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 역병 기록을 되돌아보다 – 질병의 역사학과 현재와의 대화

코로나19의 위기 앞에서 역사학계 또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며 시대적 소명에 응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개인 일기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역병 경험과 인식이 생생하게 제시되어 있어, 역병의 정치·경제·사회적 영향에 대한 미시적 연구가 가능하며, 이는 개인 차원에서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삼국시대로 가면 역병에 관한 기록이 매우 단편적이어서 외부로부터 유입된 전염병이 개개인에 미친 영향은 다룰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역병 기사들은 가장 공적인 매체에 수록된 역병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역병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기록했는지는 역병에 관한 국가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신당서(新唐書)』, 『속일본기(続日本紀)』 등 한중일의 고대 정사(正史)에 수록된 역병 기사들을 통해서는 고대 역병에 대한 ‘사실’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고대 국가에서 진행된 역병에 대한 ‘프레임 씌우기’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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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일홍, 고은별, 김민주, 최영은, 한지선(서울대학교)

고대 기록을 통해 본 역병

‘Epidemic’과 ‘pandemic’은 각각 ‘유행병’과 ‘범유행병’으로 번역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공포를 잘 표현해주는 ‘역병’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흔히 부역을 하는 집단에서 나타나는 질병이라는 의미로 고대 중국에서 유래된 ‘역병’ 개념은 ‘疫’, ‘大疫’, ‘疫疾’, ‘疫癘’, ‘熱病’, ‘染病’ 등과 같은 용어로 표현되었다(이현숙, 2013: 265-6). 『삼국사기』에는 ‘疫’ 혹은 ‘大疫’이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는 역병 관련 기사가 고구려의 경우에는 4차례, 백제의 경우에는 6차례, 신라의 경우에는 8차례, 그리고 통일기 신라의 경우에는 13차례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역병기사를 통해 본 삼국시대 역병 발생과 왜의 신라 침입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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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역병 관련 기사는 백제 온조왕 4년의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기근이 들고 역병이 돌았다(春夏旱, 饑疫)”이다. 백제의 국가형성 과정에서는 부여-고구려계통 유이민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역병은 면역력이 없는 집단이 새로운 병원균을 만나면서 발생하는데, 코로나19의 경우와 같이 새로운 병원균이 유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한 집단이 풍토병을 만나면서 역병이 도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18세기 아프리카로 진출한 유럽인 식민지 집단 내에서의 전염병에 의한 사망률은 1000명당 250명이었고, 서인도제도에서는 황열(yellow fever)이 유행할 경우 유럽인들의 사망률이 10%가 넘었다고 한다(Curtin, 1990: 28). 역병에 관한 백제 최초의 기록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여지가 있다. 수나라 군대가 요수에 이르러 역병이 돌고 이후 90%가 사망했다는 고구려 영양왕 9년 6월의 기사(軍中乏食, 復遇疾疫)와 9월의 상황을 묘사한 12월의 기사(秋九月, 師還, 死者十八九) 역시 병원균이 아닌 사람이 이동해서 역병이 돈 경우로 생각된다. 20세기 초까지 중국 동북지방의 유목민 집단들 사이에서 풍토병으로 자리 잡았던 흑사병이 유행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어서(이현숙, 2013: 283), 이 경우에도 병원균이 있던 곳으로 사람이 옮겨가면서 발생한 역병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역병 기록 중 고대 동아시아 교류 네트워크와 관련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 고구려 소수림왕 7년(377)의 “눈이 오지 않고 천둥이 쳤다. 민간에 전염병이 돌았다(無雪, 雷. 民疫)” 기사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369년에 중국 晉나라에서 치사율이 40~50%에 이르는 역병이 돌았고, 378년에도 역병이 크게 돌았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렇게 역병이 유행했던 그 10여 년 동안 고구려에서는 372년에 불교가 공인된 이후로 전진(前秦), 동진(東晉)에서 온 승려 및 건축기술자들이 고구려의 수도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소수림왕 7년에 돌았던 역병은 중국과의 심화된 인적 교류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이현숙, 2013: 279-80). 물론 외부 집단에 의해 병원균이 유입되었다고 무조건 역병이 창궐하는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의 역병 기록을 보면 ‘大疫’과 ‘太疫’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기상 이변(고구려 중천왕 9년(256)의 “12월에 눈이 오지 않고 큰 전염병이 돌았다(十二月, 無雪, 大疫)”), 자연 재해(무령왕 6년(506)의 “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3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시냇물과 연못물이 말랐다(春太疫. 三月至五月不雨, 川澤竭)”), 그리고 기근(무령왕 2년(502)의 “봄에 백성들이 굶주렸고 또 전염병이 돌았다(民饑且疫)”)에 관한 내용이다.

외부 집단의 집중적이고 주기적으로 유입에도 불구하고 역병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음을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왜인 침입에 관한 기사와 역병 관련 기사들이 잘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후 4세기까지 일본인들은 바다를 건너 신라 사회에 주기적으로 혼란을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신라에 침입했던 주기와 신라에서 역병이 발생했던 주기를 비교하면 둘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벌휴 이사금 10년(193)의 “6월에 왜인이 크게 굶주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기사, 조분 이사금 3년(232)의 “4월에 왜인이 갑자기 와서 금성을 에워쌌다. 왕이 몸소 나가 싸우니 적이 흩어져 도망하였으므로, 가볍게 무장한 기병을 보내 그들을 추격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기사, 내물 이사금 9년(364)의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기사를 보면 신라 땅을 밟은 일본인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사건 이후 수 년 동안 역병은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신라본기의 3-4세기대의 기록을 보면 일본인의 침입 기사가 9차례나 등장하지만, 역병 기사는 2개(203년, 389년)에 불과하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최소한 신라로 침입했던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 내에서는 신라인들이 접한 바 없는 병원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가 섬이라는 일본의 지리적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한반도 출신의 도래인이 앞서 일본으로 이주한 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앞으로 고민해 볼 만한 문제이다.

우리는 흔히 삼국의 통일 과정에서 한반도로 유입되었던 당나라 군대에 의해 전염병이 확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통일기 신라에서는 7-8세기 동안에는 역병이 주기적으로 창궐했으며, 857년에 문성왕이 7일 만에 죽는 등 역병의 사회적 여파도 대단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통일전쟁기에 발생한 역병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전무하다. 통일전쟁기에 전염병이 돌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671) 가을 7월 26일 ‘문무대왕이 설인귀에게 답서를 보내다’ 기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라고 한다(이현숙, 2003a: 121): “싸움에 패한 뒤부터 웅진에서 군사를 요청함이 밤낮동안 계속되었는데, 신라에는 많은 전염병이 돌아 군사와 말을 징발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요청하는 것을 어기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주류성을 포위하러 갔습니다.” 10여년도 지난 시점에,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역병이 돌았던 과거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라군을 파병했던 사실을 환기시키는 것이 이 구절의 핵심 내용이다.

당시 신라에서 돌았던 이 역병은 귀환하는 신라군에 의해 확산되었을 것이며, 아마도 신라군은 백제 영토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통해 감염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에는 636년에서 655년 사이에 역병 관련 기사가 총 7차례 등장하며, 특히 641년에는 1개의 주에 국한되었던 역병이 642년에는 5개의 주, 643년에는 3개의 주, 644년에는 5개의 주에서 창궐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가 다루고 있는 300년의 기간 동안 역병 관련 기사가 18차례만 등장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길거리에 죽은 사람이 서로 베개를 하고 있을 정도로 즐비하였다”라고 말 할 정도의 대역병만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이현숙, 2003b: 220), 한반도로 유입된 당나라 군인들이 역병이 만연한 사회에서 왔던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과 나란히 싸워 사비성을 함락시킨 신라군이 당나라군으로부터 새로운 병원균에 감염되었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신라군과 신라 사회에 확산된 이 역병의 실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수인성질병이나 학질(말라리아)등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652년에 서역에서 들어온 두창이 이후 중국 전역에서 유행했다는 당나라 의학서 『외대비요(外臺秘要)』의 내용에 근거하여 두창으로 보기도 한다(이현숙, 2003a: 126-9).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시킨 것은 660년 7월이고, 무열왕이 백제에서 귀환한 것은 11월 22일 이전이며, 당나라군이 백제 부흥군에 패한 상황에서 신라군의 재파병을 요청한 것은 661년 2월인 타임라인을 보면, 원정에서 귀환한 신라군을 통해 신라 사회로 역병을 전파되었던 시점은 660년 동절기일 것으로 보인다(이현숙, 2003a: 121-3). 그러나 무열왕 7년 11월 22일의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서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여” 기사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것이 무열왕 8년 2월의 “백제의 남은 적병들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다” 기사이며, 역병이 돌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660년 동절기에 대한 기사는 없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을 660년의 역병에 대한 기록이 왜 누락되었을까? 전근대사회에서는 백성들의 원망하는 마음으로도 역병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희생을 치르며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자 했던 신라의 정치권력이 역병의 유행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이현숙, 2013: 274).

 

공식 기록물에 반영된 역병과 국가권력의 관계

역병은 외부로부터 새로운 병원균이 유입되면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타지역과의 인적 및 물적 교류가 수월하고 심화될수록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일찍이 제국을 형성하여 세계로 뻗어나갔던 중국의 경우에는 새로운 병원균이 다양한 통로를 통해 유입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환제 연희 9년(166년)에 대진국의 왕 안돈(로마 제국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이 사신을 보내와 상아, 코뿔소의 뿔, 바다 거북이의 껍질 등을 바쳤다”라는 『후한서(後漢書)』 권88 서역전 제78의 기사를 근거로 로마제국의 전성기인 기원후 2세기에 일어난 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이 실크로드 혹은 사신단을 통해 중국으로 확산되었다는 주장도 있다(Duncan Jones, 1996). 안토니우스 역병은 두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무렵 중국에서 대진국에서 유래된 역병이 창궐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晉나라의 갈홍(葛洪)이 340년에 쓴 의약처방서인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에서는 두창을 두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휘4년에 이 병은 서쪽에서 처음 등장하여 동쪽으로 이동하여 전역에 확산되었다…. 건무연간에 남양에서 잡아 온 포로를 통해 유입되었기 때문에 노창(虜瘡)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하고 있다(幸超群, 1997: 175). 이처럼 두창이 외부에서 유입된 역병이라는 사실에 대해 중국인들은 널리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공적 기록에 해당되는 『신당서』의 기사들에서는 역병이 외부에서 유입되었다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발병 계절, 지역, 사망률만 언급될 뿐이다.

공적 기록물에서 역병의 유입 경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의 역병 관련 기사들 역시 발병 계절, 지역, 기근 관련 여부 등은 언급하고 있으나 역병의 유입 정황이나 경로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후 민간에서 두창을 ‘중국에서 온 손님’으로 인식했던 것을 보면(황병익, 2011: 138-9), 역병의 진원지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660년의 역병에 관한 기록이 신라본기에서 누락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병 관련 기사에는 (혹은 그러한 기사의 부재에는) 국가권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중국이던 한국이던, 역병의 유입 경로를 규정할 수가 없어서 언급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에 의한 역병 기록의 의도적 편집의 가능성도 간과할 수는 없다.

일본의 경우에도 『속일본기』의 역병 관련 기록은 대체로 매우 간략하며, 역시 발병 계절, 지역, 기근 관련 여부 정도만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예외적인 것이 덴표 7년(735)과 9년(737)에 발생한 (아마도 두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덴표 역병대유행(天平の疫病大流行)’을 다룬 기사들로, 일본 인구의 1/3이 사망했다는 의견이 있을 만큼 당시의 엄중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역병의 유입 경로에 대해서는 명시하고 있지 않다. 물론 큐슈지역에서 시작되어 나라지역과 동일본 전역으로 확산된 이 역병의 최초 발병 지점으로 당시 해상교역의 관문이었던 다자이후(大宰管)가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역병의 ‘외부 유입’이 시사되고 있기는 하다.

7-9세기 동아시아 역병 발생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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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후대의 일본인들은 덴표 7년 역병의 유입 경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신라를 역병의 진원지로 지목하였다. 즉, 덴표 대유행 70여 년 후에 엮은 의학서에는 병든 야만인과 운 나쁘게 접촉한 어부에 의해 역병이 일본으로 유입되었다고 나와 있고, 헤이안시대의 후기의 역사서에도 병든 야만인 배에 의해 역병이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일본의 중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덴표 대유행이 나라 밖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통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 13세기의 문헌에는 역병의 원인이 된 야만인을 ‘신라’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규슈지역의 어부가 신라에 난파되었다가 그곳에서 역병을 옮아왔다는 것이다. 다른 후대의 중세 역사서에서도 덴표 대유행의 원인이 신라에 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Farris, 1985: 53-4).

동아시아 고대국가의 입장에서 공적인 기록물에 역병의 유입 경로가 굳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에는 권력 기반의 공고화와 밀접하게 연계된 대외 교류 네트워크가 흔히 역병 유입의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과 사신단의 파견, 불교의 수용은 모두 동아시가 고대국가의 성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국가 주도’의 사업들이었다. 따라서 코로나19의 확산 앞에서 오늘날의 국가들이 입국제한조치를 함부로 내리지 못하고, 교류의 필요성과 격리의 필요성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듯이, 고대 국가권력의 입장에서도 역병을 국가 간 상호작용의 필연적 대가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역병의 유입은 쌍방향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어서 역병의 책임소지를 굳이, 그것도 공적인 기록물에, 운운하는 것은 의미 없는 행위이기도 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일본의 가장 오래 된 시가집인 『만엽집(萬葉集)』에 실린 천황의 명을 받고 한국(‘可良國’)으로 간 사신 유키 야카마로(雪連宅滿)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수도에서 출발한 유키 야카마로는 이키(壱岐)섬에 도착한 후 갑자기 역병에 걸려 죽었다고 하는데, 만약 예정대로 한국에 도착한 이후에 증상이 발현되었다면 『삼국사기』에 또 하나의 역병 기사가 추가되었을지도 모른다.

유키 야카마로(雪連宅滿)의 죽음을 다룬 『만엽집(萬葉集)』 시가(15권 3688시)의 원문과 국문번역(번역자: 이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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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이 주도하는 사업과 역병과의 복잡한 관계는 일본의 불교 전파 및 공인에 관한 다양한 에피소드에도 잘 나타나 있다(이현숙, 2013: 281-2).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로부터 불교가 처음 전파되었을 무렵에 역병이 일어났는데, 신흥종교의 도입에 반대하던 세력은 이를 핑계 삼아 불교를 배척했다고 한다. 즉, 긴메이(欽明) 천황 13년(552)에 백제로부터 받은 불상을 두고 반대 세력은 “우리나라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항상 천지사직(天地社稷)의 180신을 춘하추동으로 제사지내고 섬겨 왔습니다. 이제 번신(蕃神)으로 바꾸어 받든다면 국신(國神)의 노여움을 살까 두렵습니다.”라고 주장했으나, 왕이 불상에 대한 예배를 강행하고 이후 역병이 돌자 “지난 날 신들의 계책을 따르지 않아서 이렇게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로 원래대로 되돌린다면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속히 (불상을) 던져 버리고 열심히 후일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고 한다. 이후 불상은 버려졌고, 사찰 건축물은 불태워졌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신이 노여움을 역병을 통해 나타낸다는 위와 같은 논리는 불교의 공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본서기』에는 비다츠(敏達) 천황 14년(585) 3월 기사가 총 3개가 있는데, 그 내용의 전개가 매우 흥미롭다. 3월 1일자의 첫 번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돌아가신 천황에서 폐하에게 이르기까지 역질이 유행하여 나라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는 오로지 소아신(蘇我臣)이 불법(佛法)을 흥행하게 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에 “참으로 그러하다. 마땅히 불법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즉, 불법 때문에 과거에 역병이 돌았던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3월 30일자 기사에는 “…탑을 자르고 무너뜨린 다음 불을 질러 태웠으며, 아울러 불상과 불전을 태웠다…여승들의 승복을 빼앗고 가두었다가 해석류시(海石榴市)의 정(亭)에서 매로 때렸다.”와 같은 불교 박해의 현장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3월 30일자의 또 다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한편 종기가 나서 죽은 사람들이 나라에 가득하였다. 그 병을 앓는 사람들이 “몸이 불타고 두들겨 맞고 부서지는 것 같다.”고 하며 울면서 죽어갔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몰래 서로 “이는 불상을 태운 죄일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즉, 이번에는 역병의 원인을 불교 박해에 따른 업보라는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30여 년 전 긴메이 천황 때 사용되었던 것과 정반대의 논리가 이번에는 통하여 이후 불교의 일본 내 정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역병은 이렇듯 기존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켜 새로운 사상, 지식, 기술의 정착을 가져왔으며, 그러한 변화들도 공적 매체에 기록되었다. 예를 들어, 백제에는 ‘주금사(呪禁師)’라는 관직이 있었는데, 해당 관리는 주문을 외워서 병을 치료하는 임무를 맡은 이로, 치병활동을 하는 승려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약사신앙이 부재했던 백제에서는 주금사가 역병 치료의 역할을 담당했는데, 바로 이러한 역할 때문인지 주금사는 일본으로도 건너갔고, 『일본서기』에는 그 사실이 기록되어(“…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比丘尼), 주금사(呪禁師), 조불공(造佛工), 조사공(造寺工) 6인을 보냈다.”) 현재 남아있는 백제 주금사에 관한 주요 자료가 되었다(길기태, 2006).

 

과거라는 거울이 보여주는 역병이 가져온 변화들

역병이 유행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이미 진행되던 사회적 흐름들은 증폭되기도 했고, 기존의 현상들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기근과 역병이 되풀이되던 신라 하대(下代)의 사회경제적 혼란 속에서 이미 통일국가의 중요한 사상적 요소로 정착되었던 약사신앙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다수의 약사불이 조성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993년과 995년에 외부에서 유입된 역병이 돌았는데, 교토 귀족층의 20-25%가 사망하자 신라(한국)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빠졌다. 그 결과, 텐타이(天台) 불교의 수호신이자 교토 근교의 온조사(園城寺)에 안치되었던 신라명신(新羅明神)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겨났다가, 나중에는 역병을 물리치는 강력한 신으로 재해석되기도 했다(Kim, 2014: 185-6).

(좌)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제981호)
출처: Eggmoon 자작,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6240021)
(우) 일본 온조사의 헤이안시대 신라명신 목조상(일본 국보) 출처: Unknown author / Public
domain(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tatue_of_shinra_myojin,_Mii-dera.jpg)

현재의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작년부터 진행된 일본과의 관계의 냉각화는 더욱 더 심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또한 일부 유럽 국가들이 보여준 편견, 무지, 시스템의 취약함 등은 많은 이들을 실망시켜, 다시 여행을 갈 수 있는 상황이 되더라도 관광지의 화려함에 가려진 실상을 알게 된 이상 과연 예전만큼 좋을지가 의문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나 국가 간 관계의 변화는 전염병이 가져온 ‘현실’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지만, 코로나19 현실에 대한 ‘프레임 만들기’의 영향도 분명히 작용했다. 즉, 코로나19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기록하는지는 이 지독한 바이러스만큼이나 오늘날의 사회와 우리들의 인식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질병의 역사학적 연구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한다(Wilson, 2000: 206). 하나는 자연적 실체가 있는 과거의 질병 그 자체를 연구하는 ‘자연적-사실적’ 접근이다. 미래에는 코로나19에 관한 질병관리본부의 브리핑 내용이나 의학 및 약학 분야에서 나날이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와 연구결과가 이러한 ‘자연적-사실적’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또 다른 방식은 특정 ‘질병 개념’의 형성 및 변화과정이나 그로 인한 사회적 여파를 연구하는 ‘역사적-개념적’ 접근이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코로나19 관련 정보를 검토 및 분류하고, (앞서 살펴본 동아시아 고대 정사(正史)의 역병 기사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정보는 부각되고 어떠한 정보는 굳이 언급되지 않았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은 코로나19에 대한 앞으로의 ‘역사적-개념적’ 연구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소개

고일홍(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고은별(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고고학전공 박사과정), 김민주(서울대 국사학과 석사과정), 최영은(서울대 국사학과 석사과정), 한지선(서울대 국사학과 석사과정)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아시아의 교류협력 프로그램”(mahari95@snu.ac.kr)에 참여하고 있다. 2020년에 새롭게 설립된 “아시아의 교류협력 프로그램(Exchange and Cooperation in the Asian World Program)”에서는 과거 “아시아 세계”에 존재했던 다양한 교류 네트워크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들의 통시적 전개과정을 연구한다. 학제간 및 융복합적 접근을 통해 “아시아 세계”를 탐구하는 새로운 연구의 틀을 확립하는 것이 본 프로그램의 목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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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현숙. 2003a. 「7세기 신라의 통일전쟁과 전염병」. 『역사와 현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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