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환경의 변화와 한일경제관계의 재정립을 위하여

한일경제관계는 2010년대 초반을 정점으로 점차 약화되어 왔다. 한일자유무역협정은 2003년에 협상을 개시하였지만 2004년에 좌초되었고 양국의 금융 협력의 하나인 한일통화스왑도 2013년에 재계약이 종료되었다. 더구나 2019년에는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하여 양국 간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한일경제관계는 과연 이대로 방치해도 좋단 말인가? 이 글에서는 미중갈등으로 인해 세계경제의 분절화가 가속화되면서 한일경제관계가 새롭게 변화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특히 대중의존도가 높은 한일 양국경제는 국민경제의 안정적 운용에 필수적인 각종 중요물자의 안정적 공급망 확보에 비상이 걸려 있으며 양국경제에 모두 중요한 핵심 산업, 특히 반도체, 이차전지, 중요 광물의 공급망 안정성 제고를 위한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탄소중립 실현이라는 글로벌 과제에 도전하기 위해 수소 에너지 공급망 확보 및 녹색전환을 위한 연구개발협력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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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춘(대외경제정책연구원)

한일관계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논하기 매우 어려운 영역의 하나이다. 매우 끈적끈적하고 질척질척한 감정의 덩어리가 사람들 가슴속 깊은 곳에 들러붙어서 아무리 해도 떨어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독감에 걸린 사람의 목구멍과 폐부에 찰떡처럼 밀착해 있는 끈끈한 액체와도 같이 상대방에 대한 어떤 느낌과 감정이 우리 마음속 깊은 폐부에 들러붙어서 우리의 숨을 막히게 하고 손끝을 떨게 만든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보다 오랫동안 함께 해 왔던 동료나 친구와의 감정의 골이 더욱 깊듯이, 천륜으로 맺어진 가족 간의 갈등과 원한이 우리를 훨씬 더 괴롭히듯이, 우리가 대하는 일본에 대한 느낌과 감정은 그저 그냥 우리를 떨리게 만들고 숨이 차게 만들며 손을 움켜쥐게 만드는 마법을 발휘하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 가슴속 깊은 곳에 들러붙어 있는 이러한 불쾌한 감정의 찌꺼기들을 언제나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누가 이를 이루어 줄 수 있을 것인가?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힐수록 더욱 불쾌해지는 건 자기 자신일 뿐이다. 그리고 아무도 이런 불쾌한 감정을 나서서 걷어주는 사람도 국가도 없다. 우리를 이런 감정에서 건져줄 자는 오로지 우리 자신일 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 동료라 하더라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보조를 맞추어 일해야 하는 것처럼, 함께 사는 것이 때로는 짐이 되고 불편하더라도 천륜으로 맺어진 가족이 서로를 도와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묵은 감정을 털어내기 어려운 여건이라 하더라도 공존의 묘법을 찾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요 시급히 끝내야 할 숙제이다. 요즘 세계정세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더욱 그러한 조급한 마음이 든다.

 

한일경제관계의 현황은 어떠한가?

한일경제관계가 한국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한국은 후발주자로서 일본이 개발한 기술과 상품을 모방하면서 경쟁력을 높여 왔다. 한국경제의 중심은 여전히 제조업에 있고 제조업 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기술력과 상품개발력은 일본으로부터 배운 측면이 매우 높다. 철강, 전기전자, 자동차, 반도체 등 한국제조업의 핵심 분야는 모두 일본과 무관하게 우리의 독자적 능력만으로 발전시켜 온 것이 아니다. 일본기업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해 온 것이며 이는 양국의 무역투자관계에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악화되는 한일관계, 한국기업의 경쟁력 향상에 따른 두 나라 기업 간 경쟁 격화, 그리고 자연스러운 결과로서의 양국 기업 간 수직적 분업구조의 약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2010년대 초반을 정점으로 한일경제관계는 무역과 투자에서 모두 하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무역(수출+수입)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2001년 14.8%에서 2022년 6.0%로 하락하였다. 우리나라의 대일수출은 2011년 397억 달러를 정점으로 아직 그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 있다. 대일수입 또한 2011년 683억 달러를 정점으로 하락세가 지속되어 왔다. 대일무역수지는 1965년 이래 계속 적자를 기록한 이후 한 번도 흑자를 시현하지 못하였다. 2012년부터 2022년까지 연평균 대일무역적자는 234억 달러였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직접투자도 2012년을 정점으로 급감하여 왔다. 일본의 대한직접투자(신고기준)는 2012년 45.4억 달러로 급증하였으나 2021년에는 15.3억 달러까지 쪼그라들었다. 양국 간의 무역은 주로 중간재와 자본재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대일수입은 중간재와 자본재가 90% 이상을 차지하며 대일수출에서도 중간재와 자본재가 85%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소재, 부품, 장비를 수입해서 제품을 만들고 이를 중국이나 미국 등 제3국으로 수출하여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일본 또한 한국으로부터 최종소비재를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마찬가지로 소재, 부품, 장비를 수입해서 이를 생산에 투입하는 무역구조를 형성하였다. 이처럼 양국은 상호 간 수평적 무역을 통해 상호의존적인 경제구조를 만들어 왔고 이는 양국의 경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과의 수평적 무역, 기술협력과 투자는 제조업 경쟁력 유지 나아가 제조업 혁신에 있어서 사활을 걸 만큼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지난 2019년에 있었던 일본의 수출규제사태는 이를 반증하는 하나의 좋은 사례라 말할 수 있다. 한국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양국 간의 무역과 투자가 약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경제협력은 우리경제의 성장을 위해 여전히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림 1> 한국의 대일수출, 수입, 무역수지 추이
<그림 2> 일본의 대한직접투자 추이

 

한일경제관계의 주요 사건

한국은 지난 20여 년에 걸쳐 수많은 국가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은 EU, 중국, 아세안 등 주요 경제권과도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유독 일본과는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국은 2003년에 한일자유무역협정을 위한 협상을 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국은 협정을 체결하지 못한 채 2004년 11월 협상을 종료하였다. 무역역조를 우려한 우리나라 산업계의 반대가 중요한 이유의 하나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시 필자는 대일무역적자를 이유로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는 것은 중상주의적 사고에 불과하며 관세 철폐를 통한 양국 기업의 경쟁은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수입 비용을 줄여서 우리나라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제고하며 일본의 대한투자를 확대할 수 있는 유인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하면서 협정체결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한일자유무역협정의 좌절은 양국 경제 관계를 약화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한일통화스왑의 체결은 양국 간 금융 협력의 한 사례이다. 양국은 1998년 50억 달러의 통화스왑을 체결한 후 재계약을 지속해 왔다. 한일통화스왑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2013년 양국은 독도문제 등으로 관계가 악화되면서 당시 30억 달러의 통화스왑의 재계약을 거부하였고 2015년에는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하의 100억 달러 통화스왑도 종결하면서 금융 협력의 불씨도 모두 꺼져버렸다. 다만 2023년 이후 양국 관계가 회복되면서 통화스왑은 재개되었다. 2023년 6월 29일 한일재무장관회의에서 전액 달러 기반 100억 달러 규모로 3년간 시행한다고 합의하였다. 국제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최근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는 매우 시의적절한 조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미중 갈등으로 세계 경제가 분절화되고 있고 부채의 누증으로 글로벌 금융위기의 위험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한국경제의 대외안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 주요 경제권과의 금융 협력은 필수적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 경제도 최근 무역수지가 적자로 전환되었고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는 것도 점차 어려워지는 형국이다. 우리나라도 국제금융불안의 고조에 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변국과의 협력에 적극 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본은 2019년 7월에 돌연 3개 품목(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플루오린폴리이미드)을 대상으로 수출규제를 실시하였다. 이들 품목은 반도체, 디스플레이와 같이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의 생산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며 일본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대체품이 없다는 점에서 한국은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꼈다. 당시 한국 정부와 국민은 일본 정부의 조치에 대해 마치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 일본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일본의 소재, 부품, 장비를 대체할 수 있는 국내 역량을 강화해야 하기 위해 이른바 소부장 산업 경쟁력 강화책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 아베정부의 다분히 정치적 이유로 시작된 수출규제조치는 사실상 실질적인 수출규제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수출허가를 얻기 위해 일본의 수출업자들의 거래비용이 증가했다는 점은 있으나 신청된 수출허가는 모두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수출규제에 따라서 규제대상 품목의 대일수입은 규제 직후 감소하였으나 불화수소를 제외하고는 다시 원상으로 복귀하였다. 불화수소는 대일의존도가 규제 이전 약 50% 수준에서 규제 직후 10%대까지 하락한 후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체된 불화수소의 상당 부분은 해외의 일본기업이 생산한 제품이어서 일본제품을 대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의 대일 소부장 수입액은 2021년 이후 오히려 증가추세에 있고 특히 2023년 이후 한일관계가 급속히 회복되면서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본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도입한 수출규제는 일본기업의 대한수출을 저해하였고 한국기업의 거래비용을 증가시키는 효과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두 나라 모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그림 3> 대일 소부장 품목 수입현황

 

급변하는 국제정세

이처럼 한일경제관계는 2000년대 이후 답보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2010년대 이후부터는 양국 경제 관계가 오히려 위축되고 신뢰 관계 또한 하락하는 이상 상황이 계속되어 왔다. 과연 한일경제관계의 현상은 정상적인 것이고 또 이를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인가? 아니면 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협력의 저해 요인이 있다면 이를 제거하고 나아가 협력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한 정책 방안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필자는 후자의 입장을 지지한다. 특히 최근의 국제정세의 변화는 심상치 않게 두 나라의 경제 상황을 위협할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중국 견제 강화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두 강대국의 경쟁과 갈등으로 인하여 세계 경제는 세계화 시대에서 갑자기 분절화 시대로 회귀하였다. 정치학자들의 시각으로 보면 세계 경제가 대립과 분열로 인하여 쪼개진 상태가 인류 역사 속에서 오히려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분석하지만 경제학자의 시각으로 보면 지난 30여 년의 세계화 시대는 자신들의 삶에서 경험한 최소한 절반 이상의 시대였다. 그리고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로 인하여 세계 경제는 급속히 성장하였고 여러 가지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로 인하여 개도국의 경제성장과 빈곤 탈출을 이룰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수많은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길고도 복잡한 공급망이 효율성을 쫓아서 전 세계로 확산되어 갔다. 그 결과 값싸고 좋은 제품과 서비스가 공급되었고 이는 경제적 풍요를 이루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는 이제 두 강대국의 경쟁과 갈등 앞에서 기로에 서 있다. 미국의 대중 견제는 무역과 관세에서 안보, 기술로 그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으로 외교적인 수사의 변화가 았으나 대중견제의 정책 기조는 실질적으로 변화가 없는 상황이며 최근에는 일본과 EU도 이에 동조하면서 대중견제를 강화하는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미국 견제에 대응하여 중국은 반간첩법 시행을 통해 기밀정보의 국외유출 방지를 도모하고 갈륨, 게르마늄 관련 품목의 수출통제조치를 시행하는 등 대응에 부심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견제로 한국은 수출의 반사이익을 향유할 수 있겠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중국경제 성장하락과 공급망 분절화로 대중수출이 감소할 수 있다.

미중갈등으로 한일 양국은 외교·안보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매우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두 나라 모두, 그중에서도 한국은 특히 무역에 의존하여 경제가 성장하여 왔고 식량, 에너지, 광물, 기타 원자재의 수입의존도가 매우 높다. 또한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매우 활발하고 전 세계에 매우 길게 늘어진 복잡다기한 공급망에 깊숙히 관여하면서 경제활동을 확대해 온 결과 세계 경제의 분절화에 매우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두 나라 모두, 그 중 특히 한국은 중국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서 공급망의 대중 취약도가 심각한 수준이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중국의 요소수 수출규제로 인하여 우리나라에 물류대란이 일어난 것처럼, 중국이 수출을 규제함으로써 한국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은 차고 넘친다. 그만큼 한국경제는 중국 정부의 규제에 대항력이 취약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최근 전기차나 배터리 산업이 성장하면서 자동차용 배터리 생산에 필수적인 흑연의 대중 수입이 규제를 받을 것으로 우려된다. 이 외에 리튬, 코발트, 니켈, 기타 희토류의 상류부문에서의 가공처리를 모두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공급망에서 중국을 제외한 채 과연 전기차 산업과 배터리 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이 가능한 것인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매우 높은 것이 현실이다. 한국은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일본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경제안보전략을 더욱 강화하는 추세이다. 2022년 5월,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하였는데 반도체, 배터리 등 특정중요물자를 지정하고 이들 물자의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 기술 유출을 방지하는 것, 중요기술에 대해서는 정부 주도로 기술개발을 하고 핵심국들과의 기술동맹을 통해 기술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 통신, 전략, 항공, 철도 등 중요한 사회적 인프라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국제사회가 점차 험악해지고 전쟁과 강대국 간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일본과 매우 유사한 처지에 있으며 필요로 하는 조치 또한 유사하다고 판단된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미중 갈등 상황에서도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최대한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중의존도를 줄이면서도 완전히 중국에서 탈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또 장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현재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일본이 2022년 5월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하여 특정중요물자의 공급망을 확보하고 정부가 주도하여 기술개발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천명한 것과 같이 한국도 경제안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략물자의 공급망 관리를 위한 체제 정비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양국은 경제안보 차원에서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2019년 수출규제와 같은 어리석은 조치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양국 간 신뢰를 회복하고 식량, 에너지, 핵심광물 등 원자재, 의약품, 탈탄소, 디지털전환, 이외 신흥기술 분야에서 상호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협력은 양자 및 다자 차원에서 다차원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두 나라가 갈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근본 가치로 추구하고 있으며 2차대전 이후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언어적으로 소통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고 문화적 및 정서적으로 세계 어느 국가나 지역보다도 더 가깝기 때문이다. 경제제도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며 정부 조직이나 법률제도 상으로도 매우 비슷한 국가이기 때문에 상호 이해를 높이는 것도 용이하다. 소득수준이나 자산 수준도 가장 근접한 국가이며 산업 및 기업의 발전 정도도 한국의 추격으로 상당 부분 근접해 있다. 이러한 두 나라가 서로를 불신하면서 어려운 형국에 대립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한일경제관계의 새로운 도약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기본 가치로 지향하면서 개방된 국제무역질서를 지지하는 한일 양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상호 협력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공급망 분야에서의 협력이다.1) 일본은 2022년 12월 11개 특정중요물자를 지정하였는데 이에는 반도체, 클라우드, 배터리, 중요광물, 공작기계/산업용로봇, 항공기부품, 영구자석, 천연가스, 선박부품, 항균성물질제재, 비료원료가 포함되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이들 물자는 모두 공급망이 취약하며 국민경제와 국민안전을 위해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많은 물자분야에서 한일 간 공급망 안정성 제고를 위한 협력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필자는 인식한다. 그중에서도 반도체, 중요광물, 배터리 분야에서의 한일협력은 필요성도 높고 협력의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일본은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거의 석권하였으나 이제는 40나노 수준의 제조능력밖에 보유하지 못한 후발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의 육성이 국가안보적으로도 중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해외 반도체 생산기업의 일본 투자를 유도하고 국내적으로도 경쟁력 있는 반도체 기업을 정부가 나서서 육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경제산업성의 반도체전략에는 이러한 일본 정부의 염원이 담겨 있다. 다만 이러한 정책이 결실을 거둘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그만큼 이미 반도체 선진기업들의 제조 능력과 혁신 능력이 더 이상 추격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저만치 멀리 앞서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일본의 국내 반도체 제조 역량 강화에 적절한 수준에서 협력하면서 동시에 일본의 소재, 장비업체의 국내 투자유치를 통해 한일 양국의 국내 반도체 공급망 강화라는 공통의 정책목표를 달성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2023년 3월,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철회 이후 양국 간 반도체 공급망 협력은 증가추세에 있는데, 예를 들어 불화수소의 대일 수입액은 급속히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고 반도체 경기가 회복될 경우 지속적인 증가가 예상된다. 한국은 새롭게 정비하려는 반도체 산업단지에 대규모로 일본의 소재 및 장비업체를 유치하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은 일부 반도체의 일본 생산 증강에 기여하면서 일본은 한국의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소재와 장비를 보다 안정적으로 공급하여 양국을 세계적인 반도체 생산의 일대 거점으로 발전시켜 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일 양국의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반도체 생태계 구축이 요구되고 있다.

특정중요물자의 하나인 중요광물에는 망간, 니켈, 코발트, 리튬, 흑연, 희토류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특정 지역/국가에 편재되어 있고 동시에 대중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특징이 있다. 중요광물은 전기차 산업, 배터리 산업에서 핵심 원재료이며 이 외에도 전기기계 산업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한일 양국 경제의 아킬레스의 건이 될 수 있다. 만일 중요광물의 원활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수많은 제품의 생산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고 이는 국민경제의 대혼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처럼 중요한 중요광물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별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해외진출과 권익확보를 위한 노력이 필수이지만 양국 간 상호 도움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기업들의 적극적인 공동진출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양자 차원에서는 한일경제안보대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으며 다자 차원에서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나 MSP 등 다자 채널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소통과 공동대응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배터리 산업에서는 대중의존도 해소를 위해 한일 양국의 배터리 생태계 구축을 위한 협력방안을 고민하는 것도 매우 필요하다. 특히 배터리 기술과 관련한 새로운 기술개발동향을 공유하면서 경쟁을 하면서도 협력의 여지는 여전히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국과 EU의 산업정책에 대한 공동대응도 필요하다.

탈탄소를 위한 에너지 공급망 구축에서도 양국 협력의 가능성은 크다. 일본은 국내외 수소공급망 구축, 그린수소 제조, 철강 분야 수소 활용, 연료 암모니아 공급망 구축을 위한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실시하는 등 수소 에너지의 가능성 확대를 중요한 정책목표로 삼고 있다. 한국도 재생에너지 비중을 확대하고 수소 에너지 확대를 정책목표로 설정하는 등 유사한 방향의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수소의 도입에 있어서 한일 양국은 기술과 지리적 측면에서 공통의 제약을 받고 있다. 두 나라가 공동으로 제3국에 진출한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소의 안정적 공급망 확보를 위해 협력할 여지는 매우 크다고 본다. 일본의 종합상사를 주축으로 한일 양국기업이 공동수주/투자하고 한일 수출신용기관을 주축으로 한일 금융기관의 협조융자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탈탄소 분야에서의 연구개발협력도 상호 관심 분야다. 2050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에너지 기술개발이 요구된다. 양국이 각자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연구개발의 상호 관심과 협력이 필요하다.

관광, 인적교류, 문화콘텐츠 교류, 패션, 뷰티 등 최근 양국 간 교류가 활발한 분야에서는 이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양국 간 전자상거래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양국 공통의 경제문제인 청년 문제, 노인 문제, 부채 문제 등에 대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잘 못하는 두 나라가 만나서 무슨 해결책이 나올 것인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완벽히 해결한 나라는 세계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한일 양국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경험했거나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어서 모범답안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특징도 가진다. 이러한 난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서로의 경험, 정책을 공유하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저자소개

정성춘(jung@kiep.go.kr)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선임연구위원이다.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일본경제, 기후변화, 세계경제전망 등의 주제를 연구하였다. “일본임금정체의 원인과 시사점” 등 다수의 보고서를 소속기관을 통해 출판하였다.

 


1) 한일협력방안은 김규판 외(2022), “일본의 중장기 통상전략과 한일협력방안”을 참조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규판 외. 2022. “일본의 중장기 통상전략과 한일협력방안”. 대외경제정책연구원
  • 정성춘. 2022. “세계경제 진영화 가속…한일, 이제 협력할 때”.
    https://www.ajunews.com/view/20221102153719755 (검색일: 2024.01.08).
  • 정성춘. 2023. “녹색전환.. 한일협력으로 윈윈하자”.
    https://www.ajunews.com/view/20230823161515615 (검색일: 2024.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