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오키나와(All Okinawa)” 운동, 새로운 것과 익숙한 것

오키나와에서 “올 오키나와”는 운동의 이름이자 선거연대의 명칭이기도 하고, 조직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명칭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지점은 ‘헤노코 신기지 반대’이다. 이 명칭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섬 전체의 투쟁(島ぐるみ闘争)’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대중투쟁의 폭발과의 연관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올 오키나와” 운동의 새로움은 보수세력과 혁신세력이 통합해서 ‘조직을 결성하고 선거에 참여’했다는 점에 있다. “헤노코 신기지를 만들지 않는 ‘올 오키나와 회의’(辺野古新基地を造らせないオール沖縄会議)”에는 사회민주당, 일본공산당, 자유당, 오키나와사회대중당 등의 정당, 오키나와햄종합주식회사 등의 기업 및 경제단체, 전국노동조합총연합 오키나와현 지부, 오키나와현 교직원노동조합 등의 노동조합, 오키나와평화운동센터, 평화시민연락회 등의 시민단체가 소속되어 있으며, “올 오키나와”의 이름으로 당선된 정치인들도 개인적으로 소속되어 있다. “올 오키나와” 진영은 2016년 말까지 거의 모든 선거에서 승리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투표로서 선택할 수 있는 자신들의 ‘대표’ 거의 전부를 일관되게 ‘반기지’를 주장하는 후보를 선출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 중앙정부는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기정사실’로서 간주하며 여전히 강행하고 있다. 2018년 9월 30일에 예정된 오키나와현지사 선거의 결과는 오키나와에서 최초로 진행된 정치실험, 즉 보수계와 혁신계가 조직적으로 하나의 단위를 만들어 선거에 개입한 이 실험이 어떻게 귀결될지를 판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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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조 미노루(金城 実)의 헤노코 신기지 반대 투쟁 기간 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조각>

김민환(한신대학교)

반정부집회에서 발언한 현지사(県知事)

지난 7월 7일 오키나와 헤노코 신기지 건설현장 부근에서 <듀공·산호를 지키자! 토사(土砂)투입을 허용하지 말자! 헤노코 신기지 건설 단념을 위한 현민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언했지만, 가장 주목을 받은 사람은 당연 오키나와현의 최고 행정책임자인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현지사(県知事)였다. 그는 “정부는 현의 요구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대하는 것 없이 공사를 강행해서 8월17일에는 매립 토사를 투입하고 있습니다. 산호의 이식, 석재의 해상 운반, 해초 이식 등 스스로 내건 환경 보전 조치도 적절하게 실시하지 않고, 호안공사(護岸工事, 해안의 침식을 막고 보호하기 위한 공사)뿐 아니라 토사를 투입하는 매립공사까지 착수한 일은 자연 환경을 배려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민의를 무시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정부의 자세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현민에게 기지 부담을 질 것을 강요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또, 헤노코 신기지 건설 반대, 오스프리(Osprey, 수직이착륙기)의 배치 철회, 후텐마 비행장의 5년 이내 운용 정지 및 위험 제거, 조기 폐쇄 및 철거의 실현을 위해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여러분께 약속”하며 발언을 마무리하였다. 중앙정부에 대해 이렇게 강력하고 공개적으로 반대 및 비판 발언을 하는 지자체장의 사례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매우 이례적이다. 매우 이례적인 이 일은, 그러나, 오키나와에서는 그리 낯설지는 않다. 1995년 이래로 일본의 중앙정부와 오키나와 현지사 사이의 갈등은 꽤나 자주 있었고, 그 파장도 다차원적이었다. 오나가 지사의 경우는 헤노코에 신기지를 건설하는 문제로 일본 및 미국의 중앙정부를 상대로 비교적 일치된 의사를 표명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민의가 매우 강력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의 미군 기지 분포와 오키나와 미군 기지 현황

 

“올 오키나와(All Okinawa)” 운동의 출현과 그 이후의 선거 결과

오나가 지사는 원래 일본 자민당 소속으로 나하시장을 역임한 보수적인 정치인이었지만, 2014년 선거에서 헤노코 신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지지를 얻어 현지사에 당선되었다. 오나가 지사를 지지하는, 즉 신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세력의 이름이 “올 오키나와(All Okinawa)”이다. “올 오키나와”라는 말은 후텐마 비행장에 오스프리를 배치하겠다는 미군의 결정을 철회시키는 운동에 오키나와현 내의 모든 시초손(市町村)장이 동참한 것에 유래한다. 2012년 9월 9일 기노완 해변공원 다목적 광장에서 개최된 <오스프리 배치에 반대하는 오키나와 현민 대회>를 앞두고 현민 대회 사무국이 현내의 모든 시초손장으로부터 반대 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자 “올 오키나와”라는 표현이 ?류큐신보?와 ?오키나와타임즈? 등 오키나와현의 언론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이 현민 대회에는 주최측 추산 10만 1000명이 참석하였다. 오스프리는 미 해병대에서 사용하는 수직이착륙기로서 그 별명이 “과부제조기(widow-maker)”일 정도로 안전에 문제가 많은 기종이다. 후텐마 기지는 주민 거주지와 바로 인접해 있어서 만약 오스프리가 추락한다면, 직접적으로 주민들에게 피해가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1950년대 이래로 오키나와에서 미군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추락한 사건은 간혹 발생한 사건이며, 이때마다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키나와 사람들 입장에서는 오스프리의 추락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2013년 1월 28일에는 오키나와 현 내의 모든 시초손장 및 시초손 의회 의장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일본 정부에 <오스프리의 배치 철회와 후텐마 기지의 현내 이전 포기를 요구하는 건백서(통칭: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기도 했다.

선거 활동이나 정치세력으로서의 “올 오키나와”는 2014년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서 신기지의 헤노코 이전 반대파인 오나가 타케시를 지원하는 시스템으로서 구체화되었다. 이 선거에서 주목할 것은, 오키나와의 혁신세력 뿐만 아니라 보수세력 중 헤노코 신기지 건설 반대파가 참여해서 일종의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는 점이다. 그 전에 오키나와에서는 혁신세력들이 선거 연합을 하거나 공동투쟁에 나선 일은 매우 많았지만, 보수세력이 조직적으로 혁신세력과 힘을 합친 적은 없었다. 이 ‘통일전선’에 “신기지의 헤노코 이전에 반대하는 압도적인 주민 여론을 배경으로 보수와 혁신의 벽을 뚫고 오키나와가 일치단결했다”는 의미를 담아 “올 오키나와”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올 오키나와”를 구성하는 정치세력 중 한 축인 보수세력들은 일본본토와 구분되는 ‘오키나와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나가 지사도 원래 보수정당인 자민당 소속이었다. 이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으로 ‘오키나와의 마음(沖縄の心)’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오키나와에서 자민당 후보로 현지사에 당선된 최초의 인물인 니시메 준지(西銘順治)가 한 말이었다. 그는 1979년 현지사 취임 직후 오키나와 지역지와의 신춘인터뷰에서 저 유명한 ‘아무리 야마톤츄(大和人)가 되려고 마음먹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우치난츄(沖縄人)의 마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비록 오키나와가 일본의 현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지만, 일본의 다른 곳과 오키나와는 다르다는 점을 표현한 바 있다. ‘야마톤츄’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본본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고, ‘우치난츄’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니시메의 이 말은 “아무리 일본인이 되려고 마음먹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오키나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 ‘오키나와의 마음(沖縄の心)’을 갖고 있는 보수세력들이 “올 오키나와”에 참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14년 이후 “올 오키나와” 운동 세력들은 오키나와 현 내의 모든 선거에서 선거 공조, 후보자 조정, 통합 후보 추대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 2015년 12월에는 신기지의 헤노코 이전 반대를 내건 약 20개의 단체가 “헤노코 신기지를 만들지 않는 ‘올 오키나와 회의’(辺野古新基地を造らせないオール沖縄会議)”를 출범시켰다. 여기에는 사회민주당, 일본공산당, 자유당, 오키나와사회대중당, 국민민주당 오키나와현 지부 등의 정당, 오키나와햄종합주식회사 등의 기업 및 경제단체, 전국노동조합총연합 오키나와현 지부, 오키나와현 교직원노동조합 등의 노동조합, 오키나와평화운동센 터, 평화시민연락회 등의 시민단체가 소속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 “올 오키나와”의 이름으로 당선된 오나가 지사나 시로마 미끼코(城間幹子) 나하시장 등 정치인들도 소속되어 있다. 이제 오키나와에서 “올 오키나와”는 운동의 이름이자 선거연대의 명칭이기도 하고, 이 조직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명칭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지점은 ‘헤노코 신기지 반대’인 것이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올 오키나와” 운동이 참여한 선거에서 거의 전부 이들이 승리하였다. 2014년의 현지사 선거와 중의원 선거에서 모두 “올 오키나와” 세력이 지원하는 후보가 당선되었다. 특히,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올 오키나와”가 지원하는 후보가 4개의 지역구 모두에서 당선되어 일본 국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또, 2016년에 실시된 오키나와 현의회 선거에서 27석을 얻어 현의회의 과반 이상을 무난하게 차지하게 되었다. 같은 해 실시된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도 두 석 모두 “올 오키나와”의 지원을 받은 후보가 승리함으로써 일본 국회의 중의원 및 참의원에서 오키나와현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6명은 모두 “올 오키나와” 출신이 독점하게 되었다.

2014년에 실시된 나하시장 선거와 나고시장 선거에서도 이들이 승리했다. 무엇보다 나고시장 선거가 전국적인 주목을 끌었다. 나고시장 선거에서, 헤노코 기지 건설 찬성파가 이기면 나고시가 500억엔(약 5,230억)을 보상받게 될 것이라는 자민당 간사장의 공개 ‘매수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나고 시민들은 반기지파 후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냄으로써 일본의 여당인 자민당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반면, 2016년 실시된 기노완시장 선거에서는 “올 오키나와”가 지원하는 후보가 낙선함으로써 “올 오키나와” 진영에 처음으로 패배를 안기게 되었다. 나하시는 오키나와현 내의 최대 도시로서의 상징성이 있으며, 나고시는 신기지 건설이 추진 중인 헤노코를 관할하는 도시이다. 기노완 시는 헤노코로 이전할 예정인 후텐마 기지가 위치한 도시이다. 기지를 이전했으면 하는 기노완시민과 기지가 이전되어서는 안 된다는 나고시민의 선택의 차이가 보이는 부분이다.

2016년 말을 기준으로 보면, 중의원 및 참의원 국회의원 전원, 오키나와현지사, 오키나와현 의회의 절반 이상, 나하시장, 나고시장 등 오키나와현 내 지자체장의 다수가 헤노코 신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올 오키나와” 진영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투표로서 선택할 수 있는 자신들의 ‘대표’ 거의 전부를 일관되게 ‘반기지’를 주장하는 후보를 선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일본 중앙정부는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기정사실’로서 간주하며 여전히 강행하고 있다. 투표를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이제 어떤 방법이 남아 있을까?

역대 오키나와현 지사와 미군기지에 대한 입장

2017년부터 “올 오키나와”가 선거에서 지는 사례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2018년 2월의 나고시장 선거에서 “올 오키나와” 후보가 패배하였으며, 이후 오키나와시장 선거에서도 패배하였다. 올해 10월부터 본격화될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결과를 낳을지가 최대 관전 포인트이다.

현재 오나가 지사의 재선이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과 다시 재선되지 않겠냐는 전망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2017년부터 “올 오키나와”의 패배 횟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무엇보다 2018년에 치러진 선거에서 대부분 패배했기 때문에 지사 선거에서도 “올 오키나와”가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한편에 있다. 사실, 조직으로서의 “올 오키나와”는 약점이 매우 많다. 무엇보다 ‘반기지’라는 점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여러 조직들이 함께 하고 있어 기지 문제 이외의 다른 이슈들에서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올해 나고시장 선거에서는, 2014년 선거와 달리, 기지 문제와 관련한 중앙정부의 개입(?)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이 선거에서는 기초지자체 선거 특유의 ‘지역 이슈’들이 부각된 측면이 있고, 여기에 “올 오키나와”는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선거 이후 “올 오키나와 회의”에 참여했던, 오키나와현 경제계의 중진인 가네히데그룹(金秀グループ, 알루미늄 제조, 건설, 리조트 운영 등의 사업에 종사)의 고야 모리마사(呉屋守将) 회장이 “올 오키나와 회의가 혁신색이 짙어진 것에 불만이 있으며, 패배의 책임을 진다”며 올 오키나와 회의 공동 대표를 사퇴하면서 가네히데그룹이 “올 오키나와 회의”에서 탈퇴했다. 이것은 “올 오키나와” 진영이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들의 연합이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카리유시(かりゆし, 호텔경영)도 “올 오키나와 회의”에서 탈퇴했다. 이로써 “올 오키나와 회의”에 남은 기업은 오키나와햄종합주식회사 하나가 됐다. 반대로, 오나가 지사가 반기지 전선에서 너무 미온적이라는 혁신계로부터의 비판도 제기된 형국이다. 이처럼 “올 오키나와” 진영의 내부 균열과 다른 정책에 있어서의 취약성 등이 부각되면서 올 가을 현지사 선거에서 “올 오키나와” 진영의 오나가 지사의 재선이 어렵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기초지자체 선거와는 달리 현지사 선거에서는 오키나와현의 최대 쟁점인 기지 문제가 여전히 선거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관측하면서 “올 오키나와” 진영의 여전한 강세를 전망하는 사람들도 많다. 2017년 아베 총리의 국회해산 및 조기 총선 실시 방침에 따라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올 오키나와”는 이전 중의원 선거에 비해 1석을 잃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체 4개 선거구 중 3개 선거구에서 승리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현지사 선거처럼 오키나와현 전체의 운명을 묻는 광역 선거에서는 “올 오키나와” 진영의 지지자들이 결집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올 오키나와 회의”를 탈퇴하면서 ㈜카리유시 대표가 “오나가 지사를 지원할 다른 방법을 찾아 보겠다”고 한 것처럼, 여전히 “올 오키나와” 진영의 잠재력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올 가을의 현지사 선거는, 오키나와에서 최초로 진행된 정치실험, 즉 보수계와 혁신계가 조직적으로 하나의 단위를 만들어 선거에 개입한 이 실험이 어떻게 귀결될지를 판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올 오키나와” 운동에서 오키나와현정부 및 나고시정부의 역할

헤노코 신기지 건설은 1998년 봄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2018년인 올해까지 무려 20년 동안이나 기지가 완성되지 못했다. 미국과 일본 두 강대국 정부가 추진하려는 이 계획이 아직까지 완성되지 못한 것은, “올 오키나와” 운동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오키나와 내부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내부의 강력한 반대 운동은 매주 토요일마다 주기적으로 헤노코 기지 건설 현장에서 진행되는 연좌시위나 20년 간 이어져 온 농성, 일 년에 몇 차례씩 개최되는 현민 대회 등의 형태로 외부에 알려져 있다. 여기에 헤노코에 서식하는 희귀 포유류 듀공과 산호 등의 입을 빌어 신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이미 유명해진 사실이다.

<긴조 미노루(金城 実)의 헤노코 신기지 반대 투쟁 기간 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조각>
(필자 촬영)

이 반대투쟁에 가장 먼저 나선 사람들은 1998년 당시 이미 70대가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고깃배로 건설 물자를 수송하는 군함을 저지하는 활동을 시작으로, 앞에서 언급한 다양한 반대운동에 한결같이 참여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키나와전(戰)의 지옥, 미군정기의 어려움, 일본복귀의 희망과 좌절 모두를 경험했던 세대였다. 20년이 흐르면서 이 분들 중 해마다 노환으로 돌아가신 분도 생기고 있는데, 오키나와에서는 기금을 모아 이 분들이 마치 어깨를 걸고 있는 것 같은 형태로 조각을 하고 있다(위 사진 참조). 2016년에 분꼬(文子) 할머니는 9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농성장에서 농성을 하셨는데, 그때 이분의 말씀이 지금 헤노코 반기지 투쟁 농성장에 적혀 있다. “승리한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기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반대운동만으로는 국책사업의 완성을 20년 동안 저지할 수 없었다. 여기에 오키나와현정부나 나고시정부의 행정적인 반대가 결합되어야 비로소 신기지 건설 반대운동의 실효성이 드러난다. 이 때문에 “올 오키나와” 진영이 지사 선거나 시장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2016년까지 일본 중앙정부와 오키나와현정부 사이에는 상호 간에 여러 건의 법적 소송이 제기되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일본정부가 오키나와현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매립승인 철회 취소 소송’이었다.

이 소송을 이해하려면 헤노코 신기지 건설과 관련해서 일본의 중앙정부, 오키나와현정부, 나고시정부가 각각 담당해야 하는 일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국책사업이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모든 것을 시행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 법률 상 현정부 및 기초지자체가 담당해야 하는 일도 존재한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위한 기본 계획의 수립, 예산의 편성, 집행 등은 중앙정부의 소관이지만, 신기지 건설을 위해서는 바다를 매립하여 육지로 만드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바다를 매립하는 작업을 승인하는 권한은 중앙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정부에 있다. 한편, 헤노코 현장까지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임시도로가 부설되어야 하는데, 이 임시도로 부설권은 나고시정부에 있다. 따라서 “올 오키나와” 등 반기지 세력이 현정부나 시정부를 맡게 되면, 이 권한들을 이용해서 공사진행을 중단시킨다.

오나가 지사도 지사로 취임한 후 이전 지사가 승인한 신기지 건설부지의 매립을 철회하는 조치를 취한다. 나고시정부의 임시도로 부설권 거부는 바다를 통한 수송이라는 대안이라도 있지만, 오키나와현정부에 의해 기지가 건설될 헤노코 앞바다의 매립이 취소되면, 아무리 중앙정부라도 방법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앙정부는 오나가 현정부가 ‘매립승인을 철회한 것을 취소하라’, 즉 ‘매립을 승인하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소송에 대해 후쿠오카 고등재판소 나하지부는 2016년 9월 16일 일본 중앙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오나가는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같은 해 12월 20일 대법원은 현정부의 상고를 기각하고 매립승인 취소를 철회하지 않은 오나가의 대응은 위법하다고 판정함으로써 중앙정부의 승소가 확정되었다. 법원의 논리는 “외교·국방 정책에 대해서는 현지사의 심사권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소관이 아니라, ‘국가와 지방의 역할 분담 원칙’에 근거하여 ‘국가의 설명이 구체적인 점에서 불합리하지 않는 한’ 국가의 판단을 존중해야 하며, 또한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와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대해서도 국가의 주장을 받아들일만 하고, 국가의 환경대책도 합리적이며, 헤노코 이설에 따른 기지부담의 경감 효과가 나타날 것이고, (무엇보다) 이전 지사의 승인에 하자가 없어 위법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취소하는 것은 …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대법원도 거의 동일한 이유로 현정부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 대법원 판결을 기점으로 잠시 중단된 헤노코 매립 공사는 2017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이글의 제일 앞에서 언급한 ‘현민 대회’는 바로 이 매립 공사를 위해 토사(土砂)가 투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최된 것이다. 대법원 판결까지 난 마당에 토사가 투입되는 것을 막을 명분이 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현민 대회에 참여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아마 가장 명분이 없는 행위는 헤노코에 신기지를 건설하는 것 자체일 것이다. “우리 오키나와 사람 절대 다수가 반대하는데, 이것보다 더 큰 명분이 어디 있는가?” 문제는 이것을 뒤집을 수 있는 법적·제도적 수단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날 현지사의 발언에는 현정부에서 강구하는 몇몇 수단들이 언급되었다. 첫째,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위한 법령 등에 근거하는 지사의 권한에는 사업 실시와 관련해서 반드시 지사와 협의를 하도록 되어 있는데, 사전협의가 성립되기 전에 공사를 강행하고 있어서 현정부의 입장에서는 환경 보전 조치 등의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현정부와의 협의를 재개해야 한다. 둘째, 현정부의 정보공개 청구로 드러난 오키나와방위국(沖縄防衛局)이 실시한 지질조사보고서는 일부 공사구간에서 연약지반을 명시하고 있다. 현정부는 지질조사 결과 지반 개량공사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이것이 반영되면 전체 설계 개요가 변경될 수 있으니, 이것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물론 이 두 방안은 신기지 건설을 최대한 늦추는 것일 뿐 근본적인 대책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현정부와 시정부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하는 노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날 현지사의 마지막 발언은 “철회에 대해서는 법적인 관점에서 검토를 세심하게 하고 있어 환경보전 조치 등에 대해서 간과할 수 없는 사태가 되면 나는 주저 없이 반드시 철회를 결정할 것입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만약 대법원에서 일본 중앙정부가 아니라 오키나와현정부의 손을 들어 주는 판결을 내렸다는 상상을 해 보자. 이럴 경우 일본 중앙정부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일본 중앙정부는 법을 개정하거나 새로운 법을 제정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돌파구가 안 생길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런 추측은 역사적인 선례에 의해 뒷받침된다. 1995년 오타 마사히데(太田昌秀) 현지사 시절 소위 말하는 ‘대리서명’ 거부 사건 때 발생한 일이 그 선례이다.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토지를 제공하는(강제든 자발적이든) 지주들은 계약기간이 끝날 때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한다. 그런데, 1970년대 말부터 재계약을 거부하는 ‘반전지주(反戰地主)’들이 나타나서 조직적으로 재계약 거부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등장에 일본정부는 이들과 일대일로 계약을 맺는 대신 현지사가 일괄적으로 ‘대리서명’하는 제도를 도입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1995년 당시 오타 현지사가 무려 이 ‘대리서명’을 거부해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법적·제도적으로 보면, 오타 지사가 대리서명을 거부하면, 미군은 ‘불법’적으로 지주들의 토지를 점거 혹은 수용해 버린 것이 된다. 일본 중앙정부는 정치적으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오타 지사를 압박하는 한편, 법을 아예 개정해 버렸다. 수상이 ‘대리서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이런 중앙정부의 행위를 보면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네 번째 ‘섬 전체의 투쟁(島ぐるみ闘争)’?

앞에서 “올 오키나와” 운동의 새로움은 보수세력과 혁신세력이 조직적으로 통합해서 선거에 참여했다는 점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현대사에서 선거가 아닌 대중정치의 측면에서는 보수세력과 혁신세력이 함께 연대한 일이 적어도 세 번은 있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섬 전체의 투쟁(島ぐるみ闘争)’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대중투쟁의 폭발을 말한다. 최초의 ‘섬 전체의 투쟁’은 1956년 프라이스 권고 이후의 저항운동이다. 1956년 6월에 폭력적인 토지 탈취 등 군용지(軍用地) 정책을 포함한 당시까지의 미군지배 방식은 기본적으로 정당하다고 본 프라이스 권고가 전해지자 오키나와의 모든 곳에서 대중투쟁이 전개된다. 1956년 6월 20일 오키나와 전체 64개의 시초손 중 56개의 시초손에서 일제히 시초손 주민대회가 개최되었고 이 주민대회에 16만에서 40만 명 정도의 오키나와 주민이 참여했다고 지역신문들은 보도하였다. 이어서 6월 25일에는 제2회 주민대회가 나하와 코자(コザ, 현 오키나와 시)에서 열려 각각 약 10만 명과 약 5만 명의 주민이 참여하였다. 미군의 지배방식은 정당하지 않다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섬 전체 투쟁’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소위 ‘조국복귀운동’이었다. 이 투쟁 역시 당시 미군의 억압에서 벗어나거나 줄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조국’으로 돌아가는 방안을 모색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당시 오키나와 주민의 입장에서 미군의 억압에서 벗어나거나 줄일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는 미군의 점령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으로 복귀하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미군의 점령 상태가 아니라 미국령으로 들어가서 ‘미국적 표준(american standard)’을 획득하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오키나와에서는 이 세 가지 흐름 모두가 있었지만, 다수는 일본으로 복귀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것은 물론 과거 일본에 의한 통치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도 오키나와 주민들이 외부에서 강력한 지지세력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오키나와의 일본복귀를 청원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고, 1960년대를 거치면서 이런 흐름은 강고해졌다. 그리고, 처음에는 독립론에 기울어 있던 세력들도 ‘평화헌법 아래로의 복귀’ 그리고 그 이후 ‘반전 복귀’라는 대의명분으로 이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다.

세 번째는 1995년에 발생한 미군에 의한 ‘소녀성폭행’ 사건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반 미군기지 운동이다. 1995년은 앞에서 이야기한 오타 당시 현지사의 ‘대리서명’ 거부 사건이 발발한 해이자 오키나와전 50주년이기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군 세 명에 의해 12세 소녀가 성폭행당하고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분노한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해 10월 10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반기지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 사건 이후 오키나와 내의 미군기지 문제가 대중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고, 도심과 가까운 후텐마 기지와 카데나 기지의 이전 등의 구호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 세 번째 운동의 자장 속에서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로의 이전이 결정되었고, 헤노코 신기지 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에바루(南風原)의 ‘섬 전체 회의’에서 내건 매주 수용일 헤노코로 가자는 내용의 현수막. (필자 촬영)

2014년부터 본격화한 “올 오키나와” 운동을 일부에서는 네 번째 ‘섬 전체의 투쟁’으로 보기도 한다. 명칭 자체에서 “올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섬 전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이전의 ‘섬 전체의 투쟁’과 연관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으며, 참여하는 사람들도 이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가령, 다음의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오키나와 남부 하에바루(南風原)의 ‘섬 전체(島ぐるみ)회의’는 매주 수요일 아침 5시에 헤노코로 출발하지고 독려하고 있다. 2016년 국회의원과 현정부, 중요 도시의 시장 등을 차지해서 정치적 자신감이 넘쳐 흐르는 모습을 보여 주기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올 오키나와” 운동을 네 번째 ‘섬 전체의 투쟁’으로 보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네 번째 ‘섬 전체의 투쟁’이 마지막 ‘섬 전체의 투쟁’이 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첫 번째 ‘섬 전체의 투쟁’이 실패하여 두 번째 투쟁을 불러 왔고, 두 번째 투쟁에 성공해서 일본으로 복귀하였으나 오키나와의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기에 세 번째 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 투쟁은 네 번째 투쟁을 불러왔고,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현상적으로 보면, 오키나와의 세 번의 ‘섬 전체 투쟁’과 진행 중인 네 번째 ‘섬 전체 투쟁’은 실패했거나 실패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오키나와 사람들은 실패했는가? 그들이 네 번에 걸친 ‘섬 전체 투쟁’에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이 계속해서 뇌리에 맴돈다.

 

<후기>

이 글은 2018년 7월 7일에 있었던 <현민대회>까지의 상황을 기반으로 작성되어 8월 7일 최종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8월 8일 오나가 지사가 지병인 췌장암으로 별세하면서 오키나와의 상황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현민대회> 이후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7월 27일 오나가 지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현민대회>에서의 발언처럼 ‘매립승인 취소’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이날 표명된 ‘매립승인 취소’의 의지를 법적·제도적으로 구체화하는 절차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8월 8일 오나가 지사가 별세한 것이다. 오나가 지사의 별세로 이 문제는 다음 현지사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올 11월에 예정되어 있던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는 관련 법에 의해 9월 30일 치러지기로 결정되었다. 기지찬성파는 일찍부터 사키마 아츠시(佐喜眞 淳) 현 기노완 시장을 현지사 후보로 선출해서 선거에 대비하고 있었던 반면, “올 오키나와” 진영에서는 오나가 지사의 출마를 당연시하고 있어서 다른 대안을 준비하고 있지 못했다. “올 오키나와” 진영은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한 결과 다마키 데니(玉城デニ-)중의원에게 현지사 후보로 출마해줄 것을 요청했다. 다마키 데니 의원은 자신의 후원회 등 여러 사람들과 협의한 끝에 출마를 결정했다.

 

저자소개

김민환 金玟煥 Kim, Minhwan은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논문의 제목은 「동아시아의 평화기념공원 형성과정 비교연구: 오키나와, 타이페이, 제주의 사례를 중심으로」로서, 동아시아에서 일본제국 해체기에 발생한 전쟁 및 폭력을 ‘국가폭력’의 관점이 아닌 ‘국가를 낳은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했다. ?포위된 평화, 굴절된 전쟁기억: 히로시마 만의 군항도시 구레 연구?(공저), ?오키나와로 가는 길?(공저), ?경계의 섬, 오키나와: 기억과 정체성?(공저), ?냉전의 섬 금문도의 재탄생?(공편), 「동아시아 변경 섬의 지정학과 냉전체제 성립기 국가폭력 발생의 구조」, 「일본 전후(역)사학과 ?오키나와현사? 편찬의 역설: ‘국민사’에서 ‘탈국민사’로」 등의 연구를 수행했다.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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