쾀뻰타이(Thainess): 태국의 태국에 의한 태국을 위한!

2014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정부는 ‘쾀뻰타이 (Thainess)’ 기치 아래 강력한 내셔널리즘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관광대국인 태국에서 쾀뻰타이는 대개 관광홍보 차원에서 예술이나 문화적 용어로 이해되고 있지만 사실 쾀뻰타이는 19세기 중반 서구식 국가 개념을 도입해 생겨난 정치 용어이다. 왕권 강화가 주목적이었던 쾀뻰타이는 태국의 정체성을 규정짓고 애국심을 고취시켜 특히 군사정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정국 혼란이나 갈등이 심화된 시기에 단결심을 일으키고 대외적으로 이미지를 개선하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본 글에서는 쾀뻰타이의 역사적 기원뿐만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도 주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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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2018년 봄, <붑페싼니왓 (천생연분, Love Destiny)>이라는 드라마가 태국의 안방극장을 들썩이게 했다. 태국식 퓨전 사극으로 시청률 18%를 기록하면서 디지털 TV시대 들어 최고의 히트작으로 등극하였다. 착하고 밝은 성격에 외모에는 그다지 자신 없는 현대의 한 여성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그녀의 영혼이 아유타야 시대(1350-1767)에 살고 있는 악하기 그지없으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의 몸에 들어가면서 겪는 이야기이다. 진정한 사랑을 찾는 한 여인의 역경과 여정을 그린 드라마라고 제작사는 설명하고 있고 ‘천생연분’이란 의미의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그저 로맨스 장르이겠거니 했는데, 드라마는 보다 많은 생각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다.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고 사회적 신분의 귀천을 얘기하며 페미니즘적 요소도 엿보인다. 반면, 주제는 간단명료하다. ‘권선징악’. 하지만 ‘남나오 (썩은 물)’라 불리던 태국의 TV 드라마와는 내용도 영상도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붑페싼니왓>의 인기는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잡을 만큼 대단했다. 먼저, 20〜30대의 젊은 층을 TV 앞으로 불러들였다. 드라마에 등장한 의상, 음식, 장소 등 드라마와 관련된 모든 것이 화제가 되었고, 드라마의 배경이 된 아유타야는 방문객이 급증하면서 사원을 포함한 관광지의 개방시간을 늘려야 했다, 드라마가 방영되던 약 3개월 간 아유타야는 태국 전체 GDP의 2%에 해당하는 약 3천억 밧의 경제 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붑페싼니왓 TV 드라마 포스터

출처: CH3 방송국 홈페이지 http://www.ch3thailand.com

쁘라윳 태국총리는 드라마 주인공들과 제작진을 정부청사로 초청해 연회를 베풀면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니욤타이(Niyom Thai, 타이 선호) 정책에 큰 힘을 보태주었다고 치사하였다. 경제적인 효과를 예로 들어 ‘태국적인 것이 최고’라는 현 정부의 정책이 옮음을 증명해 준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2018년초부터 태국의 문화관광체육부에서는 10억 밧(한화 약 337억 5천 만 원)의 예산으로 태국 문화와 내셔널리즘을 고취시키는 ‘타이니욤양이은(Sustainable Thainess)’ 프로젝트를 시행중인데, 이의 일환으로 <붑페싼니왓> 제작사인 채널 3과 함께 <붑페싼니왓 2>를 제작하겠다고 나섰다. 한국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보며 태국에도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웰메이드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를 희망한다고 했던 쁘라윳 총리의 바람이 이루어진 듯하다.

2014년 5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쁘라윳 총리는 ‘쾀뻰타이(Thainess)’ 기치 아래 강력한 내셔널리즘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쁘라윳 정부만이 쾀뻰타이를 주창하며 내셔널리즘을 고취한 것은 아니다. 사실상 역대 모든 군사정부가 쾀뻰타이를 새로이 규정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방콕포스트지의 논평에서는 태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정권의 시도는 다른 그룹에 우위성을 입증하려 하는 것이며 지배의 정당성을 공표하는 행위라고 비평했다. 즉, 쾀뻰타이는 정치선전의 전술(propaganda tactic)임을 뜻하는 것이다.

 

쾀뻰타이 (Thainess)’?

쾀뻰타이란 사전 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다.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태국적인 것’으로 태국인들에게 물어보면 정의를 설명하기 보다는 ‘태국전통의상’, ‘국왕’, ‘불교사원’ 등 상징물을 예로 든다. ‘태국인의 미소’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하는 태국식 인사 (깐와이)’ 등 다소 추상적인 이미지를 말하는 이도 있다. 그만큼 막연하고 모호한 용어라는 뜻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이 나열하는 쾀뻰타이에는 반드시 ‘좋은/아름다운’ 의미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쁘고 추한 것들은 태국의 것이 아니라는 배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태국관광청(Thai Tourism Authority) 찯탄 홍보실장은 태국인의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identity)을 규정하는 캐릭터로 쾀뻰타이를 태국음식, 태국의 예술, 태국인의 생활방식 등 태국인이 창조하고 소비하고 향유하는 모든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정치학자인 핏 퐁싸왓 쭐라롱껀대 교수는 태국인으로서 행동양식을 판단하는 방법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쾀뻰타이를 가치체계로 설명하는 앤더슨(2012)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태국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앤더슨은 덧붙여 현대 태국사회에서 수용 가능의 여부는 결정적으로 태국의 3대 주축(three pillars of Thailand)–국가, 종교, 군주 (nation, religion, monarchy)–에 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현 정부에게 쾀뻰타이는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을 넘어 실질적인 통치의 수단이며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군부가 정당성을 선전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적 의견을 제시한다.

 

쾀뻰타이의 시작

쾀뻰타이는 19세기 중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구식 국가 개념을 도입해 생겨난 정치적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몽꿋왕 (재위 1851-1868) 시대를 쾀뻰타이 개념의 시작으로 본다(싸타야누락 2005: 68-81, 레이놀드 2006: 295-350, 안드레아스 2006). 몽꿋왕은 근대식 서양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서양의 발전된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왕으로 왕위에 오르자 서구식 국가 개념을 도입하였다.

라마 3세의 서거 이후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세도가인 분낙가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 몽꿋은 오랜 승려 생활로 정치적 기반과 세력이 약했다. 세도가의 권력간 갈등 속에서 몽꿋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위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시행하였다. 먼저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동남아시아 지역의 신화와 전통문화를 모아 타이화(Thaification)하고 태국의 상징물을 제작하였다.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발전시키고 태국문화와 접목시켰으며 역사의 재해석 작업을 통해 왕의 권력과 국가의 의미를 정의하면서 대영제국을 모델로 삼아 백성을 시민이라 칭하고 ‘왕이 곧 국가’라는 개념을 선포함으로써 중앙집권화와 호족세력의 약화를 꾀하였다. 국가의 경계선을 지정하고 태국 내 다양한 종족들의 타이화를 시도하였고 중부 태국의 언어를 표준어로 설정하고 태국어 문법책을 편찬하는 등 태국이라는 국가의 개념을 구체화하였다. 종교적 의식과 문화축제를 개발하고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를 태국식으로 편찬하여 신이 내려준 왕이라는 개념을 주입함으로써 왕실의 당위성을 높였다.

몽꿋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5세에 왕위에 오른 쭐라롱껀왕(재위 1868-1910)은 분낙가에 의해 섭정을 당하면서 아버지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쭐라롱껀왕은 중앙권력의 개혁을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삼았다. 현대식 군대를 양성하여 세도가와의 갈등으로부터 왕위를 보호하고 동시에 유럽제국의 식민화 위협에 대항했다. 쭐라롱껀왕은 ‘싸얌(당시 태국 국호)은 하나의 왕을 중심으로 타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국가’임을 선포하고 문화적 축제와 의례를 통해 태국 내 모든 종족들의 단결을 유도하였다. 1884년 태국 최초의 공립 초등학교가 방콕에 설립되었는데 교육을 통한 ‘쾀뻰타이’ 주입이 이루어졌다. 왕의 연대기를 가르치고 왕과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들을 영웅화하며 무엇보다 왕이 중심이 된 태국의 이미지를 고착화시켰다.

© DIVERSE+ASIA

1910년 왕위에 오른 와치라욷왕은 서양에서 교육을 받은 왕으로 서양식 국가의 개념이 확고했다. 1917년 태국 국기를 만들고 빨간색은 국가, 흰색은 종교, 파란색은 와치라욷 자신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태국의 대표 색으로 삼았다.[1] 국가와 종교와 국왕이 태국이라는 이념을 구체화한 것이다. 또한 문학 작품을 통해 국가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전파했는데 주적(主敵)으로 크메르가 등장하였다. 태국은 선하고 정의로운 국가로 크메르는 악마 또는 타자(他者)로 표현함으로써 당시 크메르와의 크고 작은 잦은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유럽의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은 와치라욷왕은 왕의 전통적 의미보다 국가의 위대함에 중점을 둠으로써 왕을 중심으로 한 쾀뻰타이의 약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자초했다. 물론 왕권의 약화는 온전히 와치라욷왕의 정치적 성향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고 태국 역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시대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1912년 왕권의 축소와 제한을 요구하는 92명의 군인과 시민들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었고 이로 인해 왕의 이미지는 치명적 손상을 입었다. 게다가 1917년과 1919년 자연재해로 인해 기근현상이 발생하면서 경제적 위기를 맞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위를 계승한 쁘라차티뽁(King Prajadhipok 재위 1925-1935)은 권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왕권이 약화되었다.

 

피분쏭크람의 태국식 문화혁명 랏타니욤정책

1932년 유럽의 민주화를 목격한 태국의 유학파 엘리트층에 의해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입헌군주제로전환하게 된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아난따싸마콤 궁에는 왕실기 대신 국기가 게양되었다. 1933년 국가를 제작하였고, 입헌혁명일인 6월 24일을 건국기념일로 지정했다. 서양식 국가 개념에 의한 완전한 국가의 형태를 갖춘 태국이 완성된 것이다.

입헌혁명의 주역으로 1938년 집권한 피분쏭크람은 프랑스에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파시스트 무솔리니를 동경하였다. 강력한 정부와 부강한 국가 건설을 꿈꾸었던 피분은 함께 혁명을 도모했던 엘리트층의 반대로 완전히 왕정 폐지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왕권을 약화시키고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몽꿋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편찬한 ‘라마끼안’이 국민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작품이라고 선언하였으며 라마왕은[2] 나약하며 우유부단한 왕이라 비난했다. 현 왕조를 부정하며 톤부리왕조의 딱씬 왕을 진정한 영웅으로 추앙하였고 태국의 황금기는 쑤코타이 시대의 람캄행 대왕때로 이 시기를 부각시키며 역사의 재해석을 시도했다.

1939년 ‘새로운 싸얌’ 건국을 위해 태국의 국명을 ‘Siam’에서 ‘Thailand’로 바꾸었고 타이문화에 대한 재해석 작업을 실시하여 관련법을 제정하였다. ‘랏타니욤’이라 불리는 이 태국식 문화혁명은 행동하고 음식을 먹는 방법까지 세밀히 법으로 규정하였는데 태국인은 문명화된 민족으로 문명화된 사회에 걸맞게 서양식 의상을 평상복으로 착용하고 태국식 전통의상 입기를 법으로 금지하였다. 로얄 패밀리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행위를 금지하였고 왕실용어 사용을 폐지하고 문자 개혁을 통해 태국문자의 간소화를 실시하였다. 새로운 태국의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국산품 애용을 권장하는 등 애국심을 고취하는 작업을 실시하였다.

랏타니욤 복장정책에 대한 홍보물

출처: 1943년 정부에서 발행한 홍보물
* 랏타니욤 정책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홍보물로 좌쪽에는 불가능한 복장과 우쪽에는 가능한 복장의 예를 제시하고 있음.

태국국민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태국 내 거주하는 중국인은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당시 무역상권을 장악하고 있거나 악덕 대부업자 또는 중개업자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이들에 대한 태국인의 감정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태국 내 중국인들이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면서 대일본 태국쌀 수출이 힘들어지면서 태국의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피분은 중국인에 대한 규제법을 강화하였다. 또한 군국주의자였던 피분은 군대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군부의 권력을 확대하였다. 군의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고 애국심을 고취시킨 덕에 약 70,000명의 장정이 자원입대하였다. 하지만 타이무슬림을 포함한 불교도가 아닌 모든 이들의 군입대를 금지하는 등 피분은 태국민족 우월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감정을 이용하여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동맹을 맺었던 피분은 일본이 패망하면서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고 이로 인해 실권하였으나 국민의 신망을 회복해 1947년 재집권에 성공한다. 이 시기에 피분정권을 위협한 대상은 공산주의로 동남아 주변국가들이 급속도로 공산화되고 있었다. 피분은 반공산주의 정책을 명목으로 미국으로부터 거대 자금을 투자 받아 군대와 지방의 현대화 및 개발에 투자하였다. 기득권 엘리트층의 친왕정주의 상승과 정적의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군주가 본인의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피분은 1950년 군주의 가치를 재건하고 본인 스스로를 군주의 수호자임을 자처한다.

1957년 왕정주의자(royalist)였던 싸릿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면서 왕권의 완전한 복권을 실시하고 동시에 중앙 권력을 확장하였다. 싸릿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간주하는 등 태국의 전통문화와 가치를 중요시하였다. 서양의 로큰롤 음악이나 댄스는 태국의 고귀한 가치를 손상시키는 해악으로 간주하여 금지시켰다. 불교의 가르침을 중요시했고 왕을 중심으로 한 태국주의를 다시 복원하였다.

피분쏭크람의 랏타니욤 정책
© DIVERSE+ASIA

 

민주화 시대의 쾀뻰타이 그리고 현재

1960년대 들어서면서 대학의 설립이 늘고 대학생 수가 증가하면서 국가발전의 중심에 대학생들이 위치하게 되었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반미 운동이 전개되었고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펼쳤다. 1973년 10월 14일 탐마쌋대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푸미폰 왕은 공식적으로 타넘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타넘은 결국 실각했다. 하지만 중국문화대혁명에 영향을 받은 대학생들에 의해 공산주의사상이 급격히 전파되자 로얄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한 극보수주의자들의 세력이 형성되고 1976년 선거에서 압승한 뒤 도덕과 윤리를 강조한 왕정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 엘리트 군장교 출신이자 대표적 왕정주의자인 쁘렘총리는[3] 국왕의 절대적 이미지 구축과불교를 통한 윤리와 도덕을 강조함으로써 태국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이는 현 정부가 그려내는 쾀뻰타이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태국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 도시와 지방간의 빈부격차, 저조한 외국인 투자 등으로 국민의 정서적 불안이 증가되었는데 쁘렘은 푸미폰 국왕을 중심으로 단결을 강조하며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또한 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며 태국의 문화는 상위 문화라는 인식을 주입하였다. 1992년 군부와 민주운동 시위대가 충돌하여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국왕이 개입하여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였고, 1997년 경제 위기가 발생하자 푸미폰 국왕은 경제적 철학을 제시하면서 국민들에게 격려와 힘이 되었다. 국민들은 진심으로 푸미폰 국왕을 우러르게 되었고 국왕이 중심에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2014년 쿠데타로 쁘라윳 총리가 집권, 2016년 푸미폰 국왕의 서거로 와치라롱껀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2005년부터 시작된 정국 혼란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양극으로 나누어져 대립하고 있는 국민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야 하는 과제를 두고 쁘라윳 총리는 쾀뻰타이를 해결책으로 내놓았다. 집권 직후 태국인으로서 지켜야 할 12가지 가치관을[4] 제시하였는데, 국왕을 중심으로 하나로 단결하며 태국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킨다는 쾀뻰타이와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는 점에서 고전적 쾀뻰타이와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2018년 초 정부는 태국문화 발전을 위한 지침 9가지를 발표하였다.[5] 이 지침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돕기 위해 10억 밧을 투자하여 전국 곳곳에 공무원과 군인 등이 팀을 이뤄 현지에 투입되었다. ‘아름다운’ 태국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좋은’ 태국인이 되자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태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촉구한다는 항목이 눈에 띈다.

2018년 지속적인 타이니욤 정책

출처: 태국 내무부 www.moi.go.th
* 현대적 의미의 쾀뻰타이로서 포스터가 의미하는 바는 참여를 강조하고 소득격차를 줄이고 지속적으로 국민에게 소득을 증가하겠다는 정부의 뜻을 정하고 있음.

현 정부의 이러한 쾀뻰타이 정책에 대해 회의적 반응이 점차 증가하고 있으나 긍정적인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옛날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태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정국 불안과 양극화로 힘들었던 국민을 위로하고 국왕을 중심으로 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일깨워 안정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태국의 좋은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홍보함으로써 외국 관광객 유치에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강제적이며 주입적인 쾀뻰타이라는 점이며 속히 총선이 이루어져 자유롭고 민주적인 쾀뻰타이가 훨씬 아름답고 좋은 것임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저자소개

이지은(busaba@naver.com)
태국 쭐라롱껀 대학교에서 태국학(문화)으로 박사학위 취득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와 서강대학교 열린동남아학교 강의와 주태국 대한민국대사관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이다. 태국의 대중문화를 통한 사회, 정치, 종교, 젠더 읽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다문화가정을 위한 <한국전래동화모음집>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1]세계 제 1차 대전의 동맹국기에서 착안해 파란색, 흰색, 빨간색에 의미를 부여함.

[2]라마(Rama)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태국 버전인 라마끼안(Ramakian)의 주인공 라마 왕으로 태국의 현왕조인 짝끄리 왕조의 연호로 사용된다.

[3]1920년 생. 재임기간 1980-1988. ‘왕의 입’으로 불릴 만큼 푸미폰 국왕의 최측근이었다. 총리임기가 끝난 뒤에도 태국인에게 신임이 두터웠고 추밀원(Privy Council)장을 지내면서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2006년 쿠데타와 2014년 쿠데타의 배후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4]첫째, 국가와 종교와 왕을 사랑한다. 둘째, 성실, 희생, 인내의 가치를 지킨다. 셋째, 부모님께 효도하고 선생을 존경한다. 넷째, 배움에 정진한다. 다섯째, 아름다운 태국의 전통문화를 보존한다. 여섯째, 도덕과 윤리를 실천한다. 일곱째, 왕을 수반으로 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한다. 여덟째, 어른을 공경하고 질서와 법을 준수한다. 아홉째, 국왕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른다. 열째, 자족경제(sufficient economy)를 배우고 실천한다. 열한번째, 심신을 건강하게 하여 종교적 금욕생활을 추구한다. 열두번째,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한다.

[5]2018년 1월 정부가 발표한 태국과 태국문화 발전을 위한 지침으로 ‘진심에서 우러난 선행 (Do good deeds by hearts) 프로젝트’라는 이름 하에 7-12명으로 이루어진 7,463개의 팀이 전 지역에 내려가 정부의 정책을 설명하고 국민의 이해를 돕는 것이 목적

 


참고 문헌

  • Janvatanavit, Pinn., 2015.06.18. An Open Conversation about ‘Thainess’, Bangkok Post.
  • Paritta Wangkiat, 2001.02.01. Thainess: History doesn’t repeat but rhymes, Bangkok Post.
  • Renard, Ronald D, 2006, Creating the Other Requires Defining Thainess Against Which the Other Can Exist: Early-Twentieth Century Definitions, 東南アジア硏究, Vol. 44, No.3: 295-320.
  • Sattayanurak, Saichol. The Construction of Mainstream Thought on “Thainess” and the “Truth” Constructed by “Thainess”.
  • Sturm, Andreas., 2006, The King’s Nation: A Study of the Emergence and Development of Nation and Nationalism in Thailand, Ph.D. Dissertation of the University of London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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