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현(서울대학교)
2019년 4월 30일과 5월 1일
2019년 5월 1일, 나루히토 왕세자가 일본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1989년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한 이래 30년간 이어져 온 헤이세이 시대가 저물고 레이와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이세신궁에 퇴위를 보고하고 돌아오는 천황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비오는 날씨에 우산을 쓰고 모여들었다. 차창을 열고, 혹은 열차에 서서 손을 흔드는 천황부부에게 사람들은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쳤다. 뉴스에는 ‘마지막 공무수행’이라는 자막이 흘렀다. 인터뷰에 나선 사람들은 천황부부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과 함께 나이를 먹은 천황부부의 퇴위를 보면서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실감한다고 눈물짓기도 했다.
아키히토 천황의 생전퇴위를 한 달 앞둔 2019년 4월 1일, 일본의 새 연호 레이와(令和)가 발표되었다. 이 연호의 공식적인 의미는 ‘아름다운 조화(beautiful harmony)’로, 일본의 가장 오래된 노래집으로 알려진 만요슈(万葉集)에 수록된 단어라고 한다. ‘레이와’라는 새 연호를 알리는 호외가 발행되었고 전 일본이 들썩였다.
2019년 4월 30일에는 ‘오늘은 무엇을 해도 헤이세이 마지막’이라면서 일본 전역에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졌다. ‘平成’, ‘令和’가 새겨진 과자, 열차표, 스템프가 판매되고 ‘아리가또 헤이세이(고마워 헤이세이)’, 그리고 ‘요오코소 레이와(반가워 레이와)’를 외치는 많은 행사가 열렸다. 연호를 주로 쓰는 사람이 30년 동안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연대를 표시할 때 ‘주로 원호’를 쓴다는 이가 34%, ‘원호와 서력 반반’ 쓴다는 이가 34%로, 일상적으로 ‘연호’를 쓰는 이가 70%를 차지한다. 주로 서력을 쓴다는 응답은 25%에 불과하였다(마이니치 신문 2019/02/05).1) 정부문서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서류 등에 연호가 쓰이니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연호 사용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연호가 바뀌는 것은 일본인들에게 새 시대의 바람을 불어넣는 사건이었다.
퇴위식에서 아베총리는 일본국과 일본국민통합의 상징으로써 재난의 상황에 처했을 때 현장을 찾아 피해자를 위로하고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고락을 함께한 천황에 감사를 표하였다. 아키히토 천황은 국민의 신뢰와 경애를 받은 것에 대한 기쁨을 표시하고, 상징으로서의 본인을 받아들여 준 국민들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그리고 레이와 시대의 일본과 세계의 평화와 행복을 비는 말로 답례하였다. 헤이세이 시대가 저물고 레이와 시대가 시작되었다. 4월 30일 자정에는 각지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졌고, 사람들은 함께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자정을 넘어 ‘레이와’가 시작되자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5월 1일에 천황의 자리에 오른 나루히토는 헌법에 의거해 일본 및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으로의 책무를 다 할 것을 선언하였다. 마침 일본은 열흘에 이르는 ‘골든위크’의 긴 휴가 중이었다.
‘쇼와’를 추억하며
‘헤이세이’를 보내며 헤이세이가 어떤 시대였는가를 돌아보는 이야기들이 무성하였다. 각종 특집방송이 방영되고 다양한 특집기사 및 출판물이 쏟아졌다. 서점에는 ‘황실’코너가 신설되었다. 결혼 당시 ‘미치코 붐’을 일으켰던 황후의 모습도 재조명되었다. 마침 2019년은 1959년 4월 10일(쇼와35년)로부터 결혼 60주년이었기에 천황부부의 테니스코트 만남부터 재조명되었다. 당시는 일본의 고도성장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시기였고, 아키히토 왕세자 부부의 결혼식을 시청하기 위해 텔레비전 판매량이 급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퇴위를 기념하여 미치코 붐을 일으켰던 당시, 왕실의 결혼식 및 나루히토의 탄생과 성장을 담은 사진을 엮은 달력이 발행되기도 했다.
여러모로 2019년 나루히토 왕세자의 즉위식은 1989년의 아키히토의 즉위식, 곧 ‘쇼와(昭和)의 끝, 헤이세이(平成)의 시작’을 떠올리게 했다. 2019년 ‘레이와’의 시작은 이전 천황의 ‘은퇴’로 시작되었지만, 1989년의 ‘헤이세이’는 쇼와천황의 사망으로 인한 ‘자숙(自粛)’의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상복을 입은 채 즉위식이 열린 셈이다. 쇼와시대의 마지막 총리 타케시타 노보루는 “쇼와시대는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시작되어 대전(大戰)의 참화, 혼란과 궁핍하기 그지없는 폐허로부터의 부흥과 진정한 독립, 유례가 없는 경제성장과 국제국가에의 발전이라는, 참으로 격동의 시대였다”고 추모사를 읽었다.
일본 사람들이 떠올리는 쇼와의 이미지는 야마자키 타카시 감독의 영화 <Always 3丁目の夕日(올웨이즈 삼쵸메의 석양)>(2005)에서 그려지는 평범한 가족과 일상의 행복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경제성장기의 도쿄, 도쿄타워와 우에노역이 지어지던 1958년(쇼와 33년) 당시, 도쿄의 서민동네 삼쵸메의 가족과 이웃들이 겪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시는 ‘단지족’이라고 하는 부러움에 찬 유행어가 등장한 때이기도 하다. 2개의 방과 스텐레스 싱크대, 수세식 화장실과 욕조를 갖춘 2DK로 상징되는 근대식 주거,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다이닝 키친(DK)의 일상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사진과 영상에 담긴 전형적인 모습은 놀이터를 가득 메운 아이들과 젊은 부모의 모습이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주한 화이트 칼라 중산층 가족에 대한 동경은 세련된 2DK가 단란한 ‘단지가족’의 ‘소비생활’에 대한 부러움이기도 했다.
아키히토 천황부부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는 사람들이 회상하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이다. 1959년 4월 10일에 왕세자 아키히토와 쇼다 미치코가 결혼을 했고, 그 다음해인 1960년에 첫 아들 나루히토가 태어났다. 헤이세이를 마감하면서 사람들이 추억하는 시대는, 헤이세이를 건너뛴, 전후의 고도경제성장기의 ‘쇼와시대’인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그 당시는 누구나 ‘중간’은 되던 시절이었다. 1958년부터 내각부의 ‘국민생활에 관한 의식조사’에서 계층귀속의식을 묻는 설문조사가 실시되었고, ‘상, 중상, 중중, 중하, 하’의 다섯 가지 선택지 중에서, ‘중’에 해당하는 중상, 중중, 중하를 선택하는 이들의 비율이 1958년의 72.4%에서 지속적으로 높아져, 1964년에는 87%, 1970년에는 89.5%, 1973년에는 90.2%에 달한다. 이로부터 ‘1억 총 중류론’이 대두된다.
일본의 경제성장은 급속한 것이었기에, 단지의 2DK는 순식간에 ‘협소함’의 상징이 되어버린다. 단지의 황금시대는 길게 잡아도 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전반까지였다. 1970년대 들어 ‘자동차를 살 수 있는 자금으로 내 집 마련’, ‘2DK 단지에서 녹음이 우거진 뉴타운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내 집 마련 정책(持ち家政策)’이 본격화된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집을 사고, 자녀를 낳는 표준적인 라이프코스, 남성정사원의 ‘회사인간’과 정책적으로 독려된 ‘전업주부’를 주축으로 한 이들의 ‘중간은 된다’라는 자신감이야말로 그리운 시절의 평범한 행복의 모습일 것이다. 헤이세이 시대가 잃어버린 것은 그 ‘평범함’일 것이다.
버블의 절정을 향하던 1987년에 리쿠르트사가 만든 ‘프리타’라는 용어가 유행하였다. 이는 회사인간을 탈피하여, 일하고 싶은 만큼만 일하고 ‘나를 찾는 삶’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아르바이트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돈은 벌 만큼 벌었다, 혹은 돈은 쓸 만큼 벌 수 있다는 낙관을 포함한 용어일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당시 주식시가총액을 기준으로 한 세계 10대 기업 중, 2위 IBM을 시가총액 4배에 가까운 압도적인 차이로 1위에 오른 것은 일본회사 NTT였다. 10대 기업 안에 스미토모 은행(3위)등 일본회사 8곳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20위 안의 16개 기업이 일본회사였다. 1989년 당시 사람들은 ‘버블’이라고 깨닫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헤이세이 시대는 버블경제의 절정기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헤이세이가 시작되자마자 버블경제는 붕괴되었다. 이 때문에 헤이세이 시대에 대해서는 ‘잃은 것’에 대한 이야기가 숱하다.
상실의 시대 ‘헤이세이’
마이니치 신문은 2018년 10-12월에 사이타마대학 사회조사 연구센터와 공동으로, 2019년 4월로 막을 내리는 헤이세이 시대를 주요 테마로 하여, “일본의 여론 2018 -당신의 헤이세이-”라는 제목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헤이세이 시대에 일어난 일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을 20개의 항목 중에서 복수응답으로 고르도록 하였다(이하, 설문조사는 본 조사를 의미함). 이 설문에 응답한 18세 이상 남녀 1274명 중에서 2011년의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를 78%의 사람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꼽았다. 1995년의 지하철 사린사건, ‘미국동시다발테러’, 1995년의 ‘한신대지진’이 그 뒤를 이었다.2)
필자는 전후 50년을 맞은 헤이세이 7년, 1995년에 주목하고 싶다. 1995년 1월 17일 새벽에 한신 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한다. 진도 7.3의 도시직하형지진으로 사망자가 6천434여 명에 이르렀다. 인구가 밀집한 도심에서 발생하여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을 뿐 아니라 사망원인의 상당수가 불량한 가옥의 파손에서 의한 것이었고, 사망자의 대다수가 고령자, 특히 빈곤층의 여성 고령자였다는 점은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다. 버블경제에 취해 ‘재팬 넘버 원’을 외치는 동안, 그리고 1억 총 중류라는 평등사회의 신화에 빠져있는 동안 한쪽에서는 열악한 주거환경을 면치 못한 이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한신아와지 대지진 피해자들이 거주하던 가설주택에서 연이어 발생한 고독사 문제는 ‘풍요사회’ 속에서 사회적인 약자가 구조적으로 발생하고 또한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한신 아와지 대지진의 충격에 이어 1995년 3월 20일에는 종교집단 옴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한다. 도쿄 시내 한복판을 달리는 지하철 차내에서 화학무기로 사용되는 신경가스 사린이 무차별 살포되어 승객과 역무원 등 12명이 사망하고 5,5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평온한 도시에서 벌어진 이 무시무시한 테러에 일본사회는 아연실색했다. 더구나 옴진리교의 교주 이사하라 쇼코가 전후 일본 최대의 공해병으로 알려진 미나마타병 환자였다는 후지와라 신야(藤原新也, 2009)의 추정이 사실이라면, 이 비극은 전후 일본의 경제적 풍요가 낳은 희생자들의 축적된 원한이 분출되어 나온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영진, 2014).
일본형 복지의 근간을 이루던 고용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1995년이다. 1995년(헤이세이7)년, 일본경영자단체연맹은 ‘신시대의 ‘일본적 경영’’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종신고용과 연공임금제를 부정하고, 파트타임이나 파견 등의 비정규직화를 통한 ‘고용유연화’를 주장했다. 이후 1999년부터는 파견의 범위가 자유화되고, 파견 노동자가 단번에 증가한다. 비정규직화는 젊은이들에게서 먼저 시작되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중년층 이상에서도 그 비율이 상승하기 시작하여 전연령층으로 번진다. 실업률은 1991년의 2.1%에서 2001년의 5.0% 급증한다.
거품경제붕괴 직후인 1991년(헤이세이 3년)부터 2001년까지, 주식과 부동산 가격의 급락과 그 여파로 은행과 기업이 도산하고 그후 10년 넘게 0%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것을 흔히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한다. 일본사회에서 ‘격차’가 사회문제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 역시 이 즈음부터이다. 사토 토시키(佐藤俊樹 2000)는 『불평등사회 일본』에 ‘사요나라 총 중류’라는 부제를 붙인다. 그리고 1955년 이래의 ‘사회계층과 사회이동의 전국조사’ 데이터를 분석하여, 전후 일본사회가 과연 ‘노력하면 어떻게든 되는 사회’였던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격차’는 고령화에 따른 착시현상이라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 1994(헤이세이6)년에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14%를 넘어 일본은 본격적으로 ‘고령사회’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몰린 이들의 죽음, 자살의 급증은 ‘격차’ 이상의 문제를 암시한다. 1998년(헤이세이 10년)에는 자살자 수가 급증했고, 그 이후 14년 동안 매해 3만 명이 넘는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바로 ‘잃어버린 10년’, 그리고 이어서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이런 가운데 2001년(헤이세이 13년)에 고이즈미 정권이 탄생했다.
헤이세이의 ‘가족’
설문조사에서 헤이세이 시대 동안 ‘무언가를 얻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44%, ‘무언가를 잃었다’고 느끼는 이는 33%였다. 지난 30년 동안 무언가를 잃었다는 이도, 무언가를 얻었다는 이도 모두 ‘가족’을 얻거나 ‘가족’을 잃었다고 답했다. 그리하여 마이니치 신문은 ‘가족의 시대, 헤이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4)
그러나 헤이세이는 안팎으로 ‘가족’이 위협을 당하는 시대였다. 1989년 헤이세이 원년은 이른바 ‘1.57 쇼크’로 시작되었다. 1년 뒤에도 출생률 1.34로 일본사회의 극심한 저출산이 본격화된다. 실업과 비정규직의 확대되고 일본형 사회보장을 담당했던 기업의 복지가 흔들림으로써, 이는 결혼, 출산, 육아 모두에 장벽이 되어 ‘가정’의 성립과 유지를 위협했다. ‘사회적 약자’로 전락한 젊은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본격화되었다.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평범한 삶’이 어려워졌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용불안에 따른 빈곤과 가족붕괴, 그리고 사회적 고립이라는 악순환 속에서 ‘고독사’는 사회문제로 떠오른다. 특히 2010년의 NHK다큐멘터리 ‘무연사회’(無縁社会)’는 ‘무연’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취재팀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직장을 다니던 사람이 실업과 이혼을 겪은 끝에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추적했고, 시청자들은 고독사에 이르는 사람들의 ‘평범함’에 충격을 받는다. 빛나는 ‘단지’는 불과 반세기를 조금 넘긴 시점에 초고령사회의 고독한 죽음의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朴承賢, 2019).
동일본대지진과 원전사고, ‘재후(災後)’
헤이세이의 마지막 10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동일본 대지진과 ‘재후’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2011년 3월 11일 진도 9.0의 강진과 뒤이은 쓰나미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사망자 1만5883명, 행방불명자 2553명(2017년 3월 10일 현재)이라는 전례가 없는 피해가 발생했다. 이어서 전세계를 공포에 빠뜨린 것은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레벨 7(INES: 국제 원자력 사고등급)까지 올라간 원전사고와 뒤이은 방사능 누출이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과 원전사고 이후의 상황은 1945년 8월 15일 패전 이후를 가리키는 ‘전후(戦後)’와 비교하여 ‘재후(災後)’라는 언어로 묘사되곤 한다. 총리대신 자문기구로 설치된 ‘동일본대지진 부흥구상회의’는 2011년 6월 25일에 제출한 보고서 <부흥을 위한 제언-비참함 속의 희망>에서 ‘이 나라의 ‘전후’를 계속 떠받쳐온 ‘무언가’가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라고 표현한다’(御厨貴: 2011).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 및 이에 대한 도쿄전력 및 정부의 대응은 경제발전 우선주의, 지방의 희생을 요구하는 시스템 등 전후 일본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이 축적된 구조적인 위기로, ‘전후’ 일본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원전사고는 국가적 공공성이 어떻게 ‘공공’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2012년 12월 총선거에서의 자민당은 정권 교체에 성공하고 아베 신조는 총리로 복귀한다. 그리고 탈원전의 기운은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서 사그라진다. 나루히토 일왕이 즉위한 후 첫 헌법기념일 5월 3일에는 아베 총리는 2020년을 새 헌법이 시행되는 해로 삼고 싶다 밝히며 헌법 개정의 의지를 다시 강하게 드러낸다. 일본 우경화의 우려 속에서 아베 총리는 메이지 유신 이래 최장기 집권 총리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설문조사에서 “‘헤이세이’ 다음의 시대의 일본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시대’라는 응답이 7%, ‘(그다지)희망을 가질 수 없는 시대가 될 것이다’라는 응답이 57%였다. 절반을 넘는 이들이 ‘다음 시대’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현재 가장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3년 연속 ‘노후의 생활’이 1위를 차지했다. 알 수 없는 노후에 대한 불안,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사회에 감도는 무색무취의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불안은 서로 닮았다. 이런 속에서 ‘레이와’ 시대가 시작되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나 1970년의 오사카 만국박람회는 패전 이후 일본의 부흥을 상징하는 축제였다. 오사카 만박 개막식은 일본의 두번째 상업용 핵발전소인 쓰루가핵발전소 1호기 운영개시일과 같은 날이었다. 박람회가 진행 중이던 8월엔 미하마핵발전소 1호기도 가동을 시작해, 행사장 전광판에는 ‘오늘 간사이전력 미하라핵발전소 전기가 박람회장으로 시험 송전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실렸다.
오사카 만국박람회로부터 정확히 50년 만에 2020년 도쿄올림픽이 열린다. 마치 반세기를 돌아 이제야 거울의 뒷면을 보는 것과 같다. “오염수는 통제되고 있다”라는 아베 총리의 발언이 비웃음을 산 것과 같이 올림픽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의 부흥의 계기로 삼으려는 정치적 시도들에 대한 시선은 냉담하다. 도쿄올림픽이 후쿠시마를 가릴 수 있을까. ‘1억 총활약’이나 ‘경제성장’이라는 낡은 구호가 아니라, 성장사회에서 성숙사회로의 전환을 견인할 수 있는 새로운 물결이 필요하지 않을까.
저자소개
박승현(totomomolala@gmail.com)은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BK21플러스 사업단에 BK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도쿄대학교 총합문화연구과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령화와 재건축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도쿄의 한 대규모 공공단지의 전후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했으며,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老いゆく団地: ある都営住宅の高齢化と建替え(늙어가는 단지: 한 공공주택의 고령화와 재건축)』 (2019.3, 東京:森話社)를 출판하였다.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 이와모토 연구실의 프로젝트 <동아시아 일상학으로서의 민속학>에 참여하며 학술지 『日常と文化(일상과 문화)』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사회의 고령화와 복지, 가족과 주거, 노년과 죽음, 지역재생과 커뮤니티 케어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1. 2019년 2월 5일 마이니치 신문 <年代に元号使用34%, 30年間で「半減」>
2. 2018년 12월 30일 마이니치 신문 <時代の記憶 震災とテロ>
http://ssrc-saitama.jp/content/files/PDF/2018.12.30Mainichi.pdf
3. 일본경찰청 홈페이지 2019년 4월 28일 검색
https://www.npa.go.jp/safetylife/…/H26_jisatunojoukyou_03.pdf
4. 2018년 12월 30일 마이니치 신문 <平成という時代 ‘ものの昭和から家族へ>
5. 내각부『平成25年度版少子化社会対策白書』
https://www8.cao.go.jp/shoushi/shoushika/whitepaper/measures/w-2013/25webhonpen/html/b1_s1-1.html
참고문헌
- 이영진. 2014. “근대 일본사회의 원한의 한 계보.” 일본비평 11호, 218-237.
- 후지와라 신야 조. 김욱 역. 2009. 『황천의 개』. 서울:청어람 미디어.
- 増田寛也 編. 2014.『地方消滅: 東京一極集中が招く人口急減』. 中公新書.
- 御厨貴 2011.『「戦後」が終わり、「災後」が始まる』. 千倉書房.
- 野澤千絵. 2016.『老いる家 崩れる街 住宅過剰社会の末路』講談社.
- 朴承賢. 2019. 『老いゆく団地:ある都営団地の高齢化と建替え』. 森話社.
신문기사
- <平成という時代><時代の記憶> 마이니치 신문 (2018년 12월 30일)
- <年代に元号使用34%, 30年間で「半減」> 마이니치 신문 (2019년 2월 5일)
인터넷자료
- 일본경찰청 “일본자살자수 추이”
https://www.npa.go.jp/safetylife/…/H26_jisatunojoukyou_03.pdf (검색일: 2019. 4. 28). - 합계출생률의 추이『平成25年度版少子化社会対策白書』
https://www8.cao.go.jp/shoushi/shoushika/whitepaper/measures/w-2013/25webhonpen/html/b1_s1-1.html (검색일 2019. 5. 10)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