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탄 동남아의 제복: 정치권력에서 경제권력까지

이 글은 동남아에서 군부의 등장, 정치참여 동기와 배경, 군부 통치로 인한 국가 구조의 왜곡이 현재의 정치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이다. 인도네시아, 미얀마, 태국 군부는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에 개입했고, 미얀마를 제외한 두 국가는 관료적 자본주의를 통해 국가의 경제발전을 견인했다. 미얀마는 군부가 부를 독점하는 가운데 군부에 도전할 신흥계층이 불가능한 구도이다. 일정 수준의 경제성장을 달성한 태국은 후견인으로서 왕실이 군부를 보호하고 있으므로 군부의 정치 개입이 가능하고, 인도네시아 군부는 정치보다 경제적 이익으로 그 역할을 전환했다. 미얀마는 경제적 저발전과 군 내부의 강력한 후견주의를 바탕으로 사회세력의 도전을 극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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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영 (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

2020년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에 따르면 2009년 94점이었던 미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2019년 86점으로 하락했다. 세계는 트럼프(Donald M. Trump) 행정부가 반대파 인사를 탄압하고, 국가기관을 장악했으며 여론을 조작하는 등 민주주의를 지속할 제도를 파괴한 사실을 목격했다. 비교정치학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전세계로 확산하는 ‘안개에 갇힌’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10년만 보더라도 힌두뜨바(Hinduttva)를 전면에 내세운 모디(Narendra Modi) 총리, 필리핀 두테르테(Rodrigo Duterte), 소수 부자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한 푸틴(Vladimir Putin) 등 특정 인물이 민주주의를 위해 고안된 법률과 제도를 교묘히 조작하거나 사유화해 왔다.

특정 인물이 주도하는 민주적 제도의 파괴와 함께 동남아에서는 군부라는 특정 집단이 다시 권력욕을 드러냈다. 21세기 들어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국가의 전환으로 칭송받았던 미얀마도 2월 1일 군부 쿠데타로 지난 10년간의 개혁과 개방이 수포의 위기에 놓여있다. 2014년 쿠데타를 통해 군사정부를 수립한 태국 쁘라윳(Prayuth Chanocha) 총리는 미얀마 쿠데타가 발생한 지 10여 일 만에 미얀마 민아웅흘라잉(Min Aung Hlaing) 군사령관으로부터 서한을 받았다. 두 국가의 민주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제 두 나라 군부는 불편했던 역사를 잊고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것 같다. 그들은 군부 통치의 서사(敍事)를 복원했고, 국민의 저항을 억눌러야 할 처지이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발전할 것이라는 주장을 할 것이다.

 

국민국가 형성과 반공의 첨병으로서 군부

태국 군대는 라마 4세와 라마 5세 치세기에 창설되었다. 즉 군부는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국가 수호보다 왕실을 보호하는 근대적 국가기관 성격의 근위대였다. 왕실의 신임과 후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왕자와 귀족들이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고 요직을 차지하는 불합리한 현실을 개탄하고, 결국 1932년 6월 24일 쿠데타를 통해 절대군주제를 무너뜨렸다. 이제 군부는 그들 스스로 관료가 되어 사회세력의 성장 동력을 막고, 정당정치의 생명력을 위협했다. 그러면서도 왕실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다. 태국에서 관료지배체제(bureaucratic polity)는 군 내부적으로 위계의식과 엘리트 의식의 강화, 군 외부적으로 민간행정기구의 약화, 그리고 이익단체나 대중운동의 활동에 제약을 가했고, 이를 토대로 군부의 독보적 지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소위 ‘혁명기’로 명명되는 1945-49년에 활동한 의용군을 모체로 한다. 각 지방을 기반으로 한 의용군은 1949년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면서도 중앙 정책에 반기를 들어 사회 혼란의 장본인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55년 군부가 군인사와 조직 개편 등 개혁조치를 단행하자 지방 군부세력의 저항은 내전에 버금가는 혼란으로 이어졌다. 1957년 3월 수까르노(Sukarno)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자 군부의 영향력이 정치로 확대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나아가 반공주의로 무장한 군부를 두고 정부는 민족주의, 종교(이슬람), 공산주의 간 연합인 나사콤(NASAKOM)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수까르노와 군부 간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미얀마 군부는 1942년 12월, 일본의 지원으로 창설되었고, 일본과 영국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군부를 창설한 아웅산(Aung San)은 독립 이후 국가 지도자로 추대될 정도로 군부는 정치권에서도 환영받는 존재였다. 아웅산의 사망 이후 군 경력이 없던 우 누(U Nu) 총리와 군부 간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우 누 총리는 독립 후 1년 만에 촉발한 소수민족 무장단체의 무장 투쟁에도 즉각 대응하지 못했고, 영국 식민군의 유산을 계승한 군 수뇌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독립군 출신 야전 사령부 소속의 군 인사를 해고했다. 또한, 그는 공산당 당원을 사면하는 등 반공으로 무장한 군부의 공로를 깎아내렸는데, 1958년 8월 여당 전당 대회에서 우 누의 측근은 국군을 “인민의 1호 적”으로 정의했다.

미얀마처럼 태국과 인도네시아 군부도 반공주의를 도구로 그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2차 대전 이후 태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세력의 팽창 저지 정책의 우산으로 편입하면서 군사원조의 최대 수혜자로서 군부는 정치적으로 보수화되었다. 미국이 주도하여 1954년 창설된 동남아조약기구(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에 동남아 국가로서 필리핀과 함께 태국이 가입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1957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싸릿(Sarit Thanarat)은 이전 군부와 달리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의회주의에 대한 이해도도 낮았던 인물이다. 그의 정치 성향을 고려할 때 국민의 정치참여를 금지하고 정당 활동을 제한한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다만, 그는 정치적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는데, 이는 미국이 참전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특수를 누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까르노와 수하르또(Suharto) 간 갈등은 마치 우 누와 네윈(Ne Win)의 갈등과 유사하다. 군부 내 육군의 영향력을 약화하기 위한 수까르노의 시도를 수하르또는 군부의 분할지배로 이해했다.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의 사주를 받은 군부 내 친공산 세력의 쿠데타 시도는 수하르또 장군에 의해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1) 1966년 2월 1일 수하르또는 중장으로 승진했고, 2년 뒤인 1968년 국민협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1998년 5월, 그가 대통령에서 하야할 때까지 32년간 1인 독재체제가 유지되었다. 민간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민간과 공조하던 군부의 전략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 누도 1958년 10월, 네윈이 과도정부를 구성할 때까지 독립군 출신 장교를 홀대했다. 18개월간의 과도정부 임무를 마치고 1960년 병영으로 복귀한 미얀마 군부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는 듯 했다. 그러나 다시 총리로 복귀한 우 누가 자치(또는 독립)을 주창하는 소수민족 지도자의 회담을 허가하자 군부는 더는 국론분열을 좌시할 수 없다며 정치에 개입했다.

인도네시아는 군부가 국가 안보수호기구로서의 전통적 역할과 국가개발기구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이른바 이중 기능(dwi fungsi)을 장착하며 국정 전반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임기 내내 인도네시아 “발전의 아버지”로 자칭했던 수하르또의 행적은 군부의 경제활동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얀마는 군부가 주도하는 산업화로 나아가지 않았다. 네윈은 아웅산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회주의의 부활을 운명으로 여겨 이념에 갇혔다. 그는 버마식사회주의로 정부의 이념적 토대를 마련하고, 민간관료를 대체한 군부에 의해 국가를 운영했다. 비동맹 중립노선은 국제사회에서 폐쇄와 고립으로 이어졌으며, 국내적으로 모든 자원은 네윈의 1인 독재체제를 위해 동원되었다. 반공주의와 함께 소수민족 무장단체를 적으로 간주하여 대화보다 무력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지난한 내전으로 돌입했다. 아웅산은 제도적 민주주의를 통한 경제적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모든 인민(국민)을 평등하게 한다는 사회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네윈의 애착을 제외하고 그가 사회주의자였다는 객관적 증거는 없다. 이념적 ‘겉핥기’로 인해 당시 버마는 산업화는 물론 신흥계층의 탄생조차 막았다.

각국의 군부는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국가 형성에 기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은 집단적 이익에 근거했다. 공산주의자의 활동과 같은 국내적 혼란은 무기를 독점하는 군부의 군사 작전을 정당화했고, 정당정치와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간정부의 실정(失政), 그리고 민간-군부 간 갈등 또한 가장 근대적이고 조직적인 군부의 정치 활동을 제어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익집단으로서 군부의 진화

아시아 군부를 연구한 알라가파(Muthiah Alagappa)에 따르면, 군부의 경제활동은 국가발전과 치안 강화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군의 경제활동은 군 내적 역량 강화, 군 기술 발전과 산업화를 통해 군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논리이다. 미얀마를 제외하고 두 나라에서 군부 집권기에 국가 경제가 성장했으므로 이 주장은 합당해 보일 수 있지만, 이는 분명 착시현상이다.

세 국가에서 세 인물이 권좌에 오르면서 군부의 경제활동은 본격화했는데, 인도네시아와 태국 군부는 관료사회를 대체하는 관료적 자본주의(bureaucratic capitalist)로 나아갔다. 인도네시아는 1957년 전국적 계엄령 중 국유화한 네덜란드 소유 기업과 농장에 참여한 뒤 경제활동에 참여했는데, 1966년 세 차례에 걸친 군 회담에서 근거한 이념 짜덱(CADEK)에 근거한다. 인도네시아 군부의 경제활동은 원유회사, 미곡산업, 대규모 인프라 사업체, 물류 산업 등을 관할하는 국영기업, 생필품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도매유통사업체가 다수인 군인 협동조합, 야야산(yayasan)이라 불리는 자선 재단 등 세 영역이 주를 이룬다. 디뽀네고로 사령관으로 근무 당시 2개의 야야산을 설립하여 사업체를 운영한 수하르또의 이력은 잘 알려져 있다.

1940년 설립된 타이 내비게이션(Thai Navigation Co.)에 해군 출신 장교가 이사회에 진출하면서 군부의 경제활동은 시작되었다. 싸릿의 집권 직후인 1957년, 군부가 태국 군 은행(Thai Military Bank)을 설립하면서 군부의 영리사업은 본격화했다. 인도네시아와 유사하게 태국 군부도 국영기업에 이사로 참여해 왔는데, 2017년 기준 56개 국영기업 중 이사회에 진출한 군인은 42명이었다. 이외에도 군부 기업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진출하여 2020년 현재 군부가 운영하거나 관여하는 기업은 115개에 이른다.

인도네시아 국영기업에서 근무하는 군인은 부족한 급료를 충당하기 위해 공금 횡령과 유용, 지역 사업체에 대한 이권과 압력 행사, 비공식적 과세 등 각종 횡포와 불법 활동을 저질렀다. 일부 민간기업도 퇴역 관료를 이사회의 일원으로 등재하여 정·재계와 유착관계를 형성했다. 1970년대까지 인도네시아 경제발전을 견인했다고 평가되는 버클리 마피아(Berkeley Mafia) 중 일부도 수하르또 일가와 유착하면서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2004년 국제투명성기구(TI)는 수하르또가 재임 기간 약 350억 달러의 국고를 횡령했다며 그를 세계 최악의 부패 지도자로 꼽았다. 위와 같은 부정부패와 도덕적 해이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여실히 드러났다.

미얀마 군부는 1988년을 기점으로 그 경제적 기능을 진화했다. 1962년 쿠데타 이후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시작되자 군기업은 모두 국영기업으로 흡수되었다. 1988년 9월 쿠데타 이후 집권한 신군부는 대내외적 도전에 직면했다. 공산당 몰락으로 인해 정전협정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한편,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가 군부를 대상으로 경제제재를 중심으로 한 포괄적 제재를 시행했다. 이에 군부는 1990년 퇴역군인과 군인가족의 복지와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으로 군기업을 설립했고, 군 개인도 사업체를 수립하며 민간 경제영역을 파고들었다. 군 기업은 보석류와 목재산업 등 추출산업과 생필품 시장을 독점했으며, 정전협정에 나선 군인은 마약 생산과 밀매, 국경 무역에 과세 행위 등을 통해 경제적 부를 누렸는데 과히 ‘정전협정의 경제’로 부를 만하다. 특히 중국이 미얀마를 정치적으로 보호하고, 미얀마는 중국 기업에 경제적으로 보은함으로써 외부의 압력을 견뎠다.

군부의 약탈적 행위는 국가 경제발전이 아니라 소수 군부의 부정축재로 귀결되었으니, 이제 군부는 정치 권력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독점하면서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에 천착하게 되었다. 민간기업은 군기업과 군 가족 기업과 경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미얀마로 투자하는 해외 기업은 군부의 손을 거처야 했는데, 이도 2013년부터 군부와 군 가족 기업의 시장 독점구조로 진출 자체를 포기하기도 했다.

2004년 제정된 인도네시아 정부 명령에 따르면, 정부는 향후 5년 내 군부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운영되는 기업 모두를 인수하며, 직업 군인은 사업체를 운영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2007년 말 기준, 군인이 운영하는 재단은 23개, 협동조합은 1천 개 이상이었다. 태국도 2020년 상업용 토지를 정부에 귀속하는 등 군인의 경제활동을 제한하겠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경제활동의 축소를 위한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는다.

세 국가에서 군부의 경제활동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지만,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 군부가 허약한 관료체제를 보충하는 역할을 했으므로 부정부패 문제를 차치하고 이들의 경제행위는 최소한 중산층의 출현에 공헌했다. 이에 비해 미얀마 군부는 철저히 군부의 집단적 이익만을 추구했다. 군부의 경제활동에 따른 수입은 군인이 국가에 헌신하고 충성심을 강화하는 장려책으로 작용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군대의 직업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 그러나 미얀마에서 군부의 경제활동은 개인이나 집단적 이익의 추구에만 그친다.

 

서로 다른 길, 군부는 어디로?

태국과 미얀마 군부는 군직업주의를 확보하지 못했다. 전근대적인 군대 문화는 군대 특유의 위계 구조, 조직력과 응집력을 만나면 법이나 제도를 무력화하는 인적 관계를 배가한다. 미얀마 군 수뇌부는 ‘부모와 자식’ 관계로 그들을 정의하고, 국왕이 쿠데타를 추인해 온 태국의 역사에서 국왕은 군부의 불변한 후견인(patron)인 셈이다. 비대칭적 권력 구조와 상호 호혜성에 근거한 후견-수혜(patron-client, 또는 주군-가신) 관계는 세 국가에서 군부 통치의 연속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태국 군부는 1947년 쿠데타 이후 출신 부대와 사관학교 기수에 따라 파벌이 형성되었는데, 2001년 이후 파벌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2014년 쿠데타 이후 군부의 파벌 구도는 라마 10세가 군 생활을 시작한 1사단(Kings Guard)과 부라파 파약(Burapha phayak), 즉 동부 호랑이를 의미하는 2사단(Queen’s Guard)으로 양분된다. 현 군사정부의 핵심인물인 쁘라윳 총리, 쁘라윗(Prawit Wongsuwan) 국방장관, 아누퐁(Anupong Paochinda) 내무장관은 후자에 속한다. 또한, 2018년 국왕은 3개월짜리 왕립 904 군사 훈련 과정을 신설했는데, 이 과정을 통과한 장교의 승진은 보장된다.

왕실이 군부의 파당화를 조장하지만, 군부는 왕실 수호에 대한 이견이 없다. 이런 측면에서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이 왕실 개혁까지 요구하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왕실에 대한 도전은 그 자체로서 혁명적이지만, 군부 통치를 종식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도 현실적인 대안을 찾은 것 같다. 그럼에도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양분된 국민 여론은 군부가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미얀마 군부는 전통적으로 네윈, 딴쉐(Than Shwe) 등 은퇴한 군 최고지도자가 배후에서 군 수뇌부를 조종하고, 군 내부적으로 위계화된 일원주의를 이탈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아웅흘라잉 군사령관은 지난 10년간 군사관학교(Defense Service Academy) 기수에 따른 인사원칙을 거스르고, 자신에 충성하는 인물 위주로 권력층을 형성했다. 민아웅흘라잉의 인사 전횡과 독단에 대한 내부 불만이 표출되지 않는다는 점은 군 내부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민아웅흘라잉이 딴쉐에게 충성한다고 알려지지만,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다. 2002년 딴쉐는 네윈과 그의 족벌을 국가 기도혐의로 체포했는데, 권력은 나눌 수 없다는 교훈을 전시했다. 퇴역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민아웅흘라잉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연장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0년간 미얀마는 시장 개방과 제도적 민주화로 나아갔으므로 군부는 더욱 편협한 독재체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1997년부터 인도네시아 시민사회의 도전은 가시화되었고, 수하르또가 몰락하자 군 출신 정치인은 자발적으로 군 개혁에 앞장섰다. 예컨대 1998년 8월, 위란또(Wiranto) 장군은 군부 할당의석을 38석으로 축소하고 골까르(Golkar)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며, 경찰과 군대를 분리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11월에는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장군이 비군사분야 내각을 점하는 장교의 직위를 철폐하고, 지방 군사령부 내 사회정치부의 폐지를 촉구했다. 정치적 영향력을 포기하는 대신 군부는 경제활동을 통해 이익 동기를 유지한다. 유도요노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쁘라보워(Prabowo Subianto) 전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 출신이 정치권으로 향하고 있으므로 군부의 병영복귀는 완전하지 않은 것 같다. 쁘라보워는 서구 민주주의가 인도네시아 전통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잠정적으로 군부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윤진표 교수는 태국군이 온실 속에서 자랐다면 인도네시아군은 벌판에서 성장했다고 비유한다. 미얀마군은 벌판에서 성장한 과거를 군부 통치 이후 저지른 만행과 과오를 덮고 그들의 통치를 정당화하여 국민의 저항과 간섭을 받지 않는 국가 내 온실 속 존재가 되고자 한다. 세 국가에서 군부가 근대 국가의 첨병이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군부가 국가 운영과 발전의 주도체가 되면서 국가 구조를 뒤틀리게 했다. 미얀마를 제외하고 두 국가에서 군부 주도의 경제발전은 초기에 달성되었으나 광활한 부정부패는 시민의 철퇴를 맞아야 했다.

미얀마와 태국에서 군부 통치의 종식은 군 내부 구조, 왕실-군부 간 관계를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군복을 입은 인도네시아 정치군인의 귀환은 불가능해 보인다. 세 나라에서 군부의 경제활동은 이익집단으로서 존속할 가능성이 크다. 미얀마 군부가 정치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도 경제적 이익이다.

 

저자 소개

장준영 교수(koyeyint@hotmail.com)는 현재 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에서 재직 중이다. 미얀마 군부 연구로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2009)를 취득했다. 주 전공인 동남아 정치 이외에도 동남아 사회, 문화, 특히 종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는 『하프와 공작새: 미얀마 현대정치 70년사』. 2017. 눌민, “미얀마 민간정부에서 쿠데타 가능성과 그 조건: 군 내부의 역동성을 중심으로.” 『글로벌정치연구』. 9권 1호. 2016 등의 논문을 저술하였으며, 언론과 주요 일간지를 비롯하여 다수의 언론 매체에 미얀마 관련 기고를 꾸준히 해 오고 있다.

 


1) 이 사건에 대해서는 논쟁적이다. 과거 인도네시아 교과서에는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공산당(PKI) 세력이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군 장성 6명을 살해한 쿠데타 미수사건으로 기록했다. 오히려 수하르또는 반공를 빌미로 정치적 반대에 있던 인물이나 집단을 탄압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태국과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 또한 미국과 영국의 암묵적 지원을 받았다면 가능했을 것이라는 시나리오이다. 실제로 미국, 영국, 호주 등 서방세계는 50만 명 이상이 사망한 잔인한 학살극을 벌인 수하르또에 대한 비난보다 반공주의와 자유진영의 승리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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