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구(한국국방연구원)
들어가며
한반도 비핵화의 개념에 대한 북한과 미국의 입장 차는 북미협상의 진행에 영향을 주는 주요한 요소로 여겨지고 있다. 비핵화 합의를 추진하던 양측은 그와 관련해 현저한 입장 차를 드러냈던 것이다. 미국과 국제사회는 NPT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반하여 핵개발을 감행한 북한의 핵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하는 것을 한반도 비핵화로 보고 있으나, 북한은 핵개발의 원인을 미국의 적대정책에 돌리고 미국의 핵위협이 공동으로 해소되어야 한반도 비핵화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비핵화 협상의 재개를 추진하던 2018년 12월 말에도 부각되었다.1)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기 며칠 전인 2018년 12월 20일경 노동신문은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를 북한 비핵화로만 이해하는 것은 “그릇된 인식”이라고 주장했었다. 2019년 초 재개된 북미대화에서 북한은 우선 부분적 비핵화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보이나, 그에 대한 논의 역시 완전한 비핵화를 둘러싼 개념 차이라는 문제에 부딪혔다.
북한의 비핵화 주장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형성과 전개과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 비핵지대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때는 1954년이었다. 그해 11월에 개최된 “아세아 제국 회의”에서 북한 대표였던 박정애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평화지대 구축을 주장했다(구갑우, 2014). 거의 같은 시기에 개최되었던 스톡홀름 세계평화이사회(1954. 11. 18~23)에서 아시아의 핵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된 “평화지대”의 확대를 박정애는 아시아에 즉각 적용했던 것이다(노동신문 54/12/07).2) 이처럼 북한이 평화지대의 창설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전후복구 시기의 현실, 오랜 전쟁과 많은 희생 끝에 국제문제에 대하여 비군사적 해법을 선호하는 북한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태도가 정책화된 것은 북한이 편승할 수 있는 소련과 중국의 외교정책 여건이 등장한 1950년대 후반이었다. 이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보여진 북한 비핵지대 운동의 전개를 파악함으로써, 북한의 한반도비핵지대 주장이 가진 전략적 성격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냉전 초기 북한의 비핵지대 운동: 미국의 핵무기 배치를 막기 위한 아태 비핵지대
북한이 본격적으로 비핵지대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배치가 개시된 시기이다.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 전략을 구체화해가고 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4년 대만해협 1차 위기로 아시아 핵무기 배치를 현실화해갔다. 미국은 대만해협 1차 위기 시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한반도로의 핵무기 반입을 검토했으며, 1955년 초 미 합참의장은 한반도 긴장 고조를 억제하기 위한 핵사용 준비 필요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1958년 초에는 주한미군도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1957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반도에 대한 핵무기 배치를 재가하자, 이듬해 1월부터 핵지뢰, 라크로스 미사일, 어니스트 존 미사일, 280mm 원자포 등이 한반도에 도입되었다. 동시에 주한미군 7사단도 팬토믹 사단으로 개편되어 관련 훈련을 진행했다.
그에 대한 소련의 대응은 미국의 핵무기 배치에 반대하기 위해 아시아 지역에 대해서도 극동·태평양 비핵지대를 설치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앞서 대만해협 1차 위기에 대해서도 소련에 가까운 평화운동진영은 스톡홀름 세계평화이사회(1954. 11. 18~23)에서 아시아의 핵문제에 대한 한 해법으로 아시아 내 평화지대의 확대를 제안했었다(노동신문 54/12/07).3) 1950년대 말 흐루쇼프 소련 지도부는 평화공존의 기조에 따라 비핵지대 창설 요구를 공식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중유럽 비핵무기지대 설치방안(1956), 태평양 비핵지대 창설방안(1957)을 제안한 소련은 아시아 비핵지대 설치방안도 모색하고 있었다. 중국도 이러한 소련 측의 주장에 동조하여 아시아 비핵지대(亚洲无核区) 설치방안을 지지한다는 공식적 입장을 1958년 2월 모스크바에 전달했다. 나아가 소련의 흐루쇼프 지도부는 1959년 제21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극동과 태평양 전 지역에 평화지대, 우선 원자무기 없는 지대를 창설할 수 있으며 또 창설할 필요가 있다”면서 극동·태평양 지역에 대한 비핵지대 설치방안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기에 이르렀다(노동신문 59/02/03).
북한은 사회주의 강대국들이 제시하는 비핵지대 창설 운동을 지지했다. 노동신문은 1958년 3월 11일에 “아세아는 핵 및 로케트 무기가 없는 평화지대로 되어야 한다.” 제목의 타스통신 성명을 전재(全載)하고, 미국 핵무기의 아시아 지역 배치에 따른 “파멸적 전쟁의 위험성”을 막기 위해서는 아시아에 “핵 및 로케트 무기가 없는 평화지대”를 설치해야 한다는 소련 측 주장을 함께 선전했다(노동신문 58/03/11). 제21차 소련공산당 대회 이후인 1959년 4월에는 북한 정부의 명의로 아시아에 “평화지대”를 창설하자는 제안까지 제시했다(노동신문 10/04/22). 소련의 극동·태평양 비핵지대 설치 방안에 대해 미국은 “거절할 하등의 구실도 없다.”면서, 소련 측의 방안은 “조선의 평화적 통일 촉진에도 유리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던 것이다.
중소분쟁이 표면화되는 과정에서도 북한은 중국의 주장으로서 아시아태평양 비핵지대 창설 제안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961년 9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김일성 수상은 “우리는 아세아와 태평양 지역 국가들 간에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며 이 지역을 핵무기 없는 지대로 전변시킬 데 대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제의를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는 의미이다. 이때는 북한이 소련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실망하게 되는 쿠바위기(1961. 10)가 아직 발생하기 전이지만, 북한은 소련의 평화공존 노선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 까닭에 중소 양국이 모두 정당하게 보는 비핵지대 창설 방안을 지지하면서도, 중국의 아태 비핵지대 창설 제의를 지지한다고 밝힌 것이다. 비록 1961년 12월 북한은 경제·국방 병진노선을 천명하고 군사적 수단 중심의 대외전략을 추구해갔지만, 이러한 아시아태평양 비핵지대 창설 입장을 일본 내 반일운동 세력과의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 1960년대 중반까지도 견지했다(노동신문 64/05/04). 1960년대 중반 한일수교 동향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일본 내 사회주의 세력의 협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핵지대 운동의 조건과 특성은 냉전기적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초강대국 위주의 국제정치와 북한의 독자적인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북한의 아태 비핵지대 운동에 대한 동참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1950년대 북한은 경제재건을 위해 소련의 지원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전후복구를 마무리 지어가는 1960년대 초에도 북한은 생존을 위해 중국과 소련의 안보공약에 기대고 있었다. 북한은 중소분쟁을 이용하여 1961년 6월에 북소동맹조약과 북중동맹조약을 동시에 체결했다. 이후 북한은 중국의 첫 핵실험이 이루어진 1960년대 중반까지도 중국으로부터의 핵기술 이전을 기대했다. 이처럼 신생체제로서 의존할 강대국이 필요한 현실은 북한이 중, 소 양국의 외교적 이니셔티브에 편승하는 모습으로 광역의 비핵지대 창설을 1950~1960년대에 주장하는 데에도 반영되었다. 북한의 비핵지대 운동은 소련과 중국의 대미외교에 편승한 것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냉전 후기 북한의 비핵지대 운동: 미국 핵위협 해소의 한반도 비핵지대화
1970년대 중반은 팀스피리트 훈련이 개시됨에 따라 북한 입장에서는 핵문제가 확대된 시기였다. 당시 미국은 남핵문제 해결을 위해 대한(對韓) 안보공약의 실효성을 보다 강조했다. 1975년 슐레진저 국방장관은 “우리가 전술 핵무기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실제 그 사용 여부를 고려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고(조선로동당출판사, 1985). 북한의 시각에서 핵무기 관련 훈련을 포함하는 것으로 의심된 팀스피리트 훈련도 1976년 6월에 시작되었다.
당시 비동맹운동에서는 인도양 비핵지대 창설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974년 평화적 핵폭발(Peaceful Nuclear Explosion)을 실시한 인도는 기존의 비핵주장을 버리기보다는 비핵지대 주장을 확대함으로써 평화적 평판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다. 인도는 1974년 세계평화이사회 국제회의를 유치했고, 디에고 가르시아에 미국의 군사기지가 설치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인도양의 평화지대화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노동신문은 “인도양과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이룩하기 위한 정당한 투쟁”으로 평가하고(노동신문 76/08/04), 마다가스카르, 예멘, 쿠웨이트, 스리랑카, 이라크, 모잠비크 등의 인도양 평화지대화 요구도 보도했다(노동신문 76/10/02; 노동신문 79/09/11).
북한은 비동맹운동의 기조를 주도하고자 하듯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 운동을 때맞춰 개시했다. 팀스피리트 훈련이 개시되기 한해 전인 1975년 8월 북한은 라마에서 개최된 비동맹운동(NAM) 외교장관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비동맹운동에 가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팀스피리트 훈련이 종료되었을 즈음인 1976년 8월 15일자 노동신문에서는 한반도 비핵화 문제가 최초로 등장했다(노동신문 76/08/15; 유성옥, 1996; 박희권, 1992; 김진철, 1987). 한민통 상임고문의 한국문제긴급국제회의 보고를 인용하여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 방안을 제기했던 것이다. 같은 시기 북한은 유엔을 통해서도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을 요구하는 서한을 회람했다. 아주 넓은 지역에 비핵지대를 창설하자는 아태 비핵지대 운동과 달리,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 주장은 “세계 여러 지역에” 비핵지대를 창설하고 기존의 비핵지대에 새로운 비핵지대들을 추가해가자는 접근방식을 띄었다(노동신문 1980/12/08).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사업총화보고를 통해 “연방국가(고려민주연방공화국)는 우리 나라 령토에 다른 나라 군대의 주둔과 다른 나라 군사기지의 설치를 허용하지 말며 핵무기의 생산과 반입, 그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조선반도를 영원한 평화지대로, 비핵지대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장기적 목표로 정당화했다(노동신문 80/10/11).
1986년 북한은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 주장을 보다 확대했고, 본격적인 정책으로서 추진되었다. 1980년대 중반 북소관계 발전의 심화와 비동맹외교의 필요성을 배경으로 북한 정부는 한반도비핵지대화를 요구하는 공화국 정부성명(1986. 6. 23)을 발표했다. 한반도에 핵무기가 1,000기 이상 배치되어 있고 한반도의 핵전쟁은 세계적 범위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반도를 “핵무기, 핵기지가 없는 비핵지대,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북한이 요구한 한반도 비핵화는 핵무기의 시험, 생산, 저장, 반입과 더불어 외국군의 핵무기 기지 설치, 핵무기 통과도 불허하는 엄격한 형태였다. 1970년대 중반 북한이 이해한 비핵지대 개념이 한반도비핵지대 방안에 적용된 것이었다.4)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 주장은 탈냉전과 미국의 한반도 내 전술핵무기 철수를 배경으로 1991년 중반 다시금 확대되었다. 북한은 1991년 6월 10일 정당, 단체 연합성명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그를 위한 핵사찰 수용 가능성을 시사했다. 1991년 중반 북한은 한소수교를 상쇄할 카드인 북일수교를 달성하기 위해 핵사찰 문제 해소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냉전 후기 북한의 한반도 비핵지대화 주장은 1950년대 후반 북한의 아태 비핵지대 운동 참여도 그러했듯이, 북한의 역량 변화와 1970~80년대 국제질서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기 시작한 1976년 8월은 그들이 비동맹운동에 가입한 후 첫 비동맹 외교장관 회담에 참석했던 때이며, 1986년에도 평양은 서울올림픽 공동개최 외교를 위해 비동맹운동의 폭넓은 지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소련은 이미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에게 유리한 올림픽 공동개최 방안이 관철되도록 하는 데에는 비동맹진영의 지지가 절실했던 것이다. 또한 이때는 북한도 일정한 수준의 내부적 발전을 이루고 외부적으로는 비동맹운동의 주도적 일원으로 주목되던 시기였다. 이에 북한의 한반도 비핵지대화 운동은 ―소련, 중국의 우호적 방임을 필요로 했겠지만― 비동맹운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덧붙여, 탈냉전으로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의 현실화 가능성을 조우했다.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시킬 기회를 잡기 위해 1992년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도 발표하고 IAEA에도 가입했던 것이다.
북한 핵보유성명 이후 비핵지대 운동: 북미 핵위협 공동 청산의 한반도비핵지대화
미국의 대북정책에 반발한 북한은 2005년 2월 10일 핵보유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이 자신들과 절대 공존하지 않을 것을 정책화했다며 6자회담의 무기한 중단 및 핵무기 증산을 선언한 것이다. 2005년 1월 18일 라이스(Condoleezza Rice) 국무장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북한을 쿠바, 미얀마, 이란, 벨라루스 등과 함께 ‘폭정의 전초기지’로 규정했고,5) 부시(George Walker Bush) 대통령은 2월 2일 연두교서 발표 시 전 세계의 폭정을 종식시키는 것을 통한 민주주의 확대를 대외정책 기조로 천명했다(The Washington Post 05/02/02). 당시 북한은 광복 및 당창건 60주년을 맞아 체제의 정치사상적 강화를 모색하고 있었기에, 체제강화 노력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지킬 힘이 있음을 과시하는 의미에서 핵보유를 선언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 이후 북한은 다시금 비핵지대 개념에 토대를 둔 한반도 비핵화 주장을 개시했다. 2005년 3월 31일 외무성 담화를 통해 미국과 북한의 핵위협이 청산되고 관계개선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언급한 것이다(노동신문 05/04/01). 이때 제시된 한반도 비핵화는 한국 내 핵무기 철수, 한국의 핵개발 가능성 제거가 이루어지고 한반도 및 주변에서 일체의 핵전쟁연습 중지 및 핵위협 공간 청산 그리고 북미관계 포함 주변국과의 신뢰관계가 수립되어야 실현 가능한 방안으로 규정되었다. 이 담화는 “우리가 당당한 핵무기 보유국이 된 지금에 와서 6자회담은 마땅히 참가국들이 평등한 자세에서 문제를 푸는 군축회담으로 되어야 한다.”는 표현으로 북한이 핵군축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으로도 평가된다. 여기에 담긴 한반도 비핵지대는 북한과 미국 모두가 공동으로 핵위협을 청산하는 방식에서 접근되었던 것이다.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5년 6월 한국 통일부장관에게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이라고 언급하고 6자회담 재개에 동의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한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후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를 배경으로 발표된 2016년 7월 6일 정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주장은 다시 강조되었다(노동신문 16/07/07). 2016년 7월 6일 정부 대변인 성명은 무수단미사일 시험발사 최초 성공 이후의 국면을 반영했다. 2005년과 유사하게 핵능력 발전과 더불어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방안이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7월 6일 정부 대변인 성명은 북한이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아와야 했기에 비핵화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 강렬하다면서, 자신들이 요구하는 비핵화는 한반도 전역의 비핵화로서 “남핵폐기와 남조선주변의 비핵화”가 포함된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에 대한 핵위협의 완전한 제거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면서 한반도 비핵화 논의를 위한 5대 조건을 제기했다. ① NCND의 대상인 한국 내 핵무기 공개, ② 한국 내 모든 핵기지 철폐와 공개적 검증, ③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중단 담보, ④ 대북 핵 불위협·불사용 확약, ⑤ 핵사용권을 가진 미군철수 선포가 그것이다. 최근에도 북한은 2017년 11월 말의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강조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3월 초 대한민국 특사단에게 한반도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이라고 언급했던 것이다. 이후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 판문점 선언, 싱가포르 합의, 평양선언도 발표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핵개발 이후 한반도 비핵화 주장의 조건과 특성 역시 국제정치와 내부역량 차원에서 파악해볼 수 있다. 이 시기 북한의 주장은 대외적으로는 핵개발 성과 자체를 배경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또한, 핵능력의 발전 여부와 대조적으로 북한 체제의 내적 정당성이나 역량은 1970~80년대에 비해 축소되었다는 것도 주목된다. 국내역량이 약화된 상황에서 북한은 체제정당성 강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시기에 핵개발 완성 주장과 이어진 한반도 비핵지대 주장을 내놓았던 것이다. 핵보유성명을 발표했던 2005년 역시 북한 당국이 노동당 창건 및 광복 50주년을 맞아 사회기강을 다지고자 했던 때이며, 북한이 비핵화 외교로 국면을 전환한 2018년 이후 역시 경제집중노선을 통해 체제정당성 입증에 주력하고 있는 시기이다.
나아가며
북한의 비핵지대 창설 방안은 시대를 거치며 다른 모습을 보여왔으나, 북한이 느끼는 정책적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된다. 냉전 초기에는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배치에 대응하기 위해 모색된 방법이었으며, 냉전 후기에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 확대와 팀스피리트 훈련의 개시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 결과에 가까웠다. 한편, 북한의 핵개발 이후 한반도비핵지대 실현 요구는 핵문제 자체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정책변경 압력에 대응하려는 맥락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특징을 갖는다. 핵보유성명과 더불어 한반도 비핵화 협상을 개시하는 북한 지도부의 동향은 핵개발 이후의 안보적 이익을 향유하려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한반도 비핵화 논의로 핵개발로 확보한 안보적 이익을 상쇄시키는 주변국의 대응을 막고 체제강화 등 내부문제에 주력하려는 태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또한, 북한의 다양한 비핵지대 접근법이 형성된 국면들을 보면, 북한이 국제정치 구조와 대내외적 상황을 고려하여 비핵지대의 대응 방향을 선택하고 구체적인 형태를 결정했음을 알 수 있다. 냉전 초기 북한의 비핵지대 운동은 초강대국 위주의 국제정치 질서를 고려하여 중국과 소련의 주장에 편승하는 아시아·태평양 비핵지대 주장, 극동·태평양 비핵지대 창설 제안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대외적 주장은 북한이 중소와의 연대를 강조하고 이들 사회주의 강대국들로부터 지원을 얻는 데에도 적합한 것이었다. 또한, 냉전 후기 한반도비핵지대 운동은 1970~1980년대 국제정치의 다변화 양상을 반영한다. 북한은 비동맹운동 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조건 속에서 비동맹국가들에게 호응을 얻는 데에 유리한 한반도비핵지대 창설 제안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는 초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약화된 조건 하에서 가능한 전략이었다. 제3세계 국가들과 직접 연계를 확보함으로써 북한은 유무형의 이익을 추구했다. 이와 같은 북한 비핵지대 운동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오늘날 북한의 한반도비핵지대 주장 역시 현시대의 국제정치 질서와 북한 내부조건을 반영하고 있을 것임을 알려준다. 오늘날 국제정치구조와 북한 내부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전략의 속성을 규정해주는 척도라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살펴볼 때, 오늘날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주장은 체제역량의 한계와 발전 문제에 대한 정책이며, 직접적인 대미 데탕트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정책문제의 측면에서 냉전 초기·후기의 북한 비핵지대 운동과 200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한반도 비핵지대 주장 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냉전기 초기 그리고 후기와 달리 2000년대 중반에는 미국의 핵위협이 뚜렷이 증대되지는 않은 시점에서 북한의 비핵지대 주장이 제기되었다. 북한이 10년간의 경제위기를 어느 정도 수습하고 체제 강화에 눈을 돌리던 시기에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북한은 정책화한 것이다. 다음으로, 정책추진 환경상 북한은 핵보유 성명 등을 통해 동북아 국제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렛대를 확보했고 대내적으로는 대내적 경제건설이 오랫동안 지연되어 온 조건에 있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이 과거처럼 중국과 소련의 평화공존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의 평화공존 혹은 데탕트를 직접적으로 추구하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저자소개
이중구(nile999@gmail.com)는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이다. 서울대에서 외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국회 외통위 보좌관, 중국인민대 방문학자.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북한의 핵담론, 핵전략, 남북·북중관계를 연구한다. “북한 핵증강론의 담론적 기원과 당론화 과정(2017)”, “The Birth and Revival of North Korea’s Denuclearization Policy for the Korean Peninsula(2018)” 등 다수 논문을 출판했다.
참고문헌
- 『로동신문』
- 구갑우. 2014. “북한 ‘핵 담론’의 원형과 마음체계, 1947~1964년.” 『현대북한연구』 17권 1호.
- 김진철. 1987. “북한의 비핵지대론 연구”. 『안보연구』 17집.
- 박희권. 1992. 『한반도의 비핵화』. 서울: 경세원.
- 유성옥. 1996. “북한의 핵정책 동학에 관한 이론적 고찰.”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 이중구. 2016. “북한 핵담론의 당론화 과정과 당론강화 동학.”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박사학위논문.
- 조선로동당출판사. 1985. 『김일성 저작집 30』. 평양: 조선로동당 출판사.
- Wittner, Lawrence. 1993. The Struggle Against the Bomb: One World or None: A History of the World Nuclear Disarmament Movement Through 1953 (Stanford Nuclear Age Series).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신문기사
- <북한 과거 1~6차 핵실험 비교> 연합뉴스 (2018년 4월 21일)
- <[북한 6차 핵실험] 북 핵실험, 1차에서 6차까지 변화와 차이점> 경향신문 (2017년 9월 3일)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