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인의 더블라이프

아시아는 20세기 전반부에 인류의 기원지로 여겨졌으며 그 중심에는 중국 저우커우뎬의 베이징인이 있다. 저우커우뎬에서 발굴된 자료는 호모 에렉투스의 대표적인 자료로서 고인류학에서 21세기 현재까지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베이징인의 발견과 해석에는 20세기 정치와 사회사가 연관되어있으며 인류의 조상에서 중국인의 조상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고인류학의 과학적인 자료로서의 베이징인과 정치사의 자료로서의 베이징인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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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대학교)

2008년 8월 8일. 중국 문화에서 풍요를 나타내는 행운의 숫자 8이 세 번 겹치는 날은 베이징 올림픽 개막일이다. 저녁 8시 8분에 열리는 개막식에 맞추어 도착할 올림픽 성화가 마지막 날의 여정을 시작한 곳은 유네스코가 1987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베이징인의 저우커우뎬 유적 박물관이다. 베이징원인으로도 불리는 베이징인은 지금의 중국 베이징 근처의 동굴 저우커우뎬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의 대표적인 고인류 화석이다. 호모 에렉투스에 대한 어떤 연구도 저우커우뎬에서 발견된 고인류 화석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자료다. 그런데 고인류학 자료로서 호모 에렉투스의 대표라는 의미 이외에 베이징인에게는 또 다른 정체성이 있다. 베이징인은 엥겔스의 이론에 따라 유인원이 노동을 통해 인간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준 예였으며 중국인의 유구한 전통을 몸으로 담고 있는 “최초의 중국인”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베이징인의 서로 다른 생애사를 추적하면서 그 둘이 어떻게 만나는지 살핀다.

저우커우뎬 유적 박물관과 그 앞에 세워진 베이징인 동상
출처: 저자 제공

 

베이징인은 호모 에렉투스의 대표

베이징인은 호모 에렉투스의 대표적인 화석으로 고인류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23년을 시작으로 저우커우뎬에서 발굴된 고인류 화석은 베이징인Peking Man으로 세간에 알려졌지만, 정식으로 발표된 종명은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Sinanthropus pekinensis이고 후일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로 통합된 후, 다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통합된 복잡한 역사가 있다. 고인류학에서 호모 에렉투스에 대한 이해는 저우커우뎬에서 발굴된 고인류 화석과 고고학 자료를 기본으로 이루어졌다.

중국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저우커우뎬 제1지점에서는 1920년대부터 장기간의 발굴 작업을 통하여 적어도 50개체의 고인류와 석기를 비롯한 고고학 유물이 발견되었다. 40m가 넘는 문화층에서는 고인류가 불을 사용한 흔적, 장기간 동굴을 이용한 흔적, 커다란 동물을 사냥하고 섭취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저우커우뎬 유적의 연대는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 연대를 50만 년 전에서 23만 년 전으로 볼 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우라늄연대측정을 한 결과, 훨씬 더 오래된 78만 년에서 43만 년 전 사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거의 30만 년 동안 호모 에렉투스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발굴 후에도 보존되어온 저우커우뎬의 지층 단면
출처: 저자 제공

베이징인은 호모 에렉투스의 머리뼈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략 미식축구공의 모양으로, 머리뼈가 두껍고 눈썹뼈, 이마뼈능선, 정수리점융기, 시상융기, 모융기, 뒤통수융기, 이마뼈능선등으로 더욱 보강되어 투구에 비유되기도 한다. 두뇌용량은 평균 1,000cc 정도로서, 다른 지역의 호모 에렉투스보다 큰 편이다.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는 머리뼈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데에 비해 머리뼈 외의 뼈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는 저우커우뎬의 호모 에렉투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얼굴뼈와 몸뼈가 거의 남아있지 않는다는 현상은 저우커우뎬이 동종포식을 했다는 가설로 설명되기도 한다. 호모 에렉투스의 동종포식은 오랫동안 주장되어왔으나 직접적인 증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아타푸에르카와 같이 비슷한 시대의 다른 유적에서 분명한 동종포식의 흔적이 나타남을 미루어 보아(Fernández-Jalvo et al., 1999) 저우커우뎬에서도 환경의 척박함으로 마지막 선택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저우커우뎬의 고인류는 불을 이용한 흔적이 보인다. 불에 그슬린 흔적이 남아있는 동물 뼈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익혀 먹었다기보다는 다른 동물로부터 보호하고 따뜻함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저우커우뎬에서 보이는 행위의 흔적이 문화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환경에 의한 습관일 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초기 점유한 고인류는 칼날 자국이 있는 뼈를 근거로 말, 사슴, 순록, 돼지 등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코끼리나 코뿔소와 같이 큰 동물도 먹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저우커우뎬에서는 상당한 양의 석기가 발견되었으며(Zhang and Shen, 2014) 초기에서 후기로 변화도 나타난다. 저우커우뎬의 석기는 비슷한 연대에 유럽에서 만들어졌던 아슐리안 손도끼는 없으므로 모비우스의 가설, 즉 아시아 동쪽에서는 아슐리안 손도끼를 만들지 않았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발견된 석기가 긁개와 찍개이기 때문에 사냥했다기보다는 사체에서 골수를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덴라이히는 저우커우뎬의 고인류 화석집단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와 인도네시아 자바의 고인류 화석집단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를 비교하여 두 집단 사이에 종 단위의 차이점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를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에 포함했다. 이로써 종으로서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는 사라지게 되었으나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연결된다는 가설은 1980년대에 다지역진화론으로 계속되었다(Wolpoff et al., 1984).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의 관계

베이징인을 비롯한 호모 에렉투스가 그 뒤를 이은 호모 사피엔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의 문제는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연구만큼 많은 관심을 받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유럽중심주의도 한몫을 했겠지만, 그 못지않게 자료의 부재 또한 중요하다. 저우커우뎬에서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던 기간 이후 십수만 년 동안 이렇다 할 고인류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모 에렉투스는 자연히 소멸하거나 아주 적은 수로 잔존했고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할 즈음에 아시아는 거의 비어있는 대륙이었다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상정되기도 했다.

호모 에렉투스가 점유했던 저우커우뎬 제1지점의 상부에 위치한 저우커우뎬 상층 동굴인 샨딩동Upper Cave山頂洞은 3만4천 년 전에서 3만9천 년 전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발견된 고인류 화석은 분명히 현생 인류로서, 발견된 두개골 세 점에서 보이는 다양성을 두고, 또 그들이 오늘날 아시아인의 조상이 되는지를 두고 활발한 논쟁이 진행되어왔다. 저우커우뎬 27지점이라고도 불리는 티엔위엔 동굴Tianyuan田园洞은 저우커우뎬에서 6km 떨어진 곳에 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3만9천 년~4만4천 년 전이라는 연대가 보고되었는데, 이 연대가 정확하다면 동부 유라시아의 가장 오래된 현생인류 화석이다. 티엔위엔인에서는 현대적 얼굴 특징들이 보이지만, 진니우샨인과 네안데르탈인과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고위도와 추운 환경에 적응한 결과일 수도 있다.

20만 년 전까지의 호모 에렉투스와 4~5만 년 전 이후의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긴 시기 동안에 해당하는 고인류 화석은 많은 수는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고식 호모 사피엔스 혹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로 불리는 고인류 화석은 마루뼈의 생김새 등에서는 중국의 호모 에렉투스와의 유사성을, 두뇌 용량의 증가 등에서는 아프리카 및 유럽의 중기 플라이스토세 고인류와 유사성을 보이며, 얼굴의 생김새 등에서는 중기 및 후기 플라이스토세의 중국 화석 인류에서 지속해서 보이는 지역적 특징들이 나타난다. 이들을 어떻게 분류할 것이냐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아시아에서 호모 에렉투스가 이들을 거쳐 호모 사피엔스로 연결된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지지가 되어 온 주류 가설이다. 데이빗슨 블랙의 뒤를 이어 저우커우뎬 화석을 연구한 프란츠 바이덴라이히Franz Weidenreich(1873-1948)는 저우커우뎬 화석에서 현생 아시아인까지 지속하는 특징을 제시하고, 그를 바탕으로 연계 관계를 주장했다(Weidenreich, 1943).

바이덴라이히의 이론. 인류는 다양한 집단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 계속 서로 연결된다는 내용을 나타낸 도표
출처: Weidenreich, 1946

다른 지역에서의 유전자 유입이 나타나거나 이전의 집단으로부터의 지속성이 나타나기도 하는 점은 아시아 플라이스토세 내내 확인되는 현상이다. 저우커우뎬의 고인류 화석 집단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부분은 현생 인류 기원 논쟁에서 양대 가설의 하나인 다지역연계론이다. 다지역연계론은 현생 인류가 하나의 기원에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기존의 고인류 집단에서 연속적으로 진화했다는 가설로, 저우커우뎬은 이 가설의 중요한 근거다.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하나의 종으로 기원하여 전 세계로 확산한 뒤 기존의 토착민과는 교류가 전혀 없거나, 최소한의 교류만 있었다는 아프리카 기원론에 의하면 저우커우뎬의 고인류는 현생 인류와 단절되어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연과 필연으로 점철된 발견

고인류 화석의 발견 이야기는 많은 경우 드라마틱한 배경과 기적적인 우연이라는 서사와 함께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베이징인이 발견된 저우커우뎬 동굴에서의 화석 발견은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다. 저우커우뎬에서 고인류 화석이 발견되어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라는 종명과 함께 발표되던 1927년 이전부터 베이징은 화석을 찾아서 유럽에서 모여든 학자들로 붐볐다. 20세기 초 정설이었던 중앙아시아 기원론에 따라 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가 인류의 기원지로 관심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기후가설이 있다. 기후가설이란 살기 힘든 냉대지역이나 살기 편한 열대지역이 아닌 건조하고 광활한 초원지대가 지능의 발달에 필요한 자극을 제공하여 인류가 가장 발달할 수 있었다는, 다분히 식민주의-인종차별적인 내용이다.

저우커우뎬이 표시된 지도
출처: Google maps

중앙아시아 기원론의 영향으로 1920년대에는 고비 사막을 가로지르는 탐험대가 유행했으며 중국 베이징으로 인류의 조상 화석을 찾으러 유럽의 학자들이 대거 모였다. 베이징 근처의 롱구샨龙骨山은 “용 뼈” “용 이빨”이 발견되기로 유명했다. 지역주민들은 용 뼈와 용 이빨을 약재상에 팔았다. 그러나 유럽의 고생물학자들은 한눈에 이것이 화석임을 알아보고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 중 구나르 안데르손Gunnar Andersson은 1921년에 지금의 저우커우뎬 제1지점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발굴을 시작하고 안데르손의 뒤를 이은 오토 즈단스키Otto Zdansky에 의해 1923년까지 발굴이 계속되어 두 개의 어금니를 발견하였다(Boaz and Ciochon, 2004).

데이비드슨 블랙Davidson Black(1884-1934)이 1927년에 시작한 저우커우뎬의 발굴에서는 또 다른 어금니 화석이 발견되어 이전에 발견된 두 개의 어금니 화석과 함께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학계에 발표되었다.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 근처인 저우커우뎬에서 나온 시난트로푸스와 영국의 수도인 런던 근처인 필트다운에서 나온 이오안트로푸스 도소니Eoanthropus dawsoni는 기후 가설로 설명되는 인류의 정통 조상으로 여겨졌다. 반면 적도 근처의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나온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와 남반구인 남아프리카의 타웅에서 나온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는 모두 원시적인 곁가지로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발굴에서 1929년 페이 원쭝裴文中에 의해 발견된 두개골은 큰 두뇌용량을 가지고 있어 큰 두뇌가 인류의 진화에서 가장 이르고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는 생각을 뒷받침했다. 계속되는 고인류 화석의 발견은 중앙아시아 기원론을 뒷받침하여 인류의 기원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최소 40개체분의 고인류 화석과 상당한 양의 고고학 유물을 발견하면서 진행되던 저우커우뎬의 발굴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여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에 휴지기에 들어갔다.

 

베이징인의 실종사건

1937년 저우커우뎬의 발굴은 중단되었지만, 바이덴라이히는 저우커우뎬의 고인류 화석을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1941년 일본이 베이징으로 진입하게 되자 바이덴라이히는 저우커우뎬의 화석과 함께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옮길 준비를 하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에 보관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저우커우뎬의 고인류 두개골 화석들이 분실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으로 운송되려고 베이징 동쪽의 보하이 만 친황다오 부두에 놓였던 화석 궤짝들이 홀연히 사라졌다. 이 사건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으며 저우커우뎬의 원본 화석들도 아직 찾지 못했다.

현재 원본 화석이 어디에 있는지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미국 정부, 중국 정부, 미국 해군과 더불어 유력한 후보로 이야기되는 것이 일본의 야쿠자다. 필자는 일본에서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하였는데 그때 베이징인의 원본 화석을 확인할 수 있으니 동행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거절한 경험이 있다(이상희, 윤신영, 2015). 저우커우뎬의 원본 화석은 전쟁을 치르면서 폭파되었거나, 땅에 묻혔다가 부두를 건설하면서 폭파되어 더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베이징인의 원본 화석은 사라졌으나 베이징인의 중요성은 계속되었다.

 

부활한 베이징인

고인류학에서의 중요한 자료로서의 의미와 평행하여 베이징인에게는 또 다른 생애사가 펼쳐졌다. 1921년 중국공산당의 창당에 이어 베이징의 저우커우뎬에서 첫 치아가 발견된 1927년, 중국에서는 인민해방군이 창설되었다. 새로운 국가, 새로운 당 중심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중국은 당시 주류 생각이었던 중앙아시아 기원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중화 중심사상과 접목하고 중심 이데올로기로 발전시켰다(Schmalzer, 2008). 인류의 요람으로 주목받던 중앙아시아의 티베트, 칭하이, 신장, 내몽고와 몽골을 중화이론 안으로 접수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했다. 새로운 국가체제에 고인류학이라는 과학의 지지를 받은 중화이론은 지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므로 중화이론을 지지할 과학적인 토대로서 고인류학 연구, 그중 수도 가까이에 있는 베이징인 연구를 지원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중국 공산당이 채택한 엥겔스의 공산주의는 다윈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인류의 진화에 대한 엥겔스의 생각이 담겨있는 1876년의 미완 저서에서 엥겔스는 “노동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Engels, 1876). 여타 다른 동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인류의 조상에서 노동의 힘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로 진화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한 엥겔스의 생각에 맞추어 베이징인은 불의 사용과 석기를 만들고 쓴 손을 통한 노동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첫 인간이었다(Sautman, 2001). 20세기 초반 인류의 요람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목했던 중앙아시아 기원론은 중국에서 주류 가설이 되었다.

1941년 바이덴라이히가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고 베이징인의 원본 화석이 사라진 이후 지아 란포는 1949년에 중화인민민주주의공화국 체제에서 저우커우뎬 발굴을 재개하였다. 저우커우뎬의 고인류가 아시아의 현생 인류로 연결된다는 바이덴라이히의 생각은 중국의 고인류학계의 기본을 이룬 우 신지吴新智 등에 의해 계속 주류 입장을 굳혔다. 미신을 혁파하고 과학적인 세계관을 인민에게 교육한다는 취지로 고인류학, 고고학 발굴은 중공 정부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949년에 재개된 저우커우뎬의 발굴은 새로운 프레임에서 이루어졌다(Yen, 2014). 베이징인은 1940년대까지 노동의 힘으로 인간이 된 첫 예로서 첫 인간으로의 지위를 누렸으나 1950년대부터 베이징인은 인류의 시초라기보다는 중국인의 시초로서 대두하기 시작한다. 1950년 이전에는 베이징인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연결되어있지 않았으나 1950년대에는 베이징인이 중국인의 조상이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이징인은 현대 중국인뿐 아니라 중국에 있는 모든 집단의 조상으로 위치를 잡았다. 유구한 역사가 뒤받쳐주는 정통성은 중일전쟁(1937-1945)에 들어가는 중국에 절대적으로 유용한 개념이었다. 이로써 중앙아시아 기원론과 아시아 중심주의는 중국에 의해 중국 중심주의로 소화되었다. 남은 일은 베이징인을 노동하는 인간의 기원으로 세우고 베이징인과 현대 중국인을 연결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더블라이프가 서로 만나다

베이징인의 두 얼굴, 인류의 진화 역사 속에서의 중요한 자료로서의 베이징인과 중국인의 특별한 조상으로서의 베이징인은 중국에서 소화되는 다지역연계론에서 그 두 얼굴이 만나게 된다. 바이덴라이히의 이론에서 시작하여 다지역연계론으로 체계를 잡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통한 유전자 교환은 다지역연계론의 중요한 특징이다. 다양한 지역의 고인류 집단들이 이전 집단으로부터 이후 집단까지 연속성을 유지하는 한편, 서로 간의 유전자 교환을 유지함으로써 세계적으로 하나의 종을 유지했다는 다지역연계론은 각 지역에서 집단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진화했다는 다원론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집단 간 유전자 교환을 인정은 하되 다른 학자들보다 그 중요성을 부각하지 않기도 했다. 집단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집단 간 유전자 교환을 뚜렷하게 부각하지 않은 것은 다른 동료들과 개별 노선을 걸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중국의 독특한 주장, 베이징인에서 중국인으로 연결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견해가 녹아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Wu, 2004}. 각 집단은 심지어 호모 사피엔스 아래의 아종으로까지 그려지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유전자 교환을 최소화하고 거의 독립적인 지역 진화가 주목받은 형태로 다지역 연계론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1998년 중국은 “진화 학습”을 통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까지 중국에서 진행된 진화 양상을 보이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세기 말 이후 아프리카 기원론이 부상하면서 중국학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제 다지역연계론을 주장하던 원로 학자들이 하나씩 물러나고 유전학으로 새롭게 훈련받은 신진 학자들이 부상하면서 베이징인과 현생 중국인의 연결 고리는 약해지고 있다.

베이징인 모형
출처: 저자 제공

필자는 2009년 베이징인의 80주년 기념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다. 올림픽 폐막전이 끝난 지 일 년하고도 두어 달이 지난 후였다. 베이징인 박물관은 훌륭했으며 저우커우뎬 유적은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리만큼 잘 꾸며져 있었다. 불을 키우면서 석기를 다듬는 베이징인의 모형 옆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 당시에는 호모 에렉투스라는 고인류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고인류학자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인류 화석은 그 발견부터 고인류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까지 순수하게 과학적인 과정으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고인류학이 과학으로서 정체성을 공고히 하면서 자료의 정치, 사회, 역사성에 관한 관심은 부차적으로 생각해온 경향이 강하다. 호모 에렉투스로서의 베이징인이 고인류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평행하여 중국에서 끌어낸 서사에 관한 연구는 21세기에 들어서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화석이라는 센세이셔널한 자료의 발견과 해석에서 당시의 정치와 사회적 흐름을 고려하지 않는 이해는 빈약할 뿐 아니라 호도될 수도 있다. 앞으로 고인류 자료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을 계속해나갈 계획이다.

 

저자소개 

이상희(shlee@ucr.edu)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펠로우다. 서울대학교에서 고고학 학사학위, 미시건 대학교에서 인류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일본의 소켄다이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거쳤다. 고인류학(인류의 진화)의 다양한 주제로 30편 이상의 논문을 냈다. 대중과의 소통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저술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인류의 기원』(이상희, 윤신영, 2015, 사이언스북스)은 8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방송 <차이나는 클래스>, <EBS 클래스 e>에 출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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