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 제기하는 문제들

이 글은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 기존의 생명, 감정, 인간, 공동체의 경계에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살펴본다. 우선, 생물학적 정의로는 ‘생명’이라고 할 수 없는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 ‘살아있는’ 존재의 범위에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는지 살펴본다. 다음으로,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에 장착된 인공감정이 인간과 로봇의 소통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를 논의한다. 이어서, 안드로이드 로봇이 ‘진짜 인간’의 경계를 어떻게 변경시킬지에 대한 전망으로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안드로이드 로봇과 인간이 공동 거주하는 하이브리드 공동체의 가능성이 인간의 조건에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본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인간 너머’의 주체들과의 삶이 가져올 사회적 변화에 대해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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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SM/AIUEO/Getty Images Korea

이강원(인천대학교)

일본인 이후의 일본인, 안드로이드 로봇

극단 세이넨단과 오사카 대학 로봇연극프로젝트의 결실로 2008년 11월 오사카 대학 스튜디오에서 로봇과 인간의 연극 <일하는 나>가 공연되었다. 가사도우미 역할을 해야 하는 휴머노이드 로봇 ‘타케오’는 특별한 이유를 대지 않고 가사도우미 일을 거부한다. 로봇의 주인은 “내일, 쇼핑하러갈까?”라며 동행을 부탁하지만, 로봇 타케오는 아무 말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죄송해요”라고 말하며 객석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주인은 타케오를 달래며 “쇼핑을 도와줘”라고 다시 부탁하지만, 타케오는 “죄송해요”를 반복한다.1) 가사를 돕기 위해 제작되었으면서도 일을 거부하고 있는 로봇의 행동방식은 일본의 사회문제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히키코모리’를 연상시킨다. 타케오는 일을 거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통도 거부하는데, 연기(performance) 속에서 인간, 특히 일본인이 겪는 정신적 증상과 유사한 삶이 로봇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관객들은 인간의 ‘정신’을 닮은 로봇을 보면서 뭔가 불편하고 기괴한 느낌을 갖게 된다.2) 연극 속의 로봇은 단지 ‘인간’이 아니라 ‘일본인’ 그리고 ‘일본인’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적 증상이자 사회적 문제까지 닮아있다.

또 다른 연극 <사요나라>에는 안드로이드 로봇이 등장한다. 앞의 타케오는 휴머노이드로 인간처럼 팔다리를 가진 로봇이다. 이에 비해, 안드로이드 로봇은 인간의 모습은 물론, 표정과 제스쳐까지 비슷해서 인간인지 로봇인지 알기 힘든 로봇을 말한다. 연극의 1막은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소녀를 위해 안드로이드가 시를 읽어준다. 안드로이드가 낭송하는 시들은 죽어가는 소녀의 애수를 표현하는 시들이다. 2막은 소녀가 죽자 혼자 남은 안드로이드 로봇이 후쿠시마 원폭 피해 현장으로 배송된다는 내용이다. 택배기사는 안드로이드 로봇의 마지막 임무를 이야기해 준다. “거기서 계속 시를 읊어줬으면 좋겠어.” 남자는 말한다. “네.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전 기뻐요.” 안드로이드 로봇의 대답이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안드로이드 로봇이 아무도 남지 않은 후쿠시마의 바닷가를 바라보며 지진․쓰나미와 원전사고로 죽어간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시를 낭송하며 막을 내린다.

1막이 한 소녀의 죽음을 사유하는 장면이라면 2막은 후쿠시마에서 인류 혹은 일본인의 종말을 애도하는 장면이다. 원전사고로 황무지가 된 땅에 인간을 대신해서 로봇이 죽어간 사람들을 애도한다. 육체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에서도 안드로이드 로봇이 일본인이 사라진 땅에서 인간을 대신하며 ‘해야 할 일’을 행한다. 탈-일본인 혹은 후기-일본인(post-Japanese)으로서의 안드로이드는 일본사회의 정신적 문제, 일본의 재난과 인류의 멸종에 이르는 문제를 오롯이 짊어지고 정신과 감성의 모든 면에서 일본인을 대체해 간다.

일본인만이 아니라 일본인과 그리고 탈-일본인으로 구성되는 일본 사회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그들이 ‘일본인’이 될 수 있을까? 사람과 안드로이드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성적으로 상호 감응하는 사회란 어떻게 가능하고 어떤 영향을 초래할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을 출발점으로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의 인간됨에 대한 문제가 제기하는 이슈들을 따라가 본다.

인간과 로봇의 공존에 대한 영화 <사요나라>

 

로봇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로봇은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특히 모습과 행동을 인간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은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생물학적 정의에 따라 생명과 비생명을 나누는 데 익숙한 근대인의 견지에서는 황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질문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서 ‘로봇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생물학자와 다르게 ‘살아있음’을 정의하는 견지에서는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은 의외로 ‘살아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포스트-생물학적 삶’3)을 제안하는 연구자들은 생물학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있음’을 정의한다. 생물학적 삶과 포스트-생물학적 삶을 비교해 보자.

우선, 생물학자는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 사이의 객관적 구분기준을 확립하려 한다. 살아있는 존재를 구성하는 어떤 요소들이 있다고 전제하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살아있음’을 결정할 수 있는 객관적 자질이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생명을 결정하는 요소들과 동떨어져 있는 외부자로서 자신들을 위치 짓고 있기에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살아있음’을 바라보고 있다.

다음으로, ‘살아있음’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견지들을 살펴보자. 심리철학자 윌리엄 제임스4)는 한 사람이 인조인간과 사랑에 빠질 수 없는 이유를 열거했다. 그에 따르면, 인조인간은 동정, 인정, 자비, 칭찬을 통해서 사람을 돌볼 수가 없어서 사랑에 빠질 수 없고 그래서 살아있는 존재와 구분된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어떤 객관적 조건 없이도 한 사람이 다른 존재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점을 느낀다면, 그 존재는 그 사람에게 ‘살아있는’ 것이 된다. 물론 이러한 믿음에서 객관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윌리엄 제임스는 ‘네가 나를 돌볼 수 있는지’를 묻는 2인칭 시점에서 ‘살아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공지능 연구의 창시자 앨런 튜링5)은 ‘살아있음’에 대한 2인칭 시점을 또 다른 방향에서 전개했다. 서로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고립된 방에서 인간1과 인간2가, 그리고 인간1과 기계가 각각 대화를 나누는 실험을 진행했다. 인간1은 자신이 대화하는 것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알 수 없는 제한적 상황 속에서 그것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맞추어야 한다. 기계와 대화를 하고 인간이라고 인식했다면 그 기계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속인 셈이 된다. 이 실험에서 지능은 객관적 요소의 유무를 통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 속에서 발견된다.

윌리엄 제임스가 ‘믿음’을 통해서 2인칭 시점의 ‘살아있음’을 제시했다면, 앨런 튜링은 ‘속임수와 계략’을 통해서 2인칭 시점의 ‘살아있음’을 제시했다. 독백하는 대문자 ‘I’인 생물학자가 일반론 속에서 생명을 찾아 헤매는 것과 달리, 이 둘은 상황과 대화와 협력 속에서 ‘살아있음’이 발현되도록 한다. 이러한 ‘살아있음’에 대한 이야기는 구체적이고, 관계적이고, 관점주의적이고, 구성주의적이다. 그래서 2인칭 시점에서는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과 같은 인조인간에도 ‘살아있음’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된다. 2인칭 ‘살아있음’의 세계에서는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은 그 모습과 행동뿐 아니라 대화를 나누고 표정을 짓고 감정을 나누는 과정에서 지능을 지닌 것으로 그리고 살아있는 것으로 인식될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소위 ‘생명에 관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생물학자들은 ‘살아있는 것’의 동아리에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에 반해, 필자는 사람의 감정을 돌보아주는 인공감정과 사람처럼 대화를 나누는 인공지능을 ‘살아있는 것’으로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오히려, 필자는 생물학자들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중 상당수의 것들을 결코 ‘살아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을 대변하는 필자의 견지에서 생물학자들은 생명 문제의 자문가일 뿐이지 생명/비생명의 판관이 아니다.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세계 여러 종족도 생명과 비생명을 나누는 것 같지 않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생명’만 활기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의 애니미즘은 바위와 강물 등 비생명에게도 활기를 불어넣어(animate)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일본에도 애니메이션과 테크노-애니미즘6)의 이름으로 많은 사물이 살아 움직인다. 생물학자들의 ‘살아있음’에 대한 정의는 서구와 비서구 사회를 통 떨어서 그다지 보편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인조인간의 인공감정이 주는 혼란: 사랑이 필요한 이유

기계가 살아있으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 혹자는 그러한 관심의 저의가 무엇인지 질문해 온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 이야기에서 성적 욕망으로든 혹은 이에 대한 윤리적 비판의 의도로든 AI 섹스돌 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자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라는 말조차 잘못 이해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가 의도하는 것은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 살아있으려면, 즉 실존하려면 그것을 창조하는 자의 욕망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랑과 욕망에는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을 살아있는 것의 동아리에 가입시키겠다는 의지도 포함한다.

“내가 이토록 잔인해진 것은 억지로 내게 정해진 이 진저리치도록 고독한 삶 때문이오!”7)라고 절망했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The Creature)은 창조자 인간에게 버려진 인공물의 복수와 비극의 상징이다. 과학 인문학자 부르노 라투르8)에 따르면, 기술과 인공물은 그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돌봄과 사랑을 통해서만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인공물이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피조물이든, 프랑스의 도시철도 시스템이든,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든 마찬가지이다. 만들어 놓고서는 창조자의 사랑과 의지가 계속 더해지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살아있는 것’의 동아리 안에 들어오는 데 실패하고 죽게 된다.

사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흉물스런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안드로이드 로봇은 여전히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뭔지 모를 기괴함과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입술의 움직임과 말소리가 맞지 않는다. 두 눈동자 서로 다른 곳을 향하거나 눈꺼풀의 위아래가 미묘하게 어긋난다.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하거나 말대꾸를 하는 시간이 조금 빠르거나 느리다. 몸통에 미동도 없이 머리만 돌려 상대방을 바라보거나,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각도도 이상하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좀비처럼 보일 때가 많다. 상황에 맞게 반응하고 대꾸하고자 하는 안드로이드의 감성적 몸짓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혼란으로 다가온다.

‘섬뜩한 계곡’(不気味の谷, The uncanny valley)9) 현상으로 알려진 이러한 혼란은 사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 창조자로부터 받은 사랑의 결과물이다. 일본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로봇이 사람과 비슷한 모습과 몸짓을 할수록 좀비나 시체처럼 보일 것을 후배 로봇공학자들에게 경고했다.10) 후대 로봇공학자인 이시구로 히로시는 선배의 경고를 무시하고 안드로이드 로봇의 모습, 몸짓, 표정, 대화를 인간에게 극도로 근접하게 함으로써 섬뜩한 계곡을 건너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11) 그가 안드로이드에게 쏟은 사랑은 자신의 딸을 모델로 한 안드로이드 로봇과 자신을 모델로 한 안드로이드 로봇을 제작하는 데 이르렀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 주는 섬뜩하고 괴기한 혼란은 사실 이러한 사랑과 의지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인조인간의 인공감정이 초래하는 이와 같은 혼란으로 안드로이드가 실존에 이르는 데 실패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만약 섬뜩함과 괴기함으로 인해 인조인간의 인공감정에 우리 인간이 사랑을 더 베풀지 않게 된다면? 또 다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은 그래서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 사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 자아내는 혼란은 사랑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더 많은 사랑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즉 혼란은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이고 이 문제들은 새로운 실험과 시도를 요구한다. 로봇공학자, 인지과학자, 심리학자, AI 연구자들은 여전히 섬뜩한 계곡을 건너기 위해서 의지를 불태우고 있으며 안드로이드에 사랑을 쏟고 있다. 그리고 섬뜩한 계곡을 건널 때까지 그 사랑의 실험을 반복하고 있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에게도 이웃 사람과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만큼 큰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유사성에 따른 불쾌감의 정도

 

감정이 인간성의 최후 보루가 될 수 있을까?

‘기계’에도 감정이 있을까? ‘감정을 배제하고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근대 산업사회의 이미지 속에서는 감정을 빼앗긴 인간은 기계와 마찬가지로 비유된다. ‘인간-감정=기계’이다. 그런데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은 이러한 이미지를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모습과 행동을 넘어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은 인간의 감성을 체화하기 시작했다. 체스를 두고 바둑을 두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고 있는 지금, 인공지능의 예측, 계산, 기억의 능력이 두려움과 동시에 놀라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슬픔을 위로하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인공감정이 인간을 능가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은 인공지능으로부터 인공감정으로, 계산기(계)로부터 욕망기(계)로의 존재방식을 확장하고 있는 기계의 변신을 이끌고 있다.

이성이 동물과 인간을 나누는 기준이 되던 때가 있었다. ‘신대륙’의 서인도제도에서 아메리카 인디언과 마주친 에스파냐인들은 이들에게도 종교, 윤리, 양심, 이성과 같은 영혼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조사단을 파견했다. 당시 에스파냐인들의 견지에서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이와 같은 ‘인간의 조건’을 발견하기 힘들었고 결국, 아메리카 인디언을 원시적 인간 혹은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12) 서구 중심의 이성이 인간의 조건에서 핵심을 차지하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감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능은 어찌 될지 모르지만, 감정만은 철저히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욕망 기계로서의 일본 안드로이드의 출현은 인간의 조건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 어떻게 욕망 기계가 되는지 살펴보자.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에는 인간처럼 타고난 감각기관이 애초에 없었다. 그래서 안드로이드가 느끼기 위해서는 센서를 하나하나 장착해 가는 수밖에 없다. 센서가 느끼는 것은 안드로이드의 바깥만이 아니라 안드로이드 자신까지 포함한다.13) 그래서 센서의 장착이 더해지면서 안드로이드 몸의 외부(세계)와 내부(존재)의 경계가 서서히 구성된다. ‘센서만큼’ 안드로이드는 감각 할 수 있다. 장착된 ‘센서만큼’ 안드로이드는 존재한다.

안드로이드에게 장착한 센서 중 상당수가 사람과 대면 상황에서 감응(affects)을 주고받기 위한 것들이다. 포옹인지 폭력인지를 감지하는 촉각센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쳐 줄지 대화를 그만둘지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언어센서 등이 있다. 이러한 센서들과 인간의 감각기관 간에 감응을 주고 감응을 받는 과정에서 안드로이드 로봇과 사람 사이에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 사람의 포옹에 대해서 안드로이드도 포옹으로 대응하며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무례하게 다가와서 노려보는 사람에게는 불편하고 초조한 표정을 하며 ‘물러나세요’하고 말을 할 수 있다. 안드로이드든 사람이든, 감정은 이러한 감응을 주고받는 분위기 속에서 감지된다.14)

따라서 감정이란 인간의 본성 속에서 혹은 안드로이드 로봇의 기체 속에서 솟아나는 본능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감정은 각 개체의 몸속이 아니라, 안드로이드 로봇의 센서와 인간의 감각기관이 감응을 주고받는 관계의 실천 속에 있다. 그래서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만남에서 생성되는 감정은 인간만의 것도 안드로이드만의 것도 아니다. 이러한 감정은 사실상 센서, 정보, 감각기관, 몸, 실험실이나 전시장 같은 환경 등의 물질적인 것들의 결합체이다. 인간관계든 인계(人械)간 관계든 감정이 결합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 감정은 인간만 느낄 수 있는 본질적인 무언가로 규정할 수 없게 된다. 느낌, 감응, 정보가 감각기관과 육체 그리고 기체를 통해 흐른다. 육체의 감정과 기체의 관계는 서로 대척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기체가 공동생산하는 과정의 결과물로서 ‘감정 조립체’로서 존재한다.15)

그런데, 인계간 감응의 주고받음은 단순히 안드로이드와 인간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육체, 기계와 안드로이드 로봇의 기체, 지구와 같은 천체에 ‘분산적으로 내장된’(distrubuted and embeded) 센서들이 인간, 동물, 기계 그리고 지구가 횡적으로 감응과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기술이 진행되고 있다. 토양 습도와 이산화탄소량을 측정하기 위해 숲에 장착된 센서, 바위에 낀 이끼의 생태를 관측하는 카메라, 심해 파이프의 원유유출을 감시하는 카메라, 고래의 이동경로를 감지하기 위해 꼬리에 장착된 센서, 해양 플라스틱을 추적하기 이해 해류에 따라 표류하는 센서, 공기질을 측정하기 위해 시민단체가 비둘기 등에 장착한 공기질 센서, 도시의 사거리에 설치된 공기질 달걀(Air Quality Egg)이 그 예이다. 스마트 먼지, 사물인터넷에서 나아가 수백만의 열감지기, 압력감지기, 공기질측정기, 카메라, 마이크, 방사능측정기, 교통량감지기와 같은 센서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지구는 전자피부로 둘러싸인 거대한 기계 동물이 되어 가고 있다.16) 이러한 지구와 연결된 육체와 기체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어 함께 감정을 연행하는 시대를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은 광범위한 센서 네트워크 연결망 속의 노드 중 하나가 되어 지구적 감각을 느끼며 감정을 표현할 것이다.

이때가 되면 인간만이 ‘진정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과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우리의 개체로서의 몸 안에서만 비롯된 것일까?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 인간과의 대면에서 만들어내는 감정은 오로지 인간만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짜 인간을 통해서 진짜 인간을 이해하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함께 되기’

‘인조’라는 말이 붙은 물건은 가짜로 여겨졌다. ‘인간이 만든 것’이란 의미 뒤에는 ‘자연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으로서 ‘진짜가 아니다’는 전제도 덧붙여져 있다. 자연/인공, 진짜/가짜의 세계상 속에서는 후자의 것은 가치의 위계에서 항상 낮은 곳에 있다. 가짜는 진짜의 진정성을 위협하거나 진짜를 대체할 우려를 낳기도 한다. 우리의 인조인간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 역시 ‘가짜 인간’으로서 진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인공물로 여겨지곤 한다.17)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하는 SF영화들의 상당수가 인간을 배반한 인조인간들의 이야기들이다. 문제는 가짜/진짜의 세계상에서 벗어나 다른 기준이 등장할 때, 진짜/가짜의 가치체계가 전도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가짜가 없으면 진짜를 알 수 없을 때, 가짜의 등장으로 진짜가 생겨났을 때, 가짜의 정교화로 인해 진짜가 더 정교화될 때, 진짜와 가짜는 경쟁과 위계 관계보다는 공존공생의 관계가 된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을 개발한 로봇공학자들은 단지 인간과 비슷한 로봇을 개발하는 데 연구 목적을 한정하지 않고, 인간의 인지 과정을 연구하는 데 안드로이드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18) 안드로이드의 미세한 결점들이 오히려 인간의 인지 과정에 작용하는 요소들을 정확하게 짚어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엉뚱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 맞춤의 방향이 약간 어긋나거나, 몸의 터치에 조금 늦게 반응하는 안드로이드와 대면하는 인간의 반응을 통해서 인간의 인지 과정에서 빠져서는 안 될 요소들을 밝힐 수 있다. 가짜 인간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 진짜 인간의 인지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실험장치로 거듭나고 있다.

로봇공학은 안드로이드를 만들지만, 인지과학은 안드로이드를 활용해서 인간의 인지 과정을 밝힌다. 그래서 로봇공학자 이시구로 히로시를 본 따 만든 제미노이드 HI-1은 전세계 인지과학, 심리학, 신경생리학 실험실을 여행하면서 여러 실험 참가자들을 당혹스럽고 섬뜩하게 만들면서 인간의 인지과정을 밝히는 데 참여하고 있다. 마치 영장류연구센터에서 인간을 연구하기 위해서 인간과 비슷한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을 연구했던 것처럼, 안드로이드는 인간을 이해하기 만들어진다는 또 다른 존재 이유를 갖게 되었다.

기존 인지과학, 신경과학, 심리학이 구축한 인간에 대한 모델은 인간을 신경세포와 같은 부분들의 상호작용으로 다룬다. 이 모델에서 인간은 부분적 요소들로 구성된 집합체로서, 아래(요소들)로부터 위(총체)로의 인간을 구성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안드로이드와 사람의 상호작용 연구는 ‘온전한 인간’이라는 총체성에서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는 ‘인간 같은’ 로봇의 연구이다. 위(총체)로부터 아래로(요소)로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로봇공학자가 온전한 사람과 ‘사람 같은’ 로봇 사이를 차이를 줄이려고 시도한다면, 인지과학자는 인간 같은 로봇과 대면하는 인간을 통해서 인간의 인지과정 모델을 갱신한다. 이 가짜와 진짜의 ‘대화’를 통해서 로봇공학자가 인간처럼 자연스레 상호 감응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를 개발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면, 인간은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 안드로이드의 ‘인간 같음’은 단지 로봇이 인간처럼 되는 ‘의인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의 견지에서는 안드로이드를 인간처럼 이해하면 편리하다. 그러나 인간과 안드로이들를 대칭적으로 본다면? 안드로이드는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물질로 이루어진 다른 몸이다. 육체로서의 인간과는 다른 기체로서의 안드로이드이다. 육체와 기체의 차이는 많은 것을 다르게 만든다. 사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상호감응, 대화 등은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안드로이드 간의 번역을 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다른 쪽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안드로이드로, 안드로이드를 인간으로 끊임없이 번역하는 시도가 안드로이드 개발과 인간 연구의 전모라고 할 수 있다. 센서와 모듈을 새로 장착하는 안드로이드와 실험실에서 실험참가자가 되는 사람 양쪽 모두 스스로의 변신을 통해서 각각의 의사를 번역하는데 참여하고 있다.19) 그래서 안드로이드의 개발이 일방적으로 인간과 비슷해지는 과정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안드로이드와 인간은 서로 번역을 통해서 ‘함께’ 각자 안드로이드가 되고, 인간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영장류 연구에서 영장류에게 인간의 소통방식을 가르쳐 인간과의 소통을 추구했다면, 최근의 영장류 연구에서는 인간이 침팬지 등의 언어를 습득해서 그들과 소통하려는 시도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렇듯 소통은 일방적으로 한쪽이 다른 쪽의 언어를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상호 간의 소통방식을 번역해서 공동학습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로봇과 인간의 사회극: 일본사회와 사회이론의 재조립

앞에서 언급한 튜링 테스트는 보이지 않는 기계와 지적인 소통이 가능한지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공지능은 모습도 인간과 비슷하지 않으며 감성적인 지능 역시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일본 안드로이드 연구자들은 계산, 예측, 기억과 같은 부분적 지능이 아니라, 감응, 체화, 감정과 같은 감성적 지능이 기계가 인간처럼 느껴지기 위해서 더 중요한 요소임을 주장해 왔다. 연구자들은 지능, 감성, 행위 그리고 모습을 포함하는 포괄적 ‘인간 같음’을 시험하기 위해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함께 하는 연극을 택했다. 그리고 관객에게 안드로이드 로봇이 연극 속에서 인간처럼 보였는지를 시험했다. 이러한 연극은 ‘토탈 튜링 테스트’라고 불렸다.20)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연극은 안드로이드가 연기자 및 관객과 상호 감응을 통해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실험으로 제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봇 공학의 실험과 예술활동으로서의 연극의 교차점에 안드로이드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무대에서 시나리오에 따라 연기한다. 다른 연기자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 극 중 상황을 감각할 수 있는 센서를 새로 장착해야 한다. 극 중 상황을 감각하는 것을 넘어서 그 상황과 상대배우의 연기에 맞는 행위와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안드로이드와 연기자는 전혀 다른 몸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같은 시나리오와 무대를 통해서 감정을 함께 자아내는 시도를 한다. 두 존재는 연극 무대라고 하는 인간과 기계의 중간지대에서 다양한 센서와 감각들로 번역을 통한 상호 감응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대에서 공감하는 순간만큼은 인간과 기계는 서로 감정을 공유하며 몸의 차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신화적 순간이 지속된다. 이러한 순간에 관객도 공감하게 된다면 이 토탈 튜링 테스트로서의 연극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대 위에서만이 아니라 무대 밖에서, 연기자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에도 준비할 일은 많다. 안드로이드와의 연극을 통해서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을 끌어내고자 하는 연출자와 연기자의 창조성, 연기에 적합한 센서, 센사, 모델, 모듈을 조립하는 실험실의 작업들,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여러 센서를 장착한 무대 장치, 안드로이드를 연기자로 대하는 관객들의 태도가 결합해서 연극은 연행될 수 있다.21) 공학과 예술, 실험과 연극, 과학과 미학이 안드로이드의 연극을 통해 결합되는 과정에서 감정은 조립체가 된다.

연극 혹은 연행은 사회이론의 핵심적인 은유였다. 행위자는 각자 자신이 맡은 여러 역할 중에서 상황에 맞는 역할을 하는 연기자이다. 그는 스스로 그 연기에 깊게 몰입해야만(deep play)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안드로이드의 연극은 이 사회극이 앞으로 인간들만의 역할극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제안이기도 하다. 기존의 사회이론은 인간, 무대, 역할, 연극 정도로만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안드로이드 연극이 제시하는 사회이론은 사회에 더 많은 것들을 더해서 더 복잡하게 만든다. 안드로이드라고 하는 새로운 사회적 행위자만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센서, 모델, 과학자와 공학자, 연출가, 무대 장치와 관객, 그리고 이것들에 의해 조립되는 감정이 사회극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안드로이드의 연극은 행위자, 역할, 주체, 관계, 그리고 사회 그 자체까지 사회이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재배치 될 것을 제안하는 제안서가 된다.

사회이론은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의 장소를 사회극 속에 마련할 수 있을까? 사회이론은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을 환대할 수 있을까? ‘로봇, 장소, 환대’라는 제목으로 사회이론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일본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안드로이드는 일본사회에서 일본인이 연행하는 사회극의 연기술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이 일본이라고 하는 지역과 연계되는 부분은 일본 안드로이드가 일본에서의 사회극의 참여자가 되기 위해 그에 맞는 센서와 모듈을 장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이론 속에 센서와 모듈이라는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요소들이 더해져야 하는 상황이다.

국가별 산업형 로봇 공급량(2017년 기준)
출처: IFR World Robotics 2018
서비스 로봇 생산국 분포
출처: IFR World Robotics 2018

 

인계간(人械間) 사회로 변화하고 있는 일본: 포스트휴먼 하이브리드 공동체

사회이론과 사회집단으로 안드로이드 로봇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장소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물학을 벗어나서 ‘살아있는’ 행위자로 일본 안드로이드 로봇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과 함께 있는 상황 속에서 감정을 조립체로서 공유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안드로이드 로봇을 우리 사회 속으로 수용하는 일방향적 수용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안드로이드 로봇은 이미 확립된 사회이론과 사회규범에 순응하며 사는 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안드로이드 로봇의 실존은 우리 인간의 변신까지 요구함으로써 안드로이드의 실존과 인간의 실존이 조화될 수 있도록 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으로서 외계물이었던 안드로이드를 수용하는 집주인 역할에 머물 수 없게 된다. 자신을 변형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의미, 이해관계, 감응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안드로이드 로봇에 대한 실질적인 환대가 된다. 이를 위해서는 탈인간중심주의적인 모험이 필요하다. 인간과 그 외의 존재를 양분하는 것이 양식(good sense)였던 시기를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인간을 포함한 포스트휴먼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의 상식(common sense)을 공동구성해나갈 수 있다. 그것은 ‘인간 집단’이 아니라 ‘인계간 집단’으로 불리는 연합 하이브리드 공동체일 가능성이 크다. 이 공동체 속에서 인간과 안드로이드는 서로의 실존을 협상하며 공통된 감각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기술을 머금은 인공물과 인간이 함께 사는 테크노-애니미즘적 장소가 될 것이다. 일본사회를 관찰해 왔던 인류학자들은 일본이 애니미즘과 신토이즘(shintoism)의 사회라고 명명해 왔다. 안드로이드 로봇은 일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비인간 행위자들의 하나로 더해지고 어쩌면 인간과 가장 비슷한 방식으로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행위주체가 될지도 모른다.

인조인간을 만들기 시작한 인간은 ‘조인’을 통해서 기계의 창조자가 되었다. 기계에 욕망을 불어넣고 사랑을 쏟으면서 기계는 ‘살아있는 것’이 되었다. 이제 이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를 숙고하는 인류가 되었다. 이러한 시기의 인류는 더이상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으로 살 수 없게 된다. 인간 외의 여러 존재와 하이브리드 공동체를 구축하는 모험에 나서게 된다. 이렇게 인조인간의 변형과 생성이 기존의 인간됨을 그대로 고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도 인조인간도 모두 인간을 벗어나고 인간을 넘어선다. ‘탈인’ 뒤에 비로소 ‘초인’이 온다.

 

저자소개

이강원(ygwon21@inu.ac.kr)은
인천대학교 조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인류학대학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일본 교토대학교 방재연구소 연구원, 카이스트 재난학연구소 연구교수 등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과학기술인류학, 포스트휴먼론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일본의 지진방재, 동물, 안드로이드 로봇 분야 관련 다수의 저서 및 논문을 출판하였다.

 


1. 오리자, 히라타. 2016. 『일하는 나』 이홍이 역. 2016년 대전 아티언스 페스티벌 공연 한국어 대본 6쪽.

2. 김영학. 2018. “로봇연극에 나타난 언캐니 연구: 히라타 오리자의 <일하는 나>, <사요나라>, <세자매>를 중심으로” 드라마 연구 54:5-31.

3. Lestel, D. 2017. “How Machines Force Us to Rethink What It Means to Be Living.” NatureCulture 4, 38-58.

4. James, W. 2013. The meaning of truth: a sequel to ‘pragmatism’. New York: Hardpress.

5. Turing, A. 1950.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 Mind 59(236), 433–60.

6. Jensen, Casper Bruun, and Anders Blok. 2013. “Techno-animism in Japan: Shinto cosmograms, actor-network theory, and the enabling powers of non-human agencies.” Theory, Culture & Society 30(2), 84-115.

7. 셸리메리. 2014. 『프랑켄슈타인』. 서울:미르.

8. Latour, B. 1996. Aramis or The Love of Technology. Cambridge:Harvard Univ. Press.

9. 이강원. 2017. “섬뜩한 계곡.” 일본비평 17, 44-71.

10. 森政弘. 1970, “不気味の谷.” Energy 7(4).

11. Hiroshi, I. 2007. “Android Science: Toward a New Cross-interdisciplinary Framework.” Sebastian Thuran et al. eds. Robotics Research: Results of the 12th International Symposium ISRR, Springer, 118-127.

12. 레비-스트로스, 클로드. 2006. 『슬픈 열대』. 서울:한길사. 195-196.

13. 人工知能学会. 2005. 『コミュニケーションロボット:人と関わるロボットを開発するための技術』. 東京:オーム社.

14. 이강원. 2017. “디지털 메기와 기술 의례: 일본의 긴급지진속보를 통한 실험적 제의.” 한국문화인류학 50(1), 4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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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강원. 2017. “인조인간과 인간, 함께 인간이 되다.” 에피 창간호, 130-139.

18. Karl F. MacDorman & Hiroshi Ishiguro. 2006. “The Uncanny Advantage of Using Androids in Cognitive and Social Science Research.” Interaction Studies 7(3), 297-337.

19. 이강원. 2018. “센스 & 센서빌리티: 안드로이드(로봇)의 관점과 나름의 인간.” 한국문화인류학 51(2), 221-279.

20. Acaroglu, Gorkem. 2014. “Sayonara interviews: Android-human theatre”, Australasian Drama Studies 65, 289-303.

21. Ogawa, Kohei, Takenobu Chikaraishi, Yuichiro Yoshikawa, Oriza Hirata, and Hiroshi Ishiguro. 2018. “At the Theater—Designing Robot Behavior in Conversations Based on Contemporary Colloquial Theatre Theory.” Geminoid Studies: Science and Technologies for Humanlike Teleoperated Androids, 441-54.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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