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힝야 (Rohingya),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들

대다수 국민이 불교도인 미얀마에서 이슬람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로힝야족은 오랜 시간 동안 구조적 차별과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왔다. 안타깝게도, 국제사회의 무관심과 미얀마 정부의 무책임 속에 감춰져 있던 그들의 힘든 삶은 2017년 8월 미얀마 서부 해안지역 라카인(Rakhine) 주에서 발생한 끔찍한 대학살 사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발생한 70만 명이 넘는 피난 행렬, 피난 과정에서 발생한 죽음, 난민캠프의 열악한 환경 등이 글로벌 뉴스채널을 통해 보도되면서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미얀마 인권 운동의 상징이기도 한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 국가자문의 로힝야 학살에 대한 침묵과 이후 이어진 부정(denial) 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으며, 다양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글은 오랜 시간 이어진 복잡하고 난해한 미얀마와 로힝야 간의 갈등과 분쟁에 대한 몇 가지 유의미한 설명과 해석을 공유함으로써, 로힝야족이 겪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살펴보고, 가능한 해결책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던지려는 의도로 쓰였다. 이를 위해 ‘로힝야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전달하고자 노력했으며, 따라서 많은 내용들이 ‘로힝야의 과거’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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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희(유엔난민기구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지역사무소)

에필로그, 2022년 11월 24일, 12:50 pm, KRC.

‘점심 시간이 되어 가네. 얼른 집에 가서 점심 준비해야 하는데, 이 회의는 왜 아직도 끝나지 않는 거지? 도대체 5년이 넘도록 같은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무엇 하나 나아지지도 않는 것 같아. 왜 이런 회의를 하는 거야… 그러나 저러나, 오늘 점심은 또 뭘로 만들지? 이미 배급 받은 식품도 떨어졌고 돈도 없는데 휴…’

이 곳에서 일한 지 1년이 훌쩍 넘은 시간, 언제부터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 이제는 회의에 참석 중인 로힝야 난민의 표정 변화만 봐도 그들의 마음이 읽히는 듯 하다. 물론 내 착각이지만. 보통 우리 팀과 파트너 기관을 통해 한달에 한 번씩 2시간 정도 진행되는 ‘지역주민과의 대화’에 참석하면 무거운 마음을 감추기가 어렵다. ‘대화’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어색할 정도로 대부분 회의 시간은 참석한 난민의 고충을 듣는 시간으로 금방 변해버리는데, 난민들과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우리 팀의 특성 상 그들의 답답하고 복잡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에 딱히 막을 이유도 없다.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놀랍게도 지난 1년 동안, 아니 아마도 지난 5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민캠프의 열악한 환경, 비위생적인 물 관리, 부족한 의료시설과 학교, 끊임없이 발생하는 범죄들, 여전히 진행 중인 조혼과 터무니없이 부족한 쌀과 보급품 등. 하지만 무엇보다도, 언제 고국 미얀마로 돌아갈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그들의 일상을 더욱 팍팍하고 힘들게 하고 있다.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리한 내용들을 다시한번 살핀다. 두통이 심하게 오고 미리 준비한 진통제를 먹는다.

 

탄압받는 소수민족, 로힝야

로힝야족은 왜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일까? 이제 그들의 현재와 과거를 되짚어 본다.

로힝야는 순니파 무슬림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 세계 약 35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그 중 약 100만 명 정도가 2017년 1월 기준, 미얀마 서부 해안지역인 라카인 주에 거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1430년경 아라칸(Arakan) 왕국(현재의 미얀마 라카인 주를 포함한 서부해안지역)으로 이주한 아랍상인의 후손이고, 1784년 해당지역이 버마 제국(Burmese Empire)에 점령당하기 전부터 그곳에 거주하였음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 주장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반면 미얀마 정부는 이들을 19세기와 20세기 초 영국 식민통치 당시 벵갈지역(현재 인도 및 방글라데시 일부 지역)에서 불법 이주해 온 무슬림 노동자로 보고 있다.

실제로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1948년 이후에도 정부는 이들을 아라칸 왕국의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마침내 1982년 시민법(Citizenship law) 제정을 통해 영국과 버마(현재의 미얀마) 간 전쟁 전 현재의 영토에 정착한 사람들 만을 자국민으로 인정함으로써, 대부분의 로힝야족을 ‘공식적인’ 불법 이민자로 규정했다. 현재 미얀마 내 135개 소수민족 중 유일하게 국적을 부여 받지 못한 소수민족이다.

 

로힝야족이 미얀마를 떠나는 이유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어떠한 서류도 없기 때문에, 시민권을 부여 받지 못한 대부분의 로힝야족은 ‘무국적자’와 다를 바 없다. 국적을 인정받음으로써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교육, 선거참여, 의료보험, 직업선택과 같은 권리를 갖지 못하고, 오히려 결혼, 가족계획, 고용, 종교선택 및 이동의 자유 등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라카인 주의 마웅다우(Maundaw)와 부디아웅(Buthidaung) 북부지역에 거주하는 로힝야족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부관계자의 승인을 얻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깨끗하게 면도를 마친 신랑의 얼굴 사진과 히잡을 쓰지 않는 신부의 사진을 제출해야 한다. 이는 그들이 공유하는 무슬림 문화에 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자녀는 최대 2명까지 허용되었으며, 새집으로 이사 가거나 다른 마을을 방문하기 위해서도 정부관계자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라카인 주는 미얀마 안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거주민의 78% 가 빈곤위기에 처한 인구로 조사될 만큼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으며, 부족한 사회간접시설, 제한된 취업 기회 등은 다양한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무국적자인 로힝야족은 다양한 사회안정망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기본적인 안전마저 보장받을 수 없다. 사실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족에 대한 이러한 차별과 폭력은 앞서 언급한 1982년 시민법 제정 훨씬 전부터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네윈 장군이 이끄는 미얀마 군부는 1962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고 이후 로힝야족에 대한 본격적인 무력 탄압을 조직적으로 해 왔다. 예를 들어, 1978년 ‘킹 드래곤 작전(Operation King Dragon)’은 인구 총조사를 앞두고 ‘외국인’을 추방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로힝야족이 거주하는 라카인 북부에서 살인, 강간, 위협 등을 통해 3개월 동안 약2만 명 이상의 피난민을 발생시켰고, 이후 1991년과 1992년에 걸쳐 진행된 ‘깨끗하고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 작전(Operation Clean and Beautiful Nation)’ 또한 로힝야족을 대상으로 한 무력 개입으로 수십 만의 난민을 추가로 발생시켰다.

미얀마 정부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탄압에 대처하기 위해 로힝야족 일부는 무력 저항을 택했다. 2017년 8월 25일, ‘아라칸 로힝야 구세군(Arakan Rohingya Salvation Army: ARSA)’으로 알려진 무력 단체가 라카인 주 북부의 경찰 초서 30곳 이상을 공격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얀마 정부는 즉각 ARSA를 테러 단체로 지정하여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치는데, 그 과정에서 적어도 6,700명 이상의 로힝야족이 사망하였고, 대다수의 집이 불타 사라졌다. 당시 현장에서 인도적 지원활동을 펼쳤던 ‘국경없는 의사회(Médecins Sans Frontières: MSF)’ 소속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얀마 군은 피난 중인 로힝야족을 향해서도 총을 난사했으며, 피난길 곳곳에 지뢰를 심기도 했다(MSF, 2017/12/15). 당시 미얀마 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탈출을 시도한 로힝야족 수는 723,000명 이상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라카인 주에 거주했던 전체 로힝야족 인구의 70%를 웃도는 수치이다. 대다수의 피난민이 향한 곳은 미얀마 접경 국가인 방글라데시를 포함하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이다. 육로와 수로를 통해 피난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가장 많은 피난민이 거주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서는 열악한 환경과 기후, 부족한 자원, 국제 사회의 지원 및 관심 감소 등의 이유로 인해 난민이 된 로힝야족의 삶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미얀마가 로힝야족을 이토록 탄압하고 있는 이유

여러 전문가들의 다양한 분석과 설명 중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는 그 원인을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서 찾는 것이다. 영국의 동방항로 진출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당시 산업혁명으로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 영국은 인도 및 동남아시아 진출을 통해 대량의 천연자원 확보를 위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렸다. 당시 영국이 본 버마는 에야와디 강 유역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벼농사가 가능하여 높은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인구가 많은 주변 국가인 인도와 중국을 포함하여 상품 작물을 생산하느라 식량 자원이 부족해진 역내 동남아 국가들에 쌀을 수출할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이 조성된 곳이기도 하였다. 문제는 부족한 인력이었다. 당시 미얀마를 비롯한 많은 동남아 국가들은 넓은 땅과 풍부한 자원에 비해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생산성 증대를 위한 노동력 확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18세기 후반 인도에서의 지배권을 확보한 영국은 19세기 바다를 통해서는 싱가포르 섬과 술탄들이 다스리던 말레이 반도로, 육로로는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인 꼰바웅 왕조가 다스리던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는데, 이 때 영국 지배하에 있던 인도인들 역시 군인, 상인, 노동자, 관료 등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 진출했다. 당시 꼰바웅 왕조가 다스리던 아라칸 지역(현재의 라카인 주)은 지리적으로 벵골만에 위치하고 있어 과거부터 불교를 믿는 버마족과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 및 벵골민들이 함께 혼거하던 지역이었는데, 1824년부터 1887년까지 총 세 차례에 걸친 인도 제국(영국령 인도)과의 전쟁에서 지면서 왕국은 완전히 패망하게 된다. 아라칸 지역은 1824년 인도제국과의 1차 전쟁 때 이미 인도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당시 인도 제국은 아라칸 지역에서의 벼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한편, 공동체 의식과 호전성이 강한 버마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인근의 로힝야 무슬림을 버마로 대거 이주시킴으로써 비극의 씨앗을 남겼다. 한편, 인도 남부 타밀 지역의 카스트 계급 가운데 주로 돈을 다루는 체티아르 계급의 상인들 역시 이 무리 중 하나였는데, 버마로 이주한 이들의 주요 기능은 고리대금업 이었다. 이들은 양곤과 같은 도시 지역에서는 중국계 이주민들이나 현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수익을 통해 자본을 늘려 감과 동시에, 농촌 지역에서는 토지를 담보로 돈을 빌려줌으로써 돈을 제때 갚지 못하는 경우 토지를 몰수해 현지에서 지주가 되기도 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당시 체티아르 상인의 이율이 다른 현지인이나 중국계 상인보다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영국인의 대리 착취자로 여겨져 버마인들에게 더욱 깊은 반감을 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이 본토 방어를 위해 병력을 이동시킨 사이 일본은 미얀마인과 손을 잡고 미얀마를 탈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은 로힝야족을 쫓아내고 그들이 점거하던 농장을 해체하여 미얀마인들에게 돌려주게 된다. 하지만 영국은 쫓겨난 로힝야족을 재무장하여 대일항전에 이용하는데, 이로 인해1942년 발생한 ‘아라칸 대학살 사건’에서 로힝야족은 일본군이 아니라, 아라칸 지역에 거주하며 농토를 돌려받았던 약 2만여 명의 미얀마인들을 무참히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불교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로힝야족은 대다수가 불교도인 미얀마인들의 원한을 사게 된다.

1948년 미얀마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영국이 조건으로 내 걸었던 로힝야족의 처우 개선이 받아들여져 정부와 의회 다수 요직에 로힝야족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오히려 미얀마인들에 더 큰 반감을 사게 되는데, 이 맥락에서 1962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네윈 장군은 로힝야족을 방글라데시와 인접한 라카인 주 일대로 강제 이주 시키고 1982년 시민법을 통해 국적을 박탈하는 등 로힝야 지우기에 앞장서게 된다.

 

로힝야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

2017년 8월 미얀마 라카인 주에서 발생한 학살은 국제사회의 즉각적인 관심을 끌었고, 유엔은 이 사태를 ‘인종 청소의 교과서적인 예시’로 표현하며 미얀마 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다(UN, 2017) . 이후 미국, 러시아, 독일, 중국 등 50개가 넘는 국가에서 공식 성명을 통해 미얀마 정부를 압박했으며, 로힝야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거나 국제사회의 지원을 독려했다. 특히 2016년 선거를 통해 국가 고문으로 추대되어 사실상 정권을 잡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는 2017년 9월 성명을 통해 미얀마 정부가 라카인 주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하였지만, 이후 유엔인권 특별보고관의 미얀마 내 활동을 승인하지 않아 그 이중성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19년 11월에는 감비아가 57개국으로 구성된 이슬람협력기구(Organization of Islamic Cooperation)를 대표하여 미얀마를 일명 유엔제노사이드협약(UN Genocide Convention) 위반으로 ICJ(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말 아웅산 수치는 ICJ에 출석하여 대량학살(genocide)에 대한 혐의를 부인하였고, 만약 미얀마군에 의해서 전쟁 범죄가 발생한 사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미얀마 군법에 의해서 다루어질 것이며, ICJ는 사법권이 없다고 주장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이와 관련해서는 2022년 7월 ICJ가 미얀마 정부의 이의 제기를 기각한 바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 족 탄압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기에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도 2017년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개별 국가 차원으로 본다면, 미국, 호주, 캐나다와 같은 나라들은 미얀마 정부 혹은 군부 지도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형태의 제재(sanction)를 가하고 있으며, 노르웨이, 한국 등 소위 ‘도너(donor)’ 국가들은 미얀마를 대상으로 하는 공적 원조를 즉각 중단했다. 세계적 인권단체인 휴먼라이트와치(Human Rights Watch: HRW) 나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 AI) 은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인권 침해 문제를 지속적으로 국제 사회에 제기하며 미얀마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다.

ICJ(국제사법재판소) 재판에 출석한 아웅산 수치
출처: 헬로아카이브

로힝야족이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인근 국가인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으로 탈출을 시도하면서, 로힝야 문제는 더 이상 미얀마 내에서만 벌어지는 국내 정치 현안으로 한정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난민이 된 로힝야에 대한 개별 국가의 대응 방식은 국내 정치 및 외교 문제와 무관할 수 없게 되었다. 미얀마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로힝야 난민이 탈출하여 정착하게 된 국가들은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속해 있어, 이 문제를 지역 간 협력기구 차원에서 논의하기도 했으나, 회원국의 국내문제 불간섭이라는 ASEAN의 주요 원칙 때문에 동 문제 해결을 위한 의미 있는 개입을 하는 것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Aljazeera, 2020/10/20). 또한 ASEAN의 많은 국가들이 난민 협약 및 선택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 문제의 개선을 위해 고려할 점을 시사한다.

 

2022 현재의 로힝야, 여전히 끝나지 않는 여정                                             

놀랍게도, 2017년 8월에 시작된 로힝야족의 미얀마 탈출 여정은 5년이 지난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당시 미얀마군의 조직적 학살을 피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야만 했던70만이 넘는 피난민은 그들보다 훨씬 이전에 방글라데시에 넘어온 후 난민캠프에 살고 있던 이들과 합세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려 100만 명이 넘는 로힝야족이 세계에서 가장 혼잡하고, 가장 큰 캠프에 살고 있는 실정이다. 캠프의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지원에 대해서는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실제 캠프에서 거주하는 난민의 삶은 예상을 훨씬 뛰어 넘을 정도로 열악하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허가 없이 국경을 넘었던 로힝야족을 받아들이고 임시 거주를 허락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강제로 추방된 미얀마 국적인(Forcibly Displaced Myanmar National: FDMN)’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난민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늘어나는 로힝야 난민 수 만큼이나 기존의 원주민(host community)과의 갈등도 증가하면서, 국제 사회의 지원도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라 방글라데시 정부의 부담이 크게 증가한 것도 사실이다.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어린이들이 배식을 기다리고 있다
출처: 헬로 아카이브

한편 미얀마는 국내 정치 상황이 여전히 불안하다. 특히 로힝야 학살에 직접 관계가 있다고 알려진 군부가 2021년 2월 또다시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으면서, 로힝야 문제의 신속한 해결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영국은 2021년 로힝야족 지원을 위한 예산을 2020년에 비해 42% 이상을 삭감했으며, 이는 2019년 지원예산의 ¼ 에도 미치지 못했다.

2022년 현재에도, 미얀마 라카인 주에 남아있는 로힝야족은 아라칸군, 미얀마 정부군, 아라칸 로힝야 구세군 간의 끊임없는 무력 충돌 속에서 강제로 납치되어 고문당하거나, 체포 및 구금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심각하고 중대한 인권 침해가 발생하고 있다. 오직 안전을 쫓아 강제로 집을 떠나야만 했던 100만이 넘는 로힝야족은 여전히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정처없이 떠밀려 다니고 있다.

 

저자소개

김광희(kindkwanghee@gmail.com)
유엔난민기구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지역사무소에서 장애통합전문가(Disability Inclusion Specialist)로 근무 중이다.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Humanitarian Intervention in Complex Emergencies: Successful Conditions for Effective Humanitarian Intervention” 및 코스타리카 소재 유엔평화대학원에서 “The Mindanao Conflict Revisited”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시민사회, 정부기관, 국제기구 등에서 활동하며 기고하고 있다.

 


참고문헌

  • Aljazeera. 2020. “Myanmar’s Rohingya crisis exposes ASEAN weaknesses: Report” https://www.aljazeera.com/news/2020/10/20/myanmars-rohingya-crisis-exposes-asean-weaknesses-report (검색일: 2022. 11. 1).
  • Médecins Sans Frontières. 2017. “MSF surveys estimate that at least 6,700 Rohingya were killed during the attacks in Myanmar” https://www.msf.org/myanmarbangladesh-msf-surveys-estimate-least-6700-rohingya-were-killed-during-attacks-myanmar (검색일: 2022. 10. 17).
  • Human Rights Watch. 2013. “Burma: Revoke ‘Two-Child Policy’ For Rohingya” https://www.hrw.org/news/2013/05/28/burma-revoke-two-child-policy-rohingya (검색일: 2022. 10. 15).
  • United Nations. 2017. “UN human rights chief points to ‘textbook example of ethnic cleansing’ in Myanmar” https://news.un.org/en/story/2017/09/564622-un-human-rights-chief-points-textbook-example-ethnic-cleansing-myanmar (검색일: 202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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