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문화교류: 1973년 만수대예술단 일본 순회 공연 사례

본고에서는 1970년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 음악예술단의 일본에서의 공연이 당시 북일 양국의 어떤 의도 아래서 진행되었으며, 실제로 일본사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분석한다. 분석 대상은 1973년의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순회공연으로, 연구 방법은 역사사회학적 접근과 내용 분석을 중심으로 하였다. 분석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은 북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문화 외교의 일환이었다; 2) 만수대예술단 일본 공연의 목적은 실제 공연을 통해서 일본 여론에서 대북 호의를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3)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은 예술적 측면에서는 전문가들에게서 호평을 많이 받았다; 4) 문화사절단으로서 만수대예술단 일본 공연은 이후 이어지는 북한 예술단에 의한 일본 방문 공연들의 ‘성공’에 첫 신호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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됴쿄 문화회관에서 열린 만수대예술단 공연을 전한 ‘朝鮮時報’
출처: ‘明日への希望を抱かせるチュチェ・チョソンの芸術’, 朝鮮時報, 1973年8月9日

모리 토모오미 (오타니[大谷]대학교)

들어가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대표적인 악단인 만수대예술단[1]은 1973년 8월부터 9월에 걸쳐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일본에 약 40일간 체류하며 전국 각지에서 순회공연을 하였다. 북한의 대규모예술단이 일본에서 공연한 것은 1948년 북한이 건국한 이후 처음이며, 공연은 일본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신문 자료 등 당시 발간된 매체를 보면 만수대예술단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이하 조선총련)을 중심으로 한 재일조선인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일본인들에게도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이 어떤 배경과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고 공연 내용과 평가는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신문과 잡지 자료 등 1차 자료를 정리 및 활용하여 1973년의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 전체상을 재구성하였다. 그러나 영상자료와 활자 자료의 일부는 입수가 어려워 공연의 상세한 부분까지는 다룰 수 없었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고는 1973년의 만수대예술단 일본 공연의 개략을 다룬 기초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만수대예술단의 사명과 해외공연

만수대예술단의 기본적 사명

만수대예술단은 1946년에 창립된 ‘평양가무단’이 기초가 되어 발전된 악단이다. 평양가무단은 직접 농장, 공장뿐만아니라 군대의 위문 공연까지 하였는데[2], 그런 의미에서 이는 ‘인민’들을 고무하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선전선동’ 부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재까지도 만수대예술단은 조선노동당이 주관하는 유일한 악단이라는 점에서 매우 격이 높다[3]. 이런 만수대예술단은 북한 음악계의 중심적인 악단이자 가극, 음악, 무용작품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악단으로 1969년 9월 27일에 김정일의 지도 아래에 조직되었다[4].

만수대예술단의 기본 임무는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위업을 실현하는 데 적극 이바지하는 것’이다. 북한의 통치 원리이자 정치 사회적 이념인 주체사상을 예술을 통하여 사회에 침투시키는 것이 만수대예술단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단원은 평양과 지방의 예술단체에서 선발된다. 그 선발 기준은 ‘정치 사상적으로, 기술 실무적으로 튼튼히 준비된 우수한 창작가, 연주가들’이다[5]. 물론 북한의 음악단이라면 그 기본적인 역할은 정치사상 및 당의 지도 내용, 국가(행정부)의 정책을 ‘인민’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특히 창립 직후인 1970년대는 ‘일대 전성기’라 불릴 정도로 ‘주체적 음악 예술’의 성과를 이룩하게 된다.

만수대예술단의 해외공연의 배경

만수대예술단은 해외에서도 다수 공연한 바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수대예술단의 기본적 역할은 예술 공연을 통해서 인민에게 주체사상을 전파하여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위업’을 완수하는 것인 한편 그 높은 예술적 역량으로 외국과의 문화교류의 중심적 역할도 담당해 왔기 때문이었다. 해외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창단한지 얼마 안 되는 1970년대 초반부터이다. 유럽(영국, 이탈리아), 아프리카, 남미, 중국공연 등을 통해서 높은 평가를 받은 만수대예술단은 1970년대 초반의 세계 순회 공연의 마지막 무대로 일본을 방문했다.

만수대예술단이 해외 순회 공연을 하게 된 배경에는 1971년의 한국민속예술단의 해외 순회공연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민속예술단은 1971년 유럽 순회 공연과 레바논과 일본에서의 공연을 치른 바 있다. 공연 여정의 마지막 땅이 일본의 토교였던 것은, 본고 주제와 관련해 주목해 볼만하다. 1971년의 한국민속예술단은 대한무역진흥공사가 한국상품 선전을 목적으로 했으며 유럽지역에서 개최한 한국주간행사의 민속예술공연도 겸하였다. 이 공연은 파리국제비교음악연구소가 초청한 것으로 단장은 주 프랑스 공보관이던 한숙이 맡고 공연에 관한 총무는 윤치오가 맡았다.  공연의 목차는 민속무용이 중심이 되여 화관무(花冠舞), 부채춤, 살풀이, 탈춤, 대금독주 등을 하였다. 동아일보는 이에 대해 “국위선양파 한국붐 조성에 획기적인 계시를 마련, 민간외교로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였으며 이외에도 유럽의 각 미디어가 한국민속예술단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였다[6].

1970년대 초는 미국과 소련이 데탕트(Détente)기에 들어가 있었고 유럽에서도 서독일 수상이던 브란트(W.Brandt)가 사회주의국가권에 대한 이른바 ‘동방정책’을 시작한 시기이다. 1972년 2월에는 닉슨(Richard Nixon)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며 ‘상하이 코뮈니케(Joint Communique Betwee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nd the United States)’를 발표하여 미국과 중국의 국교수립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한반도도 데탕트의 영향을 받아서 1972년 7월에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런 식으로 1970년대 초반은 사회주의 국가권과 자본주의 국가권의 냉전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한쪽의 행동이 또 한쪽에 행동을 크게 작용하는 상호작용이 아직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민속예술단의 세계순회공연과 만수대예술단의 세계순회공연 또한 이런 관계에 놓여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 만수대예술단은 유럽과 중국, 아시아, 아프리카 등 40개국 이상을 방문하였다[7]. 만수대예술단이 단기간에 많은 나라를 순회한 이유는 당시의 국제상황을 배경으로 한 북한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문화 사절로서 만수대예술단은 그들의 높은 예술적 역량을 외국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으로 북한의 국제적 평가를 높이는 것에 공헌하였다.

 

일본 공연까지의 과정

1973년 8월부터 9월에 걸쳐 만수대예술단은 일본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만수대예술단은 일본 조선문화교류협회(日本朝鮮文化交流協会)와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의 주최 하에 일본에 초청되어 도쿄, 나고야, 오사카 등 각지에서 모두 41회의 공연을 했다[8]. 조선총련 홈페이지에 게재된 ‘김일성주석님과 일본 인사들’에 의하면 김일성 주석(이하 직위 생략)은 1973년 9월 30일에 당시 미라이사(未来社) 편집국장이었던 마츠모토 마사츠구(松本昌次)와 회견하며 만수대예술단의 일본공연의 의의를 “일본 인민과 직접 접촉하여 조일 두 나라 인민들사이의 우호친선을 깊이 한 것”이라고 말했다[9]. 여기서는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972년 9월 25일 북일문화교류협정 체결

1972년9월25일에는 당시 일본 수상이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와 중국 수상이던 저우언라이(周恩来)에 의한 제1차 중일정상회담이 열렸다[10]. 북일 간의 교류는 이런 중일 국교 정상화 교섭에 자극을 받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로 당시 아사히신문사 사장이던 히로오카 도모오(広岡知男)는 “세계탁구 선수권 대회와 전 해 열린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해 무용단의 일본 공연, 그리고 현재 도쿄에서 개최중인 중화인민공화국 출토 문물전(出土文物展)은 중일 국교 정상화와 양국민의 우호를 깊게 하기 위해 다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저희들은 중일 문제뿐만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본의 우호관계 수립을 진심으로 염원하며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왔습니다”라고 얘기하며 중일과 북일의 국교 정상화를 목표로 한 문화외교의 일환을 아사히신문사가 맡고 있다는 인식을 피력했다[11].

그리고 만수대예술단을 일본에 초청하는 데 대하여 1973년 1월 20일 조선시보에 중요한 기사가 게재되었다. 당시 조선총련 중앙상임위원회 의장이던 한덕수와 당시 아시히신문사 사장이던 히로오카 토모오사장의 대담이다. 이 대담은 조선화보사(朝鮮画報社)의 주최로 진행되었다.

우선 한덕수는 “조선(필자주: 북한)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1971년 가을 아사히신문 도쿄본사 고토(後藤) 편집국장에게 김일성 주석의 회답이 온 후에 명확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라는 인식을 표했다. 회담 후반에는 일조문화교류협회(日朝文化交流協会)와 아사히신문사가 공동주최로 만수대예술단을 일본에 초청하는 건도 나왔다. 여기서 한덕수 의장은 북한 대외문화련락협회와 일조문화교류협회가 1972년 9월 25일에 체결한 협정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 협정은 북일 양국간의 문화, 예술, 교육, 언론 등 각 분야의 교류를 추진하는 합의서인데 이 협정에 따라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이 이루어 졌다는 의미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 협정은 평등호혜을 기본으로 한 상호주의가 원칙이다[12]. 그리고 바로 뒤인 1973년 2월 2일에는 김일성 주석이 주니치신문(中日新聞) 대표단과 회견하며 북일 관계 개선의 의지를 밝혔다. 그것에 대해서 일본의 정치인부터 문화인까지 폭넓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반응을 내보였다[13].

만수대예술단 조사단의 일본 방문

만수대예술단 조사단은 1973년3월27일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조사단의 구성원들은 리 호남 (만수대예술단 부단장, 조선국제무역촉진위원회 위원, 조선대외문화련락 협회 위원) 등 기타 5명이었다[14]. 조사단은 3월28일에 도쿄 데이코쿠(帝国) 호텔에서 기자회견하면서 만수대예술단의 가극 부문도 파견할 생각을 피력했다. 조사단이 일본을 방문한 당시 만수대예술단은 이탈리아에서 공연 중이었지만 단장인 리호남은 “일본 공연은 대규모가 될 것이며 가장 우수한 작품을 가져오고 싶다”고 언급했다[15]. 만수대예술단은 문화 사절단으로서 이번 교류를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두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호남이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은 대(対)일본 관계에서의 만수대예술단의 역할을 중시한 것이고 해석할 수 있다.

조사단은 4월4일부터 당시 도쿄도 지사인 미노베 료키치(美濃部亮)를 시작으로 나고야, 오사카, 효고현 등 지방자치제의 대표와 회담을 가지며 협력을 받아냈다. 조사단의 이러한 성과에는 주최자인 일조문화교류협회와 아사히신문사 그리고 조선총련의 원호와 힘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지만, 예술계나 문화인을 중심으로 만수대예술단 일본 순회 공연 실현에 대한 기대가 일본 사회에서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 하나의 요인으로서 작용했다. 이 시기, 만수대예술단이 유럽 공연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일본의 예술계나 문화계 인사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조선시보는 이 분위기를 “만수대예술단의 이번 일본 공연의 실현은 조일양국의 우호와 친선의 전진을 기대하는 일본 각계의 목소리와 그 고조를 제외하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표현하였다[16].

7월14일부터 도쿄 시내의 22곳의 판매소에서 예매권의 발매가 시작되었으며, 모든 표는 이틀 만에 매진되었다[17]. 이후 공연 때까지 주최자인 아사히신문사를 비롯해 당시 일본 예술계 및 연예계, 문학계를 견인하는 인물들은 공연에 대한 기대를 담아 코멘트를 보냈다.

이 외에도 아사히신문 (7월 29일자)에는 “올해 들어 북한에서는 여러 사절단들이 계속 일본을 방문하고 있는데 이러한 대형 사절단이 입국 허가를 받은 것은 처음이며 또 60일간이라는 체류 기간도 미승인국에서의 입국으로서는 이례적이다”라고 전하며[18], 단장인 윤기복에 대해서 “윤기복 조선대외문화련락협회 부위원장은 조선 로동당중앙위원으로, 남북 조선(한) 적십자 회담의 자문 위원도 맡는 각료급의 인물(중략) 윤 씨의 이번 일본 방문으로 일조 교류 촉진의 단서가 되는 상담의 진전도 있을 수 있다” 라고 평가하였다[19].  이런 식으로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에 대한 기대감은 높아져 갔다.

 

일본공연 진행 및 반응

1973년 7월30일 니가타(新潟)항에 만수대예술단 220명이 도착하여[20] 같은 날 저녁에 도쿄로 이동하였다. 우에노(上野)역의·우에노 공연장에는 3800여명의 환영하는 인파들이 모였다. 단장이던 윤기복은 조선출판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본 공연은 너무 늦었지만 지금까지 공연했던 44개국의 어디보다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하였다[21]. 공연은 일본 각지 7곳에서 진행되었으며, 여기서는 8월2일부터 6일까지 진행된 도쿄공연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도쿄 공연에서는 ‘음악 무용 앙상블’과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가 진행되었고 8월6일 저녁에는 도쿄도민들 3000명이 참가하였다. 주요 공연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공연 프로그램>

合唱 합창
首領の万年長寿を念願します(수령님의 만수무강 축원합니다),
栄えあれ、祖国よ(번영하라 조국이여) 외 2곡
女性重唱 여성중창
首領の志、赤く咲く(수령님 높은 뜻 붉게 피였네)
父なる首領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아버이 수령님 고맙습니다)
幸せなわたしの祖国(행복한 내나라)
首領は人民とともにいらっしゃる(수령님은 인민들과 함께 게시네) 외 4곡
女性二重奏 여성이중창
チョソン八景歌(조선팔경가)
首領を戴く光栄永遠に(수령님 모신 영예 끝없습니다)
離別の歌(리별가/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 섭입가) 외 2곡

실제로 공연을 본 문화인들이나 예술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예를 들면 배우이던 다키자와 오사무(滝沢修)는 “저는 소련이나 중국의 무대도 오랫 동안 보아 왔지만, 조선의 예술은 매우 독창적이며 형식이나 내용도 세계적이다. 훌륭한 예술을 만들어 내고 있는 조선의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예술, 주체의 예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였다[22]. 그리고 연극계의 중진이었던 오자키 히로쓰구(尾崎宏次)는 “2시간반에 걸친 노래와 춤을 통하여 내가 느낀 것을 소박하게 말하자면 조선의 다정함이었다. (중략) 아직 국교가 없는 나라에서 온 만수대예술단은 단 2시간반으로 우리들의 정치적 거리를 단축해버렸다”고 말하였다[23]. 저명한 작곡가이었던 도야마 유조(外山雄三)는 “이해하기 쉽고 부르기 쉬운 노래를 만드는 것, 그리고 양악기와 민족 악기를 조합시키는 것, 발성법을 민족의 특성에 맞게 독창적으로 하는 것 등은 나도 시도해 왔지만 만족하는 것을 만드는 것은 어려웠다. 식민지에서 벗어나20여년 지났지만 조선은 이 길에서 최고 권위가 되었다. 만수대예술단이 흔드는 지휘봉의 저쪽에 음악의 극치, 아니 예술의 극치가 있다”고 극찬하였다[24].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에서 또 하나의 특징은 만수대예술단이 각지에서 크게 환대 받았다는 것이다. 9월 2일 교토에서 열린 ‘만수대예술단 환영 교토부 내 각 인사의 모임’ 같이 만수대예술단이 공연을 했던 오사카, 후쿠오카, 교토, 고베 등 각지에서 성대한 환영회가 열렸다.  그렇게9월11일부터 13일까지 열린 도쿄 공연으로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은 마무리가 되었다. 만수대예술단은9월17일에 니가타항에서 귀국하였다. 일본 공연은 당초 도쿄,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후쿠오카, 교토, 고베 각지에서 합계43차 (특별공연 포함)를[25] 할 예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59차 (특별공연과 시연회를 포함)가 열리며 재일 조선인, 일본인, 각국의 주일 대사 등 합계18만 명이 관람하였다[26].

도교[東京] 우에노[上野]공원에서 만수대예술단을 대환영하는 재일조선인들(오른쪽), 환영파티를 연 일본조선문화교류협회[日本朝鮮文化交流協会]및 아사히[朝日]신문(왼쪽)
출처: ‘熱烈な歓迎をうけて国立ピョンヤン・マンスデ芸術団が訪日’, 朝鮮画報1973年9月, pp.38-39

 

전문가들의 반응

여기서는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을 관람한 예술인과 평론가 등 전문가들의 담론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그 언설들은 단순한 감상이라기보다는 전문적으로 평가한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보와 아사히신문에 게재된 전문가 언설

우선 만수대예술단에 가까운 입장에서 보도하고 있었던 조선시보 지면과 일본 방문 공연 주최자인 아사히신문 지면에서 전문가의 언설을 확인해 본다. 첫 번째는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가 높이 평가된 것을 들 수 있다. 영화감독인 야마다 요지(山田洋次)는 “몇 십년 동안 이렇게 감격한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나온다. 조선예술은 정서가 있으며 다정하며 슬프다. 그 비밀을 알고 싶다”고 언급하였다. 배우인 오야마다 무네노리(小山田宗徳)는 “어째서 이렇게 큰 감동을 받은 것인가? 그것은 인민대중을 위해서 형성된 독창적인 가극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하였다. 영화감독 기무라 소토지(木村荘十二)는 “순수한 예술이다. 인간성의 근본과 인간의 존엄을 호소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영화감독인 야마모토 사쓰오(山本薩夫)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무엇을 위해 예술이 있는가는 것을 가르쳐 준다. 조선의 예술은 인민을 위한 예술이라는 자세에 철저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27].

성악가인 다치카와 스미토(立川清登)는 “민족가극의 모범이다. 유럽 오페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의 창작 가극이 향해야할 방향을 명시하고 있다”[28]고 하였고 극작가인 다나카 지카오(田中千禾夫)는 “선률이 감미롭고 서정적이며 일본인들의 귀에 아무 저항도 없이 동감할 수 있는 소리(중략) (서양가극과 달라) 만수대예술단의 경우는 마음이 편하게 따라갈 수 있다. 친근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연극계가 따라가는 서양연극계의 예의적 관습을 만수대예술단이 하지 않은 면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29]. 다치카와도 다나카도 만수대예술단의 공연 자세에 동아시아적인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일본 국내 전문 잡지에 게재된 전문가 코멘트

다음에는 만수대예술단이나 공연 주최 단체와 관계가 없는 음악전문잡지에서 전문가가 어떻게 만수대예술단을 평가하였는지를 확인한다.

저명한 연극 및 무용 평론가인 시라하마 겐이치로(白浜研一郎) 는 음악전문잡지 ‘음악의 친구’ 1973년10월호에서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을 본 감상을 말했다. 시라하마는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을 “새롭고 힘이 있어서 인상적이다”고 표현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정하며 더러움이 없는 청순함” “수정과 같은 투명한 것” “다정함과 서정적 낭만” 이라고 평가한다. 북한 예술을 평가할 때에 중요한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대해서는 “혁명가극(오페라) ‘꽃 파는 처녀’를 제외하면 이것도 예상 의외 전체적으로 소위 혁명정신을 강요하는 부분이 적다. (중략) 소비에트나 중국 등의 공산주의권 예술의 선입견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였다”고 평가하였다.

시라하마는 한편 안무의 단순함을 비판하며 무용 ‘눈이 내린다’에 대해서도 ‘단순한 설명적 스토리’라고 논평했다. 그리고 ‘꽃 파는 처녀’에 대해서도 비참함을 강조하여 연속하는 방법을 비판했다. 그러나 시라하마는 공연 전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여러 가지 자연주의적 발상에 불만을 가지게 되면서도 어떤 동경을 품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자연 회귀를 강하게 원하는 것이다”고 정리하였다[30]. 음악가이며 음악평론가인 야자와 다모쓰(矢沢保)는 “먼저 형식을 말하자면 오페라의 고전적 양식을 타파한 완전히 독창적인 형식”이라고 규정하며 그 특징을 ①절가(節歌) ②방창 ③연출 이 세 가지라고 했다. 야자와는 “나는 이것을 보고 매우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이 가극이 내가 이상으로 하는 대중적인 예술 형식을 훌륭하게 구체화했기 때문이다 (중략) 일본의 오페라 운동은 유럽의 오페라에 얼마나 접근하는지를 목표로서 진행해 온 것에 문제가 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일본의 현실로부터 출발하며 현재 민중의 음악에 기반을 두고 독자적인 형식을 획득해야 할 시점이 됐다 (중략) 우리들은 혁명가극은 현대 조선의 대중적인 가요를 기반으로서 이것을 대중적인 예술형식에까지 이룩해 간 점에서야말로 배워서 고칠 필요가 있다고 통감했다.”고 극찬했다.

 

나가며

본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4개의 결론을 도출하였다.

1)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은 그냥 양국 친선이 아닌 북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문화 외교의 일환으로 평가 가능할 것이다.

2) 만수대예술단 일본 공연의 구체적 목적은 실제 공연을 통해서 일본인들과 접촉하여, 일본 국내에서 북한에 대한 좋은 인상과 분위기를 조성하며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3) 예술적 측면에서 전문가들의 호평이 많았다.

4) 당시 신문과 잡지 자료에서는 만수대예술단에 대한 부정적 의견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이 긍정적 평가였다. 즉 문화사절단으로서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은 이후 이어지는 북한 예술단에 의한 일본 방문 공연들의 ‘성공’에 첫 신호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다음의 한계점들이 발견되었으며 보완 및 추가 연구의 필요성이 있음을 밝힌다. 첫 번째는 1차 자료의 문제이다. 이번 분석에서는 조선총련 산하 조선신보사가 발간한 조선시보와 조선신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로동신문, 그리고 조선화보사가 발행한 조선화보, 아사히신문, 당시 일본에서 발행된 음악전문잡지 등을 주된 1차 자료로 사용하였다. 특히 조선시보와 조선신보를 많이 사용하였다. 만수대예술단 일본공연의 관련기사는 압도적으로 조선시보, 조선신보에 많았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는 당시의 일본 지방신문 기사, 영국·이탈리아 등 현지신문 기사 등을 수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 외에도 당시 만수대예술단 단원들이 출연한 텔레비젼 프로그램 기록이나 공영 자체의 동영상도 입수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두번째는 본고에는 당시의 국제정세, 특히 냉전구조와 북일 관계에 대한 관점이 약하게 담겨있다[31]. 앞으로 이 측면에 대한 분석이 더욱 진행될 필요가 있다. 세번째는 퍼블릭 디플로머시(public diplomacy)라는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본고는 당시에 사실관계나 담론을 중심으로 정리 및 분석하였기 때문에 이론적 검토가 약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 세가지 부족한 부분을 앞으로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저자소개

모리 토모오미(Tomoomi Mori)tt-mori@res.otani.ac.jp
현재 일본 오타니(大谷)대학교 문학부 국제문화학과 조교수. 박사(미디어학, 도시샤(同志社) 대학). 도시샤(同志社)대학 촉탁강사,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Global Innovation연구기구(코리아연구센터) 전문연구원 등으로 근무하고 2017년 4월부터 현직.

전문분야는 사회학(역사사회학, 정치사회학), 한반도 지역연구. 연구 영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에 관한연구(특히 음악분야), 북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본) 관계에 대한 연구, 한국 언론연구 등.

 


본고는 2018년 10월에 열린 ‘두만강포럼(TUMEN RIVER FORUM)2018’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 및 보충한 것이다. 본고는 한국의 맞춤법에 따라 작성하였다. 다만 북한의 단체명이나 북한에서 발행된 매체 명칭을 인용할 경우에는 원문 그대로 인용하였다.

[1]  1973년 당시의 신문자료에 의하면 만수대예술단은 ‘국립평양만수대예술단’이라는 표기이지만 본고에서는’조선대백과사전8’(백과사전출판사, 1999년, p611)의 표기에 따라서 ‘만수대예술단’으로 한다.

[2] ‘朝日新聞’, 1973年4月17日, チュチェの芸術 マンスデ芸術団調査団に聞

[3] 다만 필자는 2018년 1월에 등장한 심지연관혁악단은 조선노동당이 주관하는 악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4] ‘만수대예술단조직 40돐 기념보고회’, 조선문학예술연감 주체99(2010), 문학예술출판사, 2011년, p.277

[5] 조선대백과사전(8), 백과사전출판사, 1999년, pp.611

[6]  ‘동아일보’ , 1971년 11월 9일, 民俗藝術團 巡演 마치고 11日께歸國 “우아한 韓國예술’

[7] ‘朝鮮時報’, 1973年7月24日, 現代と未来を代表する不滅の芸術

[8] 朝日新聞’, 1973年9月18日, 親善の花咲かせ 新潟港から帰国 マンスデ芸術団

[9] ‘만수대예술단공연의 의의’ , 김일성주석님과 일본인사들, 조선총련 홈페이지
http://www.chongryon.com/ss/comp/w14/w14.html

[10] ‘朝日新聞’, 1972年9月26日, 日中、国交へ急テンポ

[11]  ‘朝鮮時報’, 1973年7月7日

[12]  ‘朝日新聞’, 1972年 9月 26日, 日朝交流に窓口 文化協、協定に調印

[13]  ‘朝鮮時報’, 1973年2月17日, 日本政府は日朝交流と親善を促し、国交正常化に努力せよ

[14]  ‘朝鮮時報’, 1973年3月31日,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ピョンヤン・マンスデ芸術団調査団訪日. ‘朝日新聞’, 1973年3月27日, 公演打ち合わせに副団長ら来日

[15]  ‘朝日新聞’, 1973年3月29日, オペラ部門も派遣したい

[16]  ‘朝鮮時報’, 1973年4月7日, チョソン民主主義人民共和国 国立ピョンヤンマンスデ芸術団

[17]  ‘朝鮮時報’1973年7月21日「マンスデ芸術団日本公演

[18]  ‘朝日新聞’1973年7月29日「マンスデ芸術団あす来日」

[19]  ‘朝日新聞’, 1973年7月29日, マンスデ芸術団あす来日

[20] ‘朝鮮時報’, 1973年8月4日, マンスデ芸術団の日本公演を熱烈に歓迎する

[21]  ‘朝日新聞’, 1973年7月31日, 親善の歌声響かせたい マンスデ芸術団、東京へ着く

[22] ‘朝鮮時報’, 1973年8月9日, 創造性あふれる芸術の極致

[23] ‘朝鮮時報’, 1973年8月9日, 歴史的な公演をみた歓び

[24] ‘朝鮮時報’, 1973年8月11日, キム・イルソン主席の創造したチュチェ芸術の勝利

[25]  ‘朝鮮時報’, 1973年7月24日, マンスデ芸術団の日本公演に際して

[26]  ‘朝鮮時報’, 1973年9月22日, マンスデ芸術団帰国

[27] ‘朝鮮時報’, 1973年9月22日, “キム・イルソン主席の創造したチョソンのチュチェ芸術は人類最高の芸術”

[28] ‘朝鮮時報’, 1973年9月29日, マンスデ芸術団を追って

[29] ‘朝鮮時報’, 1973年9月29日, 舞台に建設の意気込み

[30] 白浜研一郎,「国立平壤マンスデ芸術団≪花を売る乙女≫≪音楽舞踊アンサンブル≫」, ‘音楽の友’31(10) , 1973年10月号, ,1973, pp.26-29

[31]  1965년까지의 북일 관계에 대해서는 朴正鎮(2012)을 참조.

 


참고문헌

한국어 / 조선어

  • 김승, 『북한 기록영화』,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년.
  • 송광철, ‘<방문기>래일을 노래하라-《만수대정신》이 창조된 곳에서-‘, 조선예술, 2009년 9호.
  • 모리 토모오미, ‘예술 공연 ‘추억의 노래’가 가지는 의미’, 북학연구학회보, 제20권 제2호, 2016년.

일본어

  • 姜徹編著, 『在日朝鮮韓国人史総合年表―在日同胞120年史―』, 雄山閣, 2002年.
  • 朴正鎮, 『日朝冷戦構造の誕生 1945―1965 封印された外交史』, 平凡社, 2012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