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경 (아시아연구소)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 Guimet, 이후 기메 박물관)은 프랑스의 기업가 에밀 기메 (Emile Guimet, 1836-1918)의 소장품으로 1899년 파리에 설립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아시아 박물관이다. 에펠 탑에서 멀지 않은 이에나 광장(Place d’Iéna)에 자리한 기메 박물관은 세 면의 갤러리가 삼각형을 이루고 한 끝에 원형 공간이 있는 건축으로 설계되었고 기본적으로 3개 층의 상설전시 공간이 있다. 이 박물관은 이국 문화에 대한 관심의 결과물인 프랑스의 ‘호기심의 방(cabinet de curiosité)’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동아시아 유물을 전문적으로 보관하고 전시하는 프랑스 최초의 아시아 박물관이다.
기메 박물관이 세워진 1889년은 유럽에서 새로운 문물과 외국 문물에 대한 관심이 극에 달해 있었던 시기다.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있었던 해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 최고의 근대 기술력을 자랑하는 에펠탑이 세워진 해이기도 하다. 17세기부터 유럽 주요 국가들에 의해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생겨난 동양 문화와 예술에 대한 심취는 유럽에서 중국풍의 쉬누와즈리(Chinoiseries)뿐만 아니라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풍의 자포니즘(Japonisme)의 열풍을 낳았다.
19세기 제국주의의 팽배와 더불어 타문명에 대한 인문학적 혹은 과학적 탐구가 크게 확산되어 많은 연구단체들이 생겨났는데, 1857년 창설된 극동문명 연구회인 인류학 연구회(Société d’ethnographie)도 그 중의 하나이다. 1873년 9월 파리에서 일본 문화를 주제로 국제 동양학 학술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이 학회 회원으로 가입한 이들 중에 에밀 기메가 있었고 규모는 조금 더 작지만 파리에 있는 또 하나의 아시아미술관인 체르누스키 시립박물관에 자신의 소장품을 남긴 앙리 체르누스키(Henri Cernuschi)도 있었다. 이런 전반적인 동양에 대한 연구 열기와 더불어 프랑스는 식민지 인도차이나와 인근의 아시아 지역 연구를 위해 1898년 프랑스국립극동연구원 (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을 창설하고 많은 동양학자들을 현지로 파견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폴 펠리오 (Paul Pelliot, 1878-1945)는 중국 둔황의 막고굴에서 다량의 고서를 분류해서 프랑스에 가지고 간 이로 유명한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727)도 거기에 포함되었던 고서이다.
1865년 이집트 여행을 통해 동양의 고대 문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에밀 기메는 1876년 9주 동안 일본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중국을 거쳐 많은 예술품과 민속품을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것들을 1878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후 다음해 리옹에 개인 박물관을 설립했다. 하지만 여러 한계를 인식하고, 문화의 중심지인 파리로 자신의 소장품을 옮기기를 원했던 기메는 프랑스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서 파리 중심지에 리옹의 박물관과 같은 구조의 건물을 정부가 건립해준다면 자신의 모든 유물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결과 1899년 기메 박물관이 문을 열게 된다.
샤를 바라의 한국 탐사와 유럽 최초의 한국관 창설
유럽 최초로 한국관이 생긴 곳이 바로 기메 박물관이다. 박물관 2층 (한국식으로는 3층) 일본관과 중국관 사이에 한국관이 열린 것은 조선이 1876년 개항한 이후 조금씩 몰락해가고 있던 1893년이었다. 1886년 프랑스정부와 맺은 조불수호조약은 미국(1882), 영국과 독일 (1883), 이탈리아와 러시아(1884)등 다른 서양국가들에 비해 뒤늦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 프랑스 정부의 관심이 인도차이나에 쏠려 있었던 탓이 크다. 프랑스인들이 조선의 곳곳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고 명시된 조불수호조약 조항 덕택에 프랑스인 샤를 바라(Charles Varat 1842 – 1893)의 여행이 가능했다.
바라는 1891년 중일 협회 (Société Sinico-Japonaise)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겠지만 정식 인류학자는 아닌 해외문물에 관심이 많은 애호가였다. 부유한 파리지앵이었던 그는 한국에 오기 전 대부분의 유럽 뿐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과 북 아프리카의 국가들을 여행했고, 인도에서 시작해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 및 중국과 일본을 이미 방문했다. 1886년 6월 그가 자비로 조선에 왔을 때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 문교 공보부 인정 인류학 미션 담당 탐험가 (explorateur chargé de mission ethnographique par le ministère de l’Instruction publique) »라는 칭호를 얻어서 왔다. 주간지 « 르 몽드 일루스트레 (Le monde illustré) »의 1890년 2월 15일자에 실린 소개 글은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한국이 얼마나 고립된 나라로 여겨졌는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바라가 왜 한국에 오게 됐는지를 알게 해준다.
“한국은 구대륙에서도 제일 알려지지 않은 나라중의 하나이다. 아시아의 극단 인도해의 깊은 구석에 위치한 이 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유럽과 상업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한국 쪽으로 간 여행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수도 서울 이상은 가지 않았다. 바라 씨는 감히 대구와 부산을 거쳐서 한국 종단 여행을 한 최초의 유럽 여행자이다. 한국의 민속을 자세하게 연구한 유일한 인물로 [트로카데로] 박물관에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이며 교육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왔다. 이 용감한 여행자의 호의 덕택에 우리는 만국박람회에서도 거의 보지 못했지만 [트로카데로]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여기 재현해서 소개한다.” (Le monde illustré 1890 : 103)
유럽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희귀성은 바라가 한국 종단 여행을 한 최초의 유럽 여행자가 되게 하였다. 1892년 « 르 투르 뒤 몽드 (Le Tour du Monde)»지에 실린 바라의 글은 그의 탐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사진들은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곁들여진 삽화들은 사진을 찍어서 그것을 보고 그린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바라는 같은 해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빅토르 꼴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어가며 “한국민속컬렉션을 수집한다는 관점에서 다른 나라에서 온 모든 것은 가차없이 거절하며 세밀하게 조사”( Varat 1994 [1892] : 38-39)하였다. 또한 꼴랭 드 플랑시의 도움으로 조선정부의 신용장을 발급받아 8마리의 말과 12명으로 구성된 팀을 이루어 대구와 밀양을 거쳐 부산에 이르기까지 육로로 여행하며 많은 유물들을 구입하였다.
바라의 목적은 상업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학적인 것이었으므로 그가 수집한 것은 대체로 오래된 골동품이나 미술작품이 아닌 탈, 의복, 농기구, 가구, 일상에서 쓰는 그릇같은 민속품들이 많았다. 회화에 있어서도 산수화나 사군자가 아니라 울긋불긋한 색의 민화체의 그림이 주를 이루었다. 바라가 수집한 « 계견사호 »나 «봉황도 »등은 몇 년 앞서 미국 해군장교 밥티스 버나도(J. B Bernadou, 1858-1908)가 한양 광통교에서 수집해간 것들과 더불어 민화 연구 편년에 크게 기여하는데(윤진영 2021) ,정작 한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바라가 수집한 유물 중에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들도 다수 있었다. 예를 들어, 최근 머리에서 직물로 싼 수정 염주가 처음 발견된 15세기 조선시대의 목조여래좌상이라든지, 한국에는 서울 흥천사와 국립중앙박물관의 단 두 곳에만 소장된 밀교적 성격의 고려시대 천수관음보살좌상(12-13세기 추정)등이 그러하다.
이렇게 해서 그가 수집한 유물들은 파리에 에펠탑과 기메 박물관이 세워진 바로 그 해 1889년 트로카데로 민족학 박물관 (musée d’ethnographie du Trocadéro)에 전시된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유물들은 실물 크기의 한국 의상이 입혀진 마네킹을 동원해 한국의 결혼 풍습이나 장례 풍습 등을 잘 보여줄 수 있도록 극적이고 교육적인 방식으로 전시되었고, 가능하면 원래 조선에서 사용되던 당시의 맥락으로 전시하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전시가 끝난 후 바라는 이 유물들을 영구 전시하기를 강렬한 희망했고 1891년 프랑스 문교공보부는 그의 컬렉션을 새로이 문을 연 기메 박물관에 이관하기로 결정했다. 바라는 프랑스 첫 체류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옥균의 살해자로 더 알려진) 홍종우 (1851 – 1913)를 조수로 해서 몸소 소장품을 분류하고 전시했고, 마침내 1893년 4월 11일 기메 박물관 2층에 유럽 최초의 한국관 전시실을 열게 되었다. 그 당시 사진을 보면 트로카데로 박물관의 경우처럼 마네킹을 이용한 유사한 성격의 전시임을 알 수 있는데, 에밀 기메는 동양 유물 전시에 관해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극적인 부분이 부각되어야 하고 신비함을 자극하는 고요하고 어두운 부분이 가미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관람자를 감동시키고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연극적 장치와 서사적 구성이 필요하다’’고 쓴 바 있다(Archives du musée Guimet 1896). 이 전시는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책 한 권을 써도 소개된 미술, 과학, 농업, 산업 및 상업 관련의 모든 흥미로운 유물들을 묘사하기에 부족할 것’’이며 ‘‘지금까지 수집된 인류학 컬렉션 중에 가장 훌륭한 것 중의 하나’’라는 호평을 받았다 (Demays 1984).
불행히도 바라는 한국관이 개관한 지 열흘만에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이후 기메 박물관을 민속 박물관보다도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공고히 하려는 정책에 따라 바라 컬렉션 중에서 종교적이거나 예술적인 물건들은 기메 박물관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보르도의 민속박물관으로 보내게 된다 (1904년 2월 1일자 문교 공보부법령). 사실상 바라 유물의 분산은1895년 무기류 등을 군사박물관에 보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인류박물관(1930, 1943, 1962)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케 브랑리 박물관(2006)에 이르기까지 계속 진행되었는데, 그 중 아브르 박물관 (1915)에 보내 진 유물 중에는 프랑스인 중국학자 에두아르 샤반느(Édouard Chavannes, 1865-1918)가 가지고 왔던 고구려 유물들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아브르 박물관의 이 유물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폭격을 받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샤를 바라의 부재로 인해 한국관 관련 유물들에 대한 문의는 모두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1853 –1922)에게로 넘어갔다. 샤를 바라의 한국민속품 수집과정을 곁에서 꼼꼼하게 도와준 인물이기도 했던 그는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로 1888년에서 1906년 사이 15년 이상을 서울에서 근무했는데 그가 일본으로 발령이 났던 1892년에서 1896년 사이에도 한국의 유물들을 프랑스로 보내었다. 콜랭 드 플랑시는기메 박물관의 한국관이 균형 있게 유물을 소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그가 기메 미술관에 보낸 회화들은 대체로 불화나 문인화 계통이었다. 1896년 7월 20일 에밀 기메가 직접 콜랭 드 플랑시에게 쓴 다음의 편지에서도 그가 민속품보다는 예술품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틀림없이 당신은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씨가 쓴 «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éenne »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가 169페이지에 쓴 전쟁의 신을 모신 두 절의 그림에 대한 서문에서… 한국미술이 아니라 인간의 미술(art humain)이라고 하는 부분은 우리가 여기서 아는 것보다 더 수준 높은 한국미술의 유적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일본역사를 읽고 내가 생각한 것과 더 부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술의 견본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작품을 얻을 수 없다면 사진이라도 좋습니다.’’
기메 박물관 학예사 피에르 깜봉(Pierre Cambon)은 1832년에 수국사에서 그려진 <감로탱화>와 이한철(1808-?)이 비단 위에 그린 <십폭화조병풍>이 콜랭 드 플랑시가 기메 편지의 화답으로 보낸 작품이라는 의견이다 (깜봉 2022: 3). 하지만 위에서 기메가 언급한 모리스 쿠랑의 « 한국서지»의 내용은 “분홍색 살빛을 띠고 숲 속에 웅크리고 앉아 명상하고 있는 흰 머리와 흰 수염의 고행자는 어두운 초목속에서 초자연적인 빛을 발현하고 있다”고 묘사한다(Courant 1901 : 169). 같은 그림 내용은 아닐지라도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을 보내준 것만은 분명하다.
1887년 조불수호조약을 비준했던 인물인 콜랭 드 플랑시는 1888년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로 서울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 프랑스 사디 카르노 대통령 (Sadi Carnot, 1837-1894)이 고종에게 보내는 선물에도 개입을 했다. 그가 1888년 2월 20일 프랑스에 보낸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의 국왕에게 보내는 제법 큰 화병vasque과 더불어 “선물이 좀 더 무게가 있도록 한 쌍의 화병도 같이 보내는 것이 좋겠다” 고 쓰고 있다. 콜랭 드 플랑시의 외교적인 노력 덕분에 고종은 프랑스 국립 세브르 도자제작소에서 만든 백자 채색살라미나병(1828년, 높이 62.1cm, 입지름 53.2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뿐만이 아니라 클로디옹 병 한 쌍도 같이 선물 받았다. 이처럼 조선이 개항 후 수교를 맺은 서양 국가로부터 기념 선물을 받은 것은 프랑스가 최초였으며, 콜랭 드 플랑시의 편지 내용에 따르면 고종은 기쁘게 선물을 받았고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고종은 선물에 대한 답례로 프랑스 사디 카르노 대통령에게 앵무새 문양과 모란당초문이 시문된 고려청자 두 점 (12-13세기 작)과 반화 한 쌍 (금속제 화분에 금칠한 나무를 세우고, 각종 보석으로 만든 꽃과 잎을 달아 놓은 장식품, 너비 24cm 높이 42.5cm)을 선물했다. 고종이 선물한 고려청자 두 점은 현재 세브르 도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반화 한 쌍은 사디 카르노 대통령의 아들의 1954년 기증으로 현재 기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과 관련해 이 당시의 가장 큰 규모로 열린 행사는 아무래도 한국의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참여이다. 한국은 1893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 참여한 적은 있지만 유럽에서는 첫 공식 참여였다. 강대국들이 경쟁적으로 자국의 역량을 뽐내고 겨루는 이 장소에서 한국의 참여는 무너져가는 조선의 독립을 지키려는 마지막 몸부림이기도 했다.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3년 후인 이 때는 한국의 존재를 서양에 알리고 국제적인 호소를 하기위한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고종은 파리 박람회에 한국관 명예위원장 민영찬을 특사로 30여 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그 중에는 건축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인 2명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샹 드 마르스(Champ de Mars) 구역의 쉬프렌 가(Avenue de Suffren)에 미므렐 백작(August Mimerel, 1867-1928)의 설계로 경복궁의 근정전이 재현되었다. 폴 제르의 책 <1900년에 실린 사진들>에서 볼 수 있듯이 비단, 도자기, 장롱, 병풍, 금박을 입힌 목조불상, 책 등 수공예품과 악기, 무기, 의상 등이 전시되었다.
콜랭 드 플랑시는 한국이 이 국제적인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중재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개인 콜렉션 중에서도 고서 등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책표지에 프랑스어로 “지금까지 알려진 금속활자로 1377년 인쇄된 가장 오래된 책 (Le plus ancien livre coréen connu, imprimé avec caractères mobiles, avec date 1377) “이라고 (아마도 그 자신에 의해) 쓰인 “직지” 는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국의 세계무형유산이다.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물건들은 전시 후 여러 기관에 기증되었는데 기메 박물관도 그 중의 하나이다. 위원장 민영찬 특파대사 앞으로 작성된 1900년 11월 10일 수취목록을 보면 회화, 나무조각품, 촛대, 오리, 대리석 향로, 석제 화병, 불상 등 다수가 있다 (Cambon 2022 :23).
이우환 컬렉션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는 한국관이 폐관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가 되어서야 다시 한국관이 정비되었을 때는 루브르 박물관의 극동전시관에 소장 되어 있었던 (오랫동안 일본이나 중국의 작품으로 여겨졌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고려불화 등이 기메 박물관에 이관되었고, 이후 기메 박물관은 작품 구입이나 여러 기증 등으로 한국관 소장품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바라와 콜랭 드 플랑시 이후 그 어떤 것도 2001년 이우환 컬렉션 기증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 적은 없었다.
이우환의 기증은 맥락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2000년 기메 미술관이 4년 동안의 대보수 공사를 하고 재 오픈했을 때, 한국관은 기메의 전체 전시 공간(5,000m2 )중 그 전의 64m2에서 360m2로 크게 확장되어 있었으므로 이우환은 평생 수집한 회화 100점과 병풍 27점을 유럽에서 가장 큰 동양미술관인 기메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다. 70년대부터 이우환은 일반적으로 민화라고 불리는 그림들을 민속품이 아닌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Chae-Duporge 2019 : 44). 이우환이 그의 소장품들을 기메 박물관에 기증한 이유는 프랑스인들에게 이 작품들을 보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보이려는 의도였다. 기메 미술관을 조선 말기 장식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전시창으로 사용한 것이다(최옥경 2021: 88).
2001년 그의 컬렉션이 “한국의 향수nostalgies coréennes” 라는 이름으로 기메 박물관에 전시되었을 때, 언론으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는데 같은 미술관에서 몇 년 후 “수묵의 시정(poésie de l’encre)” 전시가 열렸을 때 일간지 르몽드(Le monde)는 문인화의 “전통과 아카데미의 규율에 의해 지탱된 닫힌 세계”에 대비시키며 “2001년 한국의 향수 전시가 있었을 때 기메 박물관은 전문 화가들이 그린 색깔이 넘치고 시적이고 색다르고 게다가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한국을 발견하게 해 주었음”(De Roux 2005) 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렇듯 이우환 컬렉션이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소장품들이 이국적이어서가 아니라 단적으로 그의 컬렉션에 수작이 많기 때문인데 샤를 바라(Charles Varat)의 수집품들과 이우환 컬렉션을 비교해 보면 인류학자가 수집한 것과 현대 작가가 수집한 것의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나가며
이 글을 통해 기메 박물관내에 자리한 한국관 성립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본 지금 3실의 한국관이 왜 샤를 바라실,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실 그리고 이우환실로 구성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작품기증을 통해 소장품을 풍요롭게 했지만 이들만큼 실하게 한국관의 설립에 기여하고 소장품을 풍부히 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이 고찰을 통해 우리는 한국의 문화재가 반드시 한국에만 소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외국에 소재한 고급의 한국 문화재는 한국 문화의 홍보대사와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국외소재 한국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양하게 가져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저자소개
최옥경 (okyangchae@gmail.com)은
현재 프랑스 보르도 몽테뉴대학(Université Bordeaux Montaigne)의 부교수이다. 파리 소르본느4대학(Université Paris IV-Sorbonne)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파리 세르클다르 출판사에서 « 이우환 작품의 여백 (Lee Ufan, espace non-agi) »을 불문(2017)과 영문(2017)으로 각각 출간했으며, 같은 출판사에서 강우방과의 공저로 « 한국의 문화유산 – 불국사와 석굴암 (Trésors de Corée, Bulguksa et Seokguram)»(2016)을 한불판으로 출간하였다. 최근에는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장식화에 대한 논문들을 썼으며 소부록 『역사를 따라가는 한국미술 (Les arts de la Corée –au fil de son histoire)』(2021)을 쓰기도 하였다. 한불문화상(Prix culturel France Corée 2017 )을 수상한 바 있다.
참고문헌
- 깜봉, 피에르. 2022, “국립기메동양박물관 한국소장품”,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pp. 20-29.
- 윤진영, 2021, 『민화의 시대 –민화와 궁중회화의 경계에 관한 조망』, 서울: 출판디자인 밈.
- 최옥경, 2021, “‘민화’의 대안으로서의 ‘장식화’: 파리국립기메동양미술관 소장 이우환 컬렉션을 중심으로”, 『한국미술사학보』 56호: 77-103.
- Archives du musée Guimet, Courrier d’Emile Guimet à Victor Collin de Plancy, (20 juillet 1896).
- Courant, Maurice, (1901), “ Introduction,” Bibliographie Coréenne (Paris: E. Leroux) : p. 169
- Chae-Duporge, Okyang. 2019. “ La collection de Lee Ufan au musée Guimet: la peinture coréenne décorative de la fin de la dynastie Joseon,” A la croisée de collections d’art entre Asie et occident, Paris: Editions Maisonneuve & Larose Hémisphères, pp.39-48.
- De Roux, Emmanuel. 2005, “Les jeux d’encre des lettrés coréens”, Le Monde 9 avril : pp.29.
- Le monde illustré, 15 février 1890, Paris, pp. 103.
- Varat, Charles. 1994, Deux voyages en Corée, Paris : édition Kailash, pp. 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