 “종교는 성스러운 사물들, 즉 분리되고 금지된 사물들과 관련된 신앙과 의례가 결합된 체계다. 거기에 속한 모든 사람을 도덕적 공동체로 통합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종교의 본질적 요소는 신앙, 의례, 공동체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종교의 하위개념으로 볼 수 있는 산악신앙은 산의 무형과 유형의 존재를 성스러운 믿음의 대상으로 삼으며, 공동체가 모여 신앙의 한 형태로 지내는 의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람과 자연, 다시 말해 사람과 산의 관계에서 표출된 의례가 산악신앙인 것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인간의 영역에서 가장 높은, 산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산은 신의 영역이고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신이 산에서 가끔 천둥, 번개와 같은 자연현상을 일으켜 인간에게 벌을 준다고 여겼다. 하늘과 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현상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산악신앙은 일종의 애니미즘(animism)이다. 또한 산은 하늘과 통하는 통로였다. 대표적인 세계 신화인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올림푸스산은 신들의 집합처였고, 이곳에서 신과 인간이 혼재하며 온갖 일들이 발생했다.
뒤르케임은 “모든 종교에 통용될 수 있는 종교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덧입혀진 요인이 가장 적은 원시종교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르케임의 주장대로 원시종교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산악신앙이라 할 수 있다.
산악신앙은 왜,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인간은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진화의 과정으로 볼 때 중동사람들은 눈썹이 매우 짙고 길다. 그 이유는 사막에서 날아오는 모래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네팔의 고산족 셰르파는 산소가 부족한 높은 산에서 오랜 기간 생활하면서 적응해왔다. 그들은 산소통을 쓰지 않고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곧잘 오른다. 모두 환경의 영향이고, 그 환경에 따른 적응‧진화의 결과이다.
한‧중‧일 공통적으로 산지가 70% 정도이거나 그 이상이다. 한‧중은 전 국토의 3분의 2 가량, 일본은 그 이상인 76% 정도가 산지로 이뤄져 있다. 애초부터 산의 영향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천둥•번개와 같은 자연현상에 대한 경외감은 자연스레 형성됐을 것이며, 자연에 대한 무지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구원의 믿음도 가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게 산악신앙의 주요 발생 요인이다.
산악신앙은 토속신앙의 형태로 존속하다가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특정 종교와 습합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 시기가 대략 중국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B.C 200년 전후이고, 한국은 삼국시대 초기, 일본은 국가의 틀이 잡히기 시작하는 6~7세기 전후로 추정한다. 대략적으로 전통 토속신앙과 불교 혹은 도교와의 습합 시기이다. 여기서 생성된 핵심적인 개념은 중국은 신선 및 삼교합일의 형태로 나타난 오악, 한국은 산신에 이어 조선 시대엔 신선 및 무위자연(無爲自然), 일본은 신도(神道)에 이어 슈겐도 혹은 야마부시(山伏: 영험한 깊은 산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초월적인 능력을 얻은 후 마을로 내려와 활동하는 사람) 등으로 대표할 수 있다. 한‧중은 만물에 머무는 정령(精靈)을 숭배대상-산악신앙의 대상으로서 산-으로 삼은 측면이 강했던 반면, 일본은 이와 함께 지진이나 화산과 관련된 특정한 자연물과 현상-물리적 측면에서의 산-들을 존중하고 숭배했다는 점에서 조금 더 광범위해진다. 그렇다고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중복되는 측면이 넓고 많다. 한‧중‧일 산악신앙의 애니미즘적 보편성은 뚜렷하지만 각각의 특수성은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보편성은 다신(多神)으로, 특수성은 개별적인 산신의 형태로 특징지을 수 있다.
여기서 산악신앙의 역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구체적 사실에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상상력을 더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사실을 과학적, 이성적, 합리적 상상력으로 설득력 있게 해석과 설명을 한 학문이다. 현재도 현상에 대한 인과관계를 명확히 규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데, 유물이 발견된 시점에서 과거의 정확한 인과관계, 또는 그 유물에 영향을 미치는 정확한 변수를 파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역사에서도 인간의 상상력이 덧붙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신화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는 듯하면서 더욱 비현실적인 상상력과 비합리적 요소들로 이뤄진 현실 세계에서 그럴 듯하게 해석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신화와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는 산악신앙은 역사와 신화를 넘나든다. 단군신화가 대표적이다. 우리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는 역사인가, 신화인가? 일부는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신화로 본다. 최초의 야사(野史) 역사서인 <삼국유사>에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통치한 뒤 산신이 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어디까지 역사이고, 신화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전부 신화로 치부하기엔 역사적 사실도 일부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단군에 대한 구체적 증거가 발견되고 역사적 인과관계가 증명되는 순간 트로이 신화가 역사로 변한 것 같이 우리의 단군신화도 역사로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결론적으로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건국신화이면서 산악신앙이고, 또한 일부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이와 같이 특정 민족의 산악신앙은 특징적인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출발하면서 비합리적, 비과학적 상상력이 더해져 신앙으로 발전한 믿음을 말한다. 그 본질적 바탕은 애니미즘이고, 발전한 형태는 다신으로 발현됐다고 볼 수 있다. 한‧중‧일의 공통적 현상이다.
신화 단계의 산악신앙과 역사 단계의 산악신앙
서양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는 탈레스는 “자석은 철을 움직이기 때문에 영혼(Psyche=spirit)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때의 영혼은 생명을 뜻한다. 만물은 정지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움직이는 모든 물체에 기운이 있다는 것이다. 불‧바람‧벼락‧폭풍우 등과 같은 자연현상에 생명이 있다고 보고, 그것의 영혼이 인간과 같이 의식, 욕구, 느낌 등을 갖고 있다고 믿는 세계관을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애니미즘과 같은 개념이다. 이 개념이 중세 들어서 확립된 물질에 비실재적 실체 또는 독자적 사유체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인 물활론의 본질이다. 여기서 파생된 ‘Physis’는 사물의 본래적 성질, 즉 본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사물이 외부로부터의 강제에 의하지 않고 내재하는 힘에 의해 움직인다. 자연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는 힘을 말한다.
동양에서 자연(自然)의 개념을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저절로 되어지는(self-so)’과 ‘자발적으로(spontaneous)’의 두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교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노자의 도덕경에 처음 나오며, 노자가 최초로 사용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저절로(스스로)는 특정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그 자체 힘의 결합에 따라 양상과 형상을 바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발적으로는 내부의 힘과 원인에 의해서 생기고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힘이 작용해서 자연은 사시순환 하면서 현 상태를 유지한다. 그것이 바로 우주이다. 여기까지가 동서양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신화단계의 산악신앙이다. 산악신앙은 저절로 되어지고 자발적으로 생기는 모든 현상에 대해 신이 있다고 여겼다. 움직이는 현상은 자체적으로 기운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다신 사회였다. 이 당시까지는, 즉 원시사회는 동서양 공통적으로 다신 사회였다.
역사 단계에 들어서 동양은 다신 신앙 그대로 남고, 서양은 유일신 신앙으로 바뀌며 산악신앙이 소멸단계에 들어선다. 유일신은 창조주가 등장한다. 창조주가 자신의 뜻에 따라 세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자연신이나 다신 신앙은 어떤 조건들이 결합해서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파악한다. 유일신 신앙의 자연관은 설계자 혹은 창조주라 불리는 신에 의해 사람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계약이 발생한다. 그로 인해 신은 심판의 의무가 있고, 만들어진 인간은 그에 따를 각각의 역할이 주어진다.
반면 산악신앙의 본질이 되는 자연신 신앙의 자연관은 미정형의 혼돈상태에서 사람이 나타난다. 그 혼돈상태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인간도 그 규칙에 따라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다고 믿는다. 역사 단계에 있어 동양의 핵심가치는 형성된 질서를 파악하는 것이고, 생성의 지속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믿음이 중요시된다. 따라서 역사 단계에 들어와서는 동양과 서양의 신에 대한 개념도 달라진다. 당연히 산악신앙은 동양적 신앙의 한 형태로만 존재하고, 서양은 잠재적 의식 속에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산악신앙이 왜 연구대상이 되고,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는가?
산악신앙은 고대 원시사회부터 현대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대표적 신앙이다. 고급신앙인 종교가 탄생하면서 원시 산악신앙의 형태는 일부 습합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했으나 수천 년 전승되어온 전통 토속신앙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지만 고대부터 서민들의 지배적 가치이자 믿음이었다.
산악신앙의 표출형태는 산신숭배였다. 한국은 산신, 중국은 신선, 일본은 신도의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만 본질은 산신이었다. 이러한 산악숭배는 자연환경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잠재의식으로 전통신앙에 스며들었고, 서민들에게 주요 기복신앙이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산악신앙은 산신 숭배 사상으로 공통적으로 표출됐다. 한‧중‧일 산악신앙은 서민 생활의 주요한 기반이자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문서화, 기록화 되지는 못했지만 현대까지 전승되어왔다. 잠재의식으로 스며든 산악신앙이 민족의식으로까지 상징화 된 부분을 찾는 것과 인과관계를 연구하는 것은 현대 산악신앙연구 또는 종교연구에 주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각 국가별로 개별 산악신앙의 형태도 다르고, 산신숭배도 다르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전통적 가치를 지닌 서민들의 토속신앙은 믿음으로 전승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통적 가치에 대한 현대의 재발견 작업은 부진한 셈이다. 이에 대한 개별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산악신앙이 현대 민족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부분은 매우 시의성 있는 주제로 여겨진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대표적 서민 신앙이면서 동시에 종교보다 역사가 오래 됐지만 소홀히 취급돼 온 산악신앙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해야 하는 당위론적 이유이다. 서민 신앙의 핵심 부분으로서 산악신앙이 지닌 전통적 가치의 현대적 의미를 규명하고, 전통적 가치의 보편성과 특수성까지 밝혀내 줄 연구주제가 바로 산악신앙인 것이다.
한국 지리산의 산악신앙
지리산은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명산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국가체재를 정비하면서 한반도 오악 중 남악으로 지정한 이래 <삼국사기>부터 명산으로 언급되지 않은 역사서가 없을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일부 풍수 전문가들은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의 안산이 백두산이 고, 백두산의 안산이 지리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악에 대한 제사는 기본적으로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비는 것이었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호국신앙의 반영으로 국가 주도의 산신제를 지냈다. 산신제는 지방 호족세력을 진압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응집시킬 수 있는 산신제의 강력한 대상이 필요했다. 남악 지리산에 등장하는 산신은 성모천왕, 마고할미, 선도산신모 등으로 여성성을 띠었다. 초기 원시사회의 모계사회 영향으로 추정된다. 성모천왕과 선도산신모는 중국계 산신의 변형으로 알려져 있다.
마고할미는 지리산 산신의 전형으로 파악된다. 원래 마고할미는 해남‧강진 등 주로 해안 도서지방에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지역 전설로서 거인 신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강진의 달마산에 가면 마고할미 산신에 관한 안내문이 있다. 제주도의 설문대할망, 서해안의 개양할미, 강원도의 서구할미, 경상도 동부해안의 안가닥할미 등이 창조신화에 해당하는 여성 거인 신화이다. 중국 오악도 여성 거인 신화가 그대로 드러난다. 지리산에 나타나는 마고할미는 천왕봉의 성모천왕으로 등장한다. 성모천왕은 마고할미, 노고로도 불리며, 이후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로 변신한다. 이 같은 내용은 <삼국유사>나 근대 들어서 이능화의 <조선무속고>, 권태효의 <한국의 거인설화>에 그대로 소개된다.
성모천왕신앙은 통일신라기에 남악 지리산에 영향을 미쳤고,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 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왕건은 성모천왕을 그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와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과 동격으로 삼아 지리산 산신으로 좌정시킨다. 왕권을 절대 권력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산신을 이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산악신앙의 지배이데올로기화로 볼 수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마고’를 한민족의 조상이자 최초의 국가로 주장한다. 한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가 ‘마고지나(麻姑之那)’이며, 그 뜻이 ‘마고의 나라’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만 2,000여 년 전에 건국했다고 한다. 진위 여부를 떠나 마고할미는 지리산 산신의 원형으로 봐도 별 무리 없을 것 같다. 마고할미라는 명칭의 흔적은 노고단(老姑壇)에서 찾을 수 있다.
지리산 산신의 근원은 천신이었지만 여성신인 마고할미, 성모천왕과 혼인을 한 남성신 반야 혹은 법우화상 등을 거치면서 신라 이후부터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와 마야부인 등으로 다양해진다. 점차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산신에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이다.
조선 시대는 유교가 국교로 지정됐지만 전통적 가치인 산악신앙은 여전히 서민들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다. 왕조에서는 아예 남악제례를 유교식으로 바꿔버렸다.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방식으로 산신제 위패도 정했다. 지리산의 경우 지리산지신(智異山之神) 또는 지리산대대천왕(智異山大大天王)이라고 썼다.
지리산은 지금도 구례에서 유교식으로 남악제례를 지내고 있다. 다른 지역은 사찰 내에서 불교식 또는 무속식 산신제를 지내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다. 2005년 남악제에 전국의 유림 대표가 참여하기도 했다. 구례군에서는 현재 지리산 남악제를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산신제는 유교와 불교, 도교 혹은 무속까지 전부 아우른 전통신앙으로 볼 수 있다. 국가주도형 혹은 관 주도형 산신제, 즉 공식적 산악신앙은 일제 강점기에 완전히 사라졌다. 전통이 아니라 미신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일부 남아 있던 한반도 전통신앙의 본거지였던 신도안(新都內)도 5공 때 국군통합본부 조성으로 완전히 해체되어 버렸다. 신도안은 조선 개국 때 도읍 후보지로 꼽혔던 명당이었던 곳이다.
중국 태산의 산악신앙
태산(泰山)은 자타공인 중국 최고의 명산이다. 2005년 중국 정부가 조사한 중국인이 꼽은 10대 명산은 태산, 황산, 아미산, 노산, 티벳 주물라이봉, 장백산(백두산), 화산, 무이산, 옥산, 오대산이다. 2015년 중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10대 명산 조사에서도 1위 태산, 2위 황산, 3위 아미산, 4위 화산, 5위 장백산, 6위 에베레스트, 7위 형산, 8위 숭산, 9위 후지산(富士山), 10위 알프스로 나타났다. 어떤 기준을 적용해도 태산이 으뜸이다. 태산을 두고 역사학자들은 “서양에 올림푸스산이 있다면, 동양엔 태산이 있다”고 말한다. 올림푸스산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서양 신화와 역사의 원천이다. 태산도 이에 못지않다. 중국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곽말약(郭末若)은 “태산은 중국 문화사의 축소판이며 결정판”이라고 했다. 태산이 중국 정신사적으로나 종교적,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태산은 1987년 세계복합(자연+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자연경관만으로 보자면 사실 뛰어나지는 않다. 그 의미와 가치로 평가받은 면이 크다. 유네스코는 등재이유를 “태산은 특별한 역사적, 문화적, 미적, 과학적 가치를 지닌 중국의 가장 유명한 성산(聖山) 중의 하나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했고, 약 3,00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숭배되어왔다.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문화의 요람이었다. B.C 219년 이전부터 산악숭배의 중요한 제의 대상이었고, 그 때 중국통일의 성공을 신에게 알리고자 진(晉)의 천자인 황제 자신이 봉선(封禪)을 거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봉선은 황제가 하늘과 산천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역대 황제들은 태산에 가장 많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산은 중국의 오악 중에 가장 중요한 동악이다. 오악은 중국을 최초 통일한 진나라 당시 지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악이라는 지리적 공간, 즉 국경의 개념과 오악의 신을 통해 국가를 방위하려는 절대권위적 개념, 나아가 종교‧문화적 개념까지 포괄하고 있다. 오악에 좌정한 신을 통해 중국인들은 산악신앙을 가졌고, 산악숭배를 실천했다. 서민들의 믿음의 대상이 된 수많은 신들이 오악에 좌정해 있다. 신이 있으면 당연히 신화도 만들어진다. 오악과 관련한 가장 대표적인 신화는 육조시대 임방이 쓴 <술이기(述異記)>에 나온다. 중국의 천지개벽 당시에 ‘반고(盤古)가 죽은 후에 머리는 동악, 배는 중악, 왼팔은 남악, 오른팔은 북악, 발은 서악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원시시대의 여성성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동악 태산이 가장 중요시 되는 이유는 인체 중에 가장 중요한 반고의 머리 부분이 태산이고, 해가 뜨는 동쪽이기 때문이다. 동쪽은 또한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상징하고 만물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상징성도 다른 방향보다 훨씬 크다.
태산에 좌정한 신들도 중국 최고의 신들로 꼽힌다. ‘동악대제’는 송대 이후 도교신으로 정착한 태산부군의 호칭이다. 한 대에 민간에서 태산부군으로 부르다, 당대에 천제왕으로 바뀌었다. 태산부군은 천제의 손자로 사람의 혼백(魂魄: 마음과 육체)을 불러들이는 생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숭배됐다. 동악대제의 딸은 벽하원군으로, 낭랑신의 첫 번째로 꼽힌다. 서양에서는 벽하원군만을 대상으로, 즉 벽하원군이 누구인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등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벌일 정도다. 낭랑은 전형적인 도교의 신이다. 송자낭랑은 자녀의 잉태, 자손낭랑은 자손번영, 두진낭랑은 천연두 치유, 최생낭랑은 출산 촉진, 안광낭랑은 눈병치료 등으로 아직까지 중국민들의 민간신앙 깊숙이 전승되고 있다.
도교 최고의 신 옥황상제는 태산 정상에 모셔져 있다. 옥황이란 명칭은 최고 신인 원시천존의 아칭인 옥제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태산에 가면 자주 눈에 띄는 청제(靑帝)는 동악의 신 태호(복호 또는 복희라고도 한다)를 가리킨다. 상고시대 전설 속의 동이족 수령이다. 다섯 방위를 관장하는 수호신인 오방신장의 하나로써, 봄을 맡는 동쪽의 신이기도 하다. 봄의 신 태호는 동방의 천제이고, 신하 구망은 태호 밑의 속신이 됐다. 구망의 형상은 새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을 한 채 두 마리 용을 끌고 다닌 모습을 하고 있다. 태호와 구망은 동방의 푸르고 나무 우거진 1만 2,000리 지방을 관리하면서 봄날의 주신이 됐다고 중국 신화에 전한다.
중국 산악신앙 중에 가장 큰 특징은 유불선 삼교의 통합이 그대로 표출된다는 점이다. 유교에서는 태산을 성산(聖山), 도교에서는 선산(仙山), 불교에서는 영산(靈山)으로 부른다. 각 종교의 장점을 국가통치이념과 개인의 수행에 그대로 이용했다. 유교와 불교는 주로 통치 이념으로, 도교는 산악신앙과 민간신앙으로 주로 전승되어 송 효종대에 이르러 이불치심(以佛治心), 이도치신(以道治身), 이유치세(以儒治世)라는 구호로서 완성을 보게 된다. 삼교합일을 이룬 것이다.
일본 후지산의 산악신앙
후지산은 두 말 할 필요 없는 일본 최고의 명산이자 영산(靈山)이다. 일본의 3대 영산은 후지산(3,776m)과 함께 하쿠산(2,702m), 다테야마로 꼽힌다. 후지산은 에도(江戶: 1603~1867)시대 들어 일본 최고의 산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하쿠산은 그보다 1,000여년이나 앞선 717년 다이쵸 대사(泰潧大師)가 최초로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쿠산의 신령스런 신들과 다이쵸 대사를 모신 신사가 일본 전역에 3,000여 개 달할 정도로 많다.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숭배 대상이 되는 산이다. 하쿠산과 후지산 관련 전설도 전한다.
옛날엔 하쿠산도 3,000m를 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하쿠산을 일본 최고의 산으로 알았다. 하지만 후지산이 더 높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쿠산 주변 주민들은 발끈해서 “누가 더 높은지 비교해 보자”고 제안했다. 대나무 양쪽에 물을 매달고 양쪽 산의 최고봉에 대나무를 걸쳐 놓고 물이 기우는 쪽이 낮은 것으로 결론내기로 했다. 하쿠산 쪽으로 기울었다. 주민들은 아쉬워하며 정상에 돌을 실어 나르고, 흙이 파이지 않도록 등산로 입구에서 모두 짚신을 신고 오르라고 했다. 그러나 끝내 역전하지 못했다. 오히려 화산 폭발로 더 낮아졌다고 한다. 지금도 등산로 입구에는 짚신을 파는 상점들이 눈에 띈다. 여성적인 우아한 모습의 하쿠산은 ‘천상의 화원’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근현대 들어서는 단연 후지산이다. 일본인들이 후지산을 숭배하는 근거는 전형적인 산악숭배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신화에서는 후지산의 여신과 천신(天神)의 자손이 천왕가를 형성했다고 전한다. 한반도의 단군신화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또한 부처님과 신이 사는 산으로 예로부터 여겨져 왔고, 그로 인해 숭배대상이 됐다.
일본인들의 산악신앙 중에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현세와 내세의 경계로 산 입구나 산에 있는 특징적인 건물, 혹은 숲, 바위로 구분한다는 점이다. 산 중간에 있는 아오이시(靑石)란 바위는 유명하다. 일본인들은 이 경계의 바위에 쌀과 소금을 올리고 촛불을 밝히며 기도를 하곤 한다. 일본 종교학자 쿠보타 노부히로(久保田 展弘)는 “아오이시는 천상계와 지하계를 연결하는 우주의 축과 같은 역할을 하며, 여기서부터 정상까지 천상계로부터 신이 강림(降臨)하는 것을 암시한다”고 그의 책 <山岳靈場巡禮(산악영장순례)>에서 언급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아오이시를 넘어서는, 혹은 아오모리에 들어서는 순간 천상계, 아니 ‘신들의 세계’에 접어드는 것으로 인식한다. 지금은 산 입구나 산기슭에 있는 센겐진쟈(浅間神社)가 그 역할을 하며, 후지산 신을 숭배하는 후지산악신앙의 중심이다.
후지산 혼구 센겐다이샤진쟈는 전국적으로 1,300여 개 소에 이르며 센겐진쟈의 총본산이다. 이는 후지산 산악숭배신앙의 대표적 유적이다. 센겐진쟈는 865년에 최초로 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센겐진쟈에서 신도문(神道門)을 세워 산 정상 신이 있는 데까지 금욕적 수행 행렬을 정기적으로 열었다는 기록은 12세기부터 소개된다. 금욕적 수행을 하는 사람을 슈겐도(修驗道)라고 한다.
일본 산악신앙은 신도신앙을 근본으로 한다. 한국의 전통신앙이 산신이라면 일본은 신도라고 할 수 있다. 산신과 별로 다르지 않지만 일본 신도는 천왕의 조상신이라고 믿는다. B.C 2세기쯤 정착 생활, 즉 농경 생활을 하면서 생겨났다. 신도신앙은 산, 폭포, 바위, 나무 등의 자연물을 신으로 보고 숭배하면서 신과 인간을 잇는 도구와 방법이 제사이며, 그 제사를 지내는 곳이 신사이다. 고대인들은 산신이 평야 지대에서 벼농사에 필수적인 물과 도시 생활에 필요한 돈을 다스린다고 믿었다. 또한 나라(奈良)를 세운 초대 천왕을 지도하는 신이 산에 거주한다고 생각했다. 신에 접근하기 위해서 쉬운 주문만 외우면 깨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진언종은 일본 전통신앙인 신도와 쉽게 습합한다. 이게 바로 지금까지 전하는 신불습합신앙(神佛習合信仰)이다. 산악신앙인 신도와 불교의 습합이다. 신도와 슈겐도가 일본 산악신앙의 핵심 개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악신앙에 등장하는 초기의 신도 한국과 중국과 같이 여성성이다. 헤이안(平安: 794~1185년)시대 <후지산기(富士山記)>에는 후지산 정상에서 두 명의 선녀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봤다는 기록이 소개된다. 여신의 이름은 아사마노오오카미(浅間大神). 아사마라는 뜻은 분화하는 산의 위대한 신이라는 뜻이다. 이어 가마쿠라(鎌倉: 1185~1333년)시대에 출판된 <후지연기富士緣起>에는 후지산 여신이 푸른 기모노를 입고 보물 구슬을 들고 흰구름을 타고 구름 위에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에는 센겐 다이보사츠(浅間大菩薩: 아사마 대 보살)라는 여신으로 불렸다. 700~800년 전에는 다케토리 모노가타리(竹取物語)의 카구야 히메(かぐや姫)가 후지산의 여신이라 한 시기도 있었다.
이와 같이 후지산 여신은 시대마다 이름과 모습이 조금씩 변화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중‧일 산악숭배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신의 대상과 모습을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현재 센겐진쟈가 받들고 있는 신은 고노하나 사큐야히메木花開耶姬라 불리는 여신女神. 꽃이 핀 것처럼 아름다운 신이란 뜻이다. 약 300년 전 에도(江戶)시대에 현재 여신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후지산 여신 고노하나 사큐야히메의 사자(使者)는 원숭이다. 원숭이는 일본의 대표적 동물 중의 하나. 이와 관련한 전설도 많이 전한다. B.C 360년경 원숭이해에 후지산이 생겨났다는 전설도 있다. 그래서 원숭이는 후지산과 밀접한 동물로, 원숭이해에 후지산을 등산하면 많은 복을 받는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이 일본인들은 후지산에 대해 영적일 정도로 깊은 산악신앙을 갖고 있다. 동물, 특히 원숭이와 연결된 전설들도 숱하게 전한다.
일본의 산악신앙에서 지장보살도 중요한 개념이다. 일본인들은 지장보살을 오지조사마(お地藏樣, 지장님)라고 매우 친밀하게 부른다. 일본의 저승 설화에서 부모보다 일찍 죽은 아이를 구원하는 역할을 지장보살이 담당하고 있다. 일본의 산에, 또는 신사에 가면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작은 동자 지장보살상이 아이들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 특히 빨간 턱받이를 한 지장은 사산(死産) 또는 유산, 낙태한 아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의식이라고 한다. 원래 지장보살은 범어 ‘크시티 가르바(Ksiti garbha)’의 의역으로 크시티는 땅을 의미하고, 가르바는 모태를 뜻한다. 이는 마치 대지와 같이 무수한 종자를 품고 있다는 의미다. 불교 이전 고대 인도에서는 ‘대지의 신’을 신앙했고, 이 보살은 만물의 생육을 관장하는 대지의 모신에서 출발했다. 불교의 지장신앙은 고대 농경사회에 성행했던 대지의 신 신앙의 연장선상으로 보면 된다.
한국의 사찰에 있는 지장보살은 지장전이나 명부전의 주불이다. 미래불이 출현하기까지 중생을 구제하고 교화한다는 보살이다. 일본의 지장보살은 한국과는 조금 다른 일본의 산악신앙, 즉 신도와 습합한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한‧중‧일 산악신앙의 공통점과 차이점
한‧중‧일 산악신앙은 수천 년 전승되어 온 그 민족의 전통이며, 그 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국의 마고할미, 중국의 반고는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 신이다.
한국은 원시 산악신앙의 토대 위에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산신과 신선이라는 형태로 표출됐고, 중국은 산신과 오악, 유불선 삼교합일로 나타난다. 그 바탕 위에 통치이념으로는 유교와 불교, 서민생활에서는 도교가 더 큰 영향을 미쳐 민족정서나 민족성을 형성하게 된다. 일본은 전통 토속신앙 신도 또는 도조(道祖)신앙 위에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유교와 불교, 도교는 한‧중‧일 세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영향을 받으나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한국은 산신, 그리고 무위자연과 신선사상으로, 중국은 실체적‧관념적 대상은 오악, 수행 목표는 도교에 바탕을 둔 신선. 산악신앙은 유불도 삼교합일의 형태로 표출된다. 송 효종 때 만든 구호인 이불치심(以佛治心), 이도치신(以道治身), 이유치세(以儒治世)가 그 완성된 형태이다. 일본의 전통산악신앙은 도조 또는 신도신앙이면서 산신을 숭배하고, 불교와 습합하면서 즉신성불을 중요시한다. 즉신성불의 실천적 개념인 슈겐도는 극한의 산악숭배의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원시 산악신앙의 바탕 위에 종교와 습합하면서 각 국가별로 표출된 형태는 다르지만 나타난 공통현상 또한 뚜렷하다. 먼저, 한‧중‧일 공통적으로 현대까지 여전히 다신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한‧중‧일은 근본적으로 자연, 또는 자연현상을 하나의 신으로 보는 관점에서 유사성을 띠며, 그로 인해 다신으로 표출됐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둘째, 죽은 조상이 항상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죽으면 산으로 가고, 산은 ‘사자의 공간’ 산소가 있는 곳이며, 그 산소에 있는 조상이 항상 나를 지켜주고 보호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는 가족 중심주의, 나아가 공동체 중심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의식이다. 그 밑바탕에는 산악신앙이 있다.
셋째, 산악신앙은 기복신앙의 근원이다. 기복신앙은 기본적으로 가족과 공동체의 안위와 안전, 평화를 염원하는 강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자연 재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족의 안위를 기원하는 데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기복신앙은 나아가 인연과 윤회 사상, 그리고 업(karma)으로까지 개념이 이어진다. 가족으로 만난 인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계속 세세생생 좋은 인연으로 만나 상생으로 살겠다는 믿음으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이게 동아시아의 산악신앙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종교의 원천이자 출발점이기도 한 부분이다.
여기서 한중일 산악신앙의 한계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 산악신앙은 왜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종교는 개인적 믿음을 바탕으로 가족과 나아가 공동체 커뮤니티를 형성해서 집단지성을 구성한 뒤, 대중화 시킬 수 있는 이론적, 논리적 근거를 갖춰 집단 파워를 쌓아 세력을 확산하는 단계를 거친다.
하지만 산악신앙 내지는 산신 신앙은 마을 단위 커뮤니티까지 형성했으나 이론적, 논리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 집단지성을 구성하지 못했다는 점이 산신이 종교로 발전하지 못한 결정적 한계로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산신 신앙은 또한 신정일치 사회에서는 강력한 파워를 발휘했으나 신정 분리 과정에서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왕권에 완전히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더 이상 종교로서 발전하지 못하는 한계도 드러냈다. 이로 인해 결국 민간신앙 또는 토속신앙으로 명맥만 유지한 채 현재에 이르게 된다.
또한 토속신앙의 형태로 존속하다가 고급신앙인 불교와 유교, 도교 등에 습합되면서 종교로 발전할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린 측면도 있다. 하위문화가 고급문화에 흡수된 결과이다. 지금도 절에 가면 산신당 혹은 삼성당의 형태로 불교와 습합된 산악신앙을 볼 수 있다.
저자소개
박정원(jungwon5549@gmail.com)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이며, 국립등산학교 교장으로 있다. 조선일보 편집부 기자와 월간山 편집장을 지냈다. 산림청 산하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비상임이사와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공단 문화사업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산의 역사와 민속학적 관점에서 산신에 대한 연구를 수십 년째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 <중국오악기행>(2021), <신이 된 인간들-한국의 산신 이야기>(2018), <내가 걷는 이유>(2017), <옛길의 유혹, 역사를 탐하다>(2015) 등이 있고, 고지도에 나온 산의 지명 변천과 인물, 역사를 담은 <마운틴스토리>가 곧 나올 예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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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길. 2002. “일본의 산악신앙과 슈겐도(수험도)의 세계관.” 일본사상 4, 235-268.
- 박이순. 2014. “고대 일본 민중의 정신세계” 인문과학연구 42, 225-247.
- 박정원. 2018. 『신이 된 인간들-한국의 산신이야기』. 서울: 민속원.
- 박정원. 2021. 『중국오악기행』. 서울: 민속원.
- Mason, David A. 2012. “The 21st-Century Role of Korea’s Sanshin Mountain-Spirits.” 선도문화 13, 597-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