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힘’, 현실에서 구원을 찾는 아프리카인의 신앙세계

아프리카인은 종교적이다. 아프리카인이 종교적인 이유는 신앙이 이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신앙이 아프리카인의 일상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아프리카인이 신앙을 통해 치유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상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불행과 질병을 신앙의 힘을 빌어 해결하려 한다. 달리 말해, 신앙이 갖는 치유의 힘이 없다면 종교와 신앙은 그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아프리카인의 신앙과 치유의 상관 관계를 남아공 줄루 사회를 통해 살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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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규(한국외대)

아프리카를 주제로 글을 쓸 때 일반화의 오류는 피할 길이 없다. 13억 인구의 아프리카는 지구 상에서 아시아 다음으로 큰 대륙이고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 중국과 미국, 인도와 동유럽, 아르헨티나, 스페인, 독일, 프랑스와 영국 등을 모아 놓아도 아프리카 대륙의 크기를 넘어 설 수 없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55개의 독립국이 있고 전 세계 대부분의 인종과 2천 여 민족이 한 국경 안에서 또는 국경을 가로질러 살아가고 있다. 이러다 보니 아프리카의 사회와 문화 현상은 매우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아시아인이 뒤섞여 살고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은 이런 사회문화적 다양성을 반영해 11개의 공용어를 지정하고 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도 기본적으로 2-3개의 공용어 또는 국어를 사용한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언어 상황에서 볼 수 있듯, 아프리카의 사회・문화 정체성은 복잡하고 혼성적이다. 이를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아프리카의 신앙과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종교와 신앙, 아프리카인을 지탱하는 힘

일반화의 오류를 인정하고 아프리카의 종교와 신앙에 대해 살펴보자. 이슬람과 기독교는 아프리카의 양대 종교이다. 각각 중동과 유럽에서 수입된 이 두 종교는 아프리카인의 종교적 삶을 책임진다. 아프리카 인구의 80% 이상은 기독교인 아니면 무슬림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가장 먼저 들어온 외부 종교는 정교회(Orthodox Christianity)이다. 정교회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갈린 초기 기독교 중 동방교회 계통이다. 현재에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등 북동 아프리카에 소수의 신자가 남아 있다. 이슬람은 무함마드 사후(632년) 이슬람 제국의 확장을 통해 아프리카에 들어온 종교이다. 이슬람은 크게 두 경로로 아프리카에 들어왔다. 한 갈래는 이집트를 통해 북아프리카로 전파된 것이고, 다른 경로는 홍해와 인도양을 따라 아프리카의 뿔 지역과 동아프리카 해안에 전파된 것이다. 북아프리카에 전파된 이슬람은 다시 사하라 횡단 교역로를 따라 서부아프리카에 전파되었다. 반면 천주교와 개신교는 16세기 이후 유럽인의 아프리카 진출과 함께 전파되었다. 특히 개신교는 19세기 유럽의 식민지배를 통해 이슬람 세력이 약한 남부아프리카와 중동부아프리카, 서부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전파되었다. 두 종교의 세력권은 그대로 굳어져 마치 서아프리카의 사헬과 동아프리카 해안을 경계로 대립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아프리카의 무슬림 분포
출처: Wikipedia

우리가 아프리카 종교와 관련해 잘못 알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아프리카 ‘전통 종교’이다. 종교 관련 각종 통계와 보고서에서는 아프리카의 종교를 기독교와 이슬람, ‘전통 종교’와 기타로 구분한다. 여기에서 전통 종교란 기독교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닌 아프리카 민간신앙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분류로 보인다. 아프리카 민간신앙은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종교라고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세계) 종교는 인종과 민족, 지역을 넘나드는 보편성, 경전과 교회라는 구조적 특성, 정교하고 형식적인 의례를 갖추고 있다. 반면 특정 혈족 중심의 민간신앙은 지역적으로 한정되는 폐쇄성이 짙다. 종교에서 갖추고 있는 경전과 교회가 부재한다는 특정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종교와 민간신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구원의 차이에 있다고 본다.

내세의 구원을 강조하는 기독교와 이슬람과 달리 민간신앙은 철저하게 현실의 구원을 강조한다. 일상의 육체적・정신적 건강과 물질적 풍요로움, 단단한 사회관계와 세속적 성공은 아프리카인들이 꿈꾸는 삶의 목표이다. 나의 불행을 운명이며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는 이슬람이나 기독교와 달리 민간신앙에서는 개인의 불행을 현실에서 극복 가능하다고 믿는다. 아프리카인들이 불행과 관련된 조상령과 악한 영에 일상적 관심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인은 불행을 교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영과 교류하면서 ‘치유’의 의례를 시도한다.

기복신앙이라고 볼 수 있는 신앙관은 민간신앙을 넘어 기독교와 이슬람에도 영향을 끼쳐 왔다. 아프리카의 기독교도와 무슬림은 내세의 구원관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뿌리칠 수 없는 현세의 구원에도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아프리카인 개개인은 기독교인이거나 무슬림 또는 다른 종교인(힌두교도, 불교도)이겠지만 이들은 모두 민간신앙에 종교적 삶을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유교적 가치관이 종교와 관계없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듯 아프리카 민간신앙은 모든 종교의 교집합으로 아프리카인의 종교적 삶 이면에 흐르는 강줄기와 같다.

 

아프리카의 신앙관: 조상령, 악령과 점술가의 삼위일체

아프리카인의 신앙관은 현실 세계에서의 구원을 강조한다. 현실에서의 구원은 독특한 선악개념을 바탕으로 작동하며 아프리카인의 삶의 여러 분야를 규제한다. 일상에서 아프리카인이 조상령과 악한 영, 점술가가 심심치 않게 언급하는 것도 구원에 대한 믿음과 관계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아프리카의 구원관과 선악개념에 대해 필자가 오랫동안 연구를 진행했던 남아공 줄루(Zulu) 사회의 신앙관을 사례로 들어 보겠다(장용규 1999, 2003).

줄루는 남아공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족 집단으로 크와줄루-나탈(KwaZulu-Natal) 주를 고향으로 한다. 이들은 줄루 민족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인접해 있는 코사(Xhosa)와 스와지(Swazi), 은데벨레(Ndebele) 민족 집단과 언어의 유사성을 갖고 있을 뿐더러 사회・문화적 특성도 공유한다. 언어학자들은 이 네 집단을 묶어 응구니(Nguni)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마들로지(Amadlozi), 후손을 보호하는 방패

줄루인이 가장 공을 들이는 숭배 대상은 아마들로지이다. 조상령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아마들로지는 후손의 일상을 보호하고 물질적 풍요로움과 가정의 단결을 도와주는 존재이다. 줄루인은 조상령이 죽은 몸이지만 여전히 하루 하루 자신들의 삶에 관여하는 공기와 같은 존재라고 인식한다. 조상령은 후손이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후손은 조상령을 기억함으로써 조상령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조상)이 기억된다는 것은 육신의 존재유무와는 관계없이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줄루인들은 일상적으로 집안에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 조상령에게 감사하며 축복을 바란다. 조상령은 자신들이 숭배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후손에게 축복을 내린다. 이렇듯 조상령과 후손의 관계는 현재적이다. 이런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케냐 신학자 존 음비티(John Mbiti)는 ‘살아있는 죽은 존재'(The Living-dead)라고 조상령을 칭했다(음비티, 2008. 77쪽).

줄루 사회에서 조상령은 까다로운 조건을 필요로 한다. 먼저 아버지의 형제와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 정도가 영향력 있는 조상령의 자격을 갖춘다. 이 중 가장 강력한 조상령은 아버지와 할아버지 정도이지만, 조상령이 살아있었을 당시 집안에서 특정인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조상령의 힘은 살아있던 당시 집안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느냐와 직결된다. 이는 부계율을 따르는 줄루사회의 특성이 영의 세계에 반영된 것이다. 다만 조상령도 세월이 흘러가면 일반적인 영의 세계로 흘러 들어가 후손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다음으로 조상령은 무난한 삶의 여정을 마친 사람이어야 한다. 사회적 영향력은 있지만 인생의 굴곡 없이 순리에 따르는 삶을 살아 온 사람은 훌륭한 조상령으로서 자격을 갖추게 된다. 줄루인에게 무난한 삶의 여정은 통과의례를 순조롭게 마친 삶이냐, 그렇지 않느냐로 갈리게 된다. 통과의례 중 특히 중요한 것은 결혼식이다. 줄루 남성은 많은 자식, 특히 아들을 갖는 것을 선호한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신앙의 측면에서 볼 때 아들이 많을 수록 자신이 죽어 유복한 조상령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혼은 줄루 남성에게 자신을 기억해 줄 자식들을 확보하는 적법한 의례인 것이다. 마지막 조건은 조상령이 자신을 기억해 줄 후손이 필요하듯, 조상령은 후손이 기억할만한 조건을 갖추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은 죽음을 맞이 하기 위한 적절한 때와 장소를 필요로 한다. 줄루인들은 악과 관련된 죽음 또는 객사는 조상령이 되기 전에 원혼이 되어 떠돈다는 믿음이 있다. 후손들이 지켜보지 못하는 죽음, 갑작스런 객사 등은 줄루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다.

줄루사회에서 직계 조상령과 후손은 일상적으로 끈끈한 유대를 보여준다. 후손은 조상령이 현실세계에서의 풍요로움과 단단한 가족 결속력을 보장해 주기를 바라며, 조상령은 후손이 자신을 끊임없이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후손은 조상의 기일을 맞아 또는 집안의 대소사를 앞두고 크고 작은 제사를 치러 조상령을 소환한다. 그리고 조상령이 이에 응답하기를 바란다. 조상령과 후손의 기본적인 의존관계가 깨지지 않는 한 이 둘은 단단한 결속을 맺게 된다. 물론 이론상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둘 사이에 아무리 완벽한 결속을 맺으려 해도 현실에서는 늘 균열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조상령과 후손 사이의 균열은 곧 줄루인들이 두려워하는 악한 힘이 파고드는 틈새를 만들어주게 된다.

움타가티(umthakathi), 사회 파괴자

줄루의 신앙관에서 ‘비'(-bi)의 개념은 중요하다. 비는 ‘악한~’이라는 뜻을 갖는다. 줄루인은 모든 사람이 쓸개 한 끝에 비를 갖고 있으며, 분노를 통제하지 못할 때 이 비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뜨거워진다고 말한다. 분노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는 감정이다. 줄루인들이 일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움타가티’도 비를 어근으로 한다. 움타가티를 굳이 번역하자면 ‘악한 힘’ 정도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줄루 사회의 움타가티는 서양의 악마(Devil) 또는 사탄과는 사뭇 성격이 다르다. 서양의 악마 또는 사탄이 나쁜 행위를 하는 특정 행위자를 의미한다면 움타가티는 나쁜 행위 보다는 사회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무게를 둔다. 즉 줄루 사회에서 움타가티는 기독교의 사탄과 같은 절대악이 아니라 일상에서 조화를 이루는 사회관계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힘, 그리고 그 위험한 힘을 사용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악은 반사회적 개념이며 악한 행위는 반사회적 행동을 의미한다. 음비티는 사회구성원의 행위를 규제하는 관습이나, 법률, 규칙 등을 깨뜨리는 반사회적 행동을 악으로 인식한다고 주장했다(Mbiti, 1979: 398). 즉, 인간의 본성과 관계없고 자기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관습과 규례를 준수하는 것을 선한 행동으로, 그렇지 않으면 악한 행동으로 규정한다.

줄루 사회에서 움타가티의 반사회적 속성은 사람들이 묘사하는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줄루인은 움타가티를 “독거노인(특히 할머니)으로 한 밤 중에 떠돌아 다닌다. 이들은 바분(baboon, 포악한 원숭이)을 탈 것으로 이용하는데 나체의 몸으로 바분을 거꾸로 타고 다닌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숲에 모여 잡아 온 사람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고 묘사한다. “독거노인”, “한 밤”, “나체”, “바분”, “숲”, “식인” 등은 움타가티가 사회성을 상실한 존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움타가티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불행을 던진다. 따라서 줄루인은 어떤 형태의 불행이든 그 원인을 움타가티의 소행으로 의심한다. 심지어 특정 불행의 인과 관계가 너무나 명확한 경우에도 그 인과관계 이면에 움타가티가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사학위 현지조사를 위해 줄루랜드 한 마을에 머무를 때의 일이다. 세들어 살던 집 손녀가 지붕 위에서 놀다 떨어져 팔이 부러진 일이 있었다. 손녀를 들쳐 업고 30여 분을 걸어 도립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돌아 왔다. 그 날 저녁, 아이의 엄마와 할머니는 손녀가 그렇게 된 것은 움타가티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점술가를 찾아가 누가 아이에게 해코지를 했는지 밝히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아이 엄마와 할머니는 마을의 영험한 상고마를 찾아갔다. 아이가 지붕에서 놀다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는 명확한 인과관계의 이면에 움타가티의 힘이 작용한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줄루인은 본인과 주변에서 발생하는 좋지 못한 결과의 원인으로 움타가티를 지목한다. 문제는 그 움타가티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데 있다. 그래서 줄루인은 움타가티를 찾기 위해 상고마(Sangoma)를 찾아 간다.

춤추는 상고마
출처: 저자 촬영

상고마(Sangoma),[1] 영적 치료사

상고마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영적 치료사는 그동안 많은 오해를 받아왔다. 대표적으로 영적 치료사는 ‘악마 사냥꾼'(witch doctor) 또는 ‘주술사'(sorceror) 등으로 불려왔다. 이는 영적 치료사가 아프리카인들이 두려워하는 악마를 퇴마하는 부분적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줄루사회의 상고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고마는 퇴마를 하기도 하지만 줄루 민간신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의뢰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영적 치료사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상고마는 줄루인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움타가티의 사회 파괴행위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대표적 전문가이기에 이들을 악마 사냥꾼이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사실 줄루 사회에는 상고마 외에도 교회 목사나 예언가가 퇴마를 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상고마는 퇴마 이외에도 약재처방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병원에서 치료가 어려운 민간요법을 제공하기도 한다(장용규, 2003).

줄루사회에서 상고마의 영적 능력은 특출나다. 상고마는 인간과 영의 세계 중간에 걸쳐 있으며 인간과 영의 소통을 도와주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 특히 상고마는 아마들로지(조상령)과 움타가티(악한 힘)가 세력 다툼을 하는 영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영의 세계가 일반인들에게 금기의 영역인 반면, 상고마는 이 영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다. 이 지점에서 상고마가 필요하다. 줄루인은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조상령에 대한 경외심과 움타가티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상령과 움타가티 중 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를 알아챌 능력은 없다. 따라서 늘 사후약방문식으로 불행이 닥쳐 온 뒤에야 진위여부를 알기 위해 분주해 진다.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고마를 찾는다. 상고마는 특출난 지적 능력과 훈련을 통한 인지력을 통해 조상령과 움타가티, 그리고 사람을 둘러싼 문제점을 찾아내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줄루인들이 조상령에 대한 경외와 움타가티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상고마는 늘 자신의 자리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역할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상고마와 치유 의례
출처: 저자 촬영

 

치유의 힘’, 현실에서 구원을 찾는 아프리카인의 신앙세계

서양의 식민관료와 기독교 선교사 등은 식민지배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에 근대화가 도입되면서 ‘전통’의 테두리 안에 있는 아프리카 신앙적 요소, 특히 조상숭배와 악마, 점술가는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서양인들이 유럽의 근대화를 아프리카 ‘전통’에 우선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사회진화론적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식민지배를 경험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는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사회 구석구석에 근대화로 대체되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민간신앙은? 안타깝게도 서양인의 예상과 달리 민간신앙은 소멸되지 않았다.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사실이다. 남아공의 경우, 전체 국민의 70% 가량이 기독교인으로 실질적인 기독교 국가이다. 하지만 남아공 종교를 연구하는 학자 어느 누구도 민간신앙이 소멸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민간신앙은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자생력을 확보하며 생존하고 있다. 남아공에서 민간신앙이 나름대로의 영역을 확보하면서 근대화를 버텨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아프리카 독립교회의 치유 예배
출처: 저자 촬영

줄루인이 종교와 신앙에 의존하는 근본 이유는 ‘치유'(healing)에 있다. 줄루인들이 교회에 나가는 이유와 상고마에 의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같다. 치유 때문이다. 줄루인은 자신과 가족에게 직면한 다양한 병(불행)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원한다. 병의 원인이 무엇이든 이를 바로 잡고자하는 욕망이 강한 것이다. 그 병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또는 사회적인 것이든 다를 바 없다. 줄루인은 불행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일상의 삶을 유지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줄루인이 움타가티에 전전긍긍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움타가티가 모든 불행과 병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남들 보다 잘 살지 못할까?”, “왜 내 자식들은 남의 자식들보다 성공하지 못할까?”, “왜 나는 아내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까?” 등등 불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서 이 불행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은 불행의 원인을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만든다. 과거에 좁은 지역 사회에서 불행은 자연재해와 가족/이웃과의 긴장관계, 질병 등 한정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면 현대사회에서 불행은 사회관계나 육체적 질병을 넘어서 심리적 박탈감을 포함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줄루인들은 종교와 민간신앙에 의존하는 것이다. 줄루인이 교회에 나가는 큰 이유는 이 불행을 치유하고자 하는 목적에 있다. 힐링을 하지 못하는 교회는 존립하기 어렵다. 따라서 교회 목회자나 예언가는 신자를 위한 힐링 세션을 따로 운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상고마가 조상령의 힘을 빌려 치유를 한다면 교회 목회자와 예언가는 성령의 힘을 빌려 치유를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기독교와 민간신앙의 근본적인 존재이유는 동일하다. 치유의 힘을 배가하기 위해 기독교와 민간신앙이 뒤섞이는 경우도 흔하다. 남아공에서 아프리카독립교회라고 알려진 혼성 기독교가 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성장세가 뚜렷한 기독교는 현세적 복음을 강조하는 오순절 교회이다. 아프리카 민간신앙의 근본 속성과 맞아 떨어지는 구원관이다. 현세의 불행을 참고 견디면 다음 생에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내세관은 아프리카 민간신앙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프리카인은 불행의 원인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해결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일반화의 오류를 감안하더라도 아프리카인은 현재의 치유에 큰 관심을 갖으며 종교와 신앙이 이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저자소개

장용규(ykchang@hufs.ac.kr)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학부 교수이다. 남아공 나탈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종교인류학,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와 이주 분야를 연구하고 있으며 주요 출판물로는 『아프리카 종교와 철학』(역서, 1999), 『춤추는 상고마』(2003), 『상징의 숲』(역서, 2020) 등 다수의 서적과 학술논문을 출간했다.

 


[1] 상고마는 이상고마(iSangoma)의 축약어이다. 상고마는 ‘북(ngoma)을 두드리는 사람'(isa-)라는 뜻으로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추면서 점술혼령(ngoma)을 일깨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상고마가 치유를 하기 위해서는 점술혼령을 일깨워야 하는데 상고마는 그 행위를 가리킨다.

 


참고문헌

  • 존 음비티 저. 장용규 옮김. 2008. 『아프리카 종교와 철학』. 서울:지만지.
  • 장용규. 1999. “줄루 종교 현상의 사회학적 고찰: 잉고지니 Ingozini에서의 사례연구를 중심으로”, 한국아프리카학회』11권, 129-154.
  • 장용규. 2003. 『춤추는 상고마』. 서울:한길사.
  • Pew Forum on Religion & Public Life. 2010. Tolerance and Tension: Islam and Christianity in Sub-Saharan Af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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