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회 : 아룬다티 로이의 시선들

지난 2017년,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는 20년 만에 새로운 소설을 발표했다. 1997년 부커상을 수상한 데뷔작 『작은 것들의 신』 이후 10여 편에 달하는 논픽션을 집필하면서 인도사회의 면면을 비판적으로 드러낸 로이는 그 시선들을 그러모은 집대성과 같은 소설 『지복의 성자』를 통해 현대 인도의 종교, 카스트, 젠더 문제를 실제 역사적 사건들과 엮어내었다. 본고에서는 소외되고 억압받은 개인 혹은 다양한 ‘작은 것들’이 모여 복잡하게 얽힌 작금의 거대한 인도 사회에 대해 아룬다티 로이의 시선을 빌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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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정(서울대학교)

소설가이자 사회활동가, 20년 만의 신작

1997년 26세의 나이로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The God of Small Things)을 통해 부커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1961-)는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펼치는 인물로도 유명하다. 데뷔 이후 20년간 거의 10여 편에 달하는 논픽션을 저술하며 현대 인도의 정치, 사회, 경제, 환경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현대 인도가 당면한 갖가지 이슈들에 대해 비판적 시선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고, 2014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5년에 걸쳐 집필된 『작은 것들의 신』은 33개국으로 번역되었으며,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49주간 오를(전수용 2001:420)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논픽션 작품들을 통해 로이의 명성은 탈식민주의, 서발턴, 에코-페미니즘, 반(反)세계화, 반(反)핵주의 등 다양하면서도 논란이 되는 키워드와 엮이는데, 그녀의 날 선 시선은 주로 기득권과 계급적 폭력, 부패한 공권력, 전통이라는 모습을 한 가부장제의 억압, 그리고 힌두 극우주의를 향해 있다.

한편 첫 작품 이후 무려 20년 만에 발표한 로이의 두 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The Ministry of Utmost Happiness)는 2020년 국내에서는 제4회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화제가 된 바 있다. 히즈라(hijra)1) 안줌(Anjum)과 건축학도 틸로(Tilo)를 중심으로 구자라트 폭동, 카슈미르 분쟁 등 현대 인도의 굵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삼은 해당 작품은 그동안 논픽션 작품을 통해 드러났던 그녀의 비판적 시선이 그야말로 집대성된 대작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작은 것들’로 대변되는 소외되고 억압받은 인물들이 현대 인도사회의 폭력과 모순에 노출되면서도 그에 맞서는 과정에 대해, 로이의 두 소설에 나타난 몇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아룬다티 로이가 2012년 인도 아삼 주 구와하티(Guwahati)에서 열린 제 14회 노스이스트 북페어(North East Book Fair)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억압받은 자들과 작은 것들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 한국판 표지. 해당 표지는 출판사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 10주년 특별판이다.
출처: 문학동네

『작은 것들의 신』은 인도 남부 케랄라(Kerala)를 주요 무대로 삼고 있다. 아룬다티 로이의 유년기 시절이 투사된 이 작품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생애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로이는 방글라데시에 인접한 인도 북동부 메갈라야(Meghalaya)주에서 태어났다. 메갈라야는 벵골인 힌두교도였던 부친이 일하는 다원(茶園)이 있는 곳이었지만, 양친의 이혼 후 어머니 메리 로이(Mary Roy)의 고향인 케랄라주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케랄라는 문화적으로나 정치적, 역사적으로도 ‘남인도’, ‘드라비다족’ 등의 단순한 범주로 환원되기 힘든 독자성을 지니는 곳이다. 케랄라주의 특징 중 하나는 기독교도의 비율이 높다는 점인데, 2011년 인구 총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도가 18.4%를 점유하여 인도 전국 평균(2.3%)의 대략 8배에 이른다. 로이가 자란 콧타얌에서는 이 비율이 훨씬 높아 거의 40%에 육박하며 힌두교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이다(加瀬 2022:43-44).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69년은 시리아 기독교(Syrian Christian)계 유산계급과 노동자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던 시기로, 특히 노동자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공산주의가 정치적 힘을 키우고 있던 시점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시리아 기독교와 힌두교 사이의 갈등이 있는(로이 2021: 376) 한편, 오랜 기간 인도 대륙을 지배해 온 카스트로 인해 소위 ‘가촉민’과 ‘불가촉민’의 구분이 엄격히 행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공간적 배경 속에서, 케랄라주 아예메넴의 전통적 피클 제조공장을 소유한 시리아 기독교도 유산계급 이페(Ipe) 가문 저택의 주인공 쌍둥이 남매인 라헬(Rahel)과 에스타(Estha)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작은 것들의 신』의 주 무대가 되는 케랄라주이다.
케랄라주에 본부를 둔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의 상징
출처: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공식 홈페이지

 

소설의 화자는 라헬을 비롯하여 여러 등장인물의 시점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야기의 시간 또한 두 사람의 유년 시절(1969년)과 성년기(1993년)를 교차적으로 배열하여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쌍둥이의 어머니 암무(Ammu)는 남편과의 이혼 후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핍박에 노출되는데, 소위 ‘전통적’ 가치를 대변하는 이 핍박의 주체는 암무의 모친 맘마치(Mammachi)와 고모 베이비 코참마(Baby Kochamma), 암무의 남자 형제 차코(Chacko)이다. 한편 암무는 불가촉민 파라반(Paravan)2) 계급의 남성이자 열성적인 공산당원 벨루타(Velutha)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라헬 남매가 이 둘의 관계를 목격하면서 가족의 비극적인 서사가 이어지게 된다. 암무와 벨루타의 관계는 작중에서 ‘사랑의 법칙’(Love Law)으로 언급되는 질서를 어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사랑의 법칙’은 “누가 사랑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받아야 하는지를 정한 법”(로이 2021: 51)으로 언급되는데, 계급 질서에 적법한 사랑의 규범을 말하며, 이를 어긴 벨루타는 결국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성애적 사랑의 범주를 넘어 출신과 계급이 통용되는 넓은 범위의 사랑을 아우른다. 이는 작중 아예메넴 사원에서 행해진 카타칼리3) 공연 장면에서 서사시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해당 장면은 어머니 쿤티(Kuntī)와 카르나(Karṇa)의 대화를 다룬다. 인도 고전 서사시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의 비극적 영웅이자 쿤티의 처녀 시절에 태어난 탓에 버림받고 비천한 가문에서 자란 카르나는 주인공 다섯 왕자 판다바(Pāṇḍava)의 장남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결혼 전 태어났다는 이유로 ‘사랑의 법칙’에 의해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다. 결국 자신의 형제들과 전장에서 적으로 싸우게 되자, 강력한 카르나를 저지하고자 쿤티는 ‘사랑의 법칙’을 이유로 동생들과 싸우지 않을 것을 부탁한다.

그들은 네 형제다. 네 살과 피다. 그들과 전쟁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다오. 약속해다오.’(로이 2021:262)

카타칼리는 전통적으로 남성 출연자들로만 상연된다. 극 중 여성 배역인 쿤티 또한 남성 배우가 연기하며, “가슴 달린 부드러운 쿤티마저 여타 ‘카타칼리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분장을 지우고 아내들을 구타하러 집으로 돌아가는”(로이 2021:265) 모습은 당시 가부장적 분위기를 가늠하게 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이기도 하다.

카타칼리는 인도의 고전 서사시를 소재로 행해지는 케랄라 지역의 전통극이다. 화려한 분장과 의상이 특징적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 소설에서 ‘작은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예컨대 심리적인 측면에서 ‘성적 배고픔의 충족이나 육체적 욕망의 충족’과 같은 작은 만족, ‘애정을 표현하는 형태, 사심 없이 또는 이기적일지라도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한 작은 일을 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며,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제목과 연관해서는 ‘힌두 전통의 작은 신, 민속 및 일상 예배의 신’과 같이 해석하기도 하지만(Roy 2009:56), 소설에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의 양상을 고려하였을 때, 이는 ‘큰 것’ 혹은 ‘거대한 것’과 대비되는 어떤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공동체, 기관, 집단, (계급 혹은 젠더) 권력을 ‘큰 것’으로 명명한다면, 로이의 소설에서 ‘작은 것’은 이러한 거대한 힘에 눌리거나 그 힘으로 보호받지 못한, 억압받고 소외된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차코와 암무의 남편 바바(Baba), 암무의 아버지 파파치(Papachi)와 같은 가부장적 남성들, 에스타를 성추행했던 ‘오렌지드링크 레몬드링크 맨’, 그리고 기존 질서에 순응하며 암무와 라헬 남매, 벨루타를 억압하는 맘마치와 베이비 코참마, 공권력을 사용하여 벨루타를 죽음에 이르게 한 토마스 매튜(Thomas Mathew) 경관 등은 가부장적 전통과 계급 질서(가촉민), 공권력으로 대변되는 ‘큰 것들’을 수호하는 인물들이다. 반면 순수한 어린아이들로서 이들에게 정신적·육체적 트라우마를 겪은 라헬과 에스타, 전통적 인도의 젠더 질서로 인해 억압받는 암무, 계급을 뛰어넘지 못하고 희생된 벨루타는 ‘작은 것들’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원하는 ‘작고’ 소소한 삶의 순간들은 ‘큰’ 죽음에 억눌려 빛을 발하지 못하고, “‘가장자리’, ‘경계’, ‘경계선’, ‘끄트머리’ 그리고 ‘한계’ 같은 것들이 마치 한 무리의 트롤처럼 각자의 지평선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로이 2021:21). 개인의 ‘작은’ 순간들이 비극적으로 점멸하는 과정을 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라헬이 떠나온 나라 같은 곳에서는, 여러 가지 절망이 서로 앞을 다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개인적인 절망은 결코 충분히 절망적일 수 없음을. 한 국가의 거대하고 난폭한, 휘몰아치며 밀어붙이는, 우스꽝스러운 미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공적인 혼란이라는 성지(聖地) 옆에 불시에 개인적인 혼란이 찾아오면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큰 신()’이 열풍처럼 아우성치며 복종을 요구했다. 그러자 작은 신’(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사적이고 제한적인)이 스스로 상처를 지져 막고는 무감각해진 채 자신의 무모함을 비웃으며 떨어져 나갔다.(로이 2021:37)

 

역사적 편린들과 엮인 작은존재들, 지복의 성자

『작은 것들의 신』이 남인도 케랄라의 한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와 계급, 젠더의 갈등을 다루었다면, 로이의 후속작인 『지복의 성자』는 더욱 다양한 출신의 수많은 등장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통해 현대 인도 사회를 폭넓게 다룬다. 소설의 무대는 북인도로 옮겨지고, 올드델리에서 시작하여 구자라트 폭동을 거쳐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에 이른다. 시간적으로 볼 때, 소설은 영국으로부터 인도가 독립한 1947년 이후부터 2001년 9·11 사태, 2002년 구자라트 폭동, 그리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거쳐 극우 정치인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의 집권으로 힌두 배타주의가 정점에 달하는 2014년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손석주 2021:51).

이 힌두 국수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정점에 선 사회를 로이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스스로를 힌두 신앙의 수호자라고 부르는 소규모 불량배 무리가 마을에 들어가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취했다. 야심적인 정치가들은 증오에 찬 연설을 하거나 자신이 이슬람교도를 때리는 모습을 찍어 유튜브에 올리는 방식으로 출세를 꾀했다. 모든 힌두교 순례와 축제가 도발적인 승리의 퍼레이드로 변했다. 무장한 호위팀들은 순례단이나 트럭과 오토바이에 타고 술잔치를 벌이는 사람들 곁을 달리며 평화로운 동네에서 싸움이 붙기를 기대했다. 그들은 이제 사프란색 깃발 대신 당당하게 국기를 흔들었는데, 잔타르만타르의 아가르왈 씨와 그의 땅딸막한 간디주의자 마스코트에게 배운 속임수였다.

신성한 소가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소 오줌을 (세제로서뿐 아니라 음료로서도) 홍보하는 캠페인을 후원했다. 소고기를 먹거나 소를 죽였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매질을 당하거나 린치를 당한 사람들에 관한 뉴스가 랄라를 지지하는 지역들에서 새어나왔다.(로이 2020:411)

인도 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 BJP)의 당기. 당의 상징색은 샤프란색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인도 인민당의 지지자들. 『지복의 성자』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 중 하나인 구자라트 폭동(2002) 당시 무슬림에 대한 폭력을 방관한 것으로 비판받았던 당시 주지사 나렌드라 모디는 현재 인도의 총리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러한 상황에서 이야기의 주요 인물은 양성구유의 ‘모호한 성별’로 태어나 어린 시절 아프타브(Aftab)라는 이름의 남성으로 살다가 결국 히즈라의 삶을 택한 안줌(Anjum)과, 케랄라 출신—아마도 로이의 자전적 정서가 투영된 인물인—의 여성 틸로(Tilo)이다. 안줌은 올드델리 샤자하나바드의 무슬림 집안에서 세 딸에 이어 태어난 그토록 기다리던 첫 아들이었다. 태양을 의미하는 ‘아프타브’라는 이름까지 지으며 아들을 기다렸던 부모는 기뻐하지만, 이후 안줌의 모친은 남아의 성징 아래 자리잡은 여성의 성징을 보고 깊은 혼란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가 아는 유일한 언어인 우르두어에서는 모든 것이, 생명을 지닌 것들만이 아니라 모든 것양탄자, , , , 악기까지이 성()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남성 아니면 여성이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아기만 빼고. 물론 그녀는 자신의 아기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히즈라. 사실 그런 단어가 두 개 있었다. 히즈라와 킨나르.4) 하지만 단어 두 개로 언어를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로이 2020:26)

안줌은 태생적으로 경계적인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어느 날 시장에서 히즈라를 목격하게 된 아프타브(안줌)는 열다섯 살이 되자 히즈라들이 머무는 콰브가(Khwabgah, ‘꿈의 집’)로 들어가 ‘안줌’이 된다. 이후 수술을 받아 여성이 되고 버려진 여자아이 자이나브를 키우다 기도를 하러 간 구자라트에서 폭동을 겪는다.

구자라트 폭동 당시 불이 붙은 건물에서 연기가 나고 있다. 사진이 촬영된 아마다바드(Ahmedabad)는 구자라트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Aksi great)

2002년 일어난 구자라트 폭동은 극우 힌두교도들이 천여 명에 달하는 무슬림을 학살한 사건으로, 폭동 전날 힌두교 순례자들을 태운 기차에 불이 붙어 수십 명이 사망한 후 발생한 폭동이다(BBC 2023.4.21). 이 일은 안줌의 삶에서 큰 상처를 남기는데, 공교롭게도 히즈라라는 이유로 힌두교도들에게서 살아남은 안줌은 콰브가의 동료들과 반목하다가 그곳을 떠나 묘지에 정착하고, 묘지에서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차린 그녀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다. 게스트 중 한 사람인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원래 소가죽을 무두질하는 힌두 불가촉민 출신이었으나, 소를 죽였다는 혐의로 폭도들에게 살해당한 아버지를 보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우상의 이름을 따 개명한 인물로서, 사담의 에피소드는 소가죽을 다루는 불가촉민 ‘차마르’(camār, chamar) 공동체의 문제를 거론한다.

주로 달리트로 이루어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우나라는 지역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픽업트럭에 소 사체를 싣고 있다는 이유로 다섯 명의 달리트를 공개적으로 매질한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오래 전 사담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소 사체를 트럭에 실은 것뿐이었다. 공개적인 매질을 당한 것에 대한 수치심을 견딜 수 없었던 다섯 남자는 모두 자살을 기도했다. 그중 한 사람이 자살에 성공했다. “처음엔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를 제거하려고 하더니 이제 차마르들을 노리고 있어.” 안줌이 말했다.(로이 2020:412)

가죽주머니를 만드는 작업자. ‘차마르’ 카스트의 구성원일 것으로 추측된다. (Tashrih al-aqvam, 1825)
출처: 위키피디아

한편 시위자들이 모이는 델리 광장에 검은 피부의 여자아이가 버려지고, 안줌이 아이를 데려가고자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아이가 사라지는데, 아이를 데려간 것은 또 하나의 주인공인 검은 피부의 틸로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대학을 다니던 시기에 연극 연습을 하던 중 무사(Musa), 나가(Naga), 비플랍(Biplab) 세 남자를 만나고, 이들은 모두 여러 사정을 거쳐 카슈미르 분리 독립운동에 휘말려 들게 된다. 온갖 고초를 겪은 틸로는 비플랍이 소유하는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훔친 아이에게 무사의 딸 미스 제빈(Mis Jebeen)의 이름을 따서 미스 제빈 2세(Miss Jebeen the Second)라는 이름을 붙여준 그녀는 안줌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서 교사 역할을 맡는다. 인도 최북단에 위치한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 시기에 첨예한 대립의 현장이 된 곳이며,5) 여전히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다. 저자 아룬다티 로이 또한 공개적으로 카슈미르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은 것들의 씨줄과 날줄이 엮어내는 거대한 태피스트리

비교적 한정적인 케랄라라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해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다루었던 첫 작품에 비해, 『지복의 성자』는 다양한 입장에 서있는 수많은 ‘크고 작은’ 것들에 소속된 인물들이 각자의 내러티브를 다층적으로 이끌어 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도 사회의 ‘작은’ 존재들에 속하는 인물들은 안줌과 틸로를 중심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각 장에서 풀어놓으며, 그들이 사회에서 어떠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어떻게 배제되어 있는지를 생생하게 알려 준다. 자신의 에세이집 『아자디: 자유, 파시즘, 픽션』(Azadi: Freedom, Fascism, Fiction)에서 로이는 정부가 제시하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언어, 하나의 종교, 하나의 헌법이라는 교리”가 ‘국가’가 아닌 ‘대륙’에 부과되는 불합리함을 지적하였다. 인도는 ”다양하고 더 많은 언어 – 방언을 제외하고도 최종적으로 780개에 달하여 … 유럽 전체보다 더 많은 언어를 지닌” 대륙인 것이다(Ghadiali 2020). 그녀가 말하는 인도는 이 같은 작은 요소들이 모여 이루는 “광활한 바다”이자 “깨지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사회 생태계”인 것이다.

첫 장에서 안줌과 대화를 나누는 시각장애인 이맘 지아우딘(Imam Ziaudin)은 시력을 잃은 초록색 눈을 가늘게 뜨며 안줌에게 묻는다. “말해보게, 당신네 사람들은 죽으면 어디에 묻히지? 시체는 누가 목욕시키지? 기도는 누가 올리지?” 지아우딘의 이 질문에서 ‘당신네 사람들’은 명백히 사회에서 배제된 히즈라 집단을 가리킨다. 히즈라는 무슬림의 전통적인 장례식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안줌은 크게 상처를 받고 공격적으로 되묻는다. “이맘님, 사람들이 색깔에 대해 말할 때—빨간색, 파란색, 오렌지색 같은 말로 황혼의 하늘이나 라마단 기간의 월출을 묘사할 때—당신 마음속엔 무엇이 떠오르나요?” 양지바른 무덤에 앉아 서로에게 ‘치명적이기까지 한 상처를 낸 후’ 안줌은 이 질문을 이어 간다. “늙은 새들은 어디에 가서 죽나요? 하늘에서 우리 머리 위로 돌처럼 떨어지나요? 길거리에서 새들의 시체가 우리 발부리에 걸리나요? 우리를 이 지구에 보낸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를 데려갈 적당한 방도를 마련해 놓았을까요?”(로이 2020:23) 이후 이맘 지아우딘은 잔나트 게스트 하우스의 장례식장에 묻힌 히즈라들 중 일부를 위해 장례를 집전하기 위해 돌아오며 이들의 화합이 암시된다.

하즈라트 사르마드 샤히드의 영묘와 그 내부.
출처: 델리피디아
(https://delhipedia.com/tale-of-the-naked-fakir-dargah-hazrat-sarmad-shaheed/)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지복의 성자’에 대해서는 작중 ‘하즈라트 사르마드 샤히드’(Hazrat Sarmad Shaheed)라는 성자의 영묘(靈廟)를 방문하는 장면에서 언급된다. 그는 300여 년 전 힌두 소년을 사랑하여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건너온 수도승이었다. 델리 거리에서 벌거벗은 채로 살았던 그는 참수형에 처해질 때까지 사랑의 시를 암송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유대계 아르메니아인이었으나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그는 알라신의 존재보다 개인의 영적 자유를 고집했다는 이유로 당시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처형당했다(손석주 2021:51).

『지복의 성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샤히드 성자를 닮아있다. 기존의 젠더 전통에 속하지 못한 채 일상적으로 차별과 모욕에 노출된 안줌, 검은 피부로 계급적 차별의 시선을 받으며 제도 밖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부표 같은 삶을 살아가던 틸로는 무슬림과 힌두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구자라트와 카슈미르를 배경으로, 소위 힌두트바(Hindutva)로 대변되는 힌두 민족주의와 계급적 폭력이 난무하는 이 두 공간을 경험하면서 일종의 유사가족을 꾸려나간다.

작중 인물들의 행보는 틸로가 훔친 아이의 생모 레바티(Revathy)의 이야기에서 더욱 확장되는데, 마오이스트(Maoist) 게릴라였던 그녀는 여섯 경찰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임신하고, 그렇게 태어난 딸을 델리 광장에 유기했던 것이다. 생모가 처음 부여한 아이의 이름 ‘우다야’(Udaya)는 일출을 뜻한다. 안줌이 자이나브에게 힌두 폭도들을 만났을 때 힌두인 척 하기 위해 외우도록 알려 준 산스크리트 찬가 ‘가야트리 만트라’(Gāyatrī Mantra)는 사실 고대 인도 경전 『리그베다』(Ṛgveda)의 태양 찬가이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만물을 태양의 빛이 밝혀 활동을 촉구하게 하는 이 찬가는 태양이 지닌 빛과 열기, 긍정적 에너지를 상징한다. 작중 인도 현대사의 그림자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들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묘지를 보금자리로 한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의 사람들은 미스 제빈 2세가 이어 나가는 아스라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직조된 거대하고 비극적인 인도 사회라는 태피스트리에는, 그러나 ‘작은 것’들이 만들어낸 (혹은 키워 낸) 한줄기 태양의 빛줄기가 비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아룬다티 로이는 『지복의 성자』의 마지막 문장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결국엔 모든 게 다 괜찮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하니까.
왜냐하면 미스 제빈, 미스 우다야 제빈이 왔으니까.(로이 2020:446)

 

저자소개

류현정(rhj_varoru@snu.ac.kr)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사이다.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고전 산스크리트 문학, 인도 신화 및 종교 관련 연구를 진행해 왔다. 대표 논문으로는 “희곡 <나가난다>(nāgānanda) 연구”, “맹세와 실행으로 완성되는 시의 논리: 『카비야알람카라』(Kāvyālaṃkāra) 제5장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1) 히즈라(hijra)는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 사회에서 양성구유의 성별적 특성이 있는 사람이거나 태어날 때 남성이지만 성적 지향이 여성인 경우 혹은 성전환자를 지칭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성 또는 젠더의 소유자로서 흔히 ‘제3의 성’으로 불리며 인도와 남아시아에서는 독자적 문화를 지니고 무리를 지어 생활하여 일종의 커뮤니티를 구성하기도 한다. 관련 내용은 김경학(2022) 참조.

2) 파라반(Paravan 또는 Bharathar)은 케랄라주 지정카스트(Scheduled Caste) 중의 하나로, 불가촉민에 속한다. Kerala Public Service Commission의 카스트 목록 참조.

3) 카타칼리(Kathakali)는 인도 고전 서사시를 소재로 행해지는 케랄라 지역의 전통극으로, 인도 8대 전통극 가운데 하나이며, 화려한 분장과 의상이 특징이다.

4) 킨나르(kinnar)는 히즈라를 가리키는 또 다른 용어이다. 산스크리트어로 kinnara 또는 kiṃnara(여성명사로는 kinnarī, kiṃnarī)는 의문사 kim(무엇, 어떻게)과 nara(사람, 남자)의 합성어로서,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와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신화적으로는 반신적 존재로서 새 혹은 기타 동물과 인간의 모습이 합쳐진 형태를 취하고, 음악과 유희를 즐기는 존재로 등장한다.

5) 인도의 독립과 이후 정치상황에 대해서는 강성용(2021) 참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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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학. 2022.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 남아시아의 성소수자 히즈라(Hijra).” Diverse Asia, 18호. https://diverseasia.snu.ac.kr/?p=5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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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이, 아룬다티. 민승남 옮김. 2020. 『지복의 성자』. 전자책.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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