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 인도의 영향을 읽는 세 가지 코드: 산스크리트(Sanskrit), 브라흐미(Brahmī), 그리고 불교(Buddhism)1)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는 인도의 모든 문화를 추구하였다. 인도 본토로부터는 힌두교와 대승불교를, 남인도에서는 브라흐미의 한 계통인 문자를 수용하였으며, 또 이후 스리랑카를 통해서는 상좌부 불교를 수입했다. 인도-유럽어로 밝혀진 산스크리트어가 문법이나 어원에서 유럽 언어들과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면,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는 인도로부터 문자를 받아들이고, 수많은 어휘들을 이용했다. 동남아시아는 산스크리트어, 브라흐미, 불교라는 세 가지 요소로 인도를 이해했으며, 또한 ‘인도화’와 ‘스리랑카 중심주의’를 동시에 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도는 문자의 변형, 필사본 제작 등 인도문화에 대한 재해석을 동남아시아를 통해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는 이 언어와 문자들의 변천과 혼용 속에서 때로는 인도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를 잇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불교 스스로 이런 언어의 경로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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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공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산스크리트어(Sanskrit)

영국 출신의 문헌학자이자 언어학자이며 또한 철학자였던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 1746-1794)가 1768년 아시아학회(The Asiatic Society)에서 발표했던 유명한 인용구로부터 인도의 고대어이자 고전 언어인 산스크리트어(Sanskrit)는 학자들의 급격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산스크리트는 동사 어근, 문법의 형식에서 라틴어나 그리스어와 절대 우연이라고 볼 수 없이 가까운 언어입니다. 그 관계는 엄청나게 밀접하기 때문에 어떤 문헌학 연구자도 이 세 언어의 어떤 공통된 근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 세 가지 언어를 제대로 연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산스크리트어가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 서양의 수많은 유사 계열 언어들과 ‘인도유럽어족(Indo-European)’으로서의 위치가 정립되어 가기 훨씬 이전부터, 산스크리트어는 그 문자로 사용되었던 브라흐미(Brahmī)와 함께 불교(Buddhism)라는 통로를 통해서 아시아의 전역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남아시아 남단의 거의 유일한 국가인 스리랑카(Sri Lanka)의 문자와 언어는 ‘싱할라(Sinhala)’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싱가포르(Singapore)’란 국가가 있다.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면 동남아시아 국가인 태국의 유명한 ‘싱(Singha)’과 같은 상표가 있다. 이런 사례들은 단지 사자가 우연히 산스크리트어 ‘싱하(siṅha)’로 표기된 것이 아니라 인도의 사자라는 개념 자체를 수용한 것이다. 스리랑카나 싱가포르, 태국엔 사자가 살지 않았지만, 이 인도적 관념의 용어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로 전래되었다. 동아시아에서도 성인의 설법을 의미하는 사자후(獅子吼, sīṃhanāda), 성인의 자리인 사자좌(獅子座, sīṃhāsana), 성인의 수행인 사자빈신삼매(師子頻申三昧, sīṃha-vijṛmbhitahita-samādhi) 등 사자는 성인의 위치를 묘사할 때 즐겨 쓰는 상징이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특히 푸른색 사자를 통해서 뜨거움으로 비유되는 인간의 욕심에 대해 상대적으로 냉철한 지혜(淸凉, nirvāṇa)라는 이미지를 청색 사자로 묘사하여 문수보살(Mañjuśrī)의 인도 신화적 탈 것(vāhana)으로 묘사하였다.

‘언어(language)’라는 말에는 ‘문자(script, letter)’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언어와 문자는 늘 하나의 묶음처럼 인식되지만 사실 이 두 개의 전통은 아주 다를 수도 있다. 인도에서도 ‘산스크리트어’란 언어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서 문자를 한정해서 가리키는 용어는 ‘브라흐미(Brahmī)’이다. 두 가지는 대개 하나의 묶음으로 여겨져 왔지만, 구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브라흐미에 밀려 많이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산스크리트어에는 카로슈티(Kharoṣṭhī)와 같은 다른 계통의 문자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로 인하여 특정한 문자와 언어가 하나의 묶음으로 이어지고 나면, 마치 인식에서는 원래 하나였던 것과 같이 느껴진다. 문자로 기록되는 것과 말로 하는 언어 중에 어느 쪽이 먼저인가 하는 질문에는 대개 말이 먼저라고 하는 모범적이고 공통적인 답이 있긴 하지만, 말과 글은 또한 서로 영향을 끼치기도 하여 일단 한 번 언어와 문자가 연결되고 난 후에는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9세기 크메르제국의 영역(붉은 색)

인도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 브라흐미 문자, 그리고 불교는 주변국들에게 가장 선진적인 문물이었다. 서쪽으로는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방글라데시, 그리고 인도 내 펀자브, 남인도 지역들이 이슬람 문명으로 교체되고, 또 불교가 점차 인도에서 사라지고 있는 동안에도 이 세 가지 인도의 유산은 역설적이게도 산스크리트어와 동일어족이 아닌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등 외부 지역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는 국가가 형성되는 1세기 무렵부터 전래된 것으로 보이는 캄보디아 크메르(크마에)의 힌두전통과 대승불교를 통해 인도화(Indianazation)를 도모했으며, 이를 통해 산스크리트어의 어휘들이 대거 차용되고 현지화된 혼용언어(Hybrid type)들이 생겨났다. 한 단계를 거쳐 스리랑카를 통해서는 남방 상좌부불교(Theravāda)를 수용하였다. 힌두전통과 대승불교 전통이 혼재하던 동남아시아에서 스리랑카 상좌부불교의 유입은 일종의 신문물처럼 여겨졌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기존의 크메르 제국을 통해 받아들였던 종교와 문화를 새로운 스리랑카계 상좌부불교와 함께 융합시키면서 현대까지도 불교와 힌두 전통, 산스크리트어와 남방 불교 언어인 팔리어가 공존하는 아주 특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스리랑카를 추종하는 방향으로도 발전했는데, 이런 방식은 근현대 태국의 유명한 균형외교 방식인 ‘대나무 외교 (bamboo diplomacy)’라는 전통에 영향을 주었다.

동남아시아의 인도 문자나 어휘들의 유사성은 의외로 문헌을 통해서 많이 발견된다. 산스크리트어의 용어들은 대개 일상용어보다는 문헌 용어의 빈도가 높고, 불교 또는 힌두교의 경전 용어들 지명 등에서 많이 발견된다.

“Krungthep Mahanakhol” = thep(deva, 신), mahanakhol(mahā-nagara, 거대한 도시), “Phitsanulok” = Viṣnuloka(비슈누신의 도시),

“Lopburi” = Lava(라마의 아들 이름)2),

“Uttaradit” = Uttara(북쪽),

“Nakhon Pathom” = Nagara – Pathama(최초의 도시),

“Si nakharin” = sri-nagara-Indra(성스러운 인드라신의 도시),

“Phutthamonthon” = Buddha-Maṇḍala(붓다의 세계)

브라흐미 문자(Brahmī)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 남쪽 타케오 지역(Takéo Province south of Phnom Penh)에는 앙코르 보레이(Angkor Borei)의 7세기 비문들이 남아 있으며, 티베트(Tibet)의 경우는 7세기 토번국의 33대 왕이었던 송첸캄포(581-649)의 명으로 퇸미삼보따(Thonmi Sambhota)가 당시 인도 문자인 굽타(Gupta)문자로부터 오늘날의 티베트 문자를 창제하였다.

앙코르 보레이 비문 (6-7세기)
출처: 저자 제공

13세기에는 한국의 세종대왕에 비견되는 수코타이(Sukhothai)의 왕 람캄행(Ram Khamhang, 1279-1298)이 크메르 문자를 고쳐서 태국 문자를 만들었다. 태국의 고대국가인 Sukhothai는 행복이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수카(sukha)와 발생한다는 의미의 우다야(udaya)가 합쳐진 말이며, Ram은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Rāma)의 태국식 발음이다.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문자들은 두 가지 체제로 나눠서 쓰는 방식을 채택했다. 같은 인도 전통이지만 이를 다시 양분하여 대중적인 방식과 명문화 방식으로 작성하였다. 태국은 숫자의 경우 인도 문자로부터 차용한 숫자를 사용하되 읽는 방식은 중국 남부의 언어를 채택하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반면, 문자의 성조를 나타내는 표시(tone marks)는 인도 문자에서 변형이 덜 이루어진 방식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읽는 방법 역시 산스크리트어로 읽었다. 즉 1, 2, 3, 4에 대하여 능(엣, 一), 썽(이, 二), 쌈(三), 씨(四)와 같이 현대 광동어(Cantonese)처럼 읽고, 성조의 경우 엑(eka), 토(dvi), 뜨리(trai), 짯따와(catur)와 같이 산스크리트어 발음을 사용한 것이다.

태국문자 숫자의 비교
출처: 저자 제공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의 모든 언어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 않는 대신 주요한 어휘를 대량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문자만큼은 모두 인도 남부 계열의 브라흐미 문자로부터 파생되었다.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문자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브라흐미 문자 가운데 가장 고층에 있던 문자는 대개 4세기부터 9세기까지 남인도에 존재했던 팔라바(Pallava)왕조의 이름을 차용한 팔라바 문자로 추정한다. 7세기 무렵부터 팔라바 문자는 그란타(Grantha) 문자라는 명칭으로 발전되었는데 인도의 말라얄람어(Malayalam)와 타밀어(Tamil) 문자의 원형인 동시에 싱할리 문자를 포함하여 동남아시아 문자 대부분의 토대가 되었다. 팔라바 문자가 국가의 이름을 차용했다면 그란타 문자는 ‘실’, ‘매듭’, 또는 ‘묶는 것’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인데, 여기서 의미하는 실이나 묶는 것은 책에 실을 꿰어 묶는 바인딩을 가리킨다. 이 두 개의 문자는 묶어서 팔라바-그란타(Pallava-Grantha)라고도 불렸는데, 둥근 문자인 ‘바테주투’의 원형이기도 하다.

인도 팔라바 문자, 캄보디아, 프놈펜 박물관
출처: 저자 제공
팔라바 스타일의 크메르 문자,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출처: 저자 제공

크메르어 또는 팔리어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5-6세기 이른 시기에 작성된 팔라바 문자로 쓰인 비문들이 캄보디아에서 확인되고 있으므로 이를 통해서 유사한 시기에 남인도계 브라흐미 문자들이 동남아시아에서 크메르 문자로 쓰였고, 이를 기반으로 태국 문자가 창제되었다.

인도 남부의 문자인 팔라바 또는 그란타 문자는 동남아시아에서 이 문자를 기반으로 문자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불교 문헌을 작성할 때 거의 원형 그대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는 영어권에서 주요한 문서에 라틴어를 쓰거나, 동아시아에서 주요한 문서를 한자로 작성하는 것과 아주 유사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Buddhism)

인도에서 불교는 7세기부터 뚜렷하게 힌두교에 편승하였다. 이는 일종의 민족종교와의 연합일수도 있고, 기존의 불교만의 특성으로부터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방식으로의 발전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슬람 문화라는 거대하고 강력한 외부 세력의 유입은 불교 교단이 기원전 6세기부터 천 년을 넘게 지내면서 긴 시간 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충격이었을 것이다.

9세기에 오늘날의 태국 일부와 미얀마 일부를 포함하여 동남아시아 반도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했던 크메르 제국은 동시에 그들의 문화와 언어 역시 지배했다. 앙코르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제국(nagara)을 의미한다. 크메르는 힌두 전통에 의지해서 한동안 강력한 제국을 운영했지만, 10세기 이후 태국과 미얀마는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를 점차 받아들였고, 15세기 이후부터 크메르 제국의 기세가 줄어들면서 태국과 버마 등은 팔리어어와 상좌부불교를 중심으로 크메르 제국에 대항하였다. 오늘날의 캄보디아는 태국의 탐마윳(Thammayutika)등의 불교를 수용하였다. 무엇보다 1750년경 스리랑카는 오랜 식민지 지배의 끝에서 불교 교단이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태국이 거의 스리랑카로부터 이식받았던 전통을 다시 스리랑카로 전하면서 절묘하게 상좌부 불교를 복원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스리랑카의 가장 큰 불교 교단은 태국교단(Siam Nikaya)이다.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태국이 현재 10대째를 맞이하고 있는 랏따나꼬신(Rattana Kosin) 왕조의 모든 왕의 이름에 라마(Rama)와 붓다(Buddha)가 수식이나 별칭으로 포함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태국은 크메르 전통의 힌두 전통까지 수용함으로서 ‘팔리어와 진리로 대표되는 불교’와 ‘산스크리트어와 권능을 의미하는 힌두 전통’을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인도의 문화를 계승했다. 그리고 두 전통을 모두 잇는 전승자가 왕(rat, rāja)이다. 전자는 붓다로서의 왕(thammarat, dharma-rāja), 후자는 힌두신으로서의 왕(thwarat, deva-rāja)이다. 왕조의 이름도 이를 반영했을까? 보석(ratna)과 인드라의 창고(kosa-indra)이며 힌두교 최고의 신이자 불교의 수호신으로 역할을 바꾼 인드라는 라마와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신이며 그가 히마판(Himavana, 눈의 정원 – 태국에는 산이 거의 없다)에서 모시고 온 녹색 유리불상(phra kaew)이 바로 그들의 보석(rattana)이다. 즉 랏따나꼬신은 그들이 ‘프라께우 불상을 모신 곳’이란 의미이며 그들이 불교의 적통임을 의미한다. 한편 왕조의 또 다른 이름은 짜끄리(Cakri) 왕조로 그 상징은 쉬바신의 삼지창(triśūla)에 비슈누신의 윤보(輪寶, cakra)를 합친 형태를 사용한다. 태국에서 불교와 힌두교의 상징들은 서로 잘 얽혀 있으며, 인도의 원형에 충실하면서도 특유의 조직된 구성을 지니고 있다.

짜끄리 왕조의 심볼
출처: wikimedia commons

이를테면, 힌두 전통으로는 ⟪삼계의 우주론(Trai-loka)⟫, 인도의 대서사시⟪라마끼엔(Rāmāyaṇa)⟫을 왕실에서 지속적으로 정비하고 개정 및 증보하며 이 내용을 가면극이나 궁중벽화의 소재로 사용한다. 불교 전통으로는 ⟪붓다의 생애(Pathamasambodhi)⟫와 과거생 이야기인 ⟪본생담(Jātaka)⟫등을 사원과 박물관의 벽화에 그리고 학교를 운영하면서 이를 문화컨텐츠로 이용하는 등 이를 자신들의 전통문화로 발전시키고 교육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고 대승불교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의 종교로 발전한 데는 산스크리트어의 영향력이 컸다. 이 전통이 육로를 통해 전해진 곳은 동인도와 티베트, 중국, 그리고 일부는 미얀마 북부까지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동안 정 반대쪽도 인도 남부 해안이나 심지어는 인도 동북부에서 출발하는 해로를 통해서 인도의 문화가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로 전달되었다. 여기에는 팔리어(Pāli)라고 하는 특별한 언어가 쓰였다.

오늘날 팔리어는 불교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자이나교를 연구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언어이다. 남방불교 교단은 이 언어를 서력 기원전 6세기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 당시 가장 세력이 컸던 국가인 마가다(Magadha)의 언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언어는 마가다에서 벗어난 중서부 지역 언어에 더하여 마가다어의 요소가 들어가 있기에, 대개 오늘날 학계에선 팔리어를 반마가다어(ardha-Magadhī)를 기반으로 한 언어라고 부르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팔리어가 기원전 6-5세기에 고타마 붓다가 실제 사용했던 언어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분명한데, 이 언어가 문자화된 최초의 기록은 인도가 아니라 스리랑카였다. 즉, 특정한 문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팔리어가 문자화된 것은 스리랑카의 싱할리 문자였던 것이다. 이는 또한 문자뿐만 아니라 패엽(貝葉, patra, 야자나무의 종류들)이라는 특별한 기록 매체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기도 한다. 패엽이라는 문서의 간행 형태는 패엽에 새겨지는 방식에 따라 다시 문자형태의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펜을 가리키는, 쇳조각으로 만든 뾰족한 도구가 라틴어 stilus에서 출발한 스타일러스(stylus, 鐵筆)이다. 스리랑카에서는 서력기원 1세기 초에 이런 스타일러스를 사용하여 패엽에 글씨를 썼다. 정확하게는 긁어서 자국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철필이 획의 방향을 바꿀 때마다 패엽에 구멍이 뚫리는 문제에 부딪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폰트가 개발되었는데, 이것이 바테주투(Vaṭṭeḻuttu [vattezhuthu])이다.

바테주투는 이는 동남아시아 문자들의 원형인 타밀 지역을 중심으로 인도 남부의 문자들이 유달리 둥근 획이 많은 원인이기도 하다. 이것이 동남아시아 문자들을 둥글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임은 물론이다. 바테주투라는 의미에는 “둥근 획의 글자”란 의미가 있으며 그 개념 자체도 인도 타밀(Tamil)과 케랄라주(Kerala)의 말라얄람어(Malayalam)에서 나왔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필사본 문자들에 영향을 주었다.

문헌의 야자나무 잎 방식의 형태는 나뭇잎의 자연스러운 형태에서 출발했다. 가장 넓은 면을 이용했을 때 형태는 세로로 좁고 가로로 긴 형태가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티베트나 중국, 몽골 불교에서는 나뭇잎이 아니라 종이로 된 형태로 경전을 만들 때도 패엽 형태를 일종의 불교적 전통으로 수용하여 좁고 긴 모양의 문헌을 간행하였다. 특히 티베트는 이 전통을 지금까지도 지속하고 있다.

패엽경 형태의 몽골경전 / 원각사성보박물관
출처: 저자 촬영
패엽경 형태의 티베트 종이경전. 네팔 룸비니 도서관.
출처: 저자 촬영

필사본 문화는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스리랑카와 직접적인 교류가 잦았던 태국과 관련이 깊다. 대승불교가 먼저 유입되었던 동남아시아 불교 교단은 스리랑카 상좌부 불교를 문헌과 함께 수용하여 일종의 종교와 문화적인 종주국으로 스리랑카를 지향(Lanka Centric attitude)했다.

필사본 형태의 종이경전, 샨 문자, Shan State Univ. 도서관
출처: 저자 촬영

불교학계는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하나의 양대 언어로 인식하지만, 산스크리트어와의 비교 대상은 수많은 지역 언어(프라크리트어)이다. 프라크리트어들은 대개 북동부, 중부, 서북부로 나눠지며 이 가운데 서북부와 중부를 중심으로 한 언어에 동북부의 요소가 섞여 들어간 특이한 언어이다. 이 언어는 정해진 문자가 없으면서 산스크리트어와 유사했으므로 대부분 아시아 문화권에서 자신들의 문자로 표기할 수 있었고, 불교라는 주제 아래에 다양한 문화권에서 통용되었다. 한편, 산스크리트어는 원래 성전 언어이며 일반 민중 언어가 아니었기에 고타마 붓다는 그 사용을 지양했지만, 2세기 무렵에는 인도 굽타(Gupta)왕조의 세력하에 급속도로 산스크리트어 경전들이 필사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불교는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라는 두 개의 언어를 타고 남쪽과 북쪽 루트에서 동시에 빠른 속도로 아시아 전역에 확산되었다. 그러나 중국과 동아시아에 전승된 주요한 불교 어휘들은 흥미롭게도 팔리어도 산스크리트어도 아닌 또 다른 지역의 프라크리트어임을 말해준다.

 

저자 소개

강대공(beopjin@dgu.ac.kr)은
(불교학술원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전임연구원.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철학박사. 태국출라롱콘대학교 태국학연구소(Institute of Thai Studies)에서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주요 논저로는 “산스끄릿어 또는 빨리어 표기상의 몇 가지 문제와 제안”, “동남아시아의 빨리어 문자와 불교사본”, “불교의 전파경로와 붓다전기의 변용양상” 등이 있다.


1) <라마끼엔>에서 라마가 자신을 위해 싸워준 하누만신에게 땅을 하사하였으며, 하누만은 이 땅에 감사함을 담아 라마의 아들 이름인 라바(Lava)를 붙였다.

 


참고문헌

  • 황순일. 2018. 『테라와다불교의 동남아시아 전파』,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출판부.
  • Skilling, Peter. 2009. Buddhism and Buddhist Literature of South-East Asia : Sellected Papers by Peter Skilling, Ed. by Claudio Cicuzza, Bangkok and Lumbini.
  • Patricia Hervert & Anthony Milner. 1989. South-East Asia, Languages and Literatures; a select guide, Honololu: Univ. of Hawaii Press.
  • “Brahmi Script,” https://en.wikipedia.org/wiki/Brahmic_scripts (검색일 : 2023. 1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