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C 네덜란드와 아시아 국가 간 관계 – 조선과 일본을 중심으로 - 

세계 최초로 진정한 상업 사회로 진입하여 해상패권을 차지한 네덜란드가 동아시아 진출 노력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접촉한 당시 조선과 일본은 왜 네덜란드 세력의 진출 시도에 대응하는 태도가 달랐으며, 이로 인해 양국의 국력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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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성균관대학교)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아시아 진출

청어 등 북해 어업으로 조선업, 항해술을 발전시킨 네덜란드는 16세기 들어 발틱해로부터 이베리아반도에 이르기까지 곡물, 목재, 소금, 가죽, 구리·철, 고래기름 등 각종 화물을 실어 나르면서 부를 축적해 나갔다. 그러면서, 포르투갈이 아시아에서 들여오는 후추와 같은 향신료를 유럽에 재판매하는 사업에도 뛰어들어 이익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세기 후반 들어 스페인의 포르투갈 병합(1580년) 이후 새로운 후추 컨소시엄이 형성되고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상인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는데, 당시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네덜란드에 대한 제재라고 볼 수 있는 조치였다. 이에, 네덜란드는 아시아로 직접 가서 후추를 구해오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1594년 어느 날 암스테르담에 모인 9명의 사업가와 한 명의 지도제작자는 리스본에서 위장 신분으로 아시아 무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온 코르넬리스 데 하우트만에게 29만 휠던을 투자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로부터 1년 뒤인 1595년 4월 데 하우트만을 동인도행 무역원정대 총지휘관으로 하는 4척의 원정대가 출항하였는데, 갖은 고생 끝에 인도네시아 반탐섬에 도착, 술탄과 무역협상 와중에 포르투갈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이후 자바섬 여러 해안을 돌면서 얼마 안 되는 후추만 싣고 당초 249명의 선원 중에 단 89명만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이 후추만으로도 모든 손해를 보전하고도 남으면서, 네덜란드내 아시아로의 항해 열기를 촉발시켰다. 암스테르담뿐만 아니라 홀란드나 호른, 앵크하위젠 등 다른 항구들도 회사를 발족시키고 새 선단을 구성해서 아시아로 출범시킨 결과, 데 하우트만이 귀국한 후 4년 동안 65척의 네덜란드 선박이 인도네시아로 갔고 성공적으로 대량의 후추를 가져오면서 유럽의 후추 값이 폭락했고 자바 항구에서 부르는 후추 값도 두 배가 되었다.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던 네덜란드 정부 입장에서는 회사들 간의 과당 경쟁을 통제할 필요성뿐만 아니라, 아시아 시장으로의 무역 확대는 다른 국가들과 전쟁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하나의 회사를 설립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시급했다. 몇 개월간의 협상 끝에 1602년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인 ‘통합된 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VOC)’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동인도회사(VOC)는 전쟁 선포와 평화조약 체결, 요새 건설, 무역 대표에게 해군 사령관 지위 부여 등 국가 기능을 부여하여 ‘자본’과 ‘국가’ 간 결합한 독특한 형태였다. 심지어는 VOC 로고가 새겨진 통화도 발행하였다. 동인도회사는 출범 이후 몇 주 만에 선박들을 출항시켰는데, 세 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①인도네시아와 스리랑카 지역에서 향신료와 목재, 실크를 사올 것, ②중국 해안을 탐사할 것, ③동인도 지역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교역소를 장악할 것이 그 임무들이다. VOC 선박들은 포르투갈과 다른 경쟁국들의 교역소를 무력으로 장악하면서 아시아 교역에서 최강자로 등장했는데, 이 과정에서 현지인들에 대한 무력 사용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있던 영국인 10명과 현지인들을 학살한 암본 사건은 당시 네덜란드인들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암스테르담에 있던 동인도회사(VOC) 본부
출처: Wikicommons

VOC는 1619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점령하고 도시명을 바타비아로 명명한 후 약 300여 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장악하고 통제했다. 1680년대 집계에 따르면,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에서만 1.1만 명 이상의 육상 직원들과 약 4천 명에 달하는 선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 200년의 기간 동안 백만 명이 넘는 유럽인들을 아시아로 보냈고 약 250만 톤에 달하는 아시아 생산품들을 유럽으로 들여왔는데, 이는 경쟁자인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4배나 많은 양이었다고 한다.

VOC는 당시 세계 경제를 재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기존의 아랍·인도·중국 상인들뿐만 아니라 스페인·포르투갈이 구축한 교역망에 비집고 들어가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바타비아에 본부로 두고 페르시아, 인도, 몰루카, 대만, 일본에까지 수십 군데 상관을 설치, 은, 비단·직물, 향신료, 도자기, 아편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아시아 간 상품 교역뿐만 아니라 아시아 내 새로운 역내 교역 체제를 구축하여, 근대적 세계 경제체제를 형성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VOC의 두 번째 기여는 세계 최초로 주식거래 시장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동인도회사 전까지 존재했던 회사들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창립되었다가 목적이 달성되면 회사가 해체되었으나, 동인도회사는 영속적으로 유지되었는데, 이는 바로 시장이 회사 자체를 신뢰하면서 주식을 구입했고 제도적으로는 주식을 제3자에게 되팔 권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식 유통시장이 등장하고 1611년에는 VOC의 주식뿐만 아니라 맥주, 소금, 목재, 구리 등 온갖 상품이 거래되는 암스테르담거래소 건물이 완공되었다.

암스테르담 거래소 전경
출처: Wikicommons

VOC는 17세기 말까지 세계 최대의 회사였다. 1626년에 네덜란드에 있는 VOC 창고에 쌓인 후추만 해도 약 2,721톤에 달했다 하며, 건어물, 고래기름, 설탕, 소금, 비단, 맥주, 담배 등 다양한 상품들이 창고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 이탈리아 토스카나 대공국의 군주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 3세 등 당시 암스테르담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나는 얼이 빠져,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세계 최대의 부를 목격했다.”“여기 암스테르담만큼 일상품과 진귀한 물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세상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외국인들이 이 광경을 보면 다들 놀라서 얼이 빠지며, 세계 상품의 1/4 정도가 암스테르담으로 보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등등 찬사를 쏟아냈다.

번영을 구가하던 VOC도 17세기 말부터 18세기 들어가면서 장기적인 침체에 빠져들었다. 거대한 함선과 다수의 요새, 교역소를 유지·관리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고 후추·육두구와 같은 향신료 인기도 줄면서 가격이 폭락했으며 영국 등 다른 유럽 열강과의 경쟁까지 치열해지면서 수익이 줄었는데, 차와 직물과 같은 새로운 상품 거래에서는 영국이 앞서 있었다. 동인도회사의 몰락을 더욱 촉발시킨 것은 영국·프랑스와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이었다. 특히, 1780년 발발한 제4차 영-란 전쟁에서 1784년 네덜란드가 패하면서 세계 최강국 자리에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고 1795-1813년 간 본국이 프랑스 혁명군대에 들어가면서 대부분의 식민지를 영국에 빼앗겼다. 그동안 동인도회사는 본국과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함께 수입 감소에도 높은 배당금 지불로 부채가 늘어나면서 1798년 파산하였다. 동인도회사 파산 후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무역종합상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식민지들과 동남아와 일본과의 교역을 맡았다. 이런 상태는 이후로도 약 150년간 지속되었다.

 

네덜란드와 조선과의 관계

아시아 진출을 통한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던 17세기 네덜란드는 향신료 생산지인 인도네시아와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과 교역을 길을 뚫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네덜란드는 17세기 상반기까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하멜표류기>를 통해 조선의 상황이 알려지면서 네덜란드는 ‘Corea’라는 이름을 가진 상선을 건조하기까지 하면서 조선과 교역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조선 관계는 네덜란드의 대조선 통상개시 노력과 하멜 보고서에 나타난 조선의 대응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네덜란드의 조선 진출 노력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네덜란드에 조선이 소개된 최초의 책은 반 린스호텐(J. H. van Linschoten)이 자신의 동방 여행기록을 담은 ⟪기행집⟫(1595)과 ⟪동방항해록⟫(1596)으로 알려져 있다. ⟪동방항해록⟫에서의 조선 부분은 더 구체적인데 먼저 지리적 위치를 설명한 후 “일본 상인들은…코레이(Coray)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교역을 하고 있다 한다…포르투갈어로 꼬레 섬(Ilhas de Core)라고 부르는 이 큰 섬의 실제 국호는 차오시엔(Chausien)이다…일본을 행선지로 한 항해인들이 폭풍을 만나 뜻하지 않게 그 나라에 파선 또는 정박한 후 고토섬으로 돌아오는 사건이 비일비재했다…”라고 적었다. 조선을 섬으로 인식한 것은 제주도나 남해안의 어느 한 섬을 조선 전체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고, 차오시엔은 조선의 중국식 발음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가 1602년 출범하면서 인도네시아에 이어 일본과 교역을 모색하던 중,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은 스페인·포르투갈 상인들의 경제력 확대와 신부들의 포교사업을 억제하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였고 1609년 공식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기유약조도 같은 시기여서 네덜란드인 사이에는 조선과도 무역을 시작하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히라도에 설치된 네덜란드무역관장 자크 스펙스(Jacques Specx)가 1610년 11월 3일 VOC 최고기관인 17인 위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일본 당국에 조선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재가를 요청하였으며…조선으로 가서 1년에 서너 차례 무역을 하자고 교섭을 벌였지만, 조선왕국의 무역금지령과 쓰시마 영주의 반대로 어려운 실정이지만, 비단, 표피, 약제품 등이 가져올 이익을 고려해서 계속 추진해 나갈 예정입니다…”라고 썼으며, 마우리츠 왕자도 일본 천왕에게 보낸 12월 18일자 서한에서 조선국과도 거래할 수 있도록 선처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1620년대 초까지 인도네시아 군도와 말레이 반도에서 경쟁국들을 몰아내고 무역권을 장악한 VOC는 시암, 베트남, 일본 등지에 무역관을 설립하고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전체로의 무역 확장을 목표로 정했다. 1622년 4월 바타비아항을 떠난 네덜란드 원정대가 포르투갈 지배하의 마카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페스카도레스(펑후제도)를 점령한 뒤 차후 기회를 틈타 중국 본토로 들어가기로 작전을 변경하였는데, 쿤(J. P. Coen) 바타비아 총독이 원정대에 보낸 훈령을 보면 “중국과 전쟁에 들어가면 어떤 무력을 가해서라도 중국 해안에 연계된 모든 지역을 전부 점령바랍니다. 모든 지역이라 함은 해남도에서부터 남경, 코레아를 포함시킨 모든 해안영역을 의미합니다…코레아를 점령하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으리라 봅니다.”라고 되어 있고, 이에 대한 원정대는 보유 선박의 부족과 계절풍 때문에 코레아 원정은 어렵다는 보고를 보냈다. 1624년에도 바타비아 총독은 중국 해안과 코레아를 탐험하고 각 나라의 지형을 만들라는 지시를 보냈으나, 중국 원정이 중국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로 끝나게 되고 펑후제도에서 포모사(Formosa: 대만)로 후퇴하면서 코레아 원정도 일단 포기하게 되었다.

영국, 스페인에 이어 1637년 포르투갈의 일본 철수로 네덜란드만이 유일하게 남은 유럽국가로서 일본과의 무역 독점뿐만 아니라 중‧일 중계무역에 동남아 무역까지 무역을 장악하였으나, 코레아와의 교역은 일본으로만 되어 있어 바타비아 식민정부는 조선에 대한 정보 수집을 히라도 무역관에 의뢰하였고, 쿠커바커르(N. Couckerbacker) 관장은 상세한 보고서를 보냈는데, 특기할 내용으로는 “대량 생산 추정 품목으로는 쌀, 구리, 면·아마포류, 인삼 등이 있으며 조선과 교역에서 이익을 남기는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이 거래에 끼어드는 것을 허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극히 소심하고 겁이 많은 조선은 외국인을 강력히 배척하고 있다.”인데, 이 보고서는 네덜란드 최초의 한국 관련 보고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당시 눈길을 끄는 보고서 중에는 조선 사절단의 일본 방문과 관련된 기록들이다. 1625년 11월 17일 히라도 무역관장이 바타비아 본부에 보낸 보고서 중에는 “사절단의 요청은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후금에 대항할 원병이었다. 일본은 지원병을 출병시킬 것처럼 제스쳐를 취해 그들에게 큰 기대를 심어준 것 같지만, 전쟁 준비 소문은, 조선 사절단이 출발하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번 쇼군은 외국과의 전쟁을 통해 지방 제후들에게 부를 주기보다는 성을 건축하는 업무를 부과하여 궁핍 속에 허덕이게 하려는 유형의 사람이다” 1637년 1월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에 대한 네덜란드인들의 관찰 보고는 조선통신사의 화려한 에도 도착 장면을 상세히 기록한 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일본 천황에게 청나라 군대와 대적하기 위해 원조를 요청해 왔다고 하며, 최상품 인삼을 들어 있는 금 항아리 1병, 양마 3필, 매 40마리, 호랑 이가죽 40장, 보석으로 세공된 금잔에 국왕 친서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고 적었다.

이러한 히라도 무역관의 보고에 대해 바타비아 본부에서는 1638년 6월 현 상황에서 볼 때 별다른 교역 성과를 거두지 못하리라는 점을 잘 이해했다고 보냈으나, VOC 본부 17인 위원회는 ‘코레아를 발견하라’라는 훈령을 내리기로 결정하면서, ‘금과 은의 섬(Goud-en Zilvereilanden)’ 일명 보물선 원정대를 1639년에 파견하였다. 크봐스트(Mathijs Quast) 함대 사령관은 일본 동쪽 40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보물섬’과 함께 코레아와 중국 북부 지역 개척이라는 임무를 띠고 두 척의 범선이 6월 바타비아를 출항하였으나, 태평양상에서 섬조차도 구경하지 못하고 떠다니다가 방향을 일본으로 돌려 타타르와 코레아를 탐험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열병으로 인한 인명 손실과 풍랑으로 두 척이 다 파손되어 코레아 원정을 포기하고 포모사를 거쳐 바타비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왔다. 이후 1642년과 1643년에 2차, 3차의 ‘보물섬’ 원정이 재시도되었으나, 청나라 탐험 지시만 있었을 뿐, 코레아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며 원정 자체도 실패로 막을 내렸다.

조선에서 탈출하고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한 하멜 일행은 VOC 간부들과 면담에서 조선과의 통상을 강력히 건의하여, VOC 본부는 1669년 ‘코레아(Corea)’ 이름의 상선을 건조, 바타비아로 보내면서 바타비아 총독에게 조선과의 통상을 추진해 보라는 지시를 보냈지만, 식스(D. Six) 데지마 상관장은 “조선은 빈곤하며 서양인을 환영하지 않는 데다, 일본과 중국도 반대할 것이므로 일본과 교역을 유지하는 현 상황이 최선”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보낸 결과 VOC 본부도 최종 수용하였다.

 

하멜 보고서를 통해 나타난 조선의 대응

포모사 북부를 점령하여 중국‧일본 간 중계 무역지를 구축했던 스페인을 축출하기 위해 노력했던 네덜란드는 드디어 1642년에 그 목적을 달성, 포모사 식민정부를 수립하여 후추 등 향신료를 중국의 금‧은, 비단, 도자기와 교환하여 인도와 유럽에 내다 파는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는데, 1652년 토착 농민들의 반란과 명나라 유신인 정성공의 공격설 등으로 불안정한 정세가 조성되자 VOC 본부는 강력한 지도자로 세자르(C. Caesar) 신임 총독을 임명하고 포모사로 부임할 때 탔던 ‘드 스페르버르(De Sperwer)’호가 1653년 7월 29일 64명의 선원과 3만여 길더에 달하는 화물을 싣고 포모사에서 나카사키로 떠났지만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이 배가 바로 운항 도중에 태풍을 만나 8월 15일 퀠파르트(Quelpaert:제주도) 해변에 도착한 하멜 일행이 탄 배였다.

<하멜 일행의 조선 생활과 탈출 요지>

난파당한 배에서 36명이 생존한 것을 발견한 조선은 대정현에서 제주목으로 이동하여 옮겨져 심문한 후 광해군 말년에 살던 집에 머물도록 조치한 후, 조정에 보고한 결과, 1654년 5월 한양으로 이송할 것을 지시하였다.

⟪사흐만 판 하멜보고서⟫ 표지
출처: Henny Savenije

하멜 일행은 조정이 보낸 박연(벨테브레)를 만나,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박연은 “1627년 조선에 상륙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걸했으나, 의식주는 보장 할 테니 여생 마칠 때까지 살라”는 반응이었다면서, 사정이 같을 것임을 이야기하였다. 따뜻한 배려를 해 준 이원진 제주목사가 떠난 후 대우가 형편없어지고 미래에 대한 공포심에서 6명이 탈출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곤장 25대씩 맞았다.

1654년 7월 한양에 도착해서 효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하멜 일행은 일본으로 출국을 탄원했으나, 효종은 외국인을 출국시키는 것은 관습이 아니므로 죽는 날까지 살아야 하며, 생계를 유지시켜 주겠다는 언급하였다. 이후 훈련도감 소속 국왕 호위병으로 배치되어 근무하는 도중 항해사 등 2명이 가출금지령을 어기고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 앞으로 달려 나가 큰 소동이 있었으나,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일단 마무리한 뒤 조정 논의를 거쳐 전라도로 보내지고 1663년까지 3년간 지속된 대기근 시기에 3팀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하멜 일행은 제주도 생활에 이어, 전라도에서도 담당 지방관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고 “책임자에 따라 편했다가 곤란했다 하는 식… 이국 땅에 와서 처참한 포로 신세로 있는 우리 처지에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 신에게 감사..”라고 당시 심정을 기록하였다.

⟪스티흐터르 판 하멜보고서에 수록된 목판화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부터 탈출할 때 까지 상황을 표현
출처: Henny Savenije

1666년 9월 새 지방관이 새끼를 꼬라고 하는 등 못살게 굴자 “우리의 앞날은 노예와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라도 탈출을 하기로 결심하고, 친한 조선인 친구를 통해 배를 구입하고 틈틈이 필요 물품을 산 뒤 9월 4일 여수 인근을 출발한 후 9월 8일 고토에 도착하였다. 괴상한 옷차림을 한 유럽인 8명이 돛단배를 타고 일본 고토에 도착했음이 보고되었고 바로 데지마 상관으로 이송되었는데 조사 결과, 13년 전 ‘드 스페르버르’호에 타고 있었던 승무원들로 밝혀졌다. 8명의 승무원들은 1년여 동안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일본 측으로부터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아야 했고 드디어 1667년 10월 22일 데지마 섬을 떠날 수 있었고 하멜을 제외한 승무원들은 바타비야를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한편, 총 64명의 선원 중 제주도에 난파 당시 생존자 36명 중 대부분 병사하고 처형당하기도 하여 16명만 남아 있었는데, 일본 측은 쓰시마 도주를 중재인으로 하여 조선과 외교적 협상을 벌여 사망으로 통보된 한 명을 제외한 7명이 1668년 9월 16일 나카사키로 인계되었다.

<하멜 일행에 대한 조선 대응 분석>

조선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이 국가 위기 상황이 아닌 경우는 표류자들에게 출국을 허용하는 등 관대한 정책을 유지하였으나, 하멜 일행을 억류한 것은 당시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으로서는 조선의 내부 사정에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박연의 예에서 보듯이 서양 군사기술을 활용할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국왕 호위부대로 배속시킨 것은 별다른 무기 제조기술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성해웅 저 ⟪연경재전집⟫에서는 “능숙한 장인과 쇠를 잘 다루는 사람은 대부분 바다에서 빠져 죽었고..”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1637-8년간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을 전해 들은 조정은 인도적인 견지에서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가면 처형될 가능성을 염려했을 수도 있고, 청나라에 볼모로 가있던 효종은 하멜 일행의 탈출 시도와 청 사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등 사건을 벌였어도 끝까지 살려둔 것은 개인적인 동정심으로 볼 수 있다. ⟪하멜 보고서⟫에도 “효종과 인평대군에게 우리 생명을 빚졌다.”라고 적었다.

 

네덜란드와 일본과의 관계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태평양를 횡단한 네덜란드 무역선 ‘리프데(Liefde)’ 호가 1600년 4월 일본 분고에 표착한 것은, 그동안 동아시아 진출과 교역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포르투갈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네덜란드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두 처형 건의를 무시하고 항해사를 직접 접견하고, 서양 정세,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과 조선술을 듣고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쇼군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경제력에 최우선을 두고 새로운 교역 루트 개발과 은 추출법 입수를 목표로 스페인에 접근하였으나 스페인의 기피로 네덜란드와의 통상에 나서면서, 1609년 히라도에 상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9년 VOC에 발급한 일본 도항허가증
출처: Wikicommons

이후, 포르투갈과 일본 간 분쟁이었던 ‘마카오 일본인 소요사건’(1608년), ‘데우스’ 호 폭침 사건(1610년)을 통해 포르투갈 세력이 쇠퇴하는 계기가 있었던 데다, 기독교인들의 반란으로 알려진 ‘시마바라 난’(1637년) 배후에 포르투갈 세력이 있다는 의심을 사게 되면서 막부는 1639년 포르투갈 선박의 일본 입항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사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통일에 기여한 기독교인들을 적대시하지 않았으나, 사상통제 필요성으로 1612년에 금교령을 확대하고 1623년 포르투갈인 출국 명령, 1624년 에스파냐와 국교 단절 등 강경한 조치를 취해 왔었다. 반면에, ‘시마바라 난’ 당시 막부의 요청에 따라 무장선을 동원하여 반란의 본거지였던 하라성을 포격하는 등 지원하였던 VOC는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 상관을 받고 독점 무역권과 함께 가격 통제를 면제받는 등 인센티브를 받게 되었고, 이로써 네달란드는 200여 년간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된다.

일본 내 히라도 상관
출처: Wikicommons

 

결어 시사점과 평가

17세기 당시 세계 해상 최강국이었던 네덜란드는 아시아 국가 전체와의 교역을 통한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들과 접촉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일본과 교역이 순조롭게 시작되었고 이어서 조선과도 무역을 개시하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개방을 원치 않는 조선과 일본의 반대로 결국 수포로 돌아간 것은, 기독교와 외국인 접근을 차단하면서도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세계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 강국으로 나아간 실용적인 일본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의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하멜 일행을 제대로 활용도 하지 않고 계속 억류만 하고 있다가 결국 탈출하게 만든 조선 지도자들은, 이보다 50여 년 전 네덜란드 상선이 도착하자마자 보유 무기를 모두 압수하고 직접 접견한 항해사를 고문으로 앉혀서 자문을 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도력에 비교해 볼 때 큰 차이를 보인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이다. 물론, 당시 포르투갈 등 서양 세력과의 교역을 통해 세계정세를 알고 있던 일본에 비해 조선 조정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이 질문에 대한 결론은 양국이 처한 상황이 너무도 다른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멜보고서⟫에서도 기록되어 있듯이 당시 조선은 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청의 간섭을 받고 있는 데다 복수 전쟁을 준비 중이어서 하멜 일행을 드러내 놓고 활용하지 못한 데다, 특별한 기술도 없었던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게다가, 일행 중 2명이 청 사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건으로 이미 조선을 떠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행 일부를 전라도로 보내고 나머지도 다 보낸 것은 사실상 활용을 포기했음을 보여준다.

⟪하멜보고서⟫를 통해 나타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전 국민을 훈련시키고 일본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장면에서 효종이 진지하게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속되는 기근과 일본의 지원 거절, 효종의 서거로 북벌론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사항은, 조정이 제주목사의 보고에 반응하는 데 7개월이 걸리는 정책 지연이 있었던 점, 그리고 아무리 국가재정이 어려웠다 하더라도, 지방관들에 따라 하멜 일행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고 일부는 심지어 노예처럼 부려먹어 하멜 일행이 이런 노예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걸고 탈출하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장면은 조선 시대 조정의 정책 결정 시스템과 지방 관리들의 수준이 형편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반면, 일본과 네덜란드는 실용적인 접근과 경제 부흥정책이라는 상호 이익 일치로 200여 년간 훌륭한 파트너 역할을 하였다. 네덜란드의 선진 문물과 기술 수준을 확인한 일본 막부는 쇄국정책 하에서도 이를 활용하였고, 기존의 조공관계를 요구하는 중국과의 관계를 끊으면서까지 탈아입구(脫亞入毆)의기반을 구축하고 20세기 초 세계 강국으로 등장하는 힘을 키우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본다. 네덜란드는 선두주자였던 포르투갈·에스파냐와는 달리 기독교 포교를 포기하고 막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 내부 반란에 무력 지원하는 장면은 네덜란드 실용외교의 성공 비결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네덜란드의 도움으로 국력 강화와 함께 세계정세를 꿰뚫고 있던 일본이 1876년 강압적으로 체결시킨 강화도조약 때까지 200여 년 간 쇄국으로 일관한 조선의 지도자들은 17세기 때부터 아시아에 불어 닥친 상황을 전혀 몰랐고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고, 우리의 외교에서 명심해야 할 점이다.

저자 소개

이윤영(coolyoung21@gmail.com)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이다. 성균관대학교. 서울대학교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경제학사. 석사를 각각 받았으며, 성균관대 법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1987년 외교부에 입부한 후 영국, 미국, 코트디브와르, 유럽연합대표부를 근무하고 자유무역협정교섭국장 역임시 여러 나라와의 FTA 협상 수석대표를 담당하였다. 주방글라데시.부탄.네덜란드 대사를 역임하였으며, 네덜란드 대사 당시 세계화학무기금지기구(OPCW) 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1년간 활동하였다. 현재 성균관대 객원교수, 국제조정센터 이사로 있다.


참고문헌

  • 강준식. 2002.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서울 : 웅진닷컴
  • 주경철. 2003.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서울 : 산처럼
  • 지명숙․왈라벤. 2003. ⟪보물섬은 어디에⟫. 서울 : 연세대학교 출판부
  • 국립제주박물관. 2003. ⟪항해와 표류의 역사⟫. 서울 : 솔
  • 신상목. 2019.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계사⟫. 서울 : 뿌리와 이파리
  • 김태유‧김대륜. 2017. ⟪패권의 비밀⟫. 서울 :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 러셀 쇼토 저. 허형은 역. 2013.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 서울 :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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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iemeijer, Hendrik E., Thomas Benjamin, ed. 2007. Dutch United East India Company. Michigan : G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