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아시아 종교, 그리고 새로운 존재방식의 상상

아시아는 ‘하나’가 아니라 지리적으로 광대하고 종교적으로 다양한 지역이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종교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는 ‘전 지구적’ 사건이다. 이 글은 인류의 공통적 팬데믹 경험이 드러낸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대조해 살펴보고, 재난 속에서 아시아 종교가 보이는 ‘위로’와 ‘위협’의 두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팬데믹 이후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데 종교가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음방역’의 영성과 ‘문명 전환’의 지혜에서 찾아보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윤리적 실천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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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일 (성공회대학교)

아시아종교의 다양성

아시아는 하나가 아니다. 지리적으로 아시아는 동쪽으로 일본, 서쪽으로 터키, 남쪽으로 인도, 북쪽으로 러시아 일부에 이르는 다섯 아시아로 분류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아시아의 종교도 하나가 아니다.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샤머니즘 등 아시아에서 탄생한 많은 종교들이 아시아 전역에 존재한다. 게다가 같은 종교라고 해서 다 같은 것도 아니다. 이슬람이 사실상의 지배종교인 인도네시아의 무슬림과 소수종교인 중국 신장지구의 위구르 무슬림은 정치적, 문화적 처지가 크게 다르다. 같은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만 보더라도 ‘신천지예수교회’와 ‘사랑제일교회’ 등 종교적, 정치적 근본주의 집단과 복음주의 집단, 진보적 에큐메니컬 집단 간의 종교적 거리는 마치 ‘다른 종교’ 사이처럼 멀다. 이와 같은 다양성 때문에 “팬데믹과 ‘아시아들’의 ‘종교들’”이라는 복수형 제목이 어색하지만 더 정확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아시아 종교의 팬데믹 경험과 반응을 들여다보면 다양성 못지않게 공통성도 발견하게 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지역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아시아인의, 아니 세계인의 삶과 종교에 거대한 충격을 주고 있는 보편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세의 흑사병이나, 20세기의 1, 2차 세계대전, 1918년 스페인 독감 등도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넘은 재난이었다는 점에서는 ‘세계적’ 사건이었지만,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지역과 나라로 순식간에 퍼진 코로나19 팬데믹만큼 ‘전 지구적’ 사건은 아니었다. 알랑 바디우는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매우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는 전 지구적 ‘사건’인 팬데믹을 통해 인류는 ‘새로운 존재 방식’을 어떻게 결정하게 될까?

어떤 사건과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한 사유 사이에는 시간적 거리가 필요하다. 헤겔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 녘에야 날개를 편다.”라고 말했던 것도 사유는 일어난 사건의 원인과 의미를 사후에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팬데믹의 ‘정오’ 쯤을―바라건대 ‘새벽’이 아니기를!―지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아시아들’의 ‘종교들’이 경험하고 있는 팬데믹 사건과 그 사건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성찰하고 해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대 팬데믹에 대한 아시아 종교들의 다양한 경험과 반응을 크로키 하듯 포착해 봄으로써 코로나 이후 아시아와 종교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상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아시아의 다양한 종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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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침몰과 동양의 부상?

중국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의 진원지로 알려졌고 초기 피해도 컸지만, WHO의 팬데믹 선포 후 감염 확산을 강력히 제어하면서 오히려 보건 방역 모범국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만이 아니라 대만, 베트남, 태국,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재난을 통제·관리했다는 사실이다. 실시간 세계 통계 사이트인 〈Worldometer〉의 2021년 4월 7일 ‘코로나바이러스 업데이트’에 따르면, 중국의 누적 확진자 수는 90,329명이고 일일 확진자 수는 24명이다. 대만의 누적 확진자 수는 1,050명, 일일 확진자 수는 2명이고, 베트남은 누적 2,648명 일일 11명이다. 태국은 누적 29,571명 일일 250명이고, 한국은 누적 106,230명 일일 478명으로, 불안한 증가세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선방 중이다.

반면 서양 국가의 피해 상황은 여전히 심각하다. 같은 4월 7일 미국의 누적 확진자 수는 31,557,144명이고 일일 확진자는 59,019명이다. 프랑스는 누적 4,841,308명 일일 8,045명이고, 영국은 누적 4,364,529명 일일 2,379명이다. 이태리는 누적 3,686,707명에 일일 7,767명, 스페인은 누적 3,317,948명에 일일 6,623명이다. ‘진정세’로 돌아섰다는 게 이 정도다. 특히 미국의 경우 ‘일일’ 확진자 수 최대 기록은 2021년 1월 8일의 308,995명으로, 위에서 언급한 아시아 다섯 나라의 ‘일 년’ 이상 누적 확진자 수를 모두 합한 229,828명보다 훨씬 더 많다. 선진국으로 자처해 왔던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보건의료 체계만이 아니라 사회 체제의 붕괴라고 할 만큼 무능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국가별 코로나 바이러스 누적/일일 확진자 현황 (2021.4.7. 기준)
출처: Wordometer 코로나바이러스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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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차이를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우선은 아시아가 하나가 아닌 것처럼 서양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과 서의 유형적, 통계적 차이가 있다 해도, 그 차이의 원인은 다양하고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체제 우월성 신화가 깨지면서 자존심이 상한 서양 비평가들 중에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상대적 방역 성공은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와 유교문화 때문이라고 폄훼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공산당이 정치적 지도력과 사회적 장악력을 발휘하고 있는 나라에는 권위주의적 요소가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팬데믹 시기 중국이 실시한 ‘전시체제’나 베트남이 단행한 ‘국경폐쇄’는 공산당의 강력한 주도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나 대만처럼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발전되고 정착된 국가의 방역 성공 사례도 있다. 또한 유교 전통이 동아시아인의 삶에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못지않게 힌두교, 불교, 도교, 그리스도교, 샤머니즘 등의 종교적 영향도 깊고 풍부하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방역 성공은 권위주의 체제나 유교 문화 때문이라기보다는 아시아인의 심성에 흐르는 ‘관계적 세계관’ 또는 ‘공동체주의’ 덕분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 외에도, 태국이나 베트남처럼 농업이 여전히 중요한 경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상대적으로 야외 활동 시간이 많아 ‘사회적 거리두기’에 용이했다는 점, 홍콩과 중국처럼 사스 등 바이러스 감염병을 호되게 겪었거나 한국처럼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해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점도 아시아 국가가 팬데믹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한 원인이라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또한, 흥미롭게도, 태국 공공보건부 코로나19 대변인 타위신 비사뉴요틴(Taweesin Visanuyothin) 박사는 신체 접촉을 하지 않고 인사하는 태국과 메콩 지역 국가의 문화가 방역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The New York Times, 2020.7.16). 즉 악수나 허그 대신 적절히 거리를 둔 채 두 손바닥을 합하여 인사하는(합장, 合掌) 문화 덕분이라는 것이다. 이는 힌두교, 불교, 중국종교 등 아시아 종교가 공유하는 인사법이기도 하다.

팬데믹에 대한 성공적 대응을 이유로 아시아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방역의 성공이 반드시 체제의 성공은 아니며, 한 국가의 확진자 수가 그 국가의 행복 지수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서양이 팬데믹으로 인한 보건의료적 문제만이 아니라 가난, 인종차별, 아시아인 혐오, 극우의 확산 등 사회적 문제로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아시아도 의료적 재난과 사회적 재난을 이중으로 겪고 있다. 한국의 경우, ‘K방역’의 성공은 불평등이 ‘K자’ 모양으로 양극화된 ‘K경제’로 인해 빛이 바랬다. 코로나19가 심각했던 2020년에 ‘주택’과 ‘주식’ 광풍이 불었던 것은 경제적 불평등이 야기한 집단적 불안과 관련이 있다. 또한 코로나19 이후 한국의 여성 자살률이 급증한 것도 주목해야 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1월에서 6월 사이 20대 여성 자살자는 296명으로 전년 207명보다 크게 늘었다. 아시아 다른 나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본도 2020년 여성 자살률이 전년 대비 15% 증가했고, 10월에는 전년 동월보다 70% 증가했다(BBC, 2021.2.18.). 이는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더욱 불안정해진 여성들의 불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미얀마는 군부세력의 쿠데타와 학살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고, 인도에서는 무슬림 혐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 외에도 아시아 많은 나라에서 소수자, 외국인 차별과 혐오가 발생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물학적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이 폭력과 차별과 혐오의 사회적 바이러스다. 만약 팬데믹 시대의 ‘아시아적 가치’가 실재한다면, 그것은 국가주의나 집단주의가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를 환대하는 공동체주의로 발현되어야 할 것이다.

맞잡은 손 그리고 공동체
출처: Image by Bob Dmy from Pixabay

 

종교의 두 얼굴 : ‘위로자위협자

재난의 위기는 종교의 기회일 수 있다. 재난의 원인을 모르고, 설령 알더라도 해법이 없는 한계 상황에 처할 때, 인간은 초월적 신이나 힘을 믿는 종교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재난을 해결하지는 못해도 재난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태를 받아들이고 견디게 해 줄 수 있다. 또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다. 이는 과학기술혁명시대에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자 제넷 S. 벤첸은 WHO의 팬데믹 선포 직후인 2020년 3월 구글 검색어에서 ‘기도(prayer)’가 2월보다 50% 가까이 급증했다고 밝혔다(Bentzen, 2020). 미국의 연구조사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팬데믹 직후 조사에 따르면 팬데믹으로 인해 신앙이 약화 되었다는 응답자는 2%인데 비해, 오히려 깊어졌다는 응답자는 24%였다(Gecewicz, 2020). 이는 아시아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팬데믹의 특징 중 하나는 종교가 위로자의 얼굴만이 아니라 위협자의 얼굴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팬데믹 이후 신천지예수교회와 사랑제일교회 등 한국 그리스도교(개신교) 교회와 단체들이 감염 확산의 직간접적 원인 제공 및 통로 역할을 한 것은,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의 방역 성공과 대조되면서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난겨울 종교평화국제사업단(IPCR)이 주최하고 한·중·일 세 나라 종교인, 종교학자들이 참여한 동북아 국제 세미나가 온라인으로 열렸을 때, “팬데믹 시대, 종교의 두 얼굴”(정경일, 2021)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나는 제한된 시간 때문에 신천지 사태 등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는데,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정 토론자였던 일본 측 학자는 신천지예수교회를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평가와 대안까지 제시했고, 실시간으로 중계된 참가자들의 표정을 보니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과 그 배경까지 잘 아는 눈치였다. 이는 세계가 인터넷으로 초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겠지만, 동시에 각 국가의 종교에서도 정도만 다를 뿐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종교는 위로자와 위협자의 두 얼굴로 나타난다. 종교가 팬데믹 시대에 위협이 되는 것은 과학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기보다는 전통에 대한 맹신 때문이다. 일상에서는 합리적, 과학적 사고를 하며 살아가는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적 교리나 의례와 충돌할 경우 합리성과 과학성을 거부하고 포기하는 것이 문제다. 예를 들면, 보통 때는 열이 나고 목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현대 의학 기술과 지식에 몸을 맡기지만, 의무적 기도나 예배가 문제가 될 때는 보건의료 전문가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2020년 코로나19 감염 확산 우려에도 대규모 야외 집회를 고집했던 한국의 전광훈 목사는 “야외에서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 “걸리더라도 집회에 나오면 치유된다.”라며 지지자들을 선동했다. 반대로 근본주의적 신앙에 사로잡힌 대중이 합리적 지도자에게 반발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의 무슬림 지도자 KH 로비킨 엠하스(KH Robikin Emhas)가 금요일에 모스크에 모여 기도하는 의무를 집에서 각자 지켜도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을 때, 그것을 ‘불신앙(infidel)’이라고 비난하는 무슬림의 시위가 일어났다(Rappler, 2021.3.29.).

백신과 관련해 이슬람 근본주의 신앙이 걸림돌이 되는 일도 있었다. 이슬람법은 돼지고기를 섭취하는 것을 금하는데(하람, haram),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 돼지에서 추출되는 트립신(trypsin)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로 불거졌다. (이에 대해 아스트라제네카는 돼지는 물론 어떤 동물 추출물도 자사 백신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인도네시아 종교 지도자들의 울레마협의회(MUI)는 지금은 ‘긴급상황’이므로 이슬람법에서 ‘허용되는(할랄, halal)’ 성분의 백신이 떨어질 경우 ‘하람’ 성분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사용해도 좋다는 나름의 ‘합리성’을 보여주기도 했는데(Rappler, 2021.3.29.), 팬데믹의 절박한 예외 상태에서도 그런 종교법적 논의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 외에도 종교적 근본주의와 맹신이 재난을 악화하는 위협자가 된 사례가 많으므로, 이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필요하다.

아무튼, 종교가 위협자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것은 재난 시대에 종교권력이 갖고 있는 위기의식과 관련이 있다. 재난으로 드러난 종교의 무능과 재난이 가속화한 탈종교화―종교 제도와 교리와 의례의 상대화, 신자의 개인화―에서 생존의 위기를 느낀 종교권력이 전통을 고수하려다 대중의 안전과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재난 시대의 종교가 살아남는 최선의 길, 어쩌면 유일한 길은 대중의 신뢰와 사랑을 얻는 것이다. 사랑받는 종교가 살아남는다. 그리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길은 대중을 사랑하는 것이다. 재난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종교의 자유’보다 ‘사랑의 의무’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애절한 기도
출처: Photo by Michael Heuss on Unsplash

 

종교의 쓸모 : ‘마음 방역문명 전환의 상상력

재난 속에서 제도종교는 사회적 신뢰를 잃고 추락하지만, 대중의 종교심은 약해지지 않거나 오히려 더 깊어진다는 사실은 종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사회문제’가 되어버린 종교의 현실을 목격하면서도 대중이 종교적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은 위기의 때에 종교가 주는 위로와 의미 때문일 것이다.

팬데믹이 해를 넘겨 지속되고,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종식’의 때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은 대중의 불안과 피로감을 가중하고 있다. 코로나 블루(우울), 코로나 레드(분노), 코로나 블랙(절망)은 재난 속의 ‘고통(pain)’을 ‘괴로움(suffering)’으로 만들고 있다. 앞서 말한 여성 자살률 급증이나 소수자 혐오 등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장기화된 재난이 인류의 정신과 마음에 남길 상흔과 트라우마도 깊을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각 나라의 세속 정부와 시민사회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심리방역’을 시도하고 있다. 팬데믹 시대 종교의 쓸모 중 하나는 바로 이 이 심리방역, 마음방역에 기여하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평화롭게 하는 지혜와 수행을 수천 년 동안 계발해 왔기 때문이다.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 명상, 힌두 요가, 도교 수련, 그리스도교 관상기도와 중보기도 등 영적 수행법은 불안의 격랑에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닻과 등대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재난 시대 종교의 또 다른 쓸모는 문명 전환의 상상력이다. 팬데믹이 ‘문명사적 충격’인 까닭은 현대 인류가 절대적인 정상 또는 표준으로 이해해 온 산업문명이 얼마나 취약하고 상대적인 것인지를 충격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파도에 쓸려 순식간에 뭉그러지는 모래성 같은 체제의 한계와 근본문제를 각성하며 변화를 각오한 사람들은 ‘코로나 이전(Before Corona)’과 ‘코로나 이후(After Corona)’의 세계는 완전히 다를 거라고 전망했다. 재난 초기에는,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말한 것처럼, 팬데믹을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문(portal)’으로 여기는 집단감정과 집단지성이 생동했다(Roy, 2020).

하지만 인간은 긍정적, 부정적 의미 모두에서 현실에 ‘적응하는 존재’다. 이는 한편으로는 재난 속에서도 삶을 지속하게 하는 장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난의 충격과 의미를 망각함으로써 재난으로부터 배우고 변화할 기회를 잃게 하는 단점이기도 하다. 적응하는 인간은 망각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재난 초기에 인류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보았던 것, 느꼈던 것, 바랐던 것을 의도적으로 기억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 ‘적응하는 존재’이기를 멈추고 ‘변화하는 존재’가 될 때, 과거로 돌아가려는 ‘경로의존성’을 탈피하고 새로운 세계로 향한 문을 열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종교의 역할이 필요하고 가능하다. 종교에는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상상력의 지적, 영적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시아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 도교의 자연관, 유교의 우주관과 인간관, 아브라함계 종교들―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의 창조론 등은 현대 서양 산업문명이 간과해온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성을 깨닫고 회복하게 해주는 지혜와 영성의 원천이다. 종교는 팬데믹을 종식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새로운 문명과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수는 있다. 어쩌면 종교의 미래는 이 참여의 결과에 달려있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영성
출처: Photo by William Farlow on Unsplash

 

나쁜 치유자의 좋은 치료제?

종교인들의 국제 세미나에서 “팬데믹 시대, 종교의 두 얼굴”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을 때, 한·중·일 세 나라의 지정 토론자들이 내게 던진 물음 중 하나는 강조점에 대한 것이었다. 종교의 어두운 면보다 문명 전환을 위한 지혜라든가 마음의 평안을 위한 영성 같은 밝은 면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라는 것이었다. 그 자체가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반응이었다. 왜냐면, ‘두 얼굴’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듯 나는 종교의 부정성과 긍정성을 모두―분량도 비슷하게―이야기했는데, 토론자와 참여자는 내 주장을 ‘종교비판’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이야기의 전체적 분위기나 어조가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종교의 밝은 면을 ‘더’ 강조해 말했다면 토론의 톤이 ‘덜’ 비판적이었을까? 아마도. 내가 강조점을 무엇에 두었든 어떤 톤으로 이야기했든, 종교에 대한 사회적 불신과 반감을 지역적, 지구적으로 체감하고 있던 그 세미나의 아시아 종교인 토론자들과 참여자들은 내 이야기를 팬데믹 시대의 종교에 대한 비판, 아니 자기비판으로 들었을 것이다.

종교평화국제사업단, 2020 동북아국제세미나
출처 : 종교평화국제사업단

모든 종교에는 지적, 영적, 윤리적 차원이 있다. 재난 시대의 종교인이 심각하게 고심하며 성찰해야 할 문제는 종교에 대한 오늘의 사회적 불신과 반감이 종교의 지혜와 영성보다는 ‘윤리’의 차원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종교의 깊고 풍부한 지적, 영적 샘을 종교의 비윤리성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막고 있어 종교가 사회적 적폐요 민폐가 되어 있는 것이다.

불교의 팔정도(八正道)는 구원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바른길인데, 크게 계(戒, sila), 정(定, samadhi), 혜(慧, prajna) 세 묶음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계는 윤리, 정은 영성, 혜는 지혜에 해당한다. 세 차원의 균형과 조화가 구원의 바른길이다. 이는 불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바다. 그런데, 윤리와 영성과 지혜 중에 무엇이 출발점일까? 대체로 불자들은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직업(正命)’의 윤리적 계율에서 출발해 영적 수행을 거쳐 지혜에 이르는 것을 구원의 바른길로 본다. 더 나아가, 지혜를 깨달은 자는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자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 점에서 윤리는 종교적 삶의 출발점이며 목적지이다. 팬데믹 시대에 종교가 사회적 비판과 불신을 자초한 것은 이 윤리적 출발점과 목적지를 망각해서다.

치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병들어 아픈 당신을 찾아왔다. 그는 지금껏 거짓을 말하며 당신의 몸과 맘을 해쳐온 사람이다. 그가 당신에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치료제라면서 알약을 하나 내밀었다. “이것을 먹으면 당신의 상한 몸과 맘이 치유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치유자가 주는 약을 기꺼이 받아 삼킬 것인가? 팬데믹 시대, 종교가 성찰해야 할 물음이다.

 

저자소개

정경일(jungkyeongil@gmail.com)은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이다. 숭실대 학부, 한신대 신학대학원, 서강대 대학원에서 각각 철학, 신학, 종교학을 공부한 후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참여불교와 해방신학을 비교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저로 『사회적 영성』, 『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아픔 넘어 : 고통의 인문학』 등이 있고, 역서로는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와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공역)가 있다.

 


참고문헌

  • 정경일, 2021. “팬데믹 시대, 종교의 두 얼굴.” 종교평화국제사업단(IPCR) 동북아 국제세미나: 서울 1월.
  • Beech, Hannah. 2020. “No One Knows What Thailand Is Doing Right, but So Far, It’s Working”. The New York Times, July. 16, 2020.
  • Bentzen, Jeanet, S. 2020. “In Crisis, We Pray : Religiosity and the COVID-19 Pandemic.” Covid Economics, Issue 20 (May 20).
  • Esmaquel, R. Paterno et al. 2021. “Part 2 : Religion, the Pandemic’s Unseen Force – Battle for Body and Soul”. Rapper. Mar. 29, 2021. https://www.rappler.com/newsbreak/in-depth/religion-pandemic-unseen-force-religious-gatherings (검색일 : 2021.04.03.)
  • ________. “Part 3 : Religion, the Pandemic’s Unseen Force – Faith in God’s Vaccines”. Rapper. Mar. 30, 2021. https://www.rappler.com/newsbreak/in-depth/religion-coronavirus-pandemic-unseen-force-vaccines) (검색일 : 2021.04.03.)
  • Gecewicz, Claire. 2020. “Few Americans say their house of worship is open, but a quarter say their faith has grown amid pandemic” https://www.pewresearch.org/fact-tank/2020/04/30/few-americans-say-their-house-of-worship-is-open-but-a-quarter-say-their-religious-faith-has-grown-amid-pandemic/ (검색일: 2021.03.27.)
  • Roy, Arundhati. 2020. “Pandemic is a Portal”. Financial Times. April 4, 2020.
  • Wingfield-Hayes, Rupert. 2021. “Covid and suicide: Japan’s rise a warning to the world?”. BBC News. Feb. 18,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