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도자기를 한반도에 가져온 일본 하카타(博多) 상인

15~16세기 하카타 상인들은 공식 사신으로 위장하여 조선과 유구국의 공식 교류에 개입하였으며, 일본의 지방세력과 협력하여 명나라 도자기를 조선 왕실로 공급하였다. 고고학 자료와 문헌을 통해 더 많은 수량의 명나라 도자기가 사무역으로도 조선에 유입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카타 상인들의 활발한 활동 시기에 조선의 도자기가 유통된 고고학적 증거도 하카타-대마도-창원 내이포의 경로를 따라 발견되었다. 이러한 하카타 상인들의 동북아 자기 유통은 기존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벗어나 새로운 사용가치를 창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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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고운(아시아연구소)

전근대 사회 도자기의 제작과 유통

고려와 조선시대의 도자기 생산은 중앙관리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체계적인 시스템에 따라 관리된 도공들이 좋은 원료와 태토를 캐내어 효과적으로 정제하는 과정을 거쳐 도자기를 생산했다. 또한 1,200도 이상의 높은 온도를 유지해 질적 수준을 높였고, 불량품이나 잡티가 있는 도자기는 판매하지 않고 손해를 감수하며 파기했다. 이렇게 완성도가 높은 도자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그렇기에 원료와 가마, 작업장 등의 관리와 체계적인 지원을 통해 생산된 우수한 품질의 도자기는 곧,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왕실도자기, 즉 관요(官窯) 자기는 일반 군중이나 귀족들의 사용이 제한되었다. 일례로 조선왕실은 명나라의 도자기를 모방하기 위해 중앙관리체계 아래에서 자기를 생산하는 관요를 설립하고, 백자를 조선왕의 전용 도자기로 지정했다. 1466년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자기(磁器)는 이제부터 진상하는 것 외에, 공사처(公私處)에서 널리 행하여 쓰는 것을 일체 금한다…장인이 몰래 숨어서 자기를 만들어…사사로이 서로 매매하는 자는 위제율(違制律)로 논한다.”고 했다. ‘위제율’은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하여 태형으로 다스린다는 것으로 자기 사용 독점에 대한 조선왕실의 의지가 엿보인다.

많은 학자들은 경덕진(景德鎭)에 설치된 명나라 관요가 선덕(宣德) 연간(1426~1435)을 전후로 하는 15세기 전반에 확립되었다고 여기고 있다(방병선, 2013). 이 시기 직후, 15세기 중반에 벌어진 정변(1449년)을 기점으로 기존에 설립된 관요체계가 붕괴되고 관요 도공들이 민간 가마인 민요(民窯)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민요에서도 관요 자기를 모방한 다양한 도자기들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1371년 명나라가 모든 해상 무역을 금지하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을 발효하자, 명나라의 도자기는 공식 사절단을 통해서만 해외로 유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구국(流球國, 현 오키나와)만은 명나라를 방문할 때 중국 복주항(福州港)에 정박해 있는 기간동안 명나라 도자기의 유통을 허가받았다. 그 덕분에 중국 자기를 일본 및 동남아로 중계무역할 수 있었다(彭盈真, 2005). 당시 유구국은 상당한 규모로 자기를 유통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유구국의 공식 문서인 『역대보안(歷代寶案)』에는 유구국이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와 도자무역을 진행한 목록과 수량이 남아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홍희(洪熙) 원년(1425)부터 정통(正統) 7년(1442)까지 총 15회의 교류를 통해 명대도자가 태국으로 전해졌다.1) 또한, 1430년에는 자바국, 1463년에는 만자가국(滿刺加國, 현 말레이시아), 소문답자국(蘇門答刺國, 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등과도 교역이 확대되었다. 유통되는 도자기의 종류는 대청반(大靑盤), 소청반(小靑盤), 소청완(小靑碗)이었는데, 대청반은 10점에서 20점, 소청반은 100점이 가장 많았다. 소청완은 1,000점에서 2,000점 사이의 수량으로 유통되었으며, 천 개 단위로 자기무역이 일정한 체계 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유구국의 명나라 도자기 무역은 일정한 수량과 품종을 기본 단위로 하여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유구국과 일본 간의 무역에서도 수량과 유통 품종은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하카타에서 출토된 중국도자는 유구국의 기록과 일치하는 용천(龍泉)에서 생산된 청자가 주를 이룬다. 또 출토된 도자기의 종류도 큰 접시와 작은 접시, 그리고 완 등으로 기록과 일치한다(사진 1).

오키나와 출토 중국 용천 청자편
출처: 오키나와 역사문화센터 소장(冲绳今归仁村历史文化センター), 저자 촬영

 

하카타 상인이 명나라 자기를 한반도로 유입한 비결

한반도의 남부 해안 『창원 제포 유적』에서는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명대 민요 자기가 출토되어 주목된다(사진 2).2) 명나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청화백자와 청자는 각 5점으로, 출토된 10점의 도자기에서는 명대 민요 자기의 특징이 명확하게 확인된다. 청화백자의 가장자리에는 청화안료를 사용해 선을 두르고 그 아래로 화초문과 같은 식물 문양을 장식했다. 당시에 두꺼웠던 조선의 백자와 다르게 정제된 흙을 원료로 했기 때문에 도자기의 두께가 0.1c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일부만 남은 파편에서도 문양을 밀도있게 장식하여 조선백자와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청색 안료가 뭉쳤거나 일부 가마에서 굽는 과정 중 안료가 휘발된 현상, 정형화된 문양으로 회화적 기교가 떨어지는 특징이 보인다. 이는 숙련된 도공의 부재, 안료의 사용 미숙 등 민간 가마에서 생산한 자기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그 외에도 함께 출토된 청자 그릇편을 뒤집어 살펴보면, 바닥에 갈색 태토가 노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 용천요 풍동암(風洞岩)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울 때 나타나는 특징적인 현상이다. 한편 도자기 그릇 안쪽에 ‘고씨(顧氏)’라는 성씨를 새겨넣은 청자 파편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 풍동암 가마의 주인인 고사성(顧仕成)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 용천요 민간 가마 중에서도 일부 유명 가마에서 생산된 자기가 브랜드화되어 유통되었음을 보여준다(秦大叔, 2009).

『창원 제포 유적』 출토 명대 민요 자기
출처: 김해박물관 소장, 저자 촬영

이러한 명나라 도자기들이 어떻게 우리나라 남부 해안 『창원 제포 유적』에서 출토된 것일까? 특히 이 유적은 조선을 방문한 일본 사신들이 머물며 왕실로부터 접대를 받았던 왜관(倭館) 유적이라는 데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이 시기의 『조선왕조실록』과 유구국의 『역대보안』 기록을 참고하면 명나라 도자기를 왜관으로 유입한 대부분의 세력이 일본 하카타 상인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일본 하카타 상인들은 서계(書契)를 들고 조선에 방문하였는데, 이는 유구국이 조선왕에게 보내던 공식 외교 문서인 자문(咨文)과는 다른 형식이었다. 이에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도 하카타 상인들을 의심하는 조선 왕실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3)

유구국의 사신으로 위장하여 조선을 방문했던 하카타 상인들 중 일부는 일본 큐슈 세력들의 사절 자격으로도 조선을 방문했다. 흥미로운 것은 각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도자의 횟수와 수량을 정리한 결과(표 1), 유구국에서 들어온 회차가 6차로 가장 많았음에도 그 수량은 230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입량이 가장 많은 곳은 실제 하카타 상인의 관할 아래인 큐슈지역이었으며, 유구국에서 들어온 수량 역시 하카타 상인들이 사신으로 위장했던 것임을 상기해본다면, 대마도를 통한 유입을 제외하고 80% 이상의 도자가 하카타 상인에 의해 유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 점 단위, 천 점 단위로 도자기가 대량으로 운반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 명나라 도자기들을 명대 황제가 사용했던 관요 도자기로 추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는 유구국으로부터 명나라 도자기를 유입한 하카타 상인들이 유통한 민간 가마 생산 도자기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하카타 지역에서 출토된 명나라 도자기 역시 민간 생산 도자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렇게 명나라의 민요 도자기를 한반도로 가져온 하카타 상인들은 공무역을 수행하는 사신으로 위장하거나, 큐슈 지역의 사절단으로 공식 파견된 신분이었기 때문에 긴 기간 동안 왜관에 머무를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창원 제포 유적』에서 명나라 도자기가 발견된 사실은 일본 상인들이 조선왕실에 헌상하는 물품 외에도, 추가적인 수량을 가지고 조선 상인과 교류했다는 추정과 연결된다. 1429년에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에는 “…악의적인 상인들이 왜인이 출발하는 날 한강이나 중로의 숙소를 찾아가 몰래 무역을 진행하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인이 도착하는 날, 조선의 상인들이 한강변에서 왜인들을 기다리거나, 왜인이 머무는 한양도성 내의 ‘중로의 숙소’ 즉, 동평관(東平館)까지 찾아가 밀무역 거래를 시도했던 것이다. 1610년의 『광해군일기』에도 “…동평관에 도착하면…어두운 밤마다 경비군에게 뇌물을 주며 죽음을 각오하고 교역을 하며…상인들도 비록 국법이 엄격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처형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금지법을 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적고 있다. 비록 조선왕실에서는 무역을 금지했지만 상인들은 이익을 얻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왜인들과 밀무역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무역 대체재로 선택된 조선의 도자기

15세기 후반부터 중국 용천 가마에서 제작하던 도자기의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유구국을 통해서 동남아 및 일본으로 유통되던 명나라 청자의 수량이 급격하게 감소한다. 일찍이 2000년대부터 일본 하카타 지역의 조선 도자기의 출토량에 관심을 기울인 일본 학자들은 조선 도자기 중 분청사기 품종의 증가 폭이 명나라 청자의 감소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森本朝子・片山まび, 2000). 2010년 하카타 지역의 발굴성과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명나라 청자와 조선 분청사기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자료가 발표되었다. 일본의 츄코쿠(中国) 지역에서는 15세기 8%였던 조선 분청사기의 비율이 12%로 증가하고, 미나미큐슈(南九州) 지역에서도 명나라 청자의 비율이 줄어드는 동시에 조선 분청사기의 비율이 증가했다. 이렇게 큐슈지역 전반에 걸쳐 조선 도자기의 유입이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16세기 초반까지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 하카타 상인들이 왕래하는 동시기에 조선의 도자기 역시 하카타 지역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카타야마 마비(片山まび) 교수는 이상 소개한 일본 출토 조선 도자기 중 ‘김해(金海)’ 명문이 새겨진 분청사기에 주목했다. 이들 분청사기는 김해지역에 공납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 1423년의 기록에서도 보인다. “객인이 숙박하고 있는 내이포(乃而浦)와 부산포(富山浦) 두 곳에다가…관사(館舍)와 창고를 더 짓게 하고 사용할 기명(器皿)을 공식으로 갖추어서…” 두게 했다는 것이다. 1423년 내이포와 부산에 김해부와 동래부가 설치되면서 왜인을 접대하는 왜관의 식기로 조선의 분청사기가 사용된 것이다. 특히 이와 유사한 자기가 창원 내이포-대마도-하카타에서 모두 출토되어 이 항로를 통해 조선의 분청사기가 이동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片山まび, 2015).

대마도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는 도자기 내면에 하얀색 백토 및 국화문양을 도장으로 찍은 듯한 인화 문양이 특징적이다. 이태훈은 대마도에서 출토된 조선 분청사기 자료를 해석하며, 대마도의 조전씨(早田氏)가 큐슈지역 간의 무역결탁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보았다. 대마도가 조선의 내이포와 일본 큐슈를 잇는 중계무역지로 큐슈의 상인과 결탁해 도자 무역을 진행했다는 것이다(이태훈, 2014). 표1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마도 역시 조선과의 도자 무역에서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하카타 상인이 내이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대마도에 정박한 사례가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대마도 상인과 하카타 상인 간의 결탁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보인다.

 

문화적 가치의 변화과정에서 유통자의 역할

위에서 우리는 일본 하카타 상인이 공식 사절단으로 위장하거나, 지방세력들과 결탁하면서 명나라 도자기 무역에 깊이 관여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명나라 도자기는 조선의 왕실 및 조선의 왜관 주변지역에 공무역 및 사무역을 통해 유입되었다. 한편, 하카타 상인이 대마도 상인과 결탁해 큐슈 지역으로 조선의 분청사기를 유입했을 정황에 주목하는 연구도 주 목했다. 이를 통해, 그간 개별적으로 연구되었던 중국 관요 및 민요 자기의 유통, 중국도자와 조선도자의 유통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또한 제 3국의 유통자인 하카타 상인에 의해 중국도자와 조선도자가 각기 다른 문화권으로 이동하며 새로운 사회문화적 가치를 부여받게 되었다.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로 대표되는 ‘물질의 사회적 생애(The Social life of things)’에 관한 연구 시각은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 사용되던 물질이 기존에 부여받은 사회문화적 맥락을 벗어나 새로운 유통자 및 사용자와 만나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과정에 주목한다(Arjun Appadurai, 1986). 물질이 끊임없이 새로운 행위자들과 만나면서 각기 다른 가치를 생성해 내며 문화적 질서와 인류의 사회생활에 개입하는 매개체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중국 민요 청자의 사회문화적 지위는 명나라 내에서 명대 관요자기와 병립하여 사용될 수 없는 하위 계급에서 존재했다. 그러나 하카타 상인들을 통해 공식적인 경로로 조선왕실에 유입된 명대 민요 자기는 조선왕실에서 제작한 관요 청자의 모방 대상품이 되었다(사진 3). 조선왕실 관요 청자 중에서도 직경이 20cm가 넘는 대형접시는 용천 민요청자의 기형과 문양은 물론 크기까지 모방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더욱 특징적이다(오영인, 2018). 조선 분청사기 역시 하카타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져 큐슈 지역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 기록에서 16세기에 다완(茶碗)으로 쓰여 온 중국 청자의 대체재로서 조선의 자기가 언급된다는 점이다. 1588년의 『야마노우에소우지키(山上宗二記)』 기록에 “대체로 다완에 있어서 중국 다완은 유행이 지났다. 지금은 고려다완, 이마야키다완, 세토다완이 사용될만한 것이다. 모습만 적당하면 다도구이다.(惣別、茶碗の事、唐茶碗は捨たりたるなり。当世は高麗茶碗、今焼茶碗、瀬戸茶碗までなり。此さえ能く候えば数寄道具に候なり)”고 적고 있다. 이렇게 분청사기는 중국 다완의 유행을 넘어서 일본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6세기 조선의 왜관에서 식기로 사용되던 조선 분청사기가 하카타 상인 및 대마도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조선에서의 ‘질이 떨어지는 식기’라는 가치판단에서 벗어나 새롭게 이국에서 들어온 ‘질박하고 소박한 다완’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중국자기의 대체재에서 독특한 심미감을 획득한 조선 분청사기는 임진왜란을 거친 후 17세기에 이르러 왜관의 정식 주문자기인 고려다완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군기시터 출토 조선 청자편
출처: 한강문화재연구원. 서울 군기시터 유적, 서울: 한강문화재연구원, 2011, p.157.

본고는 한국, 중국, 일본의 다양한 무역 환경의 변화 사이에서 주도적으로 활로를 탐색한 하카타 상인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연구를 통해 이전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유통자와 도자 교류에서의 중요한 주체인 상인의 역할을 조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외래 물품의 유입’과 ‘제작으로의 영향’에 따른 본토화 현상에 집중된 연구시각에서는 간과됐던 행위자(Actor)로서 상인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물질문명의 사회생명사적 관점에서 중국의 민요 자기는 하카타 상인을 만나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유입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기의 가치가 상승되었다. 또한, 조선 도자기는 하카타 상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본 큐슈로 유입되며, 일본 차 문화의 새로운 소비층과 만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하카타 상인이 조선 및 일본의 도자 수요에 대해 이해하며 의도적으로 도자를 유통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깊은 고찰이 요구된다. 하지만 하카타 상인들은 물품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문화적인 가치와 아이디어를 전달하였으며, 이를 통해 상호 간의 이해와 교류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전근대 상인들의 역할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이들을 단순한 물질 전달자로서의 역할에 머물러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문화 매개자로서 기능한 측면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저자 소개

성고운(gowoon_seong@snu.ac.kr)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푸단대학교(复旦大学, Fudan University) 고고학 박사후 연구원으로 2023년 <15~17세기 조선에 유입된 중국 도자 연구>로 동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간 중국 도자의 양식 및 제작 기술 전파에 주목했던 기존의 연구시각과 달리, 중국 도자에 대한 조선의 사용가치와 시대별 변화 양상 등을 연구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조선후기 청화백자 병화(瓶花) 도상으로 본 명대의 영향」 등이 있다.

 


1) 歷代寶案》 第一集 · 第四〇卷,臺北 : 國立臺灣大學, 1972,1273-1302、1273-1302、1303-1330頁。

2) 유물의 실견을 허락해주시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김해박물관 이춘선 학예연구사 및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 인사 전합니다.

3) 《성종실록》 卷九十七、成宗九年(1478)十月十五日; 《성종실록》 卷二百七十九、成宗二十四年(1493)六月十二日.

 


참고문헌

  • 방병선. 2013. 『중국도자사연구』. 서울: 경인문화사.
  • 片山まび. 2015. “일본출토 경상남도 도자기.” 정관박물관 편. 『기장도자: 지방민의 삶을 닮은 그릇』. 124-135. 부산: 정관박물관.
  • 이태훈. 2014. “熊川陶窯址와 水崎(假宿)遺蹟에서 본 朝日交流.” 한일관계사연구 권 48, 3-44.
  • 오영인. 2018. “조선전기(15-16세기)의 중국 용천요 청자에 대한 애호와 모방.” 미술사와 시각문화 권 21, 6-39.
  • 한강문화재연구원. 2011. 『서울 군기시터 유적』, 서울: 한강문화재연구원.
  • 두류문화연구원. 2020. 『창원 제포 유적』, 김해: 두류문화연구원.
  • 森本朝子・片山まび. 2000. “博多出土の高丽・朝鲜陶磁の分类试案-生産地编年を视座として-.” 博多研究会志 제 8호, 41-75.
  • 彭盈真. 2005. “琉球出土中国陶瓷:十五世纪陶瓷消費地之个案研究” 대만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秦大叔·施文博. 2009 “龙泉窑记载与明初生产状况的若干问题.” 浙江省文物考古研究所·北京大学考古文博学院·龙泉青瓷博物馆编. 『龙泉大窑枫洞岩窑址出土瓷器』. 28-36. 北京: 文物出版社.
  • Arjun Appadurai. 1986. The Social life of things : commodities in cultural perspective.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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