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미셸 여를 ‘화교’라 부르는가?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주민은 화교인가 아니면 말레이시아 국민인가? 한국에 양자경으로 알려진 미셸 여의 아카데미상 수상은 동남아시아의 중국계에 대한 한국 사회의 통념이 과연 현실에 부합하는지 질문하게 한다. 말레이시아의 중국계는 자신을 ‘화교’가 아니라 ‘화인’이자 ‘말레이시아인’으로 인식한다. 중국계가 화교로서 다른 종족과 뚜렷이 구분되며, 배타적 사회조직과 독특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고, 다른 종족에 비해 월등한 경제적 능력을 보여준다는 정형화된 시각은 현실에서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이는 식민지 및 독립 국가의 권력구조와 결합하면서 중국계 국민을 이방인으로 차별하는 제도를 낳았으며, 이들이 말레이시아 사회에 적응해 살면서 형성한 문화적 다양성과 혼종성을 무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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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미셸 여
출처: 연합뉴스

최서연(아시아연구소)

2023년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의 미셸 여(Michelle Yeoh)에게 돌아갔다. 세계의 언론은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출신 배우가 이 상을 받았다는 데 주목했다. 그러나 그의 수상 소식만큼 한국 사회를 놀라게 한 것은, <예스 마담(Yes, Madam)>이나 <와호장룡(Crouching Tiger, Hidden Dragon)> 등의 영화를 통해 양자경이라는 홍콩 액션 배우로 알려진 그가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지금도 말레이시아 국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언론은 갑자기 양자경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홍콩이나 중국이 아니라 말레이시아를 들여다봐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문제는 말레이시아 역사와 사회에 대해 한국의 대중은 물론 언론에도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수상 소식을 빠르게 기사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부분 언론은 말레이시아 사회의 구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대신, 한국 사회에서 익숙한 프레임에 기대는 방법을 선택했다. 미셸 여, 아니 양자경이 중국에서 온 조상을 둔 ‘화교’라는 데 주목한 것이다.

 

양자경도 아니고 에블린도 아닌 ‘미셸 여(Michelle Yeo)’

미셸 여의 수상 소식을 다룬 한국의 주요 일간지는 먼저 그를 말레이시아의 ‘화교’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한자 이름의 한국식 발음인 양자경(楊紫瓊)으로 통하는 이 배우의 ‘진짜 이름’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한자의 표준중국어 발음인 ‘양쯔충’과 호키엔(Hokkien, 福建, 복건어) 발음인 ‘여추켕’이 언급된다. 그렇다면 과연 미셸 여는 화교인 배우가 해외 활동을 위해서 만든 영어 이름일 뿐인가?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이제 이 배우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이러한 질문은 그가 홍콩 영화계에 진출하기 전까지 중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은 그가 어렸을 때 중국어를 배우지 못했고, 이를 부끄러워했으며, 이제는 광둥어뿐만 아니라 표준중국어도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1) 또한, 말레이시아에 이주한 중국인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나 주석 광산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아마 미셸 여의 가족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이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억척스럽게 살아간 것처럼 말레이시아에 정착했을 것이라 짐작해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말레이시아 경제는 중국계 화교가 장악하고 있는데, 이는 가난한 노동자로 이주한 화교의 뛰어난 상업적 재능과 높은 교육열 덕분이라는 설명도 공통으로 등장한다.2) 이러한 설명은 과연 미셸 여와 그의 집안이 말레이시아에서 살아온 방식을 제대로 반영하는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포스터와 에블린 역의 미셸 여
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이름에 관한 질문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양자경은 ‘미셸 여’라는 영어 이름도 사용하는 ‘화교’인가? 부계 조상이 중국 푸젠(福建, Fujian) 출신이므로 한자를 호키엔으로 발음한 ‘여추켕(Yeoh Choo Kheng)’이 그의 진짜 이름인가? 화교이기 때문에 미셸 여가 본명이 될 수는 없나? 혼란과 오해는 화교의 일반적 특성이라고 알려진 내용에 맞춰 설명하려 하는 데서 시작된다. 한국의 언론을 통해 재구성된 ‘말레이시아 화교’의 삶은 오래전 이 지역으로 이주해 이곳의 역사를 살아 낸 중국계 말레이시아 국민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 게다가, 중국에서 온 조상의 후손이라고 해서 그들이 말레이시아에서 처한 상황이나 살아가는 방식까지 같을 수는 없다. 말레이시아에서 미셸 여의 집안이 대를 이어 부유한 엘리트로 살아온 방식과, 식민지 시기 고무농장 또는 주석광산의 노동자와 그 후손이 삶을 꾸려나간 방식은, 중국인 또는 화교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을 수 없을 만큼 다르다.

말레이시아의 국민으로서 말레이시아 사회에 뿌리내린 중국계 주민들의 삶이 과연 지금까지도 중국인의 배타적인 사회조직과 독특한 문화에 의해 좌우될까? 그들을 종족성을 공유하며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질적인 공동체로 볼 수 있을까? 화교라는 단어에 담겨있는 동일성에 관한 의문스러운 전제는 말레이시아를 지배했던 영국 식민정부에 의해 그리고 독립 이후에는 국가의 주도권을 잡은 말레이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중국계를 차별하는 근거로 쓰였다. 이런 이유로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주민과 말레이시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화교라는 단어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회피한다.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국민으로서 미셸 여가 살아온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는 언론이 화교라는 개념을 좇느라 미처 주목하지 못한 다양성과 혼종성에 담겨있다. 아카데미 시상식 당일 쿠알라룸푸르에 모여있던 그의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자.3) 그의 어머니 이름은 왜 중국식이 아닌 자넷 여(Janet Yeo)인가? 올해 84세의 어머니는 어떻게 중국어가 아니라 유창한 영어로 인터뷰를 했을까? 당시 영상과 사진에는 서구식 정장 또는 드레스를 입거나, 말레이 전통 복장인 바주꾸룽(baju kurung)을 착용하고 뚜둥(tudung)으로 머리를 가리거나, 역시 전통 복장이면서 몸매가 드러나는 사롱 끄바야(sarong kebaya) 차림을 한 사람들이 보이는데, 왜 중국식 옷을 입은 사람은 없었을까? 그의 어머니는 왜 말레이시아가 딸의 수상을 자랑스러워한다며 말레이어로 말레이시아의 승리(Malaysia Boleh! 말레이시아는 해낼 수 있다!)를 외쳤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미셸 여의 조상이 오래전에 떠나온 중국을 바라보는 대신에, 그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으며 여전히 국민으로서 자격을 유지하는 말레이시아 사회를 들여다봐야 한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관람하던 미셸 여의 어머니 자넷 여(오른쪽 두 번째)와 지인들이 미셸 여의 수상에 기뻐하는 모습
출처: 연합뉴스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엘리트, 그리고 미셸 여

일단 미셸 여의 집안이 말레이시아에 정착해 대대로 살아온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미셸 여는 1962년 말레이시아 페락(Perak)주의 이포(Ipoh)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여쿠안주(Yeoh Khuan Joo)는 중국 푸젠성의 취안저우(泉州, Quanzhou) 출신으로 1899년에 영국령 말라야(말레이시아의 옛 이름)의 이포로 이주해 수입품 상회를 운영했다. 그의 첫째 아들이자 미셸 여의 조부인 여김쿤(Yeoh Ghim Khoon)과 동생들은 가톨릭 라살 형제회(La Salle Brothers)가 설립한 성미카엘 학교(St. Michael’s Institution)에서 영어로 교육받았다.4) 1937년에 영국 식민정부는 지역의 군소 버스회사를 통합해 이포지역운수회사(Ipoh Internal Transport Company)를 세우고, 영어에 능통하며 자동차 사업 경험도 있는 조부에게 대표를 맡겼다.5)

아버지 여키안택(Yeoh Kian Teik)도 조부와 마찬가지로 성미카엘 학교를 졸업한 후 런던의 링컨즈인(Licoln’s Inn) 로스쿨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법조인이자 정치가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할아버지의 운수회사를 이어받아 싱가포르까지 운행하는 스리마주(Sri Maju) 고속버스를 창업했다.6) 아버지가 몸담았던 정당은 중국계 정당인 MCA(Malaysian Chinese Association)로, 말레이시아가 독립한 1957년에 말레이 정당인 UMNO, 인도계 정당인 MIC와 함께 연합 여당인 동맹당(Alliance)을 구성하였다.7) 각 정당의 지지기반은 종족으로 구분됐지만, 핵심 정치인은 대부분 영어로 교육받은 보수적 엘리트로 서구적 문화와 가치를 공통으로 지향했다. 영국은 식민지 사회의 질서유지를 이유로 현지인의 극소수에게만 서구식 영어교육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엘리트 집단은 종족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성향과 이해관계에 비슷한 점이 많았다.8)

조부 세대부터 영어교육을 받은 엘리트 집안에서 성장한 미셸 여는 가정에서도 중국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였다. 그도 집안의 전통을 따라 가톨릭 작은예수회(Holy Infant Jesus) 수녀들이 세운 영어 여학교 메인컨벤트(Main Convent Ipoh)에 입학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재학 당시 학교 분위기가 여전히 영국식 사고방식에 젖어있었으며, 중국계 수녀인 교장 선생님은 영국 상류층의 표준발음(Queen’s English)을 구사했다고 회고했다. 어렸을 적부터 발레를 배우던 그는 15세에 부모와 함께 런던으로 이주해 왕립무용학교에 다녔으나 부상으로 무용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1983년에 미스말레이시아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홍콩 영화계에 진출하게 된다. 말레이어가 국어인 나라에서 태어나 영어로 교육을 받고 영어를 사용하며 성장한 그의 중국어 실력은 할머니가 사용하던 말레이시아식 칸토니즈(광둥어)로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다.9) 홍콩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그는 이전에 사용한 적이 없는 홍콩식 칸토니즈를 새로 배워야 했다.

미셸 여의 조부와 아버지가 졸업한 성미카엘 학교(왼쪽, 1912년 개교)와 미셸 여가 다녔던 메인컨벤트(오른쪽, 1907년 개교). 모두 가톨릭 학교이자 영어 학교였지만, 1970년대 이후에는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두 학교 건물의 중앙에는 십자가와 성자상이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미셸 여의 수상 소식을 다룬 기사는 그가 살아온 방식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연기한 역할, 즉 미국에서 억척같이 일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사업을 일궈나가는 중국인 이민자 에블린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미셸 여의 삶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의 증조부가 말라야의 이포에 정착해 사업을 일으킨 후, 후손들은 영어로 교육을 받고 식민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서구식 문화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특권층의 삶을 누렸다. 1957년 독립과 더불어 말레이시아 정치의 주도권은 ‘토착민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은 말레이인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종족별 엘리트 집단으로 구성된 연립정부는 자신의 특권을 보호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주류사회에 이미 탄탄하게 뿌리내린 중국계 엘리트 또한 새로운 국가의 말레이 지향적 문화 규범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라야(말레이시아)의 상황을 활용해가며 성공하는 과정에서 흔히 중국인 또는 화교와 결부되는 것과는 다른 문화적 실천방식을 획득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의 역사에서 중국계 부유층과 엘리트의 성장은 변화하는 권력구조 및 통치방식과 분리해서 ‘문화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극소수 중국계 엘리트의 사회경제적 성취가 화교의 타고난 기질과 문화적 특성의 결과라고 하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된 노동을 견뎌내야 했던 수많은 중국계 주민에게는 이러한 기질과 문화가 부족했다는 것인가? 소수의 중국계 엘리트가 부와 권력을 누리는 동안에도 대다수의 중국계 주민은 차별과 가난에 시달렸다. 이는 중국인이 자신의 문화적 특질을 발휘해 극복할 수 있는 일시적 상황이 아니라, 식민지 시기에서 독립 이후로 이어지는 권력구조와 통치방식이 초래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의 핵심에는 식민지의 중국인 주민과 독립 국가의 중국계 국민을 ‘화교,’ 즉 중국을 지향하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보는 시각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은 ‘화교’가 아니다

화교(華橋, huaqiao)라는 표현은 중국 바깥에 정착해 살면서도 중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1955년 반둥회의 때까지 민족주의적 담론을 공동으로 채택한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화교, 즉 중국영토 경계의 바깥에 거주하는 중국 국민으로 간주했다. 중국의 혈통주의에 따라 중국 남성의 후손은 중국 국민의 자격을 인정받은 것이다(Nonini, 2015:4). 말레이시아의 경우, 식민지 시기 중국 남부에서 이주해 온 이들이 고향의 관습이나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때는 화교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에 제2차대전이 끝나고 1949년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귀국을 꿈꿀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점령기 이후 돌아온 영국이 밀림에서 활동하는 말라야 공산당 게릴라 토벌을 위해 비상사태(Malayan Emergency, 1948-1960)를 선포하면서 이미 공산화된 중국과의 교류는 전면 차단되었다. 말라야에 정착해서 살아왔으며 고향에는 돌아갈 수도 없게 된 중국계 이민자들은 1957년 독립과 함께 시민권을 인정받아 새로운 국가의 국민이 되었다. 이제 중국계 말레이시아 국민은 자신을 화교로 지칭하지 않으며, 말레이시아의 역사와 사회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화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말레이시아의 인류학자 탄치벵(Tan Chee-Beng)은 오늘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화교라는 명칭을 “거부한다(reject)”고 주장한다(2000:37).

그렇다면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말레이시아 화인(馬來西亞華人 또는 馬華)은 중국인 혈통으로서 말레이시아에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화교 개념과 달리, 이 명칭은 중국 땅으로 돌아갈 가능성이나 중국과의 활발한 왕래 및 교류라는 전제를 포함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인 이민자의 후손이 당연히 조상과 같은 중국식 관습과 문화를 따를 것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일찍이 14세기부터 말라야 서부 해안의 무역항에 정착해 토착화된 방식으로 살아온 퍼라나칸(Peranakan 또는 Baba-Nyonya), 1826년 영국이 건설한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의 서구화된 부유층인 해협 화인(Straits Chinese), 19세기 이후 대규모로 이주해 독자적 상권을 형성한 페낭 화인(庇能儂, Penang Lang) 등의 표현은 화인이 정착 시기와 정착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회를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주민을 언급할 때 ―지역 전문가가 아닌 이상― 구태여 화교와 화인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의 범위를 규정하는 데 있어, 이들을 중국 사회와의 연계성을 유지하면서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사람(화교)으로 간주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 땅에서 건너온 조상의 후손이지만 오랫동안 현지 사회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사람(화인)으로 볼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이미 정착한 사회에 안정적으로 융합되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로 귀향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현재의 거주지가 아니라 조상의 땅에 귀속시키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낳는가?

중국인은 어디서 살더라도 중국적인 사회조직과 생활양식을 유지하면서 귀향을 꿈꾼다는 의미가 담긴 ‘화교’의 개념은 영국 식민정부와 말레이시아 독립 정부의 인종주의적 정책으로 이어져 중국계 주민의 삶을 구속하고 제약했다.

 

중첩된 인종주의: 말레이시아인답지도 중국인답지도 않은 사람들?

2020년 기준으로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국민은 약 3,000만 명으로, 이를 인구조사의 종족 항목에 따라 구분하면 부미푸트라는 약 2,000만, 중국계는 약 700만, 인도계는 약 200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중국과 남아시아 지역에서 대규모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같은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혈통만으로 종족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현실과는 달리 말레이시아에서는 종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랑과 결합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는 분위기였다. 최근 들어 종족 간 결혼의 비율이 빠르게 늘어나 말레이시아의 종족 다양성에 대한 공개적 논의도 활발해졌다. 하지만, 인구조사는 여전히 국민을 말레이를 포함하는 토착민을 의미하는 부미푸트라(bumiputera), 중국계, 인도계의 단순화된 종족 범주로 구분한다. 게다가 토착민인 말레이와 대비하여 중국계와 인도계를 이민자(pendatang, immigrant)로 규정하는 시각은 1970년 이후 토착민 여부에 따라 국민의 권리에 차등을 두는 사회제도로 공고하게 자리 잡았다.10) 부미푸트라는 국가의 정통성 있는 국민이자 천부적으로 영토에 속한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이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은 말레이시아 영토에서 말레이시아 국민으로 태어나고 자랐어도 영원한 이등 국민이자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인구의 종족별 구성비 ⓒDiverseAsia자료: 말레이시아 통계청 2020 인구조사 자료 (https://www.mycensus.gov.my/index.php/media-2/newsletter-infographics/125-newsletter-infographics/343-infografik#galleryad8e7f7c07-7, 검색일 2023.4.15)

이러한 인종주의적 정책의 역사는 영국 식민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민정부는 종족을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혈통과 기질의 문제로 보았고, 현대의 일반적 용례로 종족성(ethnicity)에 해당하는 구분에 인종(race)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말레이는 게으르고, 중국인은 돈만 밝히며, 인도인은 아첨하고 속인다는 것으로 요약되는 혈통과 기질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식민정부는 종족에 따라 다른 직업과 역할을 부여했다(Alatas, 1977:115).

그러나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말레이시아로 이주한 중국인이 모두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지도 않았고, 이주 이후의 경험과 삶의 궤적이 모두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영국은 하급 관료로 일하거나 경제적 협력자가 될 소수에게만 교육의 기회를 허용했고, 대부분 중국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태도로 일관했다. 식민정부에 협조하며 서구식 삶을 누렸던 중국인 엘리트와 농장과 광산에서 일하다 과로와 질병으로 일찍 삶을 마감했던 중국인 노동자가 서로 동질의식을 느낄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영국 식민정부의 공산당 게릴라 토벌 작전이 10년 이상 이어지면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중국에서 중국인을 통해 들어온 것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영국은 독립 국가의 정치적 주도권을 보수적이며 서구화된 친영 말레이 엘리트의 손에 넘겼다. 독립 협상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중국인 이민자의 대부분이 새로운 국가의 국민이 되었지만, 일부 부유층 엘리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난한 중국계 주민은 식민지의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1969년 5월 말레이와 중국계의 유혈 충돌은 사회경제적인 어려움에 불만을 품은 중국계 대중이 선거에서 야당(DAP:Democratic Action Party)에 투표하면서 촉발되었다. 독립 후에도 식민지 엘리트가 정치와 경제 권력을 독점하면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말레이 대중의 분노는 가난한 중국계 대중의 불만과 충돌하였다. 그리고 말레이 엘리트 정치인들은 이 사건을 자신들의 경제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이민자이자 이방인(pendatang)인 중국인이 이 땅의 주인(bumiputera)인 말레이가 누려야 할 것들을 독차지해 부자가 되었으므로, 말레이가 합당한 사회경제적 지위에 오를 때까지 적극적인 우대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농장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삶에 머물러 있거나, 자신의 능력으로 사회경제적 지위를 획득해야 했던 대부분의 중국계 국민은 대학입학, 취업, 주택마련 등 일상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책적인 차별을 겪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말레이 민족주의 세력이 인종주의적 논리, 즉 중국인은 타고난 상인이며 이들의 경제적 탐욕이 말레이를 가난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을 정책으로 제도화하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평범한 중국계 말레이시아 국민이었다(Nonini, 2015). 말레이 우선정책을 완화하면 나라의 주도권을 중국계에게 뺏기게 될 것이라는 논리는 2018년 이후 말레이시아의 정치적 격동상황에서도 민족주의 성향의 말레이 지지자를 확보하려는 정치인들에 의해 여전히 수시로 소환된다.

중국계라는 이유로 자신의 나라에서 차별을 받는 국민이 소위 ‘중화권’으로 불리는 중국, 홍콩, 마카오, 대만에서 온전한 중국인으로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중국계로서 경험하는 차별과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중국, 홍콩, 타이완으로 진학과 취업의 기회를 찾아서 떠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러한 흐름을 ‘중화권 화교’의 귀향으로 볼 수는 없다. 중국은 조상의 고향일지는 몰라도 그들의 고향이 될 수는 없다. 다양한 차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레이시아 사람으로 살아왔으며, 그들의 언어와 생활방식, 경험과 가치관은 중화권 사회가 아닌 말레이시아 사회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중화권 감독의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서 말레이시아의 서구화된 중국계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난 미셸 여가 중화권 화교인 ‘양쯔충’이 될 수는 없는 것처럼. 실제로 미셸 여가 중국어로 연기를 할 때마다, 그의 중국어 구사력은 칸토니즈를 쓰는 홍콩 사람들과 만다린을 사용하는 중국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러나 영어를 쓰는 말레이시아 엘리트인 그가 어렸을 때 중국어를 배우지 않았고 지금도 중국어를 할 때 원어민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니 중국어를 중국인처럼 구사하지 않는 것이 화교로서 “부끄러운” 일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심각한 문제는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국민에게 국내 영화계에서 활동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셸 여가 1983년에 미스 말레이시아에 선발되었을 때 말레이시아 영화계는 홍콩만큼 번성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는 말레이 중심의 영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중국계가 국내 영화계에 진출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홍콩 영화계 진출이 화교로서 당연한 결정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한 대중매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당시에 그는 홍콩식 광둥어를 잘 읽지도 유창하게 구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싱가포르를 기반으로 동남아 영화시장을 공략하던 홍콩의 영화제작사는 중국계 미스 말레이시아를 캐스팅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11) 이미 오래전부터 홍콩 영화사가 동남아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중국어 더빙을 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van der Heide, 2002:142). 하지만 제작진이 미셸 여의 연기에 다른 목소리를 덧씌우지 않기로 하면서 그의 목소리와 독특한 억양은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었다. 중국어 영화 출연을 계기로 유명해진 것은 그가 화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말레이시아 사람임에도 언어의 제약을 넘어설 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중국계) 말레이시아 국민: 중국적 요소의 말레이시아적 변용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의 특성을 역사와 사회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면, 그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화교’라는 범주에 부합하는 중국적 요소를 분리할 것이 아니라, 말레이시아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과 혼종성(hybridity)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조상들이 중국에서부터 따른 관습의 흔적은 그들의 일상생활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관습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식과 의미는 말레이시아에서 역사와 사회의 흐름을 살아내면서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했다. 인구조사가 같은 ‘중국계’로 분류하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삶에서 ‘중국적인 것’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은 이주 시기, 교육 배경, 직업, 거주지 등의 변수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서구화된 엘리트 화인의 생활양식과 중국계 밀집 지역에 사는 저소득층 화인의 생활양식에서 중국과 관련된 공통점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이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면서 만들어낸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적 조합은 어디까지나 말레이시아 사회에서 형성된 말레이시아의 문화이다.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고 해서, 또는 관습의 외형이 중국의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를 중국과 ‘중화권’에 귀속시킬 수는 없다.

언어의 예를 살펴보자.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만다린으로 불리는 표준중국어를 구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조상의 출신지역 언어가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언어의 토착화와 혼종성은 오랜 이주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들어와 초기에 정착한 퍼라나칸(Peranakan)은 말레이어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호키엔 어휘를 혼합한 바바 말레이어(Baba Malay)를 사용하였으며, 19세기에 페낭 지역으로 이주한 중국인은 호키엔의 기본틀에 말레이 어휘를 널리 차용한 페낭 호키엔(Penang Hokkien)을 공용어로 사용했다(강희정, 2019:124; Nonini, 2015:3)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중국계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중국어는 칸토니즈와 호키엔이다. 표준중국어는 중국어 학교나 교육과정에 중국어가 포함된 학교에서 배울 수 있지만, 그 외의 중국어는 가족, 지인, 지역 주민과의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익히게 된다. 따라서 같은 언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발음, 억양, 어휘 등이 상당히 다르다. 다른 사람의 중국어를 대략 이해해도 스스로 유창하게 구사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과거에는 중국계 주민을 출신 지역과 방언 집단에 따라 구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대가 내려오면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구사하는 언어의 조합은 점점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조상의 출신 지역과 언어를 기준으로 분류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분류의 필요성과 의미도 퇴색했다(Tan, 2000:44). 누군가가 쿠알라룸푸르 칸토니즈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의 조상이 광둥에서 온 것은 아니며, 중국 성씨를 호키엔으로 발음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태어나 처음으로 배운 언어가 호키엔인 것도 아니다. 게다가 한 사람이 하나의 중국어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각 언어에 따라 하나의 억양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주로 영어와 말레이어만 사용하는 중국계도 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구분은 한없이 복잡해진다. 중국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더라도 국가 공용어이자 공교육 및 학력인증 시험의 언어인 말레이어는 반드시 배워야 하며, 만약 도시에 거주한다면 사실상의 공용어인 영어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말레이시아에서 자란 사람이 중국인 조상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만다린을 해야 한다거나, 부모가 각각 호키엔과 칸토니즈 혈통이므로 부모의 언어를 구사할 것이라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모국어(native language) 개념에 담긴 민족주의적 편견과는 달리, 언어, 혈통, 지역, 국가는 단순한 대응 관계를 맺지 않는다. 중국 특정 지역 언어와의 연계성이나 화교의 모국어 사용 문제에 초점을 두어서는 말레이시아 중국계가 사용하는 언어의 다양성과 혼종성을 설명할 수 없다. 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레이시아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독특한 언어적 지형에 주목해야 한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버려야 보이는 것들

서구의 언론과 학계에서는 중국계 이주자와 그 후손을 ‘화교’로 지칭하면서 이들을 현지 사회의 영구적 구성원이 아니라 이주자나 체류자로 간주하는 시각이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Nonini, 2015:4). 미셸 여의 아카데미상 수상을 계기로 언론이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국민을 조명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한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들을 화교로 부를 것인지, 화인으로 부를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말레이시아인이라 부를 것인지는 단순한 용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화교라는 단어에 덧씌워진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는 그들이 특정한 환경에서 살아온 역사 그리고 계급, 지역, 성별 등에 따른 경험의 다양성을 소위 타고난 중국인의 특성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동남아시아에서도 화교는 당연히 중화권의 특색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그동안 중국인의 후손이 말레이시아 및 다른 동남아 지역에 정착해 살아가면서 여러 세대에 걸쳐 애써 형성해 온 역사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권력구조 및 사회제도와 결합하는 경우 현실의 삶에 직접적인 위협을 초래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들을 ‘화교’로 지칭하면서 중국과의 연계성과 중국인으로서의 문화적 특징을 부각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관행적 담론이며, 따라서 쉽게 용인할 수 없는 오류이다.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주민들이 현지의 역사와 사회를 살아오면서 빚어낸 혼종성과 다양성은, 화교라는 단어에 따라오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함의를 버릴 때 비로소 우리에게 다채롭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저자소개

최서연(seoyeonc1@gmail.com)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 학사와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석사를 마치고 버지니아대학교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논문에서는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말레이시아의 교육제도가 계급, 종족, 성별에 따른 구분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연구했다.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서 동남아시아의 역사 및 현대사회에 대해 가르쳤으며,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의 여성, 노동, 환경, 대중문화에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레이세계로 간 한국 기업들』, 『오늘을 넘는 아시아 여성』 (공저) 등이 있다.

 


1) 이후 본문에서는 말레이시아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중국어를 만다린, 칸토니즈, 호키엔으로 지칭한다. 한국에서는 각각 표준중국어, 광둥어, 복건어(또는 민어)로 통용되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사용되는 만다린, 칸토니즈, 호키엔은 오늘날 중국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

2) 세계일보 23/03/18, 세계일보 23/04/04, PD저널 23/03/15의 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화교’에 관한 정형화된 설명방식은 한국언론뿐만 아니라 서구 학계에서도 자주 등장한다(Nonini, 2015). 이는 비서구 사회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유행했던 국민성(민족성) 연구가 여전히 영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Alatas, 1977).

3) CNA News 23/03/13. (https://www.youtube.com/watch?v=SkvvDJv2DAE),
NST TV 23/03/13. (https://www.youtube.com/watch?v=gCSLo_Xlrds&t=10s)

4) 조부의 동생인 여김셍(Yeo Ghim Seng)은 성미카엘 학교와 페낭 프리스쿨(Penang Free School)을 거쳐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한 외과의사였다. 이후 그는 싱가포르에 정착해 의사로 활동하였고, 1970년부터 1989년까지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의원이자 의회 의장을 지냈다.

5) Ipoh Echo 19/10/01.

6) Ipoh Echo 10/07/01.

7) 연립 여당은 1973년에 국민전선(Barisan Nasional)으로 개편되었다. 미셸 여의 아버지는 1959년에서 1965년까지 말레이시아 의회 의원이었다.

8) 말레이시아의 서구화된 화인의 다양한 사례는 『아편과 깡통의 궁전』(강희정, 2016)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탄 트완 엥의 장편소설 『해 질 무렵 안개 정원』에서는 서구화된 중국계 엘리트인 주인공과 가난한 중국계 노동자 출신 주변 인물 사이의 사회문화적 격차와 거리감이 잘 드러난다.

9) Financial Times 23/03/03.

10) 실제로 말레이인으로 분류되는 국민이 모두 토착민은 아니다. 여기에는 말레이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으로서 현재 말레이시아가 아닌 주변 지역에서 오래전에 이주해 온 사람들도 포함된다.

11) Hollywood Reporter 22/03/15.

 


참고문헌

  • 강희정. 2016. 『아편과 깡통의 궁전: 동남아의 근대와 페낭 화교사회』. 서울: 푸른역사.
  • 박정욱. 2023. “오스카 여우주연상 양자경의 긴 여정.” PD저널 (3월 15일).
  • 박종현. 2023. “양자경 수상에 말레이시아가 들썩인 이유?” 세계일보 (3월 18일).
  • 채인택. 2023. “양자경?양쯔충?여추껑?…오스카 품은 이 배우, 뭐라 불러야 할까.” 중앙일보 (4월 4일).
  • 탄 트완 엥. 2016. 『해 질 무렵 안개 정원』. 공경희 옮김. 서울: 자음과 모음. (원서: Tan Twan Eng. 2013(2012). The Garden of Evening Mists. Edindurgh: Canongate Books.)
  • Alatas, Syed Hussein. 1977. The Myth of the Lazy Native. London: Frank Cass.
  • Anderson, Ian. 2019. “Nostalgia: Yeoh Ghim Khoon, Transport Entrepreneur.” Ipoh Echo (10월 1일).
  • Chan-Koppen, See Foon. 2010. “Dato’ Yeoh Kian Teik-Legal Stalwart and Transport Mogul.” Ipoh Echo (7월 1일).
  • Kuper, Simon. 2023. “Michelle Yeoh:‘Finally we are being seen.’” Financial Times (3월 3일).
  • Nonini, Donald M. 2015. “Getting By”: Class and State Formation among Chinese in Malaysia.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 Sun, Rebecca. 2022. “Michlle Yeoh Finally Loses Her Cool: What Have I Got to Lose?” The Hollywood Reporter (3월 15일). https://www.hollywoodreporter.com/feature/michelle-yeoh-interview-everything-everywhere-all-at-once-1235111436/ (검색일 2023.5.2)
  • Tan Chee-Beng. 2000. “Socio-cultural Diversities and Identities.” The Chinese in Malaysia, Edited by Lee Kam Hing and Tan Chee-Beng. Shah Alam: Oxford University Press.
  • van der Heide. 2002. Malaysian Cinema, Asian Film: Border Crossings and National Cultures. Amsterdam: Amsterdam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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