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를 둘러싼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사관 논쟁

이 글에서는 2017년 간행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 묘사된 두 역사,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난징 학살 사건에 주목하여, 현대사회 속 개인의 삶의 양식을 그리며 그 내면을 묘사하는 작가로 대표되던 하루키가 사회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그리고 그가 작품 속에서 역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한일 두 나라의 언론과 지식인의 반응을 통해 한일관계의 현주소 또한 살펴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두 역사를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그렸지만 그 역사는 ‘원경(遠景)을 그린 풍경화’처럼 어슴푸레하고 모호하고 불투명하며 현실미가 없다. 이는 가해자 또한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가해자 중심의 역사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의 태생적 한계와 그 자신도 알게 모르게 일본사회에 뿌리내린 “피해자 사관”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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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서울대학교)

4년 만의 축제, 하루키의 신작 출간

해마다 10월이 되면 각 분야의 노벨상 발표로 언론은 부산하다. 특히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에 대한 관심은 염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데 일본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라는 노벨 문학상 작가를 보유하고 있지만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기가 높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수상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아쉽게도 노벨문학상을 선정하여 발표하는 스웨덴 한림원의 내부 문제로 수상자가 선정되지 않았지만, 하루키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그날까지 이 같은 관심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村上春樹. 2017. 『騎士団長殺し』. 東京: 新潮社.
출처: 저자 제공

무라카미 하루키가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일본은 물론이고 하루키의 독자층이 탄탄한 한국에서는 하루키 열풍이 일어난다. 작년 2월 일본에서 발표되고 7월에 한국에서 번역되어 간행된 『기사단장 죽이기』(騎士団長殺し)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크나큰 관심을 모았다. 2013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彼の巡礼の年)를 발표하고 4년 만에 발표한 열네 번째 장편소설이기에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축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특히 작품 속에 중일전쟁 초기인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南京)을 점령한 일본군이 저지른 대규모 학살사건인 난징 사건이 기술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일본 안팎에서 하루키의 역사의식 또는 역사관, 나아가 그의 작품 속 역사 다루기 방식에 대해서도 관심이 드높았다.

일본에서는 『기사단장 죽이기』의 난징 학살 사건을 두고 우익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그를 비판하였고 자학사관이니 역사수정주의니 또는 노벨문학상을 타려는 목적이라는 인신공격까지 당하였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는 똑같이 작품 내적 의미보다는 난징 학살 사건을 둘러싼 하루키의 역사의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신문기사 몇몇 제목만 훑어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하루키의 역사 다루기에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키의 신작의 ‘난징 대학살’ 언급으로 벌어진 싸움의 정체”[1], “장르가 ‘하루키’. 사회성・판타지 강화해 스타일도 진화”[2], “하루키, 신작소설서 난징대학살 언급..日 우익서 ‘집단 공격’”[3], “무라카미 하루키 “역사를 잊거나 바꾸는 건 매우 잘못”[4], “하루키는 왜 ‘日치부 과거사’를 다뤘을까”[5], “난징대학살 품은 하루키 어드벤처, 노벨상 겨눴나”[6],““죽이는 쪽의 윤리”..하루키 소설의 ‘피해자 역사관’”[7], “하루키의 역사관과 문학관”[8] 등이 그것이다.

언론이 이처럼 『기사단장 죽이기』에 형상화된 역사 기술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하루키의 소설이 역사나 사회 참여보다는 “메트로폴리스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들의 내적 공허감과 소통에 대한 열망을 반영”하는 “하나의 브랜드”[9]로 인식되고 있을 만큼 개인주의를 추구해온 작가라는 이미지와 간극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개인주의 소설을 벗어나 사회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요 근래의 일이 아니다. 그는 이미 1990년 들어서부터 나름대로 사회 참여적인 발언을 작품에 담기 시작하였고 2009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상 수상연설, 2011년 스페인 카탈루냐 국제상 수상연설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을 비판하거나 원전을 비판하면서 사회 참여적인 작가의 면모를 보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가 여전히 대중에게 개인주의의 주창자, 그의 작품이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힐링 문학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소설 속에 그리는 역사가 근경(近景)이 아닌 원경(遠景)을 형상화함으로써 모호하고 불투명하며, 제3자의 시각에서 가해자 또한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피해자 사관(史觀)”[10]을 내내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역사 다루기는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혼성 장르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는 전형적인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그대로 따른다. 로맨스, 추리, 판타지 등 여러 장르가 적절히 버무려진 혼성 장르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아내의 외도로 결혼 6년 만에 이혼을 결정하고 집을 나온 작중화자인 30대 중반 초상화가인 ‘나’가 미대 동기인 아마다 마사히코(雨田政彦)의 아버지이자 유명한 일본화 화가인 아마다 도모히코(雨田具彦)가 치매로 요양원으로 옮겨가는 통에 비어 있던 오다와라(小田原) 교외의 산속 집에서 9개월간 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아마다 도모히코는 원래 서양화 전공의 촉망받던 화가로 1936년 말에서 2년여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생활을 한 뒤 1939년 2월 갑자기 일본으로 돌아와 전쟁 중 고향인 아소(阿蘇) 산중에 칩거하다가 종전 후에 일본화로 전향하여 명성을 얻었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천장 방에서 <기사단장 죽이기>로 이름 붙여진 숨겨둔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7세기 전후 아스카 시대(飛鳥時代)를 배경으로 하여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 등장하는 결투 장면을 재현한 미발표된 작품이었다.

도모히코의 그림을 찾아낸 뒤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듯이 여러 기이한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골짜기 맞은편에 사는 정체불명의 부호인 멘시키(免色)라는 사람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의뢰를 해와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축시(丑時)만 되면 들리던 방울소리의 행방을 좇아가서 집 뒤 사당 근처 잡목림 속의 지하 석실에서 불구(佛具)로 보이는 방울을 찾아내게 되었고, 방울을 따라 세상으로 나와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 속 기사단장의 모습으로 형체화되어 현현(顯現)한 ‘이데아’와 만나게 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작품의 전체 구도는 ‘나’의 이혼 시도와 재결합, 그리고 누이동생의 죽음이라는 개인사가 큰 테두리를 구성하고, 멘시키의 도움으로 도모히코가 빈에서 갑자기 돌아와 일본화로 ‘전향’하게 된 이유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다락방에 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가는 수수께끼 풀어가기, 그리고 멘시키라는 인물이 ‘나’에게 접근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가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전개되는 액자식 구성이다. 작품 마지막에 가서는 ‘나’가 이즈(伊豆) 고원의 도모히코의 요양병원에서 기사단장으로 형체화한 이데아를 죽이고 메타포의 통로를 헤매다 사흘 뒤 오다와라 산중의 집 뒤 석실로 나오면서 현실세계로 되돌아온다는 판타지 체험이 이어진다.

그리고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은 아마다 도모히코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또 이미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린 그림, 말하자면 진혼을 위한 그림”, “흘려온 많은 피를 정화하기 위한 작품”[11]이며, 그가 많은 피를 흘린 역사를 체험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그 상처를 일본화를 그림으로써 “전향”이 아닌 “승화”[12]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미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들과 그들이 흘린 많은 피가 의미하는 바는 아마다 도모히코가 빈을 갑자기 떠나 일본으로 귀국한 뒤 일본화로 전향하게 된 수수께끼를 밝히는 과정에서 밝혀진다. 그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린 두 형제 이야기, 아마다 도모히코와 그의 동생 아마다 쓰구히코(雨田継彦)의 삶이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일본의 난징 학살 사건이라는 동시대의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삼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기사단장 죽이기속 동서 두 역사의 교착,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난징 학살 사건

아마다 도모히코는 1936년 말 빈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가 빈에 유학했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대였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되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도모히코는 ‘칸델라’라는 나치 저항조직 멤버였던 오스트리아 여성인 빈 대학의 학생과 사귀게 되어 합병 뒤인 1938년 나치 고관의 암살미수사건에 참여했다가 발각된 뒤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두 달 동안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1939년 2월 일본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의 연인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가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고 동지들은 처형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과 나치스 독일은 1936년 11월 일독 방공협정(防共協定)을 맺은 뒤 결속력이 강한 동맹관계였고 양국의 우호관계를 저해하고 싶지 않다는 정치적인 배려로 도모히코는 홀로 목숨을 건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가 빈에서 반나치 암살사건에 참여하게 된 것은 동생인 아마다 쓰구히코의 자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도모히코가 유학 중이던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시작되었고 12월 난징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도쿄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던 동생 쓰구히코는 1937년 6월 육군 이등병으로 징집되어 기초훈련만 받은 채 12월 난징 공략전에 투입되었다가, 이듬해 6월 제대 후 복학하였지만 얼마 안 되어 전쟁의 트라우마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빈에 있던 도모히코는 동생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고, 비슷한 시기에 그는 암살미수사건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일본 안팎에서 주목한 『기사단장 죽이기』에 형상화된 난징 학살 사건은 도모히코의 행적을 ‘나’에게 이야기해준 멘시키의 발언과 숙부인 쓰구히코의 유서 내용을 ‘나’에게 이야기해준 친구 마사히코의 발언으로 드러난다.

“그렇습니다. 이른바 난징학살사건입니다. 일본군이 격렬한 전투 끝에 난징 시내를 점거하고 거기에서 대량의 살인이 저질러졌습니다. 전투와 관련된 살인이 있었고 전투가 끝난 뒤의 살인이 있었습니다. 일본군에게는 포로를 관리할 여유가 없었기에 항복한 병사나 시민 태반을 살해해버렸습니다. 정확히 몇 명이 살해되었는지 세부적인 것은 역사학자 사이에서도 이론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엄청난 수의 시민이 전투에 말려들어 살해된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중국인 사망자수를 40만 명이라고 하는 설도 있고 10만 명이라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40만 명과 10만 명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13]

“우리 아버지가 이야기해준 바에 따르면 거기에는 쓰구히코 숙부가 포로의 목을 땄던 이야기가 적혀 있었어. 무척 생생하고 극명하게. 물론 병졸은 군도 같은 건 지참하고 있지 않아. 이제까지 일본도 같은 걸 들어본 적도 없어. 여하튼 피아니스트니까. 복잡한 악보는 읽을 수 있어도 사람 베는 칼을 사용하는 방법 같은 건 전혀 몰라. 그러나 상관에게서 일본도를 건네받고 이걸로 포로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받은 거야. 포로라 해도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도 않았어. 나이도 꽤 먹었고. 본인도 자기는 병사 같은 것 아니라고 말해. 그저 그 근방에 있는 남자들을 적당히 잡아와서 묶어놓고 죽일 뿐이야. … 시체는 모아서 양자강에 떠내려 보내. 양자강에는 메기가 잔뜩 있어서 그걸 모조리 먹어치워. 진위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당시 양자강에는 망아지 정도 크기로 살찐 메기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 숙부는 손으로 겨우 칼을 휘둘렀지만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대량 생산된 값싼 군도야. 인간의 목이 그리 간단히 싹둑 잘릴 리가 없어. 제대로 급소는 찌르지 못하고 근방은 온통 피 칠갑이 되지, 포로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뒹굴지,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 전개되었지. … 숙부는 그 뒤 토했어. … 한심한 놈이라고 상관에게 군화로 배를 세게 맞았어. 누구도 동정해주지 않았어. 결국 그는 전부 세 번이나 포로의 목을 베어야만 했어. 연습을 위해, 익숙해질 때까지 그걸 강요당했어.”[14]

『기사단장 죽이기』에 묘사된 난징 학살 사건은 가해자의 유서라는 신뢰할 만한 매개를 통해 생생하고 적나라하며 진정성 있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점은 이러한 묘사 속에서 중국 난징의 살해당하는 민간인들은 어디까지나 쓰구히코가 자살하게 된 전쟁의 트라우마를 설명하는 하나의 ‘배경’으로 존재할 뿐이다. 일본과 동맹을 맺은 나치 독일에 의해 병합된 오스트리아의 역사 또한 도모히코의 상처를 그리고 그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를 설명하기 위한 ‘무대 장치’일 뿐이다. 도모히코 또한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가 오스트리아 국민이 아니라는 점에서 당사자가 아닌 그가 느끼는 피해의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난징 학살 사건과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이라는 역사는 연인과 동생과 동지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도모히코의 정신적인 빚과 마음의 상처, 뿌리 깊은 분노와 슬픔, 무력감과 절망감을 배태시킨 무대 장치이자, 그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진혼의 그림을 그리도록 만든 배경으로 존재할 뿐이다.

 

개인에서 현실로, 하루키를 변화시킨 계기들
『기사단장 죽이기』의 동·서 두 역사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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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출간 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사히 신문>(朝日新聞)과의 인터뷰에서 “역사는 집합적인 기억이기 때문에 과거의 것으로 잊어버리거나 새로 만들거나 하는 것은 잘못된 일. 책임을 지고 모든 사람이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15]고 발언했다. 가해자의 역사라 할지라도 잊어버리거나 변형하거나 수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잊지 않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의 역사관은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더욱더 거세져가는 듯이 보이는 일본사회의 보수우익 바람에 비한다면 매우 상식적이고 전향적이다. 결국 하루키가 소설에서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축소하거나 왜곡하거나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럼으로써 과거 일본의 모습, 군국주의의 실상을 독자에게 그대로 드러내 평가하도록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루키가 역사와 사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그가 37세 때인 1986년 10월부터 46세 때인 1995년 5월 일본으로 돌아올 때(그중 1990년 1월부터 1991년 1월까지는 일본 거주)까지 근 10여 년간 유럽과 미국에 체재하며 일본을 밖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91년 1월부터 한 달여 넘게 이어진 걸프전쟁을 미국에서 겪으며 “일본인이 세계를 보는 시각과 다른 나라 사람이 세계를 보는 시각은 전혀 다르다는 것”[16]을 절감하였고 그가 귀국하기 직전의 1995년 1월 17일의 한신(阪神) 대지진과 3월 20일의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 사건은 자신의 사회적 책임, 개인과 타인과의 관계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대담한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아마 누구의 인생에도 있”[17]다면 이때가 바로 그의 작품 인생의 대담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1991년 미국에서 집필해 1994년과 1995년에 걸쳐 3권으로 나온 그의 여덟 번째 장편소설인 『태엽 감는 새 연대기』(ねじまき鳥クロニクル)는 1939년 만주국과 몽골인민공화국의 국경 노몬한 근처에서 일어난 소련과 일본 양군의 대규모 무력 충돌 사건인 노몬한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크나큰 폭력을 다룬 첫 작품으로서 그의 작품세계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노몬한 전쟁에 대해 하루키는 일본과 한국, 중국 간의 영토분쟁이 초래할 부작용을 우려한 2012년 9월 <아사히 신문> 기고문에서 “국경선의 분쟁이 초래한 짧지만 치열한 전쟁이었다. 일본군과 몽골=소비에트군 사이에 결렬한 전투가 벌어져 양쪽 다 합쳐 2만에 가까운 수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18]고 환기시킨 바 있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하루키가 일본 밖에서 1930년대 동아시아 속 일본의 폭력적인 역사를 조명해 다룬 첫 작품이었다.

하루키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세계의 전개를 “우선 아포리즘과 냉소적인 단계, 그 다음에는 이야기를 만드는 단계, 그것들을 거치고 나면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 시점에서 현실 참여라는 것이 대두”[19]된다고 정리하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를 만드는 단계의 대표적인 작품이 그가 일본을 떠나 쓴 첫 장편소설이자 다섯 번째 장편소설로 1987년 발표한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이며 세 번째 단계인 현실 참여의 작품이 『태엽 감는 새 연대기』를 시작으로 신흥종교 문제를 다룬 『1Q84』(2009-2010), 그리고 일본과 엮여 있는 유럽과 아시아의 두 역사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기사단장 죽이기』(2017)라고 할 수 있다.

하루키가 개인이 아닌 사회 참여나 역사 문제를 작품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風の歌を聴け)로 시작된 40여 년의 작품 활동기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는 더 이상 냉소적인 개인의 삶을 그리는 데 머무르는 작가가 아니며 오랜 시간 그 나름의 사회 참여 문학 활동을 해온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작가이다. 그러기에 일본인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탓에 현재의 작품 활동 속 역사 다루기가 그에게는 최선일 수도 있겠지만 일본 밖에서는 그의 작품 내 역사 다루기에 아쉬움이 있다면 비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마지막 장은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의 기술로 시작된다. 하루키에게 지진이나 태풍이라는 자연재해와 함께 살아가는 일본인의 삶의 불안함은 일본사회의 방향과 개인의 삶을 뒤흔드는 크나큰 계기로 인식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일본 대지진 이듬해인 2012년 9월 <아사히 신문>에 하루키가 기고한 “혼이 오가는 길”[20]은 그러한 우려를 잘 드러낸 글이다. 당시 일본과 한국, 중국 사이에는 영토를 둘러싼 대립이 거셌는데, 하루키는 “영토문제가 실무문제를 넘어서 ‘국민감정’의 영역에 파고들면 그것은 자주 출구가 없는 위험한 상황을 출현시키게 된다. 그것은 싸구려 술에 취한 것과 비슷하다”며 영토분쟁 때문에 동아시아문화권 내의 ‘혼이 오가는 길’, 즉 문화교류가 막혀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난징 학살 사건을 다룬 것도 거세지는 일본사회의 보수우경화 바람에 맞서는 그 나름의 행동이기도 할 것이다.

 

중국을 향한 하루키의 시선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에 따르면, 중국을 향한 하루키의 관심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 발표된 그의 첫 단편인 「중국행 슬로보트」(中国行きのスロウ・ボート)는 작중화자인 ‘나’가 자신이 살아오면서 만난 세 명의 중국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그는 1990년 첫 전집을 내면서 후기에서 이 작품을 언급하며 “내 입으로 말하자니 낯간지럽지만 꽤 건투했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는 “당시 사회가 원하는 기대의 지평에 동조하지 않고 소위 반시대적인 주제를 고집했던 점을 가리킨다. 반시대적인 주제란, 한마디로 중국에 대한 죄책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중국행 슬로보트」에 화답하는 형태로 무라카미 자신의 생각을 담아 쓴 중국에 대한 오마주 같은 작품”이기도 한 2004년 발표한 『에프터 다크』(アフターダーク)에서는 일본인이지만 일본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요코하마에 있는 중국인 학교를 다니고 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며 중국어 번역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열아홉 살 여학생과 일본에 와서 콜걸 일을 하며 변태 같은 일본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같은 나이의 중국인 여성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 이 “두 작품의 가장 큰 공통점은 중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전쟁 책임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과 역사를 향한 하루키의 발걸음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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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이처럼 중국에 대해 일찍부터 관심을 표명하고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에 대한 일본의 전쟁 책임보다 중국에 대한 책임을 작품에 형상화하고 있는 것은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그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하루키는 2009년 예루살렘상 수상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작년 여름에 아흔 살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은퇴한 교사이며 파트 타임 승려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원 재학 당시 징병되어 중국 대륙의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는 매일 아침을 먹기 전에 불단 앞에서 길고 무거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죠. 무엇 때문에 기도를 올리느냐고 말입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답했습니다. 아군과 적군의 구별 없이,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이죠. 기도하는 아버지 모습을 뒤에서 보면, 거기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21]

“아군과 적군의 구별 없이,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을 위한 기도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이 죽은 자를 위한 진혼의 그림이라는 것과 통하며, “아군과 적군의 구별 없”는 명복 빌기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청년의 전쟁 트라우마와 삶의 파괴를 형상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기사단장 죽이기』의 작품 방향성과 이어진다. 결국 『기사단장 죽이기』는 하루키가 유년시절부터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며 체화되었던 중국, 중국인에 대한 부채의식의 총결산일지도 모른다.

 

가해자 또한 피해자라는 의식, 원경(遠景)으로서의 역사

이와 같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활동에 대해 가토 노리히로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역사 묘사에 주목해 “‘기억’된 역사의 ‘생생한’ 현실성”[22]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가토의 이러한 평가는 2013년 말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이 개최한 무라카미 하루키 관련 심포지엄에서 한국 쪽 패널인 윤상인이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 기술된 만주와 몽골에 대해 “현실의 동아시아와는 유리된 가공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23]며 부정적으로 평가한 데 대응해 나온 것이다. 윤상인의 이러한 하루키의 역사 다루기에 대한 평가는 가토에 따르자면, “역사 기술에 담긴 박제성”[24]이라는 일본 내 무라카미 하루키 비판과도 이어지는 지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인식의 차이는 아무리 “역사가 집합적인 기억”이라 할지라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라보는 역사, 그리고 그러한 역사기술 방식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는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난징 학살 사건과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반나치 활동은 무척 비현실적이다. 2000년 후반 일본 가나가와 현(神奈川県) 오다와라 시 산중에서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구순의 일본화 화가의 과거를 추적하며 등장하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중일전쟁, 그리고 반나치 활동의 희생과 난징 학살의 희생은 시공간의 거리 때문만이 아니라 아지랑이가 짙게 낀 ‘원경(遠景)을 그린 풍경화’처럼 어슴푸레하고 모호하고 불투명하다. 과거의 역사는 과거로 존재할 뿐 현실미가 없다. 이는 작중화자인 ‘나’의 감정이 그 역사 속에 이입되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독자 또한 그 역사적인 사실에 감정이입이 안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두 역사 사건은 아사다 도모히코와 아사다 쓰구히코 형제의 상처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서만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난징 학살 사건을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숨기지도 덜지도 않고 수정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생생하게 그렸다. 하루키의 이러한 시도는 그로서는 최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가공의 이미지” “박제”된 역사 기술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당사자의 시선’이 아닌 ‘제3자의 시선’으로 가해자 쪽에 발을 딛고 가해자 또한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가해자 중심의 역사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의 태생적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 하루키는 전쟁과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공통되는 일본의 문제로서 ‘자기책임 회피’를 지적한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과의 인터뷰에서 “종전 후에는 결국 누구도 나쁘지 않은 것으로 되어버렸다. 나빴던 것은 군벌이며 천황도 이용당하고 국민도 모두 속아서 혹독한 경험을 했다고. 희생자, 피해자가 되어버렸습니다”[25]라며 일본인의 가해자로서의 의식이 희박해져가는 데 우려를 표명했다. 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그 자신도 알게 모르게 가해자 또한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피해자 사관”이 내면화된 듯 보이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저자소개

이미숙(mslee82@snu.ac.kr)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이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일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일본 도호쿠 대학(東北大學) 문학연구과에서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대우교수와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였다. 저서로 『源氏物語研究ー女物語の方法と主題』(東京: 新典社), 『나는 뭐란 말인가: 『가게로 일기』의 세계』(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가 있으며, 『가게로 일기』(한길사)와 『겐지 모노가타리 1・2』(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의 번역주해서를 간행하였다. 그 밖에 전근대 일본문학과 문화에 관한 다수의 공동저서 및 논문을 출판하였다.

 


[1] 허핑턴포스트코리아 17/02/28

[2] 한국일보 17/03/02

[3] 매일경제 17/03/07

[4] 머니투데이 17/04/03

[5] 서울경제 17/04/04

[6] 중앙일보 17/07/15

[7] 중앙일보 17/07/19

[8] 한겨레신문 17/07/27

[9] 한국일보 17/03/02

[10] 오쓰카 에이지 저. 선정우 역, 2017, 281.

[11] 村上春樹, 2017, 2권 496

[12] 村上春樹, 2017, 1권 79

[13] 村上春樹, 2017, 2권 81

[14] 村上春樹, 2017, 2권 99-100

[15] 朝日新聞 17/04/02

[16]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이 하야오 저. 고은진 역, 2004, 56

[17] 村上春樹, 2017, 1권 158

[18] 朝日新聞, 12/09/28

[19]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이 하야오 저. 고은진 역, 2004, 66

[20] 朝日新聞 2012/09/28

[21] 가토 노리히로 저. 김난주 역, 2017, 64

[22] 가토 노리히로 저. 김난주 역, 160

[23] 가토 노리히로 저. 김난주 역, 160

[24] 가토 노리히로 저. 김난주 역, 160

[25] 毎日新聞, 14/11/03

 


참고문헌

  •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이 하야오 저. 고은진 역. 2004.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 서울: 문학사상.
  • 가토 노리히로 저. 김난주 역. 2017.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서울: 책담.
  • 오쓰카 에이지 저. 선정우 역. 2017.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 서울: 북바이북.
  • 임영신. 2017. “장르가 ‘하루키’..사회성・판타지 강화해 스타일도 진화,” <<한국일보>>(3월 2일).
  • 村上春樹. 2012. “魂の行き来する道筋,” <<朝日新聞>>(9月28日).
  • 大井浩一. 2014. “「孤絶」超え理想主義へ,” <<毎日新聞>>(11月3日).
  • 村上春樹. 2017. 『騎士団長殺し 1・2』, 東京: 新潮社.
  • 柏崎歓. 2017. “物語が与える力信じる,” <<朝日新聞>>(4月2日).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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