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아대륙, 다양성과 교류

세계사 속 지역사의 성격을 가지는 인도아대륙의 역사는 다양한 지방의 문화와 이국의 인구 및 문화의 유입으로 그 어느 지역사보다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인도아대륙의 유라시아 대륙 및 해양 지역들과의 교류는 선사시대부터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문화 교류는 지역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어 역동성을 증대시키고, 이 역동성은 다시 새로운 문화 교류의 동력으로 이어진다. 인도아대륙의 문화는 초기 인류가 도착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국제적이다. 다양한 지역 출신의 초기 인류가 인도아대륙에 진출했으며, 이후 밀과 쌀 농경문화권 사람들이 만났다. 철기·기마·거대 무덤 등의 새로운 문화가 인도아대륙의 역동성을 증가시켰으며, 제국과 상공업자의 후원을 받은 인도종교는 인도아대륙을 넘어 세계종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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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끼와 작업복 대신 환자를 수술하는 의사의 복장을 하고 인더스 문명 시절 도시민의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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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한국문화재재단)

인도아대륙(Indian Subcontinent)의 다양성

모든 근대국민국가의 자국사는 국경을 넘어 이국과의 교역, 이민 및 전쟁 등의 내러티브를 포함하면서 세계사 속 지역사(regional history)의 성격을 가진다. 하여 많은 전공자는 인도보다는 인도아대륙(Indian Subcontinent) 혹은 남아시아(South Asia)라는 인도와 주변 이웃 국가들을 포함한 지역을 역사 서술의 무대로 설정하는 것을 선호한다.

인도아대륙은 이질적인 지방문화(local culture)들이 다양한 자연환경 속에서 만화경처럼 펼쳐져 있으면서도 그것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어왔다. 여기에 인도아대륙은 유라시아(Eurasian) 대륙 및 해양 지역과의 문화교류 상 교차로에 위치하여 무수한 이국의 인구와 문화들이 포개어졌다. 다양한 지방문화 위에 이국의 문화가 복잡하게 더해진 인도아대륙 문화사는 석기시대부터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인도아대륙 최초의 사람들

인도아대륙 초기 인류가 남긴 삶의 흔적은 백만 년을 훌쩍 넘어간다(Pappu et al., 2011). 아프리카 대륙을 출발한 초기 인류의 인도아대륙으로의 유입은 출애굽기와 같은 일회성 대규모 인구이동이 아니다. 아프리카를 출발하여 인도아대륙까지 한숨에 내달린 대장정도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과 인도아대륙 사이의 근동과 아랍, 그리고 이란 지역 등지에 머물다 인구압력 등의 이유로 일부는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야 했고, 그들이 인도아대륙까지 진출했다. 아프리카 대륙과 인도아대륙 사이에 있는 여러 지역 출신들이 인도아대륙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다.

약 2만여 년 전부터 빙하기가 끝나고 온화해진 기후 속에서 동물들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 결과 몸집은 줄고 민첩해졌다. 느리게 움직이던 거대 동물들은 인류의 사냥에 의해 멸종해갔다. 이제 인류는 돌을 더 잘게 가공하고 대나무 등에 접합해 창과 활을 만들어 빨라진 동물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인도아대륙에는 잔석기(Microlithic) 시대라 부르는 이 시기 동안 지구상 어느 지역보다 많은 인구가 전 지역에 고루 성공적으로 정착하였다. 이들은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무리하고, 어두운 밤 맹수의 공격을 피하고자 바위은신처(rock-shelter)에 머무는 것을 선호했다. 이들은 이 은신처 바위 면에 그들의 일상과 정신세계를 암각화로 남겼다. 인도아대륙에서는 수천 이상의 선사암각화 유적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래서 남아프리카 및 호주와 더불어 선사암각화 3대 분포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온화한 인도아대륙 잔석기시대 사냥
채집민들은 바위은신처를 삶의 터전으로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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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은신처 선사암각화
주로 동물들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 문양들이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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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아대륙 최초의 농ž목축인: 밀과 쌀 문화

초기 인류의 이주 이후 사냥·채집에 기반해 삶을 영위하던 인도아대륙 지역에 약 1만여 년 전 시작된 충적세(沖積世, Holocene)의 여파로 농·목축 마을 사회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주식은 달랐다.

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Fertile Crescent)에서 시작된 밀ž소를 중심으로 한 농ž목축 경제는 인도아대륙 서북부의 인더스 대평원 지역까지 넓게 개화했다. 우기 동안 범람하여 비옥해진 대평원에 뿌려진 밀들은 많은 농·목축 마을 인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했다. 추수가 끝나면 밀짚으로 소들이 살이 쪘다. 가축의 등에 겨울을 날 식량과 내년에 심을 밀알을 싣고 새로운 농·목축지에서 봄을 시작하려고 이동하는 무리도 있었다. 이때 동부 이란의 농.목축인들이 인더스 대평원을 찾았고, 역으로 인더스 대평원 농·목축인들은 특히 건조한 기후에 강한 인도혹소(Zebu)와 함께 이들 지역을 찾았다.

갠지스강 하류 지역과 아삼(Assam) 지역에는 높은 강수량에 강한 갖가지 야생 쌀들이 저습지에 가득했다. 야생의 쌀들은 원래 사냥을 보충하던 채집의 대상이었다. 쌀의 경작은 불을 놓아 당황하는 산짐승들을 사냥하던 화전민들이 잿더미 위에 심어 식단을 보충하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저습지에서 물고기와 조개를 주식으로 하던 이들에 의해 저습지 주변에서 본격적으로 경작되면서 주식의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중국 대륙의 양쯔강(揚子江) 상류 지역에서도 쌀에 기반한 많은 농경마을이 등장했다. 이들 역시 물소와 함께 새로운 저습지와 비옥한 강 유역을 찾아 이동했다.

인도아대륙 반도, 그 중 특히 남인도 지역에는 풍부한 자연 먹거리에 기반한 채집 생활이 계속되었다. 모험적이고 고된 농경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지역의 잡곡들을 소규모 경작하면서, 서북부 지역에서 유입된 인도혹소의 목축은 받아들였다. 사냥보다는 소의 사육이 유리하다고 판단되어서였다.

인도아대륙의 신석기문화는 밀, 쌀 그리고 잡곡 중심 농경문화로 구분된다.
출처: 저자 제작 및 제공

인도아대륙의 신석기(Neolithic) 시대는 밀, 쌀 그리고 잡곡 중심의 서로 다른 농경문화로 구분된다. 물론 그 근본적인 배경은 환경의 차이이다. 지금도 아삼 지역에 가면 주로 쌀을 주식으로 하고, 펀잡(Punjab) 지역에 가면 밀을 주식으로 한다. 시야를 넓게 보면, 신석기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의 밀 문화권과 쌀 문화권이 인도아대륙에서 만난다. 잘 알려진 탈리(thali)라 불리는 쟁반에 담겨 나오는 인도 정식에는 밀과 쌀, 그리고 남인도 지역에서 기원한 잡곡이 만나는 유라시아 문화사가 담겨있다. 유라시아 농경기술의 이동과 함께 언어도 이동하였다(Bellwood and Renfrew, 2002). 인도아대륙 주요 어족(Language Family)의 분포는 밀과 쌀 문화권의 분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탈리(thali) 정식, 밀과 쌀 문화권의 만남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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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인도 아삼 주의 저습지(좌)와 서북부 인도 하이랴나(Haryana) 주의 대평원
아삼 지역은 쌀 농경이 초초로 시작된 곳 중 하나이다. 하리야나 주의 대평원에는 밀 농경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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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아대륙 최초의 도시 사회와 국제 무역

인도아대륙 곳곳의 농경 마을 사회는 오래 지속하였다. 그런데 인도서북부 인더스 대평원 밀 농경 지역에서 마을이 점점 성장하더니 기원전 2600년경부터 인도아대륙 최초의 도시에 기반한 문명사회, 인더스 문명(Indus Civilization)이 발전했다. 동시대 이집트·메소포타미아 문명 분포 영역을 합한 것보다 넓은 지역에 발전했던 인더스 문명 시절에도 농경 마을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다수의 인구는 오히려 여전히 농민이었다. 비옥한 인더스 대평원의 농경 마을은 많은 수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이러한 농업생산력에 기반하여 지역의 중심이 되는 5대 도시가 성장했다. 잘 알려진 데로 이 도시들은 잘 정비된 도로망과 수자원 관리 및 하수 처리가 계획에 의해 마련된 도시였다. 도시 내의 대형 곡물창고로 강 혹은 소가 끄는 수레를 통해 지역의 농축산물들이 모여들었다. 도시민의 옷감이 되는 양털 및 목화와 더불어 수공업에 활용될 각종 자원도 모여들었다.

도시는 부가가치가 높은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공방이 많았다. 인더스 문명은 보석 및 준보석을 정밀하게 가공하는 마이크로(micro) 산업을 특화시켰다. 고부가가치 마이크로 물품의 교역을 위해 미세 도량형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도시 길드(guild)들은 무역을 위해 인장(seal)을 사용했다. 교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문자가 창안되어 도시 엘리트들의 소통에 활용되었다.

수천 년 동안 지속한 농경 사회 시절 동안 주변 이란 등 이웃한 밀 농경 지역과 소규모의 점진적 인구이동이 있어왔다(Narasimhan. et al., 2019). 가축과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던 이 길들이 도시에 기반한 문명사회의 무역로로 여전히 활용되었다. 여기에 고부가가치 산업에 활용된 자원로와 해양 국제교역로는 이 시절 크게 확대되었다.

고대 사회에서 신비로운 푸른색을 내는 청금석(Lapis lazuli) 광산은 현 아프가니스탄 남부 지역이 유일하게 알려져 있었다. 인더스 문명인들은 이 지역에 광산촌을 개척하였다. 원석을 도시로 가져와 정밀가공 기술을 통해 장신구를 만들어 멀리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까지 수출하였다. 현 구자라트(Gujarat)주 해안가에 위치한 돌라비라(Dholavira) 도시는 해양 국제무역으로 번성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인더스 문명 지역과의 교역을 위해 당시 인더스 지역 출신 통역가들을 두고 있었다. 이는 인더스 문명 도시들에도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외국인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보석 및 준보석 장신구 산업은 인더스 문명인들의 주요 산업이었다. 화려한 목걸이를 한 인더스 문명 여성이 무덤에서 발굴되고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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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무역으로 번성했던 돌라비라(Dholavira)   
도시 유적은 다른 도시처럼 매우 발전된 도시 수자원 관리 시설이 있었다. 인공저수탱크와 그곳으로 물이 흐르는 수로가 보인다.
출처: 저자 제공

최근 급속하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유전과학(Genetic Science) 등의 생명과학이 고고학 연구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무덤에서 발굴된 인골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뼈에 남은 여러 생명과학적 정보들은 당시 사회를 복원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무덤을 발굴하는 현장에는 조끼와 튼튼한 작업바지 대신 환자를 수술하는 의사의 복장을 한 고고학자가 발굴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인더스 문명 도시민들이 묻힌 무덤에서의 최근 연구에 의해 당시 도시에는 먼 시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Valentine. et al., 2015)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더불어 살고 있었음(Kenoyer. et al., 2013)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국제적 도시의 존재는 유라시아 대륙 속 교류의 길이 다양해지고 교류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인더스 문명(기원전 2,600-1900년)
약 2,000여 유적이 알려져 있다(노란색 점 = 농경 마을 / 빨간색 점 = 5대 도시)
출처: 저자 제작 및 제공

유라시아 거석문화 루트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란 거대한 바위를 활용하여 주로 유력자의 무덤을 조성하거나 공동체의 의례를 위해 세운 선사시대 문화로서 유럽에서 한반도까지 유라시아 전 지역에 걸쳐 존재했었다.

인도의 거석문화는 19세기 초반 바빙턴(Babington, J)에 의해 본격적으로 학계에 소개된 이후, 오랜 고고학적 연구 결과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후 약 1세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많은 지역에서 철기 기술과 기마술이 발전했던 시기에 성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철기와 기마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매우 역동적으로 뒤흔들었고, 지역간의 교역과 인구이동은 빠르고 복잡해졌다. 농·목축 마을들이 강력한 리더들에 의해 결속되었고 결속된 부족들을 통합한 고대 국가들이 일부 지역에서 형성되던 시기였다. 거대 바위 무덤이나 기념물을 조성하는 데에는 공동체의 어마한 집단노동이 동원되었다. 철기와 기마가 야기한 무력 충돌이 잦아진 시대에는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강력한 리더의 우상화가 필요했다. 거석문화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인도아대륙 곳곳에서 성행하였다.

세계 거석문화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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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대륙 거석문화 분포지도
빨간 점 = 혼 구멍(port-hole)이 있는 거석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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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동안 유라시아 밀 문화와 쌀 문화가 인도아대륙에서 공존하고 교류했었던 것처럼, 유라시아 서쪽 지역에서 발달한 거석문화와 동쪽 지역에서 발달한 거석문화가 인도아대륙에서 공존하고 교류했다. 죽은 망자의 영혼이 드나들게 하고자 하는 목적 혹은 후손들이 제사 시 공물을 넣어주고자 하는 목적의 혼 구멍(Port-hole)이 설치된 거석무덤은 근동이나 흑해-카스피해(Black Sea-Caspian Sea) 연안에서 성행하였다가 육로와 해로를 따라 인도아대륙으로 소개되었다. 망자의 시신이 안치된 혼 구멍이 있는 바위무덤은 환상열석(Stone Circle)이라 불리는 바위를 이용한 무덤 보호장치를 설치했는데 이 역시 이때 함께 소개되었다.

근동, 흑해-카스피해, 인도의 혼 구멍이 있는 거석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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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시대 강한 결속력을 가진 공동체의 등장은 공동협업이 크게 요구되는 쌀 농경 문화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잡곡과 목축에 주로 의지하던 남인도의 신석기 사회에 쌀 농경이 빠르게 확산하였다. 공동체의 결속이 요구되었던 쌀의 수전농경에 기반한 동인도 및 남인도 부족사회에 조상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사회의 결속에 도움이 되었던 거석문화가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그리고 이 불길은 인도아대륙 쌀 문화권을 넘어 이웃한 동남아시아 쌀 농경 부족사회 일부에도 번져나갔다. 이들은 거석무덤 및 거석기념물 조성의 아이디어를 빌어 각 지역에 풍부한 바위의 특성 및 부족문화에 맞추어 다양한 지역 거석문화를 발전시켰다.

서남인도 지역의 버섯을 닮은 독특한 거석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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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강 유역 대평원의 철기 시대 장례ž매장 문화

현재 인도아대륙에서는 잔석기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며 바위은신처에 암각화를 많이 남긴 석기 시대부터 매장 문화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이때의 매장유적은 주로 바위 은신처에서 발견되었는데, 흙을 파묻고 덮어주는 간단한 토광묘 형태로 파악이 되었다.

이러한 토광묘는 이후 신석기 시대 및 인더스 문명 시대에도 지속되었는데, 다른 지역에서 보이는 화려한 묘제나 매장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어, 검소하고 실용적인 인도아대륙 선사ž고대 문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검소한 장례ž매장 문화에 큰 변화가 이는 시대가 바로 기원전 1,500년경으로부터의 철기 시대인데, 당시 서북인도 철기 시대 문화 속에서 번성한 베다 문화(Vedic Culture)에서는 힌두교인들의 최고 성지인 갠지스강 유역에 위치한 바라나시(Varanasi)의 화장터에서 볼 수 있는 화장 후 신성한 강이나 바다, 혹은 숲 및 나무 아래에 그 분골을 흩뿌리는 문화가 규범으로 브라만 사제 계급에 의해 제시되었고, 이러한 규범이 이후 인도아대륙 사회의 브라만ž힌두교의 확산에 따라 전 지역에 자리 잡게 되었다.

다만 이러한 규범에 예외 조항이 있었는데, 그것은 특히 출가자에 대한 것이었다. 출가라고 하는 것은 인도아대륙 문화에서는 ‘사회적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들은 이미 죽은 이들이기에 굳이 장례와 매장이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관념과 더불어, 세속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불의 관리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라는 상징적 의미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출가 전통은 후기 브라만교 전통인 우파니샤드(Upanishad) 시대에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을 반(反)브라만교 종교혁신운동으로 승화시킨 기원전 약 5세기에 창립된 자인교ž불교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자인교 출가자의 경우, 그 특유의 극단적 무소유 실천 운동과 더불어 열반을 향해 극도의 단식과 명상을 통한 자살이 실천되고 있다. 이들 열반에 이른 출가성자의 죽음에 대해 타인이 장례·매장을 치러 주는 것은 엄격히 금기시 되고 있다. 중도(中道)를 강조하는 불교의 경우는, 잘 알려진 것처럼 당시 규범 시 되던 화장을 따르지만, 브라만교에서 이단적이며 야만적으로 비아냥거리던 탑(stupa)을 건립하여, 이 속에 다비 후 남은 분골을 모시는 전통을 발전시켰다. 이 탑의 원형은 당시 광범위하게 유행하던 철기 시대 거대 봉분묘이다. 봉분묘란 흙을 피매장자가 안치된 무덤 위에 높게 쌓는 무덤이다.

북인도 거대 봉분묘의 모습이 남아있는 산치 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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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 대탑의 부조에는 당시 봉분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탑과의 유사성이 주목된다.
출처: 저자 제공

인도아대륙 서북부의 인더스강 유역과 북부의 갠지스강 유역에는 오랫동안 누적된 퇴적층으로 형성된 대평원이 발달했다. 이러한 대평원에는 거대 바위가 없다. 하여 대신 흙으로 거대한 무덤을 조성하던 이 지역의 철기 시대 봉분묘의 전통은 바위가 많은 지역에 발달했었던 동시기 거석 무덤과 장례·매장문화의 관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황제의 카리스마와 석가모니의 대탑, 거석문화인들을 매료시키다

기원전 1,500년부터 개시된 인더스-갠지스 대평원의 철기 시대는 베다 문화 및 불교가 새롭게 성장한 도시에 기반하여 발전하는 시기였다. 남인도와 동인도 지역에는 쌀의 수전농경이 확대되고 철기ž기마에 기반한 전투적 부족연맹이 각지에 등장하는 시기였다. 이전에 없던 공동체의 단결된 노동과 참여가 요구된 거대 장례ž매장 문화가 두 지역에 봉분묘와 거석묘 형태로 각각 유행하였다.

기원전 4세기 무렵, 갠지스강 유역의 연맹 왕국에서 제국의 단계로 도약한 인도아대륙 최초의 제국인 마우리아(Maurya) 제국이 탄생한다. 제국의 전성을 이루었던 아쇼카 대제(Asoka the Great)의 정치적 의지가 담긴 비문들은 거석무덤들이 밀집되어 있던 지역 부족집단의 중심지에 주로 새겨졌다. 언어와 문화가 이질적인 지방으로 불교가 확산하였을 때 거대 불탑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승원(vihara) 역시 그 근방에 많이 설립되었다. 갠지스 대평원에서 발전한 정치와 종교는 왜 거석무덤 중심지를 택했을까? 일단 지방 부족민들이 많이 운집하는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이곳에서는 거대 거석무덤에 묻힌 강력한 리더를 숭앙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황제와 깨달은 자, 부처가 지역 공동체의 새로운 리더로 설득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유라시아 대륙 철기ž기마 문화의 발달은 인도아대륙에도 역동적인 기운을 불어넣었다. 집약적 농경이 발달하고 빈번한 전쟁 속에서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거대 장례ž매장 문화가 발전하였다. 특히 거대한 바위를 활용하는 거석무덤이 근동 및 흑해·카스피해 연안에서 육로와 해로를 따라 바위가 많은 지역을 인도아대륙 반도 지역으로 소개되어 많은 부족 집단들의 사랑을 받았다. 수천 년 동안의 신석기 농촌 마을에 형성된 철기 시대 부족집단들이 존재했기에 갠지스 대평원을 중심으로 동시기 발전한 제국의 정책 및 불교 등의 종교문화가 확산될 수 있었다.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인도아대륙 각 지역 간, 유라시아 대륙 및 해양 지역과의 연결성은 증가했다.

그리스-로마 국제무역 상단, 불교를 후원하다

서기(西紀) 원년 즈음, 즉 예수가 활동하던 즈음 유라시아 대륙과 해양은 밀과 쌀, 쇠고기와 우유가 아닌 재채기를 일으키는 향신료에 열광하고 있었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그리스인들은 인도인들로부터 계절풍을 타고 아덴(Aden)에서 인도아대륙 서해안으로 항해해서 가는 법을 배웠고, 해상 국제무역의 리더들이 되었다. 로마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에서 보면 후배 격에 해당하는 제국이었지만, 시대를 선도한 제국임이 틀림없었다. 아프리카 동부 해상 무역 강국이었던 악숨(Aksum) 왕국에서 고안된 항해술도 로마 상인들에게 공유되었다. 로마령 이집트(Roman Egypt)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인도와의 향신료 무역에서 그리스-로마 지역으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 됐다. 인도아대륙과 그리스-로마 문명의 무역은 계속 증가했고, 이 무역에서는 향신료가 비단과 다른 품목을 압도하였다.

인도아대륙 서해안 항구에 도착한 지중해와 홍해의 상인들은 심해의 마그마가 분출하여 형성된 서고츠산맥(Western Ghats)을 넘어야 신나는 장사와 쇼핑이 가능한 도시로 갈 수 있었다. 이 산맥을 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현무암 돌산을 파서 거대한 석굴을 제작할 수 있는 철제도구 제작기술과 채석 기술이 오랜 거석문화 시대를 거치면서 성숙한 뒤라, 이 지역에 새롭게 전해진 불도(佛道)의 영원성을 염원하는 대형ž소형 불교 석굴들이 산맥 곳곳에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 국제상인들에게 이 석굴들은 위험하고 먼 여정에서 한숨 돌리는 호텔이었고, 사업의 번성을 비는 사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먼 이국의 종교였지만, 불교를 존경하여 많은 기부금을 냈다. 이 시기 불교석굴에는 이집트에서 유행하던 사자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sphinx)가 조각되기도 하였다.

까를레(Karle) 석굴 내부 모습
그리스-로마 상단의 기부자의 이름이 지중해 지역 스타일의 기둥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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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식(Nasik) 석굴에 조각된 스핑크스
당시 불교에 매료된 국제 상인들은 그 지역 문화 요소를 인도아대륙에 전했다.
출처: 저자 제공

인류사 최초의 세계제국이었던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 기원전 550-330년) 시절과 알렉산더 대제(Alexander the Great, 기원전 336-323년)의 동방원정을 거치면서 인도서북부 지역에 페르시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였다. 이들은 갠지스강 하류 지역에서 발흥한 불교에 매료되었었다. 인도의 종교를 받아들인 그들은 금세 그 지역의 지역민이 되었다.

인도아대륙의 생각, 바닷길 동쪽으로 흐르다.

향신료를 둘러싼 대박의 욕망은 지중해에서 인도아대륙을 넘어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국제무역 상단을 여행하게 했다. 이때 서쪽에서 온 상단들에게 팔 새로운 향신료를 찾아나선 인도아대륙 출신 상인들이 많았다. 그런데 새로운 지역에 나아가 대박을 거두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실패가 많은 두려운 일이다. 무역로 상에는 도적과 해적이 적지 않았으며, 다음 목적지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지 않는다면 맹수의 위험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해외 진출 사업에는 보디가드들, 장기적 인프라 구축을 위한 여러 분야의 기술자들과 더불어 교육을 담당하고 안녕과 사업번창을 기원해 줄 종교인들이 필요했다. 이들의 동남아 유입으로 인해 문자, 인문학, 예술, 다양한 물건들이 동남아시아 사회에 영향을 주었지만 동남아 지역민들에게 무엇보다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것은 인도아대륙의 아이디어(idea), 종교였다.

생각의 힘, 그 원천은 다양성의 오랜 경험과 관용

 그리스-로마의 상인들과 동남아시아 지역사회에 크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인도아대륙의 생각, 종교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인도아대륙은 초기인류의 진출 시기부터 갠지스 대평원에서 최초의 제국이 성립하는 시기를 거치면서 유라시아 대륙과 해양 지역과의 문화 연결성이 확대되어 왔다. 이 연결로를 통해 인도아대륙의 사람과 문화가 점진적으로 다른 지역에도 전해졌고 이것이 이후 인도아대륙의 생각들, 즉 종교문화들이 확산하는 데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상이한 환경에서 자란 다양한 지방문화권과 거기에 끊임없이 포개어진 이국의 문화 유입은 인도아대륙 자체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키웠다. 갠지스 대평원에서 철기 시대 기원ž발전한 종교문화가 인도아대륙 내부에 전해지는 과정 그 자체에서 이미 먹거리도 다르고 말도 다른 다양하고 복잡한 지역사회 속에서 이미 산전수전을 겪어왔던 ‘생각의 경험’이 인도아대륙에서 저 멀리 그리스-로마의 상인들과 동남아시아 지역사회에 어필할 수 있었던 매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아대륙의 관용(tolerance)

기원전 4세기경 세계 어느 지역보다 일찍 제국이 성립하고 국가종교가 채택되었지만 다른 종교에 관대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명한 엘로라 석굴 프로젝트는 힌두교 왕국에 의해 후원받았었지만 힌두교 사원들과 함께, 불교, 자인교 석굴 사원들이 가까이 이웃하고 있다. 전통적 부족민들과 그들의 종교도 존중받았다. 농경민들의 추수기 야생 동물의 피해를 감시하기 위해 사냥-채집 부족민들이 고용되어 귀한 곡식들을 보호해주고 곡식들을 얻어갔다. 추수기 들판은 사냥감이 깊은 정글에서 내려오는 때이니 상부상조였던 셈이다. 인도아대륙 제국의 주력 부대는 코끼리가 핵심이었다. 그런데 코끼리는 가축화하기 힘든 거대한 동물이다. 숲에서 길렀다가 어른이 되면 훈련하는(tame) 방식이 현실적이었다. 이 일을 담당한 것도 숲에 사는 전통 부족민들이었다. 원래 코끼리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민의 신이었던 가네샤(Ganesha)는 쉬바신(Shiva)의 아들로 주류 힌두교에 편입되었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국민 신이 되었다. 베다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갠지스 유역에서 만개한 고전 힌두문화가 인도아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갈 때 지역 전통신앙의 포용이 일반적이었다. 부족의 여신들은 주류 신의 아내로 대접받았다. 자간나트(Jagannath)라는 신은 인도 동부 오리사(Orissa)주, 뿌리(Puri) 지역에 연고를 둔 부족의 신이었다가 힌두 3대신에 속하는 비쉬누(Vishnu)와 동격의 신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인도아대륙의 주요 생각인 불교와 힌두교 등은 서로의 생각을 존중했고, 지방문화 및 부족문화도 존중하면서 인도아대륙에서의 오랜 관용의 경험을 가졌었다. 이 관용의 경험은 선사시대부터 점진적으로 확대되어온 유라시아 대륙 및 해양지역과의 연결로를 따라 이국 지역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아,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다. 인도아대륙의 종교 전통들이 이국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강압적인 선교 활동을 수반한 경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유라시아 속 인도아대륙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 현기증이 날 정도로 낯선 인도아대륙의 다양성을 마주한 서구 출신의 연구자들은 인도아대륙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통합ž정비되지 못한 혼란으로 해석하였다. 그 혼란은 무능력의 결과라고 보았다. 인도아대륙은 분열되어 정체된 사회로 묘사되었고, 유라시아 대륙 및 해양 지역과의 교류는 외부로부터의 우월한 문화의 유입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나마 선진문화의 영향에 의해 종종 역동적 상황과 기회가 있었지만 대체로 미래지향적으로 수습하지 못하여 혼란스러운 복잡성이 증가해온 것으로 묘사하였다.

인도아대륙의 복잡성을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인도아대륙은 인종, 언어, 종교 및 계급의 기준으로 분류되었다. 상부상조하며 관용의 경험을 성숙시켜온 인도아대륙의 많은 공동체 사이에 아(我)와 비아(非我)의 구분이 부각되었다.

인도아대륙의 역사는 유라시아 대륙 및 해양지역과 그리고 내부의 다양한 지방문화들간의 연결성을 높여왔으면서도 상생의 방식을 택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과거에도 지금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만은 아니다. 아와 비아의 타협과 상생의 기록이기도 하다.

 

저자소개

김용준(akedmina@naver.com)
한국문화재재단 국제교류팀 연구원이다. 인도 뿌네 데칸대학교 고고학부에서 인도고고학으로 석ž박사를 취득하고, 2017-19년 서울대 고인류 및 고병리학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현재는 미얀마 바간에서 한국-미얀마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고대아시아 인구사 및 고대 아시아 문화교류와 관련된 고고학 연구를 진행 중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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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njamin Valentine. et al. 2015. “Evidence for Patterns of Selective Urban Migration in the Greater Indus Valley (2600-1900 BC): A Lead and Strontium Isotope Mortuary Analysis,” PLoS ONE10(4), e012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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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hanti Pappu. et al. “Early Pleistocene presence of Acheulian hominins in South India,” Science 331, 1596–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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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